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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도 유폐 고려의종, 각종 교과서와 고려사절요 기록, 박종기 교수의 ‘의종과 무신정변 견해> 고영화(高永和) 엮음.
2018년 작성.
⇨차례 : 1. 고려 의종과 거제도 역사, 고려촌.고영화(高永和)의 견해
2. 각종 고등학교 교과서, 무신정변과 인쇄술, 도자기 등과 거제 관련 기록
3. 고려사절요 고려의종 장효대왕 거제도 관련 기록
4. 박종기 교수의 ‘의종과 무신정변’ 견해
1. 고려 의종과 거제도 역사, 고려촌. 고영화(高永和)의 견해
1170년 의종24년 8월 말(음력) 개경에서 무신정변이 일어나 9월(음)에 의종은, 당시 개경에서 역길을 통해 가장 멀리 있었던 거제도 오양역에 도착하였고, 둔덕기성에 유폐된다. 약3년 남짓 있다가 김보당 일파의 꾐에 빠져 경주로 나갔다가 이의민에게 살해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거제시 둔덕면에는 현재도 수많은 고려의종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으며, 매년 의종추도식을 거행하기도 한다. 아마 남한에서 강화도 다음으로 고려시대에 관한 역사가 많은 곳이라고 여겨진다.
조선시대까지 각종 고지도와 문헌에는, 의종이 유폐되었던 성곽을 ‘둔덕기성’ ‘기성’으로 표기하다가 약 100년 전부터 ‘폐왕성’으로, 다시 ‘피왕성‘으로 불렀다. 공식적인 명칭은 ’둔덕기성‘이다.
○ 당시 오양역에는 <정과정곡>의 저자 ‘정서’가 동래 거제(13년 6개월) 합쳐서 횟수로 20년째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다. 그해 10월(음)에 대사면령이 내려져 해배되어 고향으로 돌아갔으니, 정확히 한 달 가량 고려의종과 정서가 같은 지역에서 있다 만나서 결국, <정과정곡>이 창작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부터 부르기 시작한 ‘폐왕성’도 사실 고려의종이 방축되어 둔덕기성에 유폐된 역사적 사실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경상도 거제도는 와, 왜, 웨, 외, 여, 예, 애, 의, 위 등의 모음의 발음을 정확하게 잘 구사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고, 쉽게 단순히 말하는 경향이 있다. 아마 폐왕성이 피왕성으로 어르신들께서 잘못 발음하다가 ’피왕성‘으로 잠시나마 불리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여태껏 어떠한 문헌에도 고려의종이 ‘피난’ 왔다는 기록이 없어 이를 증명한다. (어떤 이는 기록이 있다고 하지만 공개적으로 밝히지 못하고 있다. 있으면 참! 좋으련만....)
현재 우리나라 학생들을 가르치는 각종 교과서에는 모두 고려 의종이 거제도로 유폐 또는 방축, 유배, 귀양 등으로, 고려사절요는 쫓겨 감, 추방 등으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 대부분의 역사학자들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몇몇 기록물도 이와 유사하다. 바로 죽임을 당하지 않고 거제도로 추방된 것만으로도 다행한 일이었다. 한편으로는 고려문화를 꽃피우던 융성기에 재위했던 왕이기도 하지만, 정치적인 감각과 시대적 혜안이 부족했던 왕이기도 하다.
둔덕면의 지명 중에는, 하둔 상둔 시목 농막 마장 유지 죽전 공주샘 고려무덤 등등 수많은 고려시대 의종 관련 지명이 남아전하고 있고, 둔덕기성을 포함하여 정과정곡, 청마기념관, 거림리 옛 거제 고읍지가 있으니 향후 역사문화 중심지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거기다가 둔덕면민들의 뜨거운 열정도 이를 더하고 있으니 말이다.
○ 위의 이러한 사실을 통해 거제시는 ‘고려문화촌’을 조성하고 개성시와 자매결연을 추진해 남북 문화교류의 물꼬를 트겠다는 복안이라고 전하지만, 한편으로 걱정되는 점이 많다. ①첫째로 과연 중앙정부와 수도권 지역민 중에 수많은 고려유산이 있는 강화도를 두고 거제도에 수천억을 투자하는데 동의 할 수 있겠느냐?하는 의문이 든다. 서울에서 천 리 먼 거제도는 아직까지 교통망 접근성은 물론 고려유물 등이 아주 부족하고 취약하다. ②둘째로 한 번 계획이 잡혀, ‘고려촌’이 결정되어 조성된다면, 역사문화 관광 측면에서 그 규모가 남한에서는 적어도 최고가 되어야만 성공할 수 있다. 각종 부대시설과 관광시설 도로 등이 약20년 간 최소 수천억이 투자되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그런 또 다른 지역의 관광지로 남을 것이고 경제성도 없다. ③거기다가 역사콘텐츠나 역사스토리를 만들면서 우리나라 전체 역사를 함부로 건드려 홍보한다면, 다른 지역의 웃음거리로 전락하고 추진 동력도 잃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고려 의종을 너무 미화하여 마치 성군(聖君)처럼 묘사를 해서는 안 된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했던가? 우리나라 역사와 지역의 역사는 다르다. 지역의 역사는 아무리 스토리텔링을 해도 지나침이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현재 통용되는 고려의종의 역사를 고치려면 이를 증명할 근거와 유물 등을 제시해야하며, 각종 논문 등을 발표하고 우리나라 유명 역사학자들의 이해를 구하여, 이를 일반화해야 할 것이고 이로써 각종 교과서도 고쳐야 한다. 아마 엄청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이는 지역의 아마추어가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닌,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아무리 역사 기록이 승자의 기록이고 왜곡이라고 외쳐 봐도, 미친놈이라고 되돌아 올 것이 뻔하며, 다만 소수의 견해로 남을 뿐이다.
