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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의 야인 조지 오웰(2018) - 박홍규
저자 : 박홍규
저자 박홍규는 세계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글을 쓰는 저술가이자 노동법을 전공한 진보적인 법학자이다. 인문·예술의 부활을 꿈꾸는 르네상스맨으로 현재 영남대학교 교양 학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자전거 타기와 걷기를 사랑하며, 자유·자연·자치의 삶을 실천하고자 늘 노력한다. 그동안 쓴 책으로 ?니체는 틀렸다?, ?자유란 무엇인가?, ?함석헌과 간디?, ?내 친구 톨스토이?, ?가거라 아들아 용감하게;루쉰의 외침을 듣다?, ?태초에 행동이 있었다;라만차의 돈키호테?, ?독학자 반 고흐가 사랑한 책?, ?독서독인?, ?까보고 뒤집어보는 종교?, ?이반 일리히?, ?윌리엄 모리스의 생애와 사상?, ?메트로폴리탄 게릴라?, ?야만의 시대를 그린 화가 고야?, ?아나키즘 이야기?, ?플라톤 다시 보기?, ?인디언 아나키 민주주의? 등이 있다. 함께 쓴 책으로는 ?거꾸로 생각해봐! 세상도 나도 바뀔 수 있어?, ?세상을 바꾼 창조자들?, ?청년 인생 공부? 등이 있다.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저자의 말
텔레비전을 잘 보지 않는 내가 이따금 시청하는 것이 <동물농장>인 만큼, 대한민국에서 이 프로그램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인간 중심의 사회에서 벗어나 인간과 동물의 진정한 소통을 추구하는 동물 전문 프로그램’이라고 말하지만, 사람들 사이의 의사소통도 잘되지 않는 판에 동물과의 소통에 성공했을지는 의문이다. 또 이 프로그램이 ‘동물 해방’이나 ‘동물의 권리’ 같은 차원으로 발전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러나 동물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점만은 인정해야겠다.
이 책을 펴든 사람이면 누구나 오웰이 『동물농장Animal Farm』을 썼다는 것쯤은 알 것이다. 소설의 내용이 우리가 보는 텔레비전 프로그램과 다르다는 것도 알고 있을 테지만, 최근 미국의 유명한 주간지 <뉴스위크>가 오웰의 『1984Nineteen Eighty-Four』를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이어 세계 최고의 문학작품 2위로 선정했듯이 그런 류의 여러 목록에 오웰이 세계 최고의 작가로 오르고 있음은 잘 모를 수도 있다.
『1984』라고 하면 혹자는 바로 북한을 생각할지도 모른다. 내가 좋아하는 미국의 평론가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2005년 북한에 대해 썼던 글의 제목을 ‘『1984』보다 심해’라고 달았는데, “김일성이 집권한 1945년에 나온『1984』를 읽고 이를 청사진으로 이용한 것 같지만,(주석: 이는 히친스의 유머일 것이다.) 그 소설 내용보다 상황이 훨씬 심각하다”고 말했다. 히친스는 남한에 대해서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지만, 요즘 헬조선이니 뭐니 하는 우리 사회를 돌아보면 역시 만만치 않다고 생각한다. 천편일률적인 인간, 교육, 군대, 회사, 정치, 경제사회 등을 보면 더욱 그렇다.
히친스는 이 세상 누구보다도 오웰을 좋아했다. 학자도, 작가도, 문학평론가도 아니었지만 그는 20세기에 가장 뛰어난 지성인 3~4명 중의 한 사람이다. 히친스가 오웰을 좋아한 것은 학문이나 문학의 차원에서가 아니다. 사실 오웰의 작품은 문학이나 학문이나 예술의 차원에서 그다지 높이 평가되지 못한다. 나는 이 점을 너무나도 유감으로 생각한다. 독자여러분에게 그의 작품을 제대로 이해시키고자 잘 알려지지 않은 오웰의 삶과 글을 이 책에서 탐색하는 이유다. 오웰의 삶과 작품은 그가 스페인 시민전쟁에서 만난 무명의 시민 용사를 노래한 다음 시로 집약된다.
