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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광주와 나주는 도시 규모면에서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이미 광역시와 중소도시로 현저하게 다르다. 하지만 지난 역사 속에서 두 도시는 전남의 수위 자리를 놓고 엎치락뒤치락 반복했다.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하나씩 살펴보기로 하자. 광주와 나주의 연혁 광주는 본래 백제의 무진주(武珍州)인데, 일명 노지(奴只)라고도 하였다. 신라가 백제를 빼앗은 뒤인 신문왕 6년(686)에는 그대로 무진주라 불렀다. 그 후, 경덕왕 16년(754)에 행정조직을 정비하면서 전국을 9주로 나누고 그 아래에 군현을 두었다. 이때 무진주를 무주(武州)로 고쳐 9주 중 하나로 삼았고, 근처의 현웅현[남평], 용산현[나주 일부], 기양현[창평]등 3개 현을 거느리게 하였다. 무주를 광주라고 부른 것은 견훤 때부터였으며 태조 23년(940)에 광주로 공식화하였다.
나주는 백제의 발라군(發羅郡)이었는데, 신라 경덕왕 때 금산군(錦山郡, 錦城이라고도 함)으로 고쳤다. 나주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태봉 궁예 3년(903) 3월 이후였다. 왕건이 “수군을 거느리고 서해로부터 광주 접경에 이르러 금성군을 쳐서 이를 뺏고 10여 군데의 군현을 쳐서 뺏으니 인하여 금성을 고쳐서 나주라 하고 군사를 나누어서 이를 지키게 하고 돌아왔다.”1)라 함에서 이때부터 나주라 불렀음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 때에 전남지역은 무주[광주]를 비롯하여 발라[나주], 월나[月奈, 영암]가 중요 거점이었는데, 9주 중의 하나인 무주가 수위(首位)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후삼국을 거치고 고려가 들어서면서 광주와 나주는 자리바꿈을 한다. 견훤과 왕건의 대립 – 견훤대(甄萱坮)와 왕조대(王祖坮) 진성왕 6년(892)에 견훤이 무주를 습격하여 점거하고 후백제(後百濟)라 칭하다가, 이윽고 전주로 도읍을 옮겼다. 그때 북방의 궁예도 강원도의 대부분을 정벌하고 도읍을 송악[개성]으로 옮긴 뒤 경기도를 정복, 효공왕 5년(901)에 후고구려왕을 자칭하였다. 궁예는 칭왕 이후 3년(904)에 국호를 마진(摩震)이라 하다 다시 911년에 태봉으로 고쳤다. 궁예가 왕건을 정기태감(精騎太監)으로 삼으니, 왕건은 해군을 거느리고 해상을 통해 견훤을 공격하여 금성군[나주] 등 10여 군을 공략한 후 나주에 진을 쳤다.
이처럼 견훤과 왕건이 패권을 다투고 있을 때, 견훤은 지금의 광주를 주근거지로 하고 있었으며, 왕건은 나주를 기반으로 하였다. 광주를 비롯한 영산강 상류지역 일대가 견훤을 지지했던 데 반하여 나주는 왕건을 지지하였다. 그래서 상류지역에 해당되는 담양군 대치면, 장성군 진원면, 광주광역시 생룡동 일대에는 견훤 탄생과 관련된 설화들이 많이 전승되어 오고, 광산구 용봉동의 왕조대 설화나 나주 완사천에 얽힌 설화 등 중류와 하류에는 왕건과 관련된 설화들이 많이 전한다. 『광주목지(光州牧誌)』(1799)에 따르면 왕조대는 광주 서쪽 30리에 있으며 고려 태조가 진을 쳤던 곳으로 되어 있고, 견훤대는 북쪽 15리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는 왕자대(王子臺)를 구분하여 광주 서 40리로 비정하고 삼국시기에 왕자가 진을 치고 머물렀던 곳이라고 하여 왕조대와 구분하였다. 김정호의 『대동지지(大東地志)』의 기록도 같다.