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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에 나타난 바른 목회적 영성
- 시편을 중심으로 -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 되는 것을 말하고 듣는 이외에 달리는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행17:21)는 말씀처럼 한국교회도 끊임없이 새로운 용어의 마력에 이끌리고 있는 듯하다. 지난 70년대는 '지상명령, 교회성장', 80년대는 'QT, 제자도, 선교' 90년대 초는 '휴거와 재림 '등의 용어에 사로잡혔다가, 이제는 '영성 '이란 말이 신학자들과 신자들에게 자연스럽게 사용되며 토의되고 있다.
그동안의 모든 신학자들이 해온 것처럼, 이제도 '영성 '이란 한 단어를 중심으로 기독교 신앙과 신학 전체를 다 설명하려는 시도를 최근에 나온 여러 글들에서 보게 된다. 한철하가 늘 이야기하는 것처럼 서양신학은 '핵심사상방법론(key-idea method)'을 따라 하나의 개념으로 전통적 신학체계를 전체적으로 재구성하는 작업을 해온 것 같이, 앞으로 영성에 대한 신학화의 작업 역시 이런 구도를 벗어나지 못하리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용어와 개념으로 전통적 신앙과 경건을 이해하려고 할 때, 우리는 새로운 관점에서 볼 수 있지만, 또 왜곡시키는 작업들이 이루어짐으로 조심스럽게 신학화 할 필요성을 먼저 느끼게 된다.
오늘날 우리 주위에서 이루어지는 영성에 대한 토론을 먼저 개괄적으로 살펴보면, 사람마다 '영성 '이란 단어를 자기 나름대로 사용하고 있으며, "영성이 무엇인가?"에 대해 적지 않은 혼란이 있음을 보게 된다. 하나의 신학적 개념은 성경의 다른 여러 교리들과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한 단어의 의미, 특히 어근이 지니는 의미를 가지고 신학을 만들 수는 없다. 키텔(Kittel)의 신약신학대사전(TD-NT)은 이런 식의 접근이 얼마나 무모했는지 가장 잘 보여주었다. 그러나 우리의 토론은 '영성 '이란 핵심단어를 중심으로 앞으로 계속 이루어질 것이므로, 먼저 우리가 말하는 '영성 '이 무엇인지 기본적으로 정의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이원론적인 신학적 구도 속에서, '영성'이란 단어는 종교적 차원에서 이해되며, 일차적으로 개인적인 것이며 (개인과 집단의 대립), 육적인 것과 대립되고(영과 육의 대립), 세상적인 것과 대립되며(성과 속의 대립), 이성적인 것과 대립되며(신앙과 이성의 대립), 비상식적이고, 윤리적인 것과 대립된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무관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 같다. 중세의 영성은 세상을 떠나고, 육체적인 모든 욕망을 부인하고, 오직 기도와 묵상을 통해서 신과의 영적인 합일(Visio Dei)을 추구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따라서 영성을 추구하는 것은 바울처럼 삼층천에 올라가 신비적인 환상을 보며 어떤 무아지경에 빠지는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높은 영성을 가진다는 것은 보통신자가 체험할 수 없는 오묘한 신비체험을 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이런 개념에서 보면, 영성이란 철저히 개인적이다.
그러나 이런 이원론적인 관점에서 본 영성은 비성경적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처음 만드실 때 영육을 하나로 인간을 만드셨다(창2:7). 하나님의 성령이 임재하신 성전으로서의 '몸'을 배제하거나, 무시하는 영성은 기독론에 있어서 가현설(docetism)을 만들 수밖에 없고, 구원론에 있어서도 영지주의(gnostic)에 빠지게 된다. 구약에서 성과 속의 구별이 있지만(레10:10), 이것은 윤리적이고 영적인 대립개념이 아니다. 레위기에서 정결함은 피조물의 자연스러운 상태이고 거룩함은 하나님께 바쳐지고 구별된 은혜의 상태이며 부정함은 신체의 배설이나 죄를 통해 만들어진 비정상적인 상태이다. 즉 거룩은 하나님을 위해 구별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완전성과 정상성의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 영성을 비인격적이고, 비지성적이고, 나아가 비윤리적인 차원까지 확대하는 입장은 인간존재의 근본이 인격적이고, 지성적이고, 윤리적인 '하나님의 형상'(창 1:27) 이라는 개념 속에 있다는 것을 외면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인간의 영성의 근본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 개념 속에 있다고 보며, 영성을 비세속적, 비육체적, 비인격적, 비윤리적으로 보는 이원론적 관점을 처음부터 배제하면서 전인격적이고, 윤리적이며, 세상과 사회 속에서 의미를 찾고 있는 성경의 영성개념을 찾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구약의 영성개념은 '주를 경외함'속에 가장 잘 나타나 있지만, 이 글에서는 이 주제를 발전시킬 생각이 없다(이 주제에 대해서는 Waltke, 1992:17∼33을 보라).
