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신들의 신을 찾았다!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매우 정직하고 성실한 분들이었다. 누구에게도 거짓을 말하지 않았으며 부정직한 수단으로 돈을 버는 것은 매우 수치스러운 짓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아버지는 유교 학자로서 성현들이 남긴 수많은 말씀을 암송하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성장한 나는 매우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았다. 항상 충성과 효도에 대해서 배웠기 때문에 기독교회에서 가르치는 교훈들이 나에게 별다른 감동을 주지 못했다. 내가 가지고 있던 윤리와 사상은 기독교의 그것에 비해서 전혀 손색이 없다고 확신하였다.
집안 전체가 유교를 믿었지만 동시에 미신에 깊이 빠져 있었다. 조상의 혼이 살아서 우리 가문을 지켜 준다는 조상 신을 섬겼으며 가문의 번영에 도움이 된다는 신들을 찾아다니며 섬겼다. 이런 신, 저런 신을 섬기면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세상에 수많은 신이 존재하는데, 나의 이 작은 영혼으로써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신을 만족하게 하기는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그러나 신들을 섬기지 않으면 집안에 문제가 생기고 벌을 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기회가 되는 대로 신들을 찾아가 봉사와 재물을 드렸다. 신을 이용해서 가문의 영광과 번영을 지키기 원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구원이 찾아왔다. 친구들이 찾아와서 영어로 예배드리는 교회를 다니자고 했다. 영어를 배우고 싶은 마음에 나는 즉시로 친구를 따라나섰다. 나에게 기독교 신앙을 강요하지 않는 동안 기독교는 내게 큰 기쁨을 주었다. 영어를 배우고 좋은 음악을 들으며 친절한 교인들을 사귀고 유익한 교훈이 담겨 있는 성경 이야기를 듣는 것은 내게 커다란 즐거움이었다.
주일에 교회 가는 것은 내게 진리 탐구가 아니라 즐거운 일요 산책 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교회의 목사와 교인들은 기독교의 가르침을 믿으라는 말을 하기 시작하였고 금전적으로도 희생해야 한다는 요구를 받기 시작하자 나는 그러한 요구를 정면으로 거절하였다.
일주일에 하루는 예배를 위하여 따로 구별해야 하며 그날은 공부나 오락을 해서도 안 되고 장사를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희생으로 여겨졌다. 더욱이 어려서부터 유교에 깊이 젖어 있는 우리 가정에서 외국의 신을 받아들이라는 것은 매우 어려운 요구였다. 함께 나온 친구들은 모두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지만 나는 홀로 그것을 거절하였다.
기독교회의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이고 십계명 중 둘째 계명도 하나님의 형상을 돌이나 나무에 새기지 말라고 금했지만, 내가 믿고 있던 신은 나무와 돌로 만들어진 신이었다. 성경의 하나님은 이 우주를 창조한 하나님이지만 내가 믿는 신은 그 근본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신이었다. 그 당시 내가 느꼈던 궁지와 허전함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 다음 주말 나는 교회에 가는 대신에 내가 믿는 신을 찾아가기로 했다. 쇠를 녹여 부어서 형상을 만들고 그 위에 금으로 색칠한 우상에게 수없이 절을 하면서 기도하였다. 내 속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종교에 대한 열을 신속히 소멸시키시고 나에게 기독교의 하나님을 강요하는 무리에게 벌을 내려달라고 간구하는 기도를 드렸다. 그러나 기도를 하면 할수록 내 속에서 한 음성이 들려왔고 나는 그 음성과 논쟁하기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했지만, 그 음성의 진실함을 부정할 수 없었다.
너는 어디서 왔는가? 네 부모와 조상은 어디서 왔는가?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이 세상은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떻게 끝나게 되는가? 네가 믿는 신들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줄 수 있는가? 오직 성경의 하나님만이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있는가? 신들의 신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성경의 하나님이시다! 오랜 시간 동안 나는 이러한 음성과 싸웠다.
밤낮으로 나는 양심의 음성과 논쟁을 펼쳤지만 나 자신을 속일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그동안 내가 믿던 신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성경의 창세기는 나에게 이 세상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인류의 역사가 어떻게 출발하였는가를 밝혀 주었다. 어떻게 죄의 역사가 시작되었고, 왜 슬픔과 고난이 생겼는지를 규명해 주었다.
다니엘과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예언을 이 세상 역사와 대조해 보면서 하나님의 예언이 역사 속에서 정확하게 성취된 것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이 세상이 결국에는 어떻게 끝나게 되고 누가 최후의 승리자가 될 것인지를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왜 뉴턴과 같은 위대한 과학자가 하나님을 믿는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돌 우상이나 나무 우상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신들의 신을 찾게 된 것이다! 나의 이성과 양심은 신은 하나라는 사실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신들의 신이신 하나님이 나의 방패가 되어 나를 보호하는 이상, 정기적으로 사당을 찾아가 절하지 않고 무당에게 돈을 주고 굿을 부탁하지 않을지라도 내게 벌을 내릴 다른 신이 없다는 사실이 마음속에 평안을 가져다주었다. 이제 더 이상 여러 신들을 찾아다니면서 그들의 진노를 풀어 줄 필요가 없게 되었다. 죽은 조상의 혼을 달래려고 좋은 음식과 술을 때마다 준비할 필요도 없게 되었다.
복을 빌려고 보기 흉한 죽은 짐승의 머리를 상 위에 올려놓지 않아도 되었다. 건강과 행복을 위해서 누구에게 가서 빌지 않아도 되었다. 단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과 지혜를 신뢰하면, 그분께서 모든 것을 알아서 인도해 주신다. 그것이 길이든지 흉이든지 화가 되던지 복이 되던지 상관없다. 우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믿고 따라가면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기 때문이다.
