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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회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클로드 라 콜롱비에르 (1)
주님께서 성녀에게 보내 주신 '완벽한 친구'
클로드 라 콜롱비에르.(Claude La Colombiere, 종종 존경의 뜻에서 고귀한 출생을 나타내는 전치사 ‘de’를 덧붙여 ‘드 라 콜롱비에르’라고 쓰기도 하지만, 원래는 ‘라 콜롱비에르’라고 부름)
그는 예수회 소속 신부로 ‘예수 성심’에 대한 사적 계시를 세상에 알린 것으로 유명한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 (Marguerite-Marie Alacoque) 성녀의 고해 사제이며 영적 동반자다. 1641년 프랑스 생 생포리앙도종(St. Symporien-D’Ozon)에서 태어났고, 1682년 파레르모니알(Paray-le-Monial)에서 선종했다.
성인의 삶은 적어도 대중적으로는 특별한 인상을 남기지는 않는다. 17세 때 예수회에 입회해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나중에 문법과 문학을 가르쳤는데, 평판 좋은 온화한 선생이었다. 그후 시골 마을의 가난한 한 수녀회(성모 마리아 방문 수녀회, 라틴어로는 Ordo Visitationis Beatissimae Mariae Virginis)의 영적 지도를 맡았다. 거기서 신비한 체험을 했다고 주장하지만 주변 사람들이 다들 이상한 눈으로 바라봤던 한 수녀를 홀로 옹호했다. 그리고 가톨릭 교회가 핍박당하고 있던 영국 런던으로 파견됐으나 역모 사건에 연루됐다는 누명을 쓰고 투옥됐다. 건강 악화로 프랑스로 추방됐지만 끝내 회복하지 못했다. 영화 같은 순교나 위대한 업적과는 사뭇 다른 삶이다.
하지만 성인의 내적인 삶을 봐야 한다. 성인의 삶은 ‘예수 성심’을 따르는 삶이었다. 예수 성심 즉,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은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 마음과 육체가 거기에 ‘함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보다 ‘심장’으로 옮겨야 할지도 모른다. ‘예수님의 심장’은 콜롱비에르 성인에게 유일한 기준이었다. 당시로선 의심스러운 사적 계시를 전파하고, 격정과 감성을 따랐다는 말이 아니다. 최후의 만찬에 함께했던 주님의 제자처럼 주님의 심장에 자신을 온전히 의탁했고, 그것이 그의 ‘모든 것’이었다는 뜻이다.
그의 삶은 심장처럼 감춰진 삶이었으나 하느님 의식 안에선 가장 드러난 삶이기도 했다. 그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 가장 전형적인 예수회 회원의 모습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하룻밤에 수천 명에게 세례를 주고, 열대우림의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절벽을 맨손으로 오르는 것과 같은 초기 예수회 선교사들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하지만 주님의 심장을 따른다는 그 본질에 있어서는 같다. 콜롱비에르 성인은 스스로를 죄인으로 생각했지만 ‘예수님의 친구’로 부름 받았다고 믿었다. 알라코크 수녀가 자신에게 끊임없이 주어지는 계시와 주변 사람들의 몰이해와 멸시로 힘들어하고 있을 때, 주님께서 알라코크 수녀에게 직접 건넸다고 전해지는 말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내가 네게 나의 충직한 종이자 완벽한 친구를 보내 주겠다.” 그가 바로 콜롱비에르 성인이었다. 조르주 기통 신부가 쓴「복자 클로드 라 콜롱비에르의 삶 : 그의 환경과 시대」는 성인의 생애를 다룬 책 중 분량뿐 아니라 학술 가치 면에서도 중요성을 인정받는 책이다. 이 책의 영어판 제목은「Perfect Friend(완벽한 친구)」인데 참으로 적절한 제목이다.
어린 시절
성인의 유년기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다만 그의 가족들을 통해 어떤 분위기에서 자랐는지를 짐작할 따름이다. 그는 1641년 2월 2일 주님 봉헌 축일에 리옹 근교의 생 생포리앙도종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베르트랑 드 콜롱비에르(Bertrand de Colombiere)는 법률공증인이었는데 단지 귀족 출신이어서가 아니라 지혜와 인품을 갖춰 주변 이들에게 존경받았다고 한다. 어머니 마르가리타 쿠앙다(Marguerite Coindat)는 부유한 가문의 딸이었는데 지성과 신앙 면에서 부족함이 없었고 교회 활동과 자녀 교육에 열심이었다. 다섯 명의 자녀 중 네 명이 봉헌 생활 및 사제의 길을 걷게 된다. 유일하게 결혼해 13명의 자녀를 둔 맏아들 앵베르(Humbert) 또한 의원 신분으로 수도자 같은 삶을 살았다. 성인이 거룩함의 길을 갈망하고 걸을 수 있었던 것은 단지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성인의 어린 시절 성격을 엿볼 수 있는 일화 하나가 전해진다. 어느 날 여섯 살이던 맏형 앵베르가 동생 콜롱비에르에게 물건을 전달하는 심부름을 시키려고 했다. 물건을 전달해야 하는 장소까지는 제법 먼 거리였고 외지에서 하룻밤을 묵어야만 했다. 형 앵베르는 동생에게 심부름을 시키려던 생각을 취소했다. 하룻밤 묵어야 하는 방이 너무 좁고 시끄럽기도 했고, 동생이 길 잃는 것을 무서워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이야기 하나로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만 어린 시절 성인은 다소 겁 많고 유순한 성격이었다. 별로 특출날 것이 없어 보이는 소년이 나중에 성인이 될 것이라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성인 스스로도 원래 수도 생활에 “엄청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수도자가 되면 세상의 좋아하던 모든 것, 친교에서 오는 기쁨뿐 아니라 문학과 예술, 음악에 대한 사랑까지도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랬던 그가 어떻게 봉헌 생활을 결심하게 되었을까. 추측건대 예수회 학교 체험이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 1650년 아홉 살 되던 해 성인의 부모는 그를 리옹의 예수회 학교에 보내 고전을 공부하도록 했다. 그는 그곳 학교에서 지성과 덕행 면에서 좋은 평판을 받았다고 한다. 특히 교내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를 위한 신심 단체’에서 활동했는데, 성모님께 대한 애정과 신심이 그를 예수회 사제 성소로 이끌었다고 보기도 한다. 당시 그는 리옹 남부의 5세기 교회 유적지인 ‘리몽의 성모님‘(Notre Dame de Limon) 성지로 종종 순례했고, 성지를 맡고 있던 삼위일체 수도회 수도자들과 친교를 나누었다고 전해진다.
