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의 추억 #50, 그 시절 편린 하나, 다시 데리러 온 친구
‘이단의 추억’을 기록해 나가면서 자료를 찾다가 옛날의 잡동사니들을 모아놓은 가방 안에 당시의 편지 한통을 발견했다. 감회가 새롭다. 바로 인연깊은 친구 D가 나에게 보낸 편지다.
한낮이라 아직은 뜸한 인적이지만 자동차의 소음과 안개처럼 뿌연 도심지의 공해를 피할 수 없는 사직공원의 한 모퉁이에서 잠에서 덜 깨어난 것처럼 멍멍한 精神으로 이글을 날리고 있소. 당신이 훌쩍 떠나버리던 날, 그전에도 당신이 간다는것에 대해서 별로 동조는 안했지만 그날따라 애석해진 마음은 당신의 인격과 의사를 무시하고라도 억지로 붙잡아 두지 못한 후회로서 ‘하참!’이 아니라 ‘에이!’로서 나도 모르게 연발하고 있었소.
그날 저녁, 당신이 당신답지 않는 그러한 울렁거리는 음성(내게는 그렇게 들렸소)으로서 “내가 가방을 든 초췌한 꼴을 당신에게 보이기 싫소” 하며 離京하던 날 밤에 베드로목사님이 제단에서 ‘조금만 더 참았으면 되는것을 미처 내가 손을 써지 않했던것이 참 잘못이었구나‘하시며 비통한 책임자의 일그러진 얼굴로 애써 괴로움을 감추려 하던 모습을 대했을때 나의 가슴은 더욱 후회로서 미어질듯 했소.
뻔히 내가 알면서 즉시 연락 해드리지 않았던것에 대한 내가 져야 할 책임은 끝내 회피 할 수 없는 것. 언제라도 각오는 되어있어 이제 마음은 안정이 되오만 가끔 괴로운 심경이오. 어제 11시경 당신이 올라온다는 전화를 했을때 차라리 아무런 감각이 없이 덤덤했지만 마음 한 모퉁이에서 당신의 전화에도 있었듯이 올라오지 않을것같은 흑점이 자리잡고 있어 다시 한번 더 전화를 걸고 싶었었소.
용산교회가 어떠냐고 물었을때 텅 비어있다고 대답하면 아마 당신이 올라올 줄 알고 했건만 어찌 그것이 도리어 당신의 발을 묶지나 않았는지. 어제밤에 양목사님이 갈렙목사와 '그가 어디갔어?’ 하며 두리번 거리던 모습과 ‘안왔다’고 했을때 고개를 갸우뚱이던 모습을 보고 ‘전화상으로 그가 올라오지 않으려 합디다’고 하는 말이 나의 목구멍에 걸려 나오지 않았소.
모든 행동이 자기의 마음 가운데서부터 나와야만이 부작용이 없다는 것은 기정 사실이지만 당신에게 다시 상경을 권하고 싶은 것이 나의 전부요. 올해가 고비이며 이번 시험에만 이기면 괜찮다 하시던 떠나실 때 선교사님의 말씀이 자꾸 마음에 걸리오. 그 말씀을 전적으로 믿을 만큼 나의 마음이 단순하다고 할까요?
당신의 처지와 그 말씀이 자꾸 떠 올라와 씁쓸한 심정이오만 내가 무슨 말을 할지라도 당신은 당신의 길을 걸을것이 뻔한것 같아 이제 무슨 말을 더 하리오.
한번만 더 당신이 쓴 웃음을 지으며 양손에 가방을 들고 용산역에 내리는 꿈을 꾸고 싶소. 이것은 비단 나의 원만은 아닐거요.
하늘은 구름인지 먼지인지 모르는 잿빛으로 잔뜩 찌푸리고 그다지 상쾌하지 않은 반사햇빛이 공원안에 가득하오. 옷깃을 가끔스치는 쌀쌀한 바람이 가을을 알려 오는구료. 토요일 저녁에 재선이가 와서 당신의 거처를 묻더군요. 볼일이 있어 부산갔다 온다고만 전했소. 삼손이 당신 소식 몰라 대단히 궁금해 하는 모양이오.
