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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8-10 (넝쿨째 굴러온 호박을 발로 차버려라)
성경본문 : 다니엘 1: 18-10
8.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않게 하기를 환관장에게 구하니
9. 하나님이 다니엘로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
10. 환관장이 다니엘에게 이르되 내가 내 주 왕을 두려워하노라 그가 너희 먹을 것과 너희 마실 것을 지정하셨거늘 너희의 얼굴이 초췌하여 동무 소년들만 못한 것을 그로 보시게 할 것이 무엇이냐 그렇게 되면 너희 까닭에 내 머리가 왕 앞에서 위태하게 되리라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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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이정선 목사
요즘 세간에 서울대학교 지역할당제라는 것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전국의 각 지역별로 입학정원을 정해 놓고 신입생을 뽑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서울대학교에 합격하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특정지역에서 배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서울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울대학교니까 그래야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요즘에는 위장전입을 해서라도 강남의 8학군에 집어넣어야 하고 집안 살림이 거덜나더라도 고액과외를 시켜야 자녀들을 명문대학에 입학시킬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 게 싫어서 멀리 이곳 뉴질랜드까지 피난오신 분들도 많이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그러나 옛날에는 오히려 가난한 집 아이들이 공부를 잘했습니다. 그래서 개천에서 용났다는 얘기가 종종 나왔어요. 그런데 요즘 개천에는 미꾸라지밖에 없는가 봅니다. 제가 대학교에 들어가려고 할 때만 해도 사관학교에 가려는 아이들이 많았는데, 군대가 좋아서나 나중에 무슨 권력을 누릴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보다는 우선 돈이 들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일단 합격만 하면 학비가 없는 것은 물론 먹여주고 입혀주는 것까지 나라에서 해 주니까요. 집은 가난하면서 공부 좀 한다는 아이들에게는 이보다 좋은 유혹이 없는 것이죠. 또 옛날에는 국비유학생이라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였습니다. 요즘엔 그렇게 힘들게 고생해서 유학가는 사람이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죠.
지금은 누구나 유학을 갈 수 있습니다. 과외 시키는 것보다 유학보내는 것이 적게 든다고 하니까요. 오히려 공부를 못해서 유학가는 아이들이 더 많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옛날 그 시절에 유학가는 것은 공부를 잘하건 못하건, 부자이건 가난하건, 꿈도 꾸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국가에서 유학을 보내준다면 출세와 성공이 보장된 것입니다. 그나마 유학갔다 온 사람들이 많지 않았으니까 사회의 최고층에 편입될 수 있는 기회도 되는 것이죠.
우리가 지금 살펴보고 있는 다니엘과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 이 네 젊은이들이야말로 그 시절 국비유학생에 선발된 것처럼 대단히 큰 행운을 잡은 사람들입니다. 바벨론 제국의 왕이 왕궁에서 쓰려고 똑똑한 젊은이들을 뽑아서 왕이 먹는 음식을 제공하면서 교육을 시키려고 하는 데 뽑혔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신분은 전쟁에서 잡혀온 포로입니다. 전쟁포로는 두말할 것도 없이 노예입니다. 그런데 그 노예들이 왕의 음식을 먹게 되었단 말이죠. 고대사회에서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는 것은 가족, 또는 동일한 신분을 의미합니다. 종은 절대로 주인과 함께 같은 식탁에서 음식을 먹을 수가 없습니다. 또 왕이 먹는 음식은 아무나 먹을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종교제도에서도 제사장이 먹는 음식은 다른 누구도 먹을 수 없습니다. 먹는 음식으로 특수한 신분을 구별할 수 있었단 말이지요.
다윗은 왕이 된 후 요나단과의 우정을 기억하고 그와의 맹세를 지키기 위해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왕의 식탁에서 함께 먹도록 했습니다. 자기 아들처럼 대했다는 것입니다. 전쟁포로들인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정복자인 왕의 음식을 먹게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특별대우를 받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다니엘이 왕의 음식, 진수성찬을 먹지 않고 채소만 먹겠다고 나섰습니다.
다니엘이 무슨 vegetarian도 아니고 말입니다. 이것은 국비유학생으로 선발된 사람이 장학금을 거절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비를 조달하겠다고 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국가에서 대주는 학비와 생활비를 받으면서 공부하는 사람과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잠도 못자고 여기저기 아르바이트하러 다니며 공부하는 사람이 같을 수 있겠어요? 그러다가 혹시라도 학위를 취득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런 낭패가 어디 있습니까? 이것이야말로 넝쿨째 굴러온 호박을 발로 차버리는 일이 아닙니까?
