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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트남전 당시 파월 한국군 사령관으로 유명하다. 비교적 덜 알려져 있기는 한데 사실 한국 전쟁 당시 '백골병단'이라고 불리는 게릴라 부대를 이끌고 북한군 점령지를 돌며 후방 교란을 펼쳐 전과들을 다수 올렸다. 이때의 전공과 경험들은 국군 전사 연구나 실전 사례 교육에서 비중이 높게 다뤄지고 있다.
매주 수요일 일선 부대에서 이뤄지는 정훈교육 때 채명신의 존함과 행적을 언급하고 나면 분위기가 좋은 쪽으로 달라지더라는 경험담이 있을 정도로 계급, 연령, 정치 성향을 불문하고 존경받는 원로였다.
2. 생애
2.1. 월남 장교
본래 황해도 곡산군 출신으로 독립운동가로 투옥당한 아버지를 대신해 가장 노릇을 했다. 평양사범학교를 졸업 후 평양 인근에서 교사로 재직하던 중, 평양학원장으로 부임한 김책이 일대의 교사들을 모아 강연하는 곳에 참석했다가 그가 독립투사 가족에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알고 있다는 이유로 주목되었다. 이후 김책과 가까웠던 김일성으로부터 평양에서 일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전에 대면했던 한 소련 간부가 주둔지로 초청해 자신은 4등급 식사를 한다고 말하며, "만인이 평등하다는건 허구"라 언급한 일을 기억했기 때문에 거절했다고. 그 뒤 서울로 월남했으나 친척이나 지인도 없어 막막하던 중, 아버지와 인연이 있었던 이정규, 유림 선생을 떠올리고 식객으로 머물며 신학교에 입학하려 했다. 이후 세종대학교의 전신(前身)인 경성인문중등학원에 입학하여 1944년 졸업하였다. 경성인문중등학원 졸업 후, 나날이 군비를 증강하는 북한에 비해 남한은 전쟁으로 어지러웠기에 총을 잡기로 결심,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5기로 입학해 전국에 3곳 중 하나인 전라북도 익산의 3연대에서 훈련을 받으며 교사 경험을 살려 우수한 성적을 거둘 수 있었고 제주도 9연대로 발령났다. 하지만 당시 육군사관학교에서 머나먼 제주로 간다는 것은 유배나 다름없는 것으로 여겨진터라, 채명신 자신도 성적이 우수한데도 제주에 가게 되어 실망했다고 회고록에 서술하기도 했다.
회고록에서 처음 부임했을 때, 소대장인 채명신 자신을 보는 소대원들의 눈빛은 호기심의 눈빛이 아닌 육지에서 온 앞잡이로 간주하는 증오심의 눈빛이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아무튼 육군사관학교 성적이 우수했던 지휘관 채명신을 회유하고자 남조선로동당측 사람들이 미인 처녀를 동원하기도 했지만, 채명신 본인이 욕념을 억누르고 자리를 떠나 연루되는 일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제주에서 자신이 겪은 북한의 실상을 말하며 설득하려 했지만, 육지에서 온 자신을 적대하는 시선을 완전히 바꾸지는 못했으며, 부대원 일부가 쏜 총탄에 암살당할 위기를 겪는가 하면, 직속 상관인 문영길 2중대장이 연대장을 암살한걸 계기로 9연대 내 동조자들이 모두 한라산으로 도망가 빨치산에 가담하는 등 군 안팎의 혼란상을 경험하게 된다. 제주 4.3사건이 본격화되자 채명신 소위는 강성의 지휘관들이나 족청 계열 사람들의 학살 움직임에 부화뇌동하지 않았으며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강행한 이승만 정권에 부정적이었던 경비대 인사들과 대립하는 와중에도 이들의 태도를 변화시키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7년 동안 섬 인구 1/10 이상이 죽어간 극한 상황에서 주민들의 협조가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는걸 깨닫고 가급적 억울한 죽음을 막으려 한 것.
그 뒤 수원의 11연대로 발령난 뒤 인천에서 복무하던 중 월남한 어머니와 재회해 만석동에 새 터전을 잡았으며, 개성 송악산에서 4중대장이 되어 고지전을 치르게 된다. 4중대와 채명신의 육군사관학교 동기 김영직 대위의 하사관 교육대가 각각 좌측 송악산과 우측 비둘기 고지 탈환에 투입됐는데 공격 때 따발총에 왼쪽 가슴을 맞아 쓰러지기도 했다.
다시 빨치산 토벌을 하던 2사단 25연대 1대대 2중대장으로 발령됐는데, 중대 간부들은 지원금을 횡령하고 병사들조차 빨치산과 서로 경쟁하듯 일대에서 약탈을 해 민폐를 끼치고, 점호도 하는 둥 마는 둥 군기도 엉망인 당나라 군대임을 파악하게 된다. 이에 말썽을 일으킨 이들에게 얼차려(기합)를 부여하고, 거리를 청소하는 한편 용모가 좋은 병사들을 골라 경계 지원에 적극 나섰으며, 횡령을 막고 약탈로 충당하던 부족분을 현지 주민들에게 정식으로 사들임으로서, 등돌린 민심을 회복하고자 진력한다. 덕분에 지역 주민들의 제보가 잘 들어오게 되었고, 이 경험은 훗날 남베트남의 대 게릴라전에 유용하게 활용된다.
2.2. 6.25 전쟁
빨치산을 소탕하던 나날이 계속될 즈음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시작된 북한군의 남침을 전해들은 채 중대장과 병력들은 완전히 포위당하기 전 산을 타고 내려가 7월에 8사단에 합류, 낙동강 이남에서 벌어진 안동·의성전투에서 21연대 1대대 중대장(곧 대대장대리가 됨)으로 부임해 영천 전투를 치른다. 이후 인천 상륙 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돼 한창 북진을 하던 중 1950년 12월 청천강 전투에서 중공군의 물량 포위전에 부대가 와해되었을 때 대대원들 중 50여 명을 제외한 나머지를 먼저 내려가게 한 뒤 포위당한 김영노 연대장과 3대대장인 문용섭 소령을 구해낸다. 그 후 70여 명을 재편성해 채명신의 척후분대와 문용섭의 경호소대로 나눠 국군복을 입은 상태에서 능선을 타고 남하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공산군을 마주칠 확률이 높았는데 어수룩하거나 현지 사정을 모르는 중공군은 간단한 인사나 중국어 회화로 보내고 경계심이 많고 소수일 경우 은밀히 처치하며 내려갔다. 이 와중에 북한 주민들이 국군복을 미심쩍게 여길 경우 "남조선 군복을 입고 특작 중인 인민군"이라고 둘러댔다고 한다.
그러나 남하 도중 심신이 지친 연대장이 "닭 1마리만 먹고 가자"며 주저앉는 바람에 별 수 없이 협박조로 마을 하나를 점거했다. 그러나 빨리 배를 채우고 빠져나가야 하는데도 연대장이 계속 꾸물대자 권총을 겨누고 "연대장님 때문에 떼죽음 당할 수 없습니다"라며 강권해 이동을 하기는 했지만 채명신의 우려대로 추격조가 와서 뿔뿔이 흩어지는 등 난리가 났고 연대장의 행방을 알지 못한 채 문용섭을 포함한 8명만 남았다. 그러나 얼마 안가 일대로 중공군이 지나가는 통에 문용섭과도 헤어졌고 그 뒤 정용식 상사, 김영호 중사와 남하하다 민가에 들어가 주린 배를 채우던 중 주민 제보로 북한군이 집을 포위하자 전의를 잃고 나머지는 투항하라고 하고 자신은 권총으로 자살하려고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으나 불발이 났고 직후 정용식이 권총을 쥔 손목을 억세게 내려치며 "죽지 말라는데 왜 죽습니까!"라며 만류해 이를 하늘의 뜻이라 생각하고 마음을 고쳐 방으로 들어오는 북한군을 사살하고 다른 병사들의 총알 세례를 피해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2.2.1. 북파부대 지휘관
그 후 황해도 연백군까지 내려가 그곳에 잔류 중인 반공 청년들과 함께 강화도까지 도하 후 죽창이 대부분인 그들의 무장을 보고 정면 대결은 무리니 산으로 올라가 게릴라 활동을 하는게 낫다고 권고하고 배를 타고 충청남도 당진까지 내려가 그곳의 헌병대장인 송효순 중령에 의해 대구로 가서 송악산 시절의 상관인 최경록 장군을 만나 이제 중공군들이 주력이 됐고 그들은 민가로 오긴 해도 일방적으로 민폐를 끼치지 않으며 항공기에 기겁을 한다는 정보를 전달 후 연대장에 대한 미안함과 강화도의 청년들이 걱정돼 적지 돌파 경험을 살려 북파 부대 지휘관을 자처한다. 이 부대는 북한군의 침공 초기 패색이 짙을 때 적진에 침투시킬 비공식 부대로 결성되기는 했지만 창설 요원들의 증언을 살펴보면 상부에서도 뭘 기대하고 만든 것보다는 그냥 찔러보기 소모품 정도로 생각한 것 같다. 부대원들 대부분은 북한 출신 반공 청년과 피란민들로 적지에서 활동한 경험자는 지휘관인 채명신 대위뿐이었다. 그래서 사격은 물론 지도도 볼 줄 몰라 그에 따라 훈련 기간도 늘 수밖에 없었는데 위에서 자꾸 재촉하자 "이대로 보내면 그냥 죽을 수밖에 없다"며 항의를 했으나 지휘관에서 제외당했다.