그래도 내가 그대 얼굴에서 본 건
어떤 권력으로도 빼앗을 수 없고
어떤 폭탄으로도 부수지 못할
수정 같이 맑은 정신
오웰은 그런 무명용사와 같은 수정의 재야 정신으로 20세기를 가장 명석하게 비판했다.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스페인 시민전쟁에 참전하여 목숨을 잃은 무명용사처럼 오웰은 평생 무명용사로 가난하게 살다가 47세에 죽었다. 그는 어떤 권력도, 부도, 안락도 추구하지 않았다. 최극단의 하층과 가난과 전장을 스스로 선택하여 살다가 죽었다. 그리고 그런 밑바닥 삶에서 나온 ‘수정의 정신’으로 전체주의적인 공산주의만이 아니라 자본주의까지 비판했고,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반(反)전체주의 세상을 구상했다. 바로 억압과 통치와 획일적인 허위를 넘어서는 새 세상이다. 나는 그것이 그동안 내가 꿈꾸어온 ‘자유-자치-자연’의 새 세상이라고 믿는다. 다양한 개성을 지닌 자유로운 개인들이 스스로 자치하며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세상 말이다. 그런 삶을 추구하기 위해 오웰은 정치와 예술을 합일시키는 것을 평생 작가로서의 이상으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민중적 설화를 사용하여 그러한 합일을 특히 완벽하게 형상화했다. 나는 이 책에서 나름으로 세심하게 읽은 오웰의 삶과 문학을 새롭게 분석하려 한다. 오웰의 작품이 세계문학의 고전으로 평가된다는 것은 곧 단순히 정치성을 강조한 문학 이상의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나는 오웰을 구소련이나 북한 같은 공산주의, 미국이나 남한 같은 자본주의 사회를 벗어나 새로운 사회를 지향하는 정치사상가로서 새롭게 읽었다. 또한 오웰의 작품을 그가 살았던 영국의 민중문화에 뿌리박은 문학예술로 새롭게 이해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에게 제대로 알려진 적이 없는 당시 영국의 민중문화를 소개해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이는 우리의 민중문화를 재발견하여 새로운 사회를 지향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고 여긴 탓이다. 지금, 우리 사회를 보라. 새로운 삶을 추구한다고 떠드는 자들도 여전히 외국의 현란한 이론이나 자생적인 정파에 따른 이해관계나 권력에 사로잡혀 서로 할퀴고 싸우고 있지 않은가? 정작 이땅에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데 실패했음에도 말이다. 특히 20대에 사회주의나 노동운동을 소리쳤던 자들이 30대를 지나면서 정당이나 권력, 심지어 자본에 기웃거리며 권력을 탐하는 모습을 우리는 너무나 많이 보았다. 이제 우리는 오웰과 같은 수정의 야인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야만 새로운 희망을 가질 수 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오웰의 교훈은 삶과 글의 완벽한 일치다. ‘나의 삶이 나의 메시지’라는 말은 간디가 남긴 것이지만, 간디에게 비판적이었던 오웰도 꼭 그렇게 살았다. 그의 글은 자신의 삶에 대한 완벽한 고백이자 삶 속에서 그대로 튀어나온 생각의 정직한 표현들이다. 자신의 삶과 배치되는 글을 쓰는 대한민국의 지식인들과는 달라도 너무나 다르다. 그런 점에서도 오웰은 마땅히 우리의 스승이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그를 무조건 숭배하지 않는다. 오리엔탈리즘적 편견을 지닌 ‘서양인 오웰’에 대한 비판적 인식도 분명히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는 영국의 명문 중고교인 이튼을 졸업하고 인도 총독부의 경찰이 되어 5년간 근무했다. 하지만 괴로워하다가 결국 그만두고, 그 죄의식 때문에 다시 5년 정도 자발적 빈민으로 살았다. 영국에서는 일찍이 그런 사람이 없었다. 조선에서 공무원을 지낸 일본인 중에도 그런 사람은 없다. 이 점만 보아도 오웰은 훌륭하다. 그러나 식민지 지배를 정말 괴로워했다면 간디의 인도 독립운동을 돕는 것이 옳지 않았을까?(주석:오웰은 간디를 비롯하여 인도의 독립 운동가들을 싫어했고, 영국의 식민지 지배가 다른 나라보다 최고라고 주장했다.) 뒤에 그가 스페인 시민전쟁에 참전했듯이 말이다. 물론 오웰 이전에도 식민지 지배를 비판하면서 피식민지인을 위해 싸운 사람들은 많다. 16세기의 라스카사스 신부도 그중 하나인데, 라스카사스는 콜럼버스의 수행 신부였으나 후일 회심하여 원주민을 돕는 일에 여생을 바쳤던 사람이다.