그러나 그 외 고려역사문화 부분에서는, 현재까지 둔덕면 주민의 노고와 열정, 그리고 스토리텔링은 물론 고려역사문화 부분의 노력에 찬사를 보낸다.
○ 마지막으로, 우리는 다시 한 번 숙고해 보아야한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집단의 규칙이나 행위가 과연 정당한가?’를 먼저 자문해 보자. ‘지역과 집단 너머의 사회적 역사적 가치와 어긋남이 없는지?’ 그리고 ‘사회적인 합의와 변화에 따르지 못하는 점이 없는지?’ 등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하면, 자신과 더불어 소속되어 있는 집단의 행위가 국가의 가치를 증대시켜, 좀 더 정의롭고 합리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2. <각종 고등학교 교과서, 무신정변과 인쇄술, 도자기 등과 거제 관련 기록>
1) 고려의 지나친 문신 우대 정책은 무신들의 반감을 샀다. 더우기, 의종은 문학을 좋아하고 놀이로 세월을 보냈으므로, 이를 호위하던 무신들은 불평이 컸다. 이에, 대장군 정중부, 이의방 등이 반란을 일으켜 문신을 학살하고, 왕의 아우 명종을 세워 정권을 장악하였다. 무신 정권에 대하여 명종 3년에 김보당이 반기를 들고 의종 복위 운동을 일으켰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또 이듬해에는 서경에서 조위총이 무신 정권에 반대하고 군대를 일으켰으나 결국 성공하지 못하였다.
무신 정권이 성립된 후, 얼마 안 가서 무신 간에 세력 쟁탈전이 벌어졌다. 즉, 이의방은 정중부 일파에게 피살되고, 정중부는 경대승에게 제거되었다. 이어서 경대승이 병사하자 이의민이 정권을 잡았고, 이의민은 최충헌에게 피살됨으로써, 이로부터 최씨 정권이 수립되었다.
2) 고려 인쇄술과 과학
고려는 송의 영향을 받아 목판 인쇄가 발달하여, 경서, 역사, 대장경 등이 인쇄 출판되었고, 숙종 때에는 국자감 안에 서적포를 두고 서적을 인쇄 출판하였다. 그러나, 고려 인쇄술에 획기적인 발전을 이룬 것은 금속 활자의 발명이었다. 고종 21년(1234년) 최윤의가 지은 상정고금예문 50권을 주자(금속 활자)로 인쇄하였다. 이것은 독일의 구텐베르크(Gutenberg)가 금속 활자를 발명한 것보다 2백여 년이나 앞서는 것이다. 그 후, 공양왕 때에는 서적원을 두어 주자로 서적을 인쇄 출판하게 하였다.
3) 고려 자기(청자 포함)
고려 공예 미술에 있어서 대표적인 것은 자기이다. 고려자기는 송의 영향을 받고, 다시 고려인의 독창력을 발휘하여 송을 능가하는 우수한 작품을 냈다. 자기에는 청자, 백자, 녹자 등이 있는데, 그 중에 청자는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한 예술품이다.
특히 비색청자는 아름답고 정교한 절품이고, 상감청자는 당초, 모란, 운학 등 아름다운 무늬가 새겨져 있는 고려 독창적인 작품이다. 이 청자는 섬세하고 연약한 미를 지니어 귀족적인 기풍을 풍기고 있다. 가장 우수한 작품은 귀족들의 사치 생활이 절정에 달했던 예종, 인종, 의종 때에 만든 것들이다. 고려 청자는 인종, 의종 때를 거쳐, 강화 시대에 이르러 그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고려자기는 이후에 기술적 발전을 보지 못하여 말기에는 쇠퇴하였다.
4) 무인(武人)의 발호(跋扈)
인종 때부터 고려의 왕실은 크게 쇠약해졌지만 그의 아들 의종(毅宗) 【제18대】 이 즉위하자 더욱 쇠약해졌다. 왕은 음탕한 짓에 탐닉하여 정사를 돌보지 않았고, 당시 문신(文臣)들은 일반적으로 무신(武臣)들을 업신여겼으며, 왕도 역시 그들을 경멸했으므로 무인들을 크게 분노하게 만들었는데, 장군인 정중부(鄭仲夫) 등은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왕이 절에 행차한 틈을 타 그를 구금하여 거제도로 유배시켰으며, 왕의 가까운 신하들과 기타 많은 문신들을 살육하고, 【이 왕 24년】 그 대신 모두 무인들을 채용했다. 그 이후 고려는 무신들이 발호하는 시대가 되었다.
