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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의(太醫)의 의업(醫業) 습득〔太醫習業〕
국가에서 문인(文人)ㆍ무인(武人)과 함께 의인(醫人)을 관리로 임명한 것은 대체로 백성을 제대로 양육하기 위해서이다. 이들 중 옛날 것을 배우는 데서부터 시작하여 터득하지 않은 경우는 없었다. 옛날 것을 배우는 방법은 비록 달라보여도 동일하다.
유자(儒者)가 되려면 반드시 오경(五經)ㆍ삼사(三史)ㆍ제자(諸子)ㆍ백가(百家)를 읽어야만 학자라고 부를 수가 있다. 의인(醫人)〔醫者〕에게 경서(經書)는 《황제내경소문(黃帝內經素問)》〔素問〕ㆍ《황제내경영추(黃帝內經靈樞)》〔靈樞〕가 해당한다. 의인에게 사서(史書)는 여러 의학자〔諸家〕의 본초서〔本草〕가 해당한다. 의인에게 제자(諸子)는 《난경(難經)》ㆍ《황제삼부침구갑을경(黃帝三部鍼灸甲乙經)》〔甲乙〕ㆍ《황제내경태소(黃帝內經太素)》〔太素〕ㆍ《중장경(中藏經)》〔中藏〕이 해당한다. 의인에게 백가(百家)는 《귀유방(鬼遺方)》〔鬼遺〕ㆍ《용수보살안론(龍樹菩薩眼論)》〔龍樹〕ㆍ《금촉(金鏃)》ㆍ《자요(刺要)》ㆍ《동인경(銅人經)》〔銅人〕ㆍ《황제명당경(黃帝明堂經)》〔明堂〕ㆍ《유유신서(幼幼新書)》ㆍ《산과보경(產科保慶)》 등이 해당한다.
유자(儒者)가 오경(五經)을 읽지 않는다면 어찌 도덕성명(道德性命)과 인의예악(仁義禮樂)을 밝히겠는가. 의인(醫人)이 《황제내경영추(黃帝內經靈樞)》와 《황제내경소문(黃帝內經素問)》을 읽지 않는다면 어찌 음양(陰陽)의 변화와 덕화(德化)ㆍ정령(政令)을 알겠는가.
유자가 다양한 사서(史書)를 읽지 않는다면 어찌 인재(人材)의 능력〔賢否〕과 세상의 득실(得失)ㆍ흥망(興亡)을 알겠는가. 의인이 본초서〔本草〕를 읽지 않는다면 어찌 약물의 명칭ㆍ특성ㆍ맛과 양생(養生)하며 장수하는 법을 알겠는가.
유자가 제자(諸子)를 읽지 않는다면 어찌 정교(正敎)를 숭상하는 방법과 시비를 인식하는 방법을 알겠는가. 의인이 《난경(難經)》과 《황제내경태소(黃帝內經太素)》를 읽지 않는다면 어찌 망진(望診)을 잘하는 신의(神醫)ㆍ문진(聞診)을 잘하는 성의(聖醫)ㆍ문진(問診)을 잘하는 공의(功醫)ㆍ절진(切診)을 잘하는 교의(巧醫)를 알며, 의학의 심오한 이치를 알겠는가.
유자가 백가(百家)를 읽지 않는다면 어찌 율력(律曆 악률(樂律)과 역법(曆法))의 제도(制度)와 선악〔休咎〕ㆍ길흉(吉凶)을 알겠는가. 의인이 잡과(雜科)를 읽지 않는다면 어찌 맥혈(脈穴)ㆍ골공(骨空)과 기병(奇病)ㆍ이증(異證)을 알겠는가.
비록 이렇기는 하더라도 아직은 박학한 것은 못된다. 하물며 경서(經書)와 사서(史書) 이외에 또다시 바다 같은 문장과 다양한 문집이 있으니, 한(漢)나라의 반고(班固)ㆍ사마천(司馬遷)이나 당(唐)나라의 한유(韓愈)ㆍ유종원(柳宗元)이 있고 문물(文物)이 가장 융성했던 송(宋)나라에 미쳐서는 대강이라도 거론하기가 어렵다. 의학서적〔醫文〕으로 보자면, 한나라에는 역시 장중경(張仲景 장기(張機))ㆍ화타(華佗)가 있고 당나라에는 손사막(孫思邈)ㆍ왕빙(王氷) 등이 있으며 이들이 쓴 책이 곧 백권(百卷), 천권(千卷)이었다. 그리고 송나라에서는 《태평성혜방(太平聖惠方)》〔太平聖惠〕ㆍ《승한집효(乘閑集效)》ㆍ《신교만전방(神巧萬全方)》〔神 功萬全〕이 있고, 《숭문총목(崇文總目)》〔崇文〕ㆍ《명의별록(名醫別錄)》에 의학이 갖춰져 있으니, 어찌 그저 한우충동(汗牛充棟)이라고만 하겠는가?