구약성 경에 나타난 영성을 다양한 관점과 다양한 본문 속에서 조명할 수 있겠지만, 지면 관계로 나는 시편에 제한하여 다루고자 한다(오경에 나타난 영성에 대해서는 Baker, 1992, 예언서의 영성에 대해서는 Armerding, 1992, 김중언, 1991, 성경신학적 관점에서는 Waltke, 1988, Barton, 1986을 보라). 왜냐하면 시편 속에 구약 영성 혹은 경건의 진수가 담겨 있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시편만큼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사용된 책이 없다. 우리 주님께서도 구약 성경 가운데 가장 사랑한 책이 시편이었다. 그는 십자가의 고난가운데 있을 때 시편의 말씀들을 묵상하며 자신의 수난을 받아들였다. 우리 신앙의 모든 선배들도 영적 생활의 진수를 발견하였다. 어거스틴은 시편을 '영혼의 거울'로 칼빈은 '영혼의 해부도'로 보았다. 마틴 루터는 시편 속에서 '모든 성도의 심장'을 보았다. 종교개혁의 근간을 이루게 된 루터의 시편 번역 서문(1528년)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시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세상의 여러 가지 모진 풍파 속에서 가장 진실하고 간절한 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시편 속에서 당신은 모든 성도의 심장을 들여다본다. 거기에서 당신은 하나님의 축복을 체험하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기쁨으로 솟아난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들이 만발한 봄철의 동산을 본다.…또한 우리는 그 속에서 더이상 깊을 수 없는 심연의 슬픔을 표현하는 언어들을 발견한다. 여기서도 당신은 모든 성도의 가슴을 들여다본다. 또한 우리는 죽음 속에 혹은 지옥 속에 있는 것 같은 심정을 만나게 된다… 따라서 시편은 모든 성도의 책이다. 어떤 상황 속에 처해 있든지 누구나 자신의 상황에 가장 적절한 시와 말씀을 발견하게 된다.
클라우스 베스터만(Claus Westermann)은이 루터의 시편 번역을 품에 안고 나치를 반대하며 강제 수용소에 있으면서 "강제로 이별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노래로, 말로, 침묵으로 찬양하는 것을 배웠고, 추위와 배고픔과 고문 사이에서 때로는 사형선고 앞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특권이 우리에게 있음을 알았다"라고 했다. 본회퍼의 마지막 글은 "성경의 기도책 : 시편에 대한 서론 (The Prayer Book of the Bible :An Introduction
to the Psalms"이었다. 그는 시편을 그리스도인의 기도 책으로 보았고, 기도로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보았다.
여러 성도들이 시편 속에서 자신의 영성생활의 원천을 발견하였다는 관점 속에서 시편에 나타난 영성을 생각하면, 우리는 이미 영성을 공동체를 배제한 개인, 의식을 배제한 기도, 말씀과는 동떨어진 묵상의 차원에서 이미 영성을 스스로 정의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즉 이미 우리는 영성을 개인적이고, 기도와 묵상을 중심으로 발전시켜가는 영적 활동으로 정의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나 시편의 영성에 한걸음 더 들어가보면 우리의 시각이 편협되었음을 곧 발견하게 된다. 시편 속에는 공동체의 기도와 애가와 감사와 찬양이 너무 많이 나타나며, 주님은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거룩한 분"(시22:3)이기 때문이다.
시편이 말하는 영성을 캐내기 위해, 우리는 양식비평을 통해 시편의 유형을 찾고 그 안에 담긴 영성을 보고자 한다. 시편에 대한 양식비평은 헤르만 궁켈로부터 시작되었지만(Gunkel, 1926), 우리는 성경 속에서 시편의 양식에 대한 근거를 찾아낼 수 있다. 역대상 16장4절에 따르면, 다윗은 레위 사람들을 세워 여호와의 궤 앞에서 섬기게 하고 구체적으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칭송하며(lehazkir) 감사하며(lehodot) 찬양하게(lehall-el)하였다"고 한다.
