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강경삼가해 무각스님 법문 (28)
2019년 04월 04일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菩薩이 莊嚴佛土不아 不也니이다 世尊하 何以故오
수보리 어의운하 보살 장엄불토불 불야 세존 하이고
莊嚴佛土者는 則非莊嚴일새 是名莊嚴이니이다
장엄불토자 즉비장엄 시명장엄
<번역>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한가. 보살이 부처님의 국토를 장엄하는가 아니 하는가.”
수보리가 대답하기를 장엄하지 아니합니다. 어찌하여 그런가 하면 부처의 국토를 장엄함은 곧 장엄한 것이 아님을 장엄하다고 합니다.”
<번역> - 무각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한가. 보살이 부처님의 국토를 장엄하는가 아니 하는가.”
수보리가 대답하기를 “장엄하지 않습니다(不也니이다), 어찌하여 그런가 하면 불국토를 장엄함은 곧 장엄이 아니라, 이 말을 직역을 하면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것은 장엄이 아니라 그 이름을 장엄이라 합니다(莊嚴佛土者는 則非莊嚴일새 是名莊嚴이니이다)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불국토 장엄이라고 하는 것은, 유마경 불국품에 불국토 장엄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여기 불국품에서는 중생의 종류, 이것이 보살의 불국정토이니라! 고 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중생의 종류가 많지요 육도구류(六道九類)가 중생이잖아요,
그런데 중생의 종류가 뭐냐? 보살의 불국정토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슨 뜻이냐면 원래 중생의 소견이라는 것은 나에 대한 집착에 의해서 선업과 악업을 짓잖아요,
즉 나라는 것에 의지해서 선업과 악업을 지어서, 그 선업과 악업의 힘으로 삼악도(三惡道), 삼선도(三善道)가 벌어지거든요, 삼악도는 지옥,아귀,축생이고, 삼선도는 인간,수라,천상으로 이것으로 국토를 삼습니다.
우리도 여기 인간이라는 곳의 업에 의해서 이렇게 태어나서 살잖아요, 이 국토를 자기 국토로 삼아서 지금 인간으로 살고 있지요, 이게 중생들은 다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나라는 것에 의지해서 선업과 악업을 짓거든요, 그 업의 힘으로써 그 국토를 받거든요, 좋은 일 하면 좋은데 나고, 나쁜 일 하면 나쁜데 난다는 것과 같이, 똑같은 말을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인간으로 태어났으니까 인간의 몸으로써 이 국토를 받아서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인간도 천차만별입니다. 인간도 한 가지만 있는게 아니라 아프리카 등 어느 곳에는 삶이 고달프지요, 똑같은 인간으로 태어났는데도 아주 다릅니다.
자기가 받는 선업과 악업에 의해서 인간의 몸을 받기는 받았지만 인간으로서 아프리카라는 그 국토를 받았지요.
아는 스님들이 아프리카를 갔다 왔다고 했는데, 그곳에 동물이 아주 많다고 했습니다. TV에서 본 그대로 많다고요.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났다는 겁니다.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겁니다.
그 많은 동물중 하나로 태어나지 않고 어떻게 이런 인간으로 태어났을까! 하고!
벌써 대접이 틀리고, 사는 모습이 틀리고, 또 그렇게 살면 그게 전부인줄 알고 스스로 받아 들여 자기 국토로 삼거든요, 개로 태어나면 개로서 그 세계를 살아가고 있잖아요.
그런데 보살은 어떻게 사느냐!
차별이 없고 평등한 이치를 통달하여 살아갑니다.
그래서 보살이 되려면 여러분이 차별을 놓아야 됩니다. 그리고 모두가 평등한 이치를 받아들여야 보살이 되는 겁니다.
그래야 보살이 되는 거지요, 그래서 불보살은 차별이 없고 평등한 이치에 통달하여 상대적인 세계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의 국토를 따로 받지 않는다는 겁니다.
태어나기를 인간으로 태어나든, 짐승으로 태어나든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그 국토를 중생들처럼 그대로 받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부처님도 가지가지 몸을 받았을 때, 항상 마음 씀을 어떻게 썼느냐 이겁니다.
중생심으로 쓰지 않고 보살심으로 마음을 썼습니다.
쥐로 태어나도 보살로서 마음을 썼고, 사슴으로 태어나도 보살로서 마음을 썼, 틀리잖아요,
그러니까 몸은 그대로 받았지만 그 국토를 그대로 받는게 아니라는 겁니다.
차별이 없고 평등한 이치에 통달하여 상대적인 세계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의 국토를 따로 받지 않습니다
어떤 모습으로든 자기 인연따라 나투기는 나투겠지요, 그렇지만 그걸 내가 받는게 아니라는 겁니다.
즉 여기 인간으로 살면서도 인간으로만 사는게 아니라 온갖 것으로 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살의 불국정토라는 것입니다.
지금도 사실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가지가지 업식들이 수시로 올라오잖아요, 지옥도 올라오고, 아귀, 축생, 인간, 수라, 천상등도 올라오고 그러면 그때마다 그 세상 그대로 살지 않거든요, 만약 그렇게 살면 중생인데, 그렇게 받지 않고 평등하고 차별없이 상대적인 세계에 집착하지 않게 되면 그 업식이 나오더라도 그대로 끌려다니지 않잖아요, 그래야 이름을 보살이라고 합니다.