가령 학자(學者)가 빠뜨림 없이 일람할 경우엔 박학하다면 박학할 수 있겠지만, 만약 일람한 내용을 요약할 수가 없다면 무엇을 좇겠는가? 내가 지금 서술하는 것은 곧 여러 의경(醫經)〔諸經〕의 정수(精髓)를 추려내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요약하는 방법이다. 의방(醫方)을 읽는 자들이, 마땅히 상성(上聖)께서 백성들을 기르면서 가르치신 내용을 받들어 자신의 뜻으로 삼는다면 아마도 선각(先覺)들을 배반하지는 않게 될 것이다.
[주-C001] 삼인극일병증방론(三因極一病證方論) : 중국 송(宋)나라 진언(陳言)이 1174년에 지은 18권짜리 의서로서 원래 이름은 《삼인극일병원론수(三因極一病源論粹)》이다. 흔히 이 책은 《삼인극일병증방론(三因極一病證方論)》이라고 부르며, 《삼인방(三因方)》이라고 약칭한다. 총론을 비롯하여 내과, 외과, 부인과, 소아과 등의 임상 각 분야를 포괄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의 특징은 임상 분야를 삼인(三因)이라는 질병 원인과 연관시킨 데 있다. 즉 진언은 질병 원인[病因]을 외인(外因), 내인(內因), 불내외인(不內外因)으로 나누었다. 외인은 풍한서습조화(風寒暑濕燥火)라는 육음(六淫)이 정상적인 기운을 범하면서 경락을 통해 몸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이고, 내인은 희노우사비공경(喜怒憂思悲恐驚)의 7가지 감정[七情]이 지나쳐서 장부에 질병을 야기하는 것이다. 불내외인은 내인이나 외인과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써 굶주리거나 배부른 것, 고함을 질러 기를 상하는 것, 정신의 도량을 소진하는 것, 근력을 극히 피로하게 하는 것, 음양을 거스르는 것, 범ㆍ이리 같은 짐승 및 독충에 물린 것, 금창(金瘡)과 삔 것, 주오(疰忤)가 붙은 것, 죄를 지어 옥사하거나, 무거운 것에 눌리거나 물에 빠진 것 등등이다. 《삼인방》의 병인론은 후대 의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주-D001] 난경(難經) : 원제목은 《황제팔십일난경(黃帝八十一難經)》인데, 줄여서 《팔십일난경(八十一難經)》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중국 서한(西漢)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되는 저자 미상의 의서이다. 이 책은 의심스럽고 어려운 문제를 문답으로 풀이하는 방식으로 엮어졌다. 1~22난(難)은 맥진(脈診),23~29난(難)은 경락(經絡),30~47난(難)은 장부(臟腑),48~61난(難)은 질병,62~68난(難)은 혈도(穴道),69~81난(難)은 침법(鍼法)을 다루면서, 기초 이론을 중심으로 병증을 분석하였다.
[주-D002] 황제내경태소(黃帝內經太素) : 《황제내경(黃帝內經)》의 초기 전본(傳本)의 하나이다. 중국 수(隨)나라의 양상선(楊上善)이 《황제내경소문(黃帝內經素問)》과 《황제내경영추(黃帝內經靈樞)》를 모두 포괄하고 주석을 달아 30권으로 만들었으나 현재는 23권만 전한다.
[주-D003] 중장경(中藏經) : 화타(華佗)가 남긴 의서라고 전하기도 하나 실제로는 저자 미상의 의서이다. 중국 수당대(隋唐代)에서 송대(宋代) 사이에 저술된 것으로 추정된다. 논변(論辯) 49편(篇)과 약방(藥方) 123수(首)로 구성되어 있다.
[주-D004] 귀유방(鬼遺方) : 유연자(劉涓子)가 지었다고 전하는 5권짜리 의서로서 《유연자귀유방(劉涓子鬼遺方)》이라고도 부른다. 중국 위진시대(魏晉時代)의 의술을 기록한 것으로 추측된다. 외과에 해당하는 옹저금창(癰疽金瘡)의 치료법이 상세하다.