이탈된 육신의 쾌락보다도 차라리 육신의 마음껏 누릴수 있는 생활이 규제당하는, 지금의 이 생활이 맘 편하오. 언젠가 당신에게 말했듯이 이미 폐물이 된 존재, 철저히 폐물이 되겠다는 마음 아직은 변함이 없고 아마 앞으로도 없을거요. 게으르고 열성없는 몸에 베어있는 습성이 벌써 비굴하게도 노쇄되어 물결치는대로 마치 일엽편주처럼 바람따라 떠 갈까하오. 지금의 궤도에서 이탈할만한 힘과 용기가 하나도 없소.
저멀리 담배피우는 군발이가 벤취에 않아 웃고 있소. 날이 자꾸 찌푸려 오오. 이제 또 다시 일터를 향해 어슬렁거려야 되겠오. 항상 내마음속에 틀어박혀있는 당신이여! 어디를 가든지 어느 하늘아래 땅떵어리 위에 있다 하더래도 안녕과 건강 그위에 신의 은총 있어소. D씨에 대한 글 또한 잊을 수 없을거요. 끝으로 당신의 상경을 애소하는 마음을 이글과 함께 적어 보내오 서울 D.
(D의 편지중에 나오는 선교사님이란 2대교주 노영구를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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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도망 가버린 것이 들통난 후, 세칭 동방교의 내 친구 D는 양학식 베드로목사에게 아마도 귀싸대기를 얻어 맞아 뽈따구에 불이났을 것이다. 그 성깔 사나운 베드로목사가 그냥 지나칠 턱이 없다. ‘너는 친구가 도망가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 아니야, 부산 내려가서 당장 데리고 와~’ 엄명이 떨어지고, 얼마후 D는 나를 데리러 부산으로 내려왔다.
부산에서 나와 만난 D는 나를 무던히 설득하고 회유했지만 다시 돌아갈 턱이 없는 나의 의지를 확인하고 그는 서울 용산의 '수원정'으로 혼자 돌아갔다. 다시 데리고 오지 못한 벌로 아마도 몇 대 더 귀싸대기에 불이 났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때 이미 두 번째의 입영신체검사를 기피하고 있던 중이었으므로 군 입대를 서두르고 있었다. 두 번이나 기피되어있는 신체검사를 받기위해 고향의 면사무소를 찾아가니 면서기가 깜짝 놀래면서 병적카드를 줄테니 지금 이곳은 신체검사가 지나갔으므로 신체검사를 진행하고 있는 다른 군으로 가서 모병관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신체검사를 받으면 된다고 하면서 안내를 해 주었다. 그리고는 덧붙이는 말, 기피자 명단에 올라가 있으니 파출소나 경찰서 앞으로는 다니지 말라고 당부를 했다.
그의 안내에 따라 절차를 거쳐 기피 이력없이 훈련소에 입소하게 되었고 동방교에서 단련된 생활습관은 그 어렵다는 훈련소가 나에게는 차라리 편안한 낙원 쯤 되었다. 새벽 한 두시에 취침하여 경비 한번 서고 새벽 다섯시면 일어나서 팔작밥 오작죽으로 버티던 생활에서 밤 열시에 소등하고 취침하여 아침 6시에 기상하고 며칠만에 한 번 돌아오는 불침번을 서는 일은 차라리 추억에 잠기는 고즈녁한 시간이었고 넉넉하게 퍼 주는 밥과 반찬은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어떤 훈련병 동기생들은 취사반 옆을 지나가다가 콩나물국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을 하고 군대밥을 못먹어 몇끼를 굶는 친구도 있었지만, 나는 즐겁고 유쾌한 훈련소 생활이었다. 훈련소생활을 마치고 배치받은 서울의 자대는 모든것이 두루 갖춰진, 비유컨데 오성급 호텔이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확실하게 마무리 했던 병역의무, 지금 생각해도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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