5) 무신의 난
거란의 침입이 그치자, 사회가 안정되고 고려의 지배 체제도 정비되어 갔다. 그런 반면에, 무신의 위치는 차차 격하되었다. 전시과의 토지 분배에 있어서 무신은 문신보다 낮았고, 무신들의 영업전이나 군인전 등을 문신들에게 빼앗겼다. 또한, 무신들이 출세하는 길이었던 관학 7재 가운데 하나인 무학재도 폐지되고 말았다.
인종의 뒤를 이은 의종은 일부 젊은 문신들과 더불어 향락을 일삼았는데, 왕의 향락이 거듭될수록 징발되는 서민의 재물과 노역은 증가하여, 민중은 더욱 도탄에 빠졌다. 또한, 문신들은 왕을 호위하는 무신들에게 항상 멸시와 조롱을 퍼부어, 그들의 반감을 더 샀다. 이에, 드디어 의종 때 정중부, 이의방 등의 무신들이 난을 일으켜, 문신들을 죽이고 의종을 폐하여 거제도로 귀양 보내고 명종을 세웠다(1170).
6) 무신정변 『고려사』권19, 「세가」19 의종 24년 8월
의종 24년 8월, 정축(丁丑)에 왕이 보현원(普賢院)에 행차하고자 하여 오문(五門) 앞에 이르러 시종하는 신하들을 불러 술을 나누었다. 술자리가 무르익자 좌우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이곳은 병법을 연습하기에 좋은 곳이로구나”라고 하고, 무신에게 명하여 오병수박희(五兵手搏戱)를 하게 하였다. 어두워지자 어가(御駕)가 보현원에 가까이 왔을 때 이고(李高, ?~1171)가 이의방(李義方, ?~1174)과 함께 먼저 가서 왕명이라 속이고 순검군(巡檢軍)을 집합시켰다. 왕이 보현원 문에 들고 군신(群臣)이 물러날 무렵에 이고 등이 임종식(林宗植, ?~1170)⋅이복기(李復基,?~1170)⋅한뢰(韓賴) 등을 죽였다. 국왕을 호종(扈從)한 문관과 대소 신료 및 환관이 모두 해를 입었다. 또 개경에 있는 문신 50여 명을 죽인 후, 정중부(鄭仲夫, 1106~1179) 등이 왕을 환궁(還宮)시켰다.
9월 초하루 무인일 해가 질 무렵에 왕이 강안전(康安殿)으로 들어왔는데 정중부 등이 또 왕을 수행한 내시 10여 명과 환관 10명을 찾아 죽였다. 이때 왕은 수문전(修文殿)에 앉아서 태연히 술을 마시면서 영관(伶官)들에게 음악을 연주하게 하고 밤중이 되어서야 잠들었다. 이고, 채원(蔡元, ?~1172) 등이 왕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양숙(梁淑)이 이를 저지하였다. 순검군이 창문과 벽을 뚫고 왕실 창고에 있던 보물들을 훔쳤다. 정중부가 왕을 협박하여 군기감(軍器監)으로 옮기고 태자는 영은관(迎恩館)으로 옮겼다.
기묘일에 왕은 홀로 거제현(巨濟縣)으로 쫓겨났으며 태자는 진도현(珍島縣)으로 추방되었다. 이날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왕의 아우인 익양공(翼陽公) 왕호(王晧)를 맞아다가 왕위에 앉혔다. 그 후 명종(明宗) 3년(1173) 8월에 김보당(金甫當)이 사람을 시켜 왕을 경주에 나와 살게 하였는데, 10월 경신일에 이의민(李義旼. ?~1196)이 곤원사(坤元寺)의 북쪽 연못가에서 왕을 죽였다.
3. <고려사절요 고려의종 장효대왕 거제도 관련 기록>
1) 고려 의종은 휘(諱)가 현(晛)이며, 자는 일승(日升)이요, 구휘는 철(徹)이니, 인종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공예태후(恭睿太后) 임(任)씨인데, 인종 5년 정미 4월 경오일에 출생하였다. 성질이 놀이와 잔치를 좋아하였고, 여러 소인들과 친압하여 마침내 화란을 당하였다. 24년간 왕위에 있었고, 수는 47세이었다.
