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존재론적 현상학, 일여차一如茶에 담긴 깨달음의 의미
- 김월강론2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Ⅰ.
세속화와 거리감을 두고 금정산 차밭골에 둥지를 틀고 일반인들과는 다른 수행정진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월강 큰스님에게 있어 세계는 두 차원이 있겠지만, 어떤 경우에도 시인으로서의 실존은 그가 살고 있는 세계와는 분리될 수 없다. 이 세계는 심리적으로 무관한 대상이 아니라 자기의 삶에 의미를 던지는 실존적 상황으로서 이 세계와 어떤 형태로든 관계를 맺고 있다. 비관적인 사람은 비관적인 주체로서 대상을 비관적으로밖에 볼 수 없고, 행복한 사람은 행복한 주체로서 대상을 행복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세계 내에서 이런 역학 관계가 가장 순수하게 표상되는 공간이 시의 세계다. 여기서 시의 세계는 환상과 만나게 된다. 왜냐하면, 환상과 시는 자아와 세계가 정서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동일한 의식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언제나 지향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의식은 자연과 신에게로 바로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무정물의 모든 대상을 유정물화하는 하는 시적 사고와 일치한다.
‘나뭇잎에는 빗방울 듣는 소리’나 ‘방 안에는 찻물 끓는 소리’가 엄연히 다르지만, 시인은 <일여차>에서 두 소리를 동일하게 인식한다. 다른 데도 같다고 하는 것은 비논리의 세계요, 시적 세계다. 현실 속에서 앞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빗방울 소리’와 ‘찻물 끓는 소리’를 같은 차, 즉 ‘일여차’라고 하면 거짓말이 되지만, 시 속에서는 시적 진실이 되는 것이다. 이런 시적 세계에서 시인과 대상 사이의 공간적 거리도 없고, 양자 사이의 소외도 없다. 여기서 현상학적 사고의 전논리적 심성은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시인만이 이것을 잘 사용할 수 있는 특권이 있다. 월강은 공도리(空道理)를 깨우치지 못해서이지, 깨치기만 하면 ‘구름을 벗어난 달빛’이 될 수 있다고 설파한다. 이처럼 월강 시는 자아와 세계의 일체감을 구현한다. 이런 현상학적 세계관은 세계를 자아화하는 힘이 된다. 사실 시에 있어서 감정은 결코 배제될 수 없으며, 시의 세계가 어디까지나 정서의 구조인 것은 시인의 의식이 지성적 의식이라기보다 근본적으로 정서의식이기 때문이다.
월강 시인의 의식이 정서에 닿아있기 때문에 시적 진술이 김지하 시인의 ‘어불성설’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어떤 체험 속에 있더라도 정서는 세계를 파악하는 인식론과 결부되어 있는 점, 즉 ‘이것’을 ‘이것’으로 보지 않고, ‘이것’을 ‘저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고, 이런 정서가 자아와 세계를 결속시킬 뿐만 아니라 삶의 세계를 활성화한다. 이런 차원에서 월강의 시어는 의미의 기호가 아니라 의미의 육화라 하겠다. 노자가 <도덕경>에서 “도를 도라 하면 도가 아니다”라고 한 것처럼, 월강의 시어는 의미차원이 아니라 존재차원을 지향한다. 사르트르가 시어를 사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월강 시에 나타나는 시어의 반개념적 요소는 월강 시의 이분대립항에 기반한 역설성을 견인한다고 하겠다. 첫시 <벚꽃>에서부터 마지막 시 <일여차>에 이르기까지 월강 시의 언어는 ‘기호’가 아니라 ‘사물’이 된다. 이 지점에서 월강 시의 특징이 드러난다고 하겠다.
Ⅱ.
