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예의 길
프리드리히 A. 하이에크 .1899~1992
『1899년 비엔나에서 출생하여 1992년 프라이브르크에서 생을 마쳤다. 그는 1921년과 1923년 법학과 경제학 두 분야에서 학위를 취득한 후, 영국, 미국, 오스트리아, 독일의 대학에서 강의하였다. 또한 사회주의와 정부의 시장개입을 비판함으로써 경제자유주의와 정부의 시장개입을 비판함으로써 경제자유주의를 지지하고 시장경제를 옹호한, 오스트리아의 대표적인 학자이다. 1974년에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으며, <노예의 길>을 발표하면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주요저서로는 <개인주의와 경제질서>, <과학의 반혁명>, <법. 입법 그리고 자유>등이 있다.』
[역자 서문]
이 책을 다시 읽으면서 역자도 밀턴 프리드리먼이 이 책의 서문에서 밝혔듯이 하이에크가 이 책에서 경종을 울린 것들이 새삼스럽게 더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 이유는 아마도 2017년 집권한 문재인 정부가 공개적으로 작은 정부를 버리고 큰 정부를 추구하겠다고 천명하고 재정적자의 누증은 아랑곳하지 않고 문재인 케어 등의 정책을 과감하게 추진하기 때문일 것이다.
무수한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진실을 파헤친 저술들, 그리고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가 어떤 면에서 중요한지 깨우치게 하는 무수하고 다양한 저술들의 사상적 뿌리를 찾아가면 만나는 책들 중 하나가 이 책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영국에서는 평화의 시기에도 민주의회의 승인을 받은 경제계획을 통해 경제 전체를 전시와 같이 하나의 사무실, 하나의 공장처럼 조직함으로써 더 합리적으로 더 큰 평등, 직업과 소득의 보장과 같은 사회주의의 이상을 민주주의와 함께 실천할 수 있다는 생각이 커다란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이들은 전시에는 사람들이 승리라는 하나의 목적에 매진하는데 쉽게 동의 할 수 있을지라도, 평화 시에는 서로 다른 가치체계와 목적들을 상대적으로 더 중요하다고 여기므로 이런 합의에 이르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사실과 이를 강제로 실현하고자 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며,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명확히 깨닫지 못하였다.
이처럼 경제 전체를 조직화하려는 사상적 흐름이 궁극적으로는 독일에서 나치의 등장에 이르게 하였고, 소련에서는 레닌주의와 스탈린주의에 도달하도록 하였음을 직시하였던 하이에크는, 영국의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에게, 특히 이 책을 바친 모든 정당의 사회주의자들에게 이런 사회주의의 길이 자유의 길이 아니라 독재와 노예로 가는 길임을 밝히기 위해, 이 책<노예의 길>을 썼다.
이제 공산주의나 나치와 같은 극단적 형태의 전체주의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렇지만 이 책은 여전히 개인의 자유와 정부의 권위에 대해 생각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고전으로 꼽힌다. 개인의 자유를 심각하게 제한하는 법률조차도 다수만 동의하면 합법적으로 입법할 수 있다는 생각이 만연하면, 법의 지배원칙이 쉽게 무너지는 상황이 연출된다. 이는 우리가 다수의 독재에 따라 일종의 노예의 길로 들어선다는 의미다.
사회주의를 단지 이상향으로 수긍하는 한국의 모든 사람들, 특히 정치인과 지식인들은 이를 실현하기 위한 가능한 수단(사유재산제의 철폐와 이윤의 철폐, 극가 혹은 세계단위의 경제계획 추구)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자유의 길인지 아니면 노예의 길인지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해 보기를 권한다. 사회주의가 아니라 이것이 완화된 형태인 복지국가를 이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이 책은 1944년 3월 영국에서 루틀리지에 의해 처음으로 출판되었으며, 몇 개월 후 1944년 9월 미국의 시카고대학 출판부에 의해 미국에도 소개되었다. 특히 1945년 4월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축약본을 발간하였는데, 이것이 60만 명의 독자에게 읽히면서 하이에크를 유명하게 만들어 미국을 방문했던 그는 일정에 없던 미국 순회강연을 가지기도 하였다.
헨리 레즐릿은 이 책을 20세기에 쓰인 가장 위대한 책 가운데 하나라고 평했으며, 하이에크와 논쟁을 벌였던 케인즈도 의견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내용에 가슴 깊이 동의한다고 말한 바 있다.
한국어판도 1954년에 처음 나왔으며, 그 후 1959년에 동일 역자에 의한 qsj역본이 출판되었다. 그 후 1973년에는 <예종의 길>이란 제목으로 출판되었으며, 199년 자유기업원에서 동국대 출판부에서 출판된 것을 <노예의 길>이란 제목으로 재출간하였다. ~~2018년 수정번역본이 새롭게 출간되었다. -2018년 4월. 역자-
[서문]
"이 책은 정치서적이다. 사회철학 에세이라는 우아하고 야심적인 제목을 붙여 이 점을 감출 생각은 전혀 없다."
1943년 12월
케임브리지, 런던 정경대학
프리드리히 A. 하이에크
[서론]
저자는 성년 이후의 인생 가운데 약 절반을 내가 태어난 오스트리아에서 독일의 지적 활동과 긴밀히 접촉하면서 보냈으며, 나머지 절반을 미국과 영국에서 보내고 있다. 이 나라 영국이 고향이 된 10여 년 동안 저자가 점점 확신하게 된 것은 최소한 독일에서 자유를 파괴했던 세력들 중 일부가 여기 영국에서도 활동하고 있으며, 또 이런 위험의 성격과 원천에 대해 독일에서보다 영국에서 오히려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떤 사람들은 아직 전쟁이 완전히 끝나지 않은 지금은 사람들의 의견이 날카롭게 충돌하는 문제를 제기할 때가 아니라고 할지 모르겠다. ~~특정 집단들이 다른 집단에 비해 사회주의를 원하는 정도가 다르고, 어떤 이들은 특정 집단의 이익을 도모하는 사회주의를 원하는 반면, 다른 이들은 다른 집단의 이익을 도모하는 사회주의를 원한다. 그러나 이런 사실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사건의 향후 전개에 영향을 주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 보면, 이들은 모두 어느 정도는 사회주의자들이란 사실이다. ~~~핵심적 질문은 이러한 움직임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고 갈 것인가이다.
제1장
버려진 길
■ 우리가 만든 오늘의 세계
문명의 진로가 예상과 달리 후퇴할 때, 문명이 우리의 예상대로 지속적 진보를 하지 않고 과거 야만주의를 연상시키는 악덕들이 우리를 위협할 때, 우리는 자연히 우리 자신 말고는 모든 것을 비난하게 된다. 우리는 모두 최선의 판단에 따라 애쓰지 않았던가? 많은 훌륭한 인물들이 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았던가? 우리 모두의 희망과 노력은 더 큰 자유와 정의, 그리고 번영을 지향하지 않았던가? 이렇게 노력한 결과, 우리의 목표와는 너무나 달리 우리가 자유와 번영 대신 예속과 비참함 속에 있다면, 이는 사악한 세력들이 우리의 의도들을 망쳐 놓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더 나은 결과를 얻는 길로 다시 출발할 수 있으려면. 먼저 우리를 희생물로 삼았던 사악한 세력들을 정복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지 않은가?
우리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이기기 위해 모든 정력을 쏟아 붓고 있지만, 우리가 전쟁을 해서라도 지키려는 가치들이 전쟁 전에도 이곳 영국에서 위협을 받았으며, 다른 나라에서는 파괴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마저 때로는 쉽지 않게 되었다.
■ 현대문명의 개인주의적 기초
긴 역사적 관점에서 현대적 추세를 고려해 보면, 우리는 코브던과 브라이트, 아담 스미스와 흄의 견해뿐만 아니라, 로크와 밀턴의 견해조차 버리고 있으며, 크리스토교와 그리스-로마인들에 의해 닦여진 기초로부터 자라난 서구문명의 가장 현저한 특징들 가운데 하나를 빠르게 버리고 있는 중이다. 19세기 자유주의와 18세기 자유주의뿐만 아니라 에라스무스와 몽테뉴, 키케로와 타키투스, 그리고 페리클레스와 투키디데스로부터 물려받은 기본적 개인주의조차 급진적으로 포기하고 있다.
민족사회주의 혁명을 반 르네상스로 묘사한 나치 지도자는 아마도 실제 그가 의식했던 것보다 더 진실을 말한 것이다. 민족사회주의 혁명은 르네상스시대에서부터 현대인들이 쌓아올린, 무엇보다도 개인주의를 본질적 특징으로 하는 문명을 파괴하는데 결정적 단계였다. 개인주의는 현재 오명을 뒤집어쓰고 자기중심주의나 이기주의와 함께 연관되는 용어가 되었다. ~~~사회주의와 개인주의, 이 두 가지 상반된 원칙의 대비는 앞으로 이 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점차 분명해질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정신과 고대 고전철학에 포함된 요소들로부터 출발하여 르네상스 기간 동안 처음으로 충분히 발전되었고, 그 후 서구유럽문명으로 성장하고 확산되었던 개인주의의 본질적 측면들은 다음과 같다. 인간으로서의 개별 인간에 대한 존중, 즉 그 자신의 견해와 선호를 그 자신의 영역에서는 궁극적인 것으로 인정하는 것과 사람들이 자신의 재능과 취향을 발전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신념이 바로 그것이다.
유럽 현대사의 전 기간에 걸쳐 사회발전의 일반적 방향은 각 개인들이 일상적 활동을 할 때 관습이나 정해진 방식을 따르게 한 속박으로부터 그들을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개인의 에너지가 족쇄로부터 해방되자 나타난 가장 큰 결과는 아마도 과학의 경이로운 성장일 것이다. ~~~그 전에도 인간의 발명재능은 결코 당시보다 못하지 않았다.~~~산업기술이 아직 정체중일 때에도 매우 정교한 자동인형이나 기계장치가 발명되었으며, 제한적 통제가 없었던 광산업이나 시계제작업이 크게 발전했다는 사실로 입증된다. 지배적 견해가 모든 것을 속박하는 한, 기계발명품 -일부는 극히 예외적으로 뛰어났다-을 산업적 용도로 사용하려던 시도들은 즉각 억압되었으며, 지식에 대한 욕구는 질식당하고 말았다. 무엇이 옳고 합당한 것인지에 대한 대다수의 지배적 견해가 소수 개별 혁신가의 새로운 방식의 실험을 가로막았다.