이것은 다니엘과 하나냐, 아사랴, 미사엘의 결단이었지만, 자기들만 하겠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자칫 다른 사람의 목숨까지 위험하게 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젊은이들을 교육시키고 관리하는 책임을 맡은 사람, 여기 나오는 환관장이죠, 잘못하면 이 사람의 목이 날아갈 판입니다. 국비유학생들이 줄줄이 학위를 따지 못하고 낙제해서 돌아온다면 교육부 유학국장의 목이 날아갈 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목이 날아간다는 것은 해고를 당한다는 뜻이지만, 바벨론 제국에서 목이 날아간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목이 떨어져 나가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환관장은 자기가 살기 위해서라도 이 반항적인 젊은이들을 죽여야 할 일이었습니다. 왕에게 사실대로 보고해서 이놈들이 왕께서 하사하신 왕의 진미 먹기를 거부한다고 말씀드리면 다니엘과 세 친구들의 목숨은 파리 목숨만도 못하게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일이 묘하게 되느라고 이 환관장이 다니엘을 무척 아끼고 사랑했다는 것 아닙니까? 물론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이 매사에 말썽을 부리고 하는 일도 미덥지 않으면 환관장이 그렇게 아끼고 사랑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요셉을 보세요. 비록 노예로 팔려온 신세였지만, 얼마나 착하고 성실했는지 보디발이 그를 사랑해서 가정 총무로 삼고 모든 재산을 맡겼습니다. 어쩌다가 또 감옥에까지 가게 되었지만, 감옥에서도 교도소장이 요셉에게 감옥의 사무를 모두 맡길 만큼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사람은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동일하게 성실하고 부지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인정을 받지 않을 수가 없지요. 사도 바울은 종들이 상전 섬기기를 마치 그리스도께 하듯 해야 하며,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엡 6:5-6).
눈가림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결코 할 수 없는 짓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직장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늘 눈총이나 받는 사람이 교회에 와서는 집사네, 장로네, 무슨 선교위원장이네 하면서 많은 활동하는 것을 보고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인정할 수 없습니다. 즉 다니엘이나 요셉 같은 사람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사회생활에 충실해야 한다는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다니엘이 왕의 진미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성실하게 일하면서 인정을 받아야 함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결코 해서는 안 될 일은 단호하게 거부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세상에서도 인정받는 일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세상에서 인정을 받는 것과 하나님께 충실하다는 것이 이처럼 충돌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두 배나 더 힘들 수도 있다는 대목입니다. 물론 이런 경우라면 많은 손해와 불이익을 감수하고서라도 하나님께 충실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한 일이지요.
자, 그런데 왜 다니엘이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거부해서 일을 복잡하게 만들었을까요? 다니엘은 그것이 자기를 더럽히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왕이 먹는 음식을 먹는다는 것이 왜 자기를 더럽히는 것인지 본문에서는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의 관점에서 보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마 15:17-20).
그러나 당시 다니엘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별해야 하는 것은 목숨보다도 더 중요한 규칙이었습니다. 다니엘이 그렇게 생각했던 것을 보면 왕의 진미와 포도주가 다니엘을 더럽힐 수 있는 요인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다니엘이 보기에 왕의 진미와 포도주는 부정한 음식이었다는 것이었단 말이지요.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빼앗아온 성전기물을 자기 신에게 바쳤던 것으로 보아 왕의 음식은 먼저 그 신에게 바쳐지는 의식을 거친 것으로 추정됩니다. 또 그것이 당시의 관습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다니엘로서는 부정한 것에 접촉하는 것만도 철저하게 금지하는 율법에 의해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결코 먹어서는 안 되었던 것입니다.
왕의 진미와 달콤한 포도주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성결을 유지해야 할 다니엘을 더럽히는 독소를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넝쿨째 굴러온 호박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호박을 덥석 주웠다가는 그 넝쿨에 손발이 묶이고 목이 묶여 파멸로 추락할 수 있는 것입니다. 풍부한 영양가와 달콤한 향기 속에 감추어진 무시무시한 맹독을 다니엘을 보았던 것이고, 그래서 넝쿨째 굴러온 호박을 발로 차버리려는 것입니다.
저는 종종 낚시를 합니다만, 낚시를 할 때마다 물고기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습니다. 맛있는 미끼로 유인해서 그 속에 감추어진 날카로운 바늘로 입을 꿰어 잡는다는 것이 참 비열한 방법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낚시를 그만둘 정도로 휴머니스트는 못됩니다만... 어쨌든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일들 가운데 이처럼 달콤한 미끼인 것들이 많습니다. 특히나 호박이 넝쿨째 굴러온 경우는 그 속에 날카로운 낚싯바늘이 숨겨져 있는 미끼인 수가 많습니다.