지금 죽어서 보살이라고 하는게 아니고 지금 한생각에 그냥 독사같은 마음이 올라온다고 해서 독사의 업식대로 행하면, 독사는 탁 깨물면 죽게 만들잖아요, 그래서 말로 찌르고, 말이 칼이 됩니다. 즉 혀 속에서 칼이 나와서 찌르고 베어버립니다.
그럴 때 그걸 무엇으로 바꾸느냐? 꽃으로 화했습니다.
꽃이라는 것은 깨달음이거든요,
부처님께서 마지막에 마왕 파순이 돌도 던지고 창도 던지고 칼도 던졌지만 날아오는 것들이 전부 무엇으로 변했다고 했습니까?
그것들이 꽃으로 화해서 흩어져 떨어졌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성도했다고 하지요,
여러분 몸과 마음속에 있는 업식도 그 마왕 파순이 던지는 돌이고 창이고 칼인 것입니다. 바깥에서 닥치는 경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왕 파순이 던지는 그 창과 칼을 꽃으로 화해서 흩어지게 했느냐 이겁니다.
즉 부처님은 한 생각을 잘 돌려서 깨달음의 꽃으로 전부 화했잖아요,
그렇게 하듯이, 불보살은 차별이 없고 평등한 이치에 통달한 것이고, 이게 깨달음의 불이법(不二法) 입니다.
이렇게 통달하여 상대적인 세계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의 국토를 따로 받지 않는다는 겁니다.
다만 모든 중생의 근기에 따라 응하여 나투는 까닭에, 모든 중생의 근기에 따라서 응해서 나투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떤 것이 오든지간에 응해서 나투어, 거기서 깨달음으로 화해서 나가는 거지요,
즉 깨달음으로 돌아가는 거지요, 그러니까 악마같은 마음이 나오더라도 악마같은 마음을 싫어하지 마라, 그것은 깨달음으로 돌아갈 수 있는 재료라는 겁니다.
그것이 중생의 업식에서 나오는 거니까, 그것을 벗어나서 지켜보는 그놈이 그것을 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오면 나오는데로 행하지 말고, 그것을 보살로서 받아들여, 법문에 의지해서 굴려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법문을 잘 들어서 지혜롭게 굴려야 한다는 것이고, 지혜롭게 굴릴 줄 알면 그 자리가 바로 깨달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중생의 근기에 따라서 응하여 나투는 까닭에 중생이 있는 곳이 보살이 나투어 정토를 장엄하는 곳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정토를 장엄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중생의 종류가 보살의 불국정토라고 하는 것이다 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중생 중에 어떤 중생이 나투더라도 독사같은 마음이 올라오면, 독사같은 마음이 중생이잖아요, 그것을 돌려서 놓으면 깨달음으로 화하지요, 그러면 이게 그대로 불국정토를 이룬 것입니다.
보살의 불국정토잖아요, 또 따로 어느 곳에 태어나서 그곳을 보살의 불국정토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지금 있는 이 자리에서, 즉 한생각이 일어난 그곳에서 보살의 불국정토를 이루는 거지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운문스님에게 무엇이 부처입니까? 라고 물으니, 마른 똥막대기다!
마른 똥막대기? 이것도 뭐냐 이겁니다.
부처님이 그저 성스럽고 거룩한 모습만이 부처라고 생각을 하는데, 그게 바로 분별이거든요.
이것이 옳고 저것은 그른것이고, 이런 것이 다 분별망상이라는 것입니다.
그 분멸망상을 불보살은 차별이 없고 평등한 이치에 통달하여 상대적인 세계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낱낱이 불국토를 장엄하는 것입니다. 그 힘으로.
그 더러운 마른 똥막대기도 부처님이라는 거지요.
아! 그분이 있는 그대로 말한 것이지, 조금도 부족한 것이 없이 감춰진 것도 없이,
그래서 스승의 가르침에 감추어진 것(사권 師拳:감추어진 것, 스승의 주먹)은 없다고 말합니다.
무슨 소리냐면 이미 온통 다 설해졌다는 것입니다.
진리란 것은 이미 조금도 감춰진 것 없이 온통 다 설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부처님도 그랬습니다. 아난 존자가 이제 가시면 어떻게 합니까?
여래가 일 겁을 더 머문다 해도 더 특별한 것은 없다. 이미 법은 다 설해져 있다.
즉 온통 다 드러나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조사 스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뜰앞에 잣나무니라!
이렇게 말해주면 뜰앞의 잣나무가 참으로 부처인줄 아는가요?
참으로 부처로 보이나요! 여기서 확연히 부처를 볼 수 있는가요!
또 한가지 예를 들면
나무꾼이고 일자 무식인 사람이 큰 스님에게 무엇이 부처입니까? 물으니
즉심시불(卽心是佛)이니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즉 마음이 곧 부처이니라!
그런데 이 사람은 짚신시불이라고 들은 것입니다.
즉 짚신이 곧 부처라고 들은 것입니다.
이 사람은 산에 나무하러 다니고 일하러 다니는데 지게 끝에 짚신 하나를 매어 놓고 이게 부처라니! 항상 이렇게 생각했다는 겁니다.
큰 스님이 허튼 말을 했을리는 없는데,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자신이 듣기는 짚신이 부처라고 분명히 들었으니까, 짚신을 보고 항상 이게 부처라니 한 것입니다.
믿어지지는 않지만 큰 스님 말을 믿는 것입니다.
