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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호 목사
미국의 세계적인 경제학자이자 사회평론가 중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제레미 리프킨(Jeremy Rifkin)’은 지금으로부터 6년 전인, 지난 2000년도에 책 하나를 출간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소유의 종말’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지만, 원래 그 책의 제목은 ‘The Age of Access(접속의 시대)‘입니다.
그는 이 책에서 90년대 이후 계속되어 온 ’소유의 시대‘가 종말을 맞고 ’접속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속도가 가장 중요한 오늘날, 물건을 움켜쥐고 있는 것은 오히려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예를 든다면 컴퓨터는 8개월마다 용량은 두 배가 되는데, 가격은 오히려 멈추거나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1년만 지나면 컴퓨터는 구형이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오래된 컴퓨터를 버리는 것도 돈이 들기 때문에, 컴퓨터를 사용의 개념으로 이해해야지 소유의 개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 신문을 예로 든다면, ’소유의 종말‘ 개념을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정신 나간 사람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신문을 소유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한 번 읽고 나면 더 이상의 가치를 느끼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문은 하루만 지나면 구문(Old Paper)이 되어 쓰레기통 속에 들어갑니다. 이처럼 모든 것이 빠르게 진행되는 21세기에는 ’소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접속‘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21세기에는 “얼마나 많은 것을 소유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과 접속할 수 있는가”가 그 사람의 능력을 표시하는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종종 목격할 수 있는데, 주위 사람들과 접속을 잘했느냐 아니면 접속을 잘못했느냐는 애경사가 있을 때 단번에 알 수 있습니다. 주위 사람들과 접속이 많았던 사람은 가정에 기쁜 일이 생겼을 때나 슬픈 일이 생겼을 때,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함께 기뻐해주고 함께 슬퍼해줍니다. 그러나 평소에 주위 사람들과 접속이 부족했던 사람은 가정에 기쁜 일이 생겼을 때나 슬픈 일이 생겼을 때, 찾아와서 함께 기뻐해주고 함께 슬퍼해줄 사람이 적습니다. 평소에 접속을 잘했던 가정은 사람들로 북적거리지만, 그렇지 않은 가정은 썰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접속이 많은 사람이 강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이것은 비단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접속이 많은 회사가 강한 회사가 되고, 접속이 많은 교회가 강한 교회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이처럼 21세기에는 ’소유‘ 보다도, ’접속‘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제레미 리프킨’이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제레미 리프킨’이 주장한 이 ’접속의 원리’가 바로 성경적 원리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요한일서 1장 2절을 보면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여기 ‘함께 계시다’는 말은 그냥 가만히 서서 함께 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서로를 향하여 움직이고 대화하고 교제하면서 함께 계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성부 하나님은 창조 이전부터 성자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교제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도 하나님의 인격을 닮아 서로 접속하며 살도록 지으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누구와 접속해야 합니까? 첫째는 하나님과 접속하여 살아야 하고, 둘째는 다른 성도들과 접속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수직적인 접속과 수평적인 접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달려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이 수직적인 접속과 수평적인 접속을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가로와 세로, 두 개의 기둥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이 가로와 세로 중에 하나만 없어도 십자가가 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수직적으로는 하나님과 교제해야 하고 수평적으로는 다른 성도들과 교제해야 합니다. 둘 중에 하나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데, 순서가 중요합니다.
수직적인 접속
가장 먼저 우리는 수직적인 접속이 있어야 합니다. 누구와의 접속입니까? 하나님과의 접속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 아름다운 꽃이 있습니다. 두 분의 자매님의 섬김에 따라 이처럼 아름다운 꽃이 매 주일 이 강단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사실 매 주일 꽃꽃이를 하기 위해 바쁜 토요일에 교회에 나온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것도 교회에서 경비를 대는 것이 아니라, 특별행사 때를 제외하고 대부분 본인들이 물질을 내, 여러 곳을 다니면서 꽃을 구해서 꽃꽂이 하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닙니다.