여기에서 '감사하다'와 '찬양하다'는 문제가 없지만, '칭송하다'는 단어는 무슨 뜻인가? 새로 번역된 소위 「표준새번역」은 '주 하나님을 기다리며 '라고 번역하였다. 영어번역들에는 'to commemorate'(KJV), 'to cel-ebrate'(NASV), 'to invoke'(RSV),' to make petition'(NIV) 등으로 번역되었다. 이 단어의 어근은 자카르로서 사역형에서는 주로 '상기시키다(to remind)'라는 뜻을 갖고 있으며, 애가시에서는 '간청하다, 간구하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따라서, RSV, NIV의 해석이 원어의 뜻에 가깝다. 그렇다면, 역대기자는 '애가'(혹은 기원), '찬양' 그리고 '감사'를 시편의 중심적인 형식으로 이해한 것이 분명하다. 사실 시편에는 약 50개의 애가(탄원시), 15개의 감사시, 그리고 약35개의 찬양시가 나타난다. 우리는 이 세 가지 형식을 중심으로 시편의 영성을 다루고자 한다. 또한 시편의 영성과 밀접하게 연관된 두 주제, 즉 제의와 율법의 관점에서 우리 주제를 다루고자 한다.
애가에 나타난 이편의 영성
시편의 애가는 다섯 가지의 구성요소를 갖고 있다. 시인은 먼저 (1)주님을 부르며, (2)자신의 어려움을 하소연하고 애통하며 때로는 불평하고, (3)다시 주님을 바라보며 새로운 신앙의 확신을 고백하고, (4)주님께 기도하며, 끝으로 (5) 주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시편에 나오는 첫 애가인 3편은 (1) '여호와여 '라는 부름으로 시작되며 시상이 변할 때마다 주님을 부른다(1,3,7절). (2) 시인은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라고 탄식하며, 스스로 위기를 감당할 수 없다고 탄식한다. (3)그러나 시인은 주님을 바라보며,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3절)라고 고백한다. 갑자기 어조가 바뀌어진다. 그는 믿음으로 주님이 응답해 주실 것에 대한 확신을 갖는다(4절).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5, 6절). 이런 믿음의 확신을 고백한 후, 시인은 주님께 간구한다.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7절 상). 끝으로 시인은 (4) "구원은 여호와께 있나이다"(8절)라는 찬양으로 마친다.
이 전형적인 애가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시인은 지금 자신의 원수 때문에 괴로워하며 주님께 부르짖고 있다. 사실 50개의 애가시 중 47개는 원수와 대적을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애가시는 시인이 원수의 등살을 견디지 못하며 애통하다 주님을 바라보고 구원을 간청하는 기본 구도를 갖고 있다. 즉 시인과 원수와 하나님이 중심인물로 등장한다. 시인의 경건과 영성은 수도원이나 금욕적인 삶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고난받은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시인은 구체적으로 어떤 원수들로부터 어떤 고난을 받고 있었는가? 그동안 시편을 연구하던 학자들은 시편에 나타난 이 원수들이 누구이며 시인은 구체 적으로 어떤 시련을 받고 있었는지에 대해 많은 토론을 하였다. 사실 애가에서 시인은 불의한 원수(35편), 배반자(55편), 피에 굶주린 원수(59편), 비방하는 원수(109편), 악인의 올무(140편), 악인(141편),무서운 혀(120편)에서 건짐을 받고자 하소연하고 있다. 궁켈은 시인이 한 명의 개인이며 그는 질병으로 고난을 당하고 있다고 보았다. 시인의 원수는 병든 시인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고 정죄하며 이 기회에 시인을 없애버리려고 한다. 시편 6, 13, 22, 31편을 보면 시인이 병든 것 같은 모습을 보여주며 원수가 등장하여 시인을 훼방한다(시 38,39,41편을 보라). 슈미트(Schmidt)는 "나를 판단하소서","나를 죄없다 하소서"등의 표현에 근거하여 기소된 죄수가 성전에서 무죄 선고를 기다리고 있다고 보았다(시 7, 17,26;출22:8∼9). 크라우스는 시편에 나타나는 병자나 고소된 자나 죄의식에 눌린 자가 다 같은 사람으로 고난을 다양한 은유로 표현하고 있다고 말한다. 버클란드는 시인은 왕이었으며, 원수는 외적이었다고 보았다. 궁켈의 제자였던 모빙켈은 초기에는 시편의 고난 당하는 자들이 원수의 마술에 의해 고통을 당하는 자로서 질병을 앓고 있다고 보았으나, 후기에는 주술론적인 해석을 버리고 역사적인 해석을 시도하였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으로서는 시편의 원래의 배경을 잘 알 수 없으나, 시인이 다양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여러 종류의 원수와 싸우되, 시인은 언약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의인의 회중'을 이루고 있는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시 1). 시의 속성이 원래의 정황을 모호하게 함으로써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에게 호소하는 것임을 미루어볼 때, 시편의 원수와 시인의 고난의 정체를 모호하게 만든 것이 오히려 의도적이었을 것이다.
