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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三國志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영한대역 만화 삼국지 제9권
월명성희(月明星稀) The moon outshines the sparse stars
- 달빛에 가려 별이 드문드문 보임. 달빛이 밝게 빛나면, 별빛은 희미해진다.
(1) 달빛이 밝으니 별도 드물다는 뜻으로 어진 사람이 나오면 소인(小人)들은 숨어버린다는 비유를 이르는 한자성어이다.
달이 밝게 빛나면, 별빛은 희미해진다. 魏(위)나라 맹덕 曹操(조조)의 시. 달은 자신, 별은 다른 영웅을 의미함. 곧, 큰 영웅이 나타나면, 군웅의 존재가 희미해짐을 비유함. 조조는 蜀(촉)나라의 先主(선주)가 도망간 것을 비꼬면서 자신의 기개를 드러냄. 출전 조조의 [단가행]
(2) 중국 삼국시대 위왕조(魏王朝)를 세운 조조(曹操:155∼220)가 지은 서정시 〈단가행(短歌行)〉에 나오는 말이다.
208년 조조(曹操)가 오(吳)나라의 손권(孫權:182∼252)과 촉(蜀)나라 유비(劉備:161∼223)의 연합군과 적벽(赤壁)에서 전투를 벌일 무렵 달빛이 밝은 양쯔강[揚子江]의 밤 경치를 바라보는데 새들이 울며 남쪽으로 날아가는 것을 보고 뱃전에 서서 취중에 지어 부른 노래가 〈단가행〉이다.
〈대주당가(對酒當歌)〉라고도 하는 단가행은, 술에 취한 조조가 양쯔강 연안에 서서 인간적 비애와 영웅적인 모습, 풍부한 감정을 표현한 시가로 《문선(文選)》 14권에 실려 있다. 조조는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 패하였으나 정치가로서뿐만 아니라 문인으로서도 재능이 뛰어났다.
조조(曹操)가 지은 〈단가행(短歌行)〉가운데 '달이 밝으니 별빛은 희미한데 까마귀와 까치들은 남쪽으로 날아가네[月明星稀 烏鵲南飛]'라는 구절은 중국 북송 때의 시인 소동파(蘇東坡)가 지은 《적벽부(赤壁賦)》에도 인용되었다.
(3) 단가행(短歌行) - 조조(曹操) 지음
Another of Cao Cao's most well known poems is Short Song Style (短歌行).
《단가행(短歌行)》Short Song Style
對酒當歌, 人生幾何(대주당가 인생기하)
술을 들며 노래한다. 인생이 길어봐야 얼마나 되겠는가?
I lift my drink and sing a song, for who knows if one's life is short or long
譬如朝露, 去日苦多(비여조로 거일고다)
비유하면 아침이슬 같으니, 지나간 날이 너무나도 많구나.
Man's life is like the morning dew, past days many future days few
慨當以慷, 憂思難忘(개당이강 우사난망)
슬퍼하며 탄식해도, 근심 잊기 어렵구나.
The melancholy my heart begets, comes from cares I cannot forget
何以解憂, 唯有杜康(하이해우 유유두강)
무엇으로 근심 풀까? 오직 술이 있을 뿐.
Who can unravel these sorrows of mine, I know of only one man, the God of Wine
靑靑子衿, 悠悠我心(청청자금 유유아심)
푸르른 그대의 옷깃, 내 마음에 펄럭인다.
Disciples dressed in blue, my heart worries for you
但爲君故, 沈吟至今(단위군고 침음지금)
다만 그대들로 인하여, 이제껏 조용히 노래를 읊조렸네.
You are the cause of this song without pause
呦呦鹿鳴, 食野之苹(유유녹명 식야지평)
우우하고 우는 사슴의 무리, 들에서 햇쑥을 뜯는다.
"Across the banks a deer bleats, in the wilds where it eats
我有嘉賓, 鼓瑟吹笙(아유가빈 고슬취생)
내게도 좋은 손님 오셨으니, 금을 뜯고 피리도 불리.
Honoured guests I salute, strike the drums, and play the flute
明明如月, 何時可掇(명명여월 하시가철)
밝기는 달과 같은데, 어느 때나 그것을 딸 수 있으랴.
Bright is the moon's sparkle; Will there be a time it can be grasped?
憂從中來, 不可斷絶(우종중래 불가단절)
마음 속에서 우러나는 근심, 끊어버릴 수 없구나.
Thoughts of you from deep inside, never settling never ceasing
越陌度阡, 枉用相存(월맥도천 왕용상존)
논둑과 밭둑을 넘어, 힘들여 인사하러 와 주었으니.
Friends drop by via a country road, the respect they pay really show.
契闊談讌, 心念舊恩(계활담연 심념구은)
서로 깊이 이야기를 나누며, 마음속으로 옛 은혜를 생각하네.
A long due reunion we fest, sharing past stories we possessed
月明星稀, 烏鵲南飛(월명성희 오작남비)
달은 밝고 별은 드문데, 까막까치는 남쪽으로 나네.
The moon outshines the sparse stars; the crows fly to the south
繞樹三匝, 何枝可依(요수삼잡 하지가의)
나무를 세 차례 빙빙 맴도나, 어느 가지에 의지할 수 있을꼬?
Circling the tree three times; on what branch can they find rest?
山不厭高, 海不厭深(산불염고 해불염심)
산은 높음을 꺼리지 않고, 바다는 깊음을 꺼리지 않는 법.
Mountains do not despise height; Seas do not despise depth
周公吐哺, 天下歸心(주공토포 천하귀심)
주공이 입에 물었던 것을 뱉으니, 천하 사람들의 마음을 얻으리라!
The sage pauses when guests call, so at his feet the empire does fall![d]
단가행 (短歌行)
- [출처] 조조(曹操)의 짧은 노래 단가행(短歌行) -
4. 단가행 첫 연·끝 연[短歌行 初·終聯]
저자 : 조조
구분 : 漢(한) 나라 獻帝(헌제) 때 丞相(승상)
출생 – 사망 : 154년 ~ 220년
자 : 孟德(맹덕)
對酒當歌 人生幾何 譬如朝露 去日苦多
慨當以慷 幽思難忘 何以解憂 惟有杜康〈첫 연〉
月明星稀 烏鵲南飛 繞樹三匝 無枝可依
山不厭高 水不厭深 周公吐哺 天下歸心.〈끝 연〉
(대주당가 인생기하 비여조로 거일고다
개당이강 유사난망 하이해우 유유두강
월명성희 오작남비 요수삼잡 무지가의
산불염고 수불염심 주공토포 천하귀심)
술 마시며 크게 노래 부르자꾸나, 사람의 일생이란 그 얼마인가,
마치 아침 이슬처럼 덧없는 것이라, 빠르게 지나는 날들 괴롭도록 많다네.
그걸 생각하면 탄식 않을 수 없고, 생각조차 막히어 잊을 수가 없구나.
