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흰색은 고요한 슬픔이다. 고양이 걸음을 하는 봄이 알지 못하는 새 다가와 잎눈을 틔우듯이 스며들 듯 몸에, 배여 있다. 한 무더기 피어있는 조팝 꽃처럼 보랏빛 꽃들 속에 핀 흰 도라지꽃처럼 마냥 아프다. 늦가을 외다리로 선 두루미 한 마리. 세상이 온통 흰 눈으로 덮인 겨울 자작나무 숲, 외딴집의 댓돌 위에 놓인 하얀 고무신 한 켤레에 깃드는 고요이며 과거로 손을 끄는 회상의 색이다.
할아버지는 흰 고무신을 신고 오셨다. 하얀 수염으로 마고자에 노란 호박 단추를 달고 오셨다. 아니 중절모에 꼬부랑 지팡이를 짚고 거짓말처럼 꼿꼿이 걸어오셨다. 할아버지가 오시면 어머니는 비상벨이 울린 듯 허둥지둥 움직였다. 몸을 숙이고 말씀을 낮추고 행동을 삼가셨다. 독불장군 아버지도 할아버지를 두려워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누군가를 목소리 높여 야단하는 모습을 본 적은 없다. 하지만 감히 품에 달려들어 안기지는 못했다.
할아버지가 오신 날 어머니는 분주했다. 무를 납작 썰고 파를 송송 다져 쇠고깃국을 맑게 끓였다. 삼색 나물을 하고 두부를 지지고 생선 토막을 구웠다. 그리고 하얀 밥을 지었다. 넘치는 밥물 냄새는 기름지고 차졌다. 솥 옆에서 연신 행주질을 하시던 어머니는 의식을 치루는 듯 경건함마저 들었다.
반질하게 상을 닦고 고급스런 수저 골라놓았다. 지진 두부, 구운 생선을 올린다. 삼색의 나물과 깻잎장아찌도, 뜨거운 국 한 사발도 넘치게 담는다. 드디어 공기 가득 밥을 퍼 담는다. 물기 묻힌 주걱으로 착착 돌려가며 고임 떡을 괴듯 올리는 고봉의 정성, 구순의 할아버지가 생전에 한 번에 드실 수 없는 양이었다.
그날 어머니는 일하러 나가시기 전 할아버지의 고무신을 들고 수돗가에 나왔다. 별로 많이 더러워진 신발도, 이니었지만 쪼그리고 앉아 세탁비누로 거품을 내고 초록 수세미로 닦아냈다. 땟자국도 없는 신발을 얼금 돌로 문질렀다. 뽀얀 고무 물을 물고 나온 거품들이 수채로 흘러들었다. 봄날 목련 꽃잎처럼 뽀얗게 된 고무신을 댓돌에 세워 두고 장에 장사하러 가는 어머니의 뒷모습에는 알 수 없는 아릿함이 꽃잎 떨어지듯 너울거렸다.
어머니의 슬픔이 참이던, 착각이던 흰색의 꽃이나, 흰밥, 하얀 고무신을 생각하면 풍경 같은, 그날의 일들이 떠오른다. 그 후 누군가를 극진히 대접한다는 것은 뜨거운 새 밥 한 그릇 짓는 일이라고 고봉밥 가득 마음을 퍼 담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왜 밥을 한다는 것보다 짓는다고 하는지 알게 되었다. 가족을 위해 옷을 짓듯, 혼을 다해 글을 짓듯, 나무를 켜서 집 한 채를 짓듯 밥하는 일도 온 마음을 다하기에 지어 올린다고 하는 게 아닐까. 아무리 식은 밥이 밥솥 가득 있어도 새 밥을 짓는 지극함은 하얀 고봉밥과 어머니의 뒷모습으로 기억된다.
넉넉지 않은 살림살이로 할아버지께 조금의 용돈밖에 드리지 못하고 장사하러 나가는 어머니의 심정은 어땠을까. 수돗가에 쪼그리고 앉아 고무신을 씻어 널며 수채로 빠져가는 거품처럼 숨어들고 싶었던 마음은 혹 아니었을까.
일찍 철들어버린 나는 이후 할아버지가 찾아오시면 고무신을 거품 내어 씻어 널었다. 한 번도 할아버지는 고맙다는 말씀도 다정한 눈빛도 주시지 않았다. 한 세기쯤의 삶을 살다 보면 극성스런 애정의 표현쯤은 어쩜 성가신 일일 수도 있는가 싶다. 안녕히 가시라는 인사에 ‘오냐’ 한 말씀 하셨을 뿐이었다.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신 지 스물다섯 해가 지났다. 아흔넷의 생은 자작나무 같았다. 오랜 여정의 끝에 남는 것은 삶의 흔적처럼 검버섯이 피고 하얀 살비듬이 떨어져 가는 쇠잔한 육신뿐이었다. 많은 자손으로 당신의 숲은 가끔 바람 소리를 내었지만 모른 척 꼿꼿한 한 마리 두루미였다.
당신의 숲에는 원시림처럼 내가 미처 알지 못한 많은 이야기들이 숨겨져 있었다. 두 명의 부인, 가족을 두고 만주로 떠돌아야 했던 젊은 날은 금서처럼 숨겨졌던 한 생의 역사였다. 눈바람에 자꾸만 뒷걸음쳐지는 만주벌판 어디에 달빛조차 숨죽이는 하얀 자작나무 숲이 있지는 않았을까.
하얀 고봉밥 한 그릇은 풀 수 없는 숙제가 된 지 오래다. 하얀 고무신을 신고 생시처럼 다가오는 할아버지의 환영을 보곤 한다. 그런 날은 탱자꽃 가시가 가슴을 찌른다. 얼금돌에 밀려 나오던 흰 거품 같은 어느 봄날이 아프게 그리운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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