거짓말 했을 리는 없고 농을 했을 리도 없고, 더군다나 잘못들었잖아요,
그런데 잘못들었다는 생각도 없지요. 이 사람은 그렇게 지극하게 믿으면서도, 아무리 짚신이 부처라고 믿으려고 해도 납득이 안되고 받아들여지지 않잖아요,
그러니까 나중에 짚신이 말을 걸더라는 겁니다.
야 임마! 부처를 아직도 모르냐! 그래서 그 순간 깨달았다는 겁니다.
아! 짚신이 부처구나 하고.
똑똑한 사람은 에이! 짚신이 무슨 부처야! 즉심시불이라고 했잖아! 라고 하여 마음이 곧 부처라고 해서 알아듣겠지만, 그러면 마른 똥막대기는 부처가 아닌가요?
어때요? 마른 똥막대기도 부처인가요?
결국 알고보면 지극한 자기 마음에 있는 것이고, 무명에 갇혀 있는 그것만 없으면 온통 부처 아닌게 없습니다.
즉 자기 마음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뭐가 부처냐 이겁니다.
이렇게 말해줬으니까 여러분은 좀 알겠지요? 알기는 뭘 알겠어요.
진짜 알아야지 참으로 보듯이 그래서 견(見)자를 썼나봐요!
눈으로 보듯이 견성(見性)을 해야지 말을 해봐야 이것은 그림의 떡입니다.
이렇게 알아봤자, 똑똑한 사람은 아! 드디어 알았네, 이렇게 알거든요, 알기는 뭘 알겠습니까.
진정으로 온통 볼 줄 알아야지요, 지금 이 순간, 그러니까 짚신도 부처지요,
짚신만 부처겠습니까?
오즉하면 운문 스님이 마른 똥막대기라고 했고,
조주 스님은 뜰앞의 잣나무라고 했겠습니까.
그렇게 지금 알음알이로 알았다고 해서 틀린 말은 아닌데, 깨달은 것은 아닙니다.
자기와는 아무 상관없는 말이고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말일 뿐입니다.
그것이 자기의 생사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못하잖아요,
그러니까 부질없는 말을 할 필요가 없어요, 사람은 그래서 진실해야 되고 참으로 알아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진리는 말이나 이름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장엄도 이름하여 장엄(시명장엄 是名莊嚴)이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다음은 논(論)에 나온 말입니다.
“곧은 마음이 보살의 정토이니 보살이 부처를 이룰 때 아첨하지 않는 중생이 그 국토에 태어나느니라!” 이랬습니다.
이것도 참 멋있는 말입니다. 곧은 마음이 보살의 정토이니 보살이 부처를 이룰 때, 즉 보살이 깨달아 들어갈 때 어떻게 되느냐?
아첨하지 않는 중생이 그 국토에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국토라는 것은, 따지고 보면 여기 이 몸과 마음으로 비유해도 됩니다.
이게 불국토지요, 왜 불국토냐면 일체 중생은 실유불성(悉有佛性)이거든요, 다 불성을 가지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불국토입니다. 중생이 있는 곳은 부처님이 꼭 계시거든요,
왜냐하면 실유불성이니까!
그러니까 중생 숫자만큼 부처님 숫자도 많을 것입니다.
헤아릴 수 없는 숫자만큼 중생도 많으니까, 헤아릴 수 없는 부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곧은 마음! “직심(直心)이 보살의 정토이니, 보살이 부처를 이룰 때 아첨하지 않는 중생이 그 국토에 태어나느니라.” 했습니다.
여러분 마음 가운데서 가지가지 업식으로 드러난 것이 전부다 보살로서 다시 태어나야 되거든요, 지금은 중생 업식으로써 돌아가는데, 여러분 한 생각에 의해서 그게 전부다 보살로 화하고 보살로 화합니다.
그런데 이게 구체적으로 작동이 될 때에는 보살들이 활동하는 것 하고 중생의 업식에 의해서 활동하는 것 하고는 차이가 많습니다.
위급한 일(중생의 업식)이 닥쳤을 때, 위급한 일이라는 것도 아마 중생을 꼬셔서 가자고 하는 바람에 가서 만나거든요, 악업들이 있으면 저기 후미진 곳에서 칼을 든 강도를 만난단 말입니다.
왜 그 시간에 그곳에서 꼭 만나게 됐느냐는 겁니다.
서로 유유상종입니다. 같은 류끼리는 만나는 것입니다. 끼리끼리 만난다고 하잖아요, 나를 그리로 끌고 가서 거기 업식들하고 서로 만나는 겁니다.
회포를 푸는 거지요, 그래서 찌르고 찔러 죽이고 죽임을 당하고, 그러는 겁니다.
이것도 전부 업식에 의해서 하는 것입니다.
지금 하고자 하는 말은 아첨하지 않는 중생이 그 국토에 태어나느니라는 이 말을 설명하는 것으로,
그런 업식이 있다 하더라도 어떤 중생이 여러분 마음속에 참으로 보살로 화한, 깨달아 차원이 높아진 그런 중생이 여러분 마음 가운데 있다면, 그 중생들이 나가서 대처를 하게 됩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나라가 망하려고 하면 망하는데 일조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고, 그걸 막으려고 애쓰는 애국자들이 있잖아요!
그것과 똑같습니다. 내 몸이 무너지려고 할 때 이것을 막으려고 애쓰는 세력이 있고, 같이 끌고가서 원수를 갚으려는 세력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원수를 갚으려는 악업의 세력이 많으면 결국에는 죽임을 당하겠지요.
