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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승리
오래 전 '사랑의 승리' 라는 외국의 단편소설을 읽은 일이 있다. 사랑하는 남녀가 등장한다. 남자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연인만을 사랑한다고 확신하고 있지만, 연인이 자기를 그만큼 사랑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늘 의심한다. 그래서 기회 있을 때마다 남자는 애인에게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하느냐고 묻고 다짐한다. 그럴 때마다 여자는 자신이 진정 사랑하고 있노라고 답한다.
그래도 남자는 확신이 철떡같이 서지 않는다. 남자는 티끌만한 의심도 없이 여인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었다. 어느날 남자는 애인을 데리고 까마득한 벼랑 위로 갔다. 남자는 가장 위험한 순간에 과연 애인이 전혀 다른 생각없이 자기를 사랑하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남자는 벼랑 근처에서 애인에게 자기를 사랑하느냐고 물었고 여자는 그렇다고 답했다. 그래도 믿기지 않아 남자는 저밑에 일렁이는 파도가 보이는 벼랑 끝으로 애인을 끌고 가서 다시 자기를 사랑하느냐고 애인에게 다그쳤다. 여자는 왜 그러느냐고, 이것이 무슨 짓이냐고 남자를 꾸짖었다. 남자는 애인이 진정으로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자기는 애인밖에 없노라면서 애인을 껴안고 벼랑 아래로 떨어졌다.
여기에서 이 남자의 행동은 사랑의 승리가 아니라 사랑의 포기이다. 사람들은 보통 이기적인 자기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사랑이라는 말을 둘러댄다. 나와 너가 동등할 때 사랑이라는 말이 의미를 가진다. 더 나아가서 나를 희생할 때 비로소 사랑의 승리가 열매 맺는다.
꽤 오래된 이야기이다. 심심치 않게 스캔들에 오르내리던 남녀 영화배우 부부가 이혼을 선언하여 화제거리가 되었다. 이혼하면서 그들이 한 말이 걸작이었다.
"우리는 서로 너무 사랑하기에 헤어졌다. 비록 헤어진다고 해도 우리의 사랑은 변함 없을 것이다." 바로 이 말이 그들의 이혼선언을 대변했다.
우리는 사춘기 청소년 시절부터 사랑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 사랑하는 이에게 편지를 쓰다가 찢고 또 쓰다가 찢으면서 수없는 밤을 지새우기도 한다. 아마도 청소년기처럼 심한 사랑의 열병을 앓는 시절도 드물 것이다.
그러나 사랑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 확신을 가지고 정확히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자기성찰이 없는 사랑은 다분히 충동적이고 본능적인 욕망이며 또한 이기적인 욕망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목숨을 다해서 죽도록 사랑한다고 애걸복걸하던 남자가 자신의 욕망을 다해서 죽도록 사랑한다고 애걸복걸하던 남자가 자신의 욕망을 거절당할 때는 여자를 학대하고 심한 경우에는 살인까지 저지르는 일이 있다.
참다운 사랑은 조화로운 인간관계와 인간상호의 발전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사랑은 신뢰와 이해와 관심과 배려라는, 여러 가지 요소로 구성되는 복합적인 인간의 노력에서만 비로소 진주보다도 더 영롱한 빛을 발한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요즈음 세상을 일컬어 사랑이 메마른 시대라고들 말한다. 사랑이나 선함, 용기, 행복 그리고 희망과 같은 말들은 우리들에게 힘이 나게 하며 자신감을 가지게 하고 또 아늑하고 포근한 느낌을 가져다 준다. 그런가 하면 이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가져다 주는 말들이 있다. 죄악, 미움, 좌절, 불행 그리고 절망과 같은 말들은 우리를 어둡게 하고 침울하게 만든다.
