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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정치는 낭비 행정 돌파력에 강한신념
박정희 (朴正熙) 대통령은 스스로를 정치인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가족모임에서 누가 정치얘기라도 꺼낼라치면 말을 막으면서 하던 얘기가 있다. "나는 행정가지 정치가가 아니야. 정치전문가는 저기 있네. " 정치전문가란 처남 육인수 (陸寅修.78) 전의원이다. 朴대통령은 71년 3선개헌 반대시위가 한창이던 무렵 선우련 (鮮于煉.작고) 공보비서관과 저녁을 같이 하는 자리에서 불편한 심기를 토로했다. "강한 행정력을 구사해야만 현실정에서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인데, 반체제인사들은 이를 독재라고 부르더구먼. " 박정희는 스스로 행정가라 생각했다. 경제성장과 조국 근대화를 위해 강한 행정력이 필요하다고 확신했으며, 행정의 효율성을 위해 일사불란한 질서유지를 강조했던 것이다. 朴대통령은 정리.정돈이 몸에 밴 사람이다. 그는 가끔 아들 지만 (志晩) 군의 방에 들러 "정돈 좀 해" 라며 꾸짖었고, 비서관들에게도 "군대에서 내무사열도 안받았나" 라며 호통치곤 했다. 일본식 교육의 결과일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강력한 행정력 구사는 국가발전에 필수적인 것이며 결코 '독재' 가 아니었다. 반대세력은 졸지에 '질서 파괴자' , 나아가 '반국가.반체제적 인물' 로 규정됐다. 이같은 사고방식은 집권 18년간 내내 지속됐다. 박정희는 구시대적 정치에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63년 3월 민정이양 준비를 하던 김재춘 (金在春.70) 중앙정보부장은 박정희로부터 민간에 정부를 이양할 수 없는 이유를 듣게 됐다. "임자, 거 야당에 (정권을) 넘기자고 했는데 (정치정화법을) 풀자마자 난동을 부리잖아. 정권 넘겨줘서 (야당 정치인들이) 할 수 있을 것같아?" 박정희의 눈엔 야당의 이합집산과 권력다툼이 '난동' 으로 비쳤다는 얘기다. 70년대 청와대비서관이었던 권숙정 (權肅正.61) 씨가 들었던 박정희의 야당관 (觀) . "구정치는 청산해야 할 봉건잔재다. 민주주의 한다고 해놓고 내면에서는 파벌 보스가 봉건지주처럼 자기 지분을 가지고 이해를 흥정한다. 야당은 봉건지주모임이나 마찬가지다. 조국의 근대화를 이루려는 세력이 5.16혁명세력, 10월유신세력이다. " 중정 국내 정치분야에서 오래 근무했던 C씨는 "朴대통령은 특히 돈을 요구하는 야당 정치인을 혐오했다" 며 "선명야당을 주장하며 정부를 욕하던 사람이 뒤로는 법안통과의 대가로 돈을 받아갔다는 보고를 듣고는 처음엔 어이없어 하기도 했다" 고 기억했다. 그러나 타락한 정치상에 분개했던 박정희는 얼마후 그 생리를 역이용하는 마키아벨리스트로 변한다. 65년 11월 朴대통령은 꼬장꼬장했던 원로변호사 정구영 (鄭求瑛.작고) 공화당의장을 놀라게 한 적이 있다. 국회의장선거에서 여당의 반란표에도 불구하고 야당쪽 38명이 이효상 (李孝祥.작고) 씨를 밀어 李씨가 의장이 된 무렵이다. "그까짓 40표도 안되는 야당의원 쯤이야 제 편으로 끄는 방법이 있지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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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권 2년여만에 야당을 낭중지물 (囊中之物.주머니 속의 물건) 처럼 요리하게 됐다는 얘기다. C씨는 "야당 거물은 정보부장이 직접 줬고, 비중이 낮은 의원은 남산 (정보부) 으로 불러 주기도 했다. 