그러나 이런 어중이 떠중이들을 차마 보낼 수 없어 이 임무에서 생환한 비정규 대원들을 정규군에 편입해달라는 조건을 달고 채명신 자신도 일선 대원들과 함께 강원도 영월로 향한다. 그곳에서 인민군복을 입고 유격 11연대를 이끌었으며 이후 이두병 소령의 유격 12연대, 김한철 대위의 유격 13연대들을 규합해 500~600여 명급으로 만들었고 대한민국 육군본부에서는 채명신에게 유격 부대들을 지휘할 것을 명령해 그는 이 부대에 '백골병단'이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을 붙였지만 제3보병사단, 특히 원조 백골 부대인 진백골 18연대와의 관계는 별개의 월남자 부대장인 채명신이 같은 동기로 자칭한 것 외에는 공통점이 없다.
그 뒤 능선에서 매복을 하다 전령을 덮쳐 동해안에 있던 69여단 본부의 위치를 알아낸 뒤 이 정보로 유엔군의 폭격이 끝나자마자 돌입해 털어버리고 북한 유격대장 중 하나인 길원팔을 생포 후 자결할 기회를 주고 그의 군인됨에 경례를 했다. 이후 공산군의 추격을 피해 설악산 능선을 타고 남하하며 중공군 대부대와 마주치면 태연하게 중국어로 인사를 건내 경계심을 풀고 지나가게 하고 소수라면 즉석에서 죽이는 등 과거의 경험을 활용했다. 그렇게 남쪽으로 내려가다 3사단 수색대와 조우해 한 숨 돌리고 생환자들을 수습해 보니 200여 명 남짓으로 줄어 있었다. 그러나 정작 돌아와 보니 대한민국 국방부에서는 이들의 정규군 편입을 허가하지 않았고, 급기야 신성모 대한민국 국방부장관과 언쟁을 벌이다 붙들려 나가는 등 뜻대로 되지 않아 회고록에 미안함을 덧붙였다.
다만 백골병단 생환자들은 채명신과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듯하다. <육군 본부 직할 결사대 60년사 (백골병단)>라는 백골병단 출신자가 쓴 책에 의하면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에서 북으로 넘어가기 위해 출정식을 할 때 신성모 국방장관과 유엔사령부에서 큰 기대를 하고 있다는 메세지가 전해져 왔고 국방부 장관 일반 명령으로 출정을 하게 되었다. 또한 출정식에서 육해공군 총사령관 겸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 정일권 장군이 직접 와서 가짜 인민군 장교 계급장과 하사관 계급장을 달아주며 "지금 여러분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국군 최초의 유격 부대로 유엔군 사령관도 여러분에게 거는 기대가 큽니다. 물론 여러분들이 한 사람의 희생도 없이 모두 돌아올 수는 없겠지만 만일 살아돌아오기만 한다면 여러분의 계급은 지금 그대로 현역 계급으로 전환하는 한편 1계급 또는 2계급 승진시킬 것을 약속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결사 11연대 300명이 사선을 넘고 돌아와보니 이들이 받은 계급장은 사실 비공인 가짜였고, 게릴라 군번인 GO 역시 허상에 불과하였다. 게다가 군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징집 영장까지 날아오는 상황. 하여간 이 때문에 고생은 고생대로 하였으니 지난 60년 동안 명예 회복을 해달라고 아직까지 소송을 제기하고 있다. 그러면서 당시 지휘관이였던 채명신 중령은 자신들을 도와주려고 하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똑같은 장교들이니 채명신 역시 책임을 피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2.2.2. 연대장
이후 동부 전선 백석산 전선의 7사단 5연대(현 제5보병여단) 부연대장이 되었는데 그곳은 지휘관이 얼마 안가 사고나 책임을 지고 계속 떠난다는 징크스가 있었고 병사들도 겁이 많아서 오합지졸이었다. 직후 연대장이 포탄에 전사했음에도 악명 때문에 연대를 맡겠다는 사람이 없어 한동안 연대장 대리를 하다 7사단장 김용배의 건의로 5연대장이라는 육군사관학교 5기치고는 빠른 진급을 했다. 이후 쟁탈전이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던 양갈보 고지에 과거 개성 송악산에서 쓰던 전술을 그대로 활용했는데 일단 고지에 공준사를 계속 쏟아부어 피해와 피로를 가중시키고 그 뒤 불시에 공격해 탈취 후 포격 지원 속에 알박기를 감행해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다.
한편 이때 백석산 전선 우측에서 병행 중인 피의 능선 전투에 동생 채명세가 소위로 있는걸 알았지만 계속 전선에 있겠다는 동생의 의지와 사사로운 감정으로 안전한 후방으로 빼낼 수는 없다며 모른 척하다 결국 동생의 전사 소식을 듣게 된다.
이후 백석산 북방 M-1고지 전투에서 20사단 60연대장이 되어서 61연대가 쟁탈한 고지를 사수하는 성과를 거뒀다. 전후에는 1955년 제2훈련소 참모장을 거쳐, 준장으로 진급해 5사단장이 된다.
2.3. 5.16 군사정변
박정희와의 인연은 후방 침투부대 백골병단을 이끌고 생환한 자리에서 우연히 9사단 참모장 박정희를 만난 것으로 시작되었다. 적 후방까지 깊숙이 들어가 죽을 고비를 넘긴 무용담을 들은 박정희가 즉석에서 자신의 야전상의를 벗어 건네며 호감을 표한 게 인연의 시작이었다고.
이후 그 인연으로 5.16 군사정변의 주역 중 하나가 되었으며 쿠데타 초기 5인 위원회 위원 중 1인이다. 쿠데타 당시 철원 축선에서 전방을 지키던 제5보병사단 사단장이었음에도 직속상관인 1군 사령관 이한림 장군이 직접 전화를 걸어 내린 병력 이동 및 서울 진입 금지 명령과 미8군 사령관 카터 매그루더 장군과의 대면 자리에서 하달된 위치 유지 지침을 완전히 무시하고 제36보병연대 전체와 35보병연대 일부, 그리고 사단 직할대 병력을 빼내 서울에 입성한다.
본인 회고록에 의하면 제2공화국에서도 혼란이 거듭되며, 몰지각한 기자들과 각종 민원에 시달리는 일이 반복되는 걸 겪어 쿠데타에 참가했다고 한다...는데, 이는 다분히 자기미화 섞인 증언이고 실제로는 더 복잡한 이해관계들이 있었다.
첫째가 박정희 소장과의 개인적인 인연, 둘째가 군 인사의 진급적체 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이북 출신 장교들이 겪고 있던 견제/차별 문제도 원인이었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는데, 1950년대 한국군 고위 장교단 양대 주류 파벌은 평안도 군맥(텍사스파)과 함경도 군맥(알래스카파)이었다. 적어도 이북 출신이었다고 차별받을 환경은 아니었다는 소리. 5.16 군사정변 이후 "텍사스 토벌작전", "알래스카 토벌작전" 등으로 이북 출신 장교들이 우르르 군복을 벗은 것도 이들이 원래 주류 파벌로 좋은 보직을 독식한 채 파벌다툼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채명신이 5.16 이전 인사상 불이익을 받았다면 그건 황해도 출신이라서지 이북 출신이라서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쿠데타 성공 2달도 안 되어, 같이 한강을 건넌 이북 출신 장교들이 장도영 참모총장의 체포 후 대거 군문에서 쫓겨나는 걸 보고, 당분간 이 소용돌이에서 벗어날 방안을 궁리하게 된다. 때마침 그간 고위 장성들의 진급 코스로 꼽히던 미 육군 지휘참모대 유학 과정이 있는 걸 알고 신청, 미국으로 유학을 감으로써 감투를 둘러싼 내부투쟁에서 비껴갈 수 있었다. 귀국한 후에는 채명신의 경험과 능력을 높이 산 박정희 대통령에게, 베트남으로 파병되는 파월 부대의 초대 사령관으로 발탁된다. (자세한 내용은 하단의 베트남 전쟁 관련 항목에 후술)
회고록에 의하면 자신이 박정희 대통령과 갈라서게 된 이유는 유신 헌법에 반대하고 박정희의 3선 개헌에 대한 직언과 비판을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것을 대장 진급 실패의 이유 중 하나로 생각하고 있으며 실제 대외적으로도 3선 개헌을 반대했기에 강제 예편된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회고록에 따르면 개인적으로는 돈독한 사이였으며 3선 개헌을 앞두고 그를 불러서 의견을 물었을 정도. 그래서 5.16때 동기인 김재춘, 문재준, 박치옥과 함께 거사에 동참했고 강제예편당했음에도 박정희는 개인적인 호감 때문에 외교관으로 계속 기용할 정도였다. 여담으로 장준하와 매우 친분이 깊었으며, 회고록에도 지면을 할애해 "사병들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정치인)은 그가 유일했다"는 찬사를 남긴다.
