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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岳飛’ 故事의 수용과 인물 형상의 정립 과정
1)趙 志 衡*
Ⅰ. 緖 論
Ⅱ. 岳飛 관련 文獻과 인물 형상의 정립 양상
Ⅲ. 岳飛 故事와 인물 형상의 활용과 확산
Ⅳ. 結 論
•국문초록
본고는 한국 고전문학 분야에 등장하는 중국의 역사 인물 가운데 宋代 무장인
‘岳飛’에 주목하여, 조선 전기에 악비 관련 고사와 인물 형상이 여러 문헌을 통해
수용․형성되는 과정을 탐색하였다. 또 이렇게 형성된 악비 고사와 인물 형상이
壬․丙 兩亂期에 어떻게 활용되었는지, 악비 형상이 어떠한 방식으로 확산을 거듭
해 갔는지 등의 문제에 대해 살펴보았다.
악비 관련 고사를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이른 시기의 문헌 자료는 宋史 「岳飛傳」
이다. 「악비전」에서는 武將으로서 악비에 대한 역사적 사실 기록에 충실하면서, 문
무를 겸비한 면모를 부각시키는 동시에 뛰어난 신하의 능력을 알아보지 못한 군주
의 무능을 비판하는 데까지 이르고 있다.
世宗代 간행된 三綱行實圖에서는 악비가 「忠臣」편 항목의 일원으로 선택됨으
로써 자연스레 충신으로 규정되고 있다. 그가 보여준 충효의 실질은 장수로서 외적
에 맞서 싸우면서 국토를 회복하고 국치를 설욕하고자 孤軍奮鬪한 것인데, 이러한
면모에 주목하면서 악비를 儒家의 가치를 내재하고 체현한 충신의 형상으로 격상시
키고 있다.
宣祖代 간행된 會纂宋岳鄂武穆王精忠錄은 이전 시기까지 악비에 관한 문헌들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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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총 망라하여 악비의 인물 형상을 확정하였다. 이 책은 악비의 圖像, 악비에 대한
역사 관계 기록, 악비의 저술, 고금 인물들의 악비에 대한 稱評 및 관련 시문 등을
총괄하고 있어서 악비와 관련된 모든 자료를 집대성한 문헌이다. 이러한 문헌이 중
국과 조선에서 동시에 간행되고 유포됨으로써 악비는 문무겸전과 충효의 실천을 아
우르고, 나아가 흠잡을 데 없이 온전한 不朽의 충신 형상으로 확정되기에 이르렀다.
역사적으로 볼 때, 악비 관련 고사는 漢族과 이민족 사이의 대결 과정을 드러내
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의 경우도 임․병 양란은 주변 이민족들과의 대결 양상
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국가적 위기에 잘 대응했던 선례로써 악비가 주목되게 되었
다. 이에 악비 관련 고사와 인물 형상은, 전란 직전에는 군사적 방비 강화의 논리적
근거로, 전란 과정에서는 군대의 편제와 훈련의 방법의 典範으로, 전란 후에는 講和
반대의 명분과 논리로, 나아가 전란 과정에서 활약한 무장들을 칭송하고 襃獎하는
준거 등으로 다양하게 활용되기에 이른다.
한편, 악비 관련 주요 문헌인 삼강행실도와 정충록은 이후에도 계속 간행되
고 유포되었다. 삼강행실도는 한문과 諺解가 합기된 형태로 여러 차례 간행과 頒
賜가 이루어졌으며, 정충록은 宣祖, 肅宗, 英祖 때 모두 3차례나 간행되었는데,
숙종과 영조의 경우에는 책의 서두에 직접 御製序文을 쓰기도 하였다. 이렇듯 삼
강행실도와 정충록의 지속적인 간행과 반사로 인해 악비에 대한 不朽의 충신 형
상이 광범위하게 확산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결국 이러한 과정을 통해 조선 전기에 수용․형성된 악비 관련 고사와 인물 형상
이 하나의 문학적 토양으로 자리매김을 하면서, 17세기 이후에 시조, 소설 등의 갈
래에서 작품의 창작과 향유의 측면에서 영향을 끼치게 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주제어
岳飛, 인물 형상, 宋史 「岳飛傳」, 三綱行實圖, 會纂宋岳鄂武穆王精忠錄
조선 전기 ‘岳飛’ 故事의 수용과 인물 형상의 정립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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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緖 論
본고는 조선 중기 이후 한국 고전문학 분야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 형상
가운데 하나로, 중국 宋代 무장인 ‘岳飛(1103~1142)’에 주목하고자 한다. 본
고의 주된 관심은 먼저 구체적으로 어느 시기에 어떠한 문헌을 통해 악비 관
련 故事가 국내에 수용되었으며, 이에 따라 악비에 대한 인물 형상이 어떤 모
습으로 형성되고 재구성되어 갔는가 하는 점이다. 나아가 이러한 추적과 탐색
을 통해 악비 관련 고사와 인물 형상이 조선 후기 문학사에서 어떠한 양상으
로 작품화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 하는 추후 연구의 발판을 마련하고자 한다.
주지하듯이, 伯夷․叔齊․屈原․陶淵明․張良․嚴光․諸葛亮 등 한국
고전문학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으며 수용된 중국의 역사 인물들은 실로 많
다. 이들 중국의 역사 인물들은 대체로 천 년 이상의 긴 시간적 여정을 거치
면서 한국 고전문학 작품에 수용되어 국문시가, 한시, 소설 등의 직접적인 소
재 및 주인공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들과 관련된 여러 典故들이 간접적으
로 작품화에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위에서 언급한 중국의 역사 인물들이 지속적으로 한국 고전문학
에 수용되고 활용된 이유는 무엇일까? 말하자면, 한국 고전문학에서 긍정적
인 평가를 받고 있는 중국의 역사 인물들은 거개가 文官들이며 각기 시기만
다를 뿐 모두 뛰어난 文才를 바탕으로 제왕들을 보좌하거나 혹은 사대부로서
의 出處에 관한 모범적 전거를 제시함으로써 이후 동아시아의 문인들에게 忠
節․信義․德望 등의 가치 의식을 심어주기에 충분한 인물들이었다는 공통
적 속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종래 문학 행위의 주요 담당층이 사
대부 문인 계층이었음을 고려할 때, 내부적으로는 선행 인물들이 지닌 가치의
식을 자신의 삶과 일정부분 동일시하고 대외적으로는 그들의 삶을 통해 구현
된 주요 가치를 사회적으로 고양시켜야 하는 여러 조건적인 상황이 있었기
때문이라 짐작된다. 결국 작자들은 이러한 국면에서 문학 형식을 이용한 작품
화 과정을 통해 여러 인물 형상을 유효적절하게 가져와 사용하였던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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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된다.
이에 비해 본고에서 다루고자 하는 岳飛는 앞서 열거한 인물들과 그 성격
이 제법 상이하다. 두루 알려져 있듯이, 악비는 본래 농민 출신으로 北宋 말
기 의용군에 참전하여 전공을 쌓았으며, 南宋 초기 金[여진]과의 잇단 전쟁
을 거치면서 혁혁한 전공을 세워 湖北 일대를 영유하는 大軍閥이 되었지만,
이후 高宗(재위:1127∼1162) 당시에 금과의 和議論을 앞세운 재상 秦檜
(1090~1155)에 의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살해되었다. 이렇듯 악비는 신분적
으로 문관이 아닌 무관이었고 귀족 출신이 아닌 농민 출신이었으며, 시기적으
로 앞서 언급한 인물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인물 형상화에 필요한 시간적
거리도 멀지 않다. 본론에서 상세히 논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행
적은 이른 시기인 麗末鮮初부터 국내에 알려져 여러 문인들의 입에 두루 회
자되었다. 즉, 악비에 대한 인물 형상은 앞서 언급한 여러 인물들에 비해 비
교적 짧은 기간에 우리나라에 유입되어 우리 고전문학 작품 내에 수용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악비에 대한 인물 형상이 빠르게 수용되었던 데에는 악비
라는 인물이 지니고 있는 상징적인 의미가 우리의 역사적․정치적 실정과 현
실에 잘 부합하였을 뿐만 아니라, 악비 형상을 수용하여 문학 작품으로 새롭
게 창작했던 문인들의 문제의식과도 일치하였기 때문이라 판단된다. 특히 17
세기 이후 조선 후기 문학사에서는 시조, 한시, 소설의 부문에서 악비 관련
고사와 인물 형상을 활용한 문학 작품이 출현하고 있다.1)
기실, 우리 문학사에서 무장 출신의 인물로서 문학 작품에 적극적으로 형
상화된 인물은 그다지 많지 않다. 문학 작품에 형상화된 무장 출신의 인물들
의 경우, 대체로 楚․漢 고사나 三國志 고사와 관련하여 해당 무장의 이름이
나 간단한 행적 정도가 언급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반면, 악비의 경우처럼
한 독립적인 인물을 대상으로 인물 형상이 지속적으로 수용․변전되고, 시와
1) 소설의 경우, 17세기에 東溟 黃中允(1577~1648)의 <天君紀>와 <玉皇紀>에서 악비의
죽음에 대한 재평가를 하면서 治亂의 정치의식을 드러내고 있으며, 작자 미상의 <洞仙記>
에서는 소설의 전개과정에 악비를 등장시켜 작품의 배경 설정과 서사 구조의 전환점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18세기에는 악비의 활약상을 소설화한 중국의 大宋中興通俗演義(80
장본)를 국문으로 번역한 <무목왕졍튱녹>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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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에 두루 활용되면서 작품화 된 예는 쉽게 꼽기 어렵다.2) 그렇기 때문에
우리 문학사에 보이는 무장으로서 악비에 대한 인물 형상의 수용과 형성은
나름의 특별한 위상을 점유한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본고에서는 시조나 소설 등 문학 작품 속 악비 관련 고사와 인물 형
상이 주로 17세기 이후 조선 후기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바, 그렇다면 악비
고사와 인물 형상은 이미 조선 전기부터 수용․형성되어 점차 특정한 방향으
로 정립되어갔을 것이라는 전제 아래, 우선 조선 전기에 악비 형상이 성립되
어 가는 과정을 구체적인 문헌과 자료들을 통해 탐색하고자 한다. 아울러
壬․丙 양란기에 악비 관련 고사가 어떻게 활용되었는지, 그리고 이후에는
악비 형상이 어떠한 방식으로 확산되어 갔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Ⅱ. 岳飛 관련 文獻과 인물 형상의 정립 양상
1. 宋史 「岳飛傳」: 文武兼全의 武將 형상과 君主의 道
악비에 대한 인물 형상이 한국의 문인들 사이에서 회자되기 시작하는 것은
고려 말 조선 초부터이다. 이 시기는 악비의 생몰연대를 고려할 때 死後 약
200여 년이 지난 시점으로, 이를 통해 악비에 대한 정보가 일찍부터 한국에
전래되어 문인들에게 수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고려가 宋나라와는 물
론 이후 元나라와도 지속적으로 외교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던 역사적 상황을
고려할 때, 악비에 대한 행적이 왕래하던 사신들에 의해서 입으로 전해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일 터이나 이는 단언할 수 없다.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이른 시기의 문헌 자료로는 元
2) 무장 출신의 인물로서 소설을 통해 작품화된 대표적인 예로 중국 唐代 인물인 尉遲敬德
(585~659), 薛仁貴(614~683), 郭子儀(697~781)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의 인물 형상이 악비의 경우처럼 여러 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이후 국문시가나 한시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수용되었다고는 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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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順帝 至正 5년인 1345년(충목왕 1)년에 완성된 宋史가 있다. 당시 고
려와 원나라와의 관계로 미루어 볼 때, 이 송사는 편찬 직후 고려에 유입된
것으로 생각된다. 주지하듯이, 송사는 五代의 周나라에서부터 송나라 멸망
까지 317년간의 史實을 紀傳體로 기록한 역사책이다. 이 중 本紀의 권24~권
32 高宗 부분과 권33~권35 孝宗 부분에 악비와 관련된 여러 사실들이 확인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악비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일목요연하게 집약하고
있는 것은 바로 列傳 권365 소재 「岳飛傳」이라 할 수 있다.