남산에서 부르면 안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고 증언했다. 돈으로 안될 경우 朴대통령은 철권 (鐵拳) 을 휘두르는 것도 불사했다. 72년 유신직전 밀실개헌작업을 폭로했던 대가로 보안사에 끌려가 온갖 고문을 당한 최형우 (崔炯佑.62) 의원이 대표적인 경우다. 박정희는 아이로니컬하게도 '민주주의의 꽃' 인 선거를 '혼란의 정점' 으로 간주했다. 71년 4월25일 서울장충동에서 대통령선거의 마지막 군중연설을 마치고 청와대로 돌아온 박정희가 유혁인 (柳赫仁.63.종합유선방송위원장) 정무비서관에게 한 말. "이거 무서워 안되겠어. 수십만명이 모이는데 간첩이 순사옷 입고 들어와 총이라도 한 방 쏘면 나라 뒤집어지게 생겼어. " 청와대의 유신개헌 담당자였던 柳씨는 이같은 대통령의 무질서 혐오증이 "간접선거방식 (유신) 을 택한 이유 중 하나" 라고 설명했다. 시종일관 부정적이었던 야당관과는 달리 학생운동에 대한 朴대통령의 시각은 처음과 끝이 달랐다. 장기집권의 동맥경화증처럼 시간과 함께 점차 강경해져 갔다. 60년 4월25일 4.19 희생자 위령제가 부산 동래 범어사에서 열렸다. 4.19 직후였지만 이승만 (李承晩) 대통령이 하야하기 전이었기에 당시 공직자들은 학생들을 '폭도' 라고 부르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지역 계엄사령관인 박정희 장군은 이날 비장한 애도사로 참석자들의 귀를 의심케 했다. "이 나라 진정한 민주주의의 초석을 위해 꽃다운 생명을 버린 젊은 학도들이여, 여러분의 애통한 희생은 바로 무능하고 무기력한 선배들의 책임인 바 나도 여러분 선배의 한 사람으로서 오늘 같은 비통한 순간을 맞아 뼈아픈 회한을 느끼는 바입니다. " 4.19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던 탓인지 64년 한.일회담 반대시위 당시 박정희는 학생대표들을 청와대로 불러 직접 의견을 듣는 한편 시위가 극에 달했던 3월25일엔 "평화적 시위는 허용한다" 는 유연한 자세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유신이 준비되던 71년 10월 박정희는 과거와 다른 모습을 보였다. 국방과학기술원 준공식에 참석하기 위해 신설동을 지나 안암동 쪽으로 접어들던 朴대통령 일행은 시위중이던 서울대 사범대 학생들과 마주쳤다. 시위현장을 빨리 지나치기 위해 차가 막 속력을 내려는데 朴대통령이 소리를 질렀다. "차 세워. " 차가 멈추자 朴대통령은 차밖으로 나와 돌이 날아오는 와중에도 고개를 빳빳이 들고 시위대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경호원들이 대통령을 에워싸고 경찰들이 다시 겹을 이뤄 다가가자 학생들이 모두 흩어졌다. 대통령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대학구내 학생처 사무실까지 들어갔다. 학교 관계자들에게 "학생지도 똑바로 하라" 고 질책하고는 경호원들에게 "손에 흙 묻은 놈들 다 잡아 넣어" 라고 외쳤다. 이날 동대문경찰서로 잡혀간 1백여명의 학생들은 단단히 기합을 받고 풀려났다. 유신이후 그의 태도는 더욱 강경해진다. 朴대통령은 74년 '유신헌법에 반대하면 최고 15년의 징역' 을 내리는 긴급조치를 공포했다. 백기완 (白基玩.64) 씨와 같은 재야인사, 이호철 (李浩哲.65) 씨와 같은 문인들이 먼저 잡혀들어갔다. 곧이어 발표된 긴급조치 4호는 전국적 학생운동조직인 '민청학련 (민주청년학생총연맹)' 을 겨냥한 초강경 조치. '민청학련이나 관련단체를 조직.고무.찬양.동조하거나, 대학생이 출석.수업.시험을 거부하거나, 집회.시위.성토.농성하거나 이 조치를 비방하는 자는 최고 사형까지 처할 수 있다' 는 내용이다. 