시인의 고난이 무엇이었고, 원수의 정체가 무엇이었는가 하는 문제보다 더욱 근본적인 것은, 시인이 원수와 싸우고 있다는 점이다. 시인은 '악인'과 '불의를 행하는 자'로 묘사된 그의 원수와 생명을 걸 싸움을 하고 있다. 시인은 주님께서 시내산에서 주신 계시의 말씀을 믿고 따르며, '의'를 추구하는 자로서, 악과 악행하는 자와 싸운다. 이 싸움에서 그는 스스로의 힘과 지혜로는 이길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방패이신 주님을 바라보고 새 힘을 얻으며, 믿음의 확신을 갖는다. 기도와 간구로써 원수와 싸우는 시인의 모습 속에 애가에 나타난 영성의 중요한 측면을 우리는 보게 된다. 시편은 단지 우리에게 위로의 말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원수가 있음을 상기시키고,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도록 요청하는 책이다.
애가시 중에서 시인을 괴롭히는 원수뿐 아니라, 자신의 내적인 문제, 즉 죄 때문에 씨름하는 시들이 나타난다. 그 대표적인 시로서 51편을 들 수 있다. 이 시편은 우리의 영성 토론에 새로운 조명을 준다. 오늘날의 영성에 대한 글들은 주로 마치 우리가 훈련과 연습과 교육으로 온전한 영성에 이를 수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주며, 수많은 방법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시편 51편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도덕적 무능을 말해주고 있다. 시인은 자신의 '죄과'(반역), 죄악과 죄를 고백한다. 나아가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라고 말한다(3절).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다"는 말은 자신이 죄의식의 집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시인은 나아가 자신의 죄가 이미 잉태되던 순간부터 있었음을 관찰하고 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5절). 시인은 여기에서 자신의 죄를 출생 순간 정도가 아니라, 잉태되던 순간으로 잇고 있다. 그러나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했다"는 것은 성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인간 죄의 보편성을 말해주고 있다(창6:5,8:21; 왕상8:46; 시130:3,58:3). 그러나 역설적인 것은 자신이 모태에 있을 때 이미 주님은 그에게 진실함과 지혜를 알게 하셨다(6절, 개역성경은 현재형으로 번역하고 있으나 과거로 보는 것이 더 나아보인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과 자신이 완전히 실패했음을 동시에 인정하고 있다. 그는 자기 안에 두개의 법이 싸우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 이 내적인 갈등은 결례법으로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에(7절), 그는 새로운 창조를 구하고 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10절). 여기에서 시인은 '창조하다(bara)'라는 동사를 의도적으로 사용한다. 그는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새 창조를 구하고 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11절)라고 기도한다. 그는 새 마음과 견고한 영(10절)으로 만족하지 않고, 주의 영의 내주를 간구하고 있다. 시인은 자신의 범죄로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하였지만, 죄의 용서와 새로운 창조와 성령의 임재로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되고 새로워지길 간구하고 있다. 따라서 주님께서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시고, 주의 영이 우리에게 임하셔야 비로소 우리에게 참된 영성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시편의 애가를 살펴보면, 시인은 원수와 자신의 죄 문제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문제 때문에 애통하며 간구하는 경우도 많다. 즉 시인은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것으로 그치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렸음을 하소연한다. 시편22편의 시인은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시나이까? "(1절)라고 묻는다. 그는 고통과 고독의 심연에서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버림받은 것을 말하고 있다.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2절). 시인은 하나님의 부재를 이해할 수가 없다. 이 문제는 욥기의 중심주제를 이루고 있다. 욥은 왜 하나님께서 자신을 숨기시는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나타나셔서 말씀해 달라고 구한다. 구약에 나타난 믿음의 인물들에게 하나님은 나타나셨고, "마치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주님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셨다"(출33:11). 그러나 모세(출33:2∼16)나 선지자들은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버릴 것에 대해 두려워하였다. 에스겔 선지자는 바벨론이 예루살렘과 성전을 정복하기 직전에 주의 영광이 시온산에서 떠나는 것을 먼저 본다. 시편 44편의 시인은 주님이 주무신다고 표현하고 있다.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시고 우리를 영영히 버리지 마소서.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고 우리 고난과 압제를 잊으시나이까? "(23∼24절). 같은 부재의 모티프를 시편 89편의 시인은 다윗 언약의 맥락 속에서 던지고 있다. "주여 주의 성실하심으로 다윗에게 맹세하신 이전 인자하심이 어디 있나이까?"(49절). 시편 22, 44, 89편의 시인들은 모두 주님께서 이전에는 임재하셨는데 지금은 그 임재를 찾을 수 없음을 애통하며 주님께 하소연하고 있다.
그들은 주님의 임재를 새로운 역사적 상황과 실존적 상황에서 체험하지 못하고 있다. 주님은 자신의 얼굴을 가리셨다. 물론 시편 22편의 시인은 "주님이 응답하셨나이다"라고 고백을 하고 감사와 찬양으로 넘어가지만, 응답을 체험하지 못하고 여전히 주님의 부재로 씨름하는 시인들의 모습이 더 많이 나타난다(대표적으로 80편과 88편). 특히 22편과 89편에서는 시인이 시편 51편에서처럼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있지 않다. 시인은 하나님의 특별한 총애를 받는 위치에 있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부재로 괴로워한다.