이때 내가 마음공부를 해서 이 업식들을 전부 보살로서 화해서 바꿔놨다면, 이 업식들 즉 애국자들이 이러면 안된다. 하고 막으면 이 몸이 살게 되거든요.
죽을 일이 있어도 살게 될 수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죽게 하는 것도 나고 살게 하는 것도 나란 말입니다.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너무나도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우리 삶입니다.
지금 활발발하게 보고 듣고 말하는 이걸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 부처님 공부라는게 그렇게 관념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단순히 현묘한 이론을 이야기 하는게 아닙니다.
그래서 예전에 법문 (12)의 【冶父】에서도 말했습니다.
어떤 보살이 미장원 일을 마치고 나오는데 총든 강도를 만났잖아요 그런데 그때 생각은 아무 생각이 없더랍니다. 부처님도 생각 안나고, 자성도 생각 안나고 그야말로 아무 생각이 없이 하얗더라는 겁니다.
그런데 여전히 작용은 합니다. 공부해서 닦은 마음(쉬는 마음)이, 그럴 때 작용을 하는 겁니다.
실제로 작동합니다. 아무 생각없는 그 속에서 희한하게 현재의식은 숨어버리고 잠재의식이라고 할까 하는 닦인 마음이 나와서 너무나 정확하게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곧은 마음, 즉 아첨하지 않는 중생이 이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 중생들이 쏟아져 나가서 그 문제를 해결하는 거지요.
그 어려움을 그 자리에서 해결하여 나중에 인사도 잘하고 헤어지고 나서 자기 집 아파트 엘리베이터 앞에서 현재의식이 돌아오면서 가슴이 쿵 떨어지면서 정신이 없었다는 이야기 했습니다.
이건 자신이 한 것이 아닙니다. 닦은 그 마음(곧은 마음)이 모두 문제를 해결하고 조용히 쉬니까 현재의식이 나온 것이지요.
그리고 시카고에서도 어떤 스님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떤 여자 종교인이 야채 가게를 하는데 강도가 들어왔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야 좋게 말하면 적극적이고 분별하는 스타일이거든요, 그러니 평소에 했던대로 총을 든 사람에게 덤비니 총에 맞아 죽었다고 합니다.
간단하게 생각해도 어떻게 총을 든 사람에게 덤비냐는 것이지요, 제정신이 아니지요.
앞의 보살님도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무의식에서 둘 아니게 작용을 하니까 서로서로 손해가 없이 멋지게 마무리를 지었지요.
그런데 여기서는 어떻습니까 평소에 했던 습성대로 업식으로 행한 것입니다.
위의 두 가지 경우는 업식을 어떻게 법답게 굴리느냐 이 차이거든요, 자기가 무슨 힘이 있어서 그 강도에게 덤비느냐 이겁니다.
그래서 공부라는 것이 항상 우리가 평소에 해 놓으면, 즉 둘 아닌 도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강도든 누가 와도 둘로 보지 않지요, 그런데 현재의식이 작동을 못하니까 현재의식은 숨어버리고 잠재의식이 나와서 작용을 하잖아요, 알 수가 없는 의식이!
그게 부처님이 해 주신 건가요! 자기가 한 것입니다.
그것도 모두가 이익되게 작용한 것입니다. 거기서는 부처님이나 관세음보살이라는 생각도 안 나더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부처라는 것은 이름일 뿐입니다. 그 무심자리를 부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기서 곧은 마음이 보살의 정토이니 보살이 부처를 이룰 때 아첨하지 않는 중생, 즉 그 중생이 이 국토에서 태어나느니라! 고 표현했습니다.
다음에 심심(深心 깊은 마음)이 보살의 정토이니, 보살이 부처를 이룰 때(깨달을 때) 공덕을 고루 갖춘 중생이 그 국토에 태어나느니라!
깊은 마음이라는 것은 모든 현상적인 이해 관계에 얽힌 것이 아니라 참으로 그 사람의 근본 성품을 의지하고 교류하는 것, 이게 깊은 마음이거든요 그러니까 항상 깊은 마음이 보살의 불국정토인데, 뭐냐? 보살이 부처를 이룰 때 공덕을 고루 갖춘 중생이 그 국토에 태어나느니라 이랬습니다.
그러면 그게 참다운 공덕(공덕장)이 되는 것입니다.
보리의 마음(菩提心)이 보살의 정토이니 보살이 부처를 이룰 때 대승의 중생이 그 국토에 태어나느니라!
소승의 중생이 아니라 대승의 중생이 그 국토에 태어난다고 했습니다.
나밖에 모르고 나 편하면 된다는 것은 소승이거든요
그게 아니라 나보다 모두를 위해서 부처님 법이 널리 퍼지기를 발원하는 것이 대승이지요, 이런 생각을 가져야 대승입니다.
먹을 만하고 살 만하고 어려움 없고, 그러면 소승이거든요,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 좀 더 생각을 넓게 하는 그런 중생이 여기서 태어나느니라!
태어난다는 것은, 그런 생각(원력)이 생긴다는 말입니다.
즉 그런 원력이 자기 마음에서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대승의 중생이 그 국토에 태어나느니라! 는 말, 이 세 가지가 불국토를 장엄하는 이야기로, 유마경에 나옵니다.
