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기신론(08-2) 정화스님강설
출처:침묵 속에서 묵묵히 듣고 있는 그것
(정화 스님 말씀)
이제 나이가 들어가면,
남자 분이나 여자 분이나 할 것 없이
점점 종교라고 하는 데 대해
관심이 생기고
여자 분들은 더 적극적으로
가까이 해보려고 합니다.
보통 하는 말이,
어떤 종교를 가지면
좋겠습니까, 묻습니다.
종교라고 하는 것이
자기가 갖고 있는 어떤 것이 됩니다.
뭣을 갖는다는 것은
갖는다는 것보다는
그것이 무엇이다, 라고
이미지화돼 있는 것을 갖는 겁니다.
많은 경우에
필요에 의한 갖음보다
그것이 무엇이다라고
생각되어지는 그런 것을 갖고 있으면서
더불어 거기에
자기를 동일시하는
의미가 들어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종교를 갖으면서
삶이 편해져야 하는데
그 이미지와 같이 있을 때 편하지만
공격받거나
다른 어떤 일이 있다 하면,
이것이 편해지지 못합니다.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다른 종교에 대해
제가 잘모릅니다만
어쨌든 불교도
불교라고 하는 것을 갖고 있다,
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깨달음이
불교(佛敎)의
불(佛)과 개념을 같이 합니다.
깨달은 삶.
교(敎)라고 하는 것.
교(敎)가 수행의미로
수행이라는 실천적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깨달음이
자기 삶 가운데서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 깨달음을 말하는데
심체(心體)라는 것을 떠나
뒤에 이념이라고 했습니다.
심체가 생각을 떠나 있습니다.
생각이라는 것이
자기가 갖고 있는 이미지입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모든 이미지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어떤 이미지도 갖고 있으면 안 됩니다.
해서
‘내 가르침으로부터
자유로워져라’
고 말 많이 합니다.
심체(心體)가
모든 이미지로부터
떠나 있는 자유로운 것.
마음 체 구성할 때
그것을 마음으로
그려보지 않으면
마음이나 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심체가 모든
이미지로부터 자유로워졌다,
라고 하는데 실제는 어렵습니다.
이제 보면,
‘마음의 본성을 본다’
라고 하면서,
마음이라고 하면서,
마음이 상주(常住)한다고 합니다.
진제스님 번역과
실타난타번역 기신론이 있습니다.
진제역 기신론에 대한 논문은
700여 개 됩니다.
실타난타역에 대한 논문은 23개인데,
실타난타역이
진제역 이해하는데
도움되는 부분이 많습니다.
거기서 뭐라 했냐면
마음도 존재하지 않거늘
처음이니 끝이니 말할 수 있겠는가.
여기서 말한 대로
마음이라고 하는 데 있어서의
이미지화 불교를
망념(妄念)이라 합니다.
망념을 떠나 있다 하면,
떠나 있는 마음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면,
또 그 자체가 망념이 됩니다.
마음자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 마음에
소속된 다른 것 말할 것 없습니다.
상주(常住)한다는 뭡니까.
마음의 상주며,
무념(無念)이 상주입니다.
무념은 공(空)이고
무상(無常)이며 중도(中道)입니다.
이제 위 본문에서 쭉 내려가 보면
생(生) 주(住) 이(異) 멸(滅)을
얘기하면서
생주이멸이 함께 있다, 합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생기고 소멸하는 게
분명 다른 양상을
갖고 있음에도 말입니다.
이미지는
시간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망념(妄念)은
시공을 만드는 것입니다.
자기세계를 만드는 것입니다.
인간은
인간의 시공 개념 갖고 있습니다.
닭은 닭의 시공이 있습니다.
그와 같은 것 만들어놓고 보면
생멸(生滅)이
우리의 시간 개념으로 파악될 때
선후가 존재합니다.
그와 같은 것 떠나면
생멸이 그렇게
존재치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많은 것을 거쳐옵니다.
전시간에 얘기했던
본각(本覺)과 불각(不覺).
불교에서 깨달음을
지향해간다라고 이야기하면서
근본에
깨닫지 못하는 특성이 있기에
근본무명이라 합니다.
근본무명이라는 것은,
잠깐 보면 흙과 항아리가 있습니다.
생각할 때 흙이 항아리의 원인이다,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만일 항아리가 만들어지기 전이라면
흙은 어떤 원인도 아닙니다.
항아리 만들어지고 보니까
흙이 항아리로부터
온 것으로 유추합니다.
흙 그 자체는
항아리의 원인이 아닙니다.
원인이 흙한테 있는 게 아니라
항아리한테 있습니다.
항아리가 흙을
자신의 원인으로 부여합니다.
나아가 항아리의 원인, 흙 속에
항아리의 어떤 게 있는가 물을 수 있습니다.
흙 속에 항아리가 될 수 있는
어떤 것이 먼저 있었는가
물을 수 있습니다.
답은 있거나 없거나 입니다.
만일 항아리가
될 수 있는 원인 있었다면,
원인으로 작용할 수 없습니다.
이미 항아리 될 수밖에 없기에.
없었다면
아무것으로부터
갑자기 항아리가 돼야 합니다.
그래서
유(有)나 무(無)로서
원인을 구성할 수 없습니다.
다만 무엇이 그걸 원인으로 구성하냐면,
마치 흙이
항아리의 원인처럼 있습니다.
오히려 원인 가운데
결과를 내는 게 아니라
결과가 원인을
규정하는 것처럼 됩니다.
무명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에서 뭐가 일어나면,
무엇인가 안다라고 하는 것은
알기 전까지의 과정에서는
마음이니 무엇이니 말할 수 없습니다.