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 보면, 견훤대는 광주 고읍(古邑) 바로 북쪽에 있고, 왕조대는 황룡강과 극락강[漆川]이 합치고 다시 지석천과 합류하는 지점의 위쪽 큰 강 가에 있다. 견훤대나 왕조대 모두 지금은 광주광역시에 속하나 각각 견훤과 왕건의 근거지가 되어 서로 대립하였고, 이는 광주와 나주의 간격을 상징하는 공간이 되었다. 견훤과 왕건의 대립 결과는 잘 알다시피 왕건의 승리로 끝났다. 왕건은 918년에 고려를 세웠고, 태조 19년(936)에 후백제를 멸망시켜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이듬해 무주를 광주로 개편하고 도독부를 두었다. 이렇게 되자 왕건을 도왔던 나주가 광주에 비해 행정체계상 우위에 서게 됨은 당연하였다. 성종 20년(983) 12목에 목사를 파견하였는데, 전라도에는 전주, 나주, 승주 세 곳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현종 9년(1018)에 강남도와 해양도를 합쳐 ‘전라도’라 하여 전라도가 탄생하였는데, ‘전라도’라는 이름에서 보듯이 그 중심은 전주와 나주였다. 이렇듯 고려 때 내내 나주는 중앙과 연계가 깊었다. 민요에서도 중앙과 연결된 이런 지역적 특성이 드러난다. 나주의 가창민요들은 대부분 경기민요의 영향을 받았다. 창부타령을 비롯해서 나주의 중인 사회 여성들에 전승되는 민요는 대분 경기민요들이다. 이러한 현상은 나주와 중앙권이 매우 가까웠던 역사적 사실과 함께 지역의 문화도 중앙 지향적이었음을 보여준다. 한편 삼별초가 개경 정부와 몽골에 대항하여 항쟁할 때, 원종 12년(1271) 5월 김방경(金方慶)과 몽골장수인 흔도(忻都), 홍다구(洪茶丘)가 지휘하는 여몽 연합군이 제주도 삼별초를 진압하기 위해 출발한 곳이 나주의 반남현이었다. 이것은 나주가 삼별초와는 거리가 먼 곳이었고 중앙정권과는 가까운 곳이었음을 알려준다. 반면에 광주는 중앙과의 갈등이 잦았다. 고종 24년(1237) 백제 부흥을 표방하고 고려의 무인정권에 도전해 일어난 이연년(李延年)의 난은 원율현(지금의 담양군 금성면과 용면 일대)에서 일어났다. 역시 광주 일대가 고려 정권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뜻이다. 무등산신(無等山神)과 금성산신(錦城山神) 광주와 나주는 각각 진산으로 무등산과 금성산이 있다. 둘 다 화산성 산으로 7〜8천만년 전 백악기의 화산활동에 의해 만들어진 산들이다. 기둥모양의 주상절리가 으뜸인 입석대와 서석대가 있는 무등산은 남도의 대표적인 화산성 산이다. 무등산은 섬진강과 영산강을 나누는 큰 분수계를 이룬다. 나주의 금성산은 노령에서 문수산까지 온 산줄기가 고정산으로 이어지다 광주 용진산을 지나는 산줄기의 끝자락이고 영산강의 물줄기와 나주벌을 바라보면서 나주목을 지킨 주산이었다.2)
예로부터 우리나라의 산은 신앙의 대상이자 삶터였는데, 광주와 나주의 갈등은 진산인 무등산과 금성산의 산신(山神) 우대를 둘러싸고도 나타났다. 무등산은 통일신라 때부터 그리고 금성산은 고려 때 이래로, 각각 소사(小祀) 혹은 국제(國祭) 및 본읍 치제(致祭)의 대상이 되어 지역에 파견된 중앙관리나 수령의 주관 아래 정기적으로 제의가 거행되었다. 산신 혹은 그에 대한 신앙은 산악이 소재하는 지역의 위상 및 나아가 그것을 주도하는 지역 주민 및 토착세력의 존재를 부각시키는 일이었기 때문에 이들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 광주와 나주의 읍격 경쟁은 무등산신과 금성산신의 우대 경쟁으로도 나타났다. 앞서 보았던 것처럼 백제 이래 무진주 혹은 무주라 불리면서 전남지역을 관할하던 중심지는 광주였다. 광주는 후삼국 때 견훤이 후백제를 개창하는 출발지가 되었고, 나주의 왕건에 저항하여 반고려세력의 근거지가 되었다. 이 때문에 고려시기에 들어서면서 광주는 읍격이 강등되어 나주에 영속된 속군현 내지는 현령관으로까지 격하되었다.
