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초, 영국의 남자 노동자들은 하루 15시간씩 일했단다. 아이들도 12시간 남짓 일해야 했다.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1872~1970)은 믿기지 않는다는 투로 이런 사실을 일러준다. 하지만 우리에게 이런 모습은 별스럽지 않다. 우리의 직장 생활은 야근과 특근의 연속이다. 하루 15시간 일하는 게 뭐 그리 대수란 말인가. 아이들은 어떤가? 대한민국 청소년들은 새벽 별을 보며 집 문을 나선다. 그리고 밤늦게 까지 야간 자율학습에 시달린다. 공부도 일종의 ‘노동’이다. 우리 아이들에게 12시간 정도 ‘일’하는 생활이란 특별할 것이 없다.
왜 그대는 치열하게 아득바득 일을 하는가? <출처: gettyimages>
이런 처지이기에 러셀의 [게으름에 대한 찬양]은 더 울림이 깊다. 그가 지적하던 과거 유럽의 문제가 우리에게는 현실인 까닭이다. 이 글에서 러셀은 우리에게 묻는다. “왜 그대는 치열하게 아득바득 일을 하는가?”, “왜 그대는 일자리를 잃을까 전전긍긍하는가?” 이런 물음을 받으면 화가 날지도 모르겠다. 왜냐고? 우리들 대부분은 가늘고 모진 ‘을’의 인생을 살 운명이다. ‘갑’이 나를 일터에서 내친다고 해보라. 나는 나락으로 추락해버릴 것이다. 그러니 어찌 아득바득 일하고 공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안정적인 삶을 살려면 ‘갑’이 되거나, 적어도 갑에 휘둘리지 않을 ‘슈퍼 을’ 정도는 되어야 한다. 이런 처지에서 러셀의 물음은 ‘금 수저 물고 태어난 이’의 현실 모르는 소리처럼 다가온다. 실제로 러셀은 영국의 명문 귀족이기도 했다.
그러나 답답한 마음을 누르고 러셀의 말에 좀 더 귀 기울여 보자. 러셀에 따르면, 우리가 일에 절절하게 매달리는 까닭은 생계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여가를 어떻게 보낼지 모르는 데 있다. 이 무슨 생뚱맞은 소리일까?
러셀의 주장은 이렇다. 현대 산업 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했다. 제 1차 세계대전 무렵에 이미, 유럽의 산업은 노동자들이 하루 4시간만 일하고도 모두가 생계를 해결할 정도로까지 나아갔다. 그렇다면 근무시간을 줄이고 일자리를 쪼개어 나누어야 하지 않았을까? 안타깝게도, 그 때나 지금이나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여전히 죽어라고 일한다. 그럴수록 상품은 넘치도록 생산된다. 물자가 시장에 가득 찬 상황, 상품이 제대로 팔릴 리 없다. 기업은 할 수 없이 일자리를 줄인다. 인건비를 아끼기 위해서다.
이 상황에서 사람들의 삶은 두 갈래로 갈린다. 죽도록 일해야 하는 몇몇 사람과 일거리를 얻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 이들이 꾸려가는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하다. 한 쪽은 엄청난 노동 강도에 비명을 지르고, 다른 한쪽은 일자리를 얻기 위한 신산스러운 노력을 이어간다.
만약 튼실한 일자리를 얻기를 포기하면 어떨까? 프리터(freeter)처럼 욕심을 버리고 최소한의 생계에 만족한다면 근근하게 생활은 꾸릴 수 있지 않을까? 안타깝게도 러셀은 이는 무척 어려운 꿈이라고 말한다. 사회의 복지수준이 형편없어서가 아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남는 시간을 버터 낼 능력이 없다는 데 있다.
다시 19세기 영국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노동 강도가 무척 높았음에도, 이를 비난하는 목소리는 높지 않았나 보다. 당시, 일은 방탕한 생활을 막는 ‘도덕 처방전’처럼 여겨졌다. “일이 어른들에겐 술을 덜 먹게 하고, 아이들에겐 못된 장난을 덜 하게 만들어 준다.” 하긴, 이런 논리는 우리의 ‘강제 야자’ 주장과 별다르지 않다. 야간 자율학습 없이 학생들을 풀어주었다고 해보라. 대부분은 저녁 시간을 하릴 없이 날려 버릴 것이다. 몇몇은 아예 나쁜 무리에 섞여 ‘탈선’해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니 강제로라도 학교에 잡아 놓고 공부시키는 것이 최선이다!
직장인들의 휴일을 떠올려 보자. 무엇을 할지 몰라 혹은 귀찮아서 그냥 카우치 포테이토가 되는 경우가 많다. <출처: gettyimages>
강제 야간 자율학습의 논리는 직장 생활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가난뱅이들이 휴일에 뭘 한다는 거지? 그 사람들은 일을 해야 한다고!” 어떤 공작부인이 러셀에게 했던 말이란다. 그녀는 근로자를 위한 공휴일이 정해지자 분을 못 참고 이렇게 내뱉었단다. 공작부인의 주장이 꼭 빈말만은 아니다. 직장인들의 휴일을 떠올려 보라. 주변에서 TV 리모컨을 쥐고 소파에서 빈둥대는 ‘카우치 포테이토(couch potato)’들을 찾기는 어렵지 않다. ‘이번 주말에 뭘 하지?’하는 행복한 고민(?)에 난감해 하는 가장(家長)들도 많지 않던가.
나아가, 하루에 4시간만 일하고 나머지는 하고 싶은 일을 해도 되는 세상이 왔다고 해보자. 그러면 사람들은 행복해할까? 되레 지루함이 일상을 가득 채울지 모른다. 게임이나 도박, 술 등에 빠져드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사회복지가 잘 된 북유럽 국가들에서처럼 말이다. 사람들이 일터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면서도, 일이 없을 때의 헛헛함을 두려워하는 이유다.
