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5년 3월 4일 화요일
[(녹) 연중 제8주간 화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백] 성 가시미로
말씀의 초대
집회서의 저자는, 계명을 지키는 것이 구원의 제사를 바치는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버린 것들을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계명에 충실한 것이 구원의 제사를 바치는 것이다.>
▥ 집회서의 말씀입니다. 35,1-15
1 율법을 지키는 것이 제물을 많이 바치는 것이고
2 계명에 충실한 것이 구원의 제사를 바치는 것이다.
3 은혜를 갚는 것이 고운 곡식 제물을 바치는 것이고
4 자선을 베푸는 것이 찬미의 제사를 바치는 것이다.
5 악을 멀리하는 것이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고
불의를 멀리하는 것이 속죄하는 것이다.
6 주님 앞에 빈손으로 나타나지 마라.
7 사실 이 모든 것은 계명에 따른 것이다.
8 의로운 이의 제물은 제단을 기름지게 하고
그 향기가 지극히 높으신 분께 올라간다.
9 의로운 사람의 제사는 받아들여지고 그 기억은 잊히지 않으리라.
10 기꺼운 마음으로 주님께 영광을 드리고
네 손의 첫 열매를 바치는 데에 인색하지 마라.
11 제물을 바칠 때는 언제나 즐거운 얼굴을 하고
십일조를 기쁘게 봉헌하여라.
12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네게 주신 대로 바치고
기꺼운 마음으로 능력껏 바쳐라.
13 주님께서는 갚아 주시는 분이시기에 일곱 배로 너에게 갚아 주시리라.
14 그분에게 뇌물을 바치지 마라. 받아 주지 않으신다.
15 불의한 제사에 기대를 갖지 마라.
주님께서는 심판자이시고 차별 대우를 하지 않으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복을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28-31
28 그때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29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30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31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을 어제 복음 말씀과 함께 바라봅니다. 어제 복음에서 부자는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에 대한 답을 얻기를 기대하였지만, 가진 것을 팔고 당신을 따르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그렇게 한다면 하늘 나라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부자는 하늘이 아니라, 지상에서 보물을 차지하고 싶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이미 모든 것(집, 가족, 토지 등)을 버렸으니 부자와 달리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라고 기대하였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축복을 약속하시는 대신에, 현세에서는 박해를 받고 내세에서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어쩌면 제자들 또한 현세에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싶었을지 모르겠습니다.
부자와 제자들은 저마다 예수님께 자신들이 바라는 것을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였지만, 전혀 생각하지 못한 충격적인 답변을 듣습니다. 기대한 것과 정반대의 답변이었습니다.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이들이 많을 것”(마태 19,30) 이라는 말씀의 뜻이 여기에 담겨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얻으려 노력하고 희생하면서 때로는 엄청난 것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부자와 제자들을 보면 그 무엇을 우리가 바라는 때에, 바라는 방식으로 얻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오늘 복음을 들으며 우리 신앙의 자세를 돌아봅니다. 우리는 마음의 평화와 관계의 회복을 지금 당장 얻고 싶어 합니다. 그러다 안 되면 쉽게 실망하고 신앙의 의미를 되묻기도 합니다.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긴다는 뜻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겨 보면 좋겠습니다.(한창현 모세 신부)
아마도 주님께서는 우리의 나약함과 연약함을 너무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비록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순례 여정이지만, 기쁘고 설레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뒤로 하고 길을 떠난 수도자이지만, 오늘 복음 묵상할 때 마다 부끄럽기도 하고 송구스럽기도 합니다.
수제자 베드로 사도는 수시로 예수님께 이런 고백을 되풀이했습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마르 10,28) 비록 그 장엄한 고백이 며칠 가지 않는 선언이라 할지라도, 그의 순수한 마음과 타오르는 열정이 부럽습니다.
아마도 주님께서는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금강석보다 더 단단한 언약과 서원을 당신께 드리지만, 인간적 나약함과 연약함으로 인해,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때 우리의 그 열정과 순수성을 크게 평가하시고, 우리의 결핍과 헛된 맹세조차 기쁘게 받아주시리라 확신합니다.