사회가 안정되면 민간인에게 정치를 맡기고 군에 복귀하겠다는 약속을 어긴 다른 5.16 참여군인들과 달리 채명신은 끝까지 군인으로 남았다. 중장으로 예편된 후에는 당시 예편 장성들이 으레 그러하듯이 외교관으로 부임하였다.
2.4. 베트남 전쟁 당시의 공적
월남 파병이 결정되면서 게릴라 부대 지휘관으로 이런 종류의 전쟁에 경험이 많은 적임자로 판단되어 파월 한국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후의 증언에 따르면 역시나 적절한 인사였다고. 사상 최초의 한국군의 해외 파병이었는데 비단 한국군만 아니라 한반도 전체로 늘려봐 조선시대 나선정벌이후 몇백년만의 해외출정이다.
제 코가 석자인 데다 한국군 전투력에 의문이 많던 미군 지휘부와의 담판에서 많은 양보를 얻어내어 한국군 복지 지원 확보, 전투장비 신형으로 교체, 지휘권 확보 등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이후 채명신은 과거 6.25전쟁에서 게릴라전을 맞붙은 경험을 살려 중대전술기지를 통해 엄청난 전과를 올렸고 미군도 중대전술기지 전술을 연구하며 역으로 도입하였다.
또한 베트남의 독립 전쟁사를 꼼꼼히 검토해,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의 명분이 매우 약하며, 오히려 월맹군측이 민족 지도자 호치민의 지도 하에 "독립전쟁"을 벌이는 모양새가 될 수 있다는 걸 포착, 박정희 대통령에게 "미국의 공식 요청 하에 파병을 결정"할 것을 건의했다고 한다.
이렇게 신중을 기울였어도, 역시 명분약한 전쟁에 끼어드는 걸 반대했던 야당의 공세에 밀려, 결국 날치기로 파병안을 통과시켰다고 한다. 하지만 이 야당 의원들 역시 일단 파병이 결정 된 후에는 박순천 의원을 필두로 한 주요 인사들이 위문을 와 장병들을 격려하였다. DJ(김대중)의 경우는 대권 잠룡이었던 에드워드 케네디가 "한국군은 용병"이라 비난한 데 대해 "우리 장병들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참전한다고 믿고, 현지에서 고투를 치르고 있다"고 반박해 에드워드 케네디의 사과를 받아냈다는 후문.
베트남전쟁은 사실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남 민족세력의 독립전쟁이라는 인식은 당시 박정희의 최측근이었던 차지철 민주공화당 국회의원조차도 공개적으로 떠들고 다녔을 정도로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해외에서도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대다수의 미국동맹국들도 베트남 파병을 거부했고, 그래서 한국군의 파병이 그만큼 미국한테는 중요했다.
이 베트남 전쟁 전후를 다룬 책 '베트남 전쟁과 나'가 있다.
2.4.1. 대한민국 국군 전용 레이션 개발 요구
군수지원에 관해 주월미군 사령관 웨스트모어랜드 대장과 이야기를 하려 했으나, 한국군 지휘관이자 장군인 그와 대화를 하기 위해 온 것은 어느 대령이었다. 회의의 전반적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미군 : "한국군에게 2차 대전 때 쓰던 무기를 지원하고, 전투식량과 군수지원은 전부 미국 것을 주겠다"
VS
한국군 : "말도 안 된다, 무기는 당신네 지금 쓰는 걸 주고, 먹는 거랑 군수지원은 우리 걸 써야 한다. 우리가 스테이크 썰고 다닐 상황은 아니지 않나? '정글 속을 헤치고 다닐 전투병 등에 갈비짝을 지고 다니란 말인가?' "
(실제로 회의장에서 김용휴 준장이 했던 발언이라고 한다.)
전투식량의 경우, 당시 미군은 A, B, C 레이션으로 전투식량이 3가지로 나뉘었는데 그중 C 레이션은 야전에서 바로 먹을 수 있는 통조림이나 과자 위주, B 레이션은 그보다는 좀더 여유있는 상황에서 먹을 수 있게 된 즉석 인스턴트 식품, 그리고 A 레이션은 식당 등에서 취사도구를 갖고 직접 요리하도록 다듬질 되어있는 재료 모음이었다. 미군은 자기네들이 요긴하게 쓰는 C와 B는 주지 않고 A 레이션을 한국군에게 짬처리 하려한 것이다. '갈비짝'을 언급한 이유가 이 때문이다.
결국 C 레이션도 받게 되긴 했지만, 처음엔 이러한 미국 전투식량을 받고 장병들이 잘 먹었으나 장병들이 미국 음식과 계속 잘 맞을 수가 없었다. 결국 잇따른 장병들의 요구에 한국군 장교들은 한국의 식생활에 대해 설명하여 처음엔 베트남 쌀을 지급받았으나 이걸로도 모든 해결은 불가해 결국 한국군용 전투식량을 따로 개발하여 보급받는 것으로 하였다. 널리 퍼져있는 설인 K레이션을 미국이 구입 후 보급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당시 미국의 법에 미국의 잉여 농산물을 받는 국가에선 식량을 구매할 수 없다는 법이 있었는데 이 법 때문에 원하던 미국이 현금을 지급해 구입하는 방식이 아닌 물물교환 형식으로 타결할 수밖에 없었다고 채명신 회고록에 기술되어 있다.
또한 처음 보급받을 예정이었던 전투식량은 본래 일본에서 생산한 제품이었는데, 이를 사전에 안 한국군에서는 일제 전투식량을 먹을 수 없다고 주장했고, 결국 통조림 제조 기술을 들여와서 한국에서 제조한 전투식량을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 때 채명신 회고록에서는 시식 행사에 참석할 예정이었던 부하 장병들과 채명신이 미리 말을 맞춘 뒤 맛이 이상하다며 시식장을 엎어버려서 한국 업체를 통해 전투식량을 공급받을 수 있었다고 나온다. 회고록이 회고록이니만큼 표현을 좀 과장한 것이라고 이해하자.
그리고 결국 K레이션을 개발해서 통조림에 김치를 담아 제공 받았으나, 당시 국내 통조림 기술력의 한계로 인해 통조림이 김치 국물에 산화되어 녹물 섞인 김치를 먹어야만 했다. 채명신의 회고록에는 장병들을 설득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한국에서 만든 통조림이 녹도 있고 맛이 없는 것 다 안다. 하지만, 일본산을 선택하면 우리가 피흘려 번 돈이 일본으로 갈 뿐이다. 비록 녹물 섞인 김치이지만, 그래도 고향의 부모님들이 만든 한국산 김치를 먹어야 하지 않겠냐?"며, 녹물 김치를 그대로 퍼 마시며 장병들을 설득했다고 한다. 결국, 장병들도 채 장군의 뜻에 동의하였고, 한국에서 보내준 녹물이 섞인 김치를 먹었다고 한다.
2.4.2. M16 소총 요구
회의 중에 미군 대령은 제2차 세계 대전 때 쓰던 M1 개런드 소총을 칭찬하면서 '2차 세계대전 때 정글에서 일본군을 물리친 총이니 베트남에서도 한국군에게 적절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M16 소총, M14 소총은 자국군이 써야 되고, 카빈은 이미 남베트남군과 특수부대에 죄다 나눠줘서 없는 바람에 창고를 가득 채운 M1이나 주려던 시도였다. 이에 채명신 장군이 응수하여 '내가 6.25 때 북한군한테 붙잡힐 뻔한 적이 여러 번 있었는데 그때마다 자동사격이 되는 카빈 소총 덕분에 살았다. 정글에서 전투가 벌어지면 대부분 근접전일 텐데 M1 같이 크고 자동사격도 안 되는 총을 어디다 쓰냐'라고 반박했다. 국군 파병 전에 당시 유엔군 사령관에게 M2 카빈을 요구차 2차 세계대전 이후 교전거리의 변화와 사상자의 비율수 통계 등을 들고는 설득시켰다. 한편 회고록 베트남 전쟁과 나 에서는 파병 전 주한미군 사령관에 M2 카빈을 요청했는데 흔쾌히 허락하면서 카빈도 좋지만 화력이 약하니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 이길 수 있었던 총은 역시 M1 개런드 였다며 찬양했는데 이에 채명신 장군이 속으로 아연실색하는 일화도 서술되어 있다.