「악비전」은 9,000여 자에 이르는 긴 분량으로, 서두에는 악비의 출생과 관
련된 일화 및 어린 시절의 행적이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고, 중반부에는 徽宗
宣和 4년(1122년) 의용군 병졸로 입대하여 高宗 紹興 12년(1142년) 하옥되
어 죽을 때까지 약 20여 년 동안 금나라와의 30여 차례 크고 작은 전투에서
보여준 무장으로서의 행적과 전공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후반부에는 재
상 秦檜의 和議論에 맞서다가 誣告로 하옥되어 죽음을 당하고 이후 사면․
복권․추증되는 과정까지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끝부분에 史官의 論評이 덧
붙어 있다. 송사가 한 왕조의 정통 역사 서술체계를 갖춘 正史라는 성격에 걸맞게,
기본적으로 「악비전」은 무엇보다 무장으로서 여러 전투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여준 악비에 대한 역사적 사실의 기록에 충실하려는 기술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러면서도 끝부분에 이례적으로 악비의 복권․추증의 과정까지를 기
록해 놓은 것은 악비의 죽음이 당시 송나라 간신들의 무고와 군주의 실책이
맞물려 발생한 것이었음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악비전」의 마
지막에 해당하는 사관의 논평 부분은 「악비전」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악비
인물 형상을 잘 집약하고 있다.
西漢 이래로 韓信․彭越․絳侯․灌嬰 같은 장수들이 대대로 적었던 것은
아니지만, 송나라 岳飛처럼 文武를 겸비하고 仁智를 함께 실행한 자를 한 시
대에 어찌 많이 볼 수 있겠는가? 史書에서 關雲長이 春秋左氏의 학문에 통달
하였다고 일컬었으나, 그의 문장을 본 적은 없다. 악비가 北伐하여 그의 군
대가 汴梁의 朱仙鎮에 이르렀을 때 군대를 돌리라는 詔書가 있었다. 악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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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표를 올려 조서에 답함에 忠義의 말들이 肺腑에서 흘러나왔으니 참
으로 諸葛孔明의 기풍이 있었으나 끝내 秦檜의 손에 죽고 말았다. 이는 악비
와 진회의 세력이 양립할 수 없었기 때문이니, 만일 악비가 뜻을 얻었다면
金나라에 빼앗긴 땅을 회복할 수 있었을 것이며 송나라의 수치도 설욕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진회가 뜻을 얻어 악비에게는 죽음만이 있었을 뿐이
었다. 옛날 남조 宋나라에서 檀道濟를 죽였을 때, 檀道濟가 하옥되어 눈을 부
릅뜨고 말하기를, “스스로 너의 만리장성을 무너뜨리는구나!”라고 하였는
데,3) 송나라 高宗도 스스로 中原을 버리고자 하였기 때문에 악비를 죽인 것
이다. 아, 원통하도다!4)
위 사관의 논평은 무엇보다도 악비가 武勇만을 갖춘 장수가 아니라 사실
文武를 겸비한 인물이었음을 드러내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 이는 앞서 기
술된 수많은 무장으로서의 행적으로 인해 자칫 악비의 文才가 가려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뛰어난 무용이나 전공을 보여준 인물들은 악비 이
외에도 거론할 수 있는 인물들이 다수 있겠으나, 악비처럼 문무를 겸비한 무
장은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기실, 「악비전」의 초반
부에도 이미 “악비는 집안이 가난하였으나 힘써 배웠으며 특히 春秋左傳
과 孫子・吳起의 병법을 좋아하였다.”5)고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사관은 문무
를 겸비한 악비에 필적할 만한 인물로 삼국시대 關羽를 예로 들어 견주고 있
3) 남조 宋나라에서 …… 라고 하였는데: 남조 宋나라 장군인 檀道濟는 지략이 뛰어나서 武
帝부터 文帝에 이르기까지 北伐로 여러 차례 큰 공을 세워 위엄과 명망이 컸다. 그러자
온 조정이 그를 의심하고 두려워하므로 문제가 조서를 내려 그를 체포하여 베려 하자, 그
가 분개하여 눈을 횃불처럼 부릅뜨고 모자를 벗어 땅바닥에 내던지면서 “너의 만리장성을
무너뜨리는구나.”라고 하였다고 한다. 宋書, 「檀道濟列傳」 참조.
4) 宋史 卷365, 「岳飛傳」, “論曰: 西漢而下, 若韓・彭・絳・灌之爲將, 代不乏人, 求其文武
全器・仁智並施, 如宋岳飛者, 一代豈多見哉? 史稱關雲長通春秋左氏學, 然未嘗見其文
章. 飛北伐, 軍至汴梁之朱仙鎮, 有詔班師, 飛自爲表答詔, 忠義之言, 流出肺腑, 眞有諸
葛孔明之風, 而卒死於秦檜之手. 蓋飛與檜勢不兩立, 使飛得志, 則金仇可復, 宋恥可雪,
檜得志, 則飛有死而已. 昔劉宋殺檀道濟, 道濟下獄, 嗔目曰: “自壞汝萬裏長城!” 高宗忍
自棄其中原, 故忍殺飛, 嗚呼冤哉! 嗚呼冤哉!”
5) 宋史 卷365, 「岳飛傳」, 家貧力學, 尤好左氏春秋․孫吳兵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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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러나 관우는 전해지는 문장이나 문헌이 없어 실제로 그가 문장에도 뛰
어났는지의 여부를 실증적으로 확인할 수 없는 반면에, 악비는 <滿江红詞>
같은 대표 작품은 물론 그의 문집인 岳武穆集이 전할 정도로 문장에도 뛰
어났으며, 특히 그가 北伐 과정에서 고종의 조서에 답한 글은 諸葛孔明의
<出師表>에 비길 만한 것이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이어 사관은 이렇듯 문무를 겸비한 악비가 당시 송나라에서 자신의 능력을
펼칠 수 있었다면 분명 금나라를 몰아내고 중원 지역을 회복할 수 있었을 터
이나, 그렇지 못해 악비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게 된 상황을 애
석하게 여기고 있다. 아울러 악비의 죽음은 진회와 악비 사이의 양립할 수 없
는 견해에 의해 비롯된 것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 황제인 고종도 중
원을 회복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악비를 죽음으로 내몬 것임을
예리하게 꼬집고 있다. 결국 이러한 점이 당시 송나라의 治亂의 문제와 직․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악비전」은 기본
적으로 무장으로서 악비에 대한 역사적 사실의 기록에 충실하면서, 문무를 겸
비한 악비의 면모를 부각시키는 동시에 참소를 받아들이고 뛰어난 신하의 능
력을 알아보지 못한 군주의 무능을 비판하는 데까지 이르고 있다.