하이데거는 존재와 존재자, 곧 사물 그 자체를 엄격히 구분할 것을 주장한다. 왜냐하면 현대의 기술문명이 존재와 존재자를 혼동하고 전통철학이 존재자만을 탐구함으로써 존재를 망각케 하고 본질을 상실케 했기 때문이다. 시작詩作은 존재의 진리를 묻는 철학가의 본질적 사유와 일치한다. 존재의 사유와 시인의 시작詩作은 존재를 ‘이끌어 냄’이란 뜻으로, 같은 어원을 공유하고 있다. 언어는 진리를 현시하고 수립하는 공동의 임무를 수행한다. 다시 말하면 언어는 존재 이해의 방법론적 통로다. 시인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다. 존재에 상관하는 한 언어는 본질의 언어다. 시어는 본질의 언어다. 그런데 언어는 본래 대화로서만 본질적일 수 있다. 왜냐하면 시어란 존재의 ‘부름’, ‘말 건넴’에 대한 시인의 ‘응답’이기 때문이다. 존재의 말 건넴도 언어요, 존재의 응답도 언어다. 그러나 월강 시에 있어서 그 언어는 존재를 지시함으로써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환기함으로써 언급된다. 그의 시는 ‘일상적 진실’보다는 ‘당위적 진실’을 지향한다. 이것은 인생을 일반적이고 지속적인 측면에서 파악하는 보다 폭넓은 인식태도다. 월강 시인의 경우, 인생의 보편적이고 지속적인 측면, 즉 곧 있는 그대로의 측면이 아니라 ‘있어야 하는’ 인생이 시적의 대상이 된다.
오늘은 몹시 한가로워
바람 불기를 기다리다가
산비탈 벚나무 가지에서
벚꽃 떨어지는 모습을 감상하네
화려함은 불과 며칠뿐
저렇게 사라져 버리는 것이
속세의 부귀영화인들
별 다르겠나
- <벚꽃> 전문
이 시집에서 첫 번째로 만날 수 있는 시가 <벚꽃>이란 시다. 자연은 월강 시의 제재로서 단연 으뜸이다. 이 시는 비유적 암시를 통해 삶의 진리를 묘파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감동을 준다. 꽃은 자연의 상징이다. 욕망이 해소되지 않을 때, 우리가 찾게 되는 대상이 궁극적으로 자연이다. 디지털시대, 각종 매체의 눈을 통한 자연에 길들여져 있으며, 이미지로서의 자연을 실제의 자연보다 더 친숙하게 느낀다. 이는 그 이미지가 자연 자체보다는 인간의 욕망을 투사한 대리물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월강 시인은 다르다. 자연은 소통의 창구이자 매개다. 매체의 눈으로 자연을 보는 게 아니라 항상 영안으로 자연을 보고자 한다. 순식간에 피었다가 떨어져 버리고 마는 벚꽃의 성질을 인간의 욕망에 빗대어 잘 묘파하고 있는 이 시는 자연이 살아있는 스승이라는 자명한 사실을 정작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을 주지시킨다. 그리고 꽃의 본질, 자연의 원형과 대면케 해서 눈먼 욕망으로부터 탈피하길 촉구한다.
한편 화려함은 불과 며칠뿐이라는 시의 언어는 인생의 진리를 말해준다. ‘일장춘몽’, ‘화무십일홍’이란 진리를 ‘속세’의 ‘부귀영화’에 잘 빗대어내었다. 즉 인간이 자신의 순수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지나친 욕망에서 벗어나야 한다. 참 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부귀영화도 한때임을 알아야 한다. 이처럼 시인은 ‘벚꽃 떨어지는 모습’을 통해 욕망과 권력과 재물에 노예가 된 현대인의 자본주의적 삶을 은근슬쩍 비판하면서 그 속에 문명화 이전의 욕심 없이 순리를 알고 살았던 자연인간을 잉태하고 있다. 삶의 진리를 비유로 보여주면서, 깨달음을 촉구하고 있다. 그리고 그 자연인간은 시인의 전 시에 나타난 대각大覺과도 통한다. 월강은 자연 속에 기거하므로 인간적 폐해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다. 한가로워 바람 불기를 시인이 기다리는 것은, 잠시 화려한 꽃의 자태가 주는 허망함을 보여주고 싶어서일 것이고, 산비탈 벚나무 가지에서 벚꽃 떨어지는 모습을 감상하는 것은 깨달은 자의 또 다른 형태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싶다.