[예수회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클로드 라 콜롱비에르 (2)
‘사랑의 학교’에서 하느님의 ‘완벽한 친구’로 성장
예수회 입회
1658년 가을, 그가 17세 되던 때 멀리서 아이들의 우는 목소리를 듣게 된다. 빵을 달라는 것이었지만 사실 아무도 빵을 떼어 줄 사람이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 “수확할 것은 많으나 일꾼은 적다”고 하신 예수님의 호소와 연결될 수도 있다. 결국 그해 10월 25일 성인은 아비뇽의 예수회 수련원에 입회했다.
조용한 어린 시절을 보낸 그였지만 예수회 학교에서 교육받고 특히 예수회 입회 이후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2년간 수련기를 마치고, 3대 서원을 발한 후 아비뇽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우수한 성적으로 철학 시험을 통과한 후에는 학교로 파견돼 5년간 문법을 가르쳤다. 예수회 총장 파올로 올리바(Paolo Oliva) 신부는 그의 가능성을 보고 신학 공부를 위해 그를 프랑스 파리로 파견하기로 했다. 이때 유명한 태양 왕 루이 14세의 재무대신이었던 콜베르의 자녀들에 대한 교육을 책임지는 임무까지 맡게 됐다. 사제 수품 전인 젊은 신학생에게 주어진 큰 임무와 파리의 화려함은 자칫 교만의 씨앗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교양과 인품으로 칭송받았음에도 그는 세속에 물들지 않은 채 자신의 본분에 충실했다. 1669년 4월 6일 그는 사제품을 받고 리옹의 모교로 돌아가 수사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됐다.
제3수련
그후 1674년에서 1675년까지는 성인의 영적 여정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시기다. 바로 이때 ‘제3수련’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제3수련이란 예수회 창설자 이냐시오 성인이 「회헌」에 명시한 것으로, 철학과 신학 공부를 마친 회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일종의 ‘영적 심화 교육’이다. 단순히 지식을 공부하거나 복종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자유롭게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태도 또는 정서를 함양하는 교육이다. 이냐시오 성인은 이를 ‘사랑의 학교’(schola affectus)라고 불렀다.
당시 콜롱비에르 신부가 남긴 영적 일기 가운데 예수님과 성모님께 드린 담화 속에는 이 시기에 충만했던 하느님의 은총과 그에 대한 성인의 감격이 잘 나타나 있다. “오 (두 분의) 성심이여,…당신께서는 저의 법이 되시고, (당신과) 비슷한 모든 상황에서 저는 당신의 느낌들을 느끼도록 힘쓰겠나이다. 이제부터 저의 심장이 오직 예수님과 성모님의 심장 안에 머물 수 있기를, 그리고 예수님과 성모님의 심장이 저의 심장 안에 머무시어 제 심장이 두 분 성심의 느낌들을 함께 나눌 수 있게 되기를 바라나이다.”
여러 연구에 따르면 당시 그리스도교 수덕-신비주의 전통 안에서 예수 성심에 대한 신심이 일반화돼 있었다. 하지만 예수 성심이 가장 뚜렷한 방식으로 계시된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 수녀를 알게 되기 전에 이미 성인에게 이러한 신심이 표출될 수 있었던 것을 단지 우연으로 치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수덕생활이란 ‘하기 싫은데’ 해야만 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안 해도 되지만’ 하고 싶은 어떤 것이 아닐까 한다. 제3수련 기간에 성인은 지도 신부의 승인하에 아주 특별한 서원 즉 하느님께 대한 약속을 한다. 「회헌」의 모든 규칙과 다른 일반 규범 및 사제들을 위한 규범들을 엄수하겠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단순한 수도 단체 내의 행동 규범만이 아니라 겸손하고 깨끗한 마음 등 완덕에 필요한 모든 권고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체험한 사람이 어떤 엄격해 보이는 약속으로 나아간다는 것이 요즘의 관점에서는 생소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성인의 이러한 결심이 완고한 도덕주의, 엄격주의 또는 규칙에 대한 강박의 소산이 아님은 분명하다. 이 점은 실제로 그가 한 서원의 내용을 보면 확실해진다. “이냐시오 성인에게 영감을 주시어 규칙들을 제정하게 하신 하느님께서는 그것들이 지켜지기를 원하셨다. … 이제 이 서원은 그 준수를 어렵게가 아니라 오히려 쉽게 만들어 준다. 중죄를 범하는 공포로 인한 유혹을 없애 줄 뿐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하느님이 필요한 때에 더욱 강력한 도움을 주시도록 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어려운 법규를 더 많이 준수할수록 하느님을 잘 따른다는 말이 아니다. 자세히 읽어 보면 이 서원은 이토록 어려운 무엇무엇을 잘 해내겠다는 다짐이 아니다. 행동 또는 그것을 통해 마음까지 완벽히 통제해 내겠다는 것도 아니다. 대신에 그것은 감사와 확신의 표현이다. 하느님이 ‘이미’ 나를 사랑하시고, 이미 당신의 법을 따를 힘과 용기를 주셨다는 것이다. “이 서원이 내 마음의 평화를 앗아갈까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 서원의 의무에 대해 생각하면 공포보다는 기쁨을 줍니다.” “나는 내 (진정한) 행복과 조우했다고, 모든 것을 포기해서라도 찾고 싶은 보물을 마침내 찾았다고 느낍니다.” 그는 이렇게 사랑의 학교에서 주님의 충직한 종이자 완벽한 친구로 준비되어 가고 있었다.
특별한 은총이 충만했던 성인의 제3수련은 다소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끝나게 된다. 파올로 올리바 총장 신부가 리옹 관구장에게 서신을 보내어 그가 곧바로 최종 서원을 받도록 했기 때문이다. 때는 1675년 2월 2일 그가 34번째 생일을 맞던 날이었다. 곧이어 그는 파레르모니알의 한 예수회 공동체 원장직으로 파견됐다. 그의 명성과 역량에 비해 ‘한직’으로 임명된 것이라 많은 사람이 의아해 했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은 다른 데 있었다. 그곳에는 그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던 한 영혼,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 수녀가 있었다.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 수녀는 나중에 콜롱비에르 성인보다 먼저 시성되지만, 처음에 알라코크 수녀는 덕행으로 인한 명성 대신 ‘오명’으로 사람들 사이에 알려졌다.
