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마리아 지역 이름의 내력
(1) 역사적 배경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하고 토지를 분배할 때 중앙 계곡 남부의 사마리아는 에브라임과 므낫세 라고 하는 요셉의 두 아들을 야곱이 자기 아들로 삼고 축복하여(창 48:5) 그들에게 할당되었다.
그러므로 이 둘은 요셉 족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이 땅을 나눌 때 중앙부의 세겜 분수령을 경계로 하여 둘째 아들 에브라임에게는 남반부를 주고, 그 형 므낫세에게는 북반부를 주었다.
여로보암이 북왕국을 창건할 때 이같이 중앙 고지의 사마리아를 점거하고 있는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두 지파를 중심으로 그 주변 땅을 점유하고 있는 8지파를 규합하였다. 그리고 북왕국의 주도권은 에브라임, 므낫세의 두 지파가 장악하였다.
그러므로 사마리아는 결국 두 지파의 역사이다. 처음에는 남부의 에브라임이 야곱의 축복권을 받아 주도권을 차지했다. 남부 에브라임의 땅은 서쪽이 경사를 이루고, 물이 좋고, 토지가 비옥하며, 중요한 큰길을 통하여 저지대로 내려갈 수 있는 유리한 지리적 조건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여로보암이 사마리아에 북왕국 이스라엘을 창건하였을 무렵부터 북부의 므낫세가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남부의 에브라임 땅에는 역사적 성읍으로는 벧엘 밖에 없는데 비해 북부의 므낫세 땅에는 므깃도, 이스르엘 등의 역사상 이름난 성읍이 많고 또 에스드라엘론 평야를 관통하는 큰 간선길을 장악하였다.
이처럼 므낫세와 에브라임 두 지파는 유다 지파와 더불어 고대 이스라엘에 있어서의 중심적 지파였다.1)
(2) 사마리아 이름의 유래
사마리아(Samaria)라는 이름은 이스라엘의 6대 왕 오므리(Omri, 주전 876-869)가 수도를 사마리아로 천도한 때부터 생긴 이름이다. 오므리 왕은 왕도를 옮기기 세멜(Shemer)에게서 은 두 달란트를 주고 도읍지가 될 산을 샀다. 오므리는 소유주의 이름인 세멜에서 “사마리아”라고 명명하였다.(왕상 16:24)
사마리아 사라들은 순수한 유대인들이 아니다. 사마리아가 앗수르 나라에 의하여 멸망(주전 722년경)되자 지배자의 정책에 따라 이스라엘 사라들을 포로로 잡아갔고 대신 그 곳에 외국인들을 이민시켜 놓았다(왕하 17:6, 24). 이러한 정책 때문에 사마리아 사람들은 혼혈되었고 혼혈된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들에게 냉대와 멸시를 당하게 되었다.
열왕기하 17:29에서 한 번 사마리아 사람들을 솜로님(Shomronim)이라고 나타냈는데 이 말은 “사마리아의 주민”이란 뜻이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 말을 쓰지 않고 오히려 “사메린”(Shamerin)이라는 말을 쓰는데 이 말은 “진리의 수호자” 혹은 “관찰자” 라는 뜻이다.2)
2. 사마리아의 지리적 경계선
사마리아 지방은 이스라엘 산지의 중앙에 위치하며 남북의 길이가 약 60킬로미터, 동서가 약 50킬로미터로 엇비슷한 정방형을 이루고 있다 .마치 머리 잘린 생선토막 같다. 동쪽은 요단 계곡이 경계가 되며 서쪽은 해안 평야와 접하는데, 북방으로 샤론 평야와 그 남방으로 아얄론 골짜기가 있다.
북쪽은 이스르엘 평야의 남단과 접촉되어 있는데 갈멜 산과 길보아 산을 연결하는 지점들과 경계가 되어 있고, 남쪽은 여리고와 아얄론 골짜기를 연결하는 지점들인데 이 경계는 유다와의 접촉 관계로 역사에 따라 늘 변동이 많았다.
사마리아의 고대 명칭을 에브라임 산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유대 지방을 유다 산이라고 한 말과 대칭되는 것이다. 사마리아 지방은 여러 산들이 모여서 된 산간 지대로 서쪽의 지중해나 동쪽의 길르앗에서는 하나의 큰 덩어리로 보인다.3)
3. 지형적 특성4)
사마리아 산지에는 형태학적으로 3개의 평행습곡이 있는데 하나는 서북쪽의 갈멜 산이고, 중앙의 이론 산지(the Irron Hills)이며 동남쪽으로는 동부 사마리아 습곡으로 이들은 모두 사마리아 지방의 구조적 골격을 이룬다.