■ 자유주의는 정체되지 않은 신조
■ 자유주의의 포기
자유주의 정책의 느린 진보를 더 이상 인내하지 않으려는 점증하는 조급증, 반사회적 특권을 방어하는 데 자유주의의 말투를 빌려 쓰는 사람들에 대한 정당한 분노, 그리고 지금까지 이미 성취한 물질적 진보로 확대일로에 있는 끝없는 야망 등으로, 세기가 바뀔 무렵 자유주의의 기본 원칙들에 대한 신념이 점차 퇴색되기에 이르렀다. 사람들은 지금까지 성취한 것들을 한번 획득하였기에 불멸의 안전한 소유물인 것처럼 간주하였다. 일반 대중들의 시선은 새로운 수요에 쏠렸고, 그들에게는 이 새로운 수요를 빠르게 충족할 수 없는 까닭에 과거의 원칙들을 지키기 때문인 것처럼 비쳤다.
과거의 진보를 가능케 했던 일반적 틀 속에서 과거의 방식을 따라가서는 더 이상 진보를 기대할 수 없다는 생각, 그리고 사회를 완전히 재구축할 때에만 진보가 가능하다는 생각이 점차 확산되었다. 이것은 더 이상 현존하는 기구에 무엇을 보태거나 개선하려는 게 아니라 완전히 허물어 버리고 이를 대체하자는 것이었다. 새로운 시대의 희망이 완전히 새로운 것에 집증 되기 시작하자, 현재 사회의 기능에 대한 관심이나 이해는 급속하게 쇠퇴하였다. 자유체제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이해가 쇠퇴함에 따라 자유체제가 있어야 비로소 존재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인식도 함께 후퇴하였다.
■ 새로운 출발의 지도자로 인식된 독일
사상의 조류에 나타난 변화가 사상이 전파되었던 공간상의 궤적 방향을 거꾸로 돌아가는 것과 일치한다는 점은 중요하다. 2백 년 넘게 영국의 사상이 동쪽으로 퍼져나갔기 때문이다. 영국에서 성취된 자유의 지배는 전 세계로 전파될 운명인 것처럼 보였다. 1870년 무렵 이 사상들이 가능한 한 최대한 동쪽으로 전파되었던 것 같다. 그 후 자유주의 사상은 퇴조하기 시작하였으며 한 묶음의 다른 사상들이 동쪽에서부터 전진해오기 시작하였다. 영국은 정치, 사회분야에서 사상적 지도력을 상실하고 사상의 수입자가 되었다.
그 다음 60년간은 독일이 중심지가 되어 거기에서부터 20세기에 세상을 지배하게 될 사상들이 동쪽으로, 그리고 서쪽으로 퍼져갔다. 그 사상이 헤겔 혹은 맑스, 리스트 혹은 슈몰러, 좀바르트 혹은 만하임인 것이었든, 그것이 가장 급진적 형태의 사회주의였든 아니면 단순한 조직화 혹은 보다 덜 과격한 종류의 계획이었든, 독일의 사상들은 모든 곳에서 기꺼이 수입되었으며, 독일의 제도들은 모방되었다. 비록 대개의 새로운 사상들은 특히, 사회주의는 독일에서 시작되지는 않았지만, 그 사상들이 완전해져 19세기 마지막 25년과 20세기 첫 25년 동안 그 발전이 절정에 달했던 곳은 바로 독일이었다. 지금은 자주 망각되곤 하지만 사회주의의 이론과 실천의 전개에 당시 독일이 지녔던 지도력은 실로 지대했으며, 이 나라 영국에서 사회주의가 중요한 이슈가 되기 한 세대 전에 이미 독일에서는 국회에 거대한 사회주의 정당이 진출했었다.
그 밖에도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사회주의 교리의 발전은 거의 전적으로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현재 러시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교리적 논의도 대개 독일인들이 그만둔 지점에서 계속되고 있다.
제2장
위대한 유토피아
국가가 지상지옥이 된 것은
항상 국가를 지상천국으로 만들려고 했기 때문이다.
-휠덜린(F. Hoelderlin)-
■ 사회주의의 새로운 약속
사회주의가 자유주의를 대신하여 대다수 진보주의자의 교리가 되었다.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은 과거 위대한 자유주의 사상가들이 집단주의를 추구하면 어떤 결과가 초래될 것인지 우리에게 경고했지만, 단순히 사람들이 이 경고를 망각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이 자유주의 사상가들이 예측했던 결과와 정반대되는 유토피아에 매료당했다는 것을 뜻한다. 특별히 주목할 점은 사회주의가 자유에 대한 가장 심각한 위협이라고 일찍이 인식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에 더해 사회주의가 프랑스혁명이 상징하는 자유주의에 대한 반동임을 상당히 공개적으로 표명하며 시작되었지만 그 사회주의가 일반적 승인을 얻은 것도 바로 자유의 깃발 아래였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사회주의 초창기에 솔직히 권위주의적이었다는 사실은 이제 별로 기억되지 않고 있다. 현대 사회주의의 기초를 놓았던 프랑스 저술가들은 강력한 독재정부만이 그들의 사상을 실천에 옮길 수 있다는 점에서는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사회주의란 의도적으로 사회를 위계적 방식으로 재조직하고 강압적 정신력을 강제함으로써 프랑스혁명을 말살하려는 하나의 시도를 의미했다. ~~~근대 계획가의 첫 세대인 생시몽은 그가 제안한 계획기구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은 가축처럼 취급당할 것이라고 예언하기도 하였다.
■ 자유라는 의미의 변화
1848년의 혁명에 앞서 나타났던 강력한 민주주의적 사조의 영향을 받고 난 후에서야 사회주의는 자유세력과 연대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새로운 민주사회주의가 그 전신인 사회주의로 인해 얻게 된 반민주적 성격에 대한 의구심들을 잠재우는 데에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토크빌은 본질적으로 개인주의 제도인 민주주의가 사회주의와는 화해할 수 없는 갈등을 일으킨다는 점을 누구보다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민주주의는 개인 자유의 영역을 연장시킨다(1848년 토크빌이 말했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이를 제한한다. 민주주의는 모든 가능한 가치를 개별 인간에게 둔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각자를 단순한 대리인, 일개 숫자에 불과하게 만든다.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는 평등이라는 한 단어 이외에 공통점이라고는 전혀 없다. 그러나 그 차이를 알아차려라. 민주주의는 자유에서의 평등을 추구한다. 반면에 사회주의는 제약과 예속에서의 평등을 추구한다.」
■ 다시 등장하는 의구심
■민주사회주의의 유토피아
제3장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사회주의의 의미
핵심주제로 들어가기 전 우리는 아직도 장애물을 하나 더 넘어야 한다. 바로 아무도 원하지 않는 상황으로 우리를 표류하게 하는 개념적 혼돈이라는 장애물을 반드시 쓸어내야 한다.
이 혼돈은 바로 사회주의 개념 자체에 관한 것이다. 사회주의는 때로는 단지 사회주의의 궁극적 목표인 사회정의, 더 큰 평등과 안전이라는 이상을 묘사하거나 의미한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또한 대개의 사회주의자들이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채택하는 특정한 방법을 의미하기도 한다. 많은 유능한 사람들은 이 방법이야말로 그 목적을 충분하고도 빠르게 성취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런 의미를 지닌 사회주의란 사기업제도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철폐하고,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가 대신 그 자리에 중앙계획ㄷ아국이 들어서는 계획경제 체제의 창설을 뜻한다.
첫 번째 이상만을 소중히 여기는 데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자를 자칭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사회주의의 이러한 궁극적 목표에 대해 열병에 들린 것처럼 믿고 있으나, 이 목표가 어떻게 성취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도 이해하고 있지도 않으며, 그 비용이 무엇이든 이 목표가 성취되어야 한다는 확신에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를 단순한 희망이 아니라 이를 넘어 현실정치의 대상으로 보는 거의 모든 사람에게는 현대사회주의의 특징적 방ㅂ버은 그 목적 자체만큼이나 본질적인 것이다.
한편 사회주의의 궁극적 목적을 사회주의자 못지않게 소중히 여기지만 사회주의자가 제안하는 방법이 여타 소중한 가치들에 줄 위험 때문에 사회주의자에 대한지지를 거부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비록 사회주의의 서로 다른 목적이 동시에 성취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논쟁 속에 포함되어 있다 하더라도 사회주의에 관한 논쟁은 크게 보아 목적에 관한 것이 아니라 수단에 관 것이 되었다.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사회주의는 집단주의의 한 종류이며, 따라서 집단주의에 대한 모든 진실은 또한 항상 사회주의에도 적용된다는 사실이다. 사회주의자와 자유주의자 사이의 거의 모든 논쟁점들은 모든 형태의 집단주의에 공통된 방법에 관한 것이었지 사회주의자들이 그 방법을 써서 성취하고자 했던 목적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이 책에서 관심을 가지는 결과들은 그 지향하는 목적들과는 무관하게 집단주의의 방법으로부터 초래된다. 사회주의가 단연 집단주의 혹은 계획주의 가운데 다른 종들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중요성이 가장 크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경제적 삶을 군대식으로 편제하는 것은 아담 스미스의 말을 빌리자면, 정부가 정부 자체를 유지하기 위해 억압적이고 폭압적일 수밖에 없도록 했기 때문에 자유정신의 소유자들은 이 체제를 붕괴하였다. 그러나 사회주의가 바로 이 자유로운 사람들을 설득하여 다시 한 번 그들의 삶을 군대식 병영화로 이끌고 갔다는 점 역시 잊지 말아야 한다.
■ 계획의 의미
어떤 형태이든 일정한 분배상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계획을 의미한다는 점을 명확히 한다면, 집단주의라는 용어의 의미는 다소 더 확정적이 된다.
계획이 대중적 명성을 얻게 된 것은 물론 크게 보아 우리 모두가 우리의 문제를 되도록 가장 합리적으로 처리하기 바라며, 일의 처리과정에서 우리가 동원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지능력을 사용하기 바란다는 사실 덕분이다.
■ 명령경제의 대안으로서의 합리적 경쟁
자유주의의 주장은 인간 노력들을 조정하는 수단으로 경쟁의 힘을 가능한 한 최대한 잘 활용하자는 것이지 그냥 그대로 놔두라는 것이 아니다. 이는 유효한 경쟁이 창출될 수 있는 곳에서는 다른 그 어떤 방법보다도 경쟁이 개별적 노력의 좋은 길잡이가 되어 준다는 확신에 기초한 것이다.
■ 중앙집권적 명령과 경쟁의 혼합
제4장
계획의 불가피성?