전통적으로 영성은 항상 신앙의 확신과 하나님의 임재를 중심으로 이해되어 왔지만, 신앙이 흔들리고, 하나님의 부재를 체험하고 있는 이 중요한 시들이 보여주는 영성의 본질은 어디에 있는가? 이런 시들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는 근본적인 거리를 잘 드러내어준다. 모세도 하나님을 대면한 자라고 하지만, 주님은 자신을 감추신다.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 보라 내 곁에 한 곳이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섰으라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출33:20∼23). 물론 여기에 나타난 '등'과 '얼굴'은 다 신인동형적 표현으로써,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볼 수 없고 오직 간접적으로만 볼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따라서 우리는 이 부재의 신학을 제시하는 시편들을 통해 소위 신비주의자들이 사모하는 하나님과의 완전한 영적합일이 불가능함을 알게 되며, 주님의 섭리 속에 경건한 자에게 자신을 감추시는 순간이 있음을 알게 된다.
이와 연관하여 테린의 말이 도움이 된다. "그렇지만(시편 22편의) 시인의 시련 다음에, 새로운 미래가 동터 온다. 뒤돌아 볼 때(하나님의), 부재는 유예된 임재였다. 그의 유기는 키에르케고르가 수십 세기 후에 말한 '하나님 앞의 순간(the moment before God)'에 대한 서주곡이었을 것이다. 그가 받은 잔혹한 시련은 결국 그가 이를 사명의 크기에 비교해 볼 때 크게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Terrien, 1978:323).
감사시에 나타난 영성
신명기 26장 5∼9절에 표준화된 이스라엘 초기의 신앙고백을 보면, 맥추절의 배경에서 토지소산의 맏물을 감사제물로 성전에 바치면서, 당시의 제사장 앞에 고백하는 내용이 나타난다. 이때 이스라엘 사람은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구체적인 구원의 은총을 열거하고 감사의 제물을 바치며 신앙을 고백한다. 구체적으로 내용을 분석해보면, (1) 과거의 어려웠던 시절을 돌아보며 (5, 6절),
(2)고통가운데 부르짖음(7상),
(3)주님이 부르짖음을 들으심(7하),
(4)주님께서 건져내심(10절), 그리고 (5) 찬양의 서원(8, 9절)이 나타난다. 같은 형식이 감사시에 나타나고 있다.
감사시는 일반적으로
(1) 감사하라는 부름과
(2) 특정한 시련의 고백과
(3) 구원을 보고하며,
(4) 찬양하기로 서원하는 형식을 갖추고 있다.
감사시는 크게 개인 감사시(18,30,31,40,116, 138)와 공동체 감사시(124, 129)로 나누어지나 기본적으로 같은 틀을 갖고 있다.
먼저 시편 30편을 보자. 여기에서 시인은 병과 죽음의 위험에서 건짐을 받은 것을 인하여 주께 감사하고 있다. 그는 한마디로 "주께서 나를 깊음(심연)에서 건지셨나이다"(1하)라고 고백하며 감사드리고 있다. 이 시는 '내가 주를 높이리다'(1상)로 시작하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영히 감사하리이다"(12하)로 마친다. 즉 시인은 찬양의 결심으로 시작하여 결심으로 마치고 있다.
찬양의 결심을 이어 시인은 찬양의 근거를 제시한다. 먼저 1절 하반절, "주께서 나를 심연에서 건지셨나이다"에서 전체적인 요약이 나타난다. 이 구원의 기사가 2∼12장까지 발전되고 있다. 여기에서 그는 자신이 받은 구원을 말하고 성도들로 함께 찬양하자고 한다. 2∼3절에서 시인은 자신이 죽음의 위험에서 도움을 간청했는데 주께서 건져주심을 기억하고 있다. 4∼5절에서는 시인이 청중들로 하여금 함께 찬양하자고 한다. 6절에서 12절까지 다시 자신이 받은 구원의 체험을 낭송하고 있다. 그는 먼저 형통하였는데(6∼7상), 갑자기 망했다(7하). 다시 그는 심연에서 간청하며(8∼10절) 주의 구원을 체험하고 말한다(11 ∼12상).
대부분의 애가에서는 '내가 찬양하리이다"가 항상 시의 마지막에 나오지만, 이 시는 찬송하겠다는 고백으로부터 시작한다. 즉 애가에서는 간구로 시작하여, 찬송의 결심으로 마친다. 그러나 시편 30편에서는 '찬양'과 '감사'로 시작하여, "영영히 감사하리이다"로 마친다.