오늘은 불국토 장엄에 대한 말이 나와서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說誼】
內而根身과 外而器界가 皆是淸淨智境이며 一一無爲佛土니라 根身器界를
내이근신 외이기계 개시청정지경 일일무위불토 근신기계
因甚喚作淸淨智境과 無爲佛土오 捏目에 空花亂墜요 不然이면 滿目蒼蒼이니라
인삼환작청정지경 무위불토 날목 공화난추 불연 만목창창
作麽生莊嚴고 情忘勿疎親이요 見盡無內外로다
자마생장엄 정망물소친 견진무내외
作麽生이 是非莊嚴고 情見忘處에 不留蹤하면 見佛見祖를 若冤讎니라
작마생 시비장엄 정견망처 불유종 견불견조 약원수
<번역>
안으로 육근의 몸이며 밖으로 기세계(器世界)가 다 청정한 지혜의 경계이며 일일이 무위의 부처님 국토이다.
육근의 몸과 기세계를 무엇 때문에 <청정한 지혜의 경계>이며 <무위의 부처님 국토>라고 부르는가. 성한 눈을 비비며 허공의 꽃이 어지럽게 떨어지지만 그렇게 아니 하면 눈에 가득한 것이 푸른 하늘뿐이리니 무엇을 장엄하다 하겠는가.
정을 잊으면 성글고 친함이 없고, 견이 다 없어지면 안과 밖이 없으리라.
무엇을 장엄함이 아니라 하는가.
정(情)과 지견(智見)이 잊혀진 곳에 자취를 머물러 두지 아니하니 부처와 조사를 보기 원수처럼 하지.
<해설> - 무각
안으로 육근의 몸이며 밖으로 기세계(器世界 물질세계)가 다 청정한 지혜의 경계다.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마음이나 밖에서 일어나는 모든 모습들이 다 청정한 지혜의 경계라는 말입니다.
지혜라는 것은 부처거든요. 그러니까 불교는 지혜의 종교입니다. 그래서 지혜는 부처입니다.
그러니 알고 보면 같은 말입니다. 마른 똥막대기도 기세간인데 이것도 청정한 지혜의 경계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청정한 지혜의 경계를 확연히 체험하고 깨달아야지요.
다음에 일일이 무위(無爲)의 부처님 국토이다.
즉 모든 것이 무위의 부처님 국토라는 겁니다.
육근의 몸과 기세계를 무엇 때문에 <청정한 지혜의 경계>이며 <무위의 부처님 국토>라고 부르는가, 하면서 성한 눈을 비비면 허공의 꽃이 어지러이 떨어지느니라.
이 말은 헛것이 보인다는 말입니다.
멀정한 눈인데 비빈다는 것은 중생심을 쓴다는 말이거든요, 그러니 헛것이 보여서 전부가 헛보인다는 말입니다. 즉 실체를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비비지 않으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볼 것인데 말입니다.
떨어지지만 그렇지 아니 하면 눈에 가득하게 모든것이 푸른 하늘(진리)뿐이리니, 비로자나(법신) 뿐이리니 무엇을 장엄한다고 하겠는가!
그러니까 이름이 시명장엄(是名莊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이름하여 장엄이지, 장엄이라고 이름할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본래 눈만 비비지 않았으면 그대로 장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즉 본래 장엄이란 말입니다.
다음에 정(情)을 잊으면 성글고, 성글다는 것은 소원(疎遠)하다는 것으로 소친(疎親:소원하고 친함이 없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을 잊으면 이라고 했는데, 우리가 정 때문에 공부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정이라고 하는 것은 감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느끼는 것,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 그래서 소친이 없다 이겁니다. 성글고 친함.
그래서 정을 잊으면 소원하고 친함이 없고,
다음에 견(見)이 다 없어지면, 견이라는 것은 견해(見解)지요, 알음알이 라고도 하고 지견(知見)이라고도 하고,
그래서 견이 다 없어지면 안과 밖이 없느니라고 합니다.
즉 능소(能所 나와 너)라는게 없다는 소리입니다.
그래서 나와 너라는 것을 다 놓으면 견이 없어지겠지요. 이렇게 하면 됩니다.
소원하고 친함을 따지는 마음을 놓아버리면 정이 놓아지거든요, 이렇게 뒤집어서 보면 됩니다.
공부를 어떻게 하느냐?
너와 나, 안과 밖, 옳고 그름, 이게 다 따지는 것이거든요, 이걸 놓아버리면 견해(알음이) 즉 지견이 없어져요.
그럼 뭐가 남겠어요? 깨달음이 남겠지요.
무엇을 장엄함이 아니라고 하는가?
정과 지견이 없어진 곳에 자취를 머물러 두지 아니하니(자취를 남기지 아니하면),
즉 정과 지견이 잊혀진 곳에서 정과 지견을 다 놓았다는 자취조차도 다 놓아버리면,
우리 공부가 항상 그렇지요, 무주상행어보시(無住相行於布施)항상 함이 없이 하라는 것,
즉 우리 공부가 무위법(無爲法)이라고 하잖아요, 함이 없는 법, 함이 없게 되면 부처와 조사 보기를 원수(冤讎)처럼 한다 이겁니다.
거기서 여러분은 거룩하게 생각한 부처님하고 조사스님을 원수처럼 본다는 거지요, 왜냐! 거기는 본래 이름이 붙지 않습니다. 그 자리는.