그러던 것이 무인정권기의 어느 시점(고종 46년 이후 충선왕 2년 이전으로 추정)에는 읍격이 목(牧)으로까지 승격되기도 하였다. 그 후 몇 차례 승강을 거듭한 끝에 공민왕 22년(1373) 광주목이 되어 고려시기 동안 목의 지위를 유지하였다. 그런데 광주가 무인정권기 목사주로 승격되는 배경에 무등산신에 대한 우대 조치가 있었다. 1273년(원종 14) 삼별초를 진압할 때 무등산신이 은밀한 가호를 베푼 데 대한 보답으로 우대를 요구하였고, 이에 따라 무등산신에게 작위를 더해주고, 봄·가을로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이 우대 조치로 인하여 광주의 읍격이 지사주(知事州)에서 목사주로 승격하였다. 이에 반하여 나주는 광주보다 삼별초의 항쟁을 진압하는데 분명히 더 큰 공이 있었는데 불구하고, 지역의 위상을 찾는 일에 소홀히 하였다. 이에 나주에서도 늦었지만 위상 제고의 노력을 하였다. 그 일환으로 충렬왕 3년(1277)에 나주 출신의 정가신(鄭可臣, 1224~1298)이 금성산신을 정녕공으로 봉하도록 하고 매년 녹미(綠米) 5석을 보내 제사 지내게 하였다. 그리하여 금성산단(錦城山壇)에서 본읍 치제를 지냈다. 이를 통해 다시 광주에 대한 우위를 분명히 하고자 하였다. 이에 그치지 않고 광주에서는 또다시 충렬왕 7년(1281)에 제2차 일본 원정군의 고려군 지휘관이었던 김주정(金周鼎, ? ~1290)이 무등산신의 신통력을 들어 봉작을 요청하는 등 나주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이처럼 광주와 나주의 경쟁은 무등산신과 금성산신에 대한 우대 요구를 통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조선 초 1393년(태조 2) 1월, 전국의 명산·대천·성황·해도의 신에게 봉작을 내릴 때, 무등산과 금성산은 호국백(護國伯)이란 지위에 동등하게 올랐다. 단, 그 후 1414년(태종 14) 사전(祀典) 체계를 정비할 때 전라도의 경우는 소사(小祀)로 전주 성황과 금성산이 등재되었지만, 무등산은 여기에 들지 못했다. 그때까지는 무등산보다는 그래도 나주 금성산이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금성산에는 사당이 다섯 개나 있었다. 상실사(上室祠)는 산꼭대기에 있고, 중실사(中室祠)는 산허리에 있으며, 하실사(下室祠)는 산기슭에 있고, 국제사(國祭祠)는 하실사(下室祠)의 남쪽에 있으며, 미조당(禰祖堂)은 주성(州城) 안에 있었다. 나주에서 다시 광주로 근대로 오면서 두 지역의 위상은 다시 역전되었다. 1895년(고종 32) 나주는 천년 목사골의 막을 내렸다. 이와 함께 전라남도의 중심지로서의 위상도 잃어버렸다. 1895년 7월 당시 개화파 정부는 8도로 구분되어 있던 전국의 행정구역을 23관찰부로 개편하였는데, 이때 나주는 전주부, 남원부, 제주부 등과 함께 전라도의 4관찰부 중 하나가 되었다. 나주목이 나주부로 바뀌게 된 것이다. 목이 부로 바뀌는 것은 행정상 승격이긴 하지만 나주는 더이상 목이 아니었다. 이듬해인 1896년 6월, 정부는 전국의 행정구역을 다시 13도제로 개편하면서 전라남도를 만들었다. 그런데 이때 나주에 두어야 할 관찰도가 광주군으로 넘어갔다. 이로써 나주는 그동안 관할해 왔던 38개 면 32개 도(島)를 이리저리 주변 군들에게 빼앗기면서 28개 면으로 줄어들었다. 한마디로 1896년은 나주를 사면초가의 궁지로 몰아버린 잊지 못할 해였다. 나주는 이때를 기점으로 전라남도의 수위도시에서 목포, 광주에 이은 3위의 도시로 떨어졌다. 13도제로 바뀔 때 관찰도가 왜 나주가 아닌 광주로 넘어갔을까? 그건 바로 그해 2월, 단발령에 반발해 일어났던 의병봉기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라고 해석된다. 소메카와 카쿠타로우(染川覺太郞)가 쓴 『전남사정지(全南事情誌)』를 보면 “익년