이쯤 되면 ‘여가를 보내는 능력’을 강조하는 러셀의 주장이 솔깃하게 다가온다. 왜 우리는 아득바득 일에 매달릴까? 여기에는 돈이 아쉬운 것만큼이나 ‘여가’가 두려운 마음도 있다. 은퇴자들조차도 무한정 주어진 자유로운 시간을 되레 버거워 한다. 일자리로 우리를 쥐고 흔드는 ‘갑’에게 휘둘리지 않으려면, 스스로 나의 자유 시간을 가꿀 ‘능력’을 길러야 한다.
삶을 즐기는 능력을 갖추는 데도 노력이 필요하다. 현대인들은 심지어 모여서 놀 줄도 모른다. 러셀에 따르면, 옛날 농부들은 여가가 생겼을 때 함께 춤추고 어울렸다. 여러 놀이감을 스스로 만들며 즐기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TV 속의 연예인들이 ‘대신 놀아주는 모습’을 지켜볼 뿐이다. 사람을 만나고 여행을 가는 대신, 화면 속에서 남들이 대신 수단을 떨어주고 여러 곳을 돌아다니는 것을 보며 즐거워한다. 이렇듯 많은 이들은 여가를 ‘소비’할 뿐, 이를 가꿀 능력은 없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배우는 것이 술을 마시거나 사랑하는 행위와 마찬가지로 ‘삶의 기쁨(joie de vivre)’이였다! <출처: gettyimages>
여가를 잘 보내는 능력은 어떻게 기를 수 있을까? 러셀은 배움의 즐거움을 강조한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배우는 것이 술을 마시거나 사랑하는 행위와 마찬가지로 ‘삶의 기쁨(joie de vivre)’이였다!” 인생이란 돌격하는 기병대 같아야 한다고 외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한 쪽에만 빠져 있는 삶은 다른 가능성을 보지 못한다. 이들은 일에서 밀려나면 자기 인생도 끝날 것처럼 두려워한다. 그래서 러셀은 어른에게도 ‘놀이’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한 발 물러서서 일 밖에서 즐거움을 누릴 때, 우리는 세상을 보다 객관적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 뿐 아니다. 일상에서는 속상한 일이 숱하게 벌어진다. 꼭 타야 하는 기차를 놓치기도 하고, 사람들과 사사건건 부딪히기도 한다. 상황에 폭 빠져 있는 상황에서는 작은 괴로움이 세상의 전부인 듯 다가올지 모른다. 하지만 지식과 배움을 갖춘 이는 다르다. 인류의 역사 전체의 관점에서 내가 기차를 놓친 사건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떠올려 보라. 지금 내가 겪는 심각한 갈등이, 과거 영웅들이 벌였던 투쟁만큼이나 가치 있을까? 이렇듯 혜안(慧眼)을 갖춘 사람의 삶은 훨씬 여유롭고 느긋하다.
“필요한 것은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특정한 정보가 아니라 전체의 시각에서 본 인생의 목적에 관한 지식이다. 여기에는 예술, 역사, 영웅적인 사람들의 인생 접하기, 우주 차원에서 볼 때 인간은 한심할 정도로 우연적이고 하루살이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대한 이해 등이 포함된다.”
- 버트런드 러셀 지음, 송은경 옮김 [게으름에 대한 찬양] (사회평론, 2005)
살기 힘든 세상이다. 공공 도서관 열람석에는 공부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대부분은 입시참고서, 어학 학습서, 취직 수험서 등을 ‘열공’하고 있다. ‘무엇을 하기 위해’ 하는 공부가 대부분이다. 이런 공부는 ‘무엇’을 위해 쓰이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 따라서 학습량이 많아질수록 세상의 부름에 더 애달 수밖에 없다.
반면, ‘그 자체를 위한 공부’는 어떤가? 시(詩)를 읽으며 풍부한 감성을 즐기고, 철학의 정치(精緻)한 이론을 즐기는 이들은 좀처럼 세상에 휘둘리지 않는다. 이들은 ‘게으름’을 제대로 누릴 줄 안다. 느긋하게 좋아하는 일을 할수록 영혼은 강하고 튼실해 지는 까닭이다.
견실한 행복을 누리고 싶은 ‘을’이라면 햇빛 한 줌 만으로도 느긋하게 편안할 수 있었던 거지 철학자 디오게네스의 자세를 배울 일이다. <출처: gettyimages>
물론, 이런 능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미식가의 혀를 갖출 때만큼이나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 세상에 휘둘리지 않는 ‘을’이 되는 데에도 성실한 수양이 있어야 한다. ‘갑을 위한 것’이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는 점만 다를 뿐이다.
그러나알렉산더는 온 세상을 손에 넣어야 행복할 수 있었다. 거지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햇빛 한 줌 만으로도 느긋하게 편안할 수 있었다. 세상의 ‘갑’들은 우리에게 알렉산더의 야망을 품으라고 외친다. 그러나 견실한 행복을 누리고 싶은 ‘을’이라면 디오게네스의 자세를 배울 일이다.
- 출간도서
- 도서관 옆 철학카페 2014.12.24
- 『도서관 옆 철학카페』는 삶을 단단하게 만드는 사색의 공간이다. 세네카부터 알랭 드 보통까지, 걸출한 사상가들의 저작을 통해 일상에서 부딪히는 문제에 정면으로 맞선다. ‘소크라테스 대화법’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철학자이자 10여 권의 철학 교양서를 출간한 대표적 인문 저자인 안광복은 공들여 뽑은 35권의 책에서 삶의 불안과 고민을 덜어낼 창조적인 해법을 찾아낸다.
- 책정보 보러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