당시 민청학련 의장으로 고등학생 교복을 입고 도망다니다 붙잡혀 사형선고까지 받은 사람이 이철 (李哲.49) 전의원이다. 이런 태도는 박정희식 민주주의관 때문에 가능했다. 유신 직후 중정국장을 지낸 ×씨는 朴대통령의 자랑을 들은 적이 있다. "우리 이 정도면 민주주의 잘 하고 있는 거야. 세계에서 민주주의 하는 나라 얼마나 돼. 18개 나라 뿐이야. " 대통령은 일일이 18개국을 손가락으로 다 꼽은 뒤 '동양에서는 일본뿐' 임을 강조했다. 권숙정씨는 "대통령을 포함해 당시 청와대에 근무하던 사람들은 '이렇게 10년만 노력하면 일본을 따라잡을 수 있다' 는 열의와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고 한다. '일본수준의 경제적 부 (富) 를 축적할 때까지 민주주의는 유보한다' 는 개발독재 논리다. 동시에 우리는 우리 수준에 맞는 민주주의, 즉 '한국적 민주주의' 를 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인권문제도 마찬가지다. 그는 인권정책에 대한 비판의 소리에 "굶어 죽는 사람한테 인권은 무슨…. 백성이 굶지 않게 하는 것이 최고의 인권정책이야" 라고 외쳤다. 그래서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이 방한해 '인권' '양심수' 운운할 때도 박정희는 "한국에 그런 문제는 없다" 고 잘라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김종필 (金鍾泌.JP) 전자민련총재는 이같은 박정희의 확신에 대해 "아무 것도 없던 나라를 점차 부강한 나라로 만들면서 재미도 느끼고 보람도 있었을 것이고, 그러다보니 자신도 생긴 것" 이라고 해석했다.v 그러나 JP와 같이 공화당을 만들었던 육사 동기생 강성원 (康誠元.69.성원목장 경영) 씨는 "혁명한 사람은 일단 목숨 걸고 시작하니까 독재하게 마련" 이라고 단정했다.
44.장기집권의 마감
74년 8.15 기념식장에서 문세광 (文世光) 의 흉탄에 육영수 (陸英修) 여사가 숨진 사건을 본 이건개 (李健介.56.현 자민련의원) 당시 치안본부1부장은 "국운에 마 (魔)가 끼었다" 고 한탄했다. 陸여사 죽음은 '박정희 말기' 의 시작이었다. 陸여사 서거는 절대권력자 박정희 (朴正熙) 대통령의 몸과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박정희의 흔들리는 마음은 陸여사 사후 1년이 지난 75년 8월19일 대통령의 일기에 남아 있다. '작년 8월19일, 나의 사랑하는 아내를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유택으로 떠나보내고 마지막 작별을 하던 날이다. 벌써 1년이 갔구나. 정든 청와대를 마지막 떠나며 한마디 인사도 없이, 한번 뒤돌아보지도 않고…. ' 그 며칠 뒤, 6.25 당시 박정희중령 집에 기식한 이래 朴대통령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봐온 김용태 (金龍泰.71) 의원은 달라진 대통령을 보았다. 포항제철로 가는 길에 대통령차에 동승했다. "가을이 다가와서 그런지 자꾸만 옛일들이 머리에 떠오르는구먼. "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면서 대통령은 옛 얘기를 했다. 그러다가 던진 한마디. "자네나 나나 정치 부적격자 (不適格者) 인지 몰라. 자네는 경성사범, 나는 대구사범 (경북사대 전신) 출신이니까. 훈장노릇이나 할 것을…. 80년에는 나도 대구로 내려가 훈장노릇이나 해야겠어. " 7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朴대통령은 수시로 '그만둬야겠다' 는 얘기를 했다. 79년에는 신직수 (申稙秀.70) 전법무장관을 법률특보로 임명해 유신헌법 개정을 검토하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10.26이 일어나기까지 구체적인 은퇴 움직임은 없었다. 