무얼로 이 근심 이 슬픔을 풀려는고, 오직 술만이 있을 뿐일세.〈初聯〉
달 밝으니 별은 드문데, 까막까치는 따뜻한 남으로만 날아가네.
나무들 세 겹으로 두르고 있어, 새들이 의지할 가지가 없구나.
산은 높기를 싫어하지 않고, 물 또한 깊을 대로 깊다네.
옛 주공은 극진하게 어진이들을 만나, 온 천하 인심이 주 나라로 쏠렸었다네.〈終聯〉
어구(語句)
短歌行 : 詩體(시체)의 이름.
幾何 : 얼마.
去日 : 빠르게 지나가는 날. 지난날.
苦多 : 괴롭도록 많음. 매우 많음.
慨 : 분하다. 슬프다. 강개하다. 慷慨(강개, 의기가 복받치어 원통해 하고 슬퍼함).
幽思 : 생각에 잠김. 생각을 막음.
杜康 : 중국 고대에 처음으로 술을 만든 사람. 술.
烏鵲 : 까마귀와 까치.
三匝 : 세 둘레. 세 겹. 匝은 ‘둘리다. 두루’임.
周公 : 옛 주 나라 文王(문왕)의 아들, 武王(무왕)의 아우. 이름은 旦(단)이요 시호는 元(원)인데, 문왕과 무왕을 도와 殷(은)의 紂王(주왕)을 치고 조카인 成王(성왕)을 도와 왕실의 기초를 튼튼히 하고 제도와 禮樂(예악)을 정하여 주의 문화 발전에 이바지했음.
吐哺 : 입 안의 밥을 뱉어냄. 주공이 식사 중에 어진이나 손님이 오면 입 안의 음식을 뱉고 맞이하고, 머리를 감을 때 찾아오면 머리칼을 움켜쥐고 만났는데 이를 ‘吐哺握髮(토포악발)’이라 하며, ‘하던 일을 멈추고 극진히 영접함’을 뜻함.
5. 감상(鑑賞)
첫 연은 ‘인생은 무상한데 온갖 근심이 인다. 이 근심을 술로 풀어버리자’ 했는데, 자고로 술을 근심을 잊는 물건 곧 忘憂之物(망우지물)이라 했다. 생략한 중간 부분은 모두 8연으로 인생과 자연을 읊었고, 끝 연에서 ‘달이 밝으니 별은 드물다’는 것은 ‘자기의 위력에 뭇 영웅들이 자취를 감춘다’는 것을 비유했고, ‘烏鵲南飛 ~無枝可依’는 ‘劉備(유비) 같은 사람이 몸을 붙일 만한 곳이 없어 남쪽으로 패주함’을 뜻한다는 풀이도 있다. 그리고 자기의 위세는 산이 높을수록, 물이 깊을수록 좋음과 같으니 주공처럼 덕을 쌓아 천하의 인심을 모으겠다는 포부를 폈다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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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영한대역 칼라 만화 삼국지(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제9권 P181) / 아래 스캔 자료 참조
- 저자 : 21세기 영어교육연구회(21st C.E.T.A.)
- 출판사 : (주)파우스트 칼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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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曹操:155∼220) Cao Cao(차오 차오)
(1) 중국 후한 말기의 정치인으로 위(魏) 나라 건국의 기초를 닦았다.
출생-사망 : 155년 ~ 220년
자 : 맹덕(孟德)
시호 : 무황제(武皇帝)
별칭 : 위무제(魏武帝)
국적 : 중국 삼국시대 위(魏)나라
출생지 : 중국 안후이성(安徽省)
시대 : 후한(後漢)
(2) 자(字)는 맹덕(孟德), 아명(兒名)은 아만(阿瞞)·길리(吉利)이다. 패국(沛國) 초현(譙縣, 지금의 安徽省 亳州市) 사람으로 후한 헌제(獻帝, 재위 189~220) 때에 승상(丞相)을 지냈으며, 위왕(魏王)으로 봉해졌다. 아들인 조비(曹丕)가 위나라 황제의 지위에 오른 뒤에는 무황제(武皇帝)로 추존되었다.
조조(曹操)는 후한 환제(桓帝, 재위 146~168) 때인 155년(永壽 원년)에 태위(太尉)를 지낸 조숭(曹嵩)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숭은 4대의 황제를 섬겨 환제 때에 비정후(費亭侯)로 봉해진 환관 조등(曹騰)의 양자였다. 배송지(裴松之)는 진수의 《삼국지》에 주석을 달며 양자가 되기 전 조숭의 본성은 ‘하후(夏侯)’였고, 따라서 조조와 하후돈(夏侯惇)이 종형제 관계라는 해석을 남기기도 했다.
조조(曹操)는 어려서부터 책을 즐겨 읽었으며, 여러 분야에서 재능을 드러냈다. 고대 병법가의 저술을 연구하여 《손자병법(孫子兵法)》에 주석을 붙인 《위무주손자(魏武註孫子)》라는 저술을 남겼다. 그리고 시부(詩賦)에도 뛰어난 성취를 보여 두 아들인 조비(曹丕), 조식(曹植)과 함께 ‘삼조(三曹)’라 불리기도 한다. 조조는 20세 때인 174년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낭관(郎官)으로 관직에 올랐으며 낙양북부위(洛陽北部尉), 돈구현령(頓丘縣令), 의랑(議郎) 등을 지냈다. 184년 황건의 난이 일어나자 기도위(騎都尉)로 임명되어 영천(潁川)에서 반란군 진압에 공을 세웠다. 그 공적으로 제남(済南)의 동군태수(東郡太守)로 임명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귀향하였다.
189년 영제(靈帝)가 죽은 뒤, 소제(少帝)를 폐위하고 헌제(獻帝)를 세워 정권을 장악한 동탁(董卓)이 조조를 효기교위(驍騎校尉)에 임명했다. 그러나 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낙양을 탈출해 고향으로 돌아가 병사를 모았다. 그는 190년 원술, 손견 등과 연합하여 동탁 토벌을 주창하며 거병했으며, 발해태수(勃海太守) 원소(袁紹)가 맹주가 된 반동탁 연합군에서 분무장군(奮武將軍)의 직위를 맡았다.
192년 동탁이 살해된 뒤 조조(曹操)는 연주(兗州)를 평정하여 연주목(兗州牧)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195년 헌제가 장안(長安)을 탈출하였을 때, 순욱(荀彧)의 건의에 따라 황제를 보호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 이 일로 조조는 건덕장군(建德將軍), 진동장군(鎭東將軍) 등에 임명되었고, 양조부인 조등과 마찬가지로 비정후로 봉해졌다. 196년에는 자신의 근거지인 허현(許縣, 지금의 河南省 許昌)에 궁을 지어 헌제를 그곳으로 옮겼다. 그 뒤 조조는 대장군(大將軍)으로 임명되었으며, 무평후(武平侯)로 봉해졌다. 그는 헌제를 자신의 보호 아래 둠으로써 후한 조정을 장악하였을 뿐 아니라, 황실의 권위를 배경으로 세력을 크게 확대할 수 있었다. 조조는 한호(韓浩)의 건의를 받아들여 둔전제(屯田制)를 실시했으며, 제도를 정비하고 수많은 인재를 등용하여 위(魏) 건국의 기반을 마련했다.