■ 기술변화로 불가능해지지 않는 경쟁
대부분의 계획자들은 통제를 벗어난 상황으로 인해 우리가 결국 더 이상 선택을 하는 게 불가능해지고 어쩔 수 없이 경쟁을 계획으로 대체하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 독점의 성장원인
■ 기술변화가 가져오는 새로운 문제
현대의 기술진보가 계획을 불가피하게 만든다는 주장은 현대 산업문명의 복잡성이 중앙계획이외의 방법으로는 효과적으로 다루기 힘든 새로운 문제들을 창출한다는 의미일수도 있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옳다. 그러나 그 주장이 이루어진 보다 광범위한 의미에서는 옳지 않다.
■ 경쟁 아래 실현될 수 없는 기술적 가능성에 대한 주장
독점의 성장을 기술진보와 결부시키지만, 우리가 방금 검토한 것과는 거의 정반대되는 주장을 펼치는 또 다른 이론이 있다. 비록 명확히 언급되지 않은 적이 많지만, 이 이론은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 이론의 주장에 따르면, 현대적 기술이 경쟁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경쟁으로부터 보호되지 않으면, 즉 독점이 허용되지 않으면, 많은 새로운 기술적 가능성들이 실제로 활용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만약 영국의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종류의 차를 타도록 강제할 수 있다면, 영국 자동차산업이 미국에서 사용되는 자동차보다 더 값싸지만 더 나은 차를 공급할 수 있는 상황을 최소한 상상해볼 수 있다.
■ 전문가의 협소한 견해와 계획의 주장
계획사회에서는 하나만을 분리해서 생각했을 때에는 많은 것들이 모두 달성 가능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계획에 대한 열광자들이 생긴다. 이들은 자신이 특정한 대상에 부여하는 가치를 계획사회의 계획자에게도 주입시킬 수 있다고 확신한다. 물론 의심의 여지없이 일부 열광자의 희망은 성취될 수 있다. 왜냐하면 계획사회는 현재에 비해 일부 목적들에 대해서는 분명 지금보다 높은 가치를 두고 더 강력하게 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사회를 개혁하고자 가장 열광적인 이 사람들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계획할 수 있게 된다면, 이것은 아마 이들을 다른 사람들의 계획을 조금도 인내하지 못하는 가장 위험한 사람이 되게 할 것이다.
제5장
계획과 민주주의
"사적 개인들에게 어떤 식으로 그들의 자본을 사용해야 하는지 지시하려는
정치가가 있다면, 가장 쓸데없는 데 정력을 쏟는 부담을 스스로 떠안으려고 하는 것이다.
특히 이 권위를 자신이 잘 행사할 줄 안다고 환상에 빠질 정도로 어리석고 잘난 체하는 사람이
그 권위를 수중에 넣게 될 때만큼 위험해지는 경우는 없다."
-아담 스미스-
■ 명령경제와 포괄적인 공통의 가치규범
모든 집단주의 시스템의 공통된 특징은, 모든 사회주의 학파들이 아주 소중하게 여기는 어구로 표현한다면, 특정한 사회적 목적을 위해 사회의 노동력을 의도적으로 조직하는 것이다.
다양한 종류의 집단주의, 공산주의, 파시즘 등이 사회의 노력을 동원하여 달성하려는 목적들의 성격은 서로 다르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사회 전체와 사회의 모든 자원을 하나의 목적을 위해 조직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개인들의 목적이 최고로 존중되는 독립적 영역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유주의나 개인주의와 다르다. 이론에서의 집단주의가 예기치 않게 또 집단주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면서 현실에서 겉으로 드러난 모습을 묘사하기 위해 전체주의자는 용어가 새로이 채택되었다. 이 전체주의라는 새로운 용어의 진정한 의미에서, 앞서 언급한 집단주의, 공산주의, 파시즘과 같은 사상들은 한마디로 전체주의적이다.
하나의 계획에 따라 모든 경제활동을 지시하려는 시도는 무수한 의문을 제기하게 될 것이고, 이 의문들에 대한 답변이 근거로 삼아야 할 것은 오직 윤리규범뿐이지만, 문제는 현존하는 윤리들 속에는 무엇이 구체적으로 행해져야 한다는 것에 대한 합의된 견해가 들어 있지 않으므로 그 어떤 답변도 줄 수 없게 된다. 사람들은 그와 같은 의문들에 대해 정해진 견해가 없거나 상충하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았던 자유사회에서는 이 의문들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가 없었으며, 이 의문들에 대해 공통된 견해를 형성할 기회는 더더욱 없었기 때문이다.
■ 개인적 목적과 사회적 목적
우리는 이처럼 모든 것을 포함하는 가치척도를 가지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서로 가용자원을 먼저 사용하려고 경쟁하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무수히 다양한 필요들을 이해하고, 각각의 필요에 대해 그 중요성의 경중을 가린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 문제에서는 어떤 사람이 소중히 여기는 목적들 속에 그 자신의 개인적 필요들만 들어 있는지 아니면 그의 가까운 혹은 보다 먼 동료들의 필요들도 함께 들어 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즉, 통상적 의미에서 그가 자기중심적이든 아니든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가장 중요한 요점은 그 누구든 어떤 한 사람이 한정된 분야 이상을 조사하고, 한정된 수 이상의 필요에 대해 그 시급성을 모두 인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그가 자신의 육체적 필요에 관심이 쏠려 있든 아니면 모든 아는 사람들의 복지에 따스한 관심을 가지고 있든 상관없이, 그 사람 자신이 관심을 가질 수 있는 목적들의 범위는 언제나 모든 인간들의 필요에 비하면 너무나 작은 편린에 불과할 것이다.
이것이 모든 개인주의 철학이 기초하는 궁극적 사실이다. ~~~개인주의는 사람이 자기중심적이라거나 이기적이라거나 혹은 그래야 한다고 가정하지 않는다. 개인주의는 단순히 논쟁할 여지가 없는 다음과 같은 확실한 기본적 사실로부터 출발한다. 우리의 상상력의 한계로, 우리는 우리들의 가치척도 속에 사회 전체의 필요들 가운데 일부분 이상을 포함할 수 없으며, 또 엄격하게 말해서 가치의 척도들은 개인 각자의 정신 속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개인들마다 다르고 또 상충될 때가 많은(각 개인들이 지닌)가치의 단편적 척도 이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주의자들은 개인이 정한 한계 안에서는 다른 사람의 가치나 선호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가치와 선호에 따라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고, 즉 이 영역들 안에서는 개인의 목적체계가 최고의 선이며, 다른 그 누구의 그 어떤 지시에도 종속되지 않는다고 결론 짖는다. 개인주의 입장의 본질은 바로 개인을 자기 자신의 목적에 대한 최종적 재판관으로 인식하는 것, 즉 가능한 한 자신의 견해가 자신의 행동을 지배해야 한다는 믿음이다.
개인주의는 물론 사회적 목적이 있을 수 있다는 것, 혹은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개인의 목적들이 우연히 일치해서 여러 사람들이 그 일치된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 결합하는 것이 바람직한 상황이 있다는 것을 배제하지 않는다. 그러나 개인주의는 그러한 공동의 행동을 개인들의 견해가 일치하는 경우로 한정한다. 개인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이른바 사회적 목적이란 단지 많은 개인들의 동일한 목적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사회적 목적이란 개인들이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데 있어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는 대신 그 보답으로 기꺼이 그 달성에 기여하고자 하는 공동의 목적에 불과하다.
그래서 공동행위는 공동의 목적이라고 사람들이 합의한 분야에 한정된다. 이것이 공동의 목적이라고는 하지만 각 개인들에게는 최종 목적이 아니고 단지 각 개인들이 사용하는 수단에 불과한 경우도 아주 흔할 것이다. 사람들은 공동의 목적이 그들에게 최종 목적이 아니고 단지 매우 다양한 최종 목적들에 봉사할 수 있는 수단일 경우에 오히려 공동행위에 대해 의견이 일치할 가능성이 가장 높아진다.
개인들이 공동의 목적을 실현하려고 노력을 결합하기 위해 결성하는(국가와 같은) 조직들은 그 자체의 목적과 수단의 시스템을 가진다. 그러나 이렇게 결성된 그 어떤 조직도(국가의 경우에는 그 어느 누구보다도 훨씬 더 큰 힘을 가지고 있지만)별개의 제한된 그 자체의 영역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그 영역 안에서만 그 조직의 목적들이 최고의 선이 될 뿐이며, 그 영역 밖에서는 그 조직의 목적들이 반드시 최고의 선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이런 조직도 결국 다른 여러 사람들 중의 한 사람에 불과하다는 성격은 변하지 않는다. 이 영역의 한계는 개인들이 특정한 목적들에 대해 견해가 일치하는 정도에 의해 결정된다. 특정한 행위에 대해 개인들이 동의할 가능성은 그와 같은 행위의 범위가 확정됨에 따라 필연적으로 감소한다.
국가의 여러 기능과 관련해서 생각해 보면, 어떤 기능의 경우에는 국가에 의한 그 기능의 행사에 대해 시민들이 실질적으로 만장일치를 해주었을 것이고, 또 다른 기능의 경우에는 절대적 다수가 동의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나열하다 보면, 마침내 우리는 비록 각 개인은 정부가 어떤 방식으로든 행동하기를 원할지도 모르지만, 정부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사람들 수만큼이나 견해가 다양해지는 그런 분야에 이르게 될 것이다.
■ 방법에 관한 의견일치와 목적에 대한 의견불일치
목적에 대한 동의가 없는 상태에서 사람들이 중앙집권적 계획이 있어야 한다는 데 대해서만 동의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마치 한 무리의 사람들이 어디로 갈지 동의하지 않은 상태에서 여행을 함께 떠나기로 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모두 여행을 해야 했을 수 있으나 대개의 사람들에게는 원치 않았을 여행이 되고 만다.
계획은 우리가 평소에 익숙한 정도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주제에 대해 동의가 필요한 상황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계획체제에서는 서로 동의할 수 있는 과업들에 한해서만 집단적 행동이 가능하도록 그 범위를 제한할 수 없으며, 어떤 행동이든 간에 이것이 취해지기 위해서는 모든 일에 대한 동의를 억지로 만들어내도록 강요받는다. 이 점은 계획체제의 성격을 결정하는 데 무엇보다도 크게 기여하는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의회가 포괄적 경제계획을 수립해야 한다는 것이 만장일치로 드러난 국민들의 뜻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선언한다고 해서, 국민이든 국민의 대표들이든 특정 계획에 대해 반드시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 국가 활동 범위의 확대와 의견일치 가능성의 축소
■ 민주적 통제의 환상
■ 궁극적 가치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자유
우리는 민주주의를 맹신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우리 세대는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많은 말과 생각을 하고 있지만, 민주주의가 그 실현에 봉사하는 가치에 대해서는 사실 거의 침묵하였고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 같다.