사업하는 사람들이 사기당하는 것을 잘 보면 바늘이 감추어진 줄도 모르고 미끼를 덥석 물었기 때문인 때가 많습니다. 공짜인 줄 알고 얼른 받았다가 나중에 훨씬 더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수도 많습니다. 정말 거절하기 어려운 유혹, 그것은 그만한 위험도 내포하고 있지요. 이것은 사탄이 우리를 죄악에 빠뜨리려고 할 때 사용하는 수법이기도 합니다.
우리 주님 역시 이런 유혹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사탄은 십자가에 달려 죽지 않고 세상의 구세주가 되는 방법들을 줄기차게 제시했던 것입니다.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 26:39)라고 탄원하셨던 주님의 입장에서 그 고통스러운 죽음을 당하지 않고도 세상의 구세주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매력적인 제안입니까?
그러나 그것은 공짜가 아닙니다. 결국 그것은 사탄에게 세상의 주권을 넘겨주는 일이 될 것입니다. 세상을 구원해서 그대로 통째로 사탄에게 바치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파우스트는 그토록 고민하고 방황하면서 얻고 싶었던 모든 것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엇이든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는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요? 그러나 그가 지불해야 한 대가는 자신의 영혼이었습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멋진 제안을 해 옵니다. 정말 거절하기 어려운 유혹들입니다. 쉽게 돈을 벌 수도 있고, 닥친 위기를 모면할 수도 있습니다. 거기에는 사탄의 작은 요구가 있을 뿐입니다. 때로는 그 작은 요구마저 보이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 유혹에 눈이 가려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작게 생각되었던 사탄의 요구는 돌이킬 수 없는 우리의 파멸을 초래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영혼을 넘긴다는 것은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을 얻는다는 것에 비해 아주 작은 대가처럼 생각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그것은 자기가 얻을 수 있었던 모든 것을 아무런 가치도 없고 쓸모도 없는 것으로 만드는 궁극적인 파멸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무슨 게이트, 무슨 게이트 해서 여러 사람들이 줄줄이 감옥에 가고 수모를 당하는 것을 많이 봅니다. 사건의 전말을 들어보면 모두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 인생을 망친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처음에는 호박이 넝쿨째로 굴러들어왔습니다. 너무 좋아서 호박을 얼른 주워 호박죽도 쑤어먹고, 호박엿도 만들고, 호박떡도 만들고... 신나게 잔치를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그 호박넝쿨이 자기들을 얽어매서 감옥으로 끌고 가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다니엘에게도 호박이 넝쿨째로 굴러들어왔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그것을 발로 차버렸습니다. 그랬더니 호박이 깨지면서 그 속에 들어있던 독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불고기에 삼겹살에 바비큐에 그리고 고급스러운 포도주를 마시는 동안, 한 구석에서 김치 하나 상에 올려놓고 밥을 먹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에게는 우상에게 바쳐진 그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아도 된다는 기쁨이 넘쳤을 것입니다. 자신을 옭아매고 파멸시킬 수 있는 그 죄악의 올무에서 건져주신 것이 너무나 감사했을 것입니다.
넝쿨째 굴러온 호박을 발로 차버리는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무식한 행동으로 보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용기있는 행동일 수도 있고, 또 매우 지혜로운 행동일 수도 있습니다. 만일 독이 들어있지도 않고 넝쿨에 걸려 넘어질 염려도 없는 것이라면 주워 먹어도 상관없겠지요. 그런데 문제는 나중에 걸려 넘어진 모든 사람들이 처음에 그렇게 생각하고 주워 먹었다는 사실입니다. 넝쿨째 굴러온 호박은 사탄의 달콤한 유혹일 확률이 높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기고 냉큼 주워들기가 쉽다는 말입니다. 그 호박의 성격이 무엇인지 잘 파악할 수 있는 영적인 지혜가 필요하겠지요? 만약에 잘 모르겠다면 무조건 발로 차버리십시오. 그것이 훨씬 더 안전한 방법입니다. 만약 그것이 진짜 하나님의 축복이라면 오히려 가상히 여기셔서 다른 방법으로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사탄의 유혹으로 다가온 호박을 발로 차버렸을 때, 역시 하나님께서 그에 합당한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 넝쿨째 굴러온 호박은... 어떻게 한다구요? 네, 발로 차버리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