동부 사마리아 습곡은 습곡 중에 가장 높은 곳으로 서남쪽 유대 경계에 바알 하솔 산(약 900미터)이 있고 동북쪽으로는 벧산 계곡이 있어 갑자기 해발 아래로 지대가 낮아진다. 주로 석회석이 깔려 있고 연 강우량은 2백 50밀리미터쯤 되어 그렇게 건조한 곳은 아니다.
나브러스(Nablus)의 향사(向斜) 지대는 지각 변동과 침식 작용으로 변화가 많은 곳이고 백악질로 덮여 있다. 가장 높은 지대는 에발 산(9백 40미터)과 그리심 산(881미터)으로 중앙에 위치한다.
가장 높은 산은 중앙부의 에발 산과 그리심 산이고, 동북단에 길보아 산(497m)이 있다. 이곳에서 9㎞ 지점의 벧산과의 사이에 놓인 이스르엘 계곡에서 요단 계곡에 이르는 통로가 가까이 있는 관계로 전략상 요지이었으므로 종종 큰 전쟁터가 되었다.
특히 길보아 산은 이스라엘 초대왕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이 블레셋과 싸워 전사한 비극의 무대였으며, 길보아 산의 전투는 완전히 이스라엘을 패망으로 끝나게 했다.(삼상 31:1-18) 또 세겜 성읍을 가운데 두고 북의 그리심 산(854m), 남의 에발 산(940m)이 서로 마주 바라보고 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한 후 12지파를 절반씩 나눠서 그리심 산과 에발 산 앞에 세우고 그리심 산은 율법을 준수하는 자에게 축복을 주는 산으로 선포하고, 에발 산은 거역자에게 저주를 주는 산으로 선포하였다(신 11:29).5)
특별히 계곡들에는 비옥한 농경지가 발달되어 있으며 살 아라바, 사누르, 루반 등의 계곡들이 있다. 계곡의 땅들과 경사지들이 비옥하여 지중해식 작물인 밀, 올리브, 과일, 포도, 양과 염소의 사육 등으로 농장들이 발전되어 있다.
이론 산지는 야산과 같이 고도(최고 5백미터)가 비교적 낮아 “해변로”(Via Maris)가 지나가는 교역상 중요한 지대이고 해변로는 남북을 잇는 국제 고속도로이다.
동쪽 요단 계곡 쪽으로 와디 엘 화라강이 흐르고 있어 동서 교통을 편리하게 하며, 잘 발달된 도로들은 외부와의 접촉을 용이하게 하여 사마리아에 유익을 가져오기도 하나 반대로 손해를 가져오기도 한다. 북왕국 이스라엘이 남왕국 유다보다 일찍 망한 이유도 이러한 지정학적 특수성 때문이다.
4. 사마리아의 자연
사마리아의 자연은 유다에 비해 조금도 다름없고 쌍방이 모두 산간에 평야가 있어 경작에 유리하며, 풍부한 수확을 거둘 수 있었다. 수목의 종류도 풍부하며, 과실은 야생산과 재배산 모두를 얻을 수 있었다. 강수량이 비교적 많아 불모지가 전혀 없고 유수도 각별히 많아 식물이 잘 자랐다.
특히 지중해성 작물인 밀, 감람나무, 포도의 재배가 성하였다. 요셉이 형들에 의해 애굽에 노예로 팔려간 도단 평야를 비롯한 각지에 양, 산양을 칠 수 있는 목축지가 광대한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다.6)
5. 지정학적 중요성
사마리아 지방의 지정학적 중요성 중의 첫째는 그 지역의 개방성이다. 이것은 족장들의 자유로운 이동과 미디안, 수리아, 앗수르의 침입 등으로 잘 입증되고 있다.
이러한 외국의 침입으로 인하여 많은 살상을 빚어냈을 뿐만 아니라 주변의 이방 종교가 범람하여 이스라엘을 사치와 방종으로 인도하였다. 아모스와 이사야 선지들은 이러한 그들의 불신과 사치와 죄악을 가차없이 견책하였다.
둘째 중요성은 위치적으로 중앙인 점인데 사마리아에서 제일 고지대인 에발 산과 그리심 산의 틈새에 해안에서 요단 계곡으로 연결되는 큰 길이 나 있어 그 고개가 분수령의 역할을 한다. 물은 이 곳에서 바다로 또는 반대 방향인 요단 계곡으로 흐른다. 이 분수령에 세겜(Shechem)이 위치하는데, 세겜은 고대로부터 정치적 종교적 중심 도시였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족장 이야기와 신명기, 여호수아서의 사건 내용은 세겜이 종교적, 정치적 중심지였음을 표명한다.
셋째는 요새(要塞)들이다. 사마리아 지방에는 수많은 요새들이 맣이 산재하고 있다. 사람들이 사는 성읍에는 성벽을 쌓은 성읍과 성벽을 쌓지 않은 성읍이 있는데, 세겜은 성벽을 쌓은 성읍이다. 대부분 성읍들은 고립된 높은 언덕 위에 건립되었다.7)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