베드로 사도의 모습을 묵상하며 제 개인적으로 참 부끄러웠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흔들리는 갈대 같은 우리들이기에 나중에 지키지는 못할망정, 일단 그리도 열렬히 그리고 용기 있게 선언하는 베드로 사도의 고백이 부럽기도 합니다.
돌아보니 저도 목청 높여 외치기는 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 당신께서는 세례 때에 저를 당신께 봉헌하도록 하셨으니, 당신을 보다 가까이 따르도록 저를 부르시는 당신의 아들 우리 주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빛과 힘이신 성령의 인도 아래, 저는 온전한 자유로 당신께 저를 바치나이다.”
눈물까지 글썽이며 주님 외에 모든 것을 버리겠노라고, 그리고 남아있는 삶과 젊음과 에너지 모두를 그분께 남김없이 바치겠노라고 금강석보다 더 단단한 각오로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뒤를 돌아보니 버리고 바치기는커녕 끝도 없이 쌓아 올리느라 정신없었습니다. 교만과 허영의 탑이 이미 높이 쌓아 올려졌습니다. 쓸모없는 가지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그렇게 피곤한 인생을 허덕이며 살아왔습니다.
근사한 새집을 짓기 위해서는 낡고 오래된 집은 허물어야 마땅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새 성전을 건설하기 위해 높이 높이 쌓아 올린 거짓과 위선의 탑을 과감하게 허물어버려야겠습니다. 참 주님의 제자로 거듭나기 위해 아쉽지만 또다시 버리고 또 버려야겠습니다.
거짓말처럼 또다시 봄이 찾아왔습니다. 성령의 봄바람이 불어오길 기대합니다. 성령의 바람을 타기 위해서 몸집을 줄여야겠습니다. 홀씨처럼 가벼워져야겠습니다. 그래야 성령의 바람이 부는 대로,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홀연히 날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버렸다고 하지만 아직도 멀었습니다. 좀 더 버려야겠습니다. 주님의 따뜻한 품에 온전히 안기기 위해 좀 더 과감히 버려야겠습니다. 쓸데없는 자존심도 버리고, 일생에 도움이 안 되는 교만함도 버려야겠습니다. 오랜 세월 쓰고 있던 위선과 거짓의 가면도 벗어 버려야겠습니다.
부단히 버리고 버림을 반복하던 어느 날 가벼워진 우리는 그토록 고대해왔던 강렬한 주님 현존을 체험할 것입니다. 버리고 또 버린 우리, 그래서 이제 남은 것이라고는 그저 주님 당신 밖에 없게 된 우리를 향해 주님께서는 활짝 미소 지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마르 10, 29-30)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No pain, No gain’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수고하지 않고는 열매 맺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세상의 일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기도하지 않고, 말씀을 가까이하지 않고, 자선을 베풀지 않고, 십자가를 지지 않고 신앙이 열매 맺기는 어렵습니다. 교우들과 ‘인공지능(AI) 시대와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한 자매님이 인공지능의 발전이 인류에게 해로울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인공지능의 개발을 막거나, 규제를 강화하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새로운 것이 등장하면서 사라지는 것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자동차가 등장하면서 ‘우마차’는 사라졌습니다. 스마트 폰이 등장하면서 거리에 있던 공중전화가 사라졌습니다. 카세트테이프의 자리는 ‘CD’가 차지했습니다. ‘CD’의 자리는 ‘MP3’가 차지했습니다. 지금은 대부분 ‘유튜브’를 통해서 음악을 듣습니다. 검색의 시대가 열리면서 두꺼운 사전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내비게이션이 등장하면서 지도도 사라지고 있습니다. 미국이 독점하던 인공지능의 시대를 중국의 ‘딥 시크(Deep Seek)’가 등장하면서 새로운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피할 수 없다면 대한민국도 인공지능이라는 새로운 혁신을 받아들이고, 개발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삶과 신앙 안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세상에서는 첫째가 되기 위해 경쟁하고, 높은 자리에 오르려 애씁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다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겸손과 섬김을 강조하시며, 세상의 기준과 정반대의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성경 속 이야기들을 떠올려 봅니다. 다윗은 형들보다 작고 힘없는 목동이었지만, 하느님께서 골리앗을 물리칠 용사로 선택하셨습니다. 또한, 마리아의 찬가에서 “권세 있는 자를 내치시고 비천한 이를 들어 올리셨다.”