저는 매 주일 꽃꽂이로 주님의 성전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는 두 자매님에게 이 자리를 빌어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 가지 질문할까요? 이 꽃이 죽은 꽃일까요? 살아있는 꽃일까요? 우리 눈에는 꽃이 피어있으니까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미 죽어 있는 꽃입니다.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는 죽은 꽃입니다. 꽃나무는 줄기에 붙어 있어야 뿌리로부터 영양분을 공급받아 계속해서 꽃을 피울 수 있는데, 이 꽃은 이미 원줄기에서 잘려져 나왔기 때문에 언젠가는 시들게 되어 있습니다.
열매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무 가지가 열매를 맺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원줄기에 견고히 붙어 있는 것입니다. 가지가 열매를 맺겠다고 발버둥 칠 것이 아니라, 다만 원줄기에 붙어 있기만 하면 열매를 풍성하게 맺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원리를 가지고 주님은 요한복음 15장 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예수님은 참 포도나무가 되시며, 우리는 그 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들입니다. 가지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원줄기인 예수님께 딱 붙어 있는 것이 풍성한 열매를 맺는 비결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접속되어 있으면 풍성한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있지만, 원줄기인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런 열매도 맺을 수 없는 줄로 믿습니다.
세계 2차대전 때, 태평양 한 가운데서 미국 해군함정 한 척이 일본군의 함포 사격을 받고 바다 속에 침몰할 위기에 빠졌습니다. 선원들은 배가 침몰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배 안에 있는 모든 물건을 바다 속에 던지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배에 있는 물건들 중, 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부터 바다에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함정은 물 속에 침몰하고 말았는데, 나중에 조사하다보니 해군 병사들이 최후까지 던지지 않고 가지고 있었던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죽은 해군 병사의 품속에서 그들의 애인사진들이 나왔다고 합니다. 배가 침몰하며 생명이 끝나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그들이 붙들었던 것은 바로 사랑하는 사람의 사진이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마지막까지 붙들고 싶은 것이 무엇입니까? 피땀 흘려 벌어놓은 돈입니까? 아니면 목숨과도 바꿀 수 없다는 명예입니까? 아니면 장수하기 위한 건강입니까? 여러분들은 무엇을 마지막까지 붙들고 싶습니까? 저는 모든 것을 다 버린다 할지라도 주님만큼은 마지막까지 붙들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나의 구세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만이 나의 생명이시고 나의 소망이시고, 나의 사랑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바나바는 사도행전 11장 23절에서 “...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고 권한 적이 있습니다.
여기 ‘붙어 있으라’는 말이 바로 접속하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나바는 우리가 주님께 접속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은 지금 주님께 붙어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지금 주님과 접속되어 있습니까? 저는 여러분들이 구원받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항상 주님께 붙어 있기를 바랍니다. 나홀로의 삶을 살기보다, 날마다 주님과 접속함으로 풍성한 열매를 맺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
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수평적인 접속
둘째로 우리는 수평적인 접속이 있어야 합니다. 누구와의 접속입니까? 다른 성도들과 접속이 있어야 합니다. 한자로 사람 ‘인(人)’자를 보면, 인간은 서로 의지하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후,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시며 굉장히 흡족히 여기셨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2장 18절을 보면, 첫 사람 아담을 지으시고 나서는 다른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야훼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NIV 영어 성경에는 이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The LORD God said, ‘It is not good for the man to be alone. I will make a helper suitable for him.’“
첫 사람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도와줄 자를 찾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온갖 짐승들을 아담에게 데려다 주셨지만, 그의 짝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을 잠들게 한 후, 그의 갈비뼈 하나를 취하여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여러분, 여기에서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아담이 하와를 처음 보았을 때, 뭐라고 했을 것 같습니까?
제가 성경공부를 인도하다가 어떤 학생에게 이 질문을 했더니 그 학생이 뭐라고 한 줄 아십니까? ”와!~ 여자다!“
여러분들이 아담이라면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아마 짖꿎은 사람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어! 내 갈비뼈!“
또 반대로 점잖은 사람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정말 잘 오셨습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2장 23절에는 하나님께서 하와를 자기에게 데려오셨을 때 아담은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흥분하여 말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위하여 배필을 지으셨습니다.