[예수회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클로드 라 콜롱비에르 (3)
주님의 충실한 두 종, 예수 성심께 봉헌
마르가르타 마리아 알라코크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 수녀는 ‘환시’를 보곤 하였는데 실제로 예수님의 계시였음에도 여러 덕망 있는 수도자들이 보기엔 그것은 악마의 활동을 통한 것으로 여겨졌다. 출신과 교양 면에서 동료들에 비해 떨어졌던 그녀가 받았을 오해와 심지어 멸시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한편, 예수 성심께서는 1673년 처음 성녀에게 나타난 이후 변함없이 그에게 확신을 주셨다. 어느 날엔 성녀가 주님께 탄원하는 중에 나타나셔서 ‘당신의 충직한 종이자 완벽한 친구’를 보내 주겠다고 약속하셨다.(‘당신의 충직한 종이자 완벽한 친구’인 콜롱비에르 성인이 제3수련 중이던 때였다.)
두 성인의 첫 만남은 콜롱비에르 신부가 최종서원을 하고 원장직을 맡은 바로 그달 말에 이뤄졌다. 콜롱비에르 신부가 수녀원에 훈화를 위해 초대받았던 때였는데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 수녀는 내적 목소리를 통해 그가 주님께서 약속하신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콜롱비에르 신부 또한 수녀에게 내재된 ‘은총 가득한 영혼’을 보았다. 그 후 콜롱비에르 신부가 사순절 고해성사를 위해 수녀원을 방문했을 때 둘의 대화는 한 시간 반 정도 이어졌고, 콜롱비에르 신부는 주저함 없이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 수녀가 본 환시의 진실성을 확인하게 된다. 그 판별의 기준은 (1)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열망 (2) 순명에 대한 빗나가지 않는 사랑 (3) (주님을 위해) 모욕당하려는 원의 등이다. 이러한 태도들은 악한 영이 아니라 좋은 영에게서만 오기 때문이다. 이 기준은 주관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이냐시오 성인이 「영신수련」에서 ‘영의 식별’을 기술한 것에 뿌리를 두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 후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지만 알라코크 수녀의 회고를 통해 우리는 예수 성심의 계시가 다시 특별한 방식으로 찾아왔음을 알 수 있다. “하루는 콜롱비에르 신부님이 우리 성당에 미사성제를 거행하러 오셨는데 우리 주님께서 엄청난 은총을 그분과 제게 선사하셨습니다. 영성체 시간에 제가 주님을 모시러 다가갔을 때 주님께서는 활활 타오르는 가마와 같은 당신 성심과 다른 두 개의 심장을 제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 심장들은 주님 심장 안에서 하나가 되고 그 속으로 깊이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나의 순수한 사랑은 이 세 심장을 영원히 하나로 만들 것이다.’”
이 계시 이후 알라코크 수녀는 자신이 그동안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던 계시의 내용을 콜롱비에르 신부에게 알렸고, 콜롱비에르 신부는 그것을 글로 쓰도록 했다. 계시의 핵심은 사람들이 예수 성심의 사랑을 알게 하고 그 좋은 점을 널리 알리라는 초대다. 이 사명은 두 성인의 공동 사명이 됐다. 콜롱비에르 신부와 알라코크 수녀는 더이상 지도자와 피지도자의 관계가 아니라 주님 안의 동등한 형제, 자매로서 각자 다른 장소에서 ‘함께’ 일하게 된다.
주님께서 구체적으로 요청하신 것은 (1) 당신 성심을 기리기 위하여 특별하고 공적인 축일을 제정하는 것 (2) 죄로 인한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영성체 (3) 미사성제에 대한 죄를 용서받기 위한 보속 행위 (4) 세상에 예수 성심에 대한 신심을 전파하는 것 등이다.
1675년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팔부축제 중 6월 21일은 최초의 ‘예수 성심 축일’로 기억될 수 있다. 마침 예수회 성인 루이지 곤자가의 축일이기도 한 이날에 콜롱비에르 신부와 알라코크 수녀는 함께 자신들을 예수 성심께 봉헌했다.
런던에서
콜롱비에르 신부는 파레르모니알에서 공동체 원장과 수녀원 영적 지도자로 지냈지만, 놀라운 성과에도 불구하고 두 사명을 오래 지속할 수 없었다. 열여덟 달이 지나고 또다시 예측할 수 없는 섭리로 런던에 파견된다. 요크의 공작 제임스와 결혼한 마리아 베아트리체(Maria Beatrice)를 위해 ‘설교 사제’로 가는 것이었다. 제임스 공작은 가톨릭 신자였고 형인 개신교 신자 찰스 2세가 죽을 경우 영국 왕위를 계승하게 돼 있었다. (실제로 그렇게 된다.) 당시 영국은 정치적 이유로 가톨릭을 박해하고 있었는데, 제임스의 아내가 된 마리아 베아트리체는 영국으로 가는 조건으로 사제가 동행하기를 요구했다. 이러한 미묘한 상황에서 처음엔 프랑스 예수회의 드 생 제르맹 신부가 지목됐지만, 드 생 제르맹 신부는 배신자의 밀고로 영국에서 추방된다. 이에 그를 대신할 인물로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의 고해 사제였던 드 라 셰즈 신부가 콜롱비에르 신부를 추천했다. 1676년 10월 13일 콜롱비에르 신부는 과거 파리에서 그랬던 것처럼 영국 런던의 화려함 속으로 가게 된다. 하지만 이번에는 더 중요한 임무를 띠고 있었다. 박해 속에 고통받는 신자들과 함께하는 것이었다. 그는 세속적인 사교계의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설교와 피정 지도 등을 통해 파견 목적인 영혼을 구하는 일에 매진했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어려움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찰스 2세 국왕의 궁정에서 ‘성인’으로 불릴 만큼 신뢰를 받고 있던 그였지만, 배신자 타이터스 오우츠(Titus Oates)의 덫을 피할 수 없었다. 가톨릭 인사들이 영국 국왕을 암살하려 한다는 소위 ‘교황주의자 역모 사건’(1678)은 타이터스 오우츠의 거짓 고소로 시작됐고 영국 내 수많은 가톨릭 인사들이 고초를 겪게 된다. 타이터스 오우츠는 거짓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고, 결정적으로 예수회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신앙을 속여서 입회했다가 못된 처신으로 퇴회당했던 인물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음모의 주요 배후로 예수회를 지목했고, 예수회원 541명을 고발했다. 이 가운데 콜롱비에르 신부도 포함돼 있었다. 이에 콜롱비에르 신부는 체포돼 악명 높은 감옥 킹스 벤치(King’s Bench)에 감금됐다. 그곳은 ‘지옥의 예견’이라 불릴 만큼 열악한 환경이었고, 원래 약했던 성인의 건강은 되돌릴 수 없을 만큼 악화됐다. 결국, 다섯 주 후 1678년 12월 29일 그는 프랑스로 추방됐다.