오웰이 5년 동안 자발적인 빈민으로 산 것도 빈민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글을 쓰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물론 가난에 대한 글을 쓰고, 그러기 위해 스스로 빈민으로 산다는 것 역시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본래 가난했기에 가난에 대한 글을 쓴 고리키 같은 작가는 있어도 부유하게 살 수 있음에도 가난을 택한 작가는 세계문학사에 유례가 없다. 하지만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스페인에서처럼 총을 들지 않았고, 가난을 물리치기 위해 총을 든 자들을 오히려 비난하는 모순적인 면도 보였다. 노동자들을 실제 이상으로 미화하면서도 평생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무관심했고 심지어 비난하기조차 했다.
오웰이 자신과 전혀 무관한 스페인의 시민전쟁에서 목숨을 걸고 싸운 것은 참으로 의로운 일이었다. 1950년 1월, 47세로 죽었기에 6・25전쟁은 알지 못했지만, 어쩌면, 그가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스페인 시민전쟁 때처럼 6・25전쟁에도 참전했을지 모른다. 오웰처럼 스페인 시민전쟁에 참전했던 헤밍웨이를 비롯한 수많은 작가들은 훨씬 더 긴 세월을 살았지만 6・25전쟁에 참전하기커녕 베트남전쟁에도 참전하지 않았다. 이 점 역시 오웰을 비롯한 그들의 한계가 아닐까? 여하튼 노동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찬양처럼 스페인 시민전쟁에서 공산당을 무조건 비난한 오웰의 의식에도 문제는 많다.
이처럼 오웰의 삶과 문학은 여러 가지로 논의할 수 있다. 그런 논의를 위해 쓴 이 책은 내가 2003년에 출간한 책의 개정판이다. 오로지 반공주의로 규정된 오웰을 그 책에서 처음으로 반전제주의 작가로 재조명하여 오웰을 재평가하는 데 나름으로 기여했다고 생각하지만, 오웰을 반공작가로 보는 풍조는 지금도 여전하다. 그의 작품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우리말로 번역되었다는 점을 참으로 아이러니하다고 평가하는 이유다. 평생 문학의 선전화에 반대한 오웰이 유독 대한민국에서 만큼은 완전히 반대로 오해받았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세계문학사에 기록될 만한 일이지 않은가? 그렇게 오해받는 오웰을 바로 이해하고자 노력하면서 나는 오웰의 동양관이 매우 잘못된 오리엔탈리즘이었음도 지적했다. 그러나 이 점 역시 그동안 줄곧 무시되었다. 그래서 13년이 지난 지금 이 책을 다시 펴낸다.