2) <고려사절요 제11권 / 의종 장효대왕(毅宗莊孝大王)>정해 21년(1167), 송 건도 3년ㆍ금 대정 7년. 사신이 말하기를,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는 용도를 절약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데에 있거늘, 의종이 못과 정자를 많이 만들어 재물을 손상하고 백성을 괴롭혔으며, 항상 총애하는 자들과 향락만을 일삼고 국정을 돌아보지 않는데도 재상과 대간으로서 말하는 자가 하나도 없었으니, 마침내 거제(巨濟)로 쫓겨 가게 된 것은 마땅하다." 하였다.[ 史臣曰,爲國之要,在於節用而愛民,毅宗,多作池臺,傷財勞民,常與嬖倖,耽樂是從,不恤國政,宰相臺諫,無一人言者,終致巨濟之遜,宜矣]
3) <고려사절요 제11권 / 의종 장효대왕(毅宗莊孝大王)>경인 24년(1170), 송 건도 6년ㆍ금 대정 10년○ 을묘일에 왕을 거제현(巨濟縣)으로 추방하고, 태자는 진도현(珍島縣)으로 추방하였으며, 태손(太孫)은 죽였다. 왕의 애희(愛姬) 무비(無比)는 청교역(靑郊驛)으로 도망해 숨었는데, 중부 등이 죽이려 하니 태후(太后)가 간청하여 죽음을 면하고 왕을 따라갔다. 김돈중(金敦中)은 감악산(紺嶽山)으로 도망해 들어갔는데 중부가 전부터의 원한으로 현상(懸賞)을 걸고 급하게 추적하였다. 돈중은 따라 온 하인을 시켜 몰래 서울에 들어가서 자기집 안부를 탐지해 오도록 하였던 바, 하인이 많은 현상을 탐내어 드디어 돈중의 거처를 고하여 돈중을 잡아다 냇가 모래사장에서 죽였다.[원문 : ○乙卯,放王于巨濟縣,太子于珍島縣,殺太孫,王之愛姬無比,逃匿靑郊驛,仲夫等,欲殺之,太后固請乃免,從王而行,金敦中,遁入紺嶽山,仲夫,挾宿怨,購之甚急,敦中,密使從者入京,候家安否,從者,利重賞,遂以告,殺之於沙川邊,敦中]
○ 사신(史臣) 유승단(兪升旦)이 말하기를, “원수(元首 군주)와 고굉(股肱 신하)은 한 몸으로 서로 의존한다. 그러므로 옛날의 어질고 슬기로운 임금들은 문무(文武)를 좌우의 손과 같이 보아서 피차와 경중이 없어, 임금은 위에서 밝고 신하는 조정에서 화합하여 반란이 일어날 수 없었다. 의종(毅宗) 초기의 정치는 규모가 볼 만한 것이 있었으니, 진실로 충성스럽고 정직한 사람을 얻어 보좌하였다면 반드시 후세에서 찬양할 만한 선정(善政)을 시행하였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아첨하고 경박한 무리들이 좌우에 나열되어, 재를 올리고 기도하는 데 재물을 기울여 없애고, 정치에 부지런해야 할 시간과 정력을 주색에 돌렸으며, 풍월을 읊는 것으로써 신하와의 정치에 대한 의논을 대신하였으니, 점차 무인의 노여움이 쌓여 화가 장차 이르렀던 것이다. 의종이 오병수박희(五兵手搏戲)를 하게 하여 후하게 상을 내려서 그들의 원망을 위안하려고 하였으니, 왕의 마음에도 본래 어떤 예측이 있었던 것인데, 한뇌 등이, 무인들이 총애를 받을까 두려워하여 갑자기 시기하는 마음이 생겨서 드디어 곤강(崑岡)을 태운 치열한 불길에 옥과 돌이 구별 없이 다 타고, 마침내는 임금이 쫓겨나서 최후를 좋게 마치지 못하였으니, 어찌 한스럽지 않으랴." 하였다.
4) <의종의 죽음, 김보당의 난 1173년> 고려사절요 제12권 / 명종 광효대왕 1(明宗光孝大王一) 계사 3년(1173), 송 건도 9년ㆍ금 대정 13년
○ 동북면병마사 간의대부(東北面兵馬使諫議大夫) 김보당(金甫當)이 동계(東界)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보당이 담력이 있으므로 정중부ㆍ이의방 등이 꺼리더니, 보당이 정중부와 이의방을 토멸하고 다시 전왕을 세우고자 녹사(錄事) 이경직(李敬直) 및 장순석(張純錫)과 꾀하고, 순석과 유인준(柳寅俊)을 남로병마사(南路兵馬使)로 삼고, 배윤재(裵允材)를 서해도병마사(西海道兵馬使)로 삼아 군사를 일으키게 하며, 동북면지병마사(東北面知兵馬事) 한언국(韓彦國)과 더불어 군사를 일으켜 이에 호응하였다. 순석ㆍ인준 등이 거제(巨濟)에 이르러 전왕을 모시고 경주에 나와 있었다. 중부ㆍ의방이 이 소식을 듣고서 장군 이의민(李義旼), 산원(散員) 박존위(朴存威)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려 남로(南路)로 나가게 하고, 또 군사를 서해로(西海路)에 보내어 도모하게 하였다. 이의민은 경주(慶州) 사람으로, 키가 8척이나 되고 힘이 남보다 뛰어나게 세었다. 두 형(兄)과 함께 시골에서 횡포하게 구니, 사람들의 근심거리가 되었다. 안렴사(按廉使) 김자양(金子陽)이 잡아다가 매질을 하여 고문(拷問)을 하였더니, 두 형은 감옥 안에서 여위어 죽고 홀로 의민은 죽지 아니하였는데, 자양이 그를 뽑아 경군(京軍)에 편입시켰다. 아내를 데리고 남부여대하여 서울에 이르니, 마침 어두운 밤이어서 성문이 이미 닫혀 있었다. 성의 남쪽에(여관에) 들어 자게 되었는데, 꿈에 긴 사다리가 성문에서 대궐에 이르는 것이 있어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보았는데, 깨고 나서 이상하게 여기었었다. 수박(手搏)을 잘하므로 의종(毅宗)이 사랑하였다. 경인의 변란에 의민이 많이 죽였다.