여기 ‘돕는 배필’이란 영어로 ‘helper’라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 인간이 창조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느끼신 것처럼, 인간은 절대로 혼자서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좀 더 엄밀하게 말하면 인간은 혼자 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독불장군으로 살지 말고 서로 교제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성공은 소유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helper, 얼마나 많은 협력자를 얻느냐에 달렸습니다. 누군가와 협력하지 않으면 실패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창조의 원리‘이며, ’성경의 원리’입니다. 성경적인 삶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입니다.
예수님께서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0)고 말씀하신 것처럼, 나 혼자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본문을 보아도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성도 간의 접속에 따른 축복 4가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1) 협력 효과
첫째로 성도들이 서로 접속하면 ‘협력 효과’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9절을 보겠습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은 것은 두 사람이 연합하면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학교에서 가르치는 수학공식은 1 + 1 = 2 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1 + 1 = 2가 아니라, 10도 될 수 있고, 100도 될 수 있고, 1,000도 될 수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원리는 일반 수학공식과 다릅니다. 신명기 32장 30절은 성경의 원리에 대해서 잘 설명해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야훼께서 그들을 내주지 아니하셨더라면 어찌 하나가 천을 쫓으며 둘이 만을 도망하게 하였으리요“ 세상의 원리로는 한 사람이 1,000명을 쫓을 수 있다고 한다면, 두 사람이 2,000명을 쫓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원리는 다릅니다. 두 사람이 2,000명을 좇는 것이 아니라, 10,000명도 좇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들이 연합을 하면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일으킬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서로 하나가 되면 엄청난 일들도 감당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2) 위로 효과
둘째로 성도들이 서로 접속하면 ‘위로 효과’가 있습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어려움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넘어지고 쓰러질 때도 있습니다. 폭풍 가운데 처할 때도 있습니다. 그 때 내 곁에서 위로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어려움 속에서도 힘을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곁에 위로해 주는 사람이 없다면 조그마한 어려움에도 좌절할 수 있습니다.
어느 성탄절, 우체국에서 한 할머니가 길게 늘어선 줄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우체국 직원이 물었습니다. “할머니 무슨 도움이 필요하세요?” “네, 우표 두 장 살 거예요.” 우체국 직원이 “할머니, 우표는 저기 스탬프 기계에 돈을 넣으면 나오는데요.”라고 말하자, 할머니가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알아요. 그런데 저 기게는 카운터에 있는 아가씨처럼 저에게 잘 지내셨느냐, 요새 허리 아프신 것 어떠시냐, 손자들 잘 있느냐고 묻지를 않아요.”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이 성도의 교제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표현하지 않아서 그렇지, 사람들은 교제하기 원하고 위로받기 원합니다.
오늘 본문 10절을 보겠습니다.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무슨 말입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주위에 자신을 일으켜 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주위에 자기를 일으켜 줄 사람이 없으면 화가 임하게 되지만, 주위에 자기를 일으켜 줄 사람이 있으면 많은 위로를 받고 다시 한 번 힘을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이 넘어질 때 여러분들을 일으켜주는 믿음의 동역자들을 만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에게 여러분들을 위로할 수 있는 믿음의 친구들이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3) 의지 효과
셋째로 성도들이 서로 접속하면 ‘의지 효과’가 있습니다. 11절을 보겠습니다.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팔레스타인 지방은 낮과 밤의 일교차가 심합니다. 낮에는 불볕 더위로 뜨겁지만, 밤에는 기온이 매우 낮게 떨어집니다. 그 때 서로의 체온으로 따뜻한 밤을 보낼 수 있다면 굉장한 힘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옆에 없으면 추운 밤을 떨면서 보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주위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이처럼 중요합니다.