아까 미용실 보살과 같이, 막상 위급상황에 닥치니까 부처님 ‘부’자도 생각이 안나더라는 겁니다. 그런데 여지없이 작용하는 ‘놈’이 있잖아요 그렇지요. 바로 그겁니다.
그것의 이름을 부처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름하여 부처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처는 이름일 뿐입니다.
그래서 자취를 남기지 마라!
해도 함이 없이 하고, 흔적을 지워라. 이게 공부다.
【六祖】
佛土淸淨하야 無相無形하니 何物이 而能莊嚴耶아 唯以定慧之寶로 假名莊嚴이니라
불토청정 무상무형 하물 이능장엄야 유이정혜지보 가명장엄
莊嚴이 有三하니 第一莊嚴은 世間佛土니 造寺寫經과 布施供養이 是也요
장엄 유삼 제일장엄 세간불토 조사사경 보시공양 시야
第二莊嚴은 身佛土니 見一切人에 普行恭敬이 是也요 第三莊嚴은 心佛土니
제이장엄 신불토 견일체인 보행공경 시야 제삼장엄 심불토
心淨하면 卽佛土淨이라 念念常行無所得心이 是也니라
심정 즉불토정 념념상행무소득심 시야
<번역>
부처님의 국토가 청정하다 함은 부처의 국토는 형상이 없거니 어떤 것으로 장엄한다 하겠는가. 오직 정혜(定慧)의 보배로써 장엄한다고 이름을 빌릴 뿐이다. 장엄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 장엄은 세간이라는 부처님 국토니 절을 짓고 경을 쓰며 보시하여 공양하는 것이요,
둘째 장엄은 몸이라는 부처님 국토니 모든 사람을 대하여 공경을 널리 행함이요,
셋째 장엄은 마음이라는 부처님 국토니 마음이 청정하면 곧 부처님 국토가 청정함이다.
그러니 생각생각이 항상 얻을 것이 없는 마음을 행함이 그것이다.
<해설> - 무각
부처님의 국토가 청정하다 함은 즉 불국토가 청정하다 함은 부처님의 국토는 형상이 없다 이겁니다. 모습이 없다는 것이지요,
즉 어떤 것으로써 장엄한다 하겠느냐 이거지요, 오직 선정(禪定)과 지혜(智慧)의 보배로서 장엄한다고 이름을 빌릴 뿐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장엄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 장엄은 세간장엄(世間莊嚴)이다.
세간이란 부처님 국토이니 불국토 장엄(佛國土莊嚴)이라 이겁니다.
절을 짓고, 경을 쓰고, 보시를 하며, 공양하는 것이 불국토 장엄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도 필요한 것이고 안하면 안됩니다.
그래서 무주상 행어보시가 분명하게 구체적으로 나와야 합니다. 즉 보시바라밀(布施波羅蜜), 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이라는 작용이 꼭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장엄은 부처님 몸이라는 부처님 국토로 신불토장엄(身佛土莊嚴) 즉 몸(身)을 장엄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 대하여 공경을 널리 행하는 거지요, 즉 사람들을 널리 공경하라는 말입니다.
이것부터 하셔야지요! 저기 마른 똥막대기가 부처인줄 알면 공경을 하겠지만, 그런데 일단 사람에게 먼저 해봐라 이겁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공경을 하는 것이 장엄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출발하면 나머지는 다 거기에 파생된 말이고 형상이거든요, 하나를 알면 전체를 다 꿰어서 통해버립니다.
공부라는게 하나만 알면 나머지는 다 통해 있습니다.
그래서 일관지(一觀智)라고 하잖아요, 하나로 꿰뚫어져 있다고.
하나가 하나로 따로 있지 않습니다. 절대로!
하나가 전체를 통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즉일체(一卽一切)고 일체즉일(一切卽一 입니다.
원래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걸 구체적으로 말씀하시잖아요.
모든 사람을 대하여 공경을 널리 행함이다.
세 번째 장엄은 마음이라는 심불토장엄(心佛土莊嚴)이다.
정리하면
세간불토장엄(世間佛土莊嚴), 신불토장엄(身佛土莊嚴), 심불토장엄(心佛土莊嚴)이다
마음이 청정하면 곧 부처님 국토가 청정함이다.
念念常行無所得心이 是也니라
념념상행무소득심 시야
생각생각이 항상 얻을 것이 없는 마음(無所得心)을 행함이 그것이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항상 생각생각이 무소득심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즉 항상 하는 바가 없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무소득심이 뭐냐? 깨달음입니다.
얻을 바 없는 마음이 이미 깨달은 마음입니다.
무소득심이라는 것이 실천하는 명제이지만 마지막 결론도 무소득심입니다. 차이가 없어요.
우리는 항상 얻을 바가 없어야 합니다. 그러니 함이 없이 하십시오.
본래 얻을 바 없이 작용할 줄 알면, 안팎이 맞아 떨어집니다.
즉 깨달음이 아주 분명해진다는 것입니다.
【冶父】
孃生袴子요 靑州布衫이로다
양생고자 청주포삼
<해설> - 무각
어머니가 만든 속옷이요 청주(靑州)의 베적삼이다.
【說誼】
孃生袴子는 純而無雜이라 然이나 唯古非今이요 靑州布衫은 儉而無華라 然이나
양생고자 순이무잡 연 유고비금 청주포삼 검이무화 연
但質無文이니 本始合體하야 文質이 彬彬하야사 始可名爲十成莊嚴이니라
단질무문 본시합체 문질 빈빈 시가명위십성장엄
<번역>
어머니가 만들어 준 속옷은 순수하여 섞임이 없다.