○ 9월에 한언국을 잡아 죽이고, 안북도호부(安北都護府)에서 보당ㆍ경직 등을 잡아 서울로 보내니, 이의방이 영은관(迎恩館)에서 그들을 심문하고 저자에서 죽였다. 이전에, 보당이 군사를 일으킬 일을 꾀할 때에 내시(內侍) 진의광(陳義光)ㆍ배윤재(裵允材)가 알고 있었던바, 보당이 죽음에 임박하여 거짓말하기를, “무릇 문신(文臣) 중에 함께 모의하지 않은 이가 누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리하여 문신을 모두 무찔러 죽였는데, 혹은 강물에 던지기도 하였다.
한 졸병이 재상 윤인첨(尹鱗瞻)을 잡아 묶고, 다음에 유응규(庾應圭)를 묶으려 하니, 응규가 성난 목소리로 꾸짖기를, “너는 천한 졸병이어늘 감히 재상과 낭관(郎官)을 욕보일 수 있는냐." 하니, 졸병이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응규가 가서 여러 장수들을 보고 말하기를, “옛날부터 지금까지 예의(禮義) 없이 능히 나라를 보전하였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또 옛 법에 형벌은 대부(大夫)에까지 미치지 아니한다고 하였습니다. 공(公)들이 나라를 바로잡을 뜻이 있다면 마땅히 옛일과 선례(先例)를 본받아야 할 것인데, 어찌하여 미천한 졸병을 시켜서 대신을 묶어 욕보입니까? 더구나 윤공(尹公)은 장수의 지략(智略)이 있습니다. 나라에 큰 일이 있으면 이런 분을 버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또 무죄한 사람들을 많이 죽이면 반드시 재앙과 화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말하기를, “경인년의 일에 공의 금 나라 황제에게 고주(告奏)가 아니었다면 우리들은 김치나 젓갈처럼 찢기어 죽음을 당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고, 곧 맞아들여 앉히고 절을 하였으며, 드디어 인첨의 포박을 풀어 주었다.
그때 문사(文士)들이 무찔려[戮] 모두 없어지게 되니, 안팎의 인심이 흉흉하여 금방 어찌 될지 모를 지경이었다. 낭장(郎將) 김부(金富)가 중부ㆍ의방에게 말하기를, “하늘의 뜻은 알 수 없는 것이며, 사람의 마음은 예측할 수 없는 것입니다. 힘만 믿고 의를 헤아리지 않아 의관을 갖춘 선비들을 모조리 풀 베듯 죽인다면 세상에 어찌 김보당 같은 사람이 없겠습니까? 우리들 중에 아들ㆍ딸이 있는 자는 모두 문관들과 혼인을 하여 그들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이 오래갈 수 있는 방도입니다." 하니, 여러 장수들이 그 말에 좇았다. 이로부터 화가 조금 그쳤다.
○ 이의민 등이 경주에 이르니 어떤 사람이 길을 막고 말하기를, “전왕이 이곳에 온 것은 고을 사람들의 의사가 아니고, 곧 순석ㆍ인준 등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지금 그 무리를 보니 수백 명에 불과하고, 그것은 오합지중(烏合之衆)이니, 그 괴수만 제거한다면 나머지 무리들은 죄다 무너져 달아날 것입니다. 청컨대 조금 동안만 머물러 주면 내가 돌아가서 도모하겠으니, 다만 고을 사람들에게 죄주지 말기를 원할 뿐입니다." 하였다. 의민이 말하기를, “내가 있으니 근심하지 마시오." 하였다. 그 사람이 드디어 고을 안에 들어가 여러 군중들에게 모의(謀議)하기를, “순석의 무리는 지금 임금님이 보낸 것이 아니니, 죽인들 무슨 해로울 것이 있겠는가." 하고, 밤에 군사로 포위 공격하여 수백 명을 참살하고, 전왕을 객사에 감금하여 사람을 시켜서 지키게 하였다. 