2.4.3. 독립 지휘권 획득
미군은 한국군이 숫자가 적고 보급과 수당 등을 이유로 자기네 지휘권 밑으로 들어오는 게 맞다고 처음부터 우리 군을 지휘하고자 했다고 한다. 그러나 미군들은 1차대전, 2차대전 및 한국 전쟁과 같은 전면전은 많이 겪어 봤어도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발생하는 게릴라전에 대한 이해 및 경험은 한국군보다 부족했기에 사실상 맨땅에 헤딩하는 것이나 다름없었고, 자칫 한국의 파병장병들까지 같이 위험해질 수 있었기 때문에, 파월 한국군 사령부측은 독자적인 작전 지휘권을 확보하는 데 총력을 기울인다.
미군은 '우리들이 싸우는 방식 그대로 우리와 함께 싸우자는 것인데 뭐가 문제인가?'라고 강력한 불만을 표했다고 한다. 그 방식이 문제야 게다가 한국군이 처음 왔을 때 싸울 생각은 않고 매일 주둔지에서 훈련과 경계만 해서 주월미군사령부 예하 미군 장성들이 "한국군을 우리가 지휘할 수 없다면 지휘할 수 있을 때까지 전투 활동을 중단하겠다."고 들고 일어나기까지 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채명신은 웨스트모어랜드 주월 미군 사령관에게 부탁해 주월 미군 장성들을 모두 모아 브리핑장에서 "한국군 용병설"을 소재로 브리핑을 하며 설득, 모든 미군 장성들을 회유하는 데 성공한다. 물론 브리핑은 채명신이 직접 영어로 진행했고, 이 와중에 채명신에게 쏟아진 비난조의 질문도 모두 채명신이 직접 영어로 해명했다. 또한 이후 한국 장병들의 활약이 거듭됨에 따라, 한국군의 지휘권을 간섭받지 않고 철수 전까지 독자적 지휘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휴전 이래 지속되고 있는 주한미군 사령관의 한국군 전작권을 환수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다른 고위 장성들과 마찬가지로 부정적 견해를 피력했다. 이는 자신이 베트남전에서 관철시킨 독자 지휘권 행사와 상반되는 일인데, 이에 대해서는 "한국군과 주한미군은 휴전 이래 통합된 연합 지휘체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베트남전에서는 남베트남과 미군, 한국군 등 개별 참전국들을 통합적으로 지휘하는 연합 지휘체계가 없었다. 만약 베트남전 당시 2차대전의 연합군 사령부, 나토와 같은 형태의 다국적 연합 지휘부가 있었다면 한국군도 이의없이 그 지휘 아래에 들어갔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2.4.4. 베트남 현지민 보호정책
채명신 장군은 미군이 등한시하던 대민지원과 현지 민심 확보에 심혈을 기울였는데 같은 유교 문화권인 데다 동양인이라는 점, 한국 전쟁으로 인해 베트남인들과 비슷한 상황을 경험해본 점 등으로 이 부분에서도 큰 성과를 거둔다. 미군은 이러한 대민 정책을 군이 할 수 없고 민간 단체가 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는데 미국스러운 원조 방식으로 그냥 트럭에 쌀을 갖고와서 마을에 던져놓고 가기 일쑤였다. 베트남 주민들은 이에 대해 '우리 쌀 뺏어가서 자기들이 인심 쓴다.'고 불평을 하였다. 반면 한국군은 쌀이 모자라는 집집마다 전투병들이 직접 찾아가 쌀을 원조해주고 얼마나 부족하느냐, 다음에 또 오겠다 라는 말도 해 베트남 주민들의 마음에 더 와닿는 방식을 사용했다. 그에 더하여 채명신 장군 본인도 수시로 사령부 근처의 마을로 직접 나가 주민들과 교류를 이어가고 베트콩 인접 지역에 있는 마을도 수시로 시찰해 주민들을 안심시키는 등 이런 부드러운 방식과 더불어 베트콩이 있는 것으로 의심되는 적성 촌락은 완전히 포위해놓고 경고 방송과 경고 포격을 하고 몇 날 며칠이 걸리든 간에 계속하는 물샐 틈 없는 포위로 도주자를 차단, 도발 의지를 아예 꺾어놓았다. 이런 당근과 채찍의 병용으로 투항 베트콩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고 한다.
2.4.5. 교민 보호
대민지원과 같이 베트남에 진출한 한국 기업과 교민들의 보호에 상당히 신경을 많이 썼다. 한국 기업에 경비 인원을 배치해 주는가 하면 현지에서 전역을 하게되는 장병의 해외 기업 취업을 알선했다. 한국군의 활약이 계속되며 이름값이 올라가 한국 내에서 취업하는 것의 최소 3배의 수당을 받았다고 한다. 그 외에도 해외 기업의 러브콜이 계속되자 원래는 당장 내일 모레 전역하는 장병들만 취업이 되었는데 인원이 모자라 전역이 3개월까지 남은 장병들도 바로 취업을 시켰다고.
2.4.6. 중대전술기지 도입
2개 사단 규모인 한국군을 쪼개 중대 규모로 화력기지인 중대전술기지를 여러개 건설하여 베트남 마을들을 보호하는 형태로 배치하였는데, 미군은 이를 두고 각개격파당할 수 있다고 걱정했으며 한국군 장교들도 미군이 대대급 작전을 주로 펼치고 있으니 자신들도 그럴 줄 알았는데 이렇게 중대급으로 쪼개놓으니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당장 채명신도 첫 작전회의 때 이를 이해한 지휘관은 한 명도 없었다고 회고했을 정도.
그러나 사실 이 배치는 채명신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한 것으로, 각 기지는 어느 방향에서도 중기관총과 무반동총의 자체 중화기 사격을 집중시켜 방어에 임할 수 있고, 각각의 기지는 105mm 견인곡사포대의 사거리 안에 지어져 있어 더 큰 규모의 적이 공격해오면 포병 사격으로 지원이 가능했다. 중대전술기지의 방어력을 극단적으로 보여준 전투가 짜빈동 전투로, 해병대 1개 중대 병력으로 북베트남 정규군 2개 연대를 상대로 백병전에 진내사격까지 강행하는 혈투 끝에 단 1개 중대가 진지 방어에 성공했다.이 진영은 매우 적절했다고 판단되어 한국군의 'Tactical Base(전술기지)'를 미국에서도 'Fire Base(화력기지)'라는 명칭으로 많이 참고했고 미군은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때도 이 전술을 사용하고 있다.Wikipedia
2.4.7. 장병 복지
현재까지 민간에 잘 알려진 유명 한국군 장성 중에서 장태완과 더불어 가장 장병 복지에 신경 쓴 장성으로 평가받고 있다. 병사들을 자식처럼 생각하며 배려한 일화도 상당히 많은데, 그 대표적인 일화로, 베트남 전쟁 당시 그는 보병의 전투력은 발바닥에서 나온다는 철학을 가지고 베트남 기후 특성상 무덥고 매우 습하기 때문에 여름철이 되면 전 병력에게 아예 군화 벗고 맨발로 다니게 하라는 지시도 했다고 한다. 시찰 도중, 병사들의 발바닥과 발가락을 일일이 손가락으로 만져보며 무좀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한 후 3분의 2가 넘는 병사가 무좀에 시달리고 있는 것을 확인하자, 모든 작전을 중단하고 병력들을 휴양소에 들어가게 하여 해변가 백사장을 맨발로 걷게하며 무좀을 치료케 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매일 저녁 취침하기 전, 병사들의 발을 반드시 씻게 하여 발에 냄새가 나지 않도록 지시했는데 병사의 발냄새가 심하면 아예 그 부대 중대장의 종아리를 매로 쳤다고 할 정도였다. 무좀 방지와, 그 발냄새에 꼬인 모기들을 막아 혹시 모를 말라리아 확산으로 인한 전투력 손실을 최대한 줄이기 위한 그의 생각이었다고. 결국 참전 부대가 발병부대가 되지 않도록 병사들의 사기를 높여 전투력을 올리게끔 한 그의 특유의 지휘철학이었던 셈. 그의 일화들.
또한 파병 결정 후 여의도에서 퍼레이드를 하고 바로 출발할 예정이었던 장병들의 면회를 허용해달라고 국방부와 대한민국 육군본부에 강력히 요청해 허가를 얻었다. 상부에선 면회를 허용하면 장병들의 사기에 악영향이 올 것이라고 반대했지만 채명신은 오히려 면회를 허용해주면 가족들의 축복 속에 전선으로 향할 수 있다고 믿었다. 채명신의 강력한 요구에 결국 육군본부의 허가를 얻었고 채명신은 여기에 더해 당시 완전히 허허벌판이던 여의도에 공병대를 동원해 간단한 간이 면회 장소를 만들었다. 당연히 장병들은 생각지도 못했던 면회에 감격했다.
