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시의 대명사, 시인 박재삼(1)
시인 박재삼(朴在森, 1933- 1997)은 삼천포 시인이다. 그냥 그렇게 부를 수 있다. 일본 도꾜에서 태어나 삼천포로 와 성장하고 서울에서 살다가 돌아갔다. 그는 김소월에서 출발하여 김영랑, 서정주로 이어지는 한국 전통 서정시의 맥을 잇고 있는 귀중한 시인이다.
그의 유년시절은 아픔과 눈물이 범벅이 된 시련의 연속이었다. 삼천포 앞바다의 품팔이꾼 아버지와 생선장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중학교도 늦게 야간을 다녀야 했고 어렵게 삼천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대학 진학을 못하고 나중 월간 '현대문학'에 취업을 한 뒤 고려대학교 국문과에 입학을 했다.
박재삼은 1949년 제1회 영남예술제(개천예술제) 백일장에서 시를 쓴 이형기가 장원을 할 때 시조를 써서 차상에 올랐다. 그리하여 이형기와 박재삼은 개천예술제가 낳은 간판 스타로 개천예술제의 전통과 수준을 아우르는 이름으로 남게 되었다.
그는 1953년 월간 '문예'(주간 모윤숙)에 시 <강물에서>가 첫추천이 되고 1955년 월간 '현대문학'에 시 <섭리>, <정적>이 추천됨으로써 등단하게 되었다. 그의 시는 서정주와 유치환이 서로 반해 추천을 다툴 만큼 뛰어났다. 전통적 가락에 향토서정과 서민의 고달픔을 노래했고 ' 한국적 한(恨)을 아름답게 표현한 시인', '슬픔의 연금술사'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의 <추억에서>라는 시는 어머니의 고달픈 삶을 노래했다. 진주장터 생어물전에 좌판을 놓고 삼천포에서 이른 새벽에 버스를 타고 가져간 생어물을 파는 모습은 한(恨) 그 자체로 드러난다.
"진주장터 생漁物전에는/ 바닷밑이 깔리는 해다진 어스름을/ 울엄매의 장사 끝에 남은 고기 몇 마리의/ 빛 發하는 눈깔들이 속절없이 /銀錢만큼 손 안닿는 恨이던가/울엄매야 울엄매,// 별밭은 또 그리 멀리/ 우리 오누이의 머리 맞댄 골방안 되어/ 손 시리게 떨던가 손 시리게 떨던가"
하루 내내 팔아봤자 고기 몇 마리 남고 고기 눈깔은 은전처럼 빛나지만 손 닿지 않는 은전이라는 것이다. 삼천포에서 신새벽에 나서고 별빛 보면서 삼천포로 돌아가는 동안 냉방에서 오누이는 머리 맞댄 채 손 시린 하루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박재삼의 추억은 참으로 시린 추억이고 궁핍한 세월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다른 친구들은 다 중학교로 가고 난 뒤 홀로 노산공원에 올라가 중학교 운동장을 내려다보면서 한없이 눈물 흘리고 또 흘렸다. 그러나 그것도 주린 배를 움켜 잡고 있는 동안 사치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박재삼은 일본 도꾜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삼천포로 나와 유명한 횟집 '미찌집'아래채에 세들어 살았으니까 회는 그래도 입맛을 보았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도 상황일 뿐 실제로 식구들의 주린 배는 미찌집과는 상관없이 크나큰 현안문제였다.
초등학교 시절 이야기다. 형 박봉삼이 하월여관 심부름꾼이었는데 여관 손님들이 빵이나 과자 부스러기를 남기고 가면 그것들을 종이에 싸가지고 두었다가 박재삼이 여관 앞을 지나가면 밖으로 던져 주었다. 허기를 채우는 데는 여관 심부름꾼노릇 하는 것이 제일로 좋았던 셈이다.
그 시절은 전쟁이 훑고 지나간 참이어서 누구 할 것 없이 가난으로 살았겠지만 밑바탕이 없는 귀환 동포였던 부모님은 맨주먹으로 열악한 남해안 작은 도시의 바닥 인생을 살아갔었다. 그러니까 거제나 부산 앞바다로 상륙해온 북한 탈출민들의 맨주먹 인생과 별반 다를 게 없었던 것이다.
박재삼의 시에는 그래서 눈물이 많고 울음이 많다. 대표작인 <울음이 타는 가을강>도 강을 보면서 시인이 먼저 울고 있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 강이 울고 그런 다음에 이웃들이 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