우리는 일생을 살아가면서 무수하게 많은 여러 가지 말에 익숙해 있고 또 그 말들을 사용한다. 무수히 많은 말들 가운데서 우리가 전 생애를 통해 누구나 가장 많아 접하는 말은 아마도 '사랑'일 거라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유행가는 남자와 여자의 사랑을 노래한다. 그런가 하면 대부분의 소설이나 시도 남녀간의 애틋한 사랑을 주제로 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남녀간의 사랑이란 위대한 힘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새로운 생명을 창조해내는 고귀한 힘이기 때
문이다. 밤잠을 설치고 방황하면서 마구 타오르는 청소년들의 사랑도 역시 단순한 불장난만은 아니다. 그들의 사랑 역시 생명을 탄생시킬 수 있는 위대한 힘인 것은 사실이다.
사랑을 철학적인 의미에서 제일 먼저 말한 사람은 고대 희랍의 철학자 엠페도클레스이다. 그는 세계를 생기게 하는 근원물질이 네 가지 있는데 그것들은 각각 물, 불, 공기, 흙이라고 했다. 그는 이것들이 혼합되어 만물이 생기고 또 이것들이 분리되면 사
물이 소멸되어 간다고 믿었다. 그런데 엠페도클레슨느 물, 불, 공기, 흙을 혼합되어 만물이 생기고 또 이것들이 분리되면 사물이 소멸되어 간다고 믿었다. 그런데 엠페도클레스는 물, 불, 공기, 흙을 혼합시키는 힘을 사랑이라고 부르고 그것들을 분리시키
는 힘을 미움이라고 말했다. 결국 사랑은 창조의 힘이고 미움은 파괴의 힘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인간의 심층의식을 힘으로 파악했다.프로이트는 심층의식이, 서로 반대되는 두 가지 힘으로 되어 있다고 보았다. 하나는 건설하려는 힘이고 또 하나는 파괴하려는 힘이다. 이들 두 힘은 하나의 심층의식을 이룬다.
말하자면 우리의 심층의식은 이중적인 셈이다. 그런데 사랑과 미움이 균형이 일그러지면 비정상적인 인격을 가진 인간이 된다는 것이 프로이트의 생각이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사랑과 미움이 합쳐진 것이 바로 심층의식이다. 삶을 건설하려는 경향은 사랑의 힘에서 생기고 파괴하려는 경향은 미움의 힘에서 생긴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사랑이라 하면 흔히 남녀간 사랑만을 생각하지만 자기도취적인 나르시시즘의 사랑, 친구간의 사랑, 형제간의 사랑, 모성애 등과 같은 사랑도 분명히 사랑이다. 더 나아가서 인류애나 종교적인 사랑은 그야말로 사랑의 극치이다. 나자신에 대한 사랑은
가장 좁고 미약한 사랑이지만 인류애나 종교적인 사랑은 우리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넓고도 깊은 사랑이다.
이기적인 사랑
젊은 여성들에게, 사랑은 받는 것이냐, 아니면 사랑은 주는것이냐고 물으면, 사랑은 주는 것이라고 답하는 여성들의 수가 많지만, 이와 반대로 사랑은 받는 것이라고 답하는 여성의 수도 의외로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랑은 주는 것이냐 아니면 받는 이냐
는 물음자체의 설정이 잘못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사랑은 결코 받는 것이 아닐 것이다.
연애시절의 젊은이들을 보면 참으로 정겹다. 젊은 남녀는 연인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다. 모든 것을, 심지어는 생명까지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다. 그러나 결혼 후 얼마 지나면 왜태도가 돌변하는 것일까? 연애시절의 젊은 남녀가 가지고 있는 희생할 각오를 잘 살펴보면 그것은 문제가 많은 것이다. 젊은이들은 감정의 솟구치는 불덩어리를 주체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 감정의 노예가 되기 쉽다. 남자는 여자를, 그리고 여자는 각각 상대방을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존재로 미화시킨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연인 앞에서 "당신은 나의 태양"이니, "당신은 나의 생명"이니 온갖 아람답고 화려한 말로 연인을 찬양하며 연인 앞에서 비굴한 노예의 역할도 마다 하지 않는다.