마냥 고즈넉한
암자로 가는 오솔길
따뜻한 아침 햇살을 받으며
청솔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시
발길 닿는 사람을 보면
살며시 옷소매를 붙잡네요
신선한 자연 속에서
시가 담고 있는 오묘한 메시지를
고요히 들여다보는 즐거움은
희유한 축복을 받는 일이라네요
만유와의 소통능력은
시인을 따를 자가 없으므로
인생관을 드높이고자 한다면
다양한 시심(詩心)을 살피는 중에
명백한 깨달음이 떠오른다네요
- <깃발시> 전문
월강 대종사는 조계사를 떠나올 때, <물망초>라는 시집 한 권을 달랑 들고 나왔던 스님이다. 그래서 시인이 되었고, 차를 마시면서 시심을 키운 이러한 까닭으로 ‘만유와의 소통능력은 시인을 따를 자가 없다’고 자신있게 깃발시에서 말한다. ‘인생관을 드높이고자 한다면, 다양한 시 속 시인들의 시심을 잘 살펴야 할 것이고, 시를 감상하는 중에 깨달음이 올 것이라는 사실을 독자에게 말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만유와의 소통능력에 있어서 시인을 따를 자가 없다‘는 대목이다. 그래서 시가 ’발길 닿는 사람을 보면, 살며시 옷소매를 붙잡는지도 모르겠다. 왜 시인은 싱인을 이렇게 대단하게 여길까? 시험을 보고 얻어지는 변호사, 변리사, 오랜 습작을 거쳐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서예가, 조각가 등은 모두 영리 추구에 목적을 두지만 철인, 시인 등은 돈보다는 인류에 대한 걱정과 자신의 수양에 목적을 두고 살아가기 때문일 것이다. ‘깨달음의 추구’는 월강 시가 표방하고 있는 가장 강력한 핵심 코드다.
월강의 <깃발시>는 그의 시론이 드러난 시로서, 직접적으로 감지되는 사물을 통해서 어떤 감추어진 좀더 높은 차원을 들여다보게 하는 것, 곧 구체적인 이미지의 매개를 통해 이 매개체를 초월하는 어떤 정신을, 진리를 환기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것 같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시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라고 하지 않았던가. 월강 시인은 인간이 사물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인간을 부르는 것이다. 월강은 사물한테 미리 존재자의 자격을 주고 있다. 결국 시는 대화에서 일어나며, 대화에서만 본질적일 수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무엇보다도 월강시의 특징은 진심에서 우러나온다는 것이다. “시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 시인은 어떤 존재인가는 질문과 동일하다.” 이것은 시인의 경험적 자아와 시적 자아가 일치한다는 뜻이다. 시인의 마음 속에 있는 의도는 ‘의식의 지향성’이라는 현상학적 개념을 띠고 있다. ‘시를 감상하는 일’만으로도 ‘희유한 축복’을 받는 일이라는 등식은 그가 얼마나 시의 힘을 믿고, 시를 통해 세상을 구원해 보고자 하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보름달이
너무 밝아서 그러나
간절한 소쩍새의 부름으로
가까운 둘레길 돌아서
고요하고 적적한
연못에 다다랐네
솔바람도 없고
잔물결도 없는
연못 속의 달그림자
스스로 편안하고 온전하네
소쩍새가
나를 불러낸 것은
달그림자처럼 살다 가라는
친절한 당부였구나
- <달 그림자> 전문
표제시 <달 그림자>에서도 볼 수 있듯이 월강의 사물관은 하이데거의 명명이나 헤겔의 주체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하이데거나 헤겔은 명명의 언어행위로 존재를 드러낼 수 있다고 보지만, 스님은 정반대다. 늘 사물이 인간을 명명하는 입장이다. ‘간절한 소쩍새의 부름으로’는 이를 잘 증명한다. 시적 대상과의 교감은 물론이지만, 여기서 월강이 내보이는 의식은 탈 인간중심주의를 표방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사물을 인간의 콜링이나 네이밍에 관계없이 이미 존재자로 인정하는 것이다. 인문학적 사유를 통해 시적 대상에 접근한다는 의미다. 헤겔의 논리대로라면, 인간의 명명을 받지 못한 사물, 즉 명명되기 전의 존재자는 존재자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은 어둠의 상태에 놓여있는 것이다. 시인이 존재자를 명명함으로써 그것은 비로소 우리에게 본질적인 뜻을 가지고 시인 앞에 존립하게 된다는 입장이 헤겔의 주체론이라면, 월강 시인은 대체적으로 인간이, 또는 시인이 존재자인 사물의 부름을 받는다.
