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 하나 쓸어도 잘 쓸어라…”
조계종의 계를 내리는 수장인 전계대화상이자 승보사찰
조계총림 송광사 방장인 보성(菩成)스님을 친견하러
지난 8일 송광사 부산분원인 사하구 당리동에 위치한 관음사를
찾았다. 때마침 스님은 저자(시장)에 나갔단다.
몇 분의 시간이 나서 관음사 경내를 둘러보았다.
스님의 상좌인 지현스님이 20여년동안 일군 사찰이지만,
보성스님이 특별히 살피시며 자주 머무는 곳이라 무슨
체취가 있을 법했다.
대웅전을 배경으로 둘러싼 대나무 숲이며 어린이 법회공간을
비롯해 모든 신도들이 편안하게 찾을 수 있도록 배치된
가람구조에는 어른스님의 배려가 묻어났다.
경내를 훌쩍 돌아보고 종무소에 들어오니 스님이 도착하고 있었다.
처음 만나는 모습이지만 단아하고 검소한 목우가풍(牧牛家風)을
느낄 수 있었다.
전계대화상과 총림방장이라는 중책을 맡은 종단의 어른이지만 보성스님에게서는 위암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눈 덮힌 산중에서 길을 잃어 헤멜 때 야트막한 초가에서 유유히 걸어나와 길을 안내해 줄 것 같은 친근한 촌로(村老)처럼 보였다. 순간 “이것이 목우가풍이구나”라는 생각이 스친다.
“공부하는 이야기 해 주십시요”
스님이 막 자리에 앉자 예를 올리고 불쑥 물었다.
스님은 “그런 이야기 하지 말라”고 일언지하에 잘랐다. “오늘 여기 그냥 왔다가 사람 보고 가지 다른 이야기랑은 하지 말라”고 한다. 스님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다. 아무것도 모를리 없건만 스님은 계속 이야기를 하며 현 수행자의 흐트러진 수행태도를 비판하고 있었다.
촌로같은 외모…청빈한 목우가풍
“지난해 여름 수해가 난 이후, 많은 사람들이 걱정을 해요. 산중에 있는 많은 스님네들도 수해가 나 전기 끊어져 밥 못해 먹어 어떻게 하느냐며 난리가 난듯이 호들갑을 떨었어요. 어른 스님들은 솥 걸어놓고 산에 가서 나무해서 땔감으로 살며 명안종사가 되었어요. 요즘은 나무가 있어도 땔감으로 쓸 줄 모르는 시대가 되었어요.”
보성스님은 분명 고려시대때 불교가 타락해 바람의 등불같은 위기에 처했을 때 수행자의 모습을 견지하자 했던 보조스님의 가르침과 정신을 잇고 있었다.
스님은 여타 불교국가와 비교되는 이야기를 꺼냈다.
“동남아 불교국가를 여행해 보아도 우리나라같이 좋은 수행조건을 갖추고 있는데는 없었어요. 생활에 필요한 모두를 신도들이 가져다 주니 스님들은 열심히 수행해 중생제도하면 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이 안타까워요”
스님의 따가운 비판의 화살에 대한 대안제시의 질문을 던졌다.
“그러면 어떻게 수행해야 하겠습니까. 올해는 종단에서 수행법에 대한 체계도 세운다고 하고, 여러 유사 수행법이 불교수행법인양 유행되고 있습니다”
보성스님은 특정한 수행법을 굳이 고집하지는 않았다.
오직 목마른 자만이 얻을수 있어
“화두를 챙기든지, 염불을 하든지, 간경을 하든지 알뜰하게 배워야 해요. 우리 종단도 우리 교의에 맞는 다양한 방법을 연구해 신도들에게 내 보여야 해요.”
스님은 조계종단에서 골간으로 삼고 있는 간화선을 비롯한 다양한 수행체계를 알기 쉬운 이론적 체계를 세워 중생의 근기에 맞게 수행법을 널리 펴라는 해법을 제시했다.
수행체계와 더불어 보성스님은 ‘수행자는 계(戒)를 근간으로 삼아야 한다’는 율사다운 지론을 가지고 있다. 이런한 지론은 조계종에서 계를 내리는 최고의 어른인 ‘전계대화상’으로 추대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요즘같이 계를 지키기 어려운 세태에서 전계대화상 보성스님은 “계를 꼭 지키고 실천해 자신의 인격을 닦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계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여. 또한 실천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지. 부처님 말씀 한가지라도 억지로 흉내를 내야해. 밥도 오래 씹으면 맛있는 이치와 한가지지. 그 한가지라도 흉내를 내 내것으로 만든다면 어디를 가든지 하자가 없어. 그것이 바로 계야. 부처님 말씀 단 한가지라도 지키고 실천하는 것이 바로 계라는 것이야. 목도 마르지 않는 놈에게 억지로 물을 먹이면 그 물이 제대로 들어가고 맛이 있겠어. 오직 목마른 자만이 얻을 수 있는 것을 얻을 수 있어.”(전계대화상 추대된 후 본지와 인터뷰에서)
보성스님은 일생을 종단의 계율을 세우는데 보냈다. 현재 조계종이 행자교육원을 세운 것과 3급승가고시 제도를 정착시킨 것도 스님의 역할이 컸음은 종단내에 잘 알려진 사실이다.