온 마음을 다하여 예수를 믿는 자가 되자 새로운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미신들로부터 자유롭게 된 나의 마음과 영혼은 새를 보고 꽃을 보아도 그 속에서 창조의 신비와 지혜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세상을 다시 보게 되었고 돈과 학문에 대한 목적이 새롭게 정립되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목적과 동기가 바뀌었으며 전에는 가치 없게 여기던 것들에게 중요한 가치를 부여하게 되었다. 내가 나를 보아도 다른 사람이 되었으며 가족과 친구들이 나를 보아도 다른 사람이 되었다.
지금까지는 죄를 좋아했지만, 이제 의를 사모하는 사람이 되었다. 지금까지는 우상의 눈치를 보면서 살았고 이 세상을 위해서 살았지만, 이제는 새로운 주인인 그리스도께 충성을 맹세하였다.
우상과 하나님의 차이
우상은 외모를 중시하고 사람의 마음을 압도하기 원하기 때문에 그 겉모습에 금가루를 칠하거나 화려하게 꾸민다. 우상을 섬기는 사람도 선을 행하지만, 그 동기는 우상에게 잘 보여서 복을 받고 내세에 더 나은 신분을 얻기 위함이다. 우상을 믿는 종교의 중심에는 우상이 앉아 있어서 신도들로부터 돈과 재물을 거두어들이고 복을 나누어 준다고 가르친다. 오늘날 기독교가 타락하여 하나님을 잘 믿어야 복을 받게 된다는 설교들이 빈번하게 흘러나오는데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대신에 돈과 우상을 섬기기 때문이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충성을 바치는 이유는 하나님은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중요하게 생각하시기 때문이다.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삼상 16:7). 그분은 항상 나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혹시 내가 실수를 해서 잘못을 범하여도 내 중심을 아시기 때문에 사람들은 나를 책망하고 원수 취급할지라도 그분께서는 나를 이해하시고 용서하신다. 이것이 그분을 따라가는 동안 내 영혼이 줄곧 평안을 누리게 되는 이치이다. 그러나 내가 육체의 욕심에 이끌려 죄를 범하고 품으면 그분께서는 즉시로 나를 찾아오셔서 양심을 괴롭히시고 성령으로 나를 책망하시기 때문에 나로 하여금 죄를 오랫동안 간직할 수 없게 하신다. 이것이 내가 그분의 은혜에 일생 빚진 자가 되어 따라가는 이유이다.
바라보는 대로 변화한다는 것은 인생의 철칙이다. 우상은 섬김 받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우상을 바라보는 사람들도 섬김을 받기 원하며 높은 자리에 앉아서 지시하기를 원한다. 기독교의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섬김 받기 원하고 높은 자리를 탐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아니라 우상을 섬기는 자들이다. 하나님은 섬김을 받기보다는 섬기기를 원하고 당신이 섬기는 사람을 위해서 죽기까지 하신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 20:28). 이것이 교만한 인간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구원의 과학이다. 마음에 교만을 품고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받기도 원치 않는다.
우상은 화가 나면 자신을 섬기던 사람에게 불행과 질병을 가져다 주지만, 하나님은 당신이 섬기는 사람들의 구원을 위하여 때때로 불행과 질병을 허락한다. 동쪽과 서쪽이 멀 듯, 하나님은 우상과 다르다. 하나님의 모든 관심은 인간의 구원에 집중되어 있다. 그래서 구원을 위해서라면 경제적인 어려움도 주시고 때때로 직업도 빼앗으며 질병도 허락하신다. 사람의 마음에 참된 겸손과 온유를 심어주기 위해서 세상에서 천한 멸시를 받도록 하시며 세상에서 티끌처럼 살도록 인도하신다.
하나님이 추구하는 선은 겉으로 드러나는 선이 아니라 속 사람의 선이다. 이것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인내하신다. 자녀들의 성장을 위해서 고통을 허락하고 지켜보는 아버지의 심령을 우리는 알지 않는가?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갈 4:19). 우상이 행하는 선과 하나님이 행하는 선은 다르다.
우상은 작은 구원만을 가르치지만 하나님은 큰 구원을 베푸신다. 우상은 가난한 자의 배를 채우고 지위를 향상시키며 그들을 위해서 재물을 사용하라고 말하며 정치를 개혁하라고 요구한다. 우상은 이 세상의 상태를 개량하라고 말하고 도덕을 가르친다. 그러나 그것은 작은 구원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큰 구원을 통하여 죄를 없애신다. 신들의 신인 하나님을 올바로 이해하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막혀 있던 담이 무너지고 평안을 가져오는 큰 구원이 이루어진다.
큰 구원을 받아들이면 작은 구원은 저절로 사람의 생애 속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하나님께 진정으로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으면 가난한 자를 위로하고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는 작은 구원을 베풀면서 살아가게 된다. 천국에서 영원히 살기 위한 수단으로 선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받은 하나님의 큰 구원이 너무나 감사하고 감격스럽기 때문에 작은 구원을 베풀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신들의 신이신 하나님을 만나면 모든 우상과 잡신들로부터 해방될 뿐 아니라 나 자신에로부터 해방된다. 나를 붙잡고 있던 불안과 두려움과 이기심과 탐욕으로부터 해방되면 드디어 영혼의 평안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세상이 감당하기 어려운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살아갈 때 온 세상은 그러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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