조조(曹操)는 202년 원소가 죽은 뒤 그의 아들들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자 원소의 근거지인 하북(河北) 지방 공략에 나섰고 207년 중국 북부를 통일하였다. 208년 승상의 지위에 오른 뒤에는 중국 통일을 위한 남정(南征)에 나서 형주(荆州)를 점령하였으나, 적벽에서 손권(孫權)과 유비(劉備) 연합군에 패하여 형주의 일부를 도로 내주었다. 그 뒤로도 조조는 여러 차례 관중(關中)과 한중(漢中) 지역을 공략하며 중국 통일을 시도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213년 조조(曹操)는 위공(魏公)으로 봉해졌으며, 216년에는 스스로를 위왕(魏王)으로 봉하고 황제와 마찬가지의 권력과 위세를 행사하였다. 그는 220년 3월 15일(建安 25년 1월 23일)에 병으로 낙양에서 죽었는데, 죽은 뒤 무왕(武王)의 시호를 받았으며, 4월 11일에 업성(鄴城)의 고릉(高陵)에 묻혔다. 조조가 죽자 그의 아들 조비(曹丕)가 위왕 지위를 계승했다. 이후 조비는 헌제에게 선양을 받아 위나라 황제가 되었으며, 조조는 무황제(武皇帝)로 추존되고 태조(太祖)라는 묘호(廟號)를 받았다.
(3) Cao Cao 조조(曹操)(155–220) was a warlord who rose to power towards the final years of the Eastern Han dynasty (25–220 CE) and became the de facto head of government in China. He laid the foundation for what was to become the state of Cao Wei (220–265), founded by his son and successor Cao Pi, in the Three Kingdoms period (220–280). Poetry, among other things, was one of his cultural legacies.
(4) Overview
Cao Cao was an accomplished poet, as were his sons Cao Pi and Cao Zhi. Cao Cao was also a patron of poets such as Xu Gan. Of Cao Cao's works, only a remnant remain today. His verses, unpretentious yet profound, helped to reshape the poetic style of his time and beyond, eventually contributing to the poetry styles associated with Tang Dynasty poetry. Cao Cao, Cao Pi and Cao Zhi are known collectively as the "Three Caos". The Three Caos' poetry, together with additional poets, eventually developed into the Jian'an style: Jian'an was the era name for the period from 196 to 220. Poets of the Cao family and others continued to write and develop the poetry of this style, after the end of the Han Dynasty and the subsequent founding of the Cao Wei state: these were the Jian'an poets. The effects of civil strife on poetry towards the end of the Eastern Han Dynasty contributed to the development of a solemn and heart-stirring tone of lament for life's ephemeral nature during the period of Jian'an poetry.
From its roots in Han poetry folk songs, Jian'an poetry evolved into a form of scholarly poetry that is characteristic of Six Dynasties poetry. Cao Cao and other Jian'an poets developed the characteristic Han fu (or yuefu) poetry style deriving from folk song or ballad traditions, such as of uneven line lengths. Irregular lines became transformed into regular five-character line-length styles, very similar (and inspirational to) the shi poetry of the Tang Dynasty's five-character regular line. Cao Cao has specifically been noted for his ballad-style verse, which he apparently set to music.
Cao Cao also wrote verse in the older four-character per line style characteristic of the Classic of Poetry. Burton Watson describes Cao Cao as: "the only writer of the period who succeeded in infusing the old four-character metre with any vitality, mainly because he discarded the archaic diction associated with it and employed the ordinary poetic language of his time." Cao Cao is also known for his early contributions to the Shanshui poetry genre, with his 4-character-per-line, 14-line poem "View of the Blue Sea" (as translated by Wai-lim Y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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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한대역 칼라만화 삼국지(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 나관중 / 20권 / 할인가 10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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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권 정가 15,000원 / 10% 할인 정가 13,500원)
(1) 출판사명 : (주)파우스트 칼리지
(2) 저자명 : 21세기 영어교육연구회(21st C.E.T.A.)
(3) 도서 구입 전화 : 1599-9039(파우스트 칼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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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로 읽는 영한대역 세계명작 만화]
징기즈칸[Genghis Khan, 成吉思汗]
출생 – 사망 : 1162 ~ 1227
재위 기간 : 1206 ~ 1227
지역 : 아시아 대륙
왕조 : 몽골 제국
거대한 몽골 제국은 동방으로부터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유럽 세계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서양사에 공포의 상흔을 남긴 징기즈칸, 그리고 몽골은 어떠한 존재였을까?
(1) 배경 - 동방 왕의 전설
리처드 왕의 십자군도 만족스러운 전과(戰果)를 올리지 못하고 유럽 세계가 이슬람과의 오랜 싸움에 염증이 났을 무렵, "적국 이슬람의 동쪽 저편에 기독교도들의 나라가 있는데 그 나라 왕은 프레스터 존(Prester John), 즉 '사제 요한'이라고 한다"라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동방에서 이슬람과 싸우면서 기독교의 성지 예루살렘을 노리고 있다는 이 왕의 이름은 서방의 '십자군' 사이에 하나의 구세주의 전설로서 사실인 양 퍼져 나갔다. 전설의 근원이 된 것은 당시 위구르와 몽골 고원의 일부에서 널리 퍼져 있던 네스토리우스파(派) 기독교(景敎)의 일부인데 그 실체는 전설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러나 유럽은 이 허상을 바라고 있었다. 페쇄된 시대에 성스러운 왕이 동방에서 나타나 이슬람군을 격파해 주기를 원했던 것이다.
결국 희망대로 동방에서 전설의 왕이 왔다. 하지만 그 왕의 이름은 징기즈칸이었다.