이는 사실은 ‘소쩍새가 나를 불러낸 것’에서 나타나며, 그 부름의 목적이나 이유는 진리를 표방하고, 깨달음으로 전이된다. 보통 근대적 주체는 의식 주체로 자신의 자유의지로 움직이지만, 월강 시인은 시적 화자를 사물의 부름에 따르도록 설정하고, 움직임의 동기나 원인도 사물에 귀착된다. 너무나 인간적인 말이다. 이 시를 읽어내는 관전포인트는 ‘달 그림자’에 담긴 의미 파악이라 하겠다. 달이란 대상의 의미분석은 곧 시인의 의식을 해명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달이 의식의 대상이 되었을 때 달의 의미는 이 의식의 지향형식, 곧 의식의 변화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하나는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야 새로운 세상의 가치에 다다를 수 있고, 다른 하나는 자연과의 소통하다 보면, 삶의 길이 보인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상적인 생활이 가져다주는 축복도 무시할 수 없다는 거, ‘달 그림자’라는 제재 취택은 제목이 다의적 의미를 품고 있어 이 시의 문학적 성취에 크게 기여한다고 하겠다.
지혜롭지 않은
어리석은 삶은 늘 밤길이다
낮길은
돌부리에 부딛혀도
바로 코앞에 엎어지지만
밤길은
한발 헛디디면
천길 벼랑으로 떨어진다
인생길 앞에는
온갖 위험한 장애물이
기다리고 서 있다
- <밤길과 낮길> 전문
언어는 시의 진료이며 매체다. 시의 언어라고 해서 따로 하나의 종을 본래적으로 형성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시는 특수언어가 아니라 오히려 생동하는 모든 언어의 양상이다. 크로체의 말처럼 모든 인간은 언제나 자기가 겪은 인상과 감정을 표현하기 때문에 모든 시인처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산문과는 달리 세부의 ‘축척’으로서가 아니라 선택된 세부의 ‘첨예성’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시의 언어는 매우 신중히 선택된 언어다. <밤길과 낮길>은 우선 배열이 대립항으로 되어 있고, 전개가 변증법적 질서로 짜여 있어 매우 설득적으로 읽힌다. ‘어리석은 삶’을 ‘밤길’로 일반화해서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다시 낮길과 밤길의 차이가 천지 차이라는 걸, ‘코앞’과 ‘천길 벼랑’으로 나타낸 다음 다시 인생길을 온갖 위험한 장애물이 기다리고 서 있는 유기체로 정의해서 인생살이가 만만찮음을 구체적인 형상화로 잘 표현하고 있다. 대조, 비유, 정반합, 구체화와 일반화, 관념어와 구체어 활용 등 다양한 미적 장치에 의해 최대한의 문학적 효과를 내도록 선택된 세부들이 긴밀히 조직되어 있다. ‘어리석음’과 ‘지혜롭지 않음’을 동일한 가치로 풀어내고 있는 월강은 연역적 추리를 통해 밤길 인생의 특징을 기승전결의 구성형식 ‘기’에서 어리석음과 지혜롭지 않음으로 설정하고, ‘승’ ‘전’에서 부 두류의 인생 모습을 나타내고, 그리고 ‘결’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의 해답을 내리고 있다.
자네한테는
장점도 많지만
대수롭지 않은 일인데도
곧잘 성질내는 것이 단점일세
몸으로부터
버려야할 것은 분뇨요
마음으로부터
버려야할 것은 분노라는
말이 있지 않는가
분뇨(糞尿)와
분노(憤怒)
이 두 가지만 잘 버릴 줄 알면
심신(心身)이
안락(安樂)할 것이라고도 하였네
- <분뇨와 분노> 전문
<분뇨와 분노>는 내용은 두고서라도 제목만으로도 눈길을 끄는 시다. 두 개념을 이항대립으로 나란히 내세우고, ‘이 두 가지만 잘 버릴 줄 알면 심신(心身)이 안락(安樂)할 것이라’한 판단은 절묘한 발상이고, 신선한 결론이다. 무엇보다도 압권은 첫 연에 ‘장점과 단점’을 적시하고, 그 장단점도 ‘몸과 마음’이란 대립항으로 풀어내었다는 점이다. 인생은 참는 것이라는 진리를 ‘분뇨와 분노’를 통해 잘 드러내어 공감을 설득적으로 잘 이끌어 내었다. 두 어휘의 발성적 유사성으로 음성적 효과를 최대로 내는 데도 성공했다. 언어현상이 특수한 심리적 구조나 반응에 기여하도록 사용해야 한다면, 어휘의 형태적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용도상으로 완전히 다른 차원의 해석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 시는 장단점, 몸과 마음, 분뇨와 분노, 버려야 할 것과 얻을 것 등 대립항을 보이는 어휘의 신중한 선택과 배열이 돋보인다고 하겠다. 기표와 기의의 결합관계가 음성적, 의미적, 형태적 층위가 시를 시답게 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분뇨와 분노’라는 기호와 의장의 작용으로 미적 표현이 형성되고, 이 미적 표현이 시와 시인의 내적 깊이를, 그리고 의미전달을 효과있게 한다. ‘버린다는 것’의 관념성이나 추상성에서 오는 무관심은 결국 ‘분뇨’에서 구체화되어 문학성을 견인해내는 데 성공했다.