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수단이다. 즉, 민주주의는 내적 평화와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한 실용적 도구이다. 민주주의 그 자체가 결코 오류에 빠지지 않거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제6장
계획과 법의 지배
■ 법의 지배
■ 형식적 법과 실질적 법
■ 법의 지배의 논리적 근거
국가는 단지 일반적 유형의 상황에 적용되는 규칙을 확립하는 일에 그 자신의 임무를 제한하여야 하며,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일어나는 상황들에 따라 변화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는 각 개인들에게 사적 자유를 허용해야 한다. 왜냐하면 각각의 개별 경우에 관련된 당사자들은 이 상황들을 다른 그 누구보다 충분히 더 잘 알 수 있고, 거기에 자신들의 행동을 적용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 형식적 평등과 실질적 평등의 상충
■ 법의 지배에 대한 새로운 위협
제7장
경제적 통제와 전체주의
"부의 생산을 통제하는 것은 인간의 삶 그 자체를 통제하는 것이다."
- 힐레르 벨록(Hillaire Belloc-
■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자유
대개의 계획주의자들은 지시경제가 다소 독재적 방식으로 운영되어야 한다는 점에 대해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서로 연관된 활동들의 복잡한 체계 위에 어느 정도나마 의식적으로 명령을 내리려면, 전문가들로 구성된 단일 참모진이 지시하여야 하며, 또 민주적 절차에 의해 자신의 권한이 속박되지 않은 최고명령권자가 최종적 책임과 권한을 장악하여야 한다. 이런 사실은 일반적 동의가 필요치 않을 만큼 명백한 결과이다. ~~~우리의 삶에 덜 중요하거나, 덜 중요해야 하는 것에 대한 자유를 포기함으로써 더 고귀한 가치들을 추구하는 더 큰 자유를 획득하게 될 것이라는 암시를 하는 것이 보통이다.
■ 순전히 경제적인 문제에 대한 경멸 (※내용이 모호?)
경제적 동기라는 것이 일반적 동기와 별개로 존재하지 않는다. 아울러 경제적 이득 혹은 경제적 손실이란, 단지 우리의 다양한 필요와 욕구 중 어떤 것이 그 경제적 이익과 손실에 의해 영향 받을 것인지에 대한 결정이 여전히 우리 손안에 있을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질 뿐이다. 이런 사실들을 깨닫고 나면, 경제적 문제들이 단지 삶의 덜 중요한 목적들에 영향을 미친다는 일반적 믿음 속에 숨어 있는 진리의 중요한 핵심을 알아보는 것과 흔히 보는 순전히 경제적인 고려에 대한 경멸을 이해하는 것이 한결 쉬워질 것이다. (※인간 삶의 목적에 돈은 하나의 도구일 뿐이라는 내용 같은데 약간 모호?)
경제적 변화들은 보통 우리의 필요들의 한계에서, 즉 가장자리에서 영향을 미친다. 경제적 이득이나 손실이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큰 그 어떤 것보다 우리에게 더 중요한 많은 것들이 있다. 우리들에게는 그런 중요한 것들이 쾌적한 문화적 시설들, 심지어 경제적 흥망성쇠에 의해 영향을 받는 삶의 많은 필수품들보다 훨씬 더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 깨끗하지 않은 경제적 이득과 비교하자면, 우리가 경제적으로 얼마나 더 못사느냐는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을 경제계획처럼 우리의 경제적 이해관계들에만 영향을 미치는 그 어떤 것도 삶의 보다 기초적 가치에는 심각하게 간섭할 수 없다고 믿도록 한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결론이다. 경제적 가치들이 우리에게 많은 것들보다 덜 중요한 것은 바로 경제적 문제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무엇이 우리에게 보다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 자유롭게 결정하기 때문이다. 혹은 현재의 사회에서는 우리 삶의 경제적 문제들을 풀어가는 사람은 바로 우리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경제적 추구가 통제 당한다는 것은, 우리가 구체적 목적을 선언하지 않는 한, 우리의 삶이 항상 통제 당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혹은 우리가 구체적 목적을 선언할 때, 그것이 또한 승인 되어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진정 모든 것을 통제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경제계획에 의해 제기된 질문은 단순히 우리가 우리의 다소 중요한 필요들로 간주하는 것을 우리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인지에 관한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무엇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 결정하는 주체가 바로 우리가 될 것인지 혹은 이것이 계획자에 의해 결정될 것인지에 관한 것이다.
■ 생산에 대한 통제는 소비에 대한 통제
우리의 사적인 삶에 대해 행사하는 계획자의 힘은, 그가 우리의 소비에 대해서는 직접적 통제를 하지 않기로 했다고 해서 불완전해지는 것이 아니다. 비록 계획사회에서 어느 정도까지는 배급과 같은 장치들이 아마도 사용될 것이라 하더라도, 우리들의 사적인 삶에 대한 계획자의 힘은 이런 장치들에 의해 제약되지 않으며, 소비자들이 명목상으로는 자신의 소득을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슬 수 있다 하더라도, 계획자가 행사하는 힘의 효력이 약화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계획사회에서 당국이 모든 소비에 대해 행사하는 힘의 원천은 당국의 생산에 대한 통제일 것이다.
■ 계획과 직업선택
만약 하나의 직업이 너무 참을 수 없게 되거나 다른 직업을 마음에 두게 되면, 유능한 사람에게는 거의 언제나 일정한 값의 희생을 치르기만 한다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달성할 길이 열려 있다. 우리가 어떤 노력을 하더라도 우리가 처한 조건들을 바꿀 수 없음을 아는 것만큼 그 조건들을 참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은 없다. 그리고 필요한 희생을 견딜 만한 강한 정신력을 결코 가질 수 없다면, 최소한 우리가 정말 더 열심히 노력할 때에만 이런 조건들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 자체가 그렇지 않았더라면 참을 수 없는 조건들을 참을 만하게 해 준다.
비정규직 근무시간을 선호하는 사람, 혹은 얼마 되지 않거나 아마도 정해지지 않은 소득을 얻지만 낙천적 삶을 즐길 수 있다면 이를 정규직이고 틀에 박힌 삶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 이런 사람은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게 된다.
계획당국이 자신의 과업을 단순화시키기 위해 표준을 정할 수밖에 없고, 모든 사람이 이 표준에 맞추어 행동해야 한다면, 사람들이 표준과는 다른 더 합리적이거나 효율적인 행동을 해야 할 유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계획사회에서는 사람들은 더 이상 간섭하지 않아도 합리적이거나 효율적이 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경제 전체의 계획이라는 너무나 방대한 작업을 해내려면, 계획당국은 인간의 능력과 성향을 사람들이 금방 서로 교환될 수 있는 단위가 될 수 있을 정도로 극소수의 범주로 단순화시켜야 하며, 의도적으로 세밀한 개인적 차이를 무시하지 않을 수 없다.
■ 명령과 금지는 가격체계에 대한 유일한 대안
경쟁사회에서는 거의 모든 것이 가격만 지불하면 가질 수 있다. 이 사실이 경쟁사회를 비난해야 할 이유라고 생각하는 오해는 이와 관련된 모든 주제에 널리 퍼져 있다. 이 점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어떤 사람들은 삶의 고귀한 가치들이 금전관계 속으로 불려 들어오게 되었다고 불평을 터뜨린다. 그러나 시장경제에서는 우리에게 보다 높은 가치를 가진 것들을 보존하기 위해 덜 중요한 필요들을 희생할 수 있도록 허용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 풍요의 신화
■ 전체주의적 통제의 미증유의 확대
제8장
누가, 누구를?
■ 자유와 재산
경쟁사회에서 빈곤한 사람들에게 열려 있는 기회들은 부유한 사람들에게 개방된 기회들보다 훨씬 더 제약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쟁사회의 가난한 사람들이 이와는 다른 유형의 사회에서 더 큰 물질적 안락함을 누리는 사람보다 오히려 훨씬 더 자유롭다는 사실이 변하지는 않는다.
경쟁 하에서는 가난하게 출발한 어떤 사람이 큰 부에 이르게 될 가능성은 유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보다 훨씬 더 낮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경쟁시스템에서는 가난하게 출발한 사람도 큰 부를 쌓는 것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큰 부가 자신에게만 달려 있을 뿐 권력자의 선처에 달려 있지 않다. 경쟁시스템은 아무도 누군가가 큰 부를 이루려는 시도를 금지할 수 없는 유일한 시스템이다.
영국의 미숙련노동자가 모든 진정한 의미에서 형편없는 임금을 받지만, 자신의 삶의 틀을 형성하는 데 있어 독일의 무수한 소규모 기업가, 혹은 더 좋은 보수를 받는 엔지니어, 혹은 러시아의 메니저보다 더 많은 자유를 누리고 있다. 이런 명백한 사실을 간과하게 된 것은 단지 우리가 부자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만약 모든 생산수단들이 한 사람의 손아귀에 귀속되어 있다면, 그 손이 사회 전체라는 이름의 손이든 아니면 독재자의 손이든 관계없이, 이러한 통제를 행사하는 자는 우리에 대해 완전한 권력을 가지게 된다. 작은 규모의 인종적 혹은 종교적 소수집단의 한 구성원은 그가 속한 공동체의 재산을 가진 동료구성원이 그를 고용할 수 있게 되는 한, 비록 재산이 없는 경우에도 사유재산권이 철폐되고 자신이 공동체 재산의 한몫에 대한 명목적 소유자에 불과한 때보다 더 자유로울 수 있다.
어떤 사회에서도 항상 일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실업 혹은 소득의 상실은, 당국에 의해 의도적으로 강제된 것이 아니라 불행의 결과일 때 분명 덜 불명예스럽다. 실업이나 소득의 상실과 같은 경험이 아무리 쓰라리다 할지라도, 계획사회에서 그런 경험을 겪을 때에는 훨씬 더 나쁠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든 부닥칠 수 있는(운에 따른) 고통에는 순응할 것이지만, 당국의 결정에 따른 결과인 고통에 대해서는 쉽사리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 계획과 소득분배
국가가 경제활동 전반을 계획하는 것을 자신의 과업으로 떠맡는 순간, 불가피하게 서로 다른 개인들과 집단들이 차지할 적절한 지위의 문제는 정말 핵심적인 정치적 분쟁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 분배적 정의와 절대적 평등
■ 정당한 가격과 공정한 가격, 적절한 지위에 대한 충돌
우리가 가진 기준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경쟁체제로부터 도출된 것이며, 경쟁이 사라지면 필연적으로 곧 사라질 것이다. 우리가 정당한 가격 혹은 공정한 임금이라는 말로 뜻하고자 하는 것은 통상적 가격이나 임금,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사람들이 기대하게 된 보상, 혹은 만약 독점적 착취가 없었더라면 존재했을 가격이나 임금이다.