[예수회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클로드 라 콜롱비에르 (4 · 끝)
예수님, 당신을 사랑하면서 죽을 수 있도록 해주소서
파레르모니알에서의 죽음
쇠약해진 상태에서 그는 다시 프랑스 리옹으로 돌아와 수사들을 위한 영적 지도자로서 일하게 된다. 하지만 건강은 계속 악화되었고 요양을 위해 다시 파레르모니알로 보내진다. 그 후 어느 정도 기력을 찾고 알라코크 수녀를 두 번 더 방문하기도 했다. 하지만 심한 열이 다시 그를 덮쳤고, 결국 일주일여 만에 숨을 거두고 만다. 1682년 2월 15일 그의 나이는 41세였다.
알라코크 수녀는 콜롱비에르 신부의 지인에게 편지를 쓰면서 이렇게 말했다. “울지 마십시오. 그분께 청하고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이제 그분은 당신에게 더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거룩한 성심께 대한 신심으로 하늘에서 그분은 큰 능력을 가지게 되었으니까요. 또 그분이 당신 삶의 그 어떤 곳에서 이룰 수 있었던 것보다 더 큰 영광 속으로 올라가셨으니까요.”
하지만 이는 일반적인 평가가 아니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 심지어 그의 동료 예수회원조차도 그의 죽음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던 것 같다. 콜롱비에르 신부는 사망 직후 장엄한 의식이나 행렬도 없이 학교 성당의 무덤에 묻혔다. 당시 파레르모니알의 예수회 기록 담당자(예수회 모든 공동체의 기록들은 3년마다 로마로 보고됐다)는 이렇게 쓰고 있다. “최근 3년 동안 기록할 만한 일, 혹은 우리 연감에 쓸 만한 일은 없었다.” 이처럼 특별히 가까운 몇몇 지인들을 제외하고 보통 사람들의 눈에 그는 그저 평판 좋은 사람이긴 했으나 굳이 기억하지 않아도 좋을 ‘아무개’로 여겨졌는지도 모른다. 학교에서 가르치기도 했으나 시골의 한 공동체 원장으로 일했고 모두가 악마에 씌였다고 못 박은 한 수녀를 홀로 옹호하여 같이 비난받을 위험에 노출되었던 영적 지도자. 영국에선 누명을 쓰고, 건강도 잃은 채 돌아와 영영 회복하지 못한 딱한 선교사. 어쩌면 그 재능에도 불구하고 크게 꽃 피울 기회를 잃어버린 불운했던 사제로 보였을 것이다.
주님의 완벽한 친구
하지만 주님의 눈에는 어떻게 보였을까. 충직한 종이자 완벽한 친구라고 하신 말씀은 무관심 속에 세상을 떠난 그에게 여전히 적용될 수 있는 말일까. 예수님의 관점 또는 콜롱비에르 자신의 마음을 완전히 알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성인이 남긴 묵상, 강론, 영적 일기 등은 그가 주님과 나눈 인격적이고 고유한 관계 즉 ‘친교’에 관해서 엿볼 기회를 제공한다.(성인은 살아 있을 때 저서를 남기지 않았다. 그의 글 또한 출판을 목적으로 쓰인 것들은 아니었다.)
앞서 언급한 제3수련 영신수련 피정 기간 중 예수님의 잡히심에 대해 묵상할 때 성인은 이렇게 쓰고 있다. “두 가지가 내 가슴에 깊이 와 닿았다.… 첫째는 당신을 잡으러 오는 사람들을 향하여 앞으로 나서시는 주님의 태도다. 그분의 가슴은 극심한 비통함 속에 빠져 있었다. 모든 정념이 속에서 날뛰었고 모든 본성이 조화를 잃었다. 이 모든 혼란과 유혹 가운데서 그분의 마음은 언제나 하느님과 연결되어 있었다.… 최고의 덕이 이끄는 쪽을 선택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둘째는 당신을 배신할 유다, 수치스럽게 도망쳐 버릴 제자들, 더 나아가 그분이 겪는 박해에 대한 책임이 있는 사제들과 일당들에 대한 주님의 마음이다. 이 모든 것들은 주님 안에 그 어떠한 증오나 분노의 움직임도 일으킬 수 없었다. 나는 이제 비통함과 완고함이 없는 이 마음, 원수에 대한 진실된 부드러움으로 가득한 이 마음을 내 앞에 모신다.”
성인은 누구보다 자신의 죄와 비참함에 대해 깊이 깨닫고 있었던 사람이다. 하지만 주님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그 마음을 체험한다. 그 사랑을 체험한 사람의 결정은 어떠할 것인가? 성인의 삶은 그것이 오만과 방종이 아니라 겸손과 순명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그가 자신을 위한 즐거움을 추구하지 않기 위해 좋아하던 노래도 부르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 자발적으로 예수회의 모든 규칙과 권고를 따르겠다고 서원한 것에서, 우리는 자만한 금욕주의자의 완고함 대신, “사랑받고 용서받은 죄인”의 심정과 그 떨림을 보아야 할 것이다. 가장 미천한 것을 사랑하시는 예수님께서는 그 ‘가난함’ 안에서 가장 완벽한 우정을 보시지 않았을까.
