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용서(마18:21-35)
2020.4.26 김상수목사(안흥교회)
타이타닉이라는 영화에서 배가 침몰하기 직전에 구명보트에 올라탄 사람들이 사력을 다해 밧줄을 끊어내는 장면이 있다. 그 밧줄을 끊어내지 않으면 타이타닉호와 함께 바다 속에 빠지 버리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의 마음을 꽁꽁 묶고 있는 미움과 분노의 밧줄을 끓지 않으면 우리는 행복의 바다로 한걸음도 나갈 수 없다. 오히려 불행의 바다에 함께 빠지고 만다. 특히 내가 피해자의 입장에 있거나 억울하거나 뒤통수 맞은 느낌이 들 때는 더욱 그럴 것이다. 그때 이런 종류의 말들을 많이 하게 된다.
“감히 네가 날 속여. 네가 감히 내 것을?”
“그렇게 안 봤는데, 네가 어떻게 뒤에서 그런 짓을 할 수 있어?”
“괘씸한 놈 내가 지금까지 저에게 어떻게 해줬는데”
“억울해! 억울해! 두고 봐 내가 반드시 복수할거야!”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밥상 뒤엎듯이 다 뒤집어 버리고 칼부림하고 끝내야 할까? 그럴 수는 없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도 사도 베드로가 억울한 피해자의 입장에서 용서에 대해 주님께 질문을 한다.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마18:21-22)
베드로가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한 것을 보면, 어쩌면 그 자신이나 지인들 중에서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이라는 말은 바꿔 말하면 베드로는 피해자고 죄를 범한 형제는 가해자라는 말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자신은 임금에게 많은 빚을 탕감 받았지만, 자신에게 약간의 빚진 또 다른 사람에게는 무자비했던 사람을 응징하시는 비유를 들려주시면서 용서에 대한 가르침을 주셨다(마18:23-35).
그러면 용서는 누가하는 것일까? 가해자인가 피해자인가? 용서는 피해자가 하는 것이다. 가해자는 용서를 구하고 보상해야할 책임이 있을 뿐이다. 그러면 언제까지 용서해야 하는가? 가끔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기는 하지만 한국인들은 삼세판 의식이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웬만한 일에는 한 두 번은 용서해 주는 것 같다. 그러나 반복되는 죄에 대해서는 계속 용서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주님은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했다. 이 말씀은 490번까지만 용서하는 말씀이 아니고, 계속해서 용서하라는 말씀이다.
그러면 주님은 왜 이렇게 끝없이 용서하라고 하실까? 본문을 깊이 묵상해 보면 우리가 피해자 입장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용서하라고 하시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것이 뭔지 32-33절을 함께 읽자.
“3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마18:32-33)
이 말씀에서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해 주었거늘”이라는 말씀과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라는 말씀을 눈여겨보라. 우리가 억울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해야할 이유가 있다면 우리들 자신도 예수님께 용서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오늘 설교의 핵심 포인트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나의 죄 값을 전부 탕감해(=대신 지불해) 주셨다. 그후에도 계속해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했던 베드로를 비롯해서 우리들을 용서해 주시고 계시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의 빚진 자들이 되었다. 사랑의 빚을 갚는 방법은 내가 용서받은 것처럼 주님의 용서사역에 동참하는 것이다. 내가 받은 예수님의 사랑이 용서의 기준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이렇게 말했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4:32)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골3:13)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주님이 이처럼 주님처럼 용서하라는 말씀은 결국 우리들 자신을 위해서다. 주님은 우리들이 억울한 일로 인해 피해를 당했을 때, 그것으로 인해 우리의 영혼이 병들고 불행한 삶을 사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용서를 안 하거나 미루면 그 시간만큼 나의 인생이 불행으로 불타 버린다.

어지러운 전선가닥들을 정리할 때는 사용하는 ‘케이블 타이(Cable Ties)’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한 번 조이면 절단하지 않는 한 조이는 것은 쉬워도 다시 푸는 것이 쉽지 않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들이 용서하지 않고, 분노를 품고 있으면 있을수록 케이블 타이를 한 칸씩 조이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중에는 그 분노의 끈이 자기의 영혼을 병들게 하고 결국은 숨통을 조인다.