겨울 10월 초하루 경신일에 드디어 의민 등을 인도하여 입성하게 하였다. 전왕을 끌어내서 곤원사(坤元寺)의 북쪽 못가에 이르러 술 두어 잔을 드리고, 의민이 등뼈를 부러뜨리니 손대는 대로 부러지는 소리가 나자 의민이 큰 소리로 웃었다. 박존위(朴存威)가 요(褥)로 싸고 2개의 가마솥을 마주 합하여 그 속에 넣어 못 속에 던졌다.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일어나 티끌과 모래가 날아오르니, 사람들이 모두 부르짖고 떠들며 흩어졌다. 절의 중 가운데 헤엄 잘 치는 자가 있어서 가마솥은 가져가고 시체는 버리었다. 시체가 물가에 나온 지 며칠이 되어도 물고기ㆍ자라ㆍ까마귀ㆍ솔개 따위가 감히 훼상시키지 못하였다. 전 부호장(副戶長) 필인(弼仁) 등이 비밀히 관(棺)을 갖추어서 물가에 받들어 매장하였다.[○東北面兵馬使,諫議大夫金甫當,起兵於東界,甫當,有膽氣,鄭仲夫,李義方等,忌之,甫當,欲討鄭李,復立前王,與錄事李敬直,及張純錫謀,以純錫及柳寅俊,爲南路兵馬使,裴允材,爲西海道兵馬使,使發兵,乃與東北面知兵馬事韓彥國,擧兵應之,純錫寅俊等,至巨濟,奉前王,出居慶州,仲夫,義方,聞之,使將軍李義旼,散員朴存威,領兵趣南路,又遣兵於西海路以圖之,義旼,慶州人,身長八尺,膂力絶人,與兄二人,橫於鄕曲,爲人患,按廉使金子陽,收掠栲問,二兄,瘦死獄中,獨義旼,不死,子陽,選補京軍,携妻,負戴到京,會暮夜,城門已閉,投宿城南,夢,有長梯,自城門至闕,歷梯而登,覺而異之,善手搏,毅宗,愛之,庚寅之亂,義旼所殺,居多。○九月,捕殺韓彥國,安北都護府,執甫當,敬直等,送于京,李義方,在迎恩館,訊鞫,殺之於市,初甫當之謀擧兵也,內侍陳義光,裴允材,知之,甫當,臨死誣曰,凡其文臣,孰不與謀,於是,一切誅戮,或投江水,一卒,執縛宰相尹鱗瞻,次縛庾應圭,應圭,厲聲叱曰,汝賤卒,敢辱宰相與郞官乎,卒不敢近,應圭,往見諸將曰,亘古以來,未聞無禮義而能保國家者也,且古法,刑不上大夫,公等,有志正國,宜法古先,奈何,使賤卒,縛辱大臣,況尹公,有將略,國有大事,捨此不可,又多殺無辜,必有殃禍,諸將曰,庚寅之事,微公告奏,吾屬,葅醢矣,乃迎坐而禮之,遂解鱗瞻縛,時,文士,戮且盡,中外洶洶,莫保朝夕,郞將金富,謂仲夫義方曰,天意未可知,人心不可測,恃力不揆義,獮薙衣冠,世,寧少金甫當乎,吾輩,有子女者,悉令通昏文吏,以安其心,可久之道也,衆,從之,自是,禍稍止。○李義旼等,至慶州,有人,遮說曰,前王來此,非州人意,乃由純錫,寅俊等爾,今見其徒,不過數百,皆烏合之衆,去其魁則餘悉潰走,請少留,吾歸圖之,第願勿加罪州人耳,義旼曰,我在,勿憂也,其人,遂入州,謀諸衆曰,純錫輩,非今王所遣,殺之何害,夜,以兵圍而攻之,斬數百人,幽前王于客舍,使人守之,冬十月,庚申朔,乃引義旼等入城,出前王,至坤元寺北淵上,獻酒數盃,義旼,拉脊骨,應手有聲,便大笑,朴存威,裹以褥,合兩釜投淵中,忽有旋風卒起,塵沙飛揚,人皆呼譟而散,寺僧,有善泅者,取釜棄屍,屍出水涘有日,魚鼈烏鳶,不敢傷,前副戶長弼仁等,密具棺,奉瘞水濱]
4. 박종기 교수의 ‘의종과 무신정변’ 개인적인 견해
1) 역사의 승자 무신, 의종을 무신 난 도발자로 규정
고려왕조의 최대 정변인 무신의 난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는 것이 우리 학계의 대세다. “의종은 환관 무리와 놀러 다니는 일로 날을 보내어 정치를 돌보지 않았다. 국정은 어지럽고 기강은 땅에 떨어졌다. 문신들과 주지육림(酒池肉林) 속에서 음풍농월로 세월을 보내고, 무신을 혹사하고 천대한 결과 마침내 무신의 대란(大亂)을 도발케 했다.”(김상기, 『고려시대사』, 1984).
연회에 빠져 국정 혼란과 기강을 무너뜨리고, 문신을 우대하고 무신을 천대한 의종(毅宗; 1146~1170년 재위)에게 정변의 책임을 묻고 있다. 그런데 정설(定說)과 다름없는 이 견해는 조선 초기에 편찬된 『고려사』 기록을 옮겨 놓은 것이다.