글을 쓰면서 나는 그동안 새롭게 나온 국내외의 논저를 다시 읽고 보완했다. 특히 번역판이 없어서 내 자신 임의로 번역했던 것을 새 번역판에 맞추어 조정했다. 13년 전에는 거의 번역되지 않았던 700여 편에 이르는 에세이 등 소설 외의 글을 번역한 책이 그동안 네 권이나 나온 덕분이다. 하지만 나는 그 번역판을 인용하지 않고 내가 처음에 번역했던 대로 두었다. 대신, 2014년 단권으로 펭귄 판으로 나온 에세이를 독자들에게 꼭 읽어보라고 권하면서 그 책의 쪽수를 적어 독자들이 원문을 쉽게 찾아보도록 안내했다. 중학생 정도의 영어 실력이면 『동물농장』을 비롯한 그의 모든 작품을 영어로 읽을 수 있으니 반드시 도전해보기 바란다. 그 밖에 인문 초보자에게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내용은 대폭 줄이고 인용 근거도 생략했다(그것들을 알고 싶은 독자는 13년 전의 책을 참고하면 된다).
공산주의는 물론 자본주의까지 비판하면서, 심지어 동물의 권리까지 인정하면서, 보다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를 향해 수정 같이 맑고 강한 야인의 목소리를 내는 청년들이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하다. 이 책을 만드는 ‘푸른들녘’에 사는 사람들, 그리고 이 책을 손에 든 청년 여러분이 바로 그들이다.
2017년 10월
닫는 글
오웰은 1950년에 죽었다. 그 후 반세기 이상 그에 대해 끝없는 논쟁이 제기되었으나, 그런 논쟁에 무관하게 그의 작품은 여전히 세계적으로 읽히고 있다. 우리에게는 비록 미국 정부에 의해 읽기를 강요당한 최초의 쓰라린 역사가 있지만, 그것에 아랑곳없이 여전히 읽히고 있다.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왔듯이 오웰은 사회주의자이고, 그의 모든 책은 사회주의를 위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사회주의라고 함은 소련이나 중국 또는 북한 등 이미 존재했거나 아직도 존재하고 있는 사회주의가 아니다. 그는 그 어떤 실존 사회주의에 대해서도 명백히 반대했다. 그것들은 사회주의가 아니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사회주의가 망하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도리어 참된 사회주의로 갱생하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이상으로 자본주의 세상이 사회주의로 바뀌기를 바랐다.
따라서 그의 작품, 특히 『동물농장』이나 『1984』는 그런 관점에서 읽혀져야 한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점은 그가 결코 자본주의에 찬성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는 단 한 번도 자본주의를 찬양한 적이 없다. 도리어 소련 등 현실에서 볼 수 있는 사회주의 이상으로 비판했다. 물론 그의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주의에 대응될 만큼 체계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인간의 인권이 중시되는 반독재, 반계급, 반차별의 사회를 그가 추구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또한 그는 악에 대항해서 싸우는 것이 인간의 의무라고 생각했고, 완전한 이상 사회가 아니라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해 싸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오웰이 여전히 읽히고 있고,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오웰을 읽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이유다.