상술한 중대전술기지와 M16 소총 요구, K 레이션 요구 등은 모두 채명신이 장병들을 각별히 여겼기 때문에 한 행동들이었다. 당시 대다수의 지휘관들은 이런 것을 아예 신경쓰지 않았다. 당장 파월 직전에 국방부와 미군의 협의가 있었을 때 어떤 장성이 "한국군이 미군의 지휘를 받는것은 영광이다"라고까지 한 적이 있다. 만약 채명신이 지휘관이 아니었다면 파월 한국군은 미군과 그대로, 똑같은 작전으로 나갔을 것이고 미군의 문제점을 그대로 이어받았을 것이 분명했다.
2.5. 중장 예편
베트남전 중이던 1966년 7월 20일 중장으로 진급한 채명신. 왼쪽에 계급장을 달아주는 인물이 박정희 대통령이다. 날짜를 봐도 알 수 있듯이 처음 파월 때는 소장으로 간 것이었다.
많은 전공을 세웠으나, "ROTC들을 등에 업고 '큰 일'을 꾀한다"는 음해에 시달렸으며, 10월 유신 계획하며 정권연장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에게 쓴소리를 할 정도로 의견차이를 냈다. 결국 박정희 눈밖에 나는 바람에 대장 진급은 못하고 1972년 5월 30일 중장으로 예편된다. 이후 외교관으로 재임용되어 주 그리스 대사로 임명되는 등 국외 활동에 전념하게 된다.
이후 1990년대에는 파월장병들의 고엽제 피해에 대하여 김영삼 대통령에게 직언을 하기도 하는 등, 사건 공론화와 국가의 배상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높였다. 군과 정부 관료들 중 이 문제를 덮고 가려던 이들이 적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채 중장의 행보는 매우 파격적이었다.
1991년 당시 한국군 관할 지역의 베트콩 사령관이었던 쩐박당이 방한한 후 채명신 장군과 화해의 악수를 하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2.6. 사망
2013년 11월 25일, 87세 생일을 불과 이틀을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나를 파월 장병이 묻혀 있는 묘역에 묻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채명신이 월남 파병 용사들의 추모 행사를 해왔던 국립서울현충원의 2번 사병 묘역에 따로 장소를 마련하여 묻히게 되었다. 원래 서울현충원은 벌써부터 만장 상태였고, 충혼당이라는 납골당 건물 안에 화장한 유골함을 봉안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을 뿐이었다. 따라서 법령상으로는 서울현충원 안장이 불가능했고, 당시 공석이 있던 대전현충원 장군묘역 안장이 원칙이자 최선이었다. 하지만 채명신 장군의 희망에도 불구하고 사병묘역 안장은 쉽지 않았다. 채명신 장군이 병세가 악화되자 가족과 보좌관들이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아 사병묘역에 묻히기를 원한다는 뜻을 전했지만 국방부나 현충원에서는 장군묘역과 장교묘역, 병사묘역으로 구분하고 있는 '국립묘지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을 때문에 난색을 표명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게 된 청와대가 나서서 사병 묘역 안장을 추진했고, 유지를 따르자는 박근혜 대통령의 뜻에 따라 국방부는 긴급회의를 열어 고인의 유언을 수용하기로 했다. 국방부 관계자는 "장군이 자기 신분을 낮춰 사병 묘역에 안장되길 희망한 것은 현충원 설립 사상 최초"라면서 "숭고한 고인의 뜻을 받들어 서울현충원 사병 묘역에 안장하는 방안을 확정했다"고 전했다.
따라서 채명신의 빈소를 찾은 김관진 국방부장관이 사병 묘역 안장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유가족들에게 전달하였으며, 파월 장병 묘역인 서울현충원 2번 사병 묘역에 입구쪽의 남은 공간을 활용하여, 채명신 장군을 위한 안장 장소를 추가로 만들게 되었다.
그렇게 채명신은 육군장으로 치러진 이후에, 대한민국 장성 최초로 서울추모공원에서 화장되어 국립서울현충원 2번 사병 묘역에 안장되었다. 그 때문인지 묘역의 전반적인 구도가 마치 채명신 장군이 파월 장병 묘역의 사병들을 이끌고 지휘를 하는 모습처럼 되었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2023년 9월, 그의 아내 문정인 여사도 타계해 화장 후 남편의 유해와 합장되어 파월 장병들의 어머니가 되었다.
3. 논란
3.1. 반역
蔡命新(채명신·75) 前 駐越軍 사령관은 5·16 당시 제5사단장(준장)이었다. 4·19 이후 제5사단 주둔지인 철원에는 40여명의 사이비 기자들이 득실거렸다. 돈 주고 기자증을 사서 「귀에 연필을 꽂고, 손에 수첩만 들고 다니면」 누구나 기자 행세를 할 수 있는 세상이었다. 軍納(군납)업자들은 부대에 납품하는 소에 물을 먹이는 등 군대를 상대로 갖은 농간을 부렸다.
이러한 부조리가 만연해 있는 현실을 보며 그는 『公權力(공권력)이 살아 있지 않은 국가는 국가라고 할 수 없다』,『이대로 가다가는 앉아서 빨갱이들에게 당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 연장선상에서 그는 1960년 12월경부터 朴正熙 소장 등과 쿠데타를 논의하게 됐다. 그는 1961년 5월18일 제5사단 병력을 이끌고 서울에 진주, 야전군도 혁명을 지지한다는 것을 내외에 시위함으로써 혁명 초기 유동적이던 상황에 종지부를 찍었다.
(중략)
蔡 前사령관은 5·16의 의미로서, 우리의 反共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했고, 경제발전의 계기가 되었다는 점과 함께, 5·16의 연장선상에서 越南파병이 이루어졌다는 점을 강조했다.
- 월간조선 2001년 르포, 《군사혁명 40주년 5·16 주체세력들 그룹 인터뷰》
결론부터 말하자면 5.16 군사정변 당시 채명신은 군인의 의무인 상관의 정당한 명령에 대한 복종을 자의적으로 거부했음은 물론 불법적인 쿠데타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월간조선의 평가처럼, 당시 채명신을 포함한 육사 5기가 정변 당시 야전군을 이끌고 온 덕에 쿠데타가 비로소 확고히 성공할 수 있었다.
물론 이후 육사 5기는 결국 김종필을 포함한 육사 8기와의 경쟁에서 밀려나 숙청당하거나 한직으로 좌천당했다. 사적으로 정치에 관심이 있지 않았던 채명신 중장 역시 유신 체제를 계획하던 박정희에게 반대하다 반강제로 예편당한다. 다시 말해, 채명신 중장이 4.19 혁명을 통해 비로소 탄생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30년 가량 후퇴시킨 장본인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쿠데타의 성공과 군사정권의 탄생에 산파 역할을 함으로써 정치에 깊게 개입한 인물이라는 사실이 변하지는 않는다. 정변의 결과가 한국의 민주주의와 현대사에 남긴 상흔을 고려할 때 그가 남긴 책임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3.2. 주월한국군 신화 수립
그간 주월한국군에 대한 신화가 수립되는 데에는 주월사가 대외적으로 발표한 공식 입장과 채명신 중장 본인의 회고록, 그리고 그 휘하에서 복무했던 박경석 준장이 채 중장을 주인공으로 하여 저술한 역사소설 <전쟁영웅 채명신 장군>이 큰 지분을 차지한다. 이들의 주장은 교차검증 없이 그대로 수용되는 반면, 막상 학계의 연구 결과는 대중적 인식에 영향을 거의 끼치지 못하였다.
3.2.1. 대민작전 신화에 대해
“비록 한국군이 베트남인들에게 적에 대한 용맹한 전사로서의 명성을 가지고 있지만, 주민에 대한 인정사정없는 행동들은 한국군과 남베트남군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 Memorandum for Deputy Secretary of Defense, “Republic of Korea Forces in Vietnam (ROKFV)”, 12 August 1969, Box 2, Historians Background Material Files, RG 472, NARA II.
다음의 이유로 촌락의 주민은 한국군이 그들의 지역으로 왔을 때 두려움을 가졌다. 타고난 성격상 한국인들은 가혹했다. 그들은 미국인처럼 열린 마음을 갖지 않았다. 한국군은 익숙지 않은 지역에 처음 들어왔을 때 항상 매일 같이 경계하며 의심하고 가혹한 태도를 나타냈다. 사람들은 한국군을 두려워했다. 몇몇 좋지 않은 행위는 여성에 대한 강간과 그 증거를 없애기 위한 파괴였다. 사람을 구금하고 때리는 행위는 한국군을 인기 없는 부대로 만들었다. 그러나 현재는 사람들이 지녔던 이러한 부정적인 첫인상이 사라졌다. 반면에 베트남 사람들은 그들의 재산과 삶을 보호해주기 위해 노력하는 한국군에게 감사하고 있다. 한국군이 있는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매우 행복하고 상대적으로 그들의 삶에 안전함을 느낀다. 한국군이 철수한다면 그들 마을은 곧 다시 베트콩에 의해 통제될 것이다.
- CORDS의 남베트남인 평가관의 한국군에 대한 평가. 남베트남 주민들의 한국군에 대한 복합적인 감정이 잘 드러나 있다.