■ 사회주의가 준비한 전체주의적 통제
■ 중산계급 사회주의
사회주의로 향해 점차 나아가는 과정에서 모든 이에게 점점 명백해지는 사실은 자신의 소득과 일반적 지위가 국가의 강제적 도구에 의해 결정되며,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거나 개선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도록 국가라는 도구에 영향을 미치고, 또 이를 통제할 수 있는 조직화된 집단의 구성원이 되는 것이다.
사회주의는 과거 중산계급의 급속한 소멸을 믿었고, 그래서 새로운 중산계급, 즉 무수히 많은 점원과 타이피스트, 중간상인과 낮은 직급의 공무원, 그리고 낮은 전문직 계층의 성장을 완전히 무시하였다. 당분간 이 계급은 노동운동의 지도자들을 많이 배출한다. 그러나 이 계급의 지위가 산업노동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악해진다는 것이 점차 분명해지면서, 산업노동자들의 길잡이가 되어 준 이상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호소력을 대부분 상실하였다.
과거 사회주의 정당이 특정한 직업집단의 지지를 얻기 위해 성공적으로 채택했던 수단, 즉 그들의 상대적인 경제적 지위를 향상시키는 전략은 이제 대다수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그대로 사용될 수 없다. 상대적 지위가 악화된 사람들의 지지에 호소하는 라이벌 사회주의 운동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크게 보아 산업노동운동이 창출한 노동귀족에 대해 종전에 비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게 된 계급의 반발이라고 할 수 있다. 대학에서 훈련 받았으나 성공적이지 못했던 엔지니어나 변호사와 같은 전문가와 ‘화이트칼라 프롤레타리아’ 일반이 가지고 잇던, 자신보다 몇 배의 소득을 버는 강력한 노동조합의 열차 기관사, 인쇄소 식자공, 노동조합원에 대한 질시가 어떤 경제적 요인보다도 이런 운동을 더 강력하게 지원하였다.
나치운동 초기시절 화폐소득으로 볼 때, 나치운동의 보통 운동원은 평균적 노동조합원이나 과거의 사회주의 정당의 당원보다 가난하였다. 이런 점은 후일 나치의 보통 운동원들이 더 좋은 시절을 만나게 되어, 대체로 과거의 결과인 환경에서 여전히 살고 있다는 사실과 통렬한 대조를 이룬다.
■ 경쟁하는 사회주의 간의 대립관계
항상 자신의 정당을 사회주의로 향한 미래의 보다 일반적인 운동의 자연적 싹으로 간주했던 과거 사회주의 지도자들은 사회주의적 방법을 확대할 때마다 거대한 빈곤계급의 분노가 자신들에게 적대적으로 되어간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과거 사회주의 정당들이나 특정 산업에서 조직화된 노동자들이 보통 그 특정 산업에서 사용자들과 공동행동을 취하기로 서로 이해하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던 반면, 이 대규모 빈곤계급은 추운 바깥에서 따돌림을 당하였다. 빈곤계급들은 약간의 정당성을 가지고, 번창하는 노동운동 부문들은 피착취계급이 아니라 착취계급에 t고하는 것으로 보았다.
파시즘과 민족사회주의가 대부분의 새로운 지지자를 얻었던 계급인 중하계급의 분노는 더욱 강렬해졌는데, 이렇게 된 것은 자신이 받았던 교육과 훈련으로 인해 많은 경우 그들은 명령을 내리는 지위를 열망하게 되었고, 또 자신을 명령하는 계급의 구성원이 될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제9장
보장과 자유
"사회 전체가 노동의 평등과 급여의 평등이 달성되는 하나의 사무실, 하나의 공장이 될 것이다."
-레닌-
■ 두 가지 유형의 보장
■ 자유경제에 수반되는 소득의 가변성
■ 군대식으로 조직된 사회에서만 가능한 지위의 보장
■ 특정집단에 대한 보장은 타 집단에 대한 비보장
자유에 익숙한 사회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의식적으로 이런 대가를 지불하고 군대식 보장을 구매하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모든 곳에서 따르고 있는 정책, 그러니까 보장의 특권을 이때는 이 집단에게, 저때는 저 집단에게 나누어 주는 정책으로, 경제적 보장을 얻으려는 열망이 자유에 대한 사랑보다 강렬해지게 만드는 경향이 빠르게 창출되고 있다.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이유는 한 집단에 대해 완전한 보장을 하나씩 부여할 때마다 나머지 집단의 불안정성은 필연적으로 증가한다는 데 있다. 만약 당신이 어떤 집단에게 크기가 변하는 케이크의 고정된 부분을 보장하면, 나머지 집단들에게 남은 몫은 전체의 규모보다 비례적으로 더 많이 변동하게 된다. 그리고 경쟁체제가 제공하는 보장의 본질적 요소인 너무나 다양한 기회는 점차 감소한다.
우리가 시장체제에 간섭하여 완전한 안전을 보장하려고 노력할수록 오히려 불안정이 더 커진다. 더 나쁜 것은 하나의 특권으로서 보장을 획득한 사람들의 안정과 특권에서 배제된 사람들의 점증하는 불안 사이의 대조가 더 커진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보장이 하나의 특권이 되고, 이로부터 배제된 사람들에게 위험이 가중될수록, 보장은 더 가치를 가진 것으로 평가될 것이다.
특권을 가진 사람의 수가 증가하고 이들의 안정과 다른 사람들의 불안의 대비가 더욱 확연해지면서, 점차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사회적 가치가 형성될 것이다. 더 이상 사회적 지위와 신분에 위신을 세워주는 것은 강인한 독립심이 아니라 보장이다. 젊은이의 결혼 적합성은 스스로 성공할 수 있는 자신감보다는 연금을 탈 확실한 권리가 될 것이다. 한편, 젊은 시절이 봉급을 받는 지위의 도피처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은 최하층 천민의 소름끼치는 상태가 평생 지속된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 보장에 대한 점증하는 요구가 가지는 의미
우리의 젊은이들은 어릴 적부터 보장된 봉급을 받는 지위가 기업의 위험보다 우월하고 비이기적이며, 이해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라는 설명을 들으면서 자란다. 그래서 그들이 일정한 금액이 보장된 봉급을 창업의 위험에 비해 더 선호한다고 해서 우리는 그들을 나무랄 수 없다.
현대의 젊은 세대는 학교와 언론에서 상업적 기업가정신을 불명예스러운 것으로, 이윤을 만들어내는 것을 비도덕적인 것으로, 그리고 백 명의 사람을 고용하는 것을 착취로 치부하는 반면, 같은 수의 사람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을 명예로운 것으로 바라보는 세계에서 자라났다.
보장의 이상이 독일의 이상을 누르고 승리함에 따라 일어날 사회구조의 변화는 10년 혹은 20년 전에도 여전히 영국식 사회와 독일식 사회로 간주할 수 있었던 두 유형의 사회를 비교할 때 가장 잘 드러난다.
독일국민의 대다수가 거의 언제나 다른 나라에서보다 전쟁을 위해 조직화되었다기보다는 군대식 조직들이 너무나 많은 다른 목적들을 위해 쓰였으며, 이것이 독일사회에 그 특이한 성격을 부여했던 것이다. 다른 어떤 나라보다 독일에서 만간의 삶 대부분이 의도적으로 위로부터 조직화되었고, 그래서 독일국민 중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독립적으로 여기지 않고 국가에 의해 지명된 하급관료로 생각했던 것이다. 이것이 독일의 사회구조에 특이한 성격을 부여하였다. 독일인 스스로 뽐내는 것처럼, 독일은 당국이 오랫동안 관청의 행정사무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 소득과 지위를 활당 하고 보장하는 관료국가였다.
어디에서건 자유의 정신이 강제력에 의해 절멸될 수 있는지는 의심스럽지만, 어떤 국민도 자유가 독일에서 서서히 질식해간 과정을 성공적으로 견뎌낼 수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명예와 지위가 거의 전적으로 국가의 급료를 받는 봉사자가 될 때 성취되는 곳에서, 할당받은 업무를 이행하는 것이 스스로 유용한 분야를 선택하는 것보다 칭송받는 곳에서, 공식적 위계질서에서 높은 자리 혹은 고정된 소득에 대한 권리를 부여하지 않는 그 어떤 삶의 추구도 이를 열등하거나 심지어 불명예스러운 것으로 간주하는 곳에서, 많은 이들이 오랫동안 보장보다 자유를 선호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그리고 종속적 지위 대신 얻을 수 있는 것은 너무나 불안정한 지위일 뿐이며, 그런 지위를 가진 사람은 성공하든 실패하든 마찬가지로 경멸을 당하는 곳에서, 자유의 대가로 보장을 택하려는 유혹에 저항할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일단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면, 자유는 이 지구상에서 대부분의 좋은 것을 희생해야만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정말 조롱거리가 될 뿐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 보장 없이 자유는 가질 가치가 없는 것으로 느끼게 되고, 보장을 얻기 위해 자유를 기꺼이 희생하게 되는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자유는 오직 가격을 지불하고 얻을 수 있다. 개인으로서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보존하기 위해 심한 물질적 희생도 감수할 각오를 해야 한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이런 진실에 솔직하게 직면할 줄 알아야9 한다. 이것이 정말 중요한 본질적인 것이다.
제10장
왜 가장 사악한 자들이
최고의 권력을 잡게 되는가?
"모든 권력은 부패한다.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
-액턴 경-
■ 집단주의의 도덕적 영향
우리는 스스로를 기만하여 모든 선한 사람들이 틀림없이 민주주의자일 것이라거나 혹은 이들이 반드시 정부에 참여하려 할 것이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 많은 이들이 의심의 여지없이 선한 이보다는 차라리 더 유능하다고 생각하는 이에게 정부를 맡기려고 할 것이다.
