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 참고인 조사차 끌려갔던 박종철 군이 수사기관의 무참한 고문에 의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일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면서 고문의 잔학함이 만천하에 드러났고, 6월 민주화 항쟁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고문은 ‘우발적인 실수’나 ‘재수없는 사고’가 아니라 수많은 국가보안법 관련자들에게 가해져온 이 나라 공안수사기관의 체질화되고 제도화된 관행이었기에 이후로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독립운동가에 대한 일제 경찰의 악랄한 고문수사는 해방이후 ‘용공좌익세력 척결’이라는 명목으로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명줄을 이어왔던 것이다.
비정상적으로 정권을 손에 넣은 독재권력은 정권 안정을 위해 ‘간첩’ 사건을 계속 조작해냈고, 사실상 헌법 위에 군림했던 국가보안법을 이것에 악용했다. 국가보안법이 적용되는 순간, 어느 사건이건 체포에서부터 수사, 재판, 이후 복역과정에 이르기까지 늘 인권침해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
특히 반공이 ‘국시’였던 7,80년대에는 소위 조작간첩 사건의 경우 공통적으로 불법연행, 장기구금, 고문-허위자백-번복-고문, 비공개 재판, 자백의 증거능력 인정, 높은 형량 등 수사 및 공판절차에서 불법 및 인권침해가 공공연하게 자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많은 피해자와 희생자들이 양산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56년간 인권과 민주주의의 목줄을 죄어온 국가보안법을 이번에는 끝장내자며 전국에서 줄줄이 단식농성대열에, 일부는 목숨까지 건 단식에 참여하고 있는 가운데, 국가보안법폐지국민연대는 16일 국회도서관 대회의실에서 국가보안법으로 인한 고문·용공조작 피해자 증언대회를 열었다.
△16일 국회도서관에서 열린 국보법 피해자 증언대회 ⓒ민중의소리 김철수 기자
대회에는 1974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20년간 복역했던 전창일 씨, 1980년 재일동포 관련 사건에 연루된 신귀영 씨, 1980년 진도간첩단 사건으로 모진 고초를 겪은 석달윤 씨의 아들 석권호 씨, 1990년 노동해방문학 사건으로 고문당한 이원혜 씨, 1993년 남매간첩단 사건으로 고문받아 자결까지 시도했던 김삼석 씨 등 시대별 국가보안법 피해자들이 나와 생생한 증언을 들려주었다.
전창일 씨
사건의 완전 날조도 날조지만, 사형 언도 후 17시간만에 쥐도 새도 모르게 형이 집행되어 대한민국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규정된 ‘인민혁명당재건위원회 사건’의 피해자들은 사형수들만이 아니다. 사형을 모면한 사람들도 죽음과도 같은 20년이라는 세월을 감옥에서 보내야만 했다.
△전창일 씨 ⓒ민중의소리 김철수 기자
74년 인혁당 사건으로 20년만에 세상 빛을 본 전창일 씨는 30년 전의 일을 어제 겪은 것처럼 기억하고 있었다.
“며칠간을 잠을 재우지 않으면서 수사관이 5,6명씩 번갈아 드나들면서 죽음의 직전까지 몰고 갔죠. 검찰에 넘어와서도 절대 무죄라고 주장하니까 다시 지하실로 끌고 내려가 전기고문을 가했어요.
검사 앞에 가서 ‘난 아니다’고 하면 검사가 눈짓을 해요. 그럼 수사관이 또 끌고가는 겁니다. 피투성이로 절룩거리며 다시 검사 앞에 가면 검사는 모른 척 ‘아이구 왜 이랬어. 어디 갔다 왔나’ 이럽니다.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짓이죠. 제가 징역살고 나오니까 그 검사들이 암에 걸려 다 죽었대요. 그래서 참 하느님이 계시는구나 싶대요.“
청중석에서 “그래, 아이구 잘했어” 소리들이 나왔다.
“재판도 엉터리예요. 판사의 판결문이라는 것도 검사가 작성한 공소장과 글자 하나 다르지 않고 똑같아요. 심지어 철자가 틀린 것까지 똑같더군요. 피고가 재판에서 ‘사실이 아니라’고 말한 것까지 나중에 재판 기록을 보면 ‘예, 그렇습니다’ 이렇게 기록돼있어요.”