“사신(史臣) 유승단(兪升旦)이 말한다. ‘불행하게도 의종은 아첨하고 경박한 무리들을 좌우에 두고 재를 올리고 기도하는데 재물을 기울여 탕진했다. 정치에 쏟아야 할 시간과 정력을 주색(酒色)에 빠져, 풍월을 읊는 것으로 정치를 대신했다. 이로써 점차 무신의 노여움이 쌓여 화(禍: 정변)가 일어났다’라고 했다.”(『고려사절요』 권11 의종 24년 8월 사평(史評))
2) 무신그룹이 권력 잡고 ‘의종실록’ 편찬
학계의 견해는 『고려사』에 실린 유승단의 의종 평가와 판박이다. 그런데 당시 실록 편찬에 참여한 유승단은 무신정변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처지가 아니었다. 무신권력자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의종실록 편찬 자체가 출발부터 왜곡되었다.
“어떤 사람이 무신정권 최고기관인 중방(重房)에 다음과 같이 고발했다. ‘(의종실록) 편찬자 문신 문극겸(文克謙)은 의종이 피살된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했습니다. 국왕 시해는 천하의 가장 큰 죄입니다. 무신으로 사관(史官)을 교체해 사실대로 쓰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왕[명종]도 어쩔 수 없이 무신 최세보(崔世輔)를 사관으로 임명했다. 최세보는 마음대로 사실을 고쳐 (의종)실록을 편찬했다. 이 때문에 실록에는 탈락되고 생략된 사실이 많았다.”(『고려사』 권100 최세보 열전)
최세보는 조상도 알 수 없을 정도의 미천한 가계에다 글도 몰랐는데, 무신정변 덕에 재상 자리까지 올랐다. 실록 편찬의 사관(史官)에는 문신이 임명되던 관례를 깨고, 이때 무신이 처음 임명된 것이다. 의종실록은 최세보가 편찬책임자에 임명된 1186년(명종16) 12월 무렵 시작해 그가 사망한 1193년(명종23) 10월 무렵에 편찬이 마무리된다.
의종실록은 무신정변이 일어난 지 약 20년이 지난 뒤 무신정권의 안정기에 편찬되었다. 그 때문에 무신들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정변의 책임을 의종의 실정(失政)에서 찾으려 했던 것이다. 의종 시해 사실처럼 무신들에게 불리한 사실이 많이 생략되었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기록된 유승단의 의종 평가도 온전할 리 없다. 따라서 무신정변의 원인에 관한 과거와 현재의 기록은 결코 객관적일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나아가 의종은 과연 문신을 우대하는 문신 친화적인 정책을 펼친 반면에 무신을 천대했을까 의문을 던지게 된다. 역사를 대하며 반면(反面)의 사실을 읽을 수 있을 때 역사의 묘미(妙味)가 있다.
“의종이 태자로 있을 때 국왕[인종]은 태자가 장차 왕으로서의 책임을 다할 수 있을까 걱정했다. 왕후 임씨도 둘째 아들 왕경(王暻)을 사랑해 그를 태자로 세우려 했다. 그러나 태자(훗날 의종)의 스승 정습명(鄭襲明)이 충성으로 태자를 가르치고 보호해 폐위되지 않았다.”(『고려사』 권96 정습명 열전) 정습명은 당시 김부식과 함께 문신귀족을 대표하는 정치인이다. 부왕인 인종과 모후를 등에 업은 외척들은 도량이 있고 따르는 사람이 많은 차남 왕경(王暻)을 왕위에 앉히려 했지만 ‘장자 계승’을 주장한 정습명으로 상징되는 문신귀족의 명분에 밀려 의종이 즉위한 것이다. 의종은 즉위 후 묘청 난을 진압해 정치의 주도권을 쥔 김부식 정습명 등 유교 관료집단의 요구를 외면할 수 없어, 사실상 이들에게 포위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1151년(의종5) 김부식과 함께 자신을 보필한 정습명이 죽은 뒤엔 자신의 구상대로 정치를 한다.
3) 고려 내시집단은 국왕 보좌한 신진 관료 의종은 1154년(의종8) 서경에 중흥사(重興寺)를 창건한다. 1158년(의종12)에는 ‘백주 토산(兎山)의 반월 언덕(*半月岡)은 왕조 중흥의 땅이다. 이곳에 궁궐을 지으면 7년 안에 금나라를 병합할 수 있다’라는 주장에 따라 대궐 중흥궐(重興闕)을 창건한다. 또한 측근인 재상 김영부(金永夫)와 김관의(金寬毅)에게 『편년통록(編年通錄)』을 편찬케 한다. 1157∼1160년 무렵으로 추정된다.
김영부는 뒷날 의종 복위 운동을 일으킨 김보당의 부친이다. 태조 왕건 이전 왕실 세계(世系)를 정리하고, 왕실의 기원을 중국 당나라 왕실에 연결시켰다. 풍수지리 도참사상 등에 입각해 왕실과 왕권의 신성함을 강조해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1145년)와 다른 성격의 역사서다. 정변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168년(의종22) 의종은 서경에 행차하여 자신의 통치철학을 담은 이른바 ‘신령(新令)’을 반포하여, 음양사상·불교·선풍(仙風: 도교)을 통치이념으로 내세운다. ‘왕조의 중흥’이 의종이 바라던 정치 세계였다. 의종은 문신귀족과 달리 왕권을 강조한 절대 군주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사신의 평가와 같이 결코 무능한 군주가 아니었다.