마음도 결과 지어서
마음의 심상 띄어야
마음이 있는 것처럼 추리됩니다.
추리되면
원인과 결과 사이에
시간이 존재합니다.
전후시간이.
그래서 이 심상 그 자체가,
자기의 마음과 생각
일어나는 것이 전체가 아니고,
마음 일어나게 하는
시간적으로 먼저인
무엇인가 있는 것처럼
추리하게된 것입니다.
여기에 의해
마음이 마치
흙이 항아리의 원인이 되는 것처럼
마음의 작용에 의해
마음이 원인처럼 존재합니다.
마음의 영상 맺혀서 보면
영상에 마음 자신이 한정됩니다.
유추된 마음조차
자기가 생각하는
생각 속으로 마음을 유추합니다.
마음이
현재적으로 읽혀지는 게 아니라
지나온 상황으로
그 마음을 마음이라 할 때
마음의 본래모습을 보는 게 아니라
결과 지어진 마음에 의해
원인이 구속됩니다.
그게 무명입니다.
마음에서는
무명도 무명 아닌 것도 없습니다.
마음 작용에 의해
무명이나 아닌 것처럼 있게 됩니다.
그러면
마음이라는
어떤 것이 있거나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마음도 있지 않거늘
어찌 하물며
초상(初相)이 있겠는가.
마음은 실제로
유도 무도 아닙니다.
그래서
본각(本覺)을 보면,
우리가 마음이라는 것은
이와 같은 상(相)을 만듭니다.
항아리라는 것은
인연조건이,
흙이 항아리의 모습을 띱니다.
그러나 항아리 되기 전에
흙 가운데
항아리가 선험적으로
존재하거나 있는 것이 아니지만,
항아리 될
어떤 것으로 있어야 합니다.
항아리는 아니지만.
연 만나면 무엇으로
작용하는 자기 자성 작용이
흙 속에 있습니다.
그걸 본각(本覺)이라 합니다.
우리는 마음 맺혀진 상으로
그걸 구속할 때
마치 종교가 모든 사람에 대해
행복을 약속한다고 하지만,
사람에 의해
내가 그것을 갖게 됨으로
자기 동일성을 유지합니다.
그것과 맞으면 기뻐하고
싫으면 안 좋게 생각해서
평안을 이끌어내는 데
원칙적으로 좋지 않은 작용을 합니다.
여기서도
종교라는 것을 믿거나 따르는 게 아니라
자기 소유 방식으로 만들어서
종교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와 상관없습니다.
어찌 보면 개인마다
갖고 있는 소유양식에 의해
파악되어진 것을
종교라는 이름으로 부릅니다.
그것이 마치
모든 사람이 동의한
객관적인 어떤 것으로 생각합니다.
여기서는 사실
종교는 없고,
종교를 어떤 이미지로
사유하는 마음의 양태만 있는 것입니다.
종교라는 것이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가
자기 스스로를 모형 짓는
어떤 것 갖지 않아야 종교입니다.
우리가 종교를 갖고 있지만
종교 그 자체는
테두리 갖지 않은 것으로 자기를 삼습니다.
그와 부합되면,
내가 어떻게 다가가느냐
마음 씀씀이 살폈을 때,
그 활동 잘 보면
종교도 자신도 삽니다.
그러면서 평안이라고 하는 것이
자기 한계 속에서가 아니라
모든 소유가 사라지는 데서
자기 삶을 평안으로 이끌어냅니다.
원천적으로 종교에 있습니다.
왜 그러냐면,
우리 마음이
자기 한계를 갖지 않는 것이고,
그것이 종교로 드러났을 때 그렇습니다.
일체가 다 그러합니다.
그것이 본각입니다.
마음은 있는 듯 없는 듯하지만
무엇 만나면
상(相)이 되고
전 찰나가
후 찰나를 지배하지 않는다면
상(相)이 살아난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생각이
전후찰나가 연속되면
마음의 무적(無的)
유적(有的) 상황과 어긋납니다.
그와 같은 것을
깨닫지 못한다고 합니다.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모르는 것.
마음 작용의
원래 깨달음,
그것을 주체적으로
자각하지 못하는 것.
이것이 불각(不覺)입니다.
각(覺)을 전제해서
불각(不覺)을 얘기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본원적으로 소유되면,
우리가 마음 씀씀이대로 산다는 것을
불각(不覺)이라 얘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까
마음이 우리의 일상 씀씀이가 아닙니다.
그래서
본각(本覺)과
불각(不覺)이 나눠집니다.
그것이 시각(始覺)입니다.
법신(法身)이라는 것.
아까 망념은
자기 스스로
시공을 제한적으로 이해,
비교에 의해서 압니다.
이 생각 떠나면
항아리 존립케 하는 게
항아리의 특수성, 특수성이 존재하는
모든 다른 인연이 함께 동시에 있게 됩니다.
항아리 부르는 순간 흙이 소멸합니다.
둘 만 아니라
다른 많은 관계가
불생불멸의 관계에서
항아리로 등장합니다.
그것을 함께 존재한다고 합니다.
함께 존재하는 것을
법신(法身)이라 합니다.
연기(緣起)라 합니다.
여기서
마음의 근원을 깨달았기에
구경각(究竟覺)입니다.
깨닫지 못했기에
비구경각(非究竟覺)이라 부릅니다.
그럼 마음은 근원이 있는데,
우리의 일상은
깊이 없는 얕은 마음씀처럼 보입니다.
마음이 그 자체로 존재를 부정합니다.
근원에 가면 갈수록
마음이라고 할 수 없는 것만 드러납니다.
마음을 열심히 찾을수록
마음이라고 할 수 없는 게 드러나는 데
그게 불교에서는
공(空)입니다.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