흔들리는 정신에 육체적인 피로도 겹쳤다. 호주호색 (好酒好色) 하는 대통령을 견제했던 유일한 브레이크 陸여사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陸여사는 평생 남편의 이런 기질과 싸웠다. 술을 같이 마신 사람을 따로 불러 경고를 주기도 하고, 담배를 줄이게 하려고 매일 일정량을 '배급' 하기도 했으며, 외도 소식에는 부부싸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월평균 10회 가량 연회 김용태의원이 대통령과 함께 포철에 들렀다가 숙소인 울산 현대중공업 영빈관에 도착했을 때 젊은 아가씨들의 영접을 받았다. 서울의 유명 요정에 있던 아가씨들이 단체로 출장온 것이다. 박정희는 이날 많은 술을 마셨다. 10.26 재판과정에서 김재규 (金載圭.사형) 정보부장과 대통령의 밤 행사를 담당했던 박선호 (朴善浩.사형) 의전과장이 진술한 내용에 따르면 궁정동과 같은 대통령전용 비밀연회장은 모두 5곳, 연회는 월평균 10회 정도 열렸다. 쓸쓸한 노구 (老軀) 로 폭음하곤 몸을 못가누는 일이 잦아졌다. 10.26 수사관계자는 "대통령의 그런 모습을 본 김재규나 박선호는 대통령에 대한 경외감을 잃어갔을 것이고, 절대권력자에게 총을 겨누는 심리적 원인이 됐을 것" 이라고 말했다. 더 큰 문제는 흔들리는 몸과 마음이 국정에 직접 미치는 영향이다. 박정희 특유의 탁월한 용인술이 무뎌진 것이다. 무뎌진 인사는 사정 (私情)에 얽매였다. 중앙정보부 출신 K씨는 "나이가 들고 마음이 허해지니까 자꾸만 의심이 많아지고, 그러다 보니까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가까운 사람만 찾게 됐다" 고 해석했다. 물리적으로 대통령과 가장 가까운 사람은 차지철 (車智澈) 경호실장이다. 74년 박종규 (朴鐘圭) 실장 후임으로 그를 추천한 사람은 많다. 김정렴 (金正濂.73) 비서실장은 '5.16 동지요 경호실차장을 지냈고, 국회의원에 정치학 박사학위까지 받고, 성실한 기독교인' 이었기에 車씨를 추천했다. 74년 당시 車씨는 경호실장으로 적임자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車실장은 월권하기 시작했다. 金실장은 "78년께부터 車실장이 무리한 일을 벌이기 시작했다" 고 말한다. 자유당시절 헌병감을 지낸 이규광 (李圭光.72) 씨를 비밀리에 기용해 사설정보대를 운용하면서 정치에 본격 개입했고, 경호실 연병장에서 탱크까지 동원한 열병식을 하면서 유명인사들을 초대해 세 (勢) 를 과시했다. 통상 대통령이 아침에 집무실에 도착하면 먼저 비서실장이 보고한 뒤 대통령의 지시를 관계부처에 전해준다. 비서실장 보고와 동시에 정보부의 일일보고가 대통령 책상 위에 올라가 있다. 그런데 車실장은 이러한 권력의 위계질서를 파괴했다. 아침에 대통령이 출근하기 기다렸다가 비서실장보다 먼저 들어가 보고했다. 당연히 대통령은 車실장으로부터 첫 보고를 받고 필요한 지시를 내린다. 자연스럽게 '각하의 뜻' 을 전하는 권세는 車실장의 몫이 되고, 비서실장이나 정보부장의 보고는 구문 (舊文) 으로 대통령의 관심을 끌지 못하게 된다. 車실장의 월권은 78년말 김계원 (金桂元.74) 비서실장이 취임하면서 일상화됐다. 金씨를 비서실장으로 중용한 것은 朴대통령의 말기 용인술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金씨가 비서실장직을 고사하자 朴대통령은 "일은 안해도 돼. 나하고 말동무만 하면 돼" 라며 그를 그 자리에 앉혔다. 일하는 참모보다 같이 술마실 말동무가 필요했던 것이다. 