"제 눈의 안경" 이라는 말이 있다. 젊은이는 자기 감정이 앞서기 때문에 항상 감정에 휩싸여서 살아간다. 따라서 연인의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고 자기 멋대로 자기의 감정이 만들어 놓은 이상적인 연인의 틀에 현실의 연인을 꿰어 맞춘다.
그러나 결혼하면 상황은 말 그대로 180도 달라진다. 젊은이들은 눈을 뜨게 되고 상대방이 결코 자기가 그리던 이상적인 남자나 이상적인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실망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서로 상대방에게 자기만을 위해 달라고 고집부린
다. 이러한 젊은이들의 사랑은 연애시절이나 결혼 후나 모두 자기도취적인, 곧 나르시시즘적인 이기주의적 사랑이다. 독일의 문학가 헤르만 헷세의 작품 가운데 '나르치스와 골트문트'라는 소설이 있다. 나르치스는 감성 중심으로 살아가는 청년이고 골트문트는 이성 중심으로 살아가는 청년이다. 이소설에서는 두 청년의 갈등과 조화가 잘 다루어지고 있다.
회랍신화에 나오는 나르시스는 물에 비친 자기 얼굴에 반하는 그러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나르시시즘은 자기중심적이고 자기도취적인 사랑을 말할 때 자주 인용되는 개념이다. 나르시스는 우리말로 수선화이다. 물에 비친 자기의 미모를 보고 그것이 자기인
줄 모르고 흠모하다가 물에 빠져 죽고마는 청년이 바로 수선화이다.
인간은 성숙해갈 때 아름다울 수 있다. 받기만 바라며 자기만을 고집하는 사랑은 어찌 보면 추하기까지 하다.
용기를 가지고 결단하여 이기적인 사랑의 껍질을 과감히 벗어던질 때 인간은 비로소 성숙한 사랑을 향하여 한걸음씩 발을 옮길 수 있을 것이다.
형제간의 사랑
요사이 특히 사회가 물질만늠주의의 풍토에 찌들면서 가정의 중요성이 점차 잊혀져 가고 있다. 물론 많은 남성들이 가정의 중요성도 알고 직장에서 지친 몸을 가정에서 푸근히 쉬고 싶어도 사회구조가 사람들을 가만히 놓아두지 않는다. 능률이 인간의 인
격을 대신하고 있따. 얼마나 인간성이 착한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일에서 정확한가가 중요하다. 또 얼마나 인간이 성실한가가 아니라 일의 성과가 얼마나 빠르고 또 양적으로 많은가가 중요하다.
어느 직장이든간에 한 인간이 얼마나 자발적이고 창조적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미 만들어져 있는 틀에 얼마나 잘 들어맞는가가 중요하다. 사람들은 요구되는 틀에 자기를 맞추기에 바쁘다 보니 매일같이 기진맥진 녹초가 된다.이런생활은 일생을 두고
반복하여 악순환을 거듭한다.
승진하면 또 승진해야 하고, 얼마만큼 돈을 벌면 또 벌어야한다. 그러다가 퇴직을 하거나 병에 걸리면 인생은 너무나도 허무하다고 생각하고 좌절하기 쉽다. 대부분의 남편과 아내는 그 어느 무엇보다도 가정을 위해서 모든일을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가정에 대해서는 결국 소흘히 하는 일이 많다.
나는 우리들 인간의 삶의 씨앗은 가정이라고 생각한다. 가정의 첫째 조건은 남편과 아내의 사랑이다.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신뢰와 관심, 배려와 노력이 없이는 가정이라는 씨앗이 튼튼할 수 없다.
남자와 여자의 사랑은 하늘에서 저절로 굴러 떨어진 것이 아니다. 남편과 아내는 끊임없이 배우고 노력해야 한다. 무엇을 배우고 오력하는가? 물론 사랑을 배우고 또 사랑하기를 노력해야 한다. 아기가 걸음마를 배우는 과정은 힘들고 지루하지만 아름답
다. 그 속에는 아기의 순수한, 살려는 노력이 잔뜩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부부간의 사랑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가정의 두번째 조건은 형제간의 사랑과 아울러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이라고 생각한 다.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은 물론 이고 형제간의 사랑이 부족한 가정을 보면 그 가정에는 불화가 그칠 날이 없다.