■ 공통분모를 작게 요구할수록 커지는 동질적 집단의 규모
■ 사회주의에 특유한 자기중심주의 경향
집단주의 철학이 내재된 모순 가운데 하나는 집단주의가 개인주의가 발전시킨 인본주의적 도덕들에 근거를 두는 반면, 비교적 소규모 집단에서만 실천가능하다는 점이다. 이론에 머무는 한 사회주의는 국제적이지만, 실제로 적용되는 순간 러시아에서이건 독일에서이건 사회주의는 과격한 민족주의가 된다. 이 사실은 왜 사회주의 실행이 모든 곳에서 전체주의적인 반면, 자유사회주의가 대부분의 서구인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순수하게 이론에 머물 수밖에 없는지 설명하는 이유들 중 하나이다. 집단주의는 자유주의의 광범한 인본주의를 수용할 여지가 없으며, 다만 전체주의의 비좁은 배타주의를 담을 수 있을 뿐이다.
니부르(Niebuhr)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라는 제목에는 -비록 그가 자신의 주제로부터 도출해내는 결론들에는 우리가 별로 수긍하지 않을지 모르지만-의미심장한 진리가 숨어 있다. 그가 다른 곳에서 말하는 것처럼 “현대인들 사이에 그들이 자신의 악덕들을 점점 더 큰 집단에다 떠맡겨 버렸기 때문에 스스로는 윤리적이라고 상상하는 경향이 점증하는 것”은 정말 사실이다. 한 집단을 대신해 행동한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그 집단 속에 있는 개인으로서 그들의 행동을 통제하는 수많은 도덕적 제약들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 같다.
대개의 계획자들이 국제주의에 대해 취하는 명백히 적대적인 태도는 다음 사실에 의해 더 잘 설명된다. 즉, 현존하는 세계에서는 어떤 집단이든 외부와 접촉하게 될수록 계획 가능 영역에서도 그러한 계획을 효과적으로 실행하기가 어려워진다는 게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계획에 대한 가장 종합적인 연구들을 취합한 편집자가 유감스럽게도 “대부분의 계획자들은 군국주의적 민족주의자들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 권력의 숭배
■ 모든 수단을 정당화하는 사회적 목적
모든 집단주의체제의 두 가지 중심적 특징, 즉 첫째, 그 집단이 공통적으로 받아들이는 목적체계를 가질 필요성과, 둘째, 이런 목적들을 달성하기 위해 그 집단에게 최대한 권력을 부여하려는 절대적 욕구. 이 두 가지로부터 특정 도덕체계가 자라나게 된다. 이 도덕체계는 우리의 도덕체계와 몇 가지 점에서는 일치하지만 다른 점들에서는 과격하게 대조적이다.
어떤 점에서는 우리의 도덕과 너무나 달라서 이를 도덕이라고 부를 수 잇는지 의심스럽다. 즉, 그 도덕체계는 개인적 양식이 자유롭게 그 자신의 규칙을 적용할 여지를 남겨 두지 않으며, 개인이 모든 상황에서 준수하도록 요구되거나 허용되는 어떤 일반적 규칙이 없다.
■ 전체주의 국가의 시민에게 권장되는 습관
집단주의 윤리에는 절대적인 형식적 규칙들이 없다. 이것은 물론 집단주의 공동체가 개인들에게 장려하는 어떤 유용한 습관, 혹은 억제하려는 여타 습관들이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그런 공동체는 개인들의 삶의 습관들에 대해 개인주의 공동체보다 훨씬 더 큰 관심을 가질 것이다. 집단주의 사회에서 유용한 구성원이 된다는 것은 끊임없는 실천으로 강화되어야 하는 매우 특정한 자질을 필요로 한다. 우리가 이 자질들을 유용한 습관들이라고 이름 붙이고 그것을 도덕적 미덕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이유는 개인이 유용한 습관으로 불리는 이 규칙들을 어떤 특정한 명령 위에 두거나, 이 규칙들을 그가 속한 공동체의 특정한 목표들 중 그 어떤 목표의 달성에도 장애가 되게 하는 것이 결코 허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 습관화된 규칙들은 단지 직접적 명령이나 특정한 목표가 정해진 후 남은 틈새를 메워 줄 뿐이지 결코 당국의 의지와 일으킬 수 있는 갈등을 정당화시켜 줄 수 없다.
전반적으로 독일인들이 부지런하고 기강이 서 있으며, 어떤 과제에 착수하면 철저하고 무자비할 정도로 정열적이며, 양심적이고 성실하다는 점. 그리고 독일인들은 강한 질서의식과 의무감, 그리고 권위에 대한 철저한 복종심을 지니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그들은 개인적 희생을 기꺼이 감수하려는 태도와 육체적 위험에 대해 강한 용기를 보여줄 때가 많다는 점을 부정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이런 점들은 모두 독일인을 할당된 과제를 실행하는 데 매우 효과적인 도구가 되게 한다. 이런 이유로 이런 독일식 미덕들은 사실 구프러시아제국과 프러시아 지배하의 공화국에서 조심스레 육성되었다. 흔히 전형적 독일인에게 부족하다고 여기는 것은 주로 다음의 개인적 미덕들이다.
즉 타인과 타인의 의견에 대한 관용과 존중, 독립정신, 그리고(독일인 스스로 그 부족을 의식하고 시민용기라 부르는)상사에 맞서 자신의 신념을 방어하는 올곧은 성격과 결단성, 약자에 대한 배려, 개인 자유의 오랜 전통만이 창출하는 권력에 대한 건강한 경멸과 혐오 등이 바로 그것이다.
집단주의 관점에서 보면, 반대자에 대한 가차 없는 억압. 개인적 삶과 행복에 대한 완전한 무시는 ,이런 기본적 전제의 본질적이고 피할 수 없는 결과들이다. 그래서 집단주의자들은 이것을 인정하는 동시에 공동체가 추구하는 목적들의 완전한 실현을 개인의 이기적 이해관계가 방해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체계보다 그 체제가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독일의 철학자들이 개인적 행복의 추구 자체를 부도덕하다고 보고 부과된 임무의 완수만을 칭찬받을 가치가 있다고 되풀이할 때, 이런 독일 철학자들의 설명은 이와 다른 전통 속에서 자란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독일 철학자들은 정말 진지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의 공통된 최우선의 목적이 잇는 곳에서는 어떤 일반적 도덕 혹은 규칙이 존재할 여지가 없다. 우리는 비록 제한적이지만 전시에 이를 경험한다.
제11장
진리의 종말
"사상의 국유화가 어느 곳에서나 산업의 국유화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나아갔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카(E.H. Carr)-
■ 선전의 역할
■ 계획의 기초가 되는 사실에 대한 강요
■ 옛 가치의 이름으로 도입되는 새로운 가치
사람들을 자신이 봉사하게 될 가치들의 타당성을 수용하도록 만드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이 가치들이 그들이 항상 지니고 있었으나 종전에는 적절하게 이해되거나 인지되지 못했던 가치들과 정말 똑같다고 혹은 적어도 그들 중 최선의 사람들이 지니던 것과 같다고 그들을 설득하는 것이다.
■ 통제받지 않는 학문분야의 실종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독립적 사고를 박탈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여전히 비판적 성향을 지닌 소수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들을 침묵하게 만들어야 한다.
전제주의 사회에서는 공개적 비판이나 의심의 표시는 공공의 지지를 약화시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억압되어야 한다.
■ 진리와 사상의 자유
제12장
나치즘의 사회주의적 뿌리
■ 민족사회주의 세력의 발흥을 가져온 사회주의의 지원
■ 좀바르트
■ 플렝게
■ 렌슈
■ 슈펭글러와 브루크: 자유주의 서구세계에 대한 무기로서의 사회주의
제13장
우리 속에 잠재된 전체주의
"권력당국이 조직의 가면을 쓰게 되면 자유로운
사람들의 공동체를 전체주의 국가로 전환시키기에 충분한 매력을 만들어간다."
-더 타임스-
■ 독일식 이상의 확산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15년 전에는 독일에서도 지금과 같은 만행이 일어날 가능성은 독일인 자신들 가운데 열에 아홉뿐만 아니라 독일에 적대적이던 대부분의 외국 관찰자들에게조차 하나의 환상처럼 보였다는 점이다. 마치 지금 영국에서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을 그렇게 여기듯 말이다. ~~~이 나라 조건들이 점차 닮아가는 것은 지금의 독일이 아니라 20년 혹은 30년 전의 독일이다.
■ 보다 독일적인 역사적 현실주의
■ 자본의 독점노선
■ 노동의 독점노선
제14장
물질적 조건과 이상적 목적들
■ 우리 세대의 경제공포증
가장 강력하게 추진된 사회개조의 주장들은 거의 대부분 그 성격에서 경제적이다.
우리가 놀라울 정도로 자연의 힘을 다스리는 방법을 배웠지만 사회적 협력의 가능성을 성공적으로 활용하는 데에는 슬프게도 너무 뒤쳐져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이 언급에만 한정하면 상당히 옳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비교에서 한 걸음 더 n나아가 우리가 자연의 힘을 다스리는 것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사회의 힘을 지배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것은 전체주의로 가는 통로일 뿐만 아니라 우리 문명의 파괴로 가는 통로이며, 미래의 발전을 막는 확실한 방법이다.
■ 단일목적의 다른 목적에 대한 항구적 지배
개인적 자유는 어떤 하나의 목적에 최고의 우월성을 부여하여 거기에 사회 전체로 하여금 완전히, 그리고 항구적으로 복종하도록 하는 것과는 양립할 수 없다. ~~~자유사회가 단일한 목적에 예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이 규칙의 유일한 예외는 전쟁과 여타 임시적 재앙이 발생한 경우이다. 이 경우 거의 모든 것을 당장의 직접적 필요에 예속시키는 것은 장기적으로 우리의 자유를 보존하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이다.
평화 시에는 어떤 하나의 목적이 모든 다른 것들보다 절대적으로 선호되도록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지금 모든 사람이 최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동의하는 하나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와 같은 목표가 모든 다른 것을 배제한 채 우리를 지배하도록 허용되어야 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즉, 그럴싸한 문구가 표현하듯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성취되어야 하는 게 아니다. 바로 이(고용관련)분야야말로 완전고용과 같은 애매하지만 인기 있는 구절들의 매력이 극단적으로 근시안적 조치들을 취하게 할 수 있으며, 외골수 이상주의자의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반드시 실행해야 한다”는 식의 범주적이고 무책임한 말들이 우리에게 가장 큰 피해를 줄 수 있는 분야이다.