車실장의 권력이 커지면서 김재규정보부장도 '각하의 뜻' 을 받들기 위해 경호실장의 방을 찾아야 했다. 공직으로도 엄연히 높은 서열이고, 군경력으로 말하자면 하늘과 땅 차이인 장군 (김계원대장.김재규중장) 들이 공수단 대위 출신에게 밀린 것이다. 심각한 갈등상을 알면서 방치한 것은 박정희답지 않다. 김계원비서실장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車실장과 金부장간의 알력을 얘기했지만 대통령은 "다 나를 위해 충성하려는 것" 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사실 朴대통령은 늘 그렇게 2인자들의 충성경쟁을 유도하고 또 즐겨왔다. 그런데 문제는 박정희 자신이 그런 경쟁과 알력을 적절히 조절할 수 있는 예민한 감각을 상실해가고 있었다는 점이다. 사사로운 정에 흔들렸던 박정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는 최태민 (崔太敏.작고) 이라는 괴목사의 등장이다. 큰딸 근혜 (槿惠.45) 씨에게 접근한 崔목사는 순경 출신으로 한때는 불가에 입문했다가 목사로 변신한 미스터리의 인물. 그는 75년 구국선교단.구국봉사단이란 조직을 만들어 자신은 총재, 근혜씨는 명예총재로 앉혀 놓고 각종 이권에 개입하는 등 말썽을 빚었다. 77년 9월 대통령이 崔목사의 비리를 수사해온 金정보부장과 崔목사를 직접 대면시켜 놓고 '친국' (親鞫.임금이 직접 신문하는 일) 까지 했으나 문제는 해소되지 않았다. 며칠 후 朴대통령은 선우련 (鮮于煉.작고) 비서관에게 '근혜 곁에 崔목사를 얼씬도 못하게 하라' 고 특명을 내렸다. 그러나 근혜씨가 崔목사를 옹호하고 나서자 鮮于비서관은 다시 대통령에게 이를 보고했다. 그제서야 대통령은 심중을 털어놓았다. "근혜가 엄마도 없는데 일까지 중단시켜서 가엾기도 하고, 나도 마음이 아프고…. " 결국 그렇게 崔목사건은 흐지부지되고 10.26이후 전두환 (全斗煥.66.전대통령) 합수본부장이 崔씨를 강제로 강원도로 쫓아낼 때까지 그의 활동은 계속됐다. ◇大義보다 私情에 흔들려 이러한 권력말기의 피로증후군이 집중된 곳은 정보부장 자리였다. 마침 김재규부장은 18년간 쌓인 절대권력의 내홍 (內訌) 이 터져나오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기도 했다. 金부장의 재임시절 정보부 간부였던 Z씨는 "金부장은 유신하에서 정보부는 국정의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한다는 사명의식을 갖고 있었다. 공무원을 일하게 채찍질하고, 사회질서를 바로잡고, 심지어 야당이나 언론과 같이 권력을 비판하는 역할까지 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고 말했다. 金부장의 이같은 소명의식은 분명 남다른 스트레스였을 것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정권의 방패 金부장 역시 막중한 소명을 다하기에는 정신적.육체적으로 너무나 불안정한 인물이었다. 육체적으로 그는 간경화증이 심각한 상태였다. 정서적으로 그는 79년 김영삼 (金泳三) 신민당총재의 의원직 제명에 항의해 일어난 부마 (釜馬) 시위사태 현장을 찾아가 "인명피해 없도록 하라" 고 지시하면서도 YH여공의 신민당사 농성 당시에는 경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경진압을 지시해 여공 1명의 목숨을 희생시키기도 했다. 결국 절대권력의 쌓인 피로는 권력의 가장 핵심이자 가장 약한 고리였던 김재규에 의해 10.26으로 끝을 맺었다. 비록 총을 쏜 것은 김재규지만 총을 쏘게 만든 것은 18년의 장기집권에 지친 박정희 자신이었다. 시대의 흐름이, 국민의 뜻이, 하늘의 의지가 그를 절대권좌에서 끌어내린 것이다.