자매끼리, 또는 오누이끼리, 아니면 남매가 손에 손 잡고 어깨 나란히 나들이하는 모습은 정겹기 짝이 없다. 다 커서 시집 장가 가서도 형제 중에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형제들끼리 서로 힘을 합하여 어려운 형제를 성심 성의껏 돕는 것을 볼 때 흐뭇한 마
음을 금할 수 없다.
그러나 돈에 어두워 형제끼리 다투고 서로 법정에까지 서서물고 뜯는 것을 볼때는 왜 이다지도 삶이 허무할까하고 한숨을 내뱉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형제간의 사랑은 아름답기는 해도 제한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핏줄끼리만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랑이 끝없이 넓은 것이라면 형제간의 사랑은 역시 한계가 있다.
어머니의 사랑
6.25가 지난 지 얼마 안된 어느 겨울날 밤의 일이 갑자기 생각난다. 몹시도 추운 날이었다. 어찌나 추운지 두 귀에 감각이 없고 콧물이 얼고 발이 시려워 발을 동동 구르지 않으면 안되었다. 어머니와 나는 시장 점퍼 가게에 들렀다. 나에게 맞는 점퍼가 별
로 없었다. 너무 크거나 아니면 너무 비쌌다. 어머니는 그 춥고 매서운 날씨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 가게, 저 가게를 둘러보았다. 나는 그만 짜증이 나서 금방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발이 꽁꽁 얼어 들어와서 점퍼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다.
어머니는 추위도 잊은 듯 거의 한 시간이나 이리저리 헤매다가 결국 두툼한 털점퍼를 하나 발견하고 그것을 내게 입혀 주었다. 나는 그날 밤 어머니에게 심통을 부렸지만 그 점퍼덕분에 몇 년 간 겨울을 포근히 보낼 수 있었다.
6.25를 겪지 못한 세대들이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실감이나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우리도 여유가 생기면 6.25의 참담한 경험을 여러 가지 생생한 자료를 통해서 후손들에게 잘 알려줘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삶의 어두움과 참혹함을 알 때 인간은 보다 바
람직한 삶을 이끌어 나가야 할 이유를 보다 더 분명히 깨달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모성애는 위대한 사랑이다. 어머니의 사랑이나 아버지의 사랑이나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에 있어서는 다 마찬가지이지만, 모성애가 부성애보다 더 강하게 생각되는 것은 아마도 울산의 고통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든다. 출산의 고통은 동시에 생명
을 탄시키는 기쁨이기도 하다. 어머니가 되어본 여성만이 참다운 여성이라는 말의 뜻을 이해할 만 하다.
그러기에 어머니의 사랑은 무조건적이지만, 아버지의 사랑은 조건적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어머니는 직접 생명을 잉태하고 출산하지만 아버지는 단지 방관자의 입장에서 출산에 동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머니의 사랑이나 아버지의 사랑 모두 자깆중심적인 특징이 있다.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서 무조건 모든 것을 희생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신의 못다 한 이상을 자식을 통해서 실현시키려고 한다. 그러한 태도는 모두 제한된 사랑을 나타낸다.