그는 이렇게 기도했다. “예수님, 당신께서는 저의 유일하고 참된 친구이십니다. 제 환난과 함께해 주시고 축복으로 바꾸어주십니다. 제가 어려움을 아뢸 때, 친절하게 들어주시고, 항상 상처를 치유해 주십니다. 밤이든 낮이든 어느 때건 저는 당신을 봅니다. 어딜 가더라도 당신께서 거기 계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저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제 거처가 바뀌어도 당신은 거기 계십니다. 당신은 지치지 않고 제게 좋은 것을 주십니다. 제가 당신을 그저 사랑하기만 한다면, 저를 사랑해 주실 거라 확신합니다. 제가 가진 세상의 것들은 당신께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제게 주심으로써 결코 가난해지지 않으십니다. 저의 처지가 아무리 비참하더라도 그 어떤 더 고귀하고 명민하고 심지어 거룩한 이들도 당신과 제 사이를 막고 당신과의 우정을 앗아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죽음은, 다른 친구들과 우리를 갈라놓을지언정, 당신과 저를 영원히 하나로 만들어 줄 것입니다. 나이 듦에 따른 모든 모욕과 불명예가 결코 당신과 저를 떼어 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반대로, 모든 것이 저를 모함하고 압도하고 억압하는 것만 같을 때, 그때 저는 당신을 가장 충만히 향유하고 당신은 제게 가장 가까이 계실 것입니다. 지극한 인내로 제 잘못을 참아 주시고, 심지어 제가 충실치 못하고 감사를 잊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제가 당신께 돌아갈 때 저를 받아주시지 않을 정도로 당신께 상처를 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 예수님, 제가 당신을 사랑하면서 죽을 수 있도록, 당신께 대한 사랑을 위해 죽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콜롱비에르 신부는 1929년 6월 16일 비오 11세 교황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992년 5월 31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시성됐다. 축일은 2월 15일이다.
[예수회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성 베드로 파브르 신부 (1) 두 성인과 함께 방 쓰며 우정과 신앙 키워
예수회 초기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회원 세 명을 선택한다면, 아마도 이냐시오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베드로 파브르 성인일 것이다. 세 성인은 여러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이냐시오가 회심한 후 파리에서 학업을 시작했을 때 파리 대학에서 함께 방을 사용했던 동료들이 바로 하비에르와 파브르이다. 1529년 생트 바르브 대학의 학기가 시작하면서 하비에르와 파브르가 사용하고 있던 방에 이냐시오가 새로 들어왔다. 늦게 공부를 시작한 이냐시오는 이들보다 15살이나 많았다. 세 사람은 대학에서 공부하는 동안 우정과 서로에 대한 학문적 격려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키워나갔다.
이러한 관계를 바탕으로 이냐시오는 동료들을 하느님 포도밭의 일꾼으로 함께 키워갈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1540년 예수회의 수도회 인가를 받았다. 예수회가 인가를 받은 후 수도회로서 정체성을 확립해 가는 과정에서 세 성인은 각자 고유한 역할을 하였다. 초기 동료들의 리더로서 그리고 예수회의 설립자로서 이냐시오는 예수회의 가장 중요한 두 권의 저서를 남겼다. 하나는 「영신수련」이고, 다른 하나는 「회헌」이다. 하비에르는 아시아의 선교사로서 이룩한 위대한 선교의 업적을 교회 안팎에서 인정받게 되었다. 파브르는 이냐시오로부터 영신수련을 가장 깊게 살아가는 회원으로 인정받았으며, 동시에 유럽의 다양한 곳에 예수회 공동체의 초석을 닦았다. 그는 교회 안에서는 종교개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톨릭과 개신교의 화해와 일치에 헌신하였다.
세 성인의 차이점은 이냐시오와 하비에르가 선종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성인품에 올랐지만, 파브르는 500여 년이 지난 2014년에서야 성인품에 오를 수 있었다는 점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복자 파브르 신부를 성인품에 올린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예수회원들은 “마침내!”라고 환영하였다. 그러나 많은 가톨릭 신자들은 “누구지?”라고 질문을 던졌을 것이다.
그가 교회의 아들로서 그리고 예수회원으로서 여러 가지 탁월한 면을 보여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에 묻혀서 드러나지 못한 이유는 아마도 이냐시오와 하비에르의 명성에 가려져 있었기 때문일 수 있다. 또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으려 하는 조용하고 겸손한 성품 때문일 수도 있겠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4년 1월 3일 로마 제수 성당에서 거행된 파브르 성인 시성 감사 미사에서 2006년에 베네딕도 16세 교황이 파브르 성인에 대해서 언급한 부분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성인은 겸손하고 섬세한 사람으로서 삶의 내적 깊이가 있으며 어떤 부류의 사람과도 친구가 되는 재능을 선사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교황의 말처럼 파브르 성인은 루터의 종교개혁이 전 유럽을 휩쓸던 분열과 갈등의 한복판에서 자신의 저서 「영적 일기」를 통해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닫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라고 가르쳤다.
파브르는 1506년 프랑스 동남부에서 이탈리아 서북부에 자리한 사부아 지역의 르 그랑보르낭에서 태어났다. 그는 자신의 출생과 세례를 이렇게 간단히 기록하고 있다. “나는 1506년 부활 시기에 르 그랑보르낭에 있는 빌라레라는 마을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세례를 받았다.… 르 그랑보르낭은 당시 전체 인구가 가톨릭이었던 제네바 교구에 속했다.”
르 그랑보르낭은 험준한 알프스 산악지역이었다. 파브르가 자란 마을의 주민들은 모두 넉넉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파브르 가족이 가장 가난한 것은 아니었다. 사부아 지역 사람들은 모두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가톨릭 신자들이었으며, 자존심이 강하고 강직하였다. 파브르의 고향 마을에 대한 보고서 중에서 사부아 사람들을 적절히 잘 표현한 대목이 있다. “사부아 사람들은 겸손하고, 신심이 깊으며, 마음이 강직하고, 매우 높은 도덕성을 지니고 있다. 남자들은 비록 키가 크진 않지만, 체격이 좋았다. 그들은 아주 튼튼한 치아를 갖고 있었고, 잘생겼으며, 건강해 보였다. 대화를 나눌 때에는 생기 있고 활기찼지만, 평상시 그들의 표정은 진지했다. 온화한 그들의 얼굴은 마치 조각상처럼 매우 영성적이었고, 평화로운 기운이 감돌았다. 그들은 굳건해 보였고, 조용하며, 사색과 자기 성찰을 하고 있는 듯하였다.”