스님은 법문을 잘 하지 않는다고 했다. 송광사에서도 법상에 올라서 하는 이야기의 골격은 “이래서 되겠느냐”라는 내용이라고 했다.
종단의 계율 세우는데 일생 바쳐
“나는 송광사에 있어도 대중들에게 마당하나 쓸어도 잘 쓸어라. 불 떼더라도 아궁이 단속 잘 해라고만 합니다. 다 지은 집에 불이 나면 안 되고 많은 사람들이 정성을 쏟은 절을 잘 관리해야 하는 소임이 스님네에게 있으니까요.”
‘평상심이 도’라고 했던가. 스님은 조계총림 대중들에게 ‘마당 쓸 때 깨끗이 쓸고 아궁이 불 단속 잘 하라’고 가르침을 내린다고 했다. 언필칭, ‘생활속에서 도를 구하라’는 메시지를 강하게 던져주는 법문이었다.
80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보성스님의 쩌렁쩌렁한 목소리는 조계산을 호령하는 수장으로서의 면모를 느끼게 했다. 지난해 겨울 임오년 동안거에도 그 목소리는 결재법문으로 녹아들어 깨침을 구하는 조계산 수행자들의 마음속에 각인되고 있을 것이다.
부산=글·여태동 기자 3Dtdyeo@ibulgyo.com">tdyeo@ibulgyo.com
사진 김형주 기자 3Dcooljoo@ibulgyo.com">cooljoo@ibulgyo.com
조계총림 가풍
16국사 배출한 승보사찰
조계총림 송광사는 16국사를 배출한 승보사찰이다. 16국사 배출과 더불어 이면에는 보조국사가 송광사에 선종수행장을 개설함으로 사찰로서 번창하기 시작했고, 이후 많은 개안종사들이 배출된 사찰이다. 송광사는 보조스님의 수행정신을 이어 ‘목우가풍(牧牛家風)’으로 불린다. 목우가풍은 보조스님의 아호인 목우자(牧牛子)에서 유래된다.
보조스님은 타락한 고려 불교를 바로 세우고자 33세에 팔공산 거조암에서 조직한 정혜결사를 43세가 되던 해(1200년)에 길상사(송광사)로 옮김으로서 면모를 일신하게 된다. 보조스님은 선(禪)과 교(敎)의 합일점에서 마음닦기의 근본을 세우고 조계선을 선양해 현재 조계종으로 그 맥을 잇고 있다.
보조스님 이후 송광사에서는 조선 초기까지 16분의 국사를 배출했고, 근대에는 효봉, 구산스님이 한국불교를 떠 받치는 큰 기둥이 되었으며 현재도 보성스님을 비롯해 원명스님(원로회의부의장) 등이 그 맥을 잇고 있다.
보성스님은…
전계대화상 중책맡아
범일(梵日) 보성스님은 1928년 5월 3일 경북 성주군 가천면 창천동 653번지에서 태어났다.
1945년 해인사에서 구산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수지한 스님은 50년 해인사에서 상월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1962년 조계종 총무원 종무국장, 1962~ 1971년 통영미래사 주지, 1968년 해인사 교무국장, 1970년 송광사 총무국장, 1971년 광주 증심사주지를 거쳤으며 1973년부터 1974년까지 송광사주지를 역임했다. 1974년부터 1983년까지는 조계종 4, 5, 6, 7대 중앙종회의원을 역임했으며 1976년에는 조계종 초심 규정의원의 소임을 맡았다.
1978년부터 1979년까지 다시 송광사주지를 역임한 스님은 1981년부터 1995년까지 조계종 단일계단에서 존증사(尊證師)로 승가교육에 나섰다. 1981년에는 조계종 중앙종회 수석부의장을 맡아 종단일을 지도하기도 했다.
1991년부터 1995년까지 세번째로 송광사주지를 역임한 스님은 1997년에는 조계총림 방장에 추대되었으며, 같은해 12월에는 조계종 원로의원으로 추대됐다. 종단의 스님을 양성창구인 단일수계산림에서는 교수아사리와 갈마아사리를 맡아 왔으며 2002년 10월에는 계(戒)를 내리는 최고 어른인 전계대화상에 추대되어 종단위계를 세우는데 앞장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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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보성 큰스님은 제 계사(戒師) 스님이기도 합니다...()...
우잉~. 좋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