열왕기상 17장부터 19장을 보면 엘리야 선지자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사르밧 과부의 집에 가서 기근이 끝날 때까지 통의 가루와 병의 기름이 떨어지지 않게 하는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또 어떤 여인의 아들이 죽었지만, 다시 살려내는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또 그가 기도하자 3년 6개월 동안 오지 않던 비가 내렸습니다. 또 갈멜산 꼭대기에서 450명의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하여 승리를 거두기까지 했던 인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곁에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의지할 만한 사람이 그 곁에 하나도 없었습니다. 갈멜산에서 승리를 거둔 그는 오히려 영적침체에 빠졌습니다. 그는 열왕기상 19장 10절과 14절에서 “오직 나만 남았습니다.”라고 하나님께 하소연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엄청난 역사를 일으켰던 엘리야였지만, 그를 도와줄 사람이 주위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그는 큰 어려움을 겪은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의 주위에 서로 의지할 수 있는 믿음의 친구들이 있기를 바랍니다. 엘리야처럼 나홀로 신앙 생활하다가 어려움을 당하지 말고, 더불어 신앙 생활함으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4) 보호 효과
넷째로 성도들이 서로 접속하면 ‘보호 효과’가 있습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외부로부터 공격을 받을 때도 있고, 어려움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서로 힘을 모은다면, 서로가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다같이 12절을 보실까요?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우리는 우리의 인생길에서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어느 책에서 보니까 외국으로 이민을 간 한국 사람이 가게를 오픈하면 주변에 있는 현지인들의 가게에서는 ‘이제 망했다’라고 한답니다. 왜냐하면 한국 사람이 운영하는 가게와 게임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다른 가게에 비해 일찍 문을 열고 늦게 문을 닫고 더군다나 친절하기까지 합니다. 가격을 내리거나 사은품을 주는 등, 다양한 이벤트와 새로운 아이템으로 고객 유치에 정성을 다하기 때문에 주변 가게의 손님들이 한국사람 가게로 몰려든다고 합니다. 그런데 더욱 놀랍고 충격적인 이야기는 그 다음입니다. 한국 사람의 가게 옆에 다른 한국 사람이 같은 업종의 가게를 열면 현지인들은 ‘이제 살았다’고 한답니다. 왜냐하면 두 한국 사람의 가게가 각자 많은 손님을 유치하기 위해서 서로를 비방하기도 하고, 적자가 날만큼 가격 인하를 시키다보면 결국 둘 다 망하거나, 망하지는 않더라도 나중에는 다른 업종으로 변경해버리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서로 경쟁하면 망한다는 것입니다.
서로 살기 위해서는 경쟁하기 보다는 서로 협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한자로 ‘상생철학(相生哲學)’이라고 합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Blue Ocean Strategy(블루오션 전략)’이라고 합니다.
성경에도 이러한 원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편 133편 1절을 보면,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서로 연합하는 것이 선한 일이고, 연합하는 것이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 안에서 서로 연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서로 도와주고 살려주는 복된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이제 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한국의 지구촌교회에서 시무하시는 이동원목사님의 책에서 ‘리사 비머’에 대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리사 비머’는 ‘타드 비머’의 아내인데, 타드 비머는 미국의 9.11 테러 사건 때, 자신이 타고 있던 비행기를 추락시킴으로써 더 큰 비극을 막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의 아내 리사 비머는 남편 타드 비머가 죽은 지 10일 만에 미국의 영웅의 되었습니다. 부시 미국 대통령은 임신복을 입고 의회에 나온 그녀에게 희생자 전원을 대표하여 경의를 표했습니다. 이어 그녀는 굿모님 아메리카, 오프라 윈프리 쇼, 래리 킹 쇼, 등에 등장하며 희생자들의 생각을 대변하여 알리는 역할을 했고, 오히려 미국 국민들을 위로하였습니다. 그녀는 남편이 남긴 재산과 보험금, 그리고 남편이 죽고 나서 받은 위로금들을 모두 모아 희생자들 중 어린이들을 돕기 위한 타드 M. 비머 장학 재단을 만들었습니다. 그녀가 펴낸 남편과 그녀의 이야기 “행동개시(Let's Roll)"란 책은 출간되자마자, 100만부가 팔리는 베스트 셀러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이제 미국에서 가장 유명하고 바쁜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되어 학교, 교회, 정부기관 등을 다니며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뉴스위크지는 그녀의 겉으로 드러난 이러한 공적보다, 미망인으로서, 엄마로서, 남편 잃은 외로운 여성으로서의 삶을 취재하였습니다. 뉴스위크지에 실리 기사를 소개합니다.