(2) 태생 - 몽골의 고아
징기즈칸이 이끄는 몽골이 역사의 무대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13세기 초이다. 당시 몽골 고원에서는 위구르 유목 제국이 해체된 이후에 3세기 반에 걸쳐 분열과 할거(割去)가 이어졌다. 요(遼)를 비롯한 주위 국가들은 모두 몽골의 유목 부족이 하나로 뭉치는 것을 두려워했는데 그 이유는 과거의 흉노(匈奴), 돌궐(突厥)같이 하나가 된 부족 연합은 틀림없이 아주 강력한 힘을 발휘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조금이라도 유력한 부족이 나타나면, 그 대항마(對抗馬)를 지원하여 서로 싸우게 했고 그래도 안 될 때는 대군을 북벌(北伐)하게 하여 직접 격파했다. 경연(硬軟) 양면에서 간섭한 결과 유목 부족들이 통일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요(遼)가 금(金)에 쓰러지고 멀리 중앙 아시아에서 서요(西遼)가 된 이 당시에는 몽골 고원에 대한 압박도 다소 느슨해져 있었다. 사실, 이 시대에 이르면서 몽골 부(部)는 통일되었고, 칸도 3대째에 이르렀다. 그러나 유목 부족 사이에서 여전히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고, 몽골 고원 전체를 하나의 군단(軍團)으로 통일할 사람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징기즈칸, 그의 어릴 때 이름은 테무진이었는데 초년 시절은 그리 평탄치 않았다. 아버지 에스게이는 쿠트라 칸의 뒤를 이어 몽골 부의 제4대 족장에 오를 것으로 촉망받고 있었으나 테무진이 어렸을 때 숙적(宿敵) 타타르 부(部)에 의해 독살당했다. 그러자 에스게이를 따르던 타이치우트 씨족은 손바닥 뒤집듯이 테무진을 배신했고, 테무진의 복수를 염려해 어린 그를 죽이려고 계획했다. 난세에 이용 가치가 없는 사람을 배척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이 각별히 사악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테무진이 어리고 힘이 없을 때 제거하려 한 것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테무진의 실력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 호에른의 엄한 교육 때문에 테무진은 아주 가혹하고 격렬한 성격으로 자라났다.
이런 일화가 있다. 어느 날, 테무진을 비롯한 4형제가 강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다. 이때 에스게이의 또 다른 아내의 아들, 이복형제 두 명이 찾아와서 그들이 낚은 고기를 빼앗았다. 테무진은 집으로 돌아가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말했는데, 어머니는 형제끼리 싸워서는 안 된다고 충고했다. 어머니의 책망을 듣고 테무진은 남동생 카사르와 활을 들고 집을 나가 이복형제를 앞뒤에서 공격하여 활로 쏘아 죽였다. 집으로 돌아온 두 아들을 보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된 어머니는 "같은 집안 사람끼리 싸워서 어떻게 하느냐"고 테무진을 꾸짖었다고 한다. 그런 성격의 소유자가 조용히 참으며 살 리가 없었다.
테무진은 보르테를 아내로 맞이하면서 승승장구하게 된다. '눈에 불이 있고 얼굴에 빛이 있는' 소년 테무진과 소녀 보르테를 약혼하게 한 것은 아버지 에스게이였지만 정식 결혼은 그로부터 9년이 지나서야 성사되었다. 이때 보르테가 갖고 온 결혼 선물 크로텐(검은담비) 가죽옷이 테무진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당시에 크로텐 가죽옷은 매우 고가품이었고 유목민 사이에서 진귀한 옷이었다. 테무진은 이 털가죽을 가지고 케레이트 부(部)의 군주 토오릴 칸에게 찾아갔다. 토오릴 칸은 선친 에스게이의 친한 친구였고 그를 같은 편으로 만들면 100만의 우군을 얻게 되는 셈이었다. 테무진은 몽골 고원 최대의 군주를 우군으로 받아들여 그것을 이용하려는 과감한 도박에서 결국 이겼던 것이다. 크로텐 모피에 기분이 좋아진 토오릴은 기뻐하며 말했다.
"답례로 너의 해산된 씨족 사람들을 모아 주마."
(3) 인격 - '유린하라'고 초원은 말했다
유목민의 생활은 가혹한 편이다. 으레 초원이라고 하면 초목과 바람, 끝없이 높은 하늘을 떠올릴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기후는 1년 중 짧은 여름에 불과하며 이 시기를 제외하고는 혹독한 추위 속에 갇힌다. 1월의 평균 기온은 영하 26.1도. '눈에 방목된 소의 머리가 얼어서 깨지거나' '쇠꼬리가 얼어붙어서 뚝 잘려 땅에 떨어지기도' 하는 가혹한 환경 속에서 유목민들이 철저한 약육강식의 논리로 살아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정확한 판단력과 단호한 행동력이 없으면 유목 생활을 해나갈 수 없으며 그것이 몽골 제국 전체의 특징이기도 했다. 그러나 징기즈칸은 그렇게 단순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그는 "남자가 쾌락과 기쁨으로 삼는 것은 모반인(謀叛人)을 유린하고 적을 정복하여 재산을 박탈하고 그 시종들의 눈, 코에서 눈물을 흘리게 하며, 그들의 살진 말을 타고 그들의 아내를 나의 침상으로 삼아 그 장미 같은 뺨을 애무하고 진홍빛 입술에 입맞춤하며 끌어당기는데 있다"고 말했다.
징기즈칸의 이 잔학성은 젊을 때 겪은 여러 굴욕적인 사건이 원인인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죽음을 당하고 가난의 밑바닥에서 허덕이며 아내를 빼앗기고 아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남자의 아들을 낳은('징기즈칸의 큰아들' 박스 글 참조) 데 대한 분노는 마음 속 깊이 앙금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징기즈칸이 단순히 어두운 분노에 자극받아 행동할 사람은 아니었지만, 어떤 분노에도 좌우되지 않는 냉철함, 그것이 징기즈칸이 무서운 진짜 이유였다. 그의 냉철함과 지략(智略)은 원정(遠征)에서 충분히 발휘되었다.
(4) 징기즈칸의 큰 아들
징기즈칸의 아내 보르테는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메르키드족에 의해 납치당했다. 그녀는 토오릴 칸이 9개월 동안 교섭을 벌인 끝에 징기즈칸에게 돌아올 수 있었는데, 돌아온 직후에 사내아이를 낳는다.
징기즈칸은 아들의 이름을 주치[朮赤]라 했는데, '객인(客人)' 즉 '이방인'이라는 뜻이다. 이런 이름을 붙인 이유는 보르테가 남편에게 돌아오는 도중에 뜻하지 않게 태어났기 때문이라는 설과 사실은 징기즈칸의 아들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5) 대서정(1) - 호레즘 샤와의 대립
1219년, 징기즈칸은 서양 세계에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때까지의 10년 동안 그는 몽골을 강력한 통일 국가로 통합하고 중국 북부의 금(金)을 침략하여 정복했다. 당초에는 유목민 특유의 약탈 행위로 시작된 이 침략은 해를 거듭하면서 토지를 제압하고 항구적으로 지배하는 정복 행위로 그 성격이 바뀌어 갔다. 혹독한 자연 속에 자란 유목민들에게 정착민들의 토지는 처분하기에는 너무 풍요로웠던 것이다. 지배를 하게 되면서 몽골 유목민들의 성격도 바뀌어 많은 나라를 정복하고 지배하기 위해 서쪽으로 눈을 돌렸다. 몽골의 서양 정복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 당시에 서아시아 최대의 이슬람 국가이던 호레즘 샤 왕조는 1210년에 국력이 쇠퇴해 있던 서요(西遼)를 멸망시키고 북쪽은 카스피해 연안으로부터 남쪽은 페르시아, 동쪽으로는 힌두쿠시로부터 서쪽은 코카서스(카프카스)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징기즈칸은 몽골의 접경 지역에 위치한 호레즘 샤와 당초에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1215년에 징기즈칸은 호레즘 샤가 보낸 사절단에게 말했다.