라고 노래하듯이,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논리와 다르게 역사하십니다. 그리고 그 절정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가장 수치스러운 형벌이었던 십자가가, 구원의 상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떻게 받아들이고 실천할 수 있을까요? 먼저, 우리 주변의 작은 이들에게 눈을 돌려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에서나 사회에서 ‘꼴찌’처럼 보이는 사람들, 가난한 이들,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우리는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나요? 그들을 무시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그들과 함께 걸어가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또한, 우리 자신의 태도를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세상의 성공과 인정만을 좇으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길은 섬김과 겸손의 길입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라고 하신 말씀처럼, 우리가 진정으로 높아지는 길은 다른 이들을 섬길 때 열립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과학과 자연의 원리에서도 발견됩니다. 물리학에서는 작은 미립자들이 거대한 물질의 근원이 되고, 생물학에서는 힘센 동물이 아니라 환경에 적응하는 동물이 살아남습니다. 경제에서도 전통적인 대기업이 아니라, 작은 스타트업들이 혁신을 주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상도 결국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원리 안에서 ‘역전의 법칙’을 따르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은 세상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과 다릅니다. 우리가 높은 자리를 탐하기보다 낮아지고, 다른 사람을 섬기며, 사랑과 정의를 실천할 때, 하느님 나라에서 우리를 첫째로 세우실 것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안에서, 특별히 도움이 필요한 이들 안에서 예수님을 발견하고, 그분의 길을 따르도록 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까닭>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마르 10,29)
당신을 품으러
나를 비웁니다
당신을 따르러
나를 멈춥니다
당신을 닮으러
나를 지웁니다
오늘의 성인
성 가시미로(Casimir)
신분 : 왕자, 증거자
활동지역 : 폴란드(Poland)
활동연도 : 1458-1484년
같은이름 : 가시미루스, 까시미로, 까시미루스, 카시미로, 카시미루스, 카시미르
폴란드의 국왕 가시미로 4세와 독일의 황제 알베르트 2세의 딸인 오스트리아의 엘리사벳 사이에서 태어난 13명의 자녀 가운데 3번째인 성 카시미루스(Casimirus, 또는 가시미로)는 크라쿠프(Krakow)의 궁성에서 태어나 요한 들루고즈(Joannes Dlugosz) 신부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그는 어릴 때부터 성스럽고 엄격한 생활 그리고 사랑이 충만한 생활을 원하였다. 그는 정당하지 못하다는 어떤 확신에 따라 그의 부친과 헝가리 귀족들이 요구하는 헝가리의 국왕 마티아스 코르비누스(Matthias Corvinus)의 축출 공작에 군대를 인솔하는 직책을 거부하였다.
그는 이 결심을 조금도 바꾸지 않았다. 또한 그는 부친이 자신을 결혼시키려는 노력을 일축하고 학문과 기도 생활에만 전념하였다.
그는 그의 부친이 폴란드를 떠났던 1479-1483년까지 부왕 노릇을 하였으며, 리투아니아(Lithuania)를 방문하는 길에 그로드노(Grodno) 궁성에서 운명하였다.
빌나(Vilna, 오늘날 리투아니아의 수도인 빌뉴스, Vilnius)의 주교좌 성당에 있는 그의 무덤에서는 수 많은 기적이 일어났다고 한다.
그는 1522년 교황 하드리아누스 6세(Hadrianus VI)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수호성인이다.
성 루치오 1세 (Lucius I)
신분 : 교황 순교자
활동연도 : +254년
같은이름 : 루치우스 루키오 루키우스
데키우스 황제가 일으킨 박해는 갈루스 황제 시대까지 계속되었는데, 교황 성 루키우스 1세(또는 루치오 1세)는 지명이 알려지지 않은 곳으로 유배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새로 황제에 오른 발레리아누스가 즉위 초기에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호의적인 정책을 폈기 때문에 교황 일행은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추방된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로마(Roma)로 돌아왔다.