그러므로 내가 용서가 잘 안될 때나 참기 어려울 때는 잠시 일을 멈추고, 조용히 나를 용서하신 주님을 묵상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십자가에서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 영혼을 옥죄이고, 내 생활을 병들게 만드는 끈을 절단해야 한다. 그래야 자유롭게 호흡하면서 더 큰 은혜의 바다로 나갈 수 있다. 가정이나 교회나 사회나 어느 공동체든지 용서 없는 하나 됨은 없다. 용서 없는 행복은 없다. 다른 누구 보다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용서해야 한다. 한순간의 분노를 참지 못하고 돌이킬 수 없는 극단의 길로 가면 안 된다. 그래서 용서에는 끊임없는 인내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면 여러분 중에는 “그럼 무조건 당하면서 그냥 있어야 합니까?”라고 질문하고 싶은 분이 계실 것이다. 그것은 아니다. 만약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분들이 이 말을 듣는다면 다소 황당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진정으로 우리들이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정의와 공의로우신 성품을 믿는다면 보복이나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처분을 기다려야 한다. 이런 것을 ‘하나님께 신원(伸冤, 가슴에 맺힌 원한을 풀어 버림)한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신원해 주시는 분이시다. 이런 믿음이 없으면 용서도 못한다.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맡기면, 하나님이 처리해 주시는 방법과 시간은 생각보다 오래가지 않는다.
주님께 받은 용서로 절망의 구덩이에서 해방된 사람들의 실례는 너무도 많다.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실화 중의 하나는 언젠가도 언급한 적이 있는 소록도에 사는 어느 한센 병자와 그의 아버지에 얽힌 이야기다. 오래전에 어느 노인에게 열 명의 자녀가 있는데, 그중의 한 아이가 한센병에 걸렸다. 그때 그 아이는 초등학교 4학년 열 한 살이었다. 그 당시에는 가족 중에 누군가가 한센병이 걸리면 그를 소록도로 보내는 것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을 소록도로 데려다 주는 도중에 피곤해서 잠시 곯아떨어진 있는 아이를 돌로 쳐서 죽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그리고 소록도 앞 녹동항에서 같이 빠져 죽으려고 시도하다가 그마저도 실패하고 결국 눈물로 아들을 소록도에 들여보냈다.
그리고 그로부터 4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아버지는 노인이 되었고, 다른 자식들도 나름대로 사회에서 그럴듯하게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자녀들은 아버지와 함께 사는 것을 꺼려했다. 그렇게 자식들의 집을 전전하다 노인은 다시 예전에 살던 시골집으로 돌아왔을 때, 문득 40년 전에 자신이 바윗돌로 쳐서 죽이려했던 아이를 생각해 냈다. 그래서 정신없이 소록도로 달려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곳에서 한센병으로 인해 아버지보다 더 늙어 보이는 쉰 살이 넘은 아들을 만났다. 그때 아들은 울면서 말했다.
"아버지를 한시도 잊은 날이 없었습니다. 아빠를 다시 만나게 해달라고 40년이나 기도했습니다. 이제야 기도가 응답되었네요."
노인은 눈물로 용서를 구하면서 왜 이 못난 애비를 그렇게 기다렸는가를 물었다. 그러자 아들이 말했다.
“저는 여기 와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저는 아버지를 이미 다 용서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지역 주민 여러분들이여, 바로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고, 주님이 주시는 용서의 힘이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우리는 다 부족하다. 부족한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용서하고 용서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정말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을 믿는다면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예수님이 나를 용서하신 것처럼 나도 용서하자. 툭하면 성질부터 내고, 싸우듯이 잡아먹으려고 달려들지 말고, 내 생각이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고 열린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말도 경청하고 수용하자. 그 사람 인상을 보면 무서워서 말도 못 꺼낸다는 소리가 나오지 않게 하자. 그래서 주님이 주시는 용서의 기쁨과 힘을 늘 누리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