이제 집에 돌아오는 그녀를 반기는 것은 남편이 아니라 침실 탁상 위에 있는, 비행기 잔해에서 수거된 남편 타드의 시계입니다. 그 시계는 아직도 9월 11일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종종 세 아이를 혼자 키우는 것이 너무 힘들게 느껴질 때, 그녀는 2층 침실에 올라가 벽장문을 연다고 합니다. 거기에는 아직도 남편의 옷가지가 그대로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리사 비머는 남편의 옷가지를 만지면서 “어떻게 나를 버려두고 당신 혼자 가버렸어요?”하고 흐느껴 우는 것으로 어느 정도 위로를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미망인 리사 비머가 정말 위로받으며 살아가는 방법은 다른데 있습니다. 그녀는 1주일에 하루도 빠짐없이 나가는 모임이 있다고 합니다. 9.11 사건으로 희생된 사람을 둔 가족들과 만나 슬픔을 나누는 Support Group입니다. 거기에서 만난 ‘질 골드스타인’이라는 여성이 없었다면 그녀는 견딜 수 없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같은 처지에 있는 그들이 수시로 서로 만나 아빠 없이 자녀를 키우는 어려움, Father's Day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이들의 생일파티 때에 있는 ‘아빠에게 전화하는 시간’은 어떻게 모면하는지, 등 심지어 남자들이 측은히 여기고 데이트를 신청해 올 때, 대처하는 방법까지 함께 울고 웃으며 나누는 것이 바로 지난 세월을 버틴 힘이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인들의 특징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소속되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그룹에 소속되면 꼭 억압당하여 자유를 박탈당하는 것 같아서 어느 그룹에도 속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현대인들의 특징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도 종종 이러한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한국에 있는 어느 교회에서 조사한 결과, 주일예배에 참석한 사람들 중 약 20%가 등록하지 않은 채 주일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물론 등록하지 않으면 어느 정도 편한 게 사실입니다. 예배만 드리고 바람과 같이 사라지는 것이 오히려 자기를 감출 수 있는 한 방법일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그룹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으면 영적성장이 더딜 수 있습니다. 지속적인 교제를 할 수 있는 대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더 큰 문제는 인생을 살면서 맞이하는 위기 속에서 영적인 도움을 받을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함께 아파해주고, 함께 울어주고, 함께 고민할 믿음의 친구가 없다는 문제에 빠집니다.
여러분, 사단이 좋아하는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사단은 아예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공격하지 않습니다. 자기 휘하에 있는데, 공격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사단이 공격하는 사람은 바로 교회 공동체를 떠난 사람들입니다. 나홀로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 성도들끼리 삶을 나누고 공개하기를 싫어하는 사람들, 영적인 리더쉽으로부터 어떤 점검도 받지 않고, 어떠한 지도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사단이 노립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약간의 어려움에도 힘들어합니다. 조그만 문제 앞에서도 좌절합니다. 그러나 다른 성도들과 접속되어 있는 사람들은 문제 앞에서 힘들어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습니다. 영적 싸움에서 승리합니다.
그러한 차원에서 볼 때, 오늘 개편하는 소그룹 모임인 ‘샘모임’은 매우 중요합니다. 물론 직장이나 사업, 등의 문제로 말미암아 샘모임 참석에 어려움을 겪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다는 아니라 할지라도 어느 정도까지 이해가 됩니다. 샘모임에 참석하고 싶지만 참석하지 못하는 분들의 심정을 압니다. 그러나 할 수만 있다면 샘모임에 참석하여 이민생활, 객지생활, 타향생활에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교회의 공예배에 참석하여 수직적으로 하나님과 접속하고, 주중의 샘모임에 참석하여 수평적으로 다른 샘원들과 접속하며 산다면, 무서운 사단의 공격에도 넘어지지 않고 승리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엘리야 선지자처럼 ‘나홀로’ 신앙생활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모이기를 힘썼던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더불어’ 신앙생활 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따라서 하시기 바랍니다. “Not Be Alone, But Together"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