파브르의 유년 시절을 보면 사부아의 이러한 면들을 엿볼 수 있다. 파브르의 고향 마을은 알프스의 산악지대였다. 그래서 눈이 녹아내리는 5월이 되면 가족 중의 한 명은 농장의 동물들을 알프스의 녹지로 이동시켜서 혼자서 돌봐야 했다. 파브르는 1513년 일곱 번째 생일을 맞이한 지 몇 주 되지 않아 처음으로 동물들을 데리고 고산 지대의 목초지로 갔다. 그는 산에서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어려움과 위험들을 대면하고 살아갔다. 갑작스레 다가올 폭풍의 징후를 읽을 수 있어야 했고 조난과 위험을 알리는 신호를 알아듣고 대응해야 했다. 맹수들의 공격에 대항해서 동물들을 보호해야 했다. 즉 그는 어려서부터 산에서 겪어야 하는 다양한 어려움과 위험들에 맞서 올바르고 신속한 판단과 용기, 책임감을 키울 수 있었다.
파브르와 가족들은 여느 사부아 사람들처럼 신앙이 깊었다. 그의 아버지 루이 파브르와 어머니 마리 페리생도 모두 르 그랑보르낭 출신이었다. 파브르가 남긴 기록을 보면, “부모님은 하느님을 경외하며 나를 키우신 좋은 분들이셨으며, 매우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셨다”고 말하고 있다. 파브르 자신도 동물들을 몰고 가면서 염소 젖을 짜고 있는 이웃을 만나면 습관처럼 “하느님과 비르지타 성녀가 당신을 도와주시길”이라며 인사했다. 이처럼 신앙은 파브르의 일상생활 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예수회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성 베드로 파브르 신부 (2) 친구 이냐시오, 갈팡질팡하는 파브르를 주님 포도밭으로
파브르는 어릴 적부터 신심 깊고 명석한 아이였다. 1596년 파브르의 삶과 덕행에 대한 초기 조사가 시작되었을 때 그의 어린 시절을 알고 있다는 르 그랑보르낭 출신의 두 사람의 증언은 파브르의 깊은 신심을 잘 보여 준다.
루이 블랑셰라는 사람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파브르는 6~7살 때 또래의 아이들과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이 하기엔 너무나 숭고한 일에 열중하였지요. 비록 친구들의 잘못을 책망하기도 하였지만, 그들에게 특별하고도 깊은 존경을 받았습니다.”
또 다른 증인인 장 포샤는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파브르는 이미 7~8살 때부터 거룩한 사람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는 신앙심이 깊었고,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였습니다.”
파브르는 어려서부터 공부와 배움에 대한 강한 열정을 보였다. 그에게는 루이스와 장이라는 어린 남동생들이 있었다. 부모는 넉넉하지 못한 살림과 노동에 지쳐 파브르가 빨리 어른이 되어 자신들의 짐을 좀 덜어 주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파브르는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 “아직 10살이 되지 않았던 그때 나는 공부하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하지만 나는 양치기였고, 부모님은 내가 일하기를 바라셨다. 나는 배움에 대한 열망이 매우 컸기에 매일 밤 침대에서 울기만 했다.”
파브르는 영리하고 기억력이 좋은 아이였다. 주일과 축일에 가족들은 생 장 드 식스트 성당 미사에 참여하였다. 일곱 살 무렵 파브르는 본당 신부의 강론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사람들 앞에서 말했다. 파브르의 또래 친구들이나 어른들은 파브르의 이런 모습에 놀라워했다. 르 포수아르의 카르투지오회 수도자로 있던 친지들은 파브르에게 배움의 열망을 심어 줬다.
매일 밤 학교에 대한 열망으로 우는 아들을 본 부모는 결국 마음을 바꿨다. “부모님은 줄곧 반대하셨지만 결국 나를 학교에 보내기로 하셨다. 내 학업의 진보를 보시고 계속 공부하도록 허락하신 것이다. 동시에 하느님은 나를 공부 이외의 다른 것에는 매우 서툴고 거의 쓸모없는 사람처럼 만드셨다.”
파브르는 그의 집에서 10㎞ 떨어진 톤에 있는 학교에 입학했다. 부모는 성적이 우수한 아들을 계속 공부시키기로 했다. 파브르는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1517년 고향에서 19㎞ 떨어진 라 로슈로 갔다. 그리고 마침내 1525년 19살의 파브르는 라 로슈에서 배운 것들을 정리한 노트를 들고 파리로 향했다.
그가 파리로 가기 20년 전만 하더라도 파리의 대학생들은 나태하고 방탕한 생활을 즐겼다. 심지어 타락한 수도자들은 수도복조차 입지 않았다. 그러나 프랑스 교회, 남녀 수도회, 대학, 대성당 등이 대대적인 개혁을 시도한 끝에 파브르가 파리에 와서 공부할 때쯤엔 안정적이고 건전한 문화가 자리 잡았다.
파브르는 생트 바르브 대학에 입학했다. 입학한 지 1년이 채 안 돼 그리스어 실력을 인정받았다. 교수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문장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알 수 없을 때 파브르에게 물을 정도였다.
그는 이냐시오를 만나기 전에 이미 하비에르와 같은 방을 사용하고 있었다. 하비에르는 운동을 잘했다. 하비에르는 파리 시내에서 가장 뛰어난 장대높이뛰기 선수였다. 하비에르는 자유 시간 대부분을 학교 운동장에서 다른 학교 학생들과 어울리며 운동으로 시간을 보냈다. 하비에르는 졸업 후 보베 대학에서 교수생활을 하고 싶어 했다.
공부를 잘했던 파브르는 잘생긴 외모뿐 아니라 항상 주변 사람들에게 다정하고 부드럽게 말을 해 학교에서 인기가 많았다. 파브르는 미래에 무엇을 해야 할지 방향을 잡지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세심증으로도 고생했다. 대학 구내의 이발사에게 팁을 얼마나 줘야 할지 결정하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했다. 또 고해성사를 본 후에는 자신의 모든 죄를 충분히 잘 고백했는지를 심각하게 걱정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바람이 불 때마다 마음이 왔다 갔다 하였다. 어떤 날은 결혼하고 싶었고, 어떤 날은 의사가 되고 싶었고, 또 어떤 날은 법률가, 교수, 신학자, 교구 사제가 되고 싶었으며, 심지어 때로는 수도자가 되고 싶었다.”