45.박정희 신드롬 촉발 '핵개발'은 큰발굴
지난 7월10일부터 6개월 동안 독자들의 뜨거운 관심과 성원 속에 연재돼온 '실록 박정희시대' 가 29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여러가지 사정으로 미처 못다한 얘기들을 취재기자 방담으로 엮는다. 편집자 - 박정희시대는 지금까지 숨쉬고 있는, 살아있는 오늘의 얘기입니다. 당사자들이 아직 살아있고 그들의 이해관계도 아직까지 얽혀있어 취재에 어려움이 적지 않았지요. - 박정희 사후 18년이 흐르는 동안 상당수 증언자들이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사실을 왜곡해 왔고 이것이 '사실 (史實)' 처럼 굳어져 있는 대목도 적지 않았습니다. 어떤 증언자는 당시 경제발전의 공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 했고, 다른 사람들의 업적을 비하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여러 경로로 검증해 보면 사실이 아닌데도 말이죠. - 당시의 주인공들중 일부는 이미 타계했고 생존자도 거의 70대 이상의 고령이었습니다. 증언을 채취하는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다는 점 때문에 끝까지 긴장을 풀 수 없었습니다. - 철저한 검증을 통해 박정희시대를 오늘의 시점에서 자리매김하자는 것이 기획의도였죠. 취재과정에서 절실히 느낀 것이지만 한국 현대사의 주역들중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박정희만큼 논의가치를 지닌 인물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역대 대통령중 '공과 (功過) 를 논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 박정희' 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습니다. - 그의 경제개발에 대한 열정,치밀한 사후관리, 국가발전에 대한 비전과 추진력,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한 끝없는 학습태도 등은 감탄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한 전직 장관은 "박정희를 좋아하는 기자.국민 수가 또 늘어나게 됐다" 고 하더군요. 박정희를 연구하다 보면 모두 그의 매력에 빠진다는 거예요. 하기야 박정희대통령이 기용했던 인물들은 대부분 지금까지 박정희를 못잊어 하더군요. - 인간적 향기 때문이겠지요. 인터뷰 도중 눈물을 쏟는 증언자들이 숱했고 김두영 (金斗永) 전청와대비서관은 "朴대통령을 모신 것은 가문의 영광" 이라고까지 말하더군요. - 육사11기 선두주자였던 손영길 (孫永吉) 씨를 보세요. 육참총장감으로 촉망받다 '윤필용사건' 때 버림받아 강제예편은 물론 옥고까지 치렀는데도 "그전까지 각하께서 잘 보살펴주신 것만 고맙게 간직하고 있다" 는 거예요. - 한국을 연구하는 외국 학자들은 정작 한국에서 박정희를 소홀히 다루는 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박정희 연구가 한국보다 외국에서 더 깊이 진행되고 있는 게 현실 아닙니까. - 말이 나왔으니 얘깁니다만, 대통령에 관한 자료들이 사유물처럼 이사람 저사람에게 흩어져 있는가 하면 그걸 밑천으로 언론사와 흥정하려 드는 사람들까지 있었어요. 최근 대통령사료관을 만들자는 얘기도 나오는데, 체계적 관리시스템이 절실합니다. - 그런 악조건 속에서 풍문으로만 전해진 핵무기 개발의 실체를 캐낸 건 큰 성과였죠. 핵개발 주역들의 면면, 핵폭탄 규모와 투하방식, 개발목표 연도, 예산규모 등을 증언과 도면.자료까지 발굴해 밝혀냈습니다. - 당사자들은 증언은커녕 신분노출조차 극도로 꺼렸지요. 미 중앙정보국 (CIA)에 대한 그들의 공포는 납득하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거듭 찾아갔다가 퇴짜를 맞고는 비상구로 잠입,가까스로 면담에 성공한 경우도 있었죠. 천신만고끝에 얼굴을 마주 대했더니 증언 대신 증언거부 이유를 가득 적은 편지를 들이밀 때는 정말 허탈하더군요. - 국방과학연구소에서 모씨 증언을 들을 때는 보안사 요원 등 군관계자 10여명이 입회하는 등 삼엄한 경계를 폈지요. 사안의 무게를 실감케 하더군요. - 그러면서도 증언자들은 대부분 박정희 사후 핵프로젝트 중단을 못내 아쉬워해요. 미국 눈치 보느라 핵주권을 포기했다며 분통을 터뜨리기도 했습니다. 핵개발 문제는 죽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 진행형일 수 있다는 점을 실감했습니다. - 지금까지 설 (說) 로만 전해지던 박정희의 좌익 연루문제를 당시 재판장 증언과 판결문.공문 등을 입수해 보도한 것도 큰 성과였지요. - 박정희 예찬론자들은 만군시절.좌익연루.정치자금.