모성애 또는 부성애가 참다운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자식을 부모와 똑같은 인격체로 깨달을 필요가 있다. 자식을 결코 부모의 소유물이나 수단이 아니다. 자식을 부모의 소유물이나 수단으로 생각할 경우 끔찍한 불행이 일어날 수있다. 자식이 부모를 학대
하거나 또는 부모가 자식을 구박하고 심지어는 죽이기까지 하는 끔찍한 일이 일어난다. 사랑이란 삶에 대한 인간의 끝없는 헌신과 노력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모성애와 부성애를 한껏 더 바람직한 사랑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친구간의 사랑
우리들은 알맹이가 없고 껍질만 멋있는 것이나 또는 그러한 사람을 가리켜서 "속 빈강정"이라고 하거나 또는 "공연히 북 치고 꽹과리 치고 다 한다"고 말한다. 매우 드물긴 하지만 나는 몇 년에 한 번 유명한 대학교수라든가 소설가 또는 정치가를 대할 기회가 있다. 그리고 어쩌다 방송국에 들를 때가 있으면 이름난 탤런트나 가수와 짧은 순간 함께 자리할 기회가 있다. 물론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경우 말할 수 없는 허무함을 느끼게 된다. 나도 평범한 사람이기 때문에, 아마도 평소에 유명한 사람들에 대한 기대감이 너무 컸기 때문에 그러한 허무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평소에 마음속으로 기대하고 존경했던 유명인사의 행동이 지나치게 오만불손하고 자만심에 빠져 있는 것을 볼 때 결국 사람이란 다 비슷한 것이고, 유명해질수록 그만큼 더 인간성은 알맹이가 없어지고 빈 껍질만 남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아마도 자신의 삶을 가꾸고 꾸미는 노력, 곧 사랑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한 사랑 중의 또 하나는 친구간의 사랑이다. 친구간의 사랑은 핏줄에 묶인 사랑이 아니기에, 그리고 오래오래 은은한 향기를 간직하고 지속될 수
있기에 아름답다.
보통 어떤 사람의 됨됨이를 알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친구를 보면 된다고들 말한다. 유유상종, 곧 끼리 끼리 모인다는 뜻에서 그런 말이 나왔을 것이다. 청소년들을 보면 우정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잘 알 수 있다. 청소년들뿐 아니라 어린아이나 어른들의 경우에도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어울릴 것이다. 우리들은 친구를 통해서 가정의 우타리에서 겪지 못한 소중한 체험을 배우며 삶을 넓혀가고 또 삶의 깊이를 더 깊게 할 수다 .
그러나 우정도 흔히 폐쇄적일 경우가 많다. 젊은이들의 우정은 더할 수 없이 소중한 것이지만 그 반면에 쉽사리 깨지고 상처받을 수 있다. 우정 또한 자기중심적인 요소가 강하기 때문에 친구가 자기에게 잘 대해줄 때는 모든 것을 다 바칠 각오가 되어 있지
만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서운하게 대하면 순식간에 뾰루퉁해지기 쉬운 것이 우정이다. 일생을 통해서 몇 사람의 친한 친구를 가진다는 것처럼 값진 일도 없을 것이다. 눈을 감고 조용히 앉아서 내 친구들의 모습을 그려본다. 그 오랜 시간에 걸친 친구들과
의 수많은 대화나 언쟁 그리고 화해와 만남을 생각하면 절로 흐뭇한 웃음이 나온다.
그러나 우정에도 역시 한계는 있다. 끼리끼리 모이다 보면 친구가 아닌 사람을 소흘히하고 심한 경우에는 패거리를 만들 우려도 있다. 우정도 역시 다른 종류의 사랑과 마찬가지로 삶을 충실히 하려는 인간의 근본적인 노력으로서의 사랑을 바탕으로 깔아
야만 진정한 우정으로 빛날 수 있다.