출처:<<수정의 야인 조지 오웰>>박홍규.2022. 미얀마 시절에 촬영한 오웰의 여권사진. <<버마의 나날>>표지
<<카탈루냐 찬가>> 초판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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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년간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정치적인 저술을 하나의 예술로 만드는 것이었다. 나의 출발점은 언제나 어떤 당파적인 감정, 즉 부정을 감지하는 것이다. 내가 앉아서 책을 쓰기 시작할 때, 나는 자신을 향하여 “지금부터 예술작품을 쓴다”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내가 쓰는 것은 무엇인가 폭로하지 않으면 안 될 거짓이 있고, 주의를 환기시키고 싶다는 사실이 있기 때문이고, 내가 무엇보다 먼저 생각하는 것은 그것을 타인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 일이 동시에 미적 경험이 아니었다면 나에게는 한 권의 책을 쓴다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고, 긴 잡지 기사하나도 쓰지 못했으리라.(Essays,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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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느 것이 가장 강력한 모티브인지 분명히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따라야 할 것이 무엇인지는 안다. 그리고 나의 작업을 돌이켜보면 내가 생명없는 글을 쓰고, 화려한 구절이나 의미 없는 문장이나 장식적인 수식이나 헛소리에 현혹되었을 때에는 ‘정치적 목적’이 결여되었을 때였다.(Essays,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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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웰은 “1936년이 나의 삶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라고 말하곤 했지만, 사실 전환점은 이미 그전에 있었다. 1927년 경찰직을 그만둔 시점이다. 식민지 경찰에 대한 회의는 그전부터 생겼을 것이나, 결정적인 전환은 역시 1927년이다. 그러나 오웰 자신이 말하듯이 1927년의 변화는 1936년의 변화만큼 크지 않았다. 여하튼 1927년 이후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을 경험하면서 오웰은 스스로 아나키스트를 자처한다. 이어 1936년 말 스페인 시민전쟁에 참여하면서도 그는 여전히 아나키즘에 기울어 있었는데, 이는 각 시기에 쓴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Down and Out in Paris and London』과 『카탈루냐 찬가』에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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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웰은 1943년에 쓴 「사회주의자는 행복할 수 있을까?Could Be Socialist Happy?」라는 글에서 사회주의에 대해서 상세하게 말할 필요는 없고 다만 넓은 관점으로 보면 된다고 말한다. 그런 오웰의 사회주의는 ‘decency’란 말로 집약된다. 앞에서 내가 ‘인간적 품위’로 번역한 이 말을 정확하게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나는 이 표현을 ‘본질적인 품위, 무엇보다도 솔직함과 관대함’으로 이해한다. 어떤 도그마나 이데올로기에 의한 정치적 교조주의나 계획적 사회개혁 또는 종교적 절대주의 등에 반대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언론 출판의 자유를 비롯한 개인의 표현권, 특히 소수자의 표현권이 무엇보다도 중시된다.
즉, 인간적 품위란 자유와 관용을 뜻한다. 그러나 수동적으로 누리거나 향수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주장되고 행사되어야 하는 것이다. “자유의 비밀은 용기에 있습니다”라는 말처럼 대담하게 발언하고, 반대 의견에 대해서는 관용하는 의무를 뜻한다. 이는 작가로서의 오웰에게는 무엇보다도 명확하고 간결하게 쓰는 것, 즉 공동사회성, 상식, 용기, 보통의 문제를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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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오웰을 항상 권위에 반항한 공격적인 태도와 함께 뛰어나게 논리적인 학생이라고 회상한 사람도 있다. 당시 오웰은 영국 경험론 철학을 읽지 않았고, 그 뒤에도 러셀만 읽었으나, 당시 친구들은 오웰이 경험론의 논법을 구사했다고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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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경기 몇 년, 달러가 충분하고 프랑의 교환 가치가 상대적으로 낮을 때, 예전에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온갖 화가, 작가, 학생, 아마추어 호사가, 구경꾼, 난봉꾼, 놈팽이들이 파리에 떼거지로 몰려 들어왔다. 그 도시의 어떤 구역에는 생산인구보다 예술가들이 더 많았다.(Essays,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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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겪는 가난의 체험-이것은 기이한 것이다. 평소 가난에 대해 많이 생각해왔다. 