또한 대부분의 애가에서 찬양은 주로 위기에서 구원해 주시길 구하는 간구의 맥락 속에서 나타난다. 앞에 있는 시편 28편 6절이 이점을 잘 말해준다. "여호와를 찬송함이여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심이로다. " 찬송과 간구가 밀접하다. 그러나 시편 30편에서는 이미 경험한 구원을 감사하고 있다. 즉 애가에서는 구원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먼저 감사와 찬송을 드리고, 감사시에서는 이미 체험한 구원을 감사하고 있다. 시편22편 역시 마찬가지이다. 시편 22편은 길고 긴 애가로 이어졌지만, "내게 응답하셨나이다"(21절)라는 응답의 확신을 축으로 하여 감사와 찬송으로 이어지고 있다(23∼31절).
또 하나의 감사시인 107편을 보면, 시인은 축제의 날에 온 회중들과 함께 주의 인자하심을 노래하면서, 구체적으로 (1)광야 사막 길에서 구원하시고(4∼9절), (2) 감옥에서 건지시고(10∼16절), (3) 질병에서 건지시고(17-22절), 끝으로 (4)풍랑 이는 바다에서 건지신(23∼32절) 주의 은총을 감사하고 있다. 시편 136편을 보면, 시인은 (1)온 성도들로 하여금 주께 감사하도록 권하고(1∼3절), (2) 감사의 내용을 열거하며(4∼22절), (3) 주를 찬양하도록 권유한다(23∼26절). 이 시는 창조에 나타난 주님의 인자하심(4∼9절)과 역사에 나타난 주님의 인자하심(10∼22절), 즉 구체적으로 출애굽과 홍해도하, 광야에서 보전됨, 그리고 열국의 왕들을 정복하고 기업을 얻은 것을 감사하고 있다.
감사시에서 핵을 이루는 사상은 시인이 개인으로나 공동체적으로 정말 비천하고 비참한 지경에 있었을 때(시 136:23), 주께서 그들을 기억하시고 건져주신 것을 잊지 않고 주님을 영원토록 섬기며 감사의 찬송을 드리는 데 있다. "어려울 때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 뿐 아니라, 형통과 번성의 때에(어려웠을 때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이 참된 경건의 특징이다"(H.Ringgren). 감사시에 나타난 여러 삶의 어두웠던 정황을 살펴보면, 억눌림(10편), 죽음(30편), 죄(32편), 병(41편), 고통(107편)등의 모티프가 나타난다. 공동체의 감사시에서는 하나님의 축복(65편), 구원(66편), 승리(68편) 등을 감사한다.
찬양시에 나타난 영성
감사시와 찬양시를 구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나, 일반적으로 전자는 '선포적(declarative)'이고 후자는 '서술적(descriptive)'인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Westermann, 9). '선포적'인 말이 조금 어렵다면, '고백적 '인 것으로 대치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시의 본질적 내용은 같지만, 찬양하는 방식에 있어서 조금 다르기 때문에 구별을 하고 있다. 감사는 하나님께서 시인을 위해 행하신 구체적인 내용을 회중 앞에서 선포하고 고백하지만, 찬양은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서술하며 노래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모세가 홍해를 건넌 후,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라고 말한다(출 15:1).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 이름을 높이세"(시 34:3절).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여 그 발등상 앞에서 경배할지어다 그는 거룩 하시도다"(시 99:5). "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이다"(사25:1). 여기에서 주를 '높이자'라는 표현이 반복되고 있다. 이 '높이자'는 권면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 있어서 독특한 한 요소를 부각시켜준다. 즉 하나님은 원래 높은 분이지만, 우리의 찬양을 통해 높아지신다.
이방인들도 자신의 신들을 높였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과는 달리 높인다. 바벨론 사람들이 자신의 신을 높이고 찬양할 때, 그의 신상과 그의 성전이 얼마나 크며 얼마나 영광스러운가를 묘사하였다. 느부갓네살은 너무나 멋있는 신상을 세워 온 나라로 그 앞에 절하게 한다. 그 엄위한 신상의 위대함을 보며 자신의 위대함을 높이고자 한다. 이방인들은 신상이 커야, 신이 크다는 생각을 한다. 신을 위한 성전이 크고 화려해야 신이 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찬양의 개념을 이스라엘에서 발견할 수 없다. 이들은 하나님이 구원자이기 때문에 높인다. 역사 속에 찾아오셔서 해방과 자유를 주시기 때문에 높인다. 자신에게 구원의 은총을 주신 그분이 참 높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높음은 그의 외모나, 신상이나, 성전에 있지 않고, 그의 행동, 즉 구원하시는 행동과 그의 성품에 있다. 그는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다. 이것 때문에 시인은 그를 높인다. 시인은 자신이 체험한 구원을 알리므로, 하나님을 찬송한다.