그렇다면, 송사 本紀의 기록과 「악비전」을 통해 수용된 악비 관련 행적
과 형상이 우리나라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 이에 대해서는 고려 말
石灘 李存吾(1341~1371)의 詩文과 조선 초 三峰 鄭道傳(1342~1398)의 글
에서 그 일단을 확인할 수 있다.
天地紛爭問幾回천지간에 어지러운 전쟁이 몇 번이나 되풀이 되었나?
南朝往事不勝哀南朝의 지난 일은 슬픔 겹다네.
君歸應過岳王墓그대가 돌아가면 응당 岳王墓를 지나리니
爲我丁寧酹一杯나를 위해 정성껏 술 한 잔 부어 주오.6)
6) 李存吾, 石灘集, 「送李副令韌使浙江」, 한국문집총간 6, 민족문화추진회, 27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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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 秦檜가 梓宮을 돌려주도록 청하자는 것으로 핑계를 삼아 和議를
주창하여 재상 자리를 얻음에 利를 탐하는 무리들이 따라서 호응하게 되어,
간특하고 아첨하는 자는 뜻을 얻고 충성스럽고 선량한 사람은 배척되고 벌
을 받으며, 武備는 廢弛되고 士氣가 沮喪되어 비록 張浚 같은 忠義와 岳飛 같
은 武勇으로도 능히 회복하는 공을 이루지 못하다가 마침내 장준은 내쫓기
고 악비는 죽음을 당했으니, 원통한 일이다!7)
위의 인용문 은 恭愍王 13년(1364년)에 이존오가 당시 명나라 太祖 朱
元璋과 경쟁하며 浙江 지역을 할거하고 있던 張士誠(1321~1367)에게 報聘
하고자 파견한 李韌(?~1381)을 전송하면서 쓴 시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과
거 송나라가 겪은 전란과 망국의 역사를 생각하며 슬픔에 잠기고, 그 과정에
서 희생된 악비를 떠올리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辛旽(?~1371)
의 횡포를 보고 극력 탄핵하다가 좌천되고 고향인 公州에 은둔하여 울화병으
로 죽은 행적에 비추어 볼 때, 이 작품을 통해 시인은 간신의 참소와 농단으
로 인해 충신을 죽음으로 내몰아 결국 혼란과 망국의 길로 접어든 송나라의
지난 역사를 떠올리다가 슬퍼하는 것이며, 현재 자신의 처지와 장차 자신이
맞이하게 될 운명이 과거 악비가 처했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임을 알
기에 악비의 무덤을 지나면서 자신을 대신에 술을 한 잔 부어 줄 것을 부탁하
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 작품에서 표출되고 있는 울분은 분명 일정부분 충신
의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는 공민왕에게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인용문 는 조선 太祖 6년(1397년) 완성된 經濟文鑑 別集 下 「君道」
편의 일부분이다. 경제문감이 역대의 治亂의 행적을 살펴 본받을 만한 것
과 경계할 만한 것을 논하여 임금을 바른 길로 이끌고자 했던 편찬 의도를 통
해 볼 때, 정도전은 송나라 高宗을 예로 들어 악비 같은 충신을 배척하고 진
회 같은 간신을 신임한 것이 망국의 길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
7) 鄭道傳, 三峯集, 「經濟文鑑 別集 下」, 한국문집총간 5, 민족문화추진회, 502면, “其後秦
檜以請還梓宮爲辭, 首倡和議, 取位宰相, 嗜利之徒從而和之, 姦佞得志, 忠良擯戮, 武備
廢弛, 士氣沮喪, 雖以張浚之忠義, 岳飛之武勇, 不能成恢復之功, 卒至浚出而飛戮, 嗚呼
痛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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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때, 여말선초 宋史를 통해 형성된 악비 형상은 과거 악비의 사례를 통해
君主의 도를 일깨우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송사가 正
史이기 때문에 전대 역사적 사건을 현재의 龜鑑으로 삼으면서 군주를 規戒
하기 위한 의도가 반영된 것이라 하겠다.
2. 三綱行實圖 <岳飛涅背>: 忠孝를 體現한 인물 형상과 將帥
의 道
악비에 관한 인물 형상이 나타나는 또 다른 문헌으로 조선 世宗 16년(1434
년)에 偰循(?~1435) 등이 왕의 명령을 받고 지은 三綱行實圖를 들 수 있
다. 주지하듯이, 삼강행실도는 중국과 조선에서 三綱의 모범이 될 만한 孝
子․忠臣․烈女를 모두 110명을 뽑아 그 행적을 그림과 글로 칭송한 책이다.
이 가운데 권2 「忠臣」편 22번째 <岳飛涅背> 항목에 악비에 관한 고사가 등장
한다.
우선 삼강행실도에서는 악비가 「충신」편 항목의 35명 가운데 하나로 뽑
혀 있다는 그 자체로 해당 인물의 특성이 규정된다. 즉, 삼강행실도 「충신」
편에 선택됨으로써 악비는 자연스레 충신으로 규정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서는 악비가 문신이냐 무신이냐 하는 출신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는
그가 충신이냐 그렇지 않으냐의 여부와 그가 어떤 의미에서 충신으로 분류될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 따라서 악비가 무장으로서 어떠한 전공을 세웠는지 어
떠한 활약을 했는지는 편집자들의 주된 관심사가 아니었으며, 그보다는 왜 그
가 충신이라 일컬을 수 있느냐 하는 점을 설득력 있게 설명해 내는 것이 필요
한 일이었다.
전에 樞密副使 岳飛가 금나라와 화친하는 의논은 잘못된 계책이라고 말하
였으므로 秦檜가 그를 미워하였다. 적들[金]이 침입하자, 황제가 악비에게
명하여 淮西를 구원하게 하니 그날로 길을 떠나는데, 張俊이 편지를 보내 양
식이 부족하다고 말하였으나 악비는 그만두려 하지 않았다. 장준이 조정에
돌아가서 도리어 악비가 머뭇거리고 있다고 말하고, 또 악비가 ‘山陽은 지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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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없다.’고 말하여 士氣를 잃게 했다고 말하고, 진회와 모의하여 諫議大夫
万俟卨을 시켜 악비를 탄핵하게 하여 兵權을 잃게 하였다. 진회가 반드시 악
비를 죽이고자 하여, 이에 장준과 모의하여 악비의 部將 王俊을 시켜 망령되
이 말하기를, “張憲이 襄陽을 점거하여 악비에게 병권을 돌리려고 합니다.”
라고 하고는 장준을 시켜 鞫問하고 장헌이 거짓 자복하게 하였다. 그러자
악비와 아들 岳雲을 大理獄에 잡아 가두고 진회가 손수 쪽지를 써서 獄에 부
치니, 곧 악비의 죽음이 알려지고 장헌과 악운은 棄市하였다.8)
위 인용문 <악비날배>의 전반부만 놓고 보면 악비가 왜 충신인가 하는 점
이 분명하게 와 닿지 않는다. 여기에서는 악비가 금나라와의 화친에 대해 극
력 반대 입장을 피력한 것과 금나라의 침입에 황제의 명을 받고 곧장 전장으
로 달려가는 모습 정도가 드러나 있다. 그 외에는 악비가 秦檜의 계략에 의해
죽는 과정을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충신으로서의 악비 형상을 설명하
면서 본문만 놓고 본다면 그가 진정 충신인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그 기록
이 소략하다. 그러나 이토록 간단한 설명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가 충신으로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은 이전부터 다른 자료를 통해 악비에 관
한 전고가 이미 어느 정도 확산되었기 때문일 터, 이는 추측건대 이전 시기
전래된 송사 本紀의 기록과 「악비전」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기 때
문에 악비가 보여준 무장으로서의 전공과 업적은 생략하고 그의 죽음 부분에
대해서만 언급을 해도 충분하리라는 판단을 했을 것이다.
기실, 삼강행실도 <악비날배> 기록 가운데 전반부의 기술보다 중요한 것
은 이어지는 그 다음 부분이다.
악비의 忠孝는 천성에서 나왔다. 그는 병사들을 사랑으로 기르고 行軍함
에 紀律이 있어서 적은 병사로 많은 군사를 칠 수 있었으며, 힘써 적들을 평
8) 三綱行實圖, 「忠臣」, <岳飛涅背>, “初, 樞密副使岳飛, 言和議非計, 秦檜惡之. 虜入冠,
上命飛援淮西, 卽日就道, 張俊貽書, 以乏糧爲言, 飛不爲止. 俊歸朝, 反言飛逗留, 又言
飛謂‘山陽不可守’, 沮喪士氣, 與檜謀, 令諫議大夫万俟卨劾飛, 罷兵柄. 檜必欲殺飛, 乃與
俊謀, 使飛部將王俊, 妄言: “張憲謀據襄陽, 還飛兵柄.” 令俊鞫之, 使憲誣服. 逮繫飛及
子雲大理獄, 檜手書小紙付獄, 卽報飛死, 憲雲棄市.”