정 씨는 형을 선고받기 전까지 1년 몇 개월 구금되어 있는 동안 모진 고문을 받았고 가족 면회도 할 수 없었다.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을 당한 8명의 시신을 김수환 추기경이 나서서 가톨릭 묘지에 안장시키겠다고 하자 당국은 서대문 구치소 앞에서 ‘시체강탈전’이라는 활극을 벌였다. 당시 시신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차 밑에 누워 있다가 바퀴에 깔린 문정현 신부는 아직도 다리를 절룩거린다.
인혁당 사건에 대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 결과 실제로 공판기록조차 조작되어 있었던 것이 확인되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이 사건에 대한 재심 청구를 계속 하고있지만 서울지방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석권호 씨
△아버지가 18년을 감옥에서 보내는 동안 어머니와 둘이 겪어야 했던 고초를 말하다 눈물이 쏟아지는 석 씨 ⓒ민중의소리 김철수 기자
80년 진도간첩단 사건으로 18년을 복역한 석달윤 씨의 아들 석권호 씨는 아버지가 “잠시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남산 중앙정보부 조사실로 끌려갈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석달윤 씨의 혐의는 6.25 당시 월북했다가 남파된 고종사촌형인 박양민과 8차례에 걸쳐 접선하면서 간첩 활동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석 씨는 6.25 전쟁이후 사촌형을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권력 안정을 위해 ‘간첩’이 필요한 시기였죠. 중정 지하실로 끌려간 우리 아버지는 양팔과 양다리를 밟힌 상태에서 수건을 뒤집어쓰고 물고문을 받고, 수갑을 채워 매달아 잠을 안 재운다든지, 두 손 두 발을 모두 묶여 통닭구이처럼 매달리는 고문, 전기고문, 송곳으로 하반신을 찌르는 등 온갖 고문을 당했습니다.”
물고문으로 먹은 물을 빼기 위해 수사관들은 석 씨를 거꾸로 매달아 배를 밟기도 했고, 심지어 볼펜심을 성기 요도에 찔러 넣기까지 했다. “너 하나 죽어도 진단서 하나면 된다”고 그들은 말했다.
2,3주간 전혀 잠을 재우지 않고 전신을 집중구타하는 바람에 극심한 수면부족과 공포로 인해 판단능력을 상실한 석 씨는 자신도 알 수 없는 말을 하거나 이유 없이 울기까지 했다. ‘정말 나를 죽이겠구나. 죽어나가는 것보다 징역을 살더라도 살아서 가족을 봐야한다’고 생각한 그는 허위자백을 했고, 간첩이 되었다.
허위자술서를 쓰기 시작하자 수사관들은 이 내용을 기억시키기 위해 매일 오전, 오후 두 번씩 40여 일을 허위로 작성한 자술서를 양면지 위에 반복해서 쓰도록 만들었다. 한글자라도 틀리면 몽둥이로 구타당했다.
“81년 1월 20일 동아일보에 아버지가 연루된 고정간첩단 3개단을 발견했다는 어마어마한 사건이 보도되었습니다. 이웃들은 우리를 보면 못볼 것을 본 것처럼 외면했고, 학교 친구들은 저를 ‘빨갱이 새끼’라고 놀렸습니다. 어머니와 저는 두달 이상을 고구마로 끼니를 이은 적도 있습니다. 그 이후 우리가 살아온 시간은 얼마나 큰 고통의 세월이었는지 모릅니다….”
눈물이 복받쳐 올라 석 씨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이내 격려의 박수가 쏟아졌다.
“검사의 구형은 사형이었지만 무기징역으로 판결이 났습니다. 18년을 복역하고 나와서도 아버지는 지금까지 보안관찰법이라는 이름으로 일상적인 감시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국가보안법은 꼭 폐지되어야 합니다. 아들인 제가 하지 못하면 제 자식 대까지 대물림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친인척과 친구관계 등을 이용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간첩으로 엮은 이 사건에는 모두 17명이 연루되었고 이중 1명이 사형을 받았다.
신귀영 씨
부산에 살던 신귀영 씨는 일본에 살던 형님을 65년에서 79년까지 집안의 대소사가 있을 때 만났다. 가족들의 대소사에 대한 축의금과 어머님께 드리는 형의 돈을 받아온 것이 간첩행위로 단정되어 81년 6월 대법원에서 15년형을 선고받았다.
△신귀영 씨 ⓒ민중의소리 김철수 기자
“80년 2월 25일 민방위훈련을 받으라고 해서 동사무소에 나가보니 형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 길로 부산 시경 대공분실로 끌려가 천으로 꽁꽁 묶여 물고문, 전기고문을 당했다. 여러 명의 수사관이 돌아가면서 야구방망이로 수십 대 씩 때리고, 손가락 사이에 작은 파이프를 끼우고 비트는 고문까지 받았다. 결국 진술서에 허위 진술을 할 수밖에 없었다. 스무 번이고 서른 번이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수도 없이 고쳐 썼다.”