한 가을
누렇게 익은
황금 들녘을 바라보면서
내 자신을 돌아본다
내게 있어
올 한 해 지은
농작물은
무엇일까?
- <벼 이삭을 보며> 전문
시형식의 중요한 기능 중의 하나는 시적 담화를 ‘구조화’하는 일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롯 형식을 이야기함으로써 구조의 개념이 탄생된 이래로 구조는 미적 거리를 확보하는 본질적 수단이 된다. 월강 시의 구조는 중층성을 확보함으로써 문학성을 견인한다. 최소한 이중구조 이상의 복잡성을 갖는다. 위 시도 이중구도를 가지고 있는데, 한 연이 체험, 즉 한 일이라면, 두 번째 연은 해석이다. 지극히 논리적인 구조다. 한 판단을 통해서 또 다른 판단을 이끌어내는 이런 추론적인 구조는 월강 시의 기본을 이룬다. 그의 시가 쉬운 것 같지만, 쉽지 않은 이유는 바로 이런 구조의 중첩성에 있다. 기승전결의 시상 전개방식은 시적 담화를 구조화하는 전통적 결말 맺기의 대표적 양식이지만 월강 시는 이야기의 평면적인 나열이 아니라 체험에서 의미부여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자문하는 태도는 시인의 목적론적 세계관에 근거한다고 하겠다.
반성적인 성찰은 월강 시의 핵심 가치인 깨달음을 위한 전제다. ‘내게 있어 올 한 해 지은 농작물은 무엇일까?’하는 자문은 발신자가 시인이며 발화 내용이 시인 자신의 살아온 과정과 연관되는 물음이다. 이런 자문은 자아 정체성의 위기를 극복하거나 해결하기 위한 시도와 연결된다. 자신의 삶을 고백하는 행위 자체가 주로 ‘당위적인 나’와 ‘현실적인 나’ 사이의 불연속성에서 출발해 타인의 이해를 구하거나 용서, 동정을 얻기 위해 행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성찰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주체로 하여금 자기 자신과 친숙해질 수 있도록 함으로써 내성적인 ‘살핌’의 기능을 담당한다는 것이다. ‘누렇게 익은 황금 들녘을 바라보면서 내 자신을 돌아본다’와 같이 실제 자신의 삶과 연관되는 장면으로 시적 상황이 제시되고, 이어지는 반성적 성찰은 새로운 삶의 창조로 인식되기 때문에 시인은 시의 한 가운데 서 있게 되는 것이다.