大東文化硏究 제77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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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하고 국토를 회복하기를 건의하여 개연히 國恥를 씻는 것을 자기의 임무
로 삼았다. 이 때문에 금나라 사람들은 악비를 두려워하여 아버지라 부르기
까지 하였으며, 그 旗를 바라보고도 감히 가까이 가지 못하였다. 일찍이 등
에 ‘盡忠報國’이란 넉 자를 검게 물들였으며, 高宗은 精忠旗를 하사하여 특별
히 표창하였다. 그의 죽음을 듣자, 천하가 원통하게 여겼다.9)
설순을 비롯한 삼강행실도의 편집자들은 악비의 죽음이 단순히 진회의
계략에 의한 부질없는 죽음이 아니라, 충효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맞은 장렬한
죽음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가 보여준 충효의 실질은 외적에 맞서 싸우면서
국토를 회복하고 국치를 설욕하고자 孤軍奮鬪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그의 충효는 본래부터 타고난 것이라고 평가함으로써 악비를 儒家의 가치를
내재하고 체현한 훌륭한 인물로 격상시키고 있다. 부가적으로 병사들을 잘 양
성한 점이나 軍紀가 엄격하였던 점 등도 언급하고 있으나, <악비날배> 항목
의 전체적인 무게중심은 무장으로서의 전공과 업적을 드러내려는 것이 아니
라, 악비가 온전한 인격체로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충효를 실천한 인물
이었음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면모는 <악비날배> 항목의 끝에
병기되어 있는 詩文을 통해 잘 집약되어 있다.
奸兇誤國欲和親간흉이 나라 망쳐 화친하려 하는데
誓取中原有幾人맹세코 중원 땅을 찾자 한 사람이 몇인가.
擧義復讐爲己任義를 내세워 복수함을 자기 임무로 삼았으니
岳王忠孝出天眞岳王의 忠孝는 천성에서 나왔네.
盡忠報國出丹誠충성 다해 報國함은 진심에서 나왔으니
涅背還應字字明등에 먹물이 들여 글자마다 분명하네.
愛養軍兵嚴紀律군사를 사랑하고 紀律을 엄히 하니,
古今誰得更齊名고금에 누가 이름을 나란할 수 있으랴.
9) 三綱行實圖, 「忠臣」, <岳飛涅背>, “飛忠孝出於天性. 愛養士卒, 行師有紀律, 能以少擊
衆, 力平群盜, 建議恢復, 慨然以雪國恥爲已任. 金人畏之, 至呼爲父, 望其旗亦不敢近.
嘗涅其背, 爲‘盡忠報國’四字, 高宗賜精忠旗, 以嘉異焉. 及聞其死, 天下寃之.”
조선 전기 ‘岳飛’ 故事의 수용과 인물 형상의 정립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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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두 편의 시문은 앞선 악비에 대한 산문 기록을 정리하면서 편집자들이
<악비날배> 항목을 통해 드러내고자 했던 의도를 잘 대변해준다. 즉, 악비는
화친을 주장하는 간흉들의 주장에 맞서 홀로 중원을 회복하고 나라의 치욕을
씻고자 한 인물이라는 점, 그리고 이러한 그의 의로운 마음은 그가 직접 등에
문신처럼 새겨 넣은 ‘盡忠報國’ 네 글자로 대변된다는 것이다. 아울러 그가
부하들을 잘 기르고 군율을 엄격하게 했던 완벽한 장수로서도 흠잡을 데 없
는 인물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로써 악비는 무인으로서 三綱의 덕목을
실현한 충신의 형상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 글은 변화된 악비의 인물 형상 인식의 측면을 보여준
다고 할 수 있다.
임금이 柳子光과 南怡를 面質하도록 명하니, 유자광이 남이를 불러서 남
이가 말한 것을 갖추어 말하였다. 남이가 비로소 유자광이 와서 啓達했다는
것을 알고 놀라, 머리로 땅을 치며 말하기를, “유자광이 본래 신에게 불평을
가졌기 때문에 신을 誣告한 것입니다. 신은 忠義한 선비로서 평생에 岳飛로
자처하였는데, 어찌 이러한 일이 있겠습니까?” 라고 하였다.10)
위 인용문은 睿宗 즉위년(1468년)에 柳子光(1439~1512)이 南怡(1441~
1468)가 역모를 꾀한다고 무고하여 남이를 車裂刑에 처하게 했던, 이른바 ‘南
怡의 獄’에 관한 실록의 기사 중 일부이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은
남이가 “자신은 忠義한 선비이며 평생 岳飛로 자처하였다.”고 하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대목이다. 실제로 남이는 世祖 때에 李施愛(?~1467)의 반
란을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우고, 이후 수차례 서북변의 女眞族을 토벌한 공
로로 28세의 나이로 兵曹判書에 올랐다. 그랬던 그가 무고를 당하여 역모로
몰리면서 죽음의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다. 무장으로서 그가 보여준 행적은
악비의 생애와 매우 유사한데, 실제로 남이가 무장으로서 그토록 닮고 싶어
10) 睿宗實錄, 卽位年(1468) 10月 24日 庚戌, “上命子光與怡面質, 子光呼怡, 具道怡所
言. 怡始知子光來啓而驚, 以頭擊地曰: “子光素不快於臣, 故誣臣. 臣忠義之士, 平生以
岳飛自許, 安有是事?”
大東文化硏究 제77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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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던 인물이 바로 다름 아닌 악비였던 것이다. 남이가 생각했던 악비의 형상
은 그의 입으로 말한 것처럼 바로 ‘忠義’한 인물이었으며, 또 무장으로서 龜
鑑이 되는 그런 존재였던 것이다. 이러한 악비에 대한 형상은 시기적으로 볼
때 삼강행실도 <악비날배> 항목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3. 會纂宋岳鄂武穆王精忠錄: 악비 관련 자료의 집성과 不朽의
忠臣 형상
앞서 忠義를 실천한 악비 형상이 형성된 것은 삼강행실도 「충신」편 <악
비날배> 항목에서부터였음을 언급하였다. 그런데 삼강행실도에 수록된 악
비에 대한 서술은 소략하기 때문에 충신으로서 악비의 형상을 자세하게 파악
하기에는 부족한 측면이 있다. 또 삼강행실도 「충신」편에는 35명의 충신들
가운데 하나로 악비를 기술하고 있어서 충신들 가운데 하나로 일반화되어 인
식되었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그런데 이후 악비에 관한 이전 시기까지의 여
러 문헌들을 총 망라하면서 악비의 인물 형상을 확정한 문헌이 출현하였으니,
그것은 바로 조선 宣祖 18년(1585년)에 간행된 會纂宋岳鄂武穆王精忠錄
[이하 ‘精忠錄’이라 칭함]이다.
이 책은 본래 明代 鎭守浙江太監 麥福(?~1551)11)이 岳飛의 충성을 기리
기 위해 만들어져 유포되던 舊本 精忠錄을 바탕으로 弘治 14년(1501년)에
새롭게 古今의 詩文을 增集하여 편찬․간행한 책이다. 그런데 선조 17년
(1584년) 겨울에 北京에서 돌아온 譯官이 精忠錄 한 질을 宣祖에게 바치
자, 선조가 이 책을 읽고는 곧바로 校書館에 간행을 명한 것이다.12) 아울러
李山海(1539~1609)에게 서문을 짓도록 하였으며, 柳成龍(1542~1607)에게
발문을 짓도록 하였다.
11) 麥福: 明代 중기의 宦官으로 字는 天錫, 號는 升菴이며 廣東 三水縣 출신이다. 어렸을
때 궁정에 들어와 淸寧宮의 사무를 보았고‚ 이후 司禮太監掌監事를 여러 차례 역임했으
며 東廠을 감독했다.
12) 精忠錄의 간행 관련 사실은 이 책에 기록되어 있는 李山海의 서문과 柳成龍의 발문을
통해 구체적인 시기를 추적할 수 있다.
조선 전기 ‘岳飛’ 故事의 수용과 인물 형상의 정립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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精忠錄은 모두 6卷 4冊으로 간행되었다. 1책[元]에는 明代 陳銓(1374~
1441)의 서문과 조선 李山海의 서문이 실려 있으며, 武穆像과 함께 악비의
행적을 기록한 36편의 圖가 실려 있다. 2책[亨]의 권1에는 「宋史本傳」(宋史
「岳飛傳」)이‚ 권2에는 「武穆事實」(송사 本紀의 기록)이 각각 실려 있다. 3
책[利]의 권3에는 악비의 저술과 손자인 岳珂(1183~1243)의 저술을 모아 놓
은 「武穆著述」이, 권4에는 악비에 대한 후대의 전기, 논설, 묘지명 등을 모아
놓은 「古今褒典」이 각각 실려 있다. 4책[貞]의 권5에는 후대인들이 악비를
기리면서 지은 「古今賦詠」이, 권6에는 후대인들이 악비를 소재로 한 律詩와
명대 趙寬의 後序와 조선 柳成龍의 跋이 실려 있다. 즉, 精忠錄은 악비의
圖像, 악비에 대한 역사 관계 기록, 악비의 저술, 고금 인물들의 악비에 대한
稱評, 관련 시문 등을 총괄하고 있어 실로 당대까지 나온 악비와 관련된 모든
자료를 집대성한 문헌인 것이다.
1책에서는 악비의 행적을 36편의 그림으로 정리함으로써 악비의 일대기와
공적을 글을 모르는 일반 사람들도 그림을 보고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하였다.
2책에서는 악비와 관련된 기록을 史書에서 수집․정리함으로써 그의 행적에
대한 年譜 수준의 정리가 이루어졌다. 3책의 권3에서는 악비의 저술을 모아
놓음으로써 그가 文武兼全의 무장이었음을 드러내었다. 3책의 권4와 4책의
권5, 권6에서는 후대인들이 악비를 襃揚하는 글들을 모아 놓음으로써, 그가
만고의 충신으로 기억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精忠錄이 중국과
조선에서 동시에 간행되고 유포됨으로써 이제 악비에 대한 인물 형상은 이전
시기에 형성되었던 문무겸전과 충효의 실천을 아우르고, 나아가 흠잡을 데 없
이 온전한 不朽의 충신 형상으로 정립되었던 것이다.13)
그렇다면 선조가 精忠錄을 접하고 이례적으로 서둘러 이 책을 간행하도
록 명한 것은 어째서인가? 이와 관련하여 다음의 두 인용문을 살펴보자.
