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가난한 자 복이 있나니...팔복, 그 첫번 째에 슴은 뜻[백성호의 궁궁통통]
#궁궁통1
3주 전에 이스라엘 출장을
다녀왔습니다.
다시 가도 참 좋더군요.
갈릴리 호수 일대의
푸르른 풀과 나무,
그리고 언덕들 말입니다.
2000년 전,
예수는 바로 이 언덕에 서서
사람들에게
산상수훈을 설했습니다.
예수의 음성은
호숫가 바람을 타고서
언덕 저 멀리,
아주 멀리 앉은 사람에게도
날아가
그들의 가슴에 꽂혔다고 합니다.
저도 그 언덕에
걸터앉았습니다.
갈릴리 호숫가에 있는
팔복교회의 순례객들은
여기저기서
눈을 감고 앉아
‘산상수훈’에 담긴 울림을
묵상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때,
차동엽 신부에게 던졌던
행복에 대한 질문이
생각났습니다.
#궁궁통2
산상수훈의 팔복에 등장하는
모든 구절은
똑같이 시작합니다.
“행복하여라, ~한 사람들!”
가톨릭 성경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이 구절을 개신교 성경에서는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오.”
그렇습니다.
가톨릭 성경이든,
개신교 성경이든,
팔복은 ‘행복’을 노래합니다.
<차동엽 신부는 “행복은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만드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차동엽 신부는
행복의 속성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행복의 어원은 ‘Happen(일어나다)’이다.
행복은 쟁취하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이 만드는 거다.
스스로 발생시키는 거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또 생각하게 만드는
구절입니다.
왜냐고요?
우리는 대부분
행복을 밖에서 찾으니까요.
나에게는 행복이 없어,
그래서 내 삶이 행복하지 않아.
그러니 밖에서 찾아야지.
찾아서 내 주머니에 넣어둬야지.
그럼 내가 행복해지겠지.
우리는 대개
이런 식으로 생각합니다.
차 신부는
그게 아니라고 했습니다.
행복은 밖에서
찾는 것도 아니고,
다른 데서 쟁취하는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행복은
일어나는 거니까,
발생하는 거니까,
내가 스스로
내 안에서 일으키는 거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Happen’이
‘Happiness(행복)’가 됐다고
강조했습니다.
결국
행복해지느냐,
아니냐의 열쇠는
내가 쥐고 있는 셈이더군요.
#궁궁통3
저는 정색하고 앉아서
차 신부에게
‘팔복’의 첫 번째 복을 물었습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읽고 또 읽어도
참 알쏭달쏭합니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게
대체 뭘까요.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생활은 가난해도,
마음만은 부자로 살아야지.
그런데 예수님은
마음을 가난하게 하라고 하시네.”
아무리 봐도
여기서 말하는 가난과
저기서 말하는 가난은
서로 다른 것 같습니다.
차동엽 신부에게
그걸 물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에서
‘가난한 마음’이
도대체 뭐냐고 말입니다.
차 신부는 먼저
예수님이 사용하신
히브리어를 보자고 했습니다.
“‘가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에비온(Ebiyon)’이다.
여기서 말하는 가난은
‘더 이상 기댈 곳이 없는 가난’을 뜻한다.”
더 이상 기댈 곳이 없는 가난,
그건 정말 절박한 가난입니다.
마치 진퇴양난의 낭떠러지 앞에
서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차 신부는 다음 설명을
이어갔습니다.
“성경에서는
고아들, 과부들, 나그네들에게
이 말이 종종 쓰였다.
요즘 말로 하면
갈 데도 없고, 기댈 데도 없는
노숙자쯤 된다.
그런 절대적 가난을 가리킨다.”
2000년 전에는
고아와 과부, 나그네의 삶이
훨씬 더 힘겨웠겠지요.
저는 다시 물었습니다.
그럼 그 가난이
‘물질적 가난’을 뜻하는 거냐고
말입니다.
차 신부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아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에 담긴 의미는
그렇게 얕지 않다.
여기서 말하는 가난은
‘영성적인 가난’을 뜻한다.”
영성적인 가난,
저는 더 구체적으로 풀어달라고
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에서
말하는 마음은
‘마인드(Mind)’가 아니다.
오히려 ‘영(Spirit)’이란 의미다.
구약 시편의 영성가들은
이렇게 고백했다.
‘저는 가난한 사람입니다.
하느님, 저를 돌봐주세요.
주님의 도움 없이
저는 살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듣고 보니
고개가 끄덕여지더군요.
그건
그리스도교 수도의 핵심인
‘전적인 의탁(Total Commitment)’과 뜻이
통했습니다.
내 삶의 모든 것을
하늘에 맡기고,
하늘의 흐름에 따라,
하늘의 뜻에 따라
사는 삶입니다.
#궁궁통4
사람들은 하느님(하나님)께
기도합니다.
A를 달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A가 오면
“하늘의 뜻”이라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어주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A를 달라고 했는데,
전혀 원치 않는 B가 올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기도가 부족하다”고 말입니다.
‘전적인 의탁’은
그리스도교 수도와 영성의
핵심입니다.
거기서는 좀 다릅니다.
A를 달라고 기도했는데,
원치 않는 B가 왔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A를 달라고 고집하며
더 기도를 하는 게 아니라,
하늘이 주신 B를 받아들입니다.
쉽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 과정에서
A를 고집하던 나의 에고가
무너지게 됩니다.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라고 했던
예수의 겟세마네 기도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나의 뜻을 고집하는
삶이 아니라,
하늘의 뜻을 따라
흘러가는 삶을 찾게 됩니다.
“영적인 가난이 뭡니까?”라는 질문에
차 신부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하늘의 은혜,
자연의 은혜에 맡기면서
살려는 자세다.
내가 인공적으로
나의 안전을 구하지 않고,
하늘과 자연에 맡기고 의지하면서
살려는 태도다.”
사람들은 묻습니다.
하늘의 은혜,
자연의 은혜에 맡기면서 사는 게
왜 그리스도교 영성의
핵심이냐고 말입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렇게 쭉 가다 보면
하늘의 뜻과 나의 뜻이
충돌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무엇을 무너뜨려야 할까요.
그렇습니다.
그때,
하늘의 뜻 대신
나의 뜻을 무너뜨리면
우리는 조금 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되겠지요.
반면
나의 뜻 대신
하늘의 뜻을 무너뜨리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산상수훈에
역주행하며 살게 되지 않을까요.
[출처:중앙일보] 백성호-종교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