당시 이냐시오는 18개월 동안 몽테규 대학에서 라틴어를 공부한 후 1529년 10월 초 새 학기를 시작할 때 생트 바르브 대학으로 옮겨 왔다. 하느님의 섭리인지 아니면 우연인지 모르지만 이냐시오는 파브르와 하비에르가 사용하고 있는 방으로 이사했다. 이냐시오는 다른 학생들보다 15살이나 많았다. 파브르는 이냐시오에게 아리스토텔레스를 가르쳐 주었고, 이냐시오는 이렇게 갈팡질팡하는 파브르를 하느님의 포도밭으로 인도했다.
파브르는 이냐시오가 자신을 어떻게 다뤘는지에 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는 방과 테이블 그리고 돈까지도 함께 사용하는 친한 친구가 됐다. 그는 나의 영적 지도자가 되어 하느님의 뜻을 확인할 수 있는 규칙들을 알려 줬다. 후안 카스트로에게 총고해를 하도록 조언해 줬다. 그리고 매주 고해성사와 성체를 모시도록 안내해 줬다. 생트 바르브에서 우리의 행동양식을 함께하는 다른 사람들과 4년 동안 모든 것을 공동으로 했다. 나의 영은 허영심의 강을 건넜다. 그리고 길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며 치료약을 찾았다.”
1533년 파브르는 가족을 방문했다. 그리고 다음 해인 1월까지 파리로 돌아가지 않았다. 당시 일을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사부아에서 여러 달을 머물렀다. 아버지는 아직 살아 계셨지만, 어머니는 이미 오래전에 돌아가셨다.”
[예수회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성 베드로 파브르 신부 (3) 그리스도의 향기 풍긴 ‘길 위의 수도자’
1534년 1월 파브르는 파리로 돌아와 수품을 준비했다. 그는 성품성사를 위한 서류들을 정리했다. 이냐시오는 그에게 영신수련을 받도록 권했다. 파브르는 학교에서 피정을 하지 않고, 생 자크 거리에 있는 작은 방에 머물렀다. 매우 추운 겨울이었지만 그는 난방을 하지 않았다. 아침 미사 후에 몇 방울의 포도주를 마시고는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
영신수련 제1주간이 끝나갈 무렵 이냐시오는 파브르를 방문했다. 이냐시오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그는 6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았으며 불을 지피기 위해 남겨 둔 장작더미 위에서 셔츠만 입은 채 잠을 자고 작은 마당에서 눈을 맞으며 묵상 기도를 하고 있었다.”
이냐시오는 파브르와 대화를 나눈 뒤 “하루 더 단식하라”고 충고했다. 그러고 나서 “음식을 먹고 불을 피우라”고 했다. 이냐시오는 그 다음 날 그를 위해 장작과 음식을 가득 들고 왔다. 그리고 파브르를 위해 불을 피우고 요리를 했다. 말년에 이냐시오는 “초기 예수회원 중에서 파브르처럼 영신수련을 잘 지도하는 사람은 없었다”고 종종 이야기했다.
파브르는 1534년 2월 28일 부제품 후보로 추천됐고, 그해 부활 성야에 부제품을 받았다. 그리고 같은 해 5월 30일 파리의 장 뒤 벨레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았다. 두 달이 지난 1534년 7월 22일 파브르는 첫 미사를 드렸다. 그날은 파브르의 수호성인이자 모든 죄인의 수호성인인 마리아 막달레나의 축일이었다.
1534년 9월 클레멘스 7세 교황이 서거하고 바오로 3세 교황이 새롭게 선출됐다. 1521년 루터가 교회로부터 파문을 당한 이후 교회는 분열과 갈등과 폭력에 시달리고 있었다. 동시에 교회 분열과 갈등은 유럽의 정치적 상황과 복잡하게 얽혔다. 이러한 분열을 치유하고 통합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이 있었다. 그중의 하나가 공의회 소집 요청이었다. 교회를 떠난 사람들과 화해하고 다시 교회로 불러들이기 위한 노력이었다.
클레멘스 7세 교황의 재임 때 이런 공의회에 대한 요구가 많았지만, 당시에 교황은 공의회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무시했다. 교황의 거부는 우유부단한 성격 탓이기도 했고, 콘스탄츠 공의회(1414~1418)와 바젤 공의회(1431~1447)에 대한 기억 및 교황권과 공의회 권위를 둘러싼 논란의 증가 때문이기도 했다. 교황이 정치적 개입으로 스스로 두려움과 어려움을 느끼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바오로 3세 교황은 달랐다. 그는 즉위하면서부터 열렬하게 공의회 개최를 지지했다. 그리고 마침내 1545년 트리엔트 공의회를 개최했다. 바오로 3세 교황이 즉위한 1534년부터 공의회가 시작된 1545년까지는 예수회와 파브르 신부에게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1529년 파리 생트 바르브대학 기숙사에서 방을 함께 사용하기 시작한 예수회의 초기 동료들은 마침내 1540년 9월 27일 바오로 3세 교황에게 예수회 수도회 인가를 받았다. 파브르는 1546년 트리엔트 공의회에 참석하라는 명을 받아 가는 길에 생을 마감했다.
바오로 3세 교황은 1539년 여름 파르마 공국에서 모범적인 사제 몇 명을 보내 달라는 요청을 받고 베드로 파브르와 디에고 라이네스 신부를 파견했다. 파브르 신부에게는 첫 사명이었다. 그러나 파브르는 1546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유럽의 여러 지역을 계속 여행하며 신자들의 영성 생활을 돌보고, 교회를 떠난 영혼을 다시 집으로 돌아오도록 도왔다. 또 그는 루터교도들과 다시 일치를 이루며 동시에 여러 지역에 예수회 공동체의 초석을 닦기 위해 열정적으로 온 힘을 다했다. 몇 년 동안 그가 걸어서 여행한 길은 수천㎞다. 그래서 그는 ‘길 위의 수도자’라고도 불린다.
파브르 신부는 첫 사명지인 파르마 공국에서 주일과 축일 때마다 설교하였지만, 신자들이 많이 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1년이 좀 지나서 도시 전체의 사람들이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왔다. 당시 설교를 라틴어로 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사람들이 회심하게 된 이유는 설교보다는 아마도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바로 타고난 부드러움과 친절함, 다른 이들을 편안하게 해 주는 자세, 교양과 연민 덕분에 그는 파르마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다. 파브르 신부의 고해소에는 “아버지,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라며 겸손과 탕자의 눈물로 하느님 앞에 회개하려는 파르마 사람들로 넘쳐 났다.