채 중장이 대민작전에 대해 많은 신경을 쓴 것은 사실이다. "100명의 베트콩을 놓치더라도 1명의 무고한 이가 피해를 보지 않아야 한다"는 방침처럼, 당시 한국군 사령부 차원에서는 대민작전에 대해 많은 공을 들였다. 그 핵심 기관은 주월사의 민사심리처, 줄여서 민심처와 민사심리중대 소속 3개 소대였다. 전쟁 기간 내내 한국군은 1740동의 가옥과 393.8km의 도로를 포함한 다수의 시설들은 건축했고, 일선 중대에서까지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한 의료지원 서비스를 제공했다. 식량은 백미 16,220톤을 포함한 막대한 양을 지원했다. 또한 도합 1553명의 베트남인들에 대해 기술교육을 실시해 주었다.
그러나 채명신 본인이 지시하고 또 회고록에서 자찬한 것과 달리, 실제 실무진 측에서까지 대민작전이 제대로 굴러가지는 않았다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다. 그의 휘하 장병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한 현대의 구술사 연구는 의료지원을 제외한 나머지 지원정책이 그다지 효과를 보지 못했으며, 휘하 장교단과 장병들 역시 대민작전을 제대로 이해한 이가 그다지 많지 않았다고 밝힌다. 파월 직전의 훈련에서 민사작전에 대한 교육이 미비하여 장병들은 현지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로 전투에 투입됐다. 고위 장교들은 그들대로 대부분 한국 전쟁 당시의 과격한 공비 토벌전에 익숙했기에 민사작전의 필요성을 이해하지 못했다. 한편 오랜 외침으로 인해 외국인에 대한 적개심이 높아진 베트남인들은 한국군이 쌀을 주어도 그다지 고마워하지 않았다. 한국 농법을 전수하려던 시도는 아예 주민들에게 피해를 입히며 대실패로 끝났다.
동시에 적군에 대해 지나치게 가혹했던 한국군의 대응 방식은 용맹하다는 평가를 받을지언정 민간인과 전투원을 구별하기 힘든 베트남 전장에서는 민간인들에 대한 잔혹함으로 분출될 위험을 강하게 내포했다. 한국군이 조직적인 집단학살을 벌였다는 구수정의 주장은 거짓이지만, 한국군이 소위 '부수적 피해'의 형태로 민간인 희생자를 여럿 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한국군은 주민들에게 확실한 안전을 보장하였으나 그 안전을 수립하는 과정에서의 무분별한 잔혹 행위로 주민들의 공포를 샀다.
한국군이 민간인들에 대해 가혹한 대응을 하였다는 사실 자체는 미 국방부 내부 자료나 한국군 참전용사 본인들의 증언록에서도 교차 검증된다. 지역의 자세한 피해 상황과 가해 주체를 정확히 명시한 자료가 부족하여 특정한 사건으로 분류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의 심호섭 조교수 역시 논문에서 조심스러운 어투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피해를 부정하는 것 역시 한국군에 의한 집단학살 주장만큼이나 잘못된 태도'라고 주장하며 부수적 피해 형식의 민간인 피해에 대해 인정한 바 있다.
한국군과 베트남인들 사이의 껄끄러운 관계는 베트콩 수색작전 도중 불가피하게 누적되는 민간인 피해로 인해 점차 악화되었다. 부대별로도 대민작전에 대한 성과가 갈렸는데, 제9보병사단을 필두로 한 육군은 민간인들과의 관계가 그나마 좋은 편이었으나 청룡부대를 비롯한 해병대의 경우 해병 특유의 호전성으로 인해 민간인 피해를 자주 일으켰다. 이 뒷수습은 제9사단이 민사작전을 통해 해결해야 했다. 한국군의 대반란전에 대한 외신의 호의적인 여론 역시 채명신의 귀국 이후인 1970년부터 서서히 부정적으로 변했다. 베트남전의 승리 가능성이 줄어들고, 후임 사령관인 이세호가 채명신의 민사작전 중시 방침을 아예 뒤집고 적극적인 섬멸전을 주문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채명신 장군은 이세호의 방침에 대해 반대했으나 이미 일선에서 물러난 그가 딱히 취할 수 있는 조치는 없었다.
채명신 중장 본인이 월남전 당시 대민작전 추진에 많은 노력을 한 것은 역사적인 진실이다. 따라서 채 장군이 직접적으로 지시한 범죄 명령이 존재하지 않는 한 당시 한국군에 의해 벌어진 전시범죄에 대한 책임을 그에게 물을 수는 없다. 사령관의 직책에서 그가 자신의 선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던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는 많은 증언들이 공통적으로 언급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채 중장 개인의 회고록과 주월사의 공식 보도에서 묘사되는 모습만을 진실이라 믿는 것은 잘못되었다. 채 중장이 구상하고 믿었던 것과 달리, 한국군의 민사작전은 완전하지 않았다.
3.2.2. 중대전술기지 신화에 대해
전선의 이동이 빈번한 재래식 정규전과 비교해 볼 때, 베트남 전쟁에서 군사작전을 위한 기지(base)의 운용은 일반적이었다. 한국군뿐만 아니라 미군과 남베트남군을 비롯한 연합군 역시 작전 수행을 위해 기지를 운영했다. 전술 책임 지역을 부여받은 각 군대가 해당 지역의 평정을 위한 대반란전 또는 대게릴라전을 수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미군은 그들의 기지를 화력 기지(Fire Base, FB) 또는 화력 지원 기지(Fire Support Base, FSB)로 불렀다. 소모전 전략 속에서 작전적으로는 공세를 취하려는 미 육군에게 기동력과 함께 화력은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적에게 최대한의 피해를 강요할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따라서 미군 기지가 지닌 주요 목적과 기능은 ‘탐색격멸(Search and Destroy)’이라는 정규전 형태의 공세적 군사작전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통상 기지에는 155mm 포 6문을 보유한 한 개 포대가 위치하여 보병의 탐색격멸 작전에 포병 화력을 지원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미군은 최초 기지 구축에 있어서도 효과적인 방어를 위해 기지를 견고하게 구축했다. 기지에는 최소 1개 보병 대대가 주둔하여 방어하며, 기지는 스스로 최소 3일 최대 14일까지 적의 공격에 지탱할 수 있어야 하며 상황에 따라서는 반영구적인 형태로 고안되었다.1이처럼 미군의 기지 운용은 화력 지원과 기지 방어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대반란전의 수행에 있어서도 기지는 “적의 공격에 민간인 사상자를 줄이고 보안 문제를 최소화하기 위해 주민 밀접 지역과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겼다.
- 심호섭. (2021). 주월한국군의 중대전술기지 운용이 지닌 이상과 현실 - 둑꼬 전투(1966)를 중심으로 -. 군사,(120), 79-130.
둑꼬 전투의 승리를 계기로 중대전술기지 신화가 탄생했고, 한국군 고위 장교단은 더 나아가 미군이 한국군 기지 개념을 채택했다고 주장했다. 1969년의 인터뷰에서 채명신은 미군의 화력 기지가 한국군의 기지 개념으로부터 유래했다고 말했다. 수도사단 1연대 3대대장 박경석 중령 역시 위 주장에 동의한다. 그는 둑꼬 전투 등에서의 성공 이후 한국군의 기지 운용 방식이 미군을 비롯한 연합군의 일반적인 베트남 전쟁 수행에 반영되었다고 말했다. 반면에, 미군의 한 문서에서는 “그들[한국군-필자]이 채택한 방어 전술은 독특한 산물이 아니며, 그들의 성공에는 어떠한 비밀도 없다. 그들이 한 것은 미군 고문단들로부터 배운 것이며 우리의 교범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며, 한국군의 기지 운용이 독특한 개념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 심호섭. (2021). 주월한국군의 중대전술기지 운용이 지닌 이상과 현실 - 둑꼬 전투(1966)를 중심으로 -. 군사,(120), 79-130.
채명신 장군의 회고록과 전쟁기념관에서는 중대전술기지를 한국군이 개발한 것으로 소개하고 있으나 이는 사실과 거리가 멀다. 상술했듯 미군과 남베트남군 역시 전술기지를 운용했다. 또한 미군은 자신들의 화력기지 전술이 한국군으로부터 배워온 것이라는 채명신 중장과 주월사의 주장을 부정하며, 오히려 반대로 한국군이 자신들로부터 배워간 것이라는 입장을 고수한다.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의 심호섭 조교수 역시 2021년 국군의 학술지인 "군사"에 개제한 논문에서 미군이 한국군으로부터 화력기지 전술을 배웠다는 국군의 주장은 다시 검토될 필요가 있다며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했다. 그는 중대전술기지에 대한 기존의 사관이 '신화'이며, 다각적으로 깊게 연구되지 않고 주월사의 주장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했다.