"내가 동방의 패자가 될 것이니 샤는 서방의 패자가 되시오. 우리는 서로 평화와 우호를 유지하여 상인들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게 해야 하지 않겠소?"
그러나 징기즈칸의 진의는 다른 데에 있었다. 『집사(集史)』에 의하면 1216년에 대금(對金)침략에 일단락을 지은 징기즈칸은 몽골 전군에게 2년간 휴식을 명령했다. 부족 전체적으로 대원정 준비가 진행되어 서방으로 첩보(諜報)·조략(調略)을 목적으로 통상단이 보내졌다. 표면상의 우호 관계는 적의 내정을 다 살필 때까지의 수단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1219년에 호레즘 영(領)인 오트라르(시르다리야 강의 동안, 그 지류 아리스 강 남쪽에 있었으며 옛 명칭은 파라브. 호레즘 왕국 시대에는 그 국경 도시가 되고, 태수가 몽골의 대상을 살해했기 때문에 징기즈칸이 서부 정벌을 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에서 몽골 통상단이 첩자 혐의로 학살을 당했다. 문명국 사이에서 통상단이 파견되는 경우 그것은 보통 스파이로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며,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상태에서 받아들일지 아닐지 판단하는 것이 일반적 방식이었다. 호레즘이 취한 방법은 그다지 문명적이지 못했다. 징기즈칸은 분노했고, 이것은 침략을 개시할 아주 좋은 빌미였다.
(6) 대서정(2) - 중앙 아시아에서 러시아로
용의주도한 첩보 활동을 벌인 결과 호레즘에 대한 조사가 끝났다.
골 왕조, 아바스 왕조를 누르고 이슬람 세계의 최대 패자(覇者)로 알려졌던 서방의 강국은 실은 겉보기보다 실속은 없었다.
호레즘 샤 왕조가 갑자기 대두하게 된 것은 아랄해(海) 북방의 사나운 유목 민족인 터키계 캉글리족(族)의 무력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직접 충성을 맹세한 것은 호레즘 국왕 무하마드의 생모, 캉글리족 출신의 테르켄 하튼이었고, 호레즘 왕조에서는 어머니와 아들이 대립하고 있었다. 캉글리족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킬 것을 염려한 무하마드는 병력을 집중시킬 수 없었다. 이러한 사정은 몽골측에 바로 누설되었다. 몽골의 철저한 내부 교란(攪亂)의 결과, 공격의 손길은 무하마드의 어머니 테르켄 하튼에게까지 뻗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결국 호레즘 군대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개별적 도시 방위군으로 몽골 군대 전체와 싸워야 했고, 마침내 모조리 패하고 만다.
1219년, 징기즈칸이 이끄는 원정군은 오토라르 시를 공격하고, 이어서 마와라 안나르 지역을 침공했다. 나중에 제왕 티무르에 의해 번영하는 이 지역은 옛날부터 중앙 아시아에서 가장 비옥한 지대였고 수도 사마르칸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탐내던 곳이었다.
오아시스 여러 도시를 공격, 함락시킨 몽골군은 공성전(攻城戰)에도 뛰어났다. 오토라르를 공략하는 데는 5개월이 걸렸지만 부하라는 며칠 만에, 그리고 사마르칸트는 4일 만에 함락되었다. 금(金)과 서하(西夏)에서 등용한 기술자에게서 습득한 공성전 기술이 주효했음은 물론이고, 몽골군(軍)이 두려워 자진해서 문을 여는 도시들도 많았다. 사전에 조사한 대로 호레즘 샤 왕조의 행동은 전혀 통일되어 있지 않았다. 또한 몽골군은 강력하고 잔학한 군대임을 알려 전쟁 전부터 정보전에서 상대방의 사기를 꺾어 놓았다. 사마르칸트에 몽골군이 오기 직전에 국왕 무하마드는 도시에서 도망쳐 버렸다.
서양 세계에 이 사태는 전설의 구현으로 전해졌다. 프레스터 존은 다윗 왕으로 이름을 바꾸고, 페르시아를 석권하고 바그다드 근처까지 육박했다는 정보가 로마 교황청을 통해 유럽에 퍼졌다. 환상의 구세주가 나타났다는 데 힘을 얻은 십자군은 아이유브 왕조의 수도 카이로를 공격했으나 물론 동방으로부터의 원군(援軍)은 오지 않았다. 십자군은 참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서양 세계에 동방에서 온 군단이 루시(러시아)를 향해 올라오고 있다는 새로운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7) 진격 - 러시아 공략전
사마르칸트에서 도망친 호레즘 국왕 무하마드는 서쪽으로 달아났다. 무하마드가 도망친 것은 몽골군을 내지(內地)로 유인, 공격하려는 책략이었다는 설이 있지만 이미 때늦은 일이었다. 국왕의 추태가 호레즘 샤 왕조의 해체를 앞당겼다는 설도 있다.
이 시기에 니샤푸르에서 징기즈칸이 낭독한 선언문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사령관, 대관, 평민들이여. 신이 동에서 서에 이르는 지상의 제국을 짐에게 준 것을 알라. 항복하는 자는 목숨은 살려 줄 것이다. 그러나 저항하는 자는 불행을 당하여 처자(妻子), 평민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풍요로운 마와라 안나르를 제압한 징기즈칸은 세계 제패의 실현을 계획했는지도 모른다. 징기즈칸의 군대는 이란 서부 여러 지역을 공략하는 한편, 장군 제베와 스베테이가 군대를 이끌고 루시로 향했다. 무하마드를 쫓아간다는 것이 명목이었지만 사실은 새로운 땅을 정복하기 위한 침략 행위였다.
무하마드는 추격을 피해 카스피해 남안의 쿠르간까지 달아났다. 그러나 결국 몽골군에게 발견되어 카스피해 앞바다의 아바스쿤 섬으로 다시 탈출했으나 폐병이 악화되어 죽고 말았다. 이것이 1220년 12월의 일이다.
제베와 스베테이의 진군은 계속되었다. 몽골군은 그대로 카스피해 서안에서 북진하면서 도시들을 함락해 나갔다. 카프카스 지방을 지나 흑해 연안으로 들어간 원정군은 곧 칼카 해반(海畔)에서 루시군(軍)과 일전을 벌인다.
몽골군은 당초에 남러시아 초원에 분포하는 터키계 유목민 부족 킵차크족(族)을 정복하려는 계획도 있었는데, 킵차크족은 예전의 징기즈칸의 숙적 메르키드족과 교류하는 부족이기 때문에 제압해야 할 적이었다. 몽골군이 쳐들어오자 킵차크의 족장이며 루시와 인연이 있던 코치아는 루시측에 협력을 요청했고, 루시의 대공 게오르규는 몽골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게 된다.