대표적인 찬양시 중 시편 8편을 보면, 시인은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을 노래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마친다(1, 9절). 그는 "주의 이름이 온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라고 찬양하고 있다. 그러나 시편 8편은 하나님의 높으심뿐 아니라, 주의 낮아지심을 또한 노래한다. 주님은 자신을 낮추시며, 인간을 생각해주신다. "사람이 무엇인관데, 인자가 무엇이관데." 이런 주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 같은 사상이 시편 113편에도 나타난다. 시인은 영광스러운 주님의 비하를 통해 인간의 존엄성을 드러내고 있다.
시편 29편은 폭풍 가운데 나타난 주님의 위엄을 찬양하고 있다. 시인은 폭풍을 보며 하나님의 신현의 위엄을 느낀다. '여호와의 소리'가 일곱번 나타나, 주의 소리가 완전하고 엄위하고 영광스러움을 노래한다. 이 소리는 천둥과 번개와 폭풍 소리로써 우리가 볼 때는 단순한 자연현상이지만, 시인의 눈에는 주님의 계시의 음성이었다. 천둥과 번개로 찾아오시는 주님을 묵상하며, 시인은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1상∼2)라고 권한다.
시편 33편의 시인은 "수금으로 주께 감사하고 열줄 비파로 찬송할지어다"(2절)라고 권한다. 찬양에서 악기를 사용하라고 한다. 이 시는 알파벳시로서 짧은 시는 아니나 구약신앙의 가장 근본적인 주제들을 다 담고 있다. 창조, 역사, 언약, 예배가 밀접하게 이어져 하나의 시로 만들어지며, 창조주요 역사를 움직이는 분이요, 우리를 자기 백성으로 선택하신 분이요, 우리는 그를 예배하고 찬양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시편 103편으로부터 시작하여 107편까지 찬양시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 일련의 찬양들을 열어주는 103편은 특히 주님의 선하심을 찬양한다. 시인은 주님의 모든 은택을 생각하며 주께서 "인자와 긍휼로 우리를 관 씌운다"라고 고백한다. 이 시에서는 인간의 죄와 연약이 두드러지게 강조되며, 이 어두운 배경 속에서 "주는 자비롭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도다"(8절)라고 찬양한다. 이 말씀은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주신 주님의 계시를 바로 반영하고 있다(출34:6). 우리의 죄와 부패성이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지만, 주님은 우리를 용서하시고(10∼13절), 자비를 베푸신다.
끝으로 시편 150편은 전체 시편에 대한 최종적인 송영으로 '호흡이 있는 모든 자'가 성전의 모든 오케스트라와 함께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라고 초대하고 있다. 모든 악기들이 다 동원되고 있다. 이 시는 '명령형 찬양시'로서 시인은 찬양하도록 명한다. 주님은 '그 성소에서'뿐 아니라 또한 '그 권능의 궁창에서' 찬앙을 받으신다.
제의와 영성
시편은 단지 개인의 기도책이 아니라, 온 공동체의 예배의식에서 만들어지고, 또한 예배의식을 위해 만들어졌다. 시편 속에 공동체의 예배와 절기를 보여주는 시들이 많이 있다. 구약시대에는 의식을 통해 영성이 표현되었다. 사실 예배를 떠나 영성을 생각할 수 없다. 궁켈은 시편을 볼 때 지나칠 정도로 개인기도의 관점에서 보았으므로 공동체적 성격, 의식기능적 성격을 잘 보지 못했다. 개신교의 경건도 지나칠 정도로 개인기도 중심이기 때문에 시편을 '다윗의 생애에 있어서 특정 체험 '이나, '이스라엘의 영적 체험'으로 개인화시켰다. 그러나 "기존하고 있는 시편은 그 하나 하나에 있어서 참으로 제의의식을 위한 시편이요 구체적인 의식적 상황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모빙켈). 원래 시편은 포로 이전 시대의 찬송가였으며, 이 전통은 포로 후기에도 계속되어 현재의 시편으로 편집되었다.