4년 뒤에 파브르 신부는 고해를 들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려 주기 위해 쾰른에 있는 젊은 예수회원들에게 장문의 편지를 썼다. 마지막 문단은 고해 사제의 역할에 관해 그가 생각한 핵심 내용을 보여 준다.
“무엇보다도 성령의 도움을 청하십시오. 성령의 도움은 그것을 얻고자 기도하는 사람에게 쉽게 주어집니다. 고해를 들을 때는 온화하고 부드러워야 합니다. 비록 고해자가 무례하더라도 결코 날카롭게 이야기하거나 혐오감을 드러내지 마십시오. 이 숭고하고 거룩한 임무를 지겨운 듯이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온유한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우리에게 다가와서 기꺼이 무릎을 꿇은 채 유익함의 근원인 고해를 하러 온 죄인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회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성 베드로 파브르 신부 (4 · 끝) 아무에게도 마음을 닫지 않은 사제, 주님 품에 안기다
파브르 신부는 젊은 예수회원들에게 계속해서 권고했다. “그들은 시험에 들고, 훈계를 듣고 …시련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오만하고 경멸적인 바리사이나 화가 나고 성급한 율법학자처럼 행동하지 않는지 경계합시다. 결국, 고해소를 떠나는 모든 고해자가 다시 자유롭게 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합시다.”
파브르는 가는 곳마다 이런 겸손하고, 온유하고, 연민에 가득 찬 마음과 태도로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다.
1542년 여름 파브르 신부는 슈파이어에서 「영적 일기」를 쓰기 시작하였다. 여기에는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은총과 그로 인해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싶은 것들을 기록하였다. 또 그날그날의 묵상들, 영신수련에 따른 영적인 움직임들을 기록하였다.
파브르의 지향은 신자들을 위한 영성생활뿐만 아니라 종교개혁으로 분열된 교회를 다시 하느님 안에서 일치와 통합으로 이끄는 것이었다. 1542년 11월 17일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에 기록된 그의 기도 목록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그들의 약점과는 상관없이 특별히 열심히 기도를 드리고 싶은 여덟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바오로 3세 교황 성하, 카를 5세 황제 폐하, 프랑수아 1세 프랑스 국왕, 헨리 8세 영국 국왕, 마르틴 루터, 술레이만 1세 오스만 튀르크 술탄, 마르틴 부처, 필리프 멜라히톤입니다. 사람들이 이들을 자주 가혹하게 판단하는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집니다. 그리고 성령은 그들에 대한 연민의 정을 제 안에 불러일으키셨습니다.”
이 여덟 명은 당시 교회와 세속 정치의 복잡한 역학 관계 속에서 핵심 인물들이었다. 이들을 위해서 진심으로 기도하는 파브르 신부의 태도는 일치와 통합에 있어서 단 한 마리의 양도 잃지 않으려는 복음적 태도를 엿볼 수 있다.
라이네스는 이단자들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에 대해 파브르 신부에게 편지를 보냈다. 파브르는 이렇게 답변하고 있다. “만약 그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면 그들을 사랑으로 조심스럽게 대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진심 어린 마음과 행동으로 그들을 사랑해야 한답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혼에서 그들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약화하는 모든 생각을 버려야 하겠지요. 그들이 우리를 사랑하고 기꺼이 신뢰할 수 있게 하려면 우리는 그들의 선의를 얻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논쟁이 될 만한 주제들은 피하고 대신 서로 동의할 수 있는 것들을 그들과 친밀하게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파브르 신부는 바오로 3세 교황에게 트리엔트 공의회 교부로 임명받았다. 그는 1546년 봄에서야 그 임명장을 받았다. 그래서 파브르는 4월 20일 마드리드에서 출발해서 발렌시아로 향했다. 4월 29일 발렌시아에 도착했다. 그리고 5월 20일 바르셀로나에 도착했지만 삼일열 말라리아에 걸리고 만다. 3주 동안 병상에서 회복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이미 배는 떠나 버렸다. 그는 이냐시오에게 편지를 써서 출발이 지연된 이유를 설명했다. 6월 21일 파브르는 여전히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과 같은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파브르의 건강이 많이 악화하면서, 그의 건강을 걱정한 친구들이 “여행을 취소하라”고 그에게 권고하였다. 이냐시오도 로마의 예수회원들과 상의한 후 “즉각 돌아오라”고 강력한 어조로 명령했다. 이에 파브르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사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순명하는 것은 중요하다.”
7월 7일 파브르 신부가 탄 배는 제노바로 향하였다. 제노바에 도착하고 10일 후에 마침내 로마에 도착했다. 파브르 신부는 1539년 첫 사명을 받고 파르마로 떠난 지 7년 만에 다시 로마로 돌아왔다. 그는 로마에 돌아온 첫 주를 모든 사람과 함께 기뻐하며 서로를 방문하면서 보냈다. 7월 23일에는 라이네스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트리엔트 공의회에 있는 고위 성직자들과 그들의 비서들에게 전달될 편지를 함께 동봉했다. 그것들은 스페인에서 부탁받은 것들이었다. “이 편지들을 내가 전해야 하는데 나는 로마의 더위가 누그러질 때까지 트리엔트로 출발하는 것을 연기하였기에 이것들을 잘 보관하였다가 확실히 전달하여 주기를 청하네.” 이것이 파브르가 쓴 마지막 편지였다.
이틀 후인 7월 25일 파브르는 열병에 걸렸는데 갈수록 악화됐다. 자신이 죽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임종을 준비했다. 7월 31일 토요일 그는 마지막 고해성사를 본 후 다음 날 아침 미사 때 마지막 성체를 모셨다. “베드로 사도가 감옥에서 풀려난 8월 1일 정오와 저녁 기도 사이에 공동체의 모든 회원과 많은 친구가 지켜보는 가운데 사랑하는 파브르 신부님이 선종하셨다.”
2014년 1월 3일 로마에 있는 제수 성당에서 거행된 파브르 성인 시성 감사 미사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2006년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파브르 성인에 관해 언급한 부분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성인은 겸손하고 섬세한 사람으로서 삶의 내적 깊이가 있으며 어떤 부류의 사람과도 친구가 되는 재능을 선사 받은 사람입니다.”
종교적, 인종적, 정치적, 문화적 다양함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기적 개인주의로 살아가는 오늘날, 파브르 성인의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닫지 않도록 조심하시오”라는 말씀이 생명의 물처럼 세상을 치유하고 평화를 가져다주게 되기를 기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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