[주-D005] 용수보살안론(龍樹菩薩眼論) : 중국 수당대(隋唐代)에 편찬된 안과 전문서로서 《용수안론(龍樹菩薩眼論)》 혹은 《안론(眼論)》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인도 나가르주나(Nāgārjuna)의 한자어 이름인 용수(龍樹)보살이 지었다고 하지만 실제 편찬자는 미상이다.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파된 의학의 일단을 보여주는데, 원본은 전해지지 않고 《의방유취(醫方類聚)》와 《의심방(醫心方)》 등에 인용되어 있다.
[주-D006] 자요(刺要) : 어느 의서인지 알 수 없다. 다만 《황제내경소문(黃帝內經素問)》의 〈자요론(刺要論)〉을 지칭할 가능성도 있다.
[주-D007] 유유신서(幼幼新書) : 중국 남송(南宋)의 유방(劉昉)이 편찬하여 1132년에 간행한 소아과 전문서이다. 송(宋)나라 이전의 소아 관련 의학을 포괄하여 40권 분량에 547문(門)으로 나누었다.
[주-D008] 산과보경(產科保慶) : 아마도 산부인과 전문 의서인 1권짜리 《산육보경집(產育保慶集)》을 지칭하는 것 같다. 중국 북송대(北宋代)에 등장한 《산육보경집》의 저자는 미상이며 원본은 현전하지 않는다. 《산육보경집방(產育保慶集方)》 혹은 《부인산육보경집(婦人產育保慶集)》으로 부르기도 한다.
[주-D009] 유자(儒者)가 …… 알겠는가 : 이 문장과 관련하여 《황제내경소문(黃帝內經素問)》 〈기교변대론(氣交變大論)〉에서는, 덕화(德化)가 기(氣)의 길상(吉祥 좋은 징조)이고 정령(政令)이 기(氣)의 정식(程式 표현 형식)이라고 하였다.
[주-D010] 골공(骨空) : 두 뼈 사이의 틈새로서 대부분 혈자리가 있다.
[주-D011] 손사막(孫思邈) : 중국 당(唐)나라의 의학자이다. 경조(京兆)의 화원(華原)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성동(聖童)이라 일컬어졌다. 그는 태백산(太白山)에 은거하면서 도학(道學)을 배웠으며, 천문(天文)과 의학(醫學)에 정진하였다. 특히 그는 상한(傷寒)에 독보적이었으며, 의서에서는 흔히 손진인(孫眞人)으로 지칭된다. 《비급천금요방(備急千金要方)》과 《천금익방(千金翼方)》을 저술하였다.
[주-D012] 왕빙(王氷) : 왕빙은 9세기 중국 당(唐)나라의 의학자이다. 그의 호가 계현자(啓玄子)여서 의서에서는 흔히 계현자로 지칭된다. 그는 《황제내경소문(黃帝內經素問)》의 주석본을 편찬하였으며, 운기학설(運氣學說)을 주장하였다.
[주-D013] 승한집효(乘閑集效) : 실체를 잘 알 수가 없다. 중국 송대(宋代)에 편찬된 어떤 의서의 약칭으로 보이는데 《승한집효방(乘閑集效方)》이거나 승한이 지은 《집효방(集效方)》일 수도 있다.
[주-D014] 신교만전방(神巧萬全方) : 11세기경에 중국 북송대(北宋代)의 의학자인 유원빈(劉元賓)이 저술한 처방서이다. 《의방유취》 본문에서 왕왕 인용하고 있다.[주-D015] 공(功) : 원문은 ‘공(功)’이지만 문맥상 ‘교(巧)’의 오각(誤刻)으로 판단된다.
[주-D016] 숭문총목(崇文總目) : 중국 송(宋)나라의 66권짜리 관찬 서목(書目)이다. 구양수(歐陽脩) 등의 교정을 거쳐 인종대(仁宗代)인 경력(慶歷) 원년(1041)에 완성되었다. 경부(經部)ㆍ사부(史部)ㆍ자부(子部)ㆍ집부(集部)를 대분류로 한 4부(部) 45류(類)에서 30,669권(卷)의 책을 다루었다. 의서는 이 가운데 자부의 의서류(醫書類)로 분류되어 있다.
[주-D017] 명의별록(名醫別錄) : 원래 중국 한(漢)나라의 본초서(本草書)로서 《별록(別錄)》이라고도 부른다. 편찬자는 미상이며,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을 기초로 하여 약물의 성질과 효과를 정리하고 새로운 약물을 보충하였다.
[주-D018] 한우충동(汗牛充棟) : 책을 실으면 소가 땀을 흘릴 정도이고, 방에 쌓으면 들보에 닿을 정도로 많음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