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金寧君(文烈公)事實과 封貫祖 :김녕군(문열공)사실과 봉관조)
君(군)의 諱(휘)는 時興(시흥)이요. 諡(시)는 文烈公(문열공)이라 敬順王의 八世孫(경순왕의 8세손)이요.
大輔公(대보공)으로 부터는 三十五世孫(35세손)이 된다.
隨城君(수성군) 諱(휘) 禀彦(품언)의 玄孫(현손)이요. 中書令(중서령) 文正公(문정공) 諱(휘) 順輔(순보)의 曾孫
(증손)이시며 同正公(동정공) 諱(휘) 鳳麒(봉기)의 넷째 아드님 이시다.
公(공)은 高麗仁宗(고려인종) 元年(원년)에 翰林院(한림원)에 오르고 그後(후) 兵部侍郞(병부시랑 : 지금의
國防次官 = 국방차관)을 지낼무렵 高麗十七代王(고려 17대왕) 仁宗十三年(인종 13년 :1135) 乙卯(을묘)에
妙淸(묘청)이 西京(서경 : 지금의 평양)에서 亂(난)을 일으켰다.
高麗(고려)의 서울은 開京(개경 : 지금의 개성) 이었는데 妙淸(묘청)이 西京(서경)으로 遷都(천도)코자 運動
(운동)을 하였으나 失敗(실패)로 돌아가자 趙匡(조광) 等(등)과 共謨(공모)하여 西京(서경)에 大爲國(대위국)을
세우고 年號(년호)를 天開(천개)라 定(정)하고 亂(난)을 일으켰으니 公(공)이 王命(왕명)을 받아 金富軾(김부식)과
함께 妙淸(묘청)의 亂(난)을 平定(평정)하니
王(왕)은 衛國公臣(위국공신)이라 하여 光祿大夫 平章事(광록대부 평장사)에 命(명)하시고 金州君(금주군)을
勳封(훈봉) 하시었다.
十九代王(십구대왕) 明宗四年(명종 4년 : 1174)에 西京留守(서경유수 : 지금의 시장)인 趙位寵(조위총)이
西京(서경)을 中心(중심)으로 軍士(군사)를 일으켜 北方(북방)을 휩쓸었으며 또한便(편)으로는 武臣(무신)들의
獨裁政治(독재정치)에 反對(반대)하는 僧侶(승려)들도 逢起(봉기)하여 나라가 어수선 하였다.
이무렵 고려(高麗)는 鄭仲夫(정중부) 李義方(이의방) 等(등) 文臣(문신)들을 虐殺(학살)하고 實權(실권)을 잡아
重房(중방 : 최고군사의결기관) 政治(정치)를 實施(실시)하며 武臣(무신)들의 橫暴(횡포)가 甚(심)했었다.
公(공)은 다시 王命(王命)을 받들어 尹鱗膽(윤인담)과 함께 三年間(삼년간)이나 繼續(계속)해오던 趙位寵(조위총)의
亂(난)을 平定(평정)하시니 王(왕)은 公(공)을 높이 칭찬 하시며 食邑千戶(식읍천호) 하고 上洛君(상락군 : 상주)으로
移封(이봉) 하시었으며 明宗年六年(명종 6년)에 卒(졸) 하시니 享年八十七歲(향년87세)요.
이 어른이 곧 金寧金氏(김녕김씨)의 封貫祖(봉관조) 이시다. 先封金州(선봉금주). 後封上洛(후봉상락)
▶寶蓮閣編(보연각편 : 韓國人名略傳 =한국인명사략전)
其後(그후) 高麗元宗(고려원종) 때에 金州(금주)를 金寧(김녕)으로 고쳐 부르게 되고 다시 盆城(분성)으로 고쳤
다가 또다시 金海(김해)라고 고쳐 부르니 金寧(김녕)은 金海(김해)의 古號(고호)임으로 金海(김해)라고 불러
왔으나 駕洛國(가락국)의 首露王後孫(수로왕후손)도 本貫(본관)을 金海(김해)로 쓰고 있어 首露王後孫(수로왕후손)
을 先金海(선김해)라 하고 金寧君(김녕군)의 後孫(후손)을 後金海(후김해)라고 불러 왔다. (典故大方 : 전고대방).
그러나 兩金氏(양김씨)가 서로 先祖(선조)가 다르면서도 同姓 同貫(동성 동관)이라 混同(혼동)될 염려(念慮)가 있어
高宗四年(고종4년 : 1867) 丁卯(정묘) 봄에 宗中會議(종중회의)를 열고 金寧(김녕). 上洛(상락). 盆城). 等(등)을 놓고
公論(공론)한 끝에 金寧(김녕)으로 決定(결정)하였으며 禮曹(예조)를 通(통)하여 上訴(상소)하였던 바 金海(김해의
古號(고호)인 金寧(김녕)으로 함이 마땅 하다는 禮曹踏印(예조답인)이 있었으니.(高宗甲申一八八四 = 고종갑신 1884년).
其後(그후) 金寧(김녕)으로 本貫(본관)을 確定(확정)하여 使用(사용)하게 되었고 .
現在(현재) 政府(정부)에서는 한글專用方策(전용방책)의 하나로 本貫(본관)을 한글로 表示(표시)하도록 하고있어
金寧金氏全國宗親會(김녕김씨전국종친회)에서는 會議(회의)를 열고 討議(토의)하였던 바.
"金寧(김녕) " 으로 使用(사용)하기로 決定(결정)하여 各官署(각관서)에 通告(통고) 하였다. (1971년 3월 19일).
▶위 글은 1971년 김녕김씨 대전 종친회에서 편찬한 金寧史略抄(김녕사략초)에서 발췌 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