산중의 우거진 숲 가운데
귀 설해목을 바라보면
나무나 인간이 겪는 변고는
동일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천년을 푸르던 거송이
폭설에 찢기고 쓰러지거나
백년을 누리던 부위영화도
불시에 몰락하는 법이라오
인생이란 *팔풍을 휘감고 살기에
완만한 언덕길을 오르다가도
언제 어떻게 미끄러질지 모르니
한 시도 방심할 수 없어요
*팔풍(八風) : 이(利) - 이득(利得)
쇠(衰) - 손실(損失)
훼(毁) - 뒤에서 험담함
예(譽) - 뒤에서 칭찬함
칭(稱) - 면전에서 칭찬함
기(譏) - 면전에서 비방함
고락(苦樂)
- <설해목2> 전문
산에서 사는 사람은 알 수 있는 일이지만, 겨울철이면 한파로 수목들이 많이 꺾이게 된다. 모진 비바람에도 끄떡없이 견디던 아름드리 나무들이, 꿋꿋하게 고집스럽기만 하던 그 소나무들이 눈이 내려 덮이면 데미지를 입게 된다. 가지 끝에 사뿐사뿐 내려 쌓이는 그 가볍고 하얀 눈에 외상을 입고 마는 것이다. 소리 없이 고요히 부드럽게 내리는 가벼운 눈송이들이 단단한 나무를 부러트리는 현상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태풍으로 절을 감싸고 있던 소나무가 절 지붕으로 쓰러져 죽을 고비를 넘겼던 시인에게 설해목은 예사로 다가오지 않았을 것이다. 시인은 정정한 나무들이 부드러운 것 앞에서 넘어지는 걸 인간사에 비유했다. 팔풍을 휘감고 살아가는 게 인생사이니 방심하지 말라는 시인의 말씀에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다. ‘설해목’은 부드러운 것이 억센 것보다 강하다는 진리를 전해주며, 힘이 있는 것이 최고라고 믿는 오늘날의 현실에 경종을 울린다.
이 시는 정말 살아가면서 사람들이 생각해야 할 문제, 가슴 깊이 담아두어야 할 가치 있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위의 시가 궁극적으로 표현하는 대상은 자신이 아니라, 그가 속한 환경과 이에 대처하는 인간의 보편적 성향이다. ‘설해목’이란 제재로 ‘설해목1’ ‘설해목2’ 두 편의 시를 쓴 것에는, 자연의 두 측면을 보여주고자 한 시인의 의식이 드러난다고 하겠다. 기상 이변 속에서 현대는 자연의 악영향도 엄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의 힘 앞에 인간은 나약한 존재일 뿐이다. ‘나무’나 ‘인간’이나 언제 어떻게 몰락할지 모른다는 측면에서 뭐가 다를 바가 있겠느냐는 말은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인생이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는 측면에서 큰 가르침을 준다. 언제나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큰 관심사는 나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명제다. 인간과 자연의 사례를 통해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는 역설적 교훈을 전하고 있는 이 시에서 우리는 역시 깨달음을 향해 가는 구도자의 자세를 엿볼 수 있다.
적요한 산사
선창(禪窓) 밖
푸른 나뭇잎에는 빗방울 듣는 소리
방 안에는 찻물 끓는 소리
오늘은 일여차(一如茶)를 들라네
번뇌는 공(空)이요
깨달음도 공(空)이니
공체는 하나며
그것을 ‘일여(一如)’라 하지 않는가
흔히들 번뇌로 인해
괴로울 때가 많지만
이 공도리(空道理)를 깨치기만 하면
구름을 벗어난 달빛이라네
- <일여차(一如茶)> 전문
이 시를 읽는 순간, 삶의 평온함을 고요하게 고찰할 수 있는 명상이 시작된다. 빗방울 소리가 들려오는 시간은 긴 여운을 남기고, 평온한 위로의 음향과 그윽한 다향은 지친 이의 영혼을 달래준다. 차 한 잔을 위한 기다림의 시간은 유기적으로 연결된 무언의 과정을 내포하고 있다. 그 과정 중 기다림의 시작인 사색으로 이어지는 응시와 여운이라는 잔상을 표현하는 이 시는 다선일여의 의미를 시 속에 오롯이 담아내고 있어 감동을 준다. 1연에서 ‘빗방울 소리’와 ‘차 끓이는 소리’를 ‘일여차’라 함은 차와 선이 일여한 것처럼 두 소리가 모두 나름의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는 뜻이 아닌가. 이 시의 쾌미는 마지막 3연, 깨달음 이후의 상태를 ‘구름을 벗어난 달빛’으로 비유해서 ‘있어야 할 현실’을 지배적 정황으로 그려낸 데 있다.