신 씨에 대한 구속영장은 5월 3일 발부되었다. 무려 68일간 불법 구금을 당한 셈이다. 수사 기록은 4월 12일 처음 나왔는데, 그 사이 신 씨를 간첩으로 만드는 동안 수사 기록조차 아예 작성하지 않았던 것이다.
더구나 신 씨의 형 신수영이 간첩이라는 증거는 어디서도 발견되지 않았고, 검찰이 주장하는 간첩행위라는 것도 모두 자백에만 의존한 것이었다. 같은 사건에 연루되었던 서성칠 씨가 72년 신수영 씨에게 건넸다는 부산시 지도를 구입한 곳이 근학서점이라고 되어있으나, 근학서점은 75년에 개업했다는 것이 밝혀지기도 했다.
“가족들을 잡아다 고문하겠다며 검사가 시키는 대로 하라고 협박하는 바람에 강제 자백을 했다. 진술서에 지장을 못 찍겠다고 하자 형사들이 내 손을 잡아 강제로 지장을 찍었다.”
그가 조사를 받을 당시 집안 남자들도 거의 모두 붙들려가서 모진 고문을 받았다(67세 노인에서 3세 어린이까지 20일간). 의사와 간호사가 비상대기를 하는 상황에서 자백이 이루어졌다. 그것도 그 한사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친척 중에 배타는 사람이 있느냐 묻길래 두 명 있다고 했더니 데려다 고문해서 간첩 만들었습니다. 친구 만나서 맥주 두 병 먹으며 고향 얘기 했는데 ‘간첩 접선했다’고 또 조작했습니다. 친지가 고리 원자력발전소에 근무하는 사람이 있는데 원전 비밀을 갖다주었다고 뒤집어씌우더니 간첩으로 둔갑시켰습니다. 일단 누구라도 걸리면 간첩이 될 때까지 고문하는 겁니다.”
“행정부하고 사법부하고 공범이 되어가지고 국민을 잡아다 고문하고 빨갱이 만들어 간첩 둔갑시키고 세상에 이런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자유와 민주주의 하는데 뭐가 자유고 뭐가 민주주의인지 나는 모르겠습니다. 그런 짓을 한 인간들은 자손 대대로 저주를 받을 것이오.”
신 씨는 ‘밤중에 영도다리 끌고가 빠뜨려 죽이겠다’, ‘너 하나 죽어도 몇 글자 진단서면 끝난다’는 협박을 수없이 들었다. 그 무렵엔 재판을 할 때도 중앙정보부나 안기부에서 온 쪽지가 돌았다고 사회자가 설명을 덧붙였다. 쪽지에는 형량이 이미 쓰여져 있었고, 재판부는 그대로 판결할 수밖에 없었다. 정치권력으로부터 전혀 독립하지 못한 사법부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원혜 씨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사건으로 90년부터 92년까지 2년간 복역한 이원혜 씨는 결혼을 한지 열흘 만인 90년 11월 13일 남산 안기부로 끌려갔다. 당시 활성화되기 시작했던 지역 노동자 문학조직들을 규합해 다양한 창작활동을 벌인 노동해방문학실에서 활동한 이 씨는 ‘내부적으로는 사노맹과 연관이 있었지만 그렇게 빨리 조직사건이 터질 줄은 몰랐다’고 한다.
△고통을 당하던 순간을 떠올리며 눈물짓는 이원혜 씨 ⓒ민중의소리 김철수 기자
“안기부에 들어갈 때는 우선 차 바닥에 고개가 닿을 정도로 숙이게 해서 주변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들어가면 군복 상의를 입혀 사람을 주눅들게 만들지요. 3일 안에 구속영장이 떨어지지 않으면 석방되기 때문에 묵비권으로 일관했지요. 저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하기 위한 진술서를 보니까 3, 4장밖에 안 되는 짧은 진술서에 여러 개의 질문들이 쓰여 있고 질문의 답변란에는 대부분 ‘묵비권을 행사함’, ‘대답을 거부함’ 이라고 쓰여있었어요. 그때는 순진한 생각에 과연 이것 가지고 구속영장이 나올까 생각했는데 구속영장이 발부되더군요. 그걸 보니 국가보안법을 운용하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겠구나 싶었지요.”