13) 현재 필자는 會纂宋岳鄂武穆王精忠錄의 성격 및 간행의 의의를 담은 해제 성격의 소
논문을 작성하고 있다. 精忠錄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추후 제출되는 소논문을 참조하
기 바란다.
大東文化硏究 제77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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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이) 文天詳․方孝濡․鄭夢周의 문집을 간행하여 반포토록 명하였다.
이는 임금이 절의를 숭상하고 풍속을 장려하고자 하여 이러한 명을 내린 것
이다. 이를 盧守愼에게 서문을 짓게 하였다. 또 岳王精忠錄을 간행하였는
데 柳成龍이 서문을 지었다.14)
지금 이 책을 편찬하는 것은 그 뜻이 忠을 고무하고 孝를 일깨워 勸善懲
惡하는 데 있으니,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이 매우 크다. 게다가 군
자가 충성을 다하다가 화를 당했고 소인이 참소로써 뜻을 얻었음은 또한 내
세의 龜鑑이 아니겠는가? 그러한 즉 성상께서 이 책을 가상히 여겨 감탄해
마지않아 널리 전하고자 하신 까닭은 世道를 위한 지극한 생각 때문일 것이
다.15)
인용문 은 선조수정실록의 기사이다. 이 기사를 통해 우선 精忠錄을
출간한 것이 정확하게 1585년 7월 1일임을 알 수 있다. 역관이 선조에게 책을
올린 것이 전년 겨울의 일이었고, 이산해가 서문을 지은 것은 3월 3일, 유성룡
이 발문을 지은 것은 3월 하순임을 생각하면, 대략 6~7개월 만에 책이 출간
되었으니 매우 짧은 기간 내에 책이 제작되어 출간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토록 짧은 기간 내에 서둘러 책을 제작하여 출간한 연유는 무
엇인가? 선조는 精忠錄을 간행하면서 동시에 文天祥․方孝孺․鄭夢周의
문집을 간행할 것을 명하였다. 주지하듯이 文天祥(1236~1283)은 송나라가
원나라에 의해 멸망되었을 때 자결하여 절의를 지킨 인물이다. 方孝孺(135
7~1402)는 명나라 永樂帝(재위 1402∼1424)가 쿠데타를 통해 조카인 建文
帝을 누르고 황위에 올랐을 때 그를 반대하는 글을 써서 멸문지화를 당한 인
14) 宣祖修正實錄 18年(1585) 7月 1日 庚午, “命刊布文天祥․方孝孺․鄭夢周文集. 上欲
崇表節義, 以勵風俗, 故有是命, 命盧守愼作序文. 又刊行岳王精忠錄, 柳成龍作序文.”
15) 柳成龍, 西厓集, 「精忠錄跋」, 한국문집총간 52, 민족문화추진회, 343~344면, “今是編也,
其意在於課忠責孝, 有勸有懲, 其感於人心者深矣. 况君子盡忠而賈禍, 小人以譖而得志,
亦豈非來世之龜鑑耶. 然則聖上之所以嘉歎是錄, 而欲廣其傳者, 其爲世道慮至矣.”
조선 전기 ‘岳飛’ 故事의 수용과 인물 형상의 정립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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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다. 鄭夢周는 고려를 향해 충절을 지킨 인물이다. 이렇듯, 이 세 인물은
모두 충절의 표상이었던 것이다. 실록 기사의 본문에서 史官은 선조가 ‘절의
를 숭상하고 풍속을 장려하고자 이들의 문집을 간행하도록 명한 것’이라고
하였다. 선조의 이러한 명령은 절의를 숭상하는 기풍을 조성하고 이를 통해
풍속을 교화하고자 했던 정치적인 행위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문신들이었기 때문에, 선조는 精忠錄을 간행하여 무신 출신의 악비의
충절을 드러냄으로써 문무의 균형을 맞추고자 했던 것이라 생각된다. 이러한
추정은 다음 인용문을 통해서도 충분히 가능하다. 는 精忠錄에 유성룡이
쓴 발문이다. 유성룡은 선조가 이 책을 간행하고자 한 뜻이 “忠을 고무하고
孝를 일깨워 勸善懲惡하는 데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가 世道
와 관련이 있는 행위임을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이를 통해 선조 때 精忠
錄의 간행은 국가를 다스리는 王者로서의 정치적 의도를 강하게 반영하고
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런 만큼 이 책에 드러나 있는 악비 관련 고사와 인
물 형상은 전국적으로 상하 계층에 두루 퍼져 나갔을 것으로 짐작된다.
Ⅲ. 岳飛 故事와 인물 형상의 활용과 확산
1. 壬․丙 兩亂과 악비 인물 형상의 활용
역사적으로 볼 때, 악비의 투쟁 과정은 中華의 송나라와 이민족인 여진족
금나라와의 투쟁이었다. 이는 漢族과 이민족간의 전면적인 대결이었는데, 이
민족에 의해 송나라의 도성인 開封이 함락되고 중화의 군주가 이민족에 의해
붙잡혀 간 전대미문의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에 송나라는 패망만을 겨우 면
한 채 杭州로 도읍을 옮기고 새로이 高宗을 황제로 세워 금나라의 잇단 공세
를 힘겹게 막아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빼앗긴 국토를 회복하고 國
恥을 씻으며 國紀를 다시 세우는 일에 온몸을 던져 맹활약을 하고 혁혁한 전
공을 세운 것이 바로 다름 아닌 악비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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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경우에도 1592년(宣祖25年) 壬辰倭亂과 1598년 丁酉再亂, 1627년
(仁祖5年) 丁卯胡亂과 1636년 丙子胡亂이 발발하면서 倭・女眞 등 주변의
이민족들과의 전란이 연이어 발생하였고, 이로 인해 국왕이 여러 차례 播遷
을 단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토의 전역이 초토화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
다.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전반기에 해당하는 시점은 조선에 있어서도 이민족
들과의 투쟁과 시련으로 점철된 시기였다. 따라서 자연스레 이민족과의 대결
구도 속에서 이러한 국가적 위기에 잘 대응했던 좋은 선례로써 악비가 주목
되게 되었다.
앞서 宣祖 18년(1585년)에 精忠錄이 간행되어 악비 고사가 집약되고 악
비의 인물 형상이 불후의 충신 형상으로 정립되었음을 말하였다. 시기적으로
임・병 양란 직전에 精忠錄이 간행되어 악비 관련 고사가 수용되고 인물 형
상이 확립되어 있었던 바, 무엇보다도 악비 인물 형상이 연이은 이민족들과의
전란 과정에서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었다. 그 여러 사례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아, 금나라가 송나라에 대해 날마다 侵削시킬 계책을 세우고 있는데도 秦
檜의 무리는 오랑캐들의 실정을 철저히 숨긴 채 당시의 임금과 장수가 혹시
라도 깨우칠까 두려워하였습니다. …(중략)… 그리고는 오직 땅을 떼어주
자는 한 마디 말만을 다행으로 여긴 채 攻戰에 대한 준비를 게을리 하게 만
들었습니다. 張浚․韓世忠․岳飛․劉錡 등의 諸將이 사력을 다하지 않았다
면 龜玆 지역도 보전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 秀吉이 우리나라에 대해 병탄할 계책을 세우고서 對馬島主를 살해하
고, 은밀히 자신의 복심인 平義智를 보내어 대신하게 함으로써 우리의 왼손
을 빼앗아 諜報할 길이 없게 만들었습니다. …(중략)… 그런데 우리는 供億
을 중국 사신과 다름없이 하고 있습니다. 賊使가 두 길로 나누어 올라올 적
에 영남․호남의 각 고을에서 吏民을 모두 거느리고 院驛에 나가 기다리느
라고 여러 날 지체하면서 한 번도 방비에 대한 일을 돌보지 않고 있습니
다.16)
16) 趙憲, 重峯集, 「請斬倭使疏」, 한국문집총간 54, 민족문화추진회, 299~316면, “嗚呼, 金
之於宋, 日以侵削爲謀, 而秦檜之徒, 深諱虜情, 惟恐一時君將之或悟. …(중략)… 惟以
割地一言爲幸, 以懈攻戰之備. 若非張・韓・岳・劉諸將之戮力者, 則龜玆之域, 亦不可保
조선 전기 ‘岳飛’ 故事의 수용과 인물 형상의 정립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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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글은 重峯 趙憲(1544~1592)이 임진왜란 발발 1년 전인 1591년 3월에
선조에게 올린 上疏의 일부분이다. 조헌은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
시[豊臣秀吉]가 보이는 잇단 행보를 열거하며 일본이 곧 조선을 침략을 할
여러 정황이 있으니 군사적인 방비에 힘을 쏟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
리고 그 일환으로 당시 조선에 방문한 일본 사신의 목을 벨 것을 주청하였
다. 조헌은 송나라의 경우를 예시하며, 송나라가 중원을 내주고 변방 지역으
로 쫓겨나게 된 것은 진회와 같은 자들이 화의를 내세우며 전쟁에 대한 대비
를 게을리 했기 때문이며, 동시에 그나마 변방 지역에서라도 국가의 형태를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張浚․韓世忠․岳飛 등등의 무장들이 사력을
다해 금나라와 맞서 싸웠기 때문임을 역설하고 있다. 즉 조헌은 전란에 대비
한 군사적 방비의 논리적 근거로 송나라와 악비의 고사를 가져와 사용하고
있다.