그러나 오직 옛것이어서 이제 이것은 못 되며 청주(靑州)의 베적삼은 검소하여 화려하지 못하다.
그러기에 오직 바탕뿐이고 본체가 없다.
그러니 본각과 시각이 합하여서 본체와 바탕이 아름다워야 비로소 완전한 장엄이라 하겠다.
<해설> - 무각
어머니의 속옷은 순수하여 섞임(잡됨)이 없다. 양생고자는 순이무잡이라 했습니다.
아주 순수하여 잡됨이 없다는 겁니다. 어머니가 자식을 생각할 때 거기에 분별이 붙지 않지요, 그냥 순수하게 자식을 바라보잖아요!
그러니까 어머니 마음이 바로 부처님 마음이라는 겁니다.
그 순수한 마음이 부처님 마음이거든요, 그러니 여기서 어머니의 속옷은 보이지는 않지만 본래 갖추어져 있고 순수하여 잡됨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나 오직 옛 것이어서, ‘옛’ 이라는 것은 본체를 말합니다.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이고, 자기가 나온 곳입니다.
여기서 옛 것이어서 라는 말은 지금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즉 오직 옛 이요 지금은 아니다(유고비금 唯古非今). 이겁니다.
청주의 베적삼은 검소하여 화려하지 못하다.
이것은 아주 검소하여 오직 바탕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청주의 베적삼은 바탕이고 문체가 없다(무늬가 없다.)
그러니 본각과 시각이 합하여서 무늬와 바탕이 아름다워야 비로소 완전한 장엄이라 하겠다.
무늬와 바탕이 아름다워야! 무늬도 있어야 된다는 것이고,
즉 작용도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고요히 쉬는 것만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앞에서 육조 스님이 선정과 지혜의 보배보서 장엄한다고 말했듯이.
여기서도 똑같이 본체와 작용이라고 한 것입니다.
본체만 가지고는 안되고 작용까지 들어가야 이것이 아름다워서 완전한 장엄을 할수 있다는 것입니다.
【冶父】
抖擻渾身白勝霜하니 蘆花雪月이 轉爭光이로다 幸有九皐翹足勢하니
두수혼신백승상 노화설월 전쟁광 행유구고교족세
更添朱頂又何妨가
갱첨주정우하방
<번역>
온 몸을 털어 버려 서리보다 더 희니 갈대꽃과 눈과 달이 서로 빛을 다투네, 다행히도 구고(九皐)에 발을 재겨 디디는 학이 있으니 붉은 정수리를 더 보탠들 무엇이 방해로우리오.
<해설> - 무각
온 몸을 털어 버려 서리보다 더 희니, 온 몸은 털어버리니 서리보다 더 희더라는 겁니다.
갈대꽃과 눈, 달이 서로 빛을 다투네, 여기서 갈대꽃, 눈, 달이라고 했습니다.
하늘에 달이 떠 있고, 눈이 하얗게 내렸고, 거기에 하얀 갈대꽃이 바람에 서있다는 말입니다.
알고보면 전부다 하얗지요! 눈도 하얗고, 달빛도 하얗고, 갈대꽃도 하얗고 이게 본체와 모습과 작용이 다 하얗다는 겁니다.
온 몸을 털어버리니 서리발보다 더 희고 갈대꽃과 눈과 달이 서로 빛을 다투네, 다행히 구고(九皐 깊은 못)에 달을 재겨 발돋움할 기세가 있으니(행유구고교족세 幸有九皐翹足勢), 깊은 못에 빠져 있는데 거기서 발돋움할 기세가 있으니까 뛰어 오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기세가 있으니 다시 붉은 이마(붉은 정수리)를 더 보탠들 무엇이 방해로우리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보통 태고종 스님들이 좋아한다고 하더라고요.
붉은 이마를 더한들 무슨 방해로울게 있느냐! 이 말에 붙여서 말이지요,
그런데 이런 뜻이 아니고,
아주 깊은 못에 있다 하더라도 발돋움할 기세만 있으면 어떻게 작용하든 다 법이 된다는 겁니다. 여기서 붉은 이마라고 하더라도 법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학을 보면, 학의 정수리에 붉은 무늬가 있는데 이것은 맨살입니다.
이렇게 붉은 이마(붉은 정수리)를 더 보탠들 무엇이 방해로우리오!
그래서 처음에 온 몸을 털어버리니 서리보다 더 희고라고 한 것이고.
여러분이 자기 마음 닦는 일(쉬는 공부)을 해야하는 것입니다.
즉 온 몸을 털어버려 서리보다 더 하얗게, 달리 말하면 아주 깨끗하게 닦아야한다는 것이고,
그리고 나면 갈대꽃과 눈과 달이 전부다 하얗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체도 하얗고 모습도 하얗고 작용도 하얗게 되는 것입니다.
즉 체(體), 상(相), 용(用)이 다 하얗게 되잖아요, 그래서 서로 빛을 다툰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행히 구고(九皐 깊은 못)에서 발돋움할 기세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 기세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고, 얼마든지 거기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는게 아니고 항상 뛰어오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이로, 이런 사람은 붉은 이마가 더 붙더라도 한 생각이 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하든지 자유스러워지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 말을 한 것이고 이게 바로 불국토 장엄이라는 것입니다.