의종의 정치를 보좌한 세력은 내시집단, 환관과 술사(術士: 풍수지리에 밝은 사람), 의종을 호위한 친위 군사집단의 세 그룹이다. 반(反)문벌귀족 세력이란 공통점을 지닌다. 내시는 조선시대와 달리 국왕의 정치를 보좌한 신진기예의 관료집단이다. 일반 군인은 어느 때나 고역에 시달리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의종을 호위한 친위군사인 상급 무신은 비록 정변을 일으켰지만, 평소 의종의 우대를 받았고 의종을 지지한 측근 그룹의 하나였다. 의종은 무신을 천대하지 않았다.
권력은 결코 나눠 가질 수 없다. 그로부터 나타난 폐단이 측근 그룹 가운데 내시, 환관과 술사그룹, 친위 군사그룹 사이의 권력 다툼으로 나타난다. 무신정변은 일차적으로 측근세력 내부의 권력 다툼에서 시작되었다.
“왕이 보현원(普賢院)에 가기 위해 오문(五門) 앞에 도착했다.… 왕은 무신들이 실망하지 않게 위로하기 위해 수박희(手搏戱: 태권도의 일종)를 하게 했다. 내시 한뢰(韓賴)는 (왕을 호위하는) 무신들이 왕의 총애를 받는 것을 시기했다. 마침 대장군 이소응이 수박희를 하다 힘이 부쳐 달아나자, 그의 뺨을 치고 비웃었다. 내시 임종식·이복기 등도 이소응을 모욕했다. 정중부 등은 ‘이소응이 비록 무신이나 벼슬이 3품인데 어찌 이렇게 욕을 보이는가?’하고 소리를 질렀다. 왕이 정중부를 달랬다.”(『고려사』 권128 정중부 열전)
무신정변이 일어난 날 낮에 벌어진 일이다. 왕은 수박희를 열어 친위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우려 했는데, 왕의 총애를 다투던 내시 출신 한뢰·이복기·임종식 등이 그 참에 불을 지른 것이다. 친위 군사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린 일반 군인과는 처지가 다른, 국왕의 총애를 받은 집단이다. 모욕을 당한 이소응과 정중부는 국왕을 호위하는 친위 군사 출신이다. 모욕 사건이 발생한 그날 저녁 마침내 정변이 일어났다.
“밤이 되어 왕의 수레가 보현원에 도착했다. 이고·이의방은 왕의 명령을 가짜로 만들어 (친위군사인) 순검군을 집합시켰다. 왕이 숙소에 들어가자, 이들은 임종식·이복기·한뢰 등을 죽였다. 왕을 호위한 관료들과 환관이 모두 피해를 입었다. 정중부는 왕을 개경으로 돌려보냈다.”(『고려사』 권19 의종 24년(1170) 8월) 정중부와 함께 최초의 정변을 일으킨 이의방·이고 등도 역시 의종을 호위한 친위 군사였다. 이렇듯 정변은 일차적으로 측근 그룹인 정중부 등 친위 군사들이 내시 환관과 또 다른 측근 그룹을 제거하면서 일어난 것이다. 무신에 대한 푸대접이 아니었다.
4) 의종 복위 운동 핑계로 문신들 대량 학살
그날 저녁 의종은 친위 군사들의 호위를 받아 왕궁으로 돌아와 보현원 사건은 일단락되는 듯했다. 그러나 피해를 입은 내시 환관 등이 다시 반발하자, 무신들은 의종을 거제도로 유폐한 후 환관과 내시들을 무더기로 제거한다. 3년 후인 1173년(명종3) 김보당을 주모자로 한 문신들이 거제도에 유폐된 의종을 경주로 모셔와 복위운동을 일으켜 무신에게 저항하자 마침내 이 정변은 문신들에 대한 대량 학살로 확대되었다. 당시 역사가들은 무신정변을 ‘경계(庚癸)의 난’이라 했다. 즉 최초 정변이 일어난 경인년(庚寅年: 1170년)과 복위운동이 일어난 계사년(癸巳年: 1173)의 두 차례 정변을 합해 무신정변이라 했다. 최초의 정변은 의종 측근세력 내부의 권력 다툼이며, 그런 빌미를 제공한 의종에게 일단의 책임이 있지만 의종의 책임은 여기까지였다. 두 번째 정변인 의종 복위 운동이 일어날 때 일반 군인들의 호응 아래 무신들은 문신에 대한 대량 살육을 저질렀다. 의종의 손을 떠난 정변이다. 무신정변은 가까이는 왕실 중흥과 왕권 강화를 시도한 의종과 그에 반대한 문신 관료집단 사이의 대립이라는 파행적인 정치로부터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멀리는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 등 12세기 이래 누적된 지배층 내부의 대립·갈등의 산물이 끝내는 무신정변이란 파국을 초래했다. 의종에게 모든 책임을 돌릴 수는 없다. 그것은 정변을 일으킨 무신 권력집단의 역사왜곡일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