우리가 전후 이 분야에서 직면하는 과제를 열린 시각으로 접근하고, 우리가 성취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인식해야 한다는 사실은 너무나 중요하다. 종전 직후 상황의 지배적 측면들 가운데 하나는 전쟁의 특별한 필요로 수십만 명의 남녀를 전쟁 중에는 상당히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었던 특별한 직업으로 끌어들였다는 점이다. 많은 경우 전후 특정한 직종에서는 전시와 동일한 수를 고용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노동조합이 성공적으로 특정 집단의 임금하락을 저지한다면, 이제는 단지 두 가지 대안만 남게 된다. 강제력의 사용, 즉 일부 개인을 선별하여 비교적 급여가 지금보다 못한 다른 지위로 강제로 이전시키는 하나의 대안과 전쟁 중에 벌던 비교적 높은 임금에서 더 이상 고용될 수 없는 사람들을 비교적 낮은 임금을 받아들일 때까지 실업상태로 놓아두는 또 하나의 대안이 그것이다.
■ 모든 희망의 실현이 달린 경제성장
■ 영국적 정치이상의 퇴보
우리의 보다 민감해진 사회적 양심에 대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버릇이 있지만, 우리가 우리의 개별행위의 실천을 통해 이런 버릇을 정당화하고 있는지는 결코 분명하지 않다. 소극적 측면에서 보면, 현존 사회질서의 불공정성에 대해 의분을 느끼는 데 있어 우리 세대는 아마 우리 앞 세대들을 능가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동향이 도덕의 고유분야인 개인행동에서 우리의 적극적(실천적)기준에 대해 미친 효과. 그리고 우리가 사회적 기관의 편법과 긴급조치에 반대하여 도덕적 원칙을 견지하려는 진지한 태도에 대해 미친 효과는 우리가 느끼는 의분의 정도와는 매우 다른 문제이다.
이 분야의 이슈들은 너무나 혼란스러워져서 근본분제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다. 우리 세대가 망각할 위험에 처한 것은, 도덕은 필연적으로 개인의 행동에 관한 현상이라는 사실뿐만 아니라, 도덕은 개인이 자유롭게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분야, 도덕규칙의 준수를 위해 개인적 이득을 자발적으로 포기하도록 요청하는 분야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개인이 책임지는 영역을 벗어나서는 선함도, 악함도, 도덕적 장점을 보일 기회도, 또한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 자신의 욕구를 희생하여 자신의 확신을 증명해 보일 기회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의 이해관계에 대해 책임지는 곳에서만, 그리고 자유롭게 그것을 희생할 수 있는 곳에서만 우리의 의사결정은 도덕적 가치를 지닌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희생으로 이타적일 자격을 가지고 있지도 않으며, 우리가 아무런 선택을 할 수 없다면 이타적이라는 것에 아무런 칭송할 만한 것도 있을 수 없다. 모든 측면에서 선한 일을 하도록 만들어진 사회구성원들은 칭송받을 아무런 자격도 없다. 밀턴이 말한 것처럼, “만약 성년인 사람이 취한 선하거나 악한 모든 행동이 박봉, 명령, 그리고 강제 아래 이루어진 것이라면, 그것은 이름뿐인 미덕이 아니고 무엇이며, 그 선행에 합당할 칭찬이 무엇이겠으며, 소박하고 정의롭거나 절제하는 것이 고마울 게 있을까?”
물질적 상황이 우리에게 선택을 강요하는 분야에서 우리 자신의 행위를 결정할 자유, 그리고 우리 자신의 삶을 우리 자신의 양심에 따라 꾸려간 결과에 대한 책임, 이 두 가지가 그 속에서 도덕적 감성이 자라날 수 있고, 도덕적 가치들이 개인의 자유로운 결정 속에서 날마다 새로 창출되는 토양이다. 자신의 상관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양심에 대한 책임, 강제에 의해 강요되지 않은 의무에 대한 인식, 가치 있게 여기는 것 중 다른 사람을 위해 어느 것을 희생할지 스스로 결정하고, 그 결정에 따른 결과를 감수하는 것과 같은 것들이야말로 바로 도덕이란 이름에 어울리는 도덕의 본질 바로 그것이다.
개인행위의 영역에서 집단주의가 미친 영향은 거의 전적으로 파괴적이었음은 불가피할 뿐만 아니라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책임으로부터의 면제를 그 주된 약속으로 내거는 운동은 그 운동을 태동시킨 이상이 아무리 높더라도 그 효과 면에서 반도덕적일 수밖에 없다.
개인의 능력이 허용하는 경우에도 불공평을 치유하려는 개인적 의무감은 강화되기보다는 약화되었고, 책임을 지려는 혼쾌한 태도와 어떻게 선택할지 아는 것이 개인적 의무라는 의식이 두 가지 모두 눈에 띄게 손상되었다.
바람직한 상태를 당국이 만들어야 한다고 요구하거나 심지어 모든 다른 사람이 같은 일을 하게 된다는 조건이라면 기꺼이 복종하겠다는 그런 태도가 만연하고 있다. 자신이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것을 아마도 적대적 여론에 직면해서도 자신의 욕구를 희생하면서까지 곧바로 실행하려는 태도는 점차 찾기 어려워지고 있다. 분명 이 두 태도 사이에는 너무나 현격한 차이가 있다. 우리가 사실 특정한 권리의 남용에 대해서는 더 관대해졌으며, 개별 경우에 나타나는 불공평에 대해 훨씬 더 무관심해졌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은 무수히 많다. 이렇게 된 것은 국가가 모든 일을 올바로 고치게 될, 완전히 다른 체계에 우리의 관심을 집중했기 때문이다. 앞에서 제시되었듯이 집합적 행동에 대한 열정은 우리가 개인으로서 조금 자제하는 것을 배웠던 이기심에 집단적으로 지금 후회 없이 탐닉하는 길이기도 한 것이다.
지금까지 별로 존중받지 못하고 별로 실천되지 못하는 미덕, 즉 독립심, 자조,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는 태도, 다수에 대항하여 자기의 소신을 지키는 각오, 기꺼이 자신의 이웃과 자발적으로 협력하려는 태도, 이 모든 것들은 본질적으로 개인주의 사회의 작동에 원천이 되는 미덕이다. 집단주의는 그 자리에 대신 집어넣을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이 미덕들을 모두 파괴하였다면 개인으로 하여금 그저 복종하고 집단적 결정을 실행하도록 개인들에게 강제하는 것은 옳다는 생각 이외에는 아무것도 채울 수 없는 공백이 남겨질 것이다.
전체주의 사회에서는 개인의 도덕적 선택의 기회는 점차 축소되어 주기적 대표자 선거만 남게 되는 경향이 잇을 것이다. 그러나 이 대표자 선거마저도 각 개인이 그의 도덕적 가치를 시험하거나 끊임없이 자신의 가치체계를 확신하고 증명해야 하며, 높게 평가하는 가치의 실현을 위해 낮게 평가하는 가치를 희생함으로써 스스로 공연한 가치체계의 진실성을 입증해야 한다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도덕적 선택의 기회인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제시하는 미래의 청사진 t고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이 우리 조상들의 꿈과 희망 속에서 그랬던 것보다 뒷전으로 밀려난 가치들은 도대체 어떤 종류의 가치들인가? 이것은 분명 물질적 안락함은 아니며 생활수준의 향상 혹은 낮은 위치를 지닌 어떤 사회적 지위의 보장도 아니다. 감히 대중에게 이상적 목적들을 제고시키기 위해 더 나은 물질적 전망을 희생해야 한다고 제시하는 인기를 누리는 작가나 연설가가 있는가? 실제로는 완전히 반대가 아닌가?
우리가 너무나 자주 19세기의 환상들로 간주하라고 배우는 것들, 자유와 독립, 진실과 지적 정직성, 평화와 민주주의, 그리고 조직화된 집단의 구성원에 불과한 자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개인에 대한 존중, 이것들은 실은 모두 도덕적 가치가 아닌가? 신성불가침으로 간주되고, 미래에 대한 어떤 계획에서도 존중되어야 할 움직일 수 없는 경계로 취급되기 때문에 어떤 개혁가라도 감히 손을 대려하지 않는 확고부동한 중심축은 이제 도대체 무엇인가?
부동의 중심축은 이제 더 이상 개인의 자유, 이주의 자유가 아니며, 언론의 자유라고 하기도 어렵다. 이제 그 중심축은 이 집단 혹은 저 집단의 보호수준이 되었다. 즉, 그 중심축은 어떤 집단에게 부여된 권리, 다른 사람들이 동료시민들에게 그들이 필요한 것을 제공하지 못하도록 배제할 권리가 되었다.
다른 국적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차별은 말할 것도 없고, 폐쇄된 집단의 회우너과 비회원 사이의 차별은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어떤 집단의 이익을 위해 정부행동에 의해 개인들에 가해지는 불법은 무감각과 거의 구별하기 어려운 수준의 무관심으로 무시되고 있다. 인구의 강제이주와 같은 개인의 가장 기초적 구너리에 대한 가장 무식한 형태의 침해가 빈발하고 잇으나, 자유주의자라고 생각되던 사람들조차 이런 일들을 점점 더 묵인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도덕적 감성이 날카로워지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무디어졌음을 의미한다.
■ 시급한 영국적 전통에 대한 신뢰회복
영국국민이 스위스와 네덜란드와 같은 일부 소국을 제외하고는 대개의 여타 국민들보다 더 높이 보유하던 미덕이 있다. 독립심과 자조정신, 개인주도와 지역책임, 자발적 행동에 대한 성공적 의존, 이웃에 대한 불간섭과 다르고 독특한 것에 대한 관용, 관습과 전통에 대한 존중, 그리고 권력과 권위에 대한 건전한 의구심. 이런 것들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이 전통과 제도가 집단주의 등장과 집단주의에 함축된 중앙 집권적 경향으로 인해 가속적으로 파괴되고 있다.
영국국민들은 당파와 상관없이 모두 다소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가장 두드러진 형태로 자유주의 사상을 보유하고 있다.
제15장
국제질서의 전망
■ 국가계획과 국제질서의 상충
한 나라의 모든 국민 사이에 인위적으로 경제적 연대감이 조장되고, 국가적 규모의 계획이 상반된 이해를 가진 새로운 집단들을 창출하게 되면, 이로부터 평화에 대한 위협이 발생할 수 있다.