2월 9일에 이르러 단발령에 따른 불평의 무리 다수가 봉기하여 군수를 살해하는 등의 폭역(暴逆)을 행하자 같은 해 3월 4일 진위대의
1중대(274명)는 급거 나주성내로 들어와 폭도를 진멸(鎭滅)하였고, 같은 해 6월 관제 개정의 결과 관찰부를 폐하고 관찰도를 광주로 옮기고
…”3)
라고 적고 있다. 이 의병봉기는 단발령에 저항한 항일운동의 효시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때문에 나주는 전남 수위도시의 지위를 잃게 되었다. 돌이켜보건대 민족의 독립을 지키고 일제의 침략에 대한 저항의 열정을 보였던 한말의 의병봉기가 나주에게는 관찰도의 지위를 빼앗기는 뼈아픈 상처가 되었던 것이다. 빛가람혁신도시로 가까워진 광주·전남의 미래 지방산업진흥을 통한 국가균형발전을 이룰 목적으로 참여정부가 추진한 혁신도시 프로젝트가 광주·전남에서는 양 지자체의 전격적인 합의로 광주·전남공동혁신도시로 출범하였다. 2005년 6월 24일 전국에서 유일하게 공동혁신도시 건설에 합의한 광주·전남은 가장 높은 평가를 받아 ㈜한국전력을 포함한 16개 공공기관 이전이 확정되었다. 2005년 10월 20일 3차 선정과정을 거쳐 나주시 금천면 일원이 혁신도시 입지로 결정되었고, 2007년 12월 27일 명칭을 ‘빛가람혁신도시’로 정했다. 2013년 3월부터 한전을 비롯한 16개 기관이 이전을 시작하면서 혁신도시가 출범하였다. 광주·전남공동혁신도시는 에너지신산업의 거점으로 광주·전남의 미래를 열어가는 토대가 될 것이다. 엎치락뒤치락 경쟁하던 광주와 나주 두 지역이 한 세기만에 혁신도시를 통해 협력을 통한 상생의 길로 접어들었다.
참고문헌 고석규, 「영산강과 남도문화」(『목포대학교 박물관 20주년 기념논총』, 목포대학교 박물관, 2003. 1.) 동신대학교 문화박물관·나주시, 『羅州 錦城山의 歷史的 再照明』(2001) 조선대학교 박물관, 『호남역사문화인물기행 8 -광주·나주·화순-』(2001. 11) 나주시, 『천년의 역사문화도시 나주의 재발견』(2018, 12) 1)
『高麗史』 권1, 太祖 總序
2) 박철웅, 「제1장 남도의 산과 강」 「제1절 물이 갈라놓은 곳, 산 이야기」(『남도학 첫걸음』, 전라남도평생교육진흥원, 2020. 6.) 참조. 3) 『全南事情誌』下(1930, 경인문화사 영인본), 354쪽. 글쓴이 고석규 목포대학교 前 총장, 사학과 명예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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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인가 친구와 더불어 무등산 정상에 올랐던 추억이 새록새록 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글이면 추천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