【說誼】
功中就位에 脫盡廉纖이요 位裡轉身에 更添光彩로다
공중취위 탈진염섬 위리전신 갱첨광채
<번역>
공덕을 지어 지위에 나가서 염섬(廉纖)한 것을 다 없앴거든 지위에서 다시 몸을 돌리고서야 광채가 더 나리라.
<해설> - 무각
공덕을 지어 지위에 나가서 염섬(廉纖 자질구레한 것)한 것을 다 없앴거든, 지위(자기의 분상)에서 다시 몸을 굴리고서야 광채가 더 나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전신(轉身 몸을 굴림)해야 광채가 더 난다고 했는데 광채가 더 난다는 것은 완전하다는 것입니다.
전신(몸을 굴린다)에 대한 경허스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스님이 하안거 해제때 경허 스님에게 물었답니다.
“어떤 것이 진정으로 참구하고, 진정으로 깨닫는 소식인고!”
그러니까 고봉 화상이 “남산에서 구름이 일어나니 북산에서 비가 내린다.“고 했는데, 이것이 무슨 뜻인가 라고, 경허 스님에게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여기서 경허스님이 대답을 참 신기하게 했습니다.
비유하면 그것은 마치 자벌레가 한 자(尺:자 척)를 갈 때 한 바퀴를 굴러야 하는 것과 같다.
즉 전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에 대하여 여러분이 알겠는가? 대중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전신(轉身) 구를 전자에 몸 신자 거든요,
그러니까 한암 스님이 창문을 열었습니다. 그러면 담장이 보일거잖아요!
이때 함암 스님이, 담장이 눈앞에 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만한가요?
아는 것하고 자기가 실제로 참으로 그런가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적어도 대충이라도 알기는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아까 말한, 온몸을 털어버리니 희기가 서리보다 더 희고 갈대꽃과 눈과 달이 서로 빛을 다툰다. 이겁니다.
이렇게 되야 하거든요.
이렇게 되야 하는데, 한암 스님이 창문을 열고 밖을 보니 담장이 눈앞에 있습니다.
라고 답했습니다.
그때 한암 스님은 30대 초반쯤 되었을 겁니다.
그러니까 그 다음 날일 겁니다. 경허 스님이 한암 스님에게 원선아(한암 스님)는 개심(開心)의 단계를 지났다고 했습니다.
열 개자에 마음 심자로 마음 전체가 열렸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아직 체(體)가 뭔지, 용(用)이 뭔지는 모르는구나! 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공부의 단계를 반은 인정하고 반은 인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런 부분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여기서 온몸을 털어버려서 서리보다 더 희게 되야 하는 것입니다.
온 몸이라는 것은 여러분이 보고, 듣고, 말하는 일상인 우리의 삶을 말합니다.
이 삶(닥치는 것)을 다 털어버리니 이 몸과 마음속의 중생들을 잘 굴려서(轉身)보살로 화하게 만들 것이냐 이겁니다.
앞에서 말한 미용실 보살님들도 그렇게 작용했잖아요! 그런데 그분이 공부가 다 됐다고 하는 것은 아니지요. 안됐잖아요, 공부하는 과정인데 그쯤 했다는 것입니다.
그쯤 하니까 그 정도 작용은 하잖아요! 신기한 작용이라도.
공부가 다 되야 작용하는게 아니라, 공부를 그쯤 하면 그만큼 작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지금 스님들은 그냥 공부도 했으니까 이것 보다는 넘어가야 겠지요,
그래야 누구나 다 평등한 것입니다.
이 이치를 아는것도 중요한 것이지만, 아는 것을 실제로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 즉 신(信), 해(解), 행(行), 증(證)이 같이 돌아가야 하는 것이고, 그래야 자기거라고 감히 할 수 있고 작용하게 됩니다.
여기서 전신이라는 말이 중요한 말입니다. 몸을 굴려라!
다시 말하지만 경허 스님은 자벌레가 한 자(약 30.3cm)를 갈 때 한 번 굴러야 하는 것과 같다.
그러면 ‘남산에서 구름이 일어나니 북산에서 비가 내린다’는 이 말이, 전신(구르는 것)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즉 남산과 북산이 둘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남산이 따로 있지 않고 북산이 따로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남산에서 구름이 일어나니 북산에서 비가 내리는 도리를 여러분이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신, 구, 의가 딱 맞아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즉 알음알이로 알아가지고는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다.
그러니 한바퀴를 굴러야 된다.
한바퀴를 구른다는 것은 한 번 푹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푹 쉰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진짜 죽게되고, 쉬면 멍청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남산과 북산이 둘이 아닌 도리를 확연히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 이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어느 정도 눈에 걸리게 됩니다.
이럴 때 내가 왜 이렇게 걸어가는지 조금은 감을 잡아야 되는 거지 말로만 백날 해봐야 소용 없습니다.
그래야 한 바퀴를 구른다는 것, 푹 쉰다는 것. 이것이 온 몸을 털어버려 서리보다 더 희다는 것,
온 몸을 털어버리는 것은 모든 분별을 다 놓아야 털어버리는 것이고, 이러면 갈대꽃과 눈과 달이 서로 빛을 다투듯이 본체도 하얗고, 진리의 모습도 하얗고, 작용도 하얗게 되어 서로 빛을 다투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다행히 깊은 못에 있어도 발돋움할 기세가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경계에 물들지 않으므로 붉은 이마를 더 보태더라도 방해로울게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한 생각을 내는 것이 다 법에 적중이 된다는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