카르타고(Carthago)의 주교인 성 키프리아누스(Cyprianus, 9월 16일)는 교황의 귀환을 축하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는 대립교황 노바티아누스(Novatianus)와 그의 추종자들을 단죄한 전임 교황의 정책을 유지했지만 에우세비우스(Eusebius)에 의하면 재위 기간은 8개월을 넘지 않았다고 한다.
로마 순교록에는 그가 발레리아누스 황제 시대에 참수형으로 순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시신은 성 칼리스투스(Callistus) 카타콤바의 교황 묘역에 안장되었다가 후에 성녀 체칠리아(Caecilia) 성당으로 이장되었다.
로마 순교록은 그의 축일을 3월 4일로 기록하고 있으나, 3월 5일을 축일로 기념하기도 한다.
성 바실리오와 동료 순교자들
성 바실리오 (Basil)
신분 : 주교 순교자
활동연도 : +4세기
성 아가토도로 (Agathodorus)
신분 : 주교 순교자
활동연도 : +4세기
성 아르카디오 (Arcadius)
신분 : 주교 순교자
활동연도 : +4세기
성 에우제니오 (Eugene)
신분 : 주교 순교자
활동연도 : +4세기
성 에테리오 (Etherius)
신분 : 주교 순교자
활동연도 : +4세기
성 에프렘 (Ephraem)
축일 : 3월 4일
신분 : 주교 순교자
활동연도 : +4세기
성 엘피디오 (Elpidius)
신분 : 주교 순교자
활동연도 : +4세기
성 네스토르 (Nestor)
신분 : 주교 순교자
활동연도 : +4세기
성 카피토 (Capiton)
신분 : 주교 순교자
활동연도 : +4세기
성 바실리우스(Basilius, 또는 바실리오), 성 아가토도루스(Agathodorus), 성 엘피디우스(Elpidius), 성 에프라임(Ephraem), 성 아이테리우스(Aetherius), 성 에우게니우스(Eugenius), 성 아르카디우스(Arcadius), 성 카피토(Capiton), 성 네스토르(Nestor)는 모두 주교로서 사목하다가 순교하였다.
성 네스토르와 성 아르카디우스는 키프로스(Cyprus)에서 순교하였고, 다른 주교들은 크림(Krym) 반도와 러시아 남부의 다른 곳에서 순교하였다.
성녀 플라치다 비엘(Placide Viel)
신분 : 동정녀
활동연도 : 1815-1877년
같은이름 : 쁠라치다, 플라키다, 비엘, 에우랄리아, 빅토리아
자클린 비엘은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Normandie)의 어느 마을에서 농부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17세 때까지 농사일을 거들며 집안의 온갖 일을 다 하며 자랐다.
한 번은 그녀가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포스텔(Maria Magdalena Postel, 7월 16일)의 공동체에 살던 숙모를 방문하여 큰 감명을 받고 그곳의 수녀가 되었다.
이때 플라치다(Placida)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당시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포스텔 원장은 80세의 고령이었는데, 이 젊은 수련자가 수련을 마치자 자신이 지도하던 대수도원의 후임자로 선정하였다.
그래서 플라치다는 아르장탕(Argentan)에서 정규 학교를 다니는 등 여러 가지 준비를 하여 마침내 큰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우선 그녀는 5년 동안 수련장을 맡았고, 그 다음에는 생소뵈르르비콩트(Saint-Sauveur-le-Vicomte) 수도원을 세우기 위해 파리(Paris)로 파견되었다.
1846년 7월 16일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포스텔 원장이 서거하자 그녀는 수녀회의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숙모가 시기하고 질투하는 통에 큰 곤욕을 치렀다.
플라치다 원장은 30여 년 동안이나 수도회를 지도 운영하였는데, 보르도(Bordeaux)의 대주교인 귀베르 추기경은 이런 말을 하였다.
“프랑스 전역에서 이 수녀만큼 뛰어난 수도자는 없다.”
그녀의 개인생활은 극히 단순하였으나 초자연적 은혜가 많았다.
그녀의 재임 기간에 프랑스 내의 자비의 그리스도인 학교 수녀회의 회원 수는 150명에서 1,000명으로 불어났다고 한다.
그녀는 1951년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시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