자기애
남자와 여자를 가리지 않고 외모만을 치장하는 데 유난히 골몰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여성은 외출 전 화장하는 데 적어도 한 시간 이상 걸리지 않으면 안된다고 한다. 또 어떤 남성을 외출 전에 반드시 얼굴과 머리손질을 하고 일일이 옷과 넥타이 및 양말의 색깔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이와 같은 유형의 사람들은 나르시시즘적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러한 유형의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그 어느 누구보다도 자기를 끔찍이 아끼며 사랑한다. 그러나 또 반대로 말하면 매우 이기적인 성격의 사람들이다. 그
렇기 때문에 그러한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들보다 우선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며 자기 자신의 판단에 따라서 모든 사태를 보고자 하기 때문에 독선적인 성격을 가지기 쉽다. 고대 회랍신화에 나르시스가 등장한다. 나르시스라는 청년은 물에 비친 자신의 너무나도 아름다운 모습에 반해서 그 아름다운 사람과 결합하려는 욕망 때문에 결국 물에 빠져서 죽고, 그가 서 있던 자리에 피어난 꽃이 수선화라고 한다. "자기를 버리는 자는 살고 자기를 구하는 자는 죽는다"는 말이 있다. 또 "우물 안 개구리"라는
말도 있다. 자기만 본다는 것은, 말하자면 남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또한 남을 이해하거나 남과 공감하지도 못한다는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그리고 나 지신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행동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심할 경우 오직 나만의 욕망을 해우기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행동할 경우가 많다. 그것은 바로 이기적인 사랑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이기적인 사랑은 나만을 위하다가 나까지 망치는 결과를 가져온다. 경상도니 전라도니 지방색을 강조해서 같은 지방 출신끼리 똘똘 뭉치는 것이나, 혈연이나 가문중심으로 패거리를 만드는 것이나 또는 출신학교별로 뭉치는 것 등은 다분히 이기적
인 사랑을 바탕에 깔고 있다.
나만 생각하고 내 이익만 원하는 사람은 남에게 폐를 끼치며 동시에 공동생활을 깨뜨리게 된다. 그러면 결국 그 자신의 이익도 그를 멸망의 구덩이 속으로 몰아넣을 것이다.
소크라테서는 "너 자신을 알라"고 했다. 나는 이기적인 사랑과 자기애를 구분하고 싶다. 이기적인 사랑이란 본능적 욕망충족에 가까운 것인 반면에, 자기애란 인간으로서의 자신에 대한 사랑을 말한다. 참다운 인격주체로서의 자기 자신을 사랑할 때 누구
든지 타인을 자기와 동등한 인격으로 생각할수 있다. 그리고 자기애에 성실한 사람은 자신의 삶을 책임지며 자신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할 수 있다.
한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결단하고 책임지는 개인주의에 충실할 수 있다.
인류애
미국의 어떤 심리학자에 의하면 인간의 도덕감정은 대체로 13세 때 정지한다고 한다. 우리들이 여러 사람을 접하여 보고 또 나 자신을 잘 성찰해 보면 그 심리학자의 말이 상당한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우리는 누구든지 자기만을 사랑하며 이기적인 사랑에 충실하기 쉽다. 그리고 형제간의 사랑이나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 친구들간의 사랑은 당연한 것으로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냉정하게 한 인격 주체로 대하며 또한 그렇게 사랑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흔히 우리는 자기 자신의 핵심되는 부분은 마주치지 않고 가능하면 피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사실, 삶에 어느 정도 본받을 흔적을 남긴 사람들은 어느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냉혹하리만큼 자기 자신을 예리하게 성찰한 사람들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자신의 장점만 바라보며 키워가고 단점은 될 수 있는 한 보지 않고 피하려고 한다. 그 사이에 내 속에 꿈틀거리는 단점은 순식간에 커져서 끔찍한 괴물의 모
습으로 나 자신까지도 흉칙하제 만들어 버리고 만다.
정신분석학자이면서 사회철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현대인의 특징을 일컬어 "자유로부터의 도피"라고 한다. 이 말은 금방 듣기에는 잘 이해가 가지 않지만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그 뜻이 곧 밝아진다. 자유란 인간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단하는 행동의
힘이다. 그러나현대인은 언제나 부모와 사회 그리고 남들이 하라는 대로 습관적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자신의 일을 스스로 결단해서 행동하는 것이 너무나도 힘들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유가 지나치게 벅차고 힘들어서 남이 내 코를
꿰어서 끌고 가기를 바라면서 있는 힘을 다해서 자유로부터 도망가려고 한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인격주체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남들도 역시 인격주체로 사랑할 줄 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자기애는 인류애와 똑같은 차원에 있는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기 안에 가득 찬 기쁨과 즐거움만 보지 않고 자기 안에 깊이 숨어 있는 고통과 번민을, 그리고 온갖 단점을 직시하는 용기를 가질 수 있을 때 인간은 비로소 자기 자신의 삶을 새롭게 창조할 수 있는 자신감을 가진다. 그러한 인간만이 타인을 나와 똑같이 생각할 수 있으며 타인의 기쁨을 같이 나누고 또 타인의 번뇌와 한숨을 함께 나눌 수 있다. 모든 인간에게 대하여 공정하고 공평한 인류애를 실천한 예들은얼마든지 있다. 소크라테스는 길거리에서 아무런 보수도 받지 않고 젊은이들에게 정의와 선을 가르쳤다. 공자와 석가모니 그리고 예수도 마찬가지이다.