루시 제후들로 이루어진 연합군은 드네프르 강 우안(右岸)에 진을 치고 몽골군을 기다렸다. 연합군은 8만 정도였고, 이에 비해 몽골군은 훨씬 열세였다. 첫 전투에서는 연합군의 가리치 공(公)이 몽골군을 압도했다. 기세등등해진 연합군은 후퇴하는 몽골군을 추격했고, 몽골군은 연합군을 방어하면서 칼카 강 동안(東岸)까지 후퇴했다. 그러나 그것은 몽골군의 책략이었다. 몽골에 비해 기동력이 뒤떨어지는 루시군(軍)은 추격전에 지쳐 있었는데, 가루치 공은 혈기만을 믿고 칼카 강을 건너는 작전을 감행했다. 때를 기다리고 있던 몽골군은 일제히 반격에 나섰고 루시군은 꼼짝없이 격파당하고 말았다.
가루치 공의 군단과 그것을 지원한 킵차크 군대는 괴멸되었고 몽골군은 제후들을 추격하여 그들을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키에프 공, 체르니고프 공은 붙잡혔고 공전승(共戰勝)의 연회석상에서 함께 처형되었다.
칼카 강의 결전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그후 원정군은 동쪽으로 전진하여 징기즈칸의 본군대와 합류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 루시 남쪽에 몽골군의 직접적 영향이 미치지는 않았지만, 이 패배는 루시 제후, 그리고 흑해 건너편의 비잔틴 제국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상흔(傷痕)을 남기고 몽골은 이렇게 떠났다. 1227년 징기즈칸은 서하 정복전이 한창일 때 죽었는데, 그가 만든 제국과 정복에 대한 야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10년도 채 지나지 않아 서양 세계는 다시 한번 징기즈칸의 그림자에 떨게 된다.
(8) 재방문 - 유럽 침입
1236년, 루시인들이 몽골을 거의 잊어갈 무렵에 몽골은 다시 동쪽에서 왔다. 징기즈칸의 뒤를 이은 오고타이 칸의 명령하에, 죽은 징기즈칸의 장남 주치의 아들인 바투 칸이 군을 이끌었다. 이번 원정의 목적 또한 킵차크족 지배, 호레즘 잔당의 괴멸, 그리고 서양 세계의 정복이었다.
바투 원정군은 우선 가까이 있는 킵차크족을 공격했다. 유목민 집단에 불과하며 몽골처럼 군단으로서 통일되지 않은 킵차크족은 몽골군의 적수가 못 되었다. 어떤 자들은 서쪽으로 도망치고 어떤 이들은 투항하여 대부분이 몽골의 지배하에서 몽골군의 일원으로 재편성되었다.
새롭게 킵차크군을 얻게 된 바투 원정군은 그 다음으로 루시를 침공했다. 카스피해에서 북상하여 모스크바, 블라디미르 여러 도시를 장악하고 노브고로드를 위협한 후에 방향을 바꾸어 폴란드, 헝가리 방면으로 침입해 들어갔다.
겁에 질린 두 나라는 동유럽의 비잔틴 제국과 로마 교황에게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지만 당시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는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2세와의 전쟁에 패해 그 호소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9) 압도 - 발슈타트 전투
유럽의 권력자들이 방관하고 있는 동안, 몽골군 별동대는 폴란드에 침입하여 폴란드 대공은 국내가 수습되지 않은 채 이를 맞아 싸우게 되었다. 1241년 4월, 양군은 리그니츠 평원에서 대규모 전투를 벌이고 몽골군은 폴란드군을 괴멸했다. 이곳은 훗날 발슈타트라 불렸는데 독일어로 '시체의 도시'라는 뜻이다. 이는 전투 후에 시체가 많이 나왔기 때문인 듯하다. 이 전투의 규모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들이 있지만, 몽골군의 가차없는 살육은 러시아인들에게 이질적인 모습으로 비쳤을 것은 확실하다.
그 무렵 바투가 이끄는 본대(本隊)는 헝가리로 향하고 있었다. 당시 헝가리 왕국의 군대는 유럽 최강으로 알려져 있었고, 국왕 베라 4세가 이끄는 헝가리군은 전력상 몽골군에 뒤지지 않았다고 한다.
헝가리의 수도 부다(현 부다페스트)로 진로를 잡은 몽골군과 헝가리 국왕군은 사요 강의 하반(河畔)에서 대치했다. 몽골군의 노궁포(弩弓砲)가 빗발치듯 쏟아져 헝가리군 내부에서는 참전한 수도원장과 국왕 사이에 균열이 생겼다. 이 혼란을 틈타 몽골군은 헝가리를 격파했다. 참패한 헝가리군은 몽골군의 추격을 받아 퇴로에는 여정 이틀에 걸쳐 시체가 흩어져 있었다고 한다.
(10) 공포의 전설 - 타타르의 멍에
유럽은 위기에 처해 있었고, 몽골군이 어디까지 공격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헝가리에서부터 서쪽으로 향하면 그곳은 독일, 프랑스와 평원이 이어져 있었다. 라인 강 이외에 몽골군의 진격을 저지할 요충지는 없었다. 그대로 대서양에 도달하고 마는 것이다. 바투군은 헝가리 평원의 목초 지대에 주둔하며 전진에 대비하고 있었다. 만약 몽골군이 유럽을 정복했더라면 라인 강가의 구릉지대는 목초지대로 모습을 바꿔, 훗날 유럽의 역사, 아니 세계의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유럽을 구한 것은 1241년 12월의 오고타이 칸의 갑작스런 죽음이었다. 정복 명령은 본래 오고타이 칸이 내렸으므로 그것을 계속할 것인지는 대회의를 열어 결정할 문제였다. 바투 칸은 빈을 눈앞에 두고 군사를 돌려 유럽을 떠났다. 그후에 몽골군이 유럽을 공격하는 일은 없었지만, 루시 땅에서는 제후와 각 도시, 그리고 정교회(正敎會)가 몽골의 지배를 완전히 받아들여 이후 수백 년간 루시는 킵차크 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를 러시아인들은 '타타르의 멍에'라 불렀고, 이 말은 지금도 불행을 뜻한다.
몽골인들의 지배는 몽골군의 가혹함과 잔학성에 비하면 훨씬 온후한 편이어서 기독교는 보호되었고 국내의 치안은 양호했다. 하지만 그들은 러시아인으로부터 10분의 1세(稅)를 거두는 한편 그들의 노동력을 이용했는데, 거역할 경우에는 가차없이 학살했다.