요즘 兵曹가 훈련을 부지런히 시키고 있으니 매우 가상하다. …(중략)…
그런데 훈련도 부지런히 해야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군대를 정하게 고르는
일이다. 지금 冗雜하고 용기 없는 자들을 잘 가리지 않고 그대로 行伍에 편
입시켜 편안히 앉아서 총 쏘고 칼을 시험하게 하는 것은 이른바 군대를 훈
련시키는 방법이 아닌 듯하다. 옛사람들은 군대 훈련에 있어 精兵에 주력하
였고 많은 것을 요하지 않았다. 岳飛의 군대가 소수로 많은 적을 공격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정하게 골라 남달리 훈련을 더 시켰기 때문이다.17)
윗글은 1594년 4월 임진왜란 중에 선조가 承政院을 통해 訓練都監에 하교
한 내용의 일부이다. 이 당시 선조는 義州까지 쫓겨 갔다가 平壤을 수복하고
다시 도성인 漢陽으로 돌아온 상황이며, 일본과의 전쟁은 소강상태에 접어든
矣. 今玆秀吉之於我國, 日以呑噬爲計, 至殺對馬島主, 而暗遣腹心平義智代守, 奪我左
臂, 諜報無路. …(중략)… 而我乃盛備供億, 無異乎華使支待. 其於賊使之分二路上來也,
湖嶺各邑, 盡率吏民, 出候于院驛, 留時延日, 一不顧防備之事.”
17) 宣祖實錄 27年(1594) 4月 10日 戊午, “近觀兵曹, 勤於訓鍊, 深嘉. …(중략)… 第鍊兵
雖勤, 簡兵當精. 今以冗雜無勇者, 擇之不精, 苟充行伍, 只習安坐放丸試釰, 恐非所謂鍊
兵之道也. 古人鍊兵, 唯務精而不務多. 岳飛之兵, 能以少擊衆者, 只是精擇, 而加訓之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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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점이었다. 이에 선조가 직접 훈련도감에 군대의 편제와 훈련의 방법 등에
있어 자신의 소견을 밝히고 있는 대목이다. 핵심적인 내용은 소수의 병력이라
하더라도 精兵들을 뽑아서 양성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러한 맥락에서 소수의
정예병으로 여러 전투를 승리로 이끈 악비의 사례를 언급하고 있다. 송사를
참조할 때, 악비는 북벌 초기에 500명 가량의 정예 기병으로 기습과 유격을
병행하며 적진을 교란시키고 여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결국 선조는 다수
의 오합지졸보다는 소수의 정예병이 현재의 상황에서 절실하고 향후 전투에
서도 요긴할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에 대한 좋은 참조의 사
례로 악비를 언급하고 있다.
신이 듣건대, 논자들이 ‘옛날 송나라가 망한 것은 和議가 그렇게 만든 것
이다. 그때 화의를 주장한 사람 가운데 秦檜와 王倫 같은 자들은 그 죄가 하
늘에 사무쳐 千載 뒤에서도 누군들 머리털을 세어가면서 베려 하지 않겠는
가. 만일 송나라가 화의로 오도되지 않고 宗澤과 岳飛의 무리로 하여금 心力
을 펼 수 있게 하였던들 송나라의 융성을 곧바로 기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화의가 국가를 그르치는 것을 종시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마침내 遼・金에게
망하고 말았으니 어찌 통분할 일이 아니겠는가. 지금의 왜적은 곧 송나라
때의 요・금인 것이니 화친 할 수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이 왜적
은 우리나라의 큰 원수로서 영원히 풀 수 없는 원한이 있다. 따라서 화친에
대해 말하는 자는 곧 송나라 때의 진회인 것이다.’라고 합니다.18)
윗글은 1600년(宣祖 33年) 2월에 慶尙兵使로 있던 郭再祐(1552~1617)가
당시 여러 정치적인 사안들에 대해 논하고 사직을 청한 上疏의 일부이다. 윗
글은 그 가운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후 조정에서 다시금 일본과 和親할 것
18) 郭再祐, 忘憂集, 「兵使時棄官䟽」, 한국문집총간 58, 민족문화추진회, 512~514면, “臣
聞論者有云: ‘在昔宋室之亡, 和議誤之也.’ 其時主張和議者, 如秦檜・王倫者, 罪通于天,
千載之下, 孰不欲擢髮而誅之? 如使宋不誤於和議, 而宗澤・岳飛之徒, 得展其心力, 則
宋室之隆, 可立以待也. 惟其誤於和議, 而終始不悟, 故卒亡於遼・金, 豈不痛哉? 今之倭
賊, 卽宋之遼、金也. 其不可和也決矣. 此賊, 乃國之大讎, 而百世之怨也. 其有言和者,
卽宋之秦檜也.”
조선 전기 ‘岳飛’ 故事의 수용과 인물 형상의 정립 과정
- 289 -
을 요구하는 논의가 일어나자 왕에게 상소하여 일본과의 和議를 극력 반대하
는 내용이다. 곽재우는 옛날 송나라가 망한 것은 금나라와의 화의 때문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만약 송나라가 진회 등이 주장한 화의가 아니라 악비가 주장
한 북벌을 추진하였다면 송나라는 분명 다시금 융성할 수 있었을 것이라 확
신하고 있다. 그러면서 곽재우는 송과 遼・金의 관계를 조선과 일본의 경우로
치환하여, 조선이 일본과 화의를 할 경우 송나라의 전철을 밟아 망국으로 이
어질 것임을 말하고 있다. 심지어 일본과의 화친에 대해 말하는 자는 곧 송나
라 때의 진회라고 하며 극력 반대의 주장을 펼치고 있다. 곽재우는 전란 후
일본과의 講和 반대의 명분과 논리적 근거로 악비의 전고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아침에 李舜臣의 碑文을 보았는데, 죽을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殉節한 일
에 이르러서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이는 하늘이
우리나라를 중흥시키기 위하여 이런 훌륭한 장수를 탄생시킨 것이다. 순신
의 재능은 岳飛와 같은데, 더욱 작은 병력으로 큰 병력을 공격하는 데 능하
였다. 그 당시 淸正의 간사한 모략에 빠져 잘못되어 譴罰을 받기에 이르렀고
드디어 元均의 패배가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뒤 순신이 약간의 거북선을
가지고 대적을 격파하였으니, 참으로 쉽게 얻을 수 없는 인재이다.19)
윗글은 1659년(孝宗 10年) 윤3월에 효종이 신하들과 강하는 자리에서 주
고받은 대화의 일부이다. 효종은 임진왜란의 영웅인 李舜臣을 행적을 언급하
면서, 이순신을 송나라 악비에 견주고 있다. 주목할 점은 효종이 악비 관련
고사를 잘 알고 있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이순신의 능력을 견주어 평가하고
그를 칭송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울러 숙종 6년(1680년)에는 임진왜란 때 의
병장이었던 朴光玉(1526~1593)과 金德齡(1567~1596)의 포장을 논하면서
그들의 충정을 악비에 견주고 있다.
19) 孝宗實錄 10年(1659) 閏3月 30日 庚寅, “朝見李舜臣碑文, 至力戰殉節之事, 不覺悌
淚汍瀾. 此天所以爲我國中興, 生此良將也. 舜臣之才, 同於岳飛, 尤善於以少擊衆. 而
其時爲淸正詐謀所誤, 至被譴罰, 致有元均之敗. 其後舜臣, 以若于龜舡, 擊破大賊, 誠
是不易得之才也.”
大東文化硏究 제77집
- 290 -
이렇듯 임진왜란 이전에 수용․형성된 악비 관련 고사와 인물 형상은 주변
이민족들과의 전란을 거치면서, 전란 직전에는 군사적 방비 강화의 논리적 근
거로, 전란 과정에서는 군대의 편제와 훈련의 방법의 전범으로, 전란 후에는
講和 반대의 명분과 논리로, 나아가 전란 과정에서 활약한 무장들을 칭송하
고 포장하는 준거 등으로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諺解․重刊 사업과 악비 고사의 확산
앞서 악비 관련 문헌으로 세종 때 편찬된 三綱行實圖와 선조 때 간행된 精忠錄에 대해 언급하였다. 그런데 이 문헌들은 당시에만 제작․간행되어
유포된 것이 아니라 조선 시대를 전체를 관류하면서 여러 차례 간행되고 유
포되었다. 이에 따라 악비 고사와 인물 형상도 더욱 널리 확산되어 갔을 것임
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먼저 三綱行實圖는 세종 16년(1434년)에 한문으로 간행되었으나, 한글
창제 이후인 成宗 21년(1490년)에 수록 인원수를 본래 110명에서 효자․충
신․열녀 각 35명씩 105명으로 줄이고, 한문 원문에 諺解를 붙여20) 3卷 1冊
의 목판본으로 다시 간행하였다. 그러고는 얼마 후 이를 전국 각지에 두루 배
포하였다.