뺨을 여러 차례 맞고, 쓰러지면 발로 짓밟혔다. 집이 압수수색을 당했는데, 이 씨는 ‘집을 몽땅 들고 온 줄 알았다’고 한다. 심지어 남편과 주고받았던 극히 사적인 편지, 일기장도 있었다.
“하나하나 읽으면서 조롱과 멸시를 해댔습니다. 차라리 맞는 것은 참을 수 있었지만 인간적으로 참기 어려운 모멸감을 느꼈습니다. 잠을 안 재우고 사흘간 세워 두길래 나중엔 야전 침대에 가서 누웠더니 침대를 부수어 버리더군요.”
잠을 재우지 않고 사흘간 심문할 경우 정신분열증에 걸릴 확률이 70%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잠을 안 재우는 것은 고문도 아니라고 생각할 정도로 우리 나라에서는 고문이 일상화되어 버렸다.
고문도 고문이지만 상대 수사관은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모두 알고 있는데 나는 그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는 ‘익명성’이야말로 사람을 주눅들게 하는 것이라고 사회자는 설명을 덧붙였다. 심지어 수사관들은 심문 대상자가 들을까봐 서로 이름조차 절대 부르지 않는다.
“더러 인상착의를 기억했다가 고발을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공안기관이 누가 그걸 찾아주겠습니까.”
김삼석 씨
△김삼석 씨 ⓒ민중의소리 김철수 기자
반핵평화운동연합 정책실 연구원, 태평양 전쟁희생자 유족회 사무장, 범민족대회추진본부 일본문제 대책위원회 간사를 역임한 김삼석 씨는 1993년 9월 8일 오후 1시경 집에서 안기부 수사관 10여명에 의해 구타당하면서 연행되었다.
백흥룡이라는 안기부 프락치가 김 씨와 여동생 김은주 씨에게 의도적으로 접근, 북한 자료를 주는 척 하면서 소위 ‘함정수사’를 벌여 ‘남매간첩단’을 만들었던 것이다.
“저 한 사람에 대해 17명의 수사관이 붙었습니다. 때리고, 고문하고, 온갖 성적인 모욕감과 욕설에 ‘이제 햇볕은 다 봤다’, ‘죽어서나 여기서 나갈 것이다’는 말들을 들었죠.”
화장실에 갈 때는 수사관이 따라오곤 했는데, 한번은 화장실에서 샤워를 하려고 옷을 벗으니까 한 수사관이 와서 성기에 칫솔을 대면서 “칫솔하고 어떤 게 더 큰지 한번 대보자”라는 둥 성고문에 가까운 짓을 해댔다.
“11년 전 사건이지만 얼굴이며 몸짓이며 말투를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160번 명찰을 달고 있었고, 얼굴도 야시시하게 생겼어요.”
자신이 당한 고문들을 고발하기 위해 그는 죽을 결심을 했다. 전에 그 같은 경험이 없었던 그는 그 이상 다른 것을 생각해낼 수가 없었다. 변호사가 접견 온 자리에서 그는 혀를 깨물고 콘크리트 벽에 세게 부딪혔다.
“혀에는 충격이 안가고 목과 꼬리뼈가 휘어졌습니다. 깁스를 하고 엉덩이에는 쿠션을 여러 개 대고 앉아 수사를 계속 받았죠. 나는 몸으로 때워도 된다고 생각했지만, 옆방에서 여동생도 똑같은 일을 겪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정말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그를 그같은 고통에 빠뜨린 안기부 프락치 백흥룡은 94년 독일에서 자신이 프락치였다고 양심선언을 했다. 그는 2년 동안 안기부 돈을 받고 활동을 하면서 ‘한국 정보부 뒤에는 미국 CIA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99%는 CIA가 지시하고 조작한 것이더라고 말했다. 미행을 알아차리는 방법 등 교육받는 교본도 모두 CIA에서 나온 것이었다고 회고했다.
사노맹 사건 등을 변론했던 박연철 변호사(대한변협 인권위원)는 “오늘 증언을 들으니 우리는 모두 허수아비였던 것 같다. 검사도 허수아비, 판사도 허수아비, 변호사도 장식품에 지나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백발이 성성한 한 할머니 청중은 “오늘 이 자리에 와 보니 가슴아프면서도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조봉암 사건을 비롯해 한국 현대사를 돌아보면 사법부의 잘못이 얼마나 많았나. 한국 사법부가 그 동안 재판에서 저질러온 과오를 밝히는 자리를 더 많이 만들었으면 한다”고 소회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