또한 베트남군에게 있어 한국군의 중대전술기지는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베트남군 사령관 보응우옌잡은 회고록 <디엔비엔푸> 에서 이 전술이 '베트남에서 침략자들이 수행한 전쟁의 특징적인 형태'라고 평가하며 딱히 특정 국가의 특징으로 한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프랑스군의 전술기지를 상대하며 그 파훼법을 체득한 바 있었다. 당시 프랑스군은 부족한 병력을 바탕으로 베트남을 재점령하고자 시도하면서 1950년 이래 집단전술기지라는 이름으로 중대 또는 대대급 전술기지들을 곳곳에 배치했다. '고슴도치 방어 전략(Défense en hérisson)'이라 불린 이 전략은 본래 1940년 프랑스 침공 당시 프랑스군 총사령관 막심 베이강이 독일군의 기동전을 막기 위해 고안한 아이디어를 응용한 것이다. 한국군의 그것처럼 프랑스군 역시 지뢰와 철조망으로 기지를 둘러쳤고, 원거리 화력 지원 범위 내에 기지를 배치했다. 각 기지간 상호 지원이 가능하도록 연계했음은 물론이며 비행장의 항공 지원을 바탕으로 물자를 보급받았다.
보응우옌잡은 프랑스군의 전술이 도로와 지역을 차단하여 베트민군의 행동을 크게 제약시켰다고 평가하였다. 그전까지 베트민군의 주 방침은 속공속승, 즉 기동성을 살린 공격으로 빠르게 승리한다는 원칙이었으나 전술기지들의 등장으로 이 방식은 더 이상 효과를 내기 힘들었다.
가. 포위전투를 수행할 때, 우리는 적 저항의 외곽을 무너뜨리고, 포위망을 압축해 들어가며, 적 점령 지역을 축소시키고, 적의 보급로를 제한, 차단한다.
나. 상황이 우리에게 유리해지면, 총공격으로 전환해 모든 적군을 소멸한다.
- 디엔비엔푸 공략에 대한 개념화. 보응우옌잡의 회고록 <디엔비엔푸> 459p에서 발췌.
1953년 2월 말 베트남군은 전훈 분석을 통해 각 전술기지가 오직 화력에만 의존하고 기동예비를 통해 서로를 적극적으로 구원하지는 않는다는 점에 주목했다. 따라서 보응우옌잡은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대량의 중화기와 대공 무기를 들여와 적의 항공 및 화력 지원을 차단했다. 또한 각 기지 사이의 공간을 막아 증원을 차단하며, 야간 기습을 적극 활용하고, 병력 우위를 유지하면서 일단 한번 장악한 기지는 사수했다. 작전 방침 역시 속공속승에서 연공연진, 즉 연속적으로 공격하며 꾸준히 진격한다는 것으로 바꾸었다. 그는 이 방식으로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디엔비엔푸는 대규모 전술기지 클러스터였고, 그 개념은 중대전술기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같은 이유로 인해 한국군 중대전술기지가 베트콩이 아닌 본격적인 북베트남 정규군과의 교전에서까지 효과를 발휘했을지는 매우 불명확하다. 전술기지 전략은 너무나도 정적이고 수세적이며, 따라서 적의 공격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가 매우 어렵다. 한국의 중대전술기지는 미국의 압도적인 항공 우세와 비정규군 적이라는 조건이 맞물려 한정적으로 효과를 발휘했던 것이다. 프랑스의 선례는 이러한 조건들이 달성되지 않는다면 전술기지는 무력화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이다.
이는 한국군 역시 실제로 겪을 뻔 했던 일이다. 대표적인 한국군 중대전술기지의 승전으로 꼽히는 두코 전투 역시 중대전술기지 그 자체만이 승리의 비결이 아니었다는 것이 종합적인 평가다. 한국군은 중대전술기지의 견고함을 주된 승리 비결로 꼽았으나, 미군은 한국군의 견고한 방어를 인정하면서도 미국 측의 압도적인 포격 지원이 보다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고 파악했다. 심호섭 교수는 2021년의 논문에서 여기에 추가적으로 북베트남군의 잘못된 돌격 위치 선정과 박격포탄의 높은 불발률 등 운적인 요소 역시 상당히 작용했다고 파악한다. 만일 베트남군이 조금만 더 끈질기게 공격했더라면, 야간 기습을 허용했던 9중대 기지는 보급이 떨어져 함락되었을 것이라는 게 심 교수의 냉정한 평가다.
추가적으로 당시 한국군의 중대전술기지는 각 기지가 지나치게 넓은 지역을 담당하였다는 것도 문제였다. 각 기지의 한정된 인원만으로 약 70제곱킬로미터의 넓은 영역을 커버해야 했으며 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민간 촌락에 인접하여 지역을 장악하고 평정한다는 한국군의 전략적 목표는 달성할 수 없었다. 기지의 안전을 위해서는 민간 거주구가 아닌 따로 떨어진 높은 고지에 위치해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주월사는 위험에 노출된 기지들의 문제를 중대원들의 사기와 규율 부족으로 돌리면서 문제를 축소했다. 병사들이 지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넓은 담당구역으로 인한 피로 누적이었다는 점에서 이 결론은 매우 부적절한 것이었다.
요약하자면 중대전술기지는 딱히 한국만의 특별한 전술도 아니며, 무적의 전술도 아니었다. 견고했고 대부분의 경우 훌륭하게 작동하였으나 너무 소극적이었기에 적의 본격적인 공격에 맞닥뜨렸을 때 그 한계는 명확했다. 동시에 한국군의 한정된 병력으로 너무 넓은 지역을 방어하다 보니 본래 중대전술기지를 도입한 전략적 목적을 이룰 수 없었다. 소극적인 방법으로 지역을 평정한다는 적극적 전략을 이뤄야 한다는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결국 한국군은 지역 안정화라는 전략 목표 달성에 실패했으며, 최소한의 희생자를 낸다는 전술적인 목표만을 달성할 채 철군하였다. 결국 중대전술기지 신화는 주월한국군 스스로와 당시 한국 언론이 만들어낸 여러 무적신화들 중 하나일 뿐이며 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3.2.3. 포로 0명 신화에 대해
얼마나 베트콩들이 한국군과 태권도를 무서워했으면 이런 책자까지 나왔겠는가. 한국군이 7년 간 약 32만 명이 다녀갔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놀라운 신화를 창조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한국군 포로가 없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군사학이나 일반학문에서도 풀기 어려운 기적이다.
몇 년 전 서울대학교 교수 전경수란 사람이 '한국군 포로가 없다는 것은 거짓이다. 내가 조사한 바로는 약 900명이다'라고 언론에 발표하여 일간신문은 물론 주간지, 월간지 할 것 없이 대서특필하여 야단법석을 떤 적이 있었다. 터무니없는 날조였다. 우리가 아니라고 역공하자, 그는 베트남에까지 가서 수소문하고 다녔지만 허탕쳤다. 베트남 사람들이 "저런 미친 놈이 어디 있느냐"고 오히려 괴이하게 그를 봤다는 것이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실종자는 시체 미확인자 8명이었고, 북한 당국이 이름까지 밝힌 포로는 2명뿐이다. 이런 기적은 어느 전쟁에서도 없었다. 이것은 태권도 정신이며, 어떠한 경우에도 부상 전우나 시체를 유기하지 않는 주월한국군의 작전방침과 전우애 때문이다.
- 채명신, 회고록 <베트남전쟁과 나> 241 ~ 242p 중.
1990년대 말에 기밀 해제된 미국 국방부의 포로 관련 문서에는 한국인 실종자와 포로 18명의 명단이 포함돼 있다. 미국 국방부는 명단에 들어간 인물들을 전쟁포로(PP), 포로수용소 사망자(KK), 전사자(BB), 송환자(RR), 협상에 따른 유해 송환자(NR), 무단이탈 및 탈영자(AA) 등으로 분류했다. 이 명단에서 한국인 18명은 전쟁포로(PP)나 포로수용소 사망자(KK)다. 무단이탈 탈영자(AA)로 분류된 이는 단 한 명도 없다.
이들 중 군인은 박성렬 병장, 김인식 대위, 정준택 하사, 안학수 하사, 조준범 중위, 안삼이 상병, 이용선 병장, 박양정·임준성·이윤동씨 등이다. 민간인으로는 김성모·김흥삼·민경윤·이기영·김수근·이창훈·신창화·채교상씨 등이 명단에 올라 있다. 민간인 가운데 김성모씨와 김흥삼씨는 ‘포로 수감 중 사망자’로 분류됐다.