여성관계 등 어두운 일면들을 들춰낼 때는 "두번 죽일 참이냐" 고 야단이었죠. 업적을 평가할 때는 "정말 고맙다" 는 인사도 많이 들었습니다. - 이 시리즈에 대해 시비도 없지 않았습니다. 특히 진보를 내세우는 학계나 언론에서 "박정희를 일방적으로 미화하거나 찬양하지 말라" 고 윽박지를 때는 어이없더군요. 사실 취재진은 거의다 70년대 대학을 다니면서 반독재투쟁에 가담하는 등 굳이 따지자면 반 (反) 박정희 정서를 갖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 매회 비판적 내용을 담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지만 박정희의 업적에 가려 잘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었겠지요. 물론 우리의 비판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밝히려는 애정있는 비판' 이었던 것은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 학계에서는 '언론이 박정희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를 선도한다' 며 불만이었습니다. 그러나 언론이 증언과 문건 등 기초자료를 모으고 학계는 역사적 평가를 맡는, 일종의 역할분담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지요. - 못내 아쉬운 것은 이후락 (李厚洛) 씨의 증언 거부입니다. 대통령비서실장.중앙정보부장을 지낸 그가 건강악화.해외여행 등을 핑계로 끝내 면담조차 회피하더군요. 10여년전 그가 때가 되면 모든 걸 밝히겠다고 했는데 아직도 못밝히는 데는 '사연' 이 있지 않겠습니까. - 김형욱 (金炯旭) 전 중앙정보부장의 비서실장을 지낸 文모씨는 "할 얘기를 전부 녹음해 외국에 보관하고 있다. 내가 죽은 뒤 공개될 것" 이라며 손을 내저었는데 기대해 보죠. - 참, 연재기간중 '박정희 신드롬' 은 정말 대단했지요. - 역사속으로 사라진 박정희가 현실무대로 뚜벅뚜벅 걸어나온 셈입니다. 책이 언제 나오느냐는 문의전화가 쇄도했습니다. 박정희기념관을 세우자는 단체만도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경찰이 일부 단체에 대해서는 내사를 벌이기도 했어요. - 따지고 보면 박정희 신드롬이 일어날 수 있는 토양은 최초의 문민정부라고 자부하던 김영삼 (金泳三) 정권이 제공한 것이지요. 현정권의 실정 (失政) 이 죽은 박정희를 되살려놓은 셈입니다. - 대선후보들 역시 어쩔 수 없었나 봅니다. 말투.제스처에다 헤어스타일까지 흉내낸 후보도 있었고 아예 "역사는 다시 박정희의 공화당을 부릅니다" 라는 타이틀로 광고를 낸 후보까지 있었습니다. - 그뿐입니까. 박정희시대 수난의 상징이었던 김대중 (金大中) 후보가 선거운동기간중 박정희 생가를 방문해 고개를 숙일 땐 격세지감을 느끼게 했지요. - 각 후보진영의 유족모시기 쟁탈전은 어땠고요. 근혜씨는 결국 한나라당 선대위 고문직을 맡으며 정치시장에 뛰어들었지요. - 베나지르 부토 파키스탄총리, 미얀마 민주화의 기수 아웅산 수지 여사 등이 부친의 후광으로 정치판의 여걸로 성장했는데 박정희 추종자중에는 근혜씨에게 그런 기대를 하는 사람도 있습디다. 과연 그렇게 될지는 미지수지만요. - 그런데 박정희 신드롬이 가져온 부작용은 분명히 있습니다. 21세기를 바라보는 지금 "박정희같은 지도자가 필요하다" 는 주장이 나온다면 시대착오라고 해야겠지요. 그런 발상은 자칫 세계적 대공황의 소용돌이에서 출현한 독일의 히틀러같은 지도자를 만들어낼 소지도 있어요. - 박정희시대에 경제개발이 이뤄졌다고 해서 국제통화기금 (IMF) 의 구제금융을 받는 이 시절에 박정희식 리더십이나 경제구상을 원용한다는 것도 시대착오지요. 한 시대를 풍미했다고 해서 그것이 다른 시대에까지 적용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 그런데 현 경제난의 원인 (遠因) 을 박정희식 개발드라이브의 부산물로 보는 견해도 있잖아요. 정경유착.부정부패.물신주의.관 주도형 경제운용 등은 그때부터 싹텄다는 거죠. 이 역시 지나친 비약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그래요. 지금 경제난국을 박정희경제의 한계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견강부회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부작용은 박정희 이후 시대를 맡은 사람들의 책임이 아닐까요. - 한 외국학자는 "한국은 박정희에 의해 근대화를, 박정희반대자들에 의해 민주화를 이룰 것" 이라고 했는데 김영삼정권에 이어 김대중 국민회의총재가 대통령에 당선됐으니 그 예언이 실현됐다고 할 수 있나요.
- 아무튼 중앙일보의 '실록 박정희 시대' 가 박정희에 대한 객관적 평가작업에 작은 초석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