러시아 제후는 이 타타르의 멍에 아래에서 단결을 결의했다. 1380년에 모스크바 대공 드미트리 돈스코이는 주위의 제후에게 킵차크한국의 지배로부터의 해방을 호소하여 크리코보 전투에서 한번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대군을 이끌고 역습한 킵차크한국에 패하여 모스크바는 황폐화되었고 1만 내지 2만 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결국, 러시아가 타타르의 멍에에서 탈출하려면 이반 뇌제(雷帝) 시대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11) 몽골 제국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서양 제국에게 몽골, 그리고 징기즈칸은 파괴와 약탈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몽골에 관한 저서들은 대부분 그들의 파괴와 약탈, 폭력과 살육만이 묘사되어 있다. 그들이 서양 세계에 던져준 공포를 생각하면 당연하겠지만, 몽골이 서양 세계에 준 또 다른 영향 ― 몽골이 동서의 교통을 활발하게 만들었다 ― 에 대해서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몽골의 지배자들은 '초원의 길'이라 전해지는 동서의 교통로에 역과 말과 숙사(宿舍)를 마련했고 그 때문에 외국 사절과 여행자들은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었다. 또한 금과 은으로 된 파이자라는 여권이 발행되어 이것이 있으면 외국인도 여행할 때 시설을 이용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 상인 마르코 폴로가 멀리 중국을 여행하다 돌아올 수 있었던 것도 그 영향이 크다. 파이자는 현재의 러시아 영(領)에서 여러 장 발견된 바 있다.
몽골인들은 통상을 통해 얻는 이익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결국은 육로뿐 아니라 해상로도 열렸다. 몽골 제국의 지배하에 통일을 회복한 중국 남부 항구에서 3층 갑판의 큰 배가 인도를 향해 항행(航行)했다. 몽골 제국의 보호하에 중국, 페르시아, 인도, 중앙 아시아, 흑해 주변에서 러시아까지를 포함한 거대한 통상 시장이 나타나 세계는 동과 서가 서로 통하게 되었던 것이다.
"······인쇄술, 항해자의 나침반, 화기(火器), 사회생활의 매우 중요한······이것들은 유럽에는 없는 것들이며 몽골의 영향에 의해 극동(極東)에서 유럽에 이입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라고 말한 사람도 있다.
몽골 고원의 한촌(寒村)에서 태어난 소년 테무진, 징기즈칸은 세계를 공포에 떨게 한 상징으로서, 또 한편으로는 세계를 발전으로 이끈 공로자로서 역사에 그 이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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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로 읽는 영한대역 세계 명작 칼라 만화]
왕자와 거지 The Prince and the Pauper / 마크 트웨인(Mark Twain) - 사무엘 클레멘스(Samuel Clemens)
(1) 왕자와 거지(The Prince and the Pauper)는 미국의 문호 마크 트웨인이 46세 때 (1881년)에 발표한 작품으로 12~13세기에 북유럽에서 전해 오던 '왕자와 시종'이라는 전설을 바탕으로 하여 쓴 사회 풍자소설이다.
(2) 왕자와 거지 The Prince and the Pauper 줄거리
톰 캔티는 거지 술중독자 존 캔티의 아들로 오팔가의 빈민가에 태어났고 에드워드 6세는 영국의 왕 헨리 8세의 아들로 궁전에서 태어났는데, 둘은 같은 해 같은 날에 태어났다. 톰은 아버지 존 캔티의 강요로 동냥생활을 했으나 같은 마을에 사는 앤드루라는 신부에게 가서 책을 읽거나 라틴어를 배웠다. 책을 읽으면서 톰은 왕자를 동경하게 되었다. 왕자를 동경하던 톰은 어느 날, 오팔 가를 벗어나 왕자가 사는 궁전에 오게 되었다. 거지 톰을 본 문지기는 톰에게 거칠게 폭행을 가했다. 그것을 본 왕자가 와서 문지기 병사를 엄하게 꾸짖고 톰을 자기의 방으로 데리고 좋은 음식을 가져오라고 명령하여 톰이 마음껏 먹도록 하고 톰과 이야기를 하면서 왕자는 톰의 생활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에드워드는 서로 옷을 바꾸어 입자고 톰에게 제안하고 둘은 서로 옷을 바꾸어 입었다.
톰과 옷을 바꿔 입은 에드워드 6세 왕자가 밖으로 나가자, 문지기는 에드워드6세가 톰이라고 생각하고 왕자에게 폭행을 가하고 쫓아냈다. 왕자는 밤이 되도록 거리를 해매다가 술에 취한 톰의 아버지 존 캔티를 만나 자기가 왕자라고 말했으나 톰의 아버지 존 캔티는 에드워드 왕자를 붙잡아 자기 집으로 끌고 갔다. 에드워드 왕자가 존 캔티에게 강제로 끌려가는 모습을 본 앤드루 신부는 존 캔티가 에드워드 6세를 가혹하게 다루는 것을 말리려다가 그에게 몽둥이로 머리를 맞아 죽게 되었다.
궁전에 남은 톰은 궁전 사람들에게 자기는 왕자가 아니고 거지라고 신분을 밝혔지만, 궁전 사람들은 왕자가 정신이 이상해졌다고 생각했다. 병상에 누워있던 왕자의 아버지 헨리 8세는 왕자가 미쳤다는 이야기를 하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렸고 병상에서 톰을 만난 헨리 8세는 톰을 에드워드 왕자로 생각하여 톰에게 프랑스어를 말하고 자기가 톰에게 말한 프랑스어를 통역해보라고 말했으나 톰이 헨리 8세가 말하는 프랑스어를 통역하지 못하고 톰이 자기는 왕자가 아니고 어머니와 누나들이 있는 자기의 집으로 보내달라고 말하는 것을 보고 왕자의 정신이 이상해졌다고 실망했다. 이후 에드워드 왕자의 아버지 헨리 8세가 죽자 새로운 왕이 등극하는 것을 축하하는 자리에 톰과 왕족들이 참석했다.
존 캔티에게 잡혀 그의 집에 끌려온 에드워드 6세는 존 캔티에게 맞고 시달렸으나 톰의 어머니는 에드워드가 톰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존 캔티에게 머리를 맞은 앤드루 신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존 캔티는 에드워드 6세의 손목을 붙집고 집에서 나와 달아나다가 길에서 슬주정뱅이를 만나 술주정뱅이가 강요하는 술통에 든 술을 마시려고 에드워드의 손목을 잡았던 그의 손을 놓아 에드워드6세는 존 캔티로부터 달아나 새 왕이 등극한 것을 축하하는 축제에 참여한 군중들에게 자기가 왕자라고 외쳤으나 군중들의 비웃움만 샀는데 그 때 에드워드 6세는 마일스 헨든이란 사내의 도움으로 자기를 놀리는 군중들로부터 벗어난 뒤 그와 길을 가다가 아버지 헨리 8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슬퍼했다. 에드워드 6세는 아버지의 사망으로 왕(에드워드 6세)이 되었지만, 거지꼴에 인정받지 못하는 신세였다. 군중 속으로 사라진 에드워드 6세를 찾던 존 캔티는 마일스와 같이 있는 그를 보고 잡으려 했으나 마일스 헨든의 제지로 포기했다. 마일스 헨든은 왕을 자기의 방으로 안내하여 음식을 먹이고, 왕에게 자기 가족사를 들려주고 왕과 다른 자리에서 잤다.
