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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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4 21:45
38집 원고(이규석)
cornerlee
조회 수 402 댓글 1
죄의 무게
이규석
목욕탕 들 때와 날 때의 내 몸무게 차이는 일 킬로그램
세상이 가벼워진다
막말 쏟아낸 죄, 삿대질한 죄, 오리발 내민 죄, 아는 척한 죄, 없는 척한 죄, 아내에게 흰 눈 뜬 죄
씻고 또 씻어도 꺼멓다
음, 옆집 과수댁 돌보지 않은 죄도 있었네
죄 다 벗겨도 하얘지지 않는다
아하, 욕하면서 못된 짓 배운 나라님을 미워한 대역죄 꼭꼭 숨어있었네
물이 좋아 온갖 허물 다 벗겨주는 우리 동네 목욕탕
환해졌다고, 벌거벗은 채 거울 앞에서 벙긋이 웃어본다
어느 날의 자화상
이규석
어쩌다 술이 술 잡아먹은 날엔
아스팔트가 벌떡벌떡 일어나 이마를 치려한다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해가며 집으로 간다
움켜쥔 붕어빵 봉지 비틀거려 가슴에 품자
골목길마저 흔들거린다
'가련다 떠나련다’
십팔번 노랫가락 목청껏 뽑아 올리자
현관문 열리며 우르르 몰려나온 아이들
다섯이었다가 금세 여섯으로 어른거린다, 내 아인 셋이라
황급히 욕실로 들어서자
얼굴 벌게진 아버지가
너 그리 살지 말라고 나무라신다
깜짝 놀라 당신께 다가서니
거울이 나를 막아선다
당신은 뉘십니까?
이규석
앞뜰과 뒤안 가득한 양귀비
폭죽 터지듯
불쑥불쑥 꽃을 피웠다
피 흘려 생명을 지켜준 당신
꾸역꾸역 이어온 역사를
다 토해내고 싶으셨나
가슴을 열 때마다
흩뿌려지는
붉디붉은 선혈
차마 말이 되지 못한 사연들
이제야 불꽃처럼 활활 타올랐다
살기 위한 악다구니가 어찌 독이기만 할까
오달지게도 피어난 꽃송이들
당신의 정령이기나 한 듯
선과 악의 경계를 하염없이 넘나들었다
당신의 바다
이규석
수평선 끌어안은 바다
소라 빛 소녀였다가
샛바람에 옥빛 새댁으로 거듭나더니
놀라워라, 당신
금세 남빛 엄마 되고 말았네
누런 강물 밀려와도
성난 태풍 몰아쳐도
당신은 언제나 푸르른 마음
하지만 하루도 평안할 날 없는
생명을 키우는 넉넉한 품
생 속의 아비는 모른다
뜨겁게 터져 나오는 숨비소리를
언제나 살아 일렁이는 바다
밀려오면 옥빛
밀려가면 쪽빛
당신의 사랑은 끝이 없어라
삶은 계란
이규석
동네 목욕탕 평상 위 삶은 계란
이달부터 값이 올랐다
세 알 담긴 한 소쿠리 천원에서 이천 원으로
‘계란이요 계란, 삶은 계란이요’
그 옛날 기차간에서 소리 높여 삶을 외치던
아저씨는 날 것의 삶을 어찌 삶아냈을까
한 알 집어 껍질을 깨는데
빤스만 걸친 삼부자 계란 통을 잡았다 놓았다 어쩔 줄 몰랐다
삶은 계란,
셋이서 한 소쿠리로는 모자라고 두 소쿠리로는 남아
쉬 맞아떨어지지 않는 내 인생 닮았다
고추는 무죄
이규석
올봄 울 안 텃밭에다
청양고추 열 포기
오이고추 열 포기
꾹꾹 눌러 심었다
탁한 세월에도 야무지게 자란 꿈,
꽃 진 자리마다 성성히 맺힌
고추 탱탱해졌다
청양이야 본디 맵다지만
오이고추 덩달아 매콤해졌다
오뉴월 벌건 대낮에 도대체
누가 널 건드렸느냐고 다그치는데
대문 들어서던 서삼촌이 농치셨다
고추는 무죄야
이 꽃 저 꽃 분탕질한 벌이 문제지
삼촌의 헛헛한 웃음소리 집안을 흔들었다
능소화
이규석
주황빛으로 단장한 그가
뉘 따라올세라
회화나무 타고 오른다
이글거리는 욕망
불타는 햇볕에 데면 어쩌려고
자꾸만 오를까
기대서라도
휘감아서라도 만나야 할
넝쿨 진 사랑
땅에 붙어 꽃피운
노란 민들레 힐끔거리다가는
흙 담장을 훌쩍 넘어버린다
어화둥둥 어사화
열흘도 못 버티고
길바닥에 몸져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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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cornerlee 21-10-15 22:03
마지막 작품, 능소화
마지막 연 끝에 두 줄이 짤립니다. 자꾸만~
어째야지요?
파일로 첨부할 수 있으면 이런 문제는 없을 텐데. . . .
끝에 두 줄입니다
열흘도 못 버티고
길바닥에 몸져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