(상이) 三綱行實圖를 京城의 五部와 八道의 郡縣에 頒賜하고 愚夫愚婦로
하여금 두루 알지 못함이 없게 하라고 명하였다.21)
성종대 삼강행실도에 언해를 붙여서 간행하면서 서울은 물론이고 전국
각지에 두루 반포하여 일반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두루 알게 하였다는 위 기
록을 참고할 때, 그 의도가 백성들의 교화와 관계가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에 충신편 항목의 <악비날배>를 통해 충효를 실천한 신하로서의 악비 형상
20) 참고로 三綱行實圖에 대한 諺解 사업은 성종 12년(1481년) 경부터 시작하고 있었다.
21) 成宗實錄 21年(1490) 4月 1日 癸未, “命頒賜三綱行實于京城五部及八道郡縣, 令愚
夫愚婦, 無不周知.”
조선 전기 ‘岳飛’ 故事의 수용과 인물 형상의 정립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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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민간에까지 널리 확산되어 갔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삼강행실도는 이후
에도 한문과 언해가 합기된 형태로 지속적으로 간행과 頒賜가 이루어지는데,
특히 중종대는 5년과 6년, 10년에 세 번의 인출 기록이 있다. 그 중에서 중종
6년(1514년)에는 무려 2,940질을 간행하여 中外에 반포하게 하였다.22) 이후
明宗 9년(1555년)과 宣祖 14년(1581년)과 英祖 5년(1729년)에도 간행과 반
포가 이루어졌다. 아울러 영조대에는 평안도, 강원도, 황해도, 함경도 등 지방
감영에서도 간행이 이루어졌다.23) 이렇듯 삼강행실도의 지속적인 간행과
반사로 인해, 이 책 소재 악비 고사와 인물 형상도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갔을
것이라 생각된다. 精忠錄의 경우에도 重刊이 이루어졌다. 앞서 선조 18년(1585년)에 책이
간행된 이후, 肅宗 35년(1709년)에 다시 간행되었다. 이보다 앞서 숙종은 악
비에 대한 추숭 사업을 벌이기도 하였다.
내가 宋史를 읽다가 岳武穆의 일에 이르러 나도 모르게 먼 후세에서 서
로 감격하고 千載에 존경심을 일으켰노라. 아, 오랑캐가 猖獗하고 황제의 수
레가 북쪽으로 播遷한 시기를 당해, 慨然히 한 번 국가의 수치를 씻고 제왕
의 공업을 회복하는 것으로써 자기의 임무를 삼아, 和議를 극력 배격하고
충의를 떨쳐서 적군을 격파하여 徽宗과 欽宗의 還國을 얼마 안가서 기약할
수 있었다. …(중략)… 더구나 ‘精忠輔國’이란 네 글자가 분명히 등에 문신
으로 새겨지고, 婦人이 甁을 안고 우물로 뛰어 든 것은 모두가 天性의 자연
스러움이며 忠孝가 감응한 것이니, 이른바 凛凛하기가 마치 白日․秋霜과 같
다고 할 것이다. 내 생각에는 이 악무목을 특별히 永柔의 諸葛武候의 사당에
合享하여 百代의 風聲을 세웠으면 한다.24)
22) 옥영정, 「三綱行實圖 판본의 간행과 유통」, 조선시대 책의 문화사, 휴머니스트, 2008,
45면.
23) 삼강행실도에 관한 보다 상세한 내용은 주영하, 옥영정, 전경목, 윤진영, 이정원이 공동
으로 펴낸 조선시대 책의 문화사, 휴머니스트, 2008를 참조할 것. 이 책에는 서지학, 역
사학, 미술사, 소설사, 민속학의 측면에서 삼강행실도가 갖는 특성과 의의를 잘 설명하
고 있다.
24) 肅宗實錄, 21年(1695) 3月 30日 辛卯, “予讀宋史, 至岳武穆事, 不覺曠世相感, 千載起
敬也. 噫, 當夷虜猖獗, 乘輿北徙之日, 慨然以一雪國恥, 恢復帝業爲己任, 力排和議, 奮
大東文化硏究 제77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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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글은 숙종 21年(1695년)에 숙종이 禮曹에 내린 備忘記이다. 숙종은 악비
의 주요 행적을 언급함은 물론 그의 충심을 가상히 여기기도 하였다. 이에 숙
종은 平安道 永柔縣에 있던 諸葛孔明의 사당에 악비를 合享하도록 하고, 관
련 일을 예조에 지시하였다.25) 이로써 악비는 국가 차원에서 공인된 제갈공
명에 필적하는 상징적인 위상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추숭 사업의 일환으로
숙종 35년에 정충록을 다시 간행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精忠錄을
다시 간행하면서 숙종은 책 서두에 직접 서문을 쓰기도 하였다. 뒤이어 영조
45년(1769년)에도 또 다시 간행하였는데, 영조 또한 서문을 남기고 있다. 따
라서 精忠錄은 세 차례 모두 국왕이 간행을 주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직접
御製序文까지 덧붙임으로써 매우 특별한 위상을 지니게 되었다. 精忠錄은
文史를 아우르는 특성과 또 표기 언어 측면에서 볼 때 분명 사대부 계층과
식자층을 대상으로 한 텍스트로 생각이 되며, 또 세 차례나 간행이 이루어진
것으로 미루어 유통의 범위도 비교적 넓었을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三綱行實圖와 精忠錄의 지속적인 간행과 반
사로 인해, 악비 관련 고사와 인물 형상은 상하 계층은 물론 전국적으로 확산
되어 갔을 것이며, 악비에 대한 不朽의 충신 형상이 계속 이어졌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18세기 초에 중인 신분의 歌客인 金天澤(생몰년미상)에 의
해 편찬된 靑丘永言(1728년)에는 악비에 관한 시조 작품이 無名氏條에 수
록되어 주목을 요한다.
岳鵬擧의 一生 肝膽이 석지 아닌 忠孝ㅣ로다
背上四字 무어시라 엿고
南枝上 一片宋日이 耿耿丹衷에 비최엿다.26)
忠破賊, 兩宮之還, 指日可期, …(중략)… 而況其四字之分明沮背, 婦人之抱甁投井, 莫
非天性之自然, 忠孝之所感, 可謂澟澟若白日秋霜也. 予意欲以此人, 特爲合享於永柔諸
葛武侯之廟, 以樹百代之風聲.”
25) 아울러 英祖 26年(1750) 3月에는 文天祥을 이곳에 함께 배향함으로써, 평안도 영유현의
와룡사는 爲國忠臣을 배향하는 聖所로 거듭나게 되었다.
26) 靑丘永言(진본) #280.
조선 전기 ‘岳飛’ 故事의 수용과 인물 형상의 정립 과정
- 293 -
위 작품은 악비 인물 형상을 바탕으로 작품을 지어냈다. 먼저 악비의 忠孝
가 썩어 없어지지 않을 성격의 것이며 그가 북벌 과정에서 자신의 등에 직접
‘精忠輔國’이라고 문신을 새겨 넣은 일을 언급하면서, 송나라의 국운이 결국
그의 빛나는 충정에 달려 있었음을 말하며 악비를 회고하고 있다.
이렇듯 악비 고사와 인물 형상을 활용한 작품이 국문시가인 시조로까지 창
작되고, 이렇게 창작된 작품이 중인층 歌客에 의해 포착되어 歌集에 수록되
었으며, 이렇게 수록된 작품은 이후에 다시금 도시 유흥 공간에서 노래로 불
리며 향유되었을 것임을 생각할 때,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이미 악비 형
상이 閭巷에까지 두루 확산되어 있었음을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Ⅳ. 結 論
지금까지 본고에서는 조선 전기에 악비 관련 고사와 인물 형상이 여러 문
헌을 통해 수용․형성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또 이렇게 형성된 악비 고사와
인물 형상이 壬․丙 양란기에 어떻게 활용되었는지, 악비 형상이 어떠한 방
식으로 확산을 거듭해 갔는지 등의 문제에 대해 살펴보았다. 앞의 논의를 정
리하는 것으로 논의를 마무리 짓고자 한다.
본고는 우선 한국 고전문학 분야에 등장하는 중국의 역사 인물 가운데 중
국 宋代 무장인 ‘岳飛’에 주목하였다. 우리 문학사에 등장하는 중국의 역사
인물들은 다양하지만, 악비의 경우처럼 무장 출신의 인물로서 주목되어 시와
산문에 두루 활용된 예는 찾기 어렵다. 대표적으로 17세기 황중윤의 소설 작
품인 <천군기>와 <옥황기>, 작자 미상의 <동선기>, 18세기 중국 소설을 국문
으로 번역한 <무목왕졍튱녹> 등이 악비 고사와 인물 형상을 활용하여 작품화
한 경우라 할 수 있다. 본고에서는 시조나 소설 등 문학 작품 속 악비 관련 고
사와 인물 형상이 주로 17세기 이후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바, 그렇다면 악
비 고사와 인물 형상은 이미 조선 전기부터 수용․형성되어 점차 특정한 방
大東文化硏究 제77집
- 294 -
향으로 정립되어갔을 것이라 판단하고 먼저 조선 전기에 악비 관련 고사와
인물 형상이 성립되어 가는 과정을 구체적인 문헌을 통해 탐색하였다.