또한 온 생애에 걸쳐 두려워하던 것이고, 그런 가난이 언젠가는 나에게도 닥쳐오리라고 생각해왔지만, 막상 닥치고 보니 정말 달갑지 않은 불청객이다. 전에는 그것이 매우 단순한 것이라고 여겼는데, 사실은 매우 복잡한 것이다. 몹시 끔찍하리라고 여겼는데 실제로는 단지 궁색하고 지루할 뿐이다. 맨 처음 느끼게 되는 것은 가난이 지닌 독특한 비열함이다. 어쩔 수 없이 쓸데없는 농간을 부려야 하고 마지막 빵 조각으로 접시에 묻어 있는 고기국물을 닦아먹는 궁상맞음 같은 것들이다. 이를테면 가난에는 꼭 따라다니기 마련인 거짓말이라는 것이 있다.(파리, 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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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나 똑같다. 반쯤 붙어 있다시피 한 작은 주택들이 끝없이 늘어서 있고 (…) 치장 벽토로 마감한 외벽, 방부 기름을 칠한 현관문, 쥐똥나무 울타리, 녹색 현관문 (…) 오십 채 중 한 채 꼴로, 결국은 빈민원 신세를 질 만한 반사회적 타입의 주인이 현관문을 녹색 대신 파랑으로 칠해놓았다.(숨 쉬러,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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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점에서 일한 적이 없는 사람이면, 고서점을 일종의 천국-멋진 노신사가 영원히 가죽 표지의 대형 책에 빠진 천국이라고 간단히 생각할 것이지만, 나에게 가장 깊이 새겨진 인상은 책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은 드물다고 하는 점이었다.(Essays,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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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신진 작가들은 이미 유명해진 기성 작가들의 살롱에 초대받거나 스스로 손님을 초대하여 교제의 영역을 넓히곤 했다. 그런 살롱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이 영국박물관 주변인 블룸즈버리에 사는 사람들의 주축으로 이루어진 ‘블룸즈버리 그룹’이었다. 버지니아 울프를 비롯한 작가들과 철학자 러셀, 경제학자 케인스 등이 중심이었는데, 구성원 대부분이 옥스브리지 출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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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절에 쓴 에세이로 「T. S. 엘리엇」(1942)이 있다. 오웰에 의하면 「황무지」를 비롯한 엘리엇의 전반기 시는 죽어가는 문명에 대한 애가인 반면, 가톨릭에 귀의한 뒤 쓴 신앙을 주제로 한 후반기 시는 죽음과 불멸에 대한 명상으로서 후자보다 전자가 훨씬 활기에 넘친다. 엘리엇이 후기에 와서 그런 반동적 보수주의에 빠진 이유는 스탈린주의자들처럼 엘리엇이 도그마에 갇혀버렸기 때문이라고 오웰은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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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은 완전히 그 자체의 이익을 위해서 권력을 추구하는 거야. 우리는 타인의 행복에는 관심이 없고, 단지 권력만이 관심거리지. 재산이나 사치나 장수나 행복도 아니야. 오로지 권력, 순수한 권력이야.(동물, 280)
우리는 혁명을 보장하기 위해서 독재정권을 세운 것이 아니고, 독재정권을 세우기 위해서 혁명을 일으킨 거야. 박해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박해야. 고문의 목적은 고문이고, 권력의 목적은 권력이야.(동물, 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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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오웰은 히틀러나 스탈린 같은 독재자들이 그 권력 남용을 은폐하기 위해 이데올로기를 사용했다고 보았다. 따라서 히틀러를 파시스트, 스탈린을 공산주의자라고 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오직 전체주의 국가를 설립하고자 했을 뿐이다. 또한 문제는 개인에 그치지 않는다. 권력 숭배를 위한 권력 숭배는 매우 일반적인 현상이잖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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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 리바이어던」
『1984』를 완성하기 위해 고투하던 1948년 3월, 오웰은 짧은 에세이 「작가와 리바이어던Writers and Leviathan」을 썼다. 리바이어던은 성서에 나오는 바다 괴물로 홉스가 1651년에 쓴 『리바이어던』처럼 정치나 이념이라는 괴물을 뜻한다. 오웰은 작가가 그것과 무관할 수는 없어도 작가로서의 본분은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오웰은 영국 문단의 지식인들이 전체주의로 가는 유력한 경향이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고(Essays, 453) 경고하는데, 당시를 그렇게 보았다면 21세기에는 더욱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특히 한국의 경우가 그렇다. 오웰은 당파적인 문학평론을 사기라고까지 칭했다. 그는 또한 좌파 이데올로기는 당장 권력을 잡는다고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발전시킨 것이지만 1945년부터는 노동당이 집권하고 있으므로 책임을 져야 함에도 그렇지 못한 현실을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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