시장에 대한 경쟁 혹은 원자재에 대한 경쟁을 국가 간 혹은 조직화된 집단간 협상으로 대체하면 국제적 마찰이 줄어든다고 보는 것은 가장 치명적인 환상 가운데 하나이다. 이것은 비유 속의 이른바 경쟁의 투쟁 대신 물리적 힘의 경쟁을 도입하는 데 불과하다. 이것은 물리적 힘에 의존하지 않은 채 개인들 사이에 결정되어야 할 경쟁관계를, 아무런 상위법에 의해 제약받지 않은 채 강력하게 무장한 국가간 경쟁으로 전환시킬 뿐이다. 아무런 상위법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최고 심판관이기도 한, 그 대표들이 각 국가의 즉각적 이익 이외에는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는, 그런 국가단체들 사이의 경제교역은 틀림없이 힘의 충돌로 귀결될 것이다.
■ 국제경제계획이 야기하는 국제적 규모의 정치적 곤란
■ 물리력으로만 해결 가능한 이상들의 충돌
[결론]
이 책의 목적은 장래의 바람직한 사회질서에 대한 자세한 프로그램을 작성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Review]
오늘날 국민들의 마음은 정치적 이념을 넘어 감정적으로 크게 양분되어 있다. 텔레비전 뉴스는 종일 시시콜콜 정치인들의 이야기로 이어지고, 사람들은 거기서 들은 이야기들을 가지고 또 이웃들과 나누며 시시비비를 가린다. 그러는 동안 사람들의 마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양 진영으로 갈라져 버렸다. 사석에서도 정치 이야기가 나오면 서로의 눈치를 살피게 되고, 가정에서도 부모와 자식 간에 다툼했다는 웃지 못 할 이야기까지 듣게 되는 판국이다.
정치적 이념을 달리하는 보수와 진보는 어느 나라에도 같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그 고리가 남북한의 정치적 사상적 노선에 연결되어 있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그리고 자유민주주의의 논쟁은 이미 지나간 시대에 끝나 버린 일이지만 아직까지도 남북이 분단된 우리나라는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 있어서 정권이 바뀔 때마다 논쟁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지난해 대통령의 취임 연설에서 “자유와 이성”, “시장경제”라는 용어가 여러 번 반복되어 화제가 되었는데, 여기에는 지난정부와 선을 긋고 새로운 정부를 세우겠다는 분명한 의지가 들어 있다고 본다.
이 책은 1940년대 정치적 이념으로 갈등을 겪고 있던 영국인들에게 독일의 사회주의를 따라가지 말라는 교훈의 내용이다. 사회주의는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여 평등을 실현하려는 무모한 유토피아일 뿐, 궁극적으로는 국민을 노예로 삼아가는 길이며 부패하여 지속될 수 없다는 경고의 내용이 담겨 있다. 인류가 큰 희생을 대가로 치르게 된 1, 2차 세계 대전에는 독일과 일본이라는 군국주의가 있다. 그 배후(특히 독일)에는 개개인의 의사와 자유를 희생해서라도 사회 전체의 이익을 중시하는 사회주의적 이데올로기가 있었다는 지적은 흥미롭다.
“다른 어떤 나라보다 독일에서 만간의 삶 대부분이 의도적으로 위로부터 조직화되었고, 그래서 독일국민 중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독립적으로 여기지 않고 국가에 의해 지명된 하급관료로 생각했던 것이다. 이것이 독일의 사회구조에 특이한 성격을 부여하였다. 독일인 스스로 뽐내는 것처럼, 독일은 당국이 오랫동안 관청의 행정사무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 소득과 지위를 할당 하고 보장하는 관료국가였다.”(본문)
엊그제 뉴스에 북한이 러시아의 푸틴을 만나기 위해 모스크바에 갈 것임을 보도하면서 미국은 두 나라 간의 밀약이 북한의 무기 거래에 있을 것이라며, 만약 그렇게 된다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경고했다. 대통령도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ASEAN 총회에서 이 일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였다. 미국이 중국과 러시아에 이렇게 민감한 이유는 물론 경제적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체제가 아직은 사회주의 체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사회 속에서는 고통을 받으며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고, 알게 모르게 사회주의 이상을 바라는 이들도 있을 수 있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방법론적인 것 외에 우리가 무엇에 바탕을 둘 때 그것이 옳은가를 아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비록 오래전에 쓰인 책이지만 오늘의 대한민국이 처한 여러 정치적 갈등에서 올바른 선택을 하는 데 도움을 주는 책이다. 이 책에서도 인용한 휠덜린의 말 “국가가 지상 지옥이 된 것은 항상 국가를 지상천국으로 만들려고 했기 때문이다.”라는 말은 가슴에 남는다. 어려운 책을 끝까지 읽게 된 것에는 이 책의 문장이 너무나 분명하고 잘 표현되어 어떤 유명 인사의 연설문을 읽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저자는 1899년 오스트리아 태생의 영국 경제학자로 신자유주의 입장에서 영국의 국가권력과 경제정책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특히 1943년 이 책<노예의 길>을 발표하면서 명성을 얻었고, 1974년에는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다.■
(본문)
“사회주의는 때로는 단지 사회주의의 궁극적 목표인 사회정의, 더 큰 평등과 안전이라는 이상을 묘사하거나 의미한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또한 대개의 사회주의자들이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채택하는 특정한 방법을 의미하기도 한다. 많은 유능한 사람들은 이 방법이야말로 그 목적을 충분하고도 빠르게 성취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런 의미를 지닌 사회주의란 사기업제도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철폐하고,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가 대신 그 자리에 중앙계획ㄷ아국이 들어서는 계획경제 체제의 창설을 뜻한다.”
“자유주의의 주장은 인간 노력들을 조정하는 수단으로 경쟁의 힘을 가능한 한 최대한 잘 활용하자는 것이지 그냥 그대로 놔두라는 것이 아니다. 이는 유효한 경쟁이 창출될 수 있는 곳에서는 다른 그 어떤 방법보다도 경쟁이 개별적 노력의 좋은 길잡이가 되어 준다는 확신에 기초한 것이다.”
“국가는 단지 일반적 유형의 상황에 적용되는 규칙을 확립하는 일에 그 자신의 임무를 제한하여야 하며,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일어나는 상황들에 따라 변화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는 각 개인들에게 사적 자유를 허용해야 한다. 왜냐하면 각각의 개별 경우에 관련된 당사자들은 이 상황들을 다른 그 누구보다 충분히 더 잘 알 수 있고, 거기에 자신들의 행동을 적용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
“현대의 젊은 세대는 학교와 언론에서 상업적 기업가정신을 불명예스러운 것으로, 이윤을 만들어내는 것을 비도덕적인 것으로, 그리고 백 명의 사람을 고용하는 것을 착취로 치부하는 반면, 같은 수의 사람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을 명예로운 것으로 바라보는 세계에서 자라났다. ”
“경쟁사회에서 빈곤한 사람들에게 열려 있는 기회들은 부유한 사람들에게 개방된 기회들보다 훨씬 더 제약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쟁사회의 가난한 사람들이 이와는 다른 유형의 사회에서 더 큰 물질적 안락함을 누리는 사람보다 오히려 훨씬 더 자유롭다는 사실이 변하지는 않는다. ”
“경쟁 하에서는 가난하게 출발한 어떤 사람이 큰 부에 이르게 될 가능성은 유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보다 훨씬 더 낮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경쟁시스템에서는 가난하게 출발한 사람도 큰 부를 쌓는 것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큰 부가 자신에게만 달려 있을 뿐 권력자의 선처에 달려 있지 않다. 경쟁시스템은 아무도 누군가가 큰 부를 이루려는 시도를 금지할 수 없는 유일한 시스템이다. ”
“과거의 진보를 가능케 했던 일반적 틀 속에서 과거의 방식을 따라가서는 더 이상 진보를 기대할 수 없다는 생각, 그리고 사회를 완전히 재구축할 때에만 진보가 가능하다는 생각이 점차 확산되었다. 이것은 더 이상 현존하는 기구에 무엇을 보태거나 개선하려는 게 아니라 완전히 허물어 버리고 이를 대체하자는 것이었다.”
“이 이론의 주장에 따르면, 현대적 기술이 경쟁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경쟁으로부터 보호되지 않으면, 즉 독점이 허용되지 않으면, 많은 새로운 기술적 가능성들이 실제로 활용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도덕은 필연적으로 개인의 행동에 관한 현상이라는 사실뿐만 아니라, 도덕은 개인이 자유롭게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분야, 도덕규칙의 준수를 위해 개인적 이득을 자발적으로 포기하도록 요청하는 분야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개인이 책임지는 영역을 벗어나서는 선함도, 악함도, 도덕적 장점을 보일 기회도, 또한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 자신의 욕구를 희생하여 자신의 확신을 증명해 보일 기회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의 이해관계에 대해 책임지는 곳에서만, 그리고 자유롭게 그것을 희생할 수 있는 곳에서만 우리의 의사결정은 도덕적 가치를 지닌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희생으로 이타적일 자격을 가지고 있지도 않으며, 우리가 아무런 선택을 할 수 없다면 이타적이라는 것에 아무런 칭송할 만한 것도 있을 수 없다. 모든 측면에서 선한 일을 하도록 만들어진 사회구성원들은 칭송받을 아무런 자격도 없다. 밀턴이 말한 것처럼, “만약 성년인 사람이 취한 선하거나 악한 모든 행동이 박봉, 명령, 그리고 강제 아래 이루어진 것이라면, 그것은 이름뿐인 미덕이 아니고 무엇이며, 그 선행에 합당할 칭찬이 무엇이겠으며, 소박하고 정의롭거나 절제하는 것이 고마울 게 있을까?”
“ 물질적 상황이 우리에게 선택을 강요하는 분야에서 우리 자신의 행위를 결정할 자유, 그리고 우리 자신의 삶을 우리 자신의 양심에 따라 꾸려간 결과에 대한 책임, 이 두 가지가 그 속에서 도덕적 감성이 자라날 수 있고, 도덕적 가치들이 개인의 자유로운 결정 속에서 날마다 새로 창출되는 토양이다. 자신의 상관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양심에 대한 책임, 강제에 의해 강요되지 않은 의무에 대한 인식, 가치 있게 여기는 것 중 다른 사람을 위해 어느 것을 희생할지 스스로 결정하고, 그 결정에 따른 결과를 감수하는 것과 같은 것들이야말로 바로 도덕이란 이름에 어울리는 도덕의 본질 바로 그것이다. ”
“개인행위의 영역에서 집단주의가 미친 영향은 거의 전적으로 파괴적이었음은 불가피할 뿐만 아니라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책임으로부터의 면제를 그 주된 약속으로 내거는 운동은 그 운동을 태동시킨 이상이 아무리 높더라도 그 효과 면에서 반 도덕적일 수밖에 없다.”
Go My Book Review ~~
https://blog.naver.com/bookrev/2232047297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