악비 관련 고사가 한국의 문인들 사이에서 회자되기 시작하는 것은 고려
말 조선 초부터로,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이른 시기의
문헌 자료는 宋史 「岳飛傳」이다. 「악비전」은 기본적으로 무장으로서 여러
전투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여준 악비에 대한 역사적 사실의 기록에 충실하려
는 기술 태도를 보이고 있다. 특히 그가 武勇만 갖춘 것이 아니라, 명실 공히
문무를 겸비한 무장이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아울러 끝부분에 악비의 복
권․추증의 과정까지를 기록해 놓음으로써 악비의 죽음이 당시 송나라 간신
들의 무고와 군주의 실책이 맞물려 발생한 것이었음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송사 「악비전」은 기본적으로 무장으로서 악비에 대한 역사
적 사실의 기록에 충실하면서, 문무를 겸비한 악비의 면모를 부각시키는 동시
에 뛰어난 신하의 능력을 알아보지 못한 군주의 무능을 비판하는 데까지 이
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악비 관련 고사와 인물 형상이 드러나는 또 다른 문헌으로 세종대 간행된
三綱行實圖를 들 수 있다. 삼강행실도에서는 악비가 「충신」편 항목의 35
명 가운데 하나로 뽑혀 있다는 그 자체로 해당 인물의 특성이 규정된다. 즉,
삼강행실도 「충신」편에 선택됨으로써 악비는 자연스레 충신으로 규정되고
있는 것이다. 삼강행실도 「악비날배」 항목에서는 악비의 죽음이 충효를 실
천하는 과정에서 맞은 장렬한 죽음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가 보여준 충효의
실질은 외적에 맞서 싸우면서 국토를 회복하고 국치를 설욕하고자 孤軍奮鬪
한 것인데, 이러한 그의 충효는 본래부터 타고난 것이라고 평가함으로써 악비
를 儒家의 가치를 내재하고 체현한 훌륭한 인물로 격상시키고 있다. 이로써
악비는 장수로서 모범을 보이며 三綱의 덕목을 실현한 충신의 형상으로 거듭
나게 되었다.
이후 宣祖 18년(1585년)에 악비에 관한 이전 시기까지의 여러 문헌들을 총
망라하면서 악비의 인물 형상을 확정한 문헌이 출현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會纂宋岳鄂武穆王精忠錄이다. 이 精忠錄은 6卷 4冊의 분량을 통해 악
조선 전기 ‘岳飛’ 故事의 수용과 인물 형상의 정립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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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 圖像, 악비에 대한 역사 관계 기록, 악비의 저술, 고금 인물들의 악비에
대한 稱評, 관련 시문 등을 총괄하고 있어 실로 당대까지 나온 악비와 관련된
모든 자료를 집대성한 문헌이었다. 이러한 문헌이 중국과 조선에서 동시에 간
행되고 유포됨으로써 이제 악비에 대한 인물 형상은 이전 시기에 형성되었던
문무겸전과 충효의 실천을 아우르고, 나아가 흠잡을 데 없이 온전한 不朽의
충신 형상으로 정립되기에 이르렀다.
역사적으로 볼 때, 악비 관련 고사는 中華와 이민족의 대결 과정을 드러내
고 있다. 조선의 경우도 임․병 양란이 발발하면서 일본․만주족 등 주변 이
민족들과의 대결 구도 속에서 국가적 위기에 잘 대응했던 좋은 선례로써 악
비가 주목되게 되었다. 이렇듯 임진왜란 이전에 이미 수용․형성된 악비 관련
고사와 인물 형상은, 전란 직전에는 군사적 방비 강화의 논리적 근거로, 전란
과정에서는 군대의 편제와 훈련의 방법의 전범으로, 전란 후에는 講和 반대
의 명분과 논리로, 나아가 전란 과정에서 활약한 무장들을 칭송하고 포장하는
준거 등으로 다양하게 활용되기에 이른다.
게다가 악비 관련 문헌인 三綱行實圖와 精忠錄은 조선 전기에만 제
작․간행되어 유포된 것이 아니라 조선 시대를 전체를 관류하면서 여러 차례
간행되고 유포되었다. 삼강행실도는 한문과 언해가 합기된 형태로 지속적
으로 간행과 頒賜가 이루어졌기에 상하 계층과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갔을 것
이라 생각된다. 精忠錄은 선조, 숙종, 영조대에 걸쳐 모두 3차례 간행되었
는데, 숙종과 영조의 경우에는 책의 서두에 직접 서문을 쓰기도 하였다. 즉
국왕이 간행을 주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직접 御製序文까지 덧붙임으로써 이
精忠錄은 매우 특별한 위상까지 지니게 되었다. 이렇듯 삼강행실도와
精忠錄의 지속적인 간행과 반사로 인해 악비에 대한 不朽의 충신 형상이
광범위하게 확산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상 조선 전기에 수용・형성된 악비 관련 고사와 인물 형상이 하나의 문학
적 토양으로 자리매김을 하면서, 조선 후기에 시조, 소설 등의 갈래에서 작품
의 창작과 향유의 측면에서 영향을 끼치게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본고는 악비 관련 고사와 인물 형상이 조선 후기 문학사에서 어떠한 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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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고일: 2012.1.19 심사일: 2012.2.14 게재확정일: 2012.2.21
으로 작품화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 하는 추후 연구의 발판을 마련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앞에서 언급한 작품들에 대한 연구
를 계속 이어갈 것이다.
조선 전기 ‘岳飛’ 故事의 수용과 인물 형상의 정립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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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宋史
․三綱行實圖
․會纂宋岳鄂武穆王精忠錄
․黃中允, 「天君紀」, 「玉皇紀」
․작자미상, 「洞仙記」
․大宋中興通俗演義(80장본)
․「무목왕졍튱녹」,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본
․成宗實錄
․睿宗實錄
․宣祖實錄, 宣祖修正實錄
․孝宗實錄
․肅宗實錄
․英祖實錄[http://sillok.history.go.kr]
․承政院日記[http://sjw.history.go.kr]
․靑丘永言(진본)
․李存吾, 石灘集, 한국문집총간 6, 민족문화추진회
․鄭道傳, 三峯集, 한국문집총간 5, 민족문화추진회
․柳成龍, 西厓集, 한국문집총간 52, 민족문화추진회
․趙憲, 重峯集, 한국문집총간 54, 민족문화추진회
․郭再祐, 忘憂集, 한국문집총간 58, 민족문화추진회
․옥영정, 「三綱行實圖 판본의 간행과 유통」, 조선시대 책의 문화사, 휴머니
스트, 2008, 45면
大東文化硏究 제77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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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cess of accepting event of 'Yue Fei' and forming
image of Yue Fei in early Joseon
Cho, Ji-hyoung
This study drew attention on 'Yue Fei(岳飛)' who was an admiral in Song
dynasty among Chinese historical figures appeared in Korean classical
literature and explored process of accepting event of Yue Fei and forming
image of Yue Fei in early Joseon through several documentary records.
Furthermore, this study investigated how event of Yue Fei and formed
image of Yue Fei were used in two events of Japanese invasion of 1592 and
Manchu Invasion of 1636, how formed image of Yue Fei had been
developed.
The earliest documentary record where event related to Yue Fei can be
identified is History of the Song(宋史)「the story of Yue Fei(岳飛傳)」. In
the 「the story of Yue Fei」, historical facts about Yue Fei as an admiral were
substantially recorded, while aspects of having both literary and military
accomplishments were stressed. At the same time, this story even criticizes
inability of King who could not see excellent ability of vassal.
Samganghaengsildo(三綱行實圖) published in King Sejong includes Yue
Fei in the section 「Loyal Subjects」. So Yue Fei is regarded as a royal
subject. Yue Fei, as an admiral, fought against foreign enemies to recover
national land and to vindicate national disgrace with all his efforts. Based on
his this career, his image as a royal subject was made - Yue Fei is described
as a figure who had value of Confucianism and embodied such a value.
Hoechansongakakmumokwangjeongchungrok(會纂宋岳鄂武穆王精忠錄)
published in King Seonjo contains all the literatures related to Yue Fei until
then and definitely defined image of Yue Fei. This book includes
iconography of Yue Fei, historical records about Yue Fei, books written by
조선 전기 ‘岳飛’ 故事의 수용과 인물 형상의 정립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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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e Fei, assessment about Yue Fei, related poetry and writings etc. - all the
materials about Yue Fei were collected. Such literature was published and
distributed both in China and Josen at the same time. This definitely made
image of Yue Fei as a permanent royal subject without flaw and Yue Fei is
described as a figure who had both literary and military accomplishments,
and implemented loyalty and filial piety.
Historically, it can be said that event related to Yue Fei discloses
showdown between China and different ethnic groups. For Joseon, because
two events of Japanese invasion of 1592 and Manchu Invasion of 1636
show appearance of showdown between different ethnic groups, Yue Fei
was paid attention as a case where national crisis is well responded.
Accordingly, event of Yue Fei and his image was variably used like these -
just before wars, as a basis of logic for strengthening military defense;
during war, as a model of military organization and training method; after
war, justification and logic to oppose treaty; furthermore standard to praise
and encourage military commanders who acted in wars.
On the other hand, since then, major literatures related to Yue Fei such as
Samganghaengsildo and Jeongchungrok were continuously published and
distributed. Samganghaengsildo was published and distributed several
times in the form of being written in Chinese letter and vernacular
translations together. Jeongchungrok was published three times during
Seonjo, Sukjong, and Yeongjo - Sukjong and Yeongjo themselves wrote
preface of the book. Thus, Samganghaengsildo and Jeongchungrok were
continuously published and distributed. As the result, it is thought that image
of permanent royal subject about Yue Fei was widely expanded.
In the end, through this process, event of Yue Fei and image of Yue Fei
accepted and formed in early Joseon became one of literary soil. And it is
thought that this affected creation and enjoyment of work in the Sijo, novel
etc. since the 17th century.
Key Words : Yue Fei, figure image, History of the Song, the story of Yue Fe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