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카페 ‘천헌재’에 우리들 이야기는 문중역사의 기록이며, 회원들의 이야기 공간이기도 하
다. 그리고 나의 이야기도 되며, 뭇사람들과 공유하고 있으니, 내 몸을 꼬집어보고 남의 아픔
을 아는 인정에서 출발하였다. 그 인정을 잘 씹어본 삶은 덕이 되어 서로 납득할 수 있는 약
속이 전제되어 오늘에 이르렀으며, 때론 심파적 요소가 가미되어 있었고, 글 쓰는 이의 마음
이 전해지길를 바람도 있었다.
몇 년을 벼루다 작년에 비로소 서실書室에 등록했다. 일필지휘로 세상을 그리고 싶었고 어느
정도 자신감에서 시작되었지만 기초부터 많은 괴리가 생겨 낙심할 때도 있었다. 서예란 먹과
종이의 교감으로 작품이 완성된다. 아마도 붓을 잡아본 사람은 얼마나 예민한 존재인지 경험
한다. 붓의 완급 조절, 강약에 따라 종이는 완연히 달라지듯 움직이는 속도에 지면은 변화되
고 먹의 농도, 화선지 종류의 차이 등에 따라 쓰고자 하는 글자의 표현에 현격한 차이가 난
다. 가장 중요한 것은 능숙함이다. 더 오래 일한사람일수록 자신의 일을 사랑한다. 달리기든
글쓰기든 춤이든 능숙해질 만큼 반복해서 연습하는 것이 만족도를 끌어올리는 지름길이다.
기해년과 경자년의 갈림길에서 매서운 겨울 한파가 지나갔다. 요즈음은 모든 것이 미쳐가고
가파르게 돌고 있다. 이런 때는 조심하지 않으면 건강을 해치는 법이다. 그러나 세상사를 푸
념을 하며 마음을 다잡아 보지만 그리 만만치 않다. 일찌감치 은퇴한 합천 오도산친구는 가을
이 접어드는 길목에서 힘없이 무너졌고, 이제 외롭게 서있는 나무의 앙상한 가지가 더욱 아프
게 다가온다. 그러나 종조모께선 올해 백세가 되신다. 누구는 천명을 따라가지만 할머니의 생
명의 나무는 아직 수를 누리고 있다. 작년에 막둥이까지 성혼成婚시키고 이제 모든 것이 정리
되었다고 방심하던 차에 시련이 닥쳤다. 인간의 연상이란 항상 자기가 편리한 희망으로 연결
되지만 이는 너무나도 마음먹은 것과 다른 결과가 되었으며,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고 경계
를 삼아야할 때인 것 같다. 그리고 살아가면서 아직도 성찰하지 못했다고 자조한다.
인간의 머리 위에는 항상 운명과 숙명 그리고 천명의 세 가지가 작용하고 있다. 사람이 자
유롭게 움직일 때까지가 운명이라 한다면 이 운명은 그 사람의 의지로 개척할 수 있고 쌓아
올릴 수도 있지만 그 바탕 속에서 가로막혀 움직일 수 없을 때가 숙명이 아닐까? 바로 그 다
음이 천명이 있다. 이렇게 살아오고 있는 것은 하늘의 명이다. 인간은 인간의 힘으로선 어떻
게 바꿀 수 없는 천명이 있다는 걸 염두에 두어야한다. 깨 닫았을 때, 비로소 자기를 활용하
며 돌아볼 수 있다. 내 천명이 무엇이냐? 천명은 자기에게 과해진 사명이기도 하다. 이걸 깨
닫지 못할 동안은 움직여도 헛일이며, 숙명의 테두리 안에서의 발버둥 이외는 아무 것도 아니
었다.
사람의 행복을 산산이 부숴 버리는 것은, 천지를 울리는 큰 사건보다도 때론 지극히 작은
손끝에 박힌 가시가 많다. 살아보니 옳은 일로 충돌해서 좋은 경우가 있다면, 양보하는 편이
옳은 경우도 있다. 사람 저마다의 뜻하는 바도 마찬가지다. 대비책이 졸렬한 계책이 되고, 언
젠가는 무책이 도리어 상책이 될 때도 있다. 세상에는 현격한 차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이
현격한 차이 정도라면, 때에 따라 져야할 자가 이기기도 하고 이겨야할 자가 뒤바뀌는 일도
곧잘 있다. 막상 어떤 일을 하다보면 이것도 모자라고 저것도 모자라고…. 부족된 것이 아직
도 남아 있을듯한데, 불투명하면 허락된 공간의 등불을 더 살려야 된다. 사물에는 모두 중심
이 있다. 과일에 씨가 있듯이, 문중도 후학後學을 단단히 파악하고 후계자의 양성, 이것을 자
칫 소홀하기 쉽다. 이제 와서 자칫 소홀하게 느낀 한 가지가 이거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