3연에서 시인은 “흔히들 번뇌로 인해 괴로울 때가 많지만 이 공도리空道理를 깨치기만 하면 구름을 벗어난 달빛이라네”라고 했는데, 이 시의 핵심은 ‘공도리’를 깨치는 것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데 있다.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는 건 시의 설명하지 않아야 하고 보여주어야 하는 성격 때문이 아니겠는가. ‘금강경’은 공空을 말하는데, 이 또한 공空이고, 이 또한 공空이 다시 공空이 되므로, 공空이라고 하는 즉시 또 공空이 공空이 되는 것을 이름하여 ‘본체의 체’라고 한다. 불교 교리에서는 부처님과 수보리, 그리고 이를 깨친 마음으로 들은 아난존자, 이 셋을 본체의 공空이라 하고, 듣는 것을 작용 즉 용用이라 한다. 금강경의 본체 자체가 삼공처三空處에 속하는 것이므로, 즉 공 또한 공이다. 그러므로 ‘공도리空道理를 깨쳤다’는 것은 ‘금강경’의 본뜻을 안다는 의미라 하겠다.
예부터 차와 선승들과는 불가분의 관계였다. 다선삼매, 다선일여라고 하여 차와 선을 하나로 묶어 일체로 보았던 것이다. 시인은 더 나아가 ‘다선일여’를 기반으로 2연에서, ‘번뇌는 공空이요 깨달음도 공空이니 공체는 하나며 그것을 ‘일여一如’라 하지 않는가‘하는 말로, 금강경의 말씀, 즉 내게 다가오는 것들과 만나는 방법이 도道임을 말해준다. 공空은 텅 빈 고요함이 아니며, 세간을 떠난 적적함이나 한가함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소음으로 가득 찬 속세 안에서 고요함이고, 객진으로 번거로운 세간에서 적적하게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평상심이란 중생의 평범한 일상 세계 안에서의 평온함이다. 공空의 텅 비어 있는 모습을 통해 무를 상징하려 하지 않음에서 우리는 대종사 월강 시인이 <일여차>에서 펼치는 진정한 의미의 금강경 공空 사상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
Ⅲ.
김월강 시인은 '작가의 말'에서, “밤하늘의 보름달과 같은 사유로 별처럼 반짝이는 시를 쓰면서 스스로 행복해하는 사람을 ‘시인詩人’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시인은 온 누리의 유정무정有情無情을 차별하지 않고 아리땁고 감미로운 정담을 나눈다. 그러므로 시인은 시를 포기하면 모를까 시를 쓰는 이상 외롭지도 않다”고 했다. 그는 또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간절히 권하고 싶은 것은 ‘틈틈이 하는 시詩공부’다. 환경이 좋고 나쁨을 개의치 않고 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시를 쓰는 좋은 습관을 가질 것을 당부하고 싶다. 사유하는 습관이 몸에 밴다면 급발진 같은 분노조절장애로 인한 사회불안도 감축시킬 수 있다고 확신한다.”고 하였다. 작가의 말은, ‘시는 가르치고 즐거움을 주려는 의도를 가진 말하는 그림이다.’라는 시드니의 말이나, ‘시는 유용하고 즐거이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라는 아놀드의 언급을 떠오르게 한다. 그의 이런 효용론적 관점은 시를 문학의 교시적 기능, 곧 진리의 전달자로서 인식하고 있음이 아니겠는가.
동양에서는 시를 인격수양이나 교화의 수단으로 보고, 문학의 사회학적 가치를 더 중시하였다. 그의 말대로, “시의 매력적인 메시지는 들뜬 마음, 침울한 마음, 사악한 마음을 없앨 뿐만 아니라 온갖 사회병리를 치유하는 데 보탬이 될 것이다.” 월강 시는 정서적 사유, 불교적 가르침, 자연이나 사물에서의 ‘느낌’ 또는 ‘진리 발견’을 추구하기 때문에 시는 경험적 사건으로 구성되어 담론화를 지향한다. 법구경 같은 시로 향수되기 위해서 과학적 논리적 필연성이 아니라 경험에서의 얻음 그 자체의 구조가 띠는 타당성, 즉 감각적 구체성의 질서가 띠는 보편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러므로 심상이나 사건의 연결은 독특한 시적 질서를 포실하게 보여준다. 월강 시인에게 있어 시 쓰기는 깨달음을 향해 가는 여정인지도 모른다. 바로 이것이 제1시집부터 제2시집까지 월강의 시들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시적 방법론이자 시적 이념이며 세계에 대한 태도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그것을 검증하기 위해서는 이제 두 채의 집 안에 모인 그의 시 모두를 읽어봐야 할 테지만, 그것은 당연히 독자들의 몫이 아니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