사랑이 깊어지고 넓어질수록 그것은 온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순화된다. 우리들 각자가 자신의 심연을 통찰할 줄 알 때 비로소 우리는 인류애의 고귀함을 몸소 체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랑의 숭고함
자기애와 인류애 그리고 종교적사랑은 모두 다 사랑의 극치로 그것들은 숭고한 사랑이다. 자신의 삶을 소중히 아끼며 끊임 없이 그것을 갈고 닦아나가는 사람들앞에서 우리는 숙연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또 자신을 돌보지 않고 밀림에 들어가 흑인의 아픔
을 치료하는 슈바이처라든가 맨발로 빈민굴을 뛰어다니며 헌신하고 봉사하는 테레사 수녀의 인류애 앞에서 우리는 경건함을 느낀다. 그러나 자기애와 인류애 그리고 종교적 사랑 이들 세 가지 사랑 가운데서 가장 으뜸가는 사랑은 역시 종교적 사랑이다.
종교적 사랑은 그야말로 차별이 없다. 성 어거스틴은 열심히 기도하며 교회에 나가는 자와 그렇지 않는 자 사이에 어느 누가 구원을 받을지 우리들 인간은 아무도 모른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우리들 인간의 능력은 유한한 반면에 하나님은 전지전능하며
인간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유일한 권능에 의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불경의 어떤 구절은 불교도 없고 불타도 없다고 말하고 있다. 불교를 고집하거나 또는 불타만을 고집한다면 참다운 깨달음이 이루어지지 않고 한쪽으로 쏠린 생각만 고집할 것이기 때문에 그와 같은 말을 했을 것이다. 또 불경에 보면 깨달음이란 "사해평
등" 이며 "보조광명" 이라고도 했다. 깨달음은 치우침이 없이 어느 곳에나 있고 어느 곳에서나 가능하며 모든 것을 환하게 비춘다는 의미일 것이다.
성 프란치스코는 새들과 함께 사이좋게 지냈고 드물지 않게 그의 어깨와 손에 새들이 날아와서 놀았다고 한다. 또 어느 스님에 관한 이런 이야기도 있다. 추운 겨울날 스님 한분이 따스한 양지에 나와 햇볕을 즐기고 있었다. 그 스님은 속옷을 벗어서 햇빛에 쪼이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그 스님에게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스님은 옷 속에 있는 이가 너무 햇빛을 쪼이지 못했기에 그 놈들에게 햇빛을 쪼여주고 있다고 답했다.
어떻게 보면 인간중심적인 사랑이란 결국 인간만을 위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인간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을 가능성이 있다. 우주만물에 대한 사랑 그리고 우주의 원리에 대한 사랑, 곧 절대자나 절대경지에 대한 종교적 사랑이 역시 가장 으뜸가
는 사랑이다. 만일 남녀의 사랑, 친구간의 사랑, 인류애 등이 종교적 사랑의 바탕을 망각한다면 그것들은 여전히 불완전한 사랑으로 끝나고 말 것이다.
불완전함과 유한함을 통찰하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노력과 만물에 대한 공평한 사랑이 결여된 사랑은 결코 성숙한 사랑이 아닐 것이다. 이 혼란하고 삭막한 현대사회가 그나마 유지되고 있는 것도 역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우리들에게 알게 모르게 포근하고 은은한 종교적인 사랑을 한없이 베풀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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