다음 날, 마일스 헨든은 왕이 잠에서 깨기 전에 밖에 나가 헌 옷 가게에서 왕이 입을 옷 한 벌을 사와 왕의 침대로 갔지만 에드워드 6세는 존 캔티가 보낸 불량배에게 속아 이미 밖으로 나갔다. 마일스 헨든은 에드워드6세를 찾아 나섰다. 존 캔티가 보낸 후우고에게 속은 에드워드6세는 존 캔티와 거지 소굴로 들어가 갖은 고생을 하였다. 거지 소굴의 두목의 명령으로 심부름을 나온 에드워드 6세는 자기를 특히 괴롭히던 후우고를 따돌리고 도망쳤다. 도망친 에드워드는 숲속 불빛을 향해 걸어들어 갔는데, 거기에는 조그만 오두막에 노인이 살고 있었다. 그 노인은 에드워드로부터 영국의 왕 에드워드 6세라는 말을 듣고 자기를 대천사라고 소개하였다. 노인은 에드워드에게 다정하게 대해 주었으나, 에드워드 6세가 자기의 수도원을 파괴하고 교황이 되지 못하게 만든 헨리 8세의 아들이라는 것을 듣고 에드워드가 잠든 뒤 꽁꽁 묶고 살해하려 하였다. 때마침, 마일스 헨든이 나타나자 노인이 마일스를 따돌리려고 밖으로 나간 사이 존 캔티와 후우고가 오두막에 찾아와 에드워드 6세의 결박을 풀고 다시 자기들의 소굴로 끌고 갔다. 존 캔티에게 끌려간 에드워드는 휴우고가 꾸민 계락에 말려들어 도둑으로 몰려 감옥으로 가게 되었으나, 마일스 헨든을 만나 거지 소굴을 탈출하고 그의 고향집으로 함께 갔다. 그러나, 마일스 헨든의 동생 휴 헨든은 마일스 헨든을 매우 냉대하고 그와 크게 싸운 후 마일스 헨든과 에드워드 6세를 감옥에 가게 한다.
마일스 헨든과 감옥에서 나온 에드워드 6세는 대관식 전날에 궁전으로 들어가서 대관식 당일 톰의 머리에 왕관이 씌워지기 직전 대관식장에 나타나 자신이 진짜 왕이라고 말하고 톰도 에드워드가 진짜 왕이라고 밝혔다. 대관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에드워드 6세의 얼굴과 톰의 얼굴이 매우 닮은 것을 보고 크게 놀라면서도 에드워드가 진짜 왕인지를 의심했으나, 행방이 묘연했던 옥새가 어디 있는지 에드워드 6세가 말하면서 에드워드 6세는 영국의 국왕으로 왕관을 썼다.
국왕이 된 에드워드 6세는 자기를 도와준 마일스 헨든에게 켄트주의 백작작위를 주고, 톰은 육아원 원장이 되게 하고, 가혹한 법률들을 폐지시켰다.
(3) The Prince and the Pauper is a novel by American author Mark Twain. It was first published in 1881 in Canada, before its 1882 publication in the United States. The novel represents Twain's first attempt at historical fiction. Set in 1547, it tells the story of two young boys who were born on the same day and are identical in appearance: Tom Canty, a pauper who lives with his abusive, alcoholic father in Offal Court off Pudding Lane in London, and Edward VI of England, son of Henry VIII of Eng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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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판사명 : (주)파우스트 칼리지
(2) 저자명 : 21세기 영어교육연구회(21st C.E.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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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학생들의 학교 내신 및 필독서 시리즈 !
모든 가족이 한글 또는 영어로 함께 읽을 수 있는 가족용 세계 문학 시리즈입니다.
아래의 모든 만화 작품은 소년조선일보, 매일경제, 에너지데일리신문, 아시아일보, 용산신문, The Korea Times, The Korea JoongAng Daily 등에 100% 연재된 도서들입니다.
3. 영한대역 세계 명작 칼라 만화 : 총 20권(각권 정가 15,000원)
(각권 정가 15,000원 / 10% 할인 정가 13,500원)
(1) 돈키호테 Don Quixote / 세르반테스 (Miguel de Cervantes)
(2) 걸리버 여행기 Gulliver's Travels / 조나단 스위프트 (Jonathan Swift)
(3) 우주 전쟁 The War of The Worlds / H.G. 웰즈(H.G. Wells)
(4) 폭풍의 언덕 Wuthering Heights / 에밀리 브론테(Emily Bronte)
(5) 로빈슨 크루소 Robinson Crusoe / 다니엘디포우(Daniel Defoe)
(6) 파우스트 Faust / 괴테(Goethe)
(7) 로미오와 줄리엣 Romeo and Juliet /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8) 왕자와 거지 The Prince and the Pauper / 마크 트웨인(Mark Twain) - 사무엘 클레멘스(Samuel Clemens)
(9) 보물섬 Treasure Island / 스티븐슨(R.L. Stevenson)
(10) 백경(白鯨) Moby Dick 모비 딕 / 허만 멜빌(Herman Melville)
(11) 슬리피 해로우의 전설 The Legend of Sleepy Hollow / 워싱톤 어빙(Washington Irving)
(12) 노트르담의 꼽추 The Hunchback of Notre Dame / 빅토르 위고(Victor Hugo)
(13) 정글 북 The Jungle Book / 루드야드 키플링(Rudyard Kipling)
(14) 지킬박사와 하이드씨 Dr. Jekyll and Mr. Hyde / 스티븐슨(R.L. Stevenson)
(15) 크리스마스 캐롤 A Christmas Carol / 촬스 디킨즈(Charles Dickens)
(16) 80일간의 세계일주 Around The World in Eighty Days / 쥴 베른(Jules Verne)
(17) 해저 2만리 20,000 Leagues Under the Sea / 쥴 베른(Jules Verne)
(18) 위대한 유산 Great Expectations / 촬스 디킨즈(Charles Dickens)
(19) 모히칸족의 최후 The Last of the Mohicans / 제임스 페니모어 쿠퍼(James Fenimore Cooper)
(20) 죄와 벌 Crime And Punishment /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Fyodor Dostoevskii)
4. 영한대역 칼라 만화 징기즈칸((Genghis Khan) : 5권(각권 정가 15,000원)
(각권 정가 15,000원 / 10% 할인 정가 13,500원)
5. 영한대역 칼라만화 삼국지(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 나관중 / 20권 / 할인가 108,000원
6. 이솝우화 10권(오디오 CD 포함) : 할인 가격 30,000원
7. 10주 완성 영어 회화(1권 - 정가 15,000원)
(각권 정가 15,000원 / 10% 할인 정가 13,500원)
8. 위 도서 관련 내용
(각권 정가 15,000원 / 10% 할인 정가 13,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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