사실 구약의 경건은 거룩한 장소(예루살렘, 성전), 거룩한 때(안식일, 안식년, 희년), 거룩한 절기(유월절, 맥추절, 추수감사절), 거룩한 직원(제사장, 레위인, 나실인), 거룩한 물건들(촛대, 진설병, 법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예배의식은 사회성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거룩한 의식과 말씀이 만나는 순간이며, 개인이 공동체 속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순간이기 때문에 영성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식이 시편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여러 시들이 증거하고 있다(5:7,66:13, 63:2∼4, 26:6∼7, 1:9∼10,84편). 시편에는 때로는 행렬을 지어 입장하는 배경을 보여주는 시들이 있다(24, 68, 118, 132편). 이 예식에서 제사장뿐 아니라, 왕이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학자들은 현 시편의 배후에 '언약갱신 축제 ' 혹은 '시온산 축제 '등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예식과 제의가 너무나 구약 영성에서 중요하지만, 우리가 예물로 하나님을 매수할 수 있다든지, 제사 자체가 어떤 주술적 능력을 갖고 있다는 이교적 생각이 철저히 배제되고 있다. 예배와 삶, 의식과 말씀, 제사와 순종이 일치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시편들이 많지만(15, 24, 81, 95편), 그 중 가장 중요한 시편이 50편이다. 이 시의 중심주제는 "감사로 제사를 드리라"(14,23절)는 말씀으로 잘 표현되어 있다.
토라 (율법)와 영성
끝으로 우리는 시편의 영성을 토라의 빛 속에서 볼 필요가 있다.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시편을 보면, 시편의 세계를 열어주는 첫 대문인 제1편은 주님의 율법을 노래하는 토라시편이다. 우리는 우리의 영적 세계를 열어주는 시편의 첫 시가 심오한 천상의 영적 체험이나 엘리야의 기도로 시작하지 않고, 주의 율법을 노래하는 시편임을 보며 당황하게 된다. 시편 1편이 현 위치에 서 있는 것은 의도적이다. 시편의 편집자는 1편을 현 위치에 둠으로써, 자신의 의도를 명백히 하고 있다. 즉 구약 경건의 진수를 따르는 자는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2절).
즉 참된 영성은 주의 율법을 순종하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주야로 묵상하는 데'있다. 이것은 주의 율법을 내면화시키는 것이다. 시편 19편의 시인은 "여호와의 율법은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10절)라고 노래한다. 이 시인은 토라를 '율법, 증거, 교훈, 계명, 주를 경외하는 도, 판단'등의 동의어를 통해 하나님 말씀의 총체성을 여섯 가지 측면에서 말한다. 특히 여기에서 토라를 주관적 관점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로 묘사한 것을 주목하라. 토라를 진실히 대할 때 우리는 주를 경외하는 도를 깨닫게 된다. 이 토라는 '좋고, 완전하며, 확실하고, 바르며, 순수하고, 빛나며, 참되다'라고 노래한다. 시편 119편의 시인은 176절에 걸쳐 토라의 아름다움과 영광을 질서정연하고 심오하게 노래한다. 이 시에는 율법은 의인화되어 하나의 인격체로 나타난다(이것을Barton처럼 torahmysticism이라고 말할 필요는 없다). 시인은 이 주의 율법을 사랑하며(97절), 즐거워하고(16절), 묵상하며(27절), 연구하고(15절), 지키며, 또 계속 지킬 수 있는 힘을 구하고 있다. 시인은 자신의 생명의 원천을 토라와 하나님의 약속에서 발견하고 있다(50.93절). 그에게 있어서 생명이란, 자유와 빛과 기쁨과 번성을 의미하며, 토라를 생활과 마음의 중심으로 한, 하나님과의 교통 가운데서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이다.
맺는 말
시편에서 나타난 구약 영성의 중심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시내산에 계시된 토라(객관적 말씀)와 기도(애가, 감사, 찬양)가 두 중심 축으로 자리잡고 있다. 구약 영성의 질과 내용과 방향과 성격은 시내산에서 계시된 토라에 근거한다. 토라를 내면화하며, 토라에 계시된 주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이 참으로 영적이며 합리적인 예배(롬 12:1)이다. 토라를 떠난 영성은 있을 수 없으며 계시된 진리를 떠날 때 이방인의 영성에 빠지고 만다(신 18:9∼14를 보라). 토라는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주를 경외하는 도'를 깨우쳐준다(시 19:9). 토라에 근거한 영성은 전인격적이며, 사회성과 역사성을 띠고, 세상에서 언약의 백성으로 사는 것을 말한다.
또한 토라를 진리의 기준으로 받아들인 시인들은 다양한 삶의 현장 속에서 애가와 감사와 찬양으로 주님께 나아가며 교제한다. 여기에서도 초점을 이루는 것은 시인의 간절성이나 영역이 아니라, 주님 자신이다. 애가에서 시인은 구원을 베푸실 주님을 바라보고, 감사시에서 구원을 베푸신 주님을 전하며, 찬양시에서 주님 자신의 아름다움과 위엄과 영광을 노래한다. 시인에게 구원을 베푸신 주님은 바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시고 율법을 주신 그분이다.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시 103:8; 출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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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우/ 부산공대와 총신대 신대원을 졸업하고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구약학을 전공했다. 지금은 총신대 신대원 구약학 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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