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지하에도 물이 흐른다 - 상징과 은유 (2004-04-01)
소설을 거울에 비친 것으로 인식하는 의견에 우리는 꽤 익숙해져 있다. 이른바 세계를 반영하는 것이 소설이라는 생각. 여기에는 두 가지 요소가 들어 있다.
세계가 그 하나이고, 거울이 다른 하나이다. 세계가 있고, 세계를 비추는 거울이 있다. 세계는 복잡하고 무질서하고 혼란스럽고 어지럽다. 세계는 둥글기도 하고 갸름하기도 하고 반짝거리기도 하고 어둡기도 하고 딱딱하기도 하고 물렁물렁하기도 하고 반듯하기도 하고 삐뚤빼뚤하기도 하고 깊기도 하고 높기도 하다. 둥글기만 한 것도 아니고 어둡기만 한 것도 아니고 반듯하기만 한 것도 아니고 깊기만 한 것도 아니다. 그 모든 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이다.
소설은 종잡을 수 없는, 이것이면서 저것인, 그러나 이것만도 아니고 저것만도 아닌, 무정형의 세계를 비춘다. 그러나 세계가 그렇다고 소설 속에 비친 세계마저 종잡을 길 없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소설을 통해 반사되는 순간 세계는 일정한 형태를 얻는다. (얻어야 한다) 무정형의 세계에 형태를 부여하는 작업이 소설 쓰기인 까닭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거울의 반사면이다. 거울은 감정도 욕망도 생각도 없는 죽은 물체가 아니다. 거울은 세계를 비추되 자신의 감정과 욕망과 생각에 따라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고 형태를 부여해서 비춘다. 거울을 통과해 나온 세계는 거울의 반사면(의 감정과 욕망과 생각)에 의해 정리되고 해석되고 재구성된 세계이다.
어떤 거울은 예쁘게 비추고 어떤 거울은 날씬하게 비춘다. 거울이 다 같은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거의 같지만 그러나 똑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거울의 표면이 다 다르니까 비추는 것도 다를 수밖에 없다. 소설에서 세계를 정리하고 해석하고 재구성하는 역할은 작가의 세계관과 욕망과 체험이 맡아 한다. 세계를 반영하는 소설이 다 다른 것은 그것을 비추는 작가의 세계관이나 욕망이나 체험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세계를 무시하고는 소설을 생각할 수 없지만 (왜냐하면 세계를 비춰야 하니까), 또한 작가의 세계관이나 욕망이나 체험에 의해 정리되고 해석되고 재구성될 때만 (왜냐하면 세계를 다르게 비춰내야 하니까) 소설이 생겨난다는 깨달음에 이른다.
사건이나 현상을 그저 서술하거나 묘사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런 소설을 읽으면 독자들은 대개 ‘그래서 어쨌다는 말이야?’하는 반응을 보인다. 이 반응의 속내에는 적어도 세 가지 생각이 숨어 있다.
‘무슨 소린지, 혼란스럽군’이 그 하나이고, ‘그 정도는 나도 알아’가 다른 하나이고, ‘그러니까 그게 당신에게 무엇인지를 말해 봐’가 또 다른 하나이다. 예컨대 소설 독자들은 맨-현실을 보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거울에 비친 현실을 보려고 하는 것이다. 거울을 통해 일정한 형태를 부여받은 세계를 보려고 하는 것이다. 작가인 거울. 작가의 욕망이며 세계관인 거울의 반사면.
자명해진 사실은, 세계에 대한 해석이 없이는 소설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해석은 담론의 수준이어서는 안 된다. 소설은 말하는 자가 아니고, 소설은 말이 아니다. 담론은, 소설이 되기 위해, 아무리 튼튼한 담론이라고 하더라도, 아니, 튼튼할수록 더욱 더, 스스로 몸을 해체하여 다른 몸으로 변신하여야 한다. 예컨대 메타포나 상징.
양귀자가 쓴 「한계령」이라는 소설에서 우리는 나이트클럽에서 노래를 부르는 밤무대 가수인 초등학교 동창생과의 우연한 전화 통화를 통해 화자가 술회하는 유년기의 구질구질한 과거사와 현재의 스산한 삶에 대해 듣게 된다. 사연은 곡진하고 나름대로 절실하지만 그러나 어찌 보면 그렇고 그런 이야기이다. 뭐 대단한 이야기라고,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하는 투정이 새어나오려고 할 즈음에, 작가는 ‘저 산은 내게 내려가라, 내려가라 하네……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운운 하는 「한계령」이라는 노랫말을 들려 준다. 그렇게 하여 이 그렇고 그런 이야기는 불현듯 빛을 발하며 떠오른다. 소설이 되는 찰나이다.
임동헌이 쓴 소설 가운데 「아이 러브 토일럿」이 있다. 사기를 당해 빈털터리가 된 사나이가 틈을 내어 사기꾼들을 찾아다닌다는 외연을 가진 이 소설에서 작가는 일주일치의 배변을 위해 일부러 덜컹거리는 교외선 기차를 타고 기차 화장실에 들어가는 변비 환자의 사연을 병치한다. 기차 화장실에서의 변비 해결이라는 에피소드는 주인공의 비참하고 갑갑한 현실을 훨씬 더 잘 이해하게 할 뿐 아니라 현실의 다른 층을 보여 줌으로써 소설의 품을 만드는 데 기여한다.
한 맥주 회사는 한때 ‘지하 1백 50미터 암반층에서 퍼 올린 암반수’를 내세움으로써 맥주 시장을 장악했다. 술 소비자들의 관심을 끌어 모은 것은, 내가 생각하기에, 그저 ‘1백 50미터 암반층’이었다. 깊은 층에서 퍼 올린 물에 대한 신뢰가 이 맥주를 선택하게 한 요인이 아니었을까.
소설도 층을 가져야 한다. 두 개, 세 개의 층을 갖추어야 한다. 이루어지기 어려운 힘든 사랑을 하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소설로 쓴다고 하자. 소설은 그들이 자동차에서 만나 데이트하는 장면, 몰래 모텔에 들어가는 장면, 서로를 껴안고 불안해하거나 안쓰러워하는 장면을 보여 줄 것이다. 죄의식을 토로하는 장면이나 자책하는 장면을 보여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소설은 대체로 현실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러나 그것만이라면 어쩐지 허전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어쨌단 말이야? 하는 질문과 맞닥뜨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 소설은 비유하자면 지표수의 물로 만든 맥주와 같다.
그러나 만일 이 사랑을 현실(지상)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으로 인식한 주인공들의 지하(비현실)에 대한 꿈꾸기나 신화 속의 인물에 대한 동일시의 과정을 보여 준다면 소설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층이 생기니까.
**비현실에 대한 꿈꾸기.....신화 속의 인물에 대한 동일시.....(이게 뭘까?)
상징과 은유와 이미지를 적절하게 이용하라. 지하에도 물이 흐른다는 걸 생각하라. 지하 깊은 곳에 암반층이 있다는 걸 생각하라.
출처 : 시를 사랑하는 서정마당
글쓴이 : 같은세대 원글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