미국 국방부의 포로 관련 문서에는 한국인은 물론이고 연합군 포로 명단도 실려 있다. 모두 3000여 명에 달한다. 연합군 포로의 경우 대다수가 미국과 월맹(越盟, 베트민)의 지난한 협상을 거쳐 생환되거나 유해라도 송환받았다. 하지만 한국인 포로 중에는 그런 사례가 단 한 명도 없다.(중략)
유종철 일병이 살아서 돌아온 뒤 국방부는 더 이상 한국군 포로는 없다고 주장했다. 주월 한국군사령부는 한술 더 떴다. 국군 실종자를 ‘찾을 필요가 없는 쓰레기’에 비유한 것이다. 1973년 3월27일 열린 국무회의 기록을 보면, 박정희 정권의 국군 포로에 대한 인식과 보호 의식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주월 한국군 실종자는 전투 중 발생한 행불자가 아니고 모두 자의에 의한 탈영자로서, 일부는 북한에서 방송한 사실이 있고, 나머지도 범법 도배자들이므로 이들을 포로로 간주하지 않고 있으며 송환 요청을 할 대상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미국 국방부의 포로 실종자 담당 부서에서 조사해 작성한 한국군 실종자 및 포로 관련 문서는 내용이 다르다. 베트남에서 사라진 한국인 18명 중 16명은 ‘전쟁포로’이거나 ‘포로수용소에서 사망한 자’로 기록돼 있다. 박 정권이 주장하듯이 부대 무단이탈이나 탈영 등 군형법상 범죄를 저지른 이는 단 한 명도 없다. 원인 모를 실종자 2명이 포함돼 있을 뿐이다. 결국 베트남전 한국군 포로와 민간인 실종자들은 박정희 정권과 군 수뇌부의 비인도적 처사로 국제미아가 된 후 구출될 기회를 얻지 못한 채 밀림에서 죽어가거나 북한으로 팔려갔던 것이다.
종전 후 이들의 신상 처리 문제는 타이에 있는 미군 실종자수색센터(JCRC)로 넘어갔다. JCRC는 베트남 전쟁에서 실종된 미군의 행방을 탐색할 목적으로 미군이 운영하는 기구였다. 1973년 1월23일 사이공에서 창설된 이 기구는 베트남 전쟁 종전 후 타이 내 나콘파놈 공군기지로 옮겨 활동했다. 1973년 10월12일 주타이 한국 대사가 외무장관에게 짤막한 전문을 하나 보냈다. “베트남 전쟁에서 실종된 제3국인 행방 탐색에 대해 미국 대표가 성명서를 발표함. 내용 요약: 미국 측의 거듭된 요망 사항에 공산 측 묵묵부답. 미국 측은 공산 측의 무성의와 비협조를 비난함.” 이것으로 박 정권의 베트남전 국군 포로 대응은 끝이었다. 이후 아무런 정부 대책도 없이 그들은 역사 속으로 잊혔다.
이처럼 한국 정부는 자국민 실종자 실태를 파악하고도 국민에게 쉬쉬했을 뿐 아니라 이후 베트남과 수교하는 과정에서도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종전 이후 45년이 흐른 오늘도 베트남 전쟁 실종자를 찾아 수색을 벌이고 유해 발굴 작업을 지속하는 미국 정부와 무척 대조된다.
한국 정부가 버린 베트남전 포로 문제는 잊히는 듯하다가 미군 포로 송환 과정에서 곁가지로 불쑥불쑥 드러난다. 한양건설 직원이던 김흥삼씨와 김성모씨는 1968년 베트남에 파견돼 한국군 작전을 지원하는 도로 건설공사 중 월맹에 납치되었다. 두 사람은 하노이 포로수용소로 끌려가 모진 고초를 당한 끝에 사망했다. 이들의 유해는 전쟁이 끝난 뒤 베트남 정부가 ‘한국인 사망자’로 따로 분류해 보존해두기까지 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가 별다른 송환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 방치되다가 1981년 미군이 베트남전 유해 송환 협상을 벌이는 과정에서 신원이 드러나 그제야 고국 땅을 밟았다. 1967년 베트남에서 군사작전 도중 헬기와 함께 사라진 박우식 대위는 35년 만인 2002년 8월 미군 유해발굴단이 베트남에서 그의 유해를 찾아내 한국 내 유족에게 인계함으로써 실종 35년 만에 국립대전현충원에 잠들 수 있었다.
- 시사IN 기자 정희상, <기밀 해제 문서에 담긴 베트남전 국군 포로 실체>
채명신이 휘하 장병들에게 저지른 가장 큰 과오. 주월한국군사령부는 베트남전 당시 국군포로의 존재를 부인하였으며, 그 사령관이었던 채명신 역시 본인의 자서전에서 같은 주장을 강조하였다. 그는 한국군 포로가 발생하지 않은 이유로 '태권도 정신'을 꼽았으며 베트콩이 한국군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는 논리로 국군 포로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였다.
물론 1994년 이 문제를 최초로 제기한 전경수 교수의 포로 900명설은 폐기된 가설이다. 그러나 미군의 조사에 따르면 최소 18명의 한국군 포로가 존재하며, 이들 중에는 북베트남 측에 의해 북한으로 납북된 이들 역시 존재한다. 주월한국군사령부와 당시 대한민국 제3공화국 정부는 포로에 아예 관심조차 두지 않다가 국제앰네스티가 사건을 공론화한 이후에야 그들의 존재를 파악하였고, 그마저도 다시 조직적으로 감추었다.
채명신의 회고록이 쓰인 시점은 미군 기밀문서의 공개 이전이므로 채명신이 포로의 존재를 몰랐다는 주장 역시 빈약한 것이, 그는 다른 이도 아닌 주월한국군을 통할하는 사령관의 위치였기 때문이다. 이미 1972년 안케패스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맹호기갑연대 2대대 8중대 1소대 유종철 일병이 전사 처리되었다가 생존 사실이 확인되어 포로 교환 형식으로 풀려났던 사실이 존재한다. 유 일병의 호적은 '부활'로 처리되었으며 그의 귀국은 국군의 위신을 위해 은폐당했다.
채명신은 국군포로의 존재를 알 수밖에 없으며, 알아야만 하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월한국군의 무적신화를 위해 포로가 된 부하들을 외면했다. 평상시 장병복지에 매우 신경쓰고 전후에도 고엽제 후유증에 시달리던 참전용사들에 대한 처우 개선에 적극 나섰던 행보와 대비되는 오점.
4. 기타
KBS 다큐멘터리 "우리 시대의 군인, 채명신"이 있다.
장준하를 대단히 존경했다고 한다. 그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 분이 대통령에 출마한다면 맨발로 뛰어다니며 운동하고 싶은 심정”이라고까지 표현했을 정도. 월남전 파병 장병들 처우 개선에 대해 다른 국회의원들이 거들떠도 보지 않을 때 유일하게 장준하(당시 국방위원회 소속)가 앞장서서 처우개선을 위해 관심가지고 처우개선 법안 내용을 통과시켰다고 한다. 이후로 채 장군은 장준하에 대해 상당한 호감을 표했다고.
혼외자식 문제(친자확인 소송이 있었다.)나, ROTC들을 업고 큰일(대권)을 꾀한다는 음해로 고생했으며, 예편의 진짜 이유가 위에 언급된 유신 반대 때문이 아니라 베트남에서 축재를 너무 많이 해, 부하들이 연판장을 돌려 예편하게 됐다는 강창성 당시 보안사령관의 증언까지 나온 적도 있다. 하지만 반대측에선 그를 음해하는 주장일 뿐이라며, 채명신에 대한 다각적인 평은 오히려 강력한 권력하에서 "암투가 얼마나 치열하게 전개됐는지" 알 수 있는 한 단면이라고 말하는 주장도 있다.
일본의 밀리터리 작가 고바야시 모토후미의 만화 Cat Shit One에 채명신의 뉴스위크 인터뷰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가 실려있다.
회고록에서 국군의 계급장 색깔이 하얀색이었으나 미군에서 제기된 저격 위험성으로 검은색으로 하자 이에 미군을 따라해 검은색으로 바뀐 것에 대해 검은색은 초상의 의미라고 하며 아쉬워 하였다. 채명신 본인의 경험상으로는 백색 계급장이 위험하다고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으며 그렇기에 베트남전 첫 브리핑 때 미군 장성들이 백색 계급장을 검은색으로 바꾸는게 좋겠다는 제안도 거절하였다고 한다. 당장 한국전쟁 때도 장교들은 반창고를 오려서라도 지휘의 상징인 계급을 철모에 부착했다고 술회하나 대세는 어쩔 수 없었고... 회고록에서 그렇게 백색 계급장이 문제될 거라고 생각하면 땅에 침을 뱉어서 그걸로 백색 계급장에 문지르면 3초 안에 해결될 것이라고 아쉬워하는 것으로 그친다.
국군이 미군에 대해 떠받들다시피 하는 풍습을 바꾼 바 있다. 당시엔 아직 미군 고문관이 있었을 때였는데 지프를 타면 원래는 상급자가 조수석에 선탑하고 하급자가 뒷칸에 후탑하여야 하나 국군 장성이 미군 고문관과 타면 대령인 미군 고문관은 조수석에, 중장인 국군 제1야전군사령관은 뒷좌석에 앉았다. 채명신은 이에 대해 이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견지하였고 자신이 지휘관으로 있었던 베트남전에선 이같은 풍습을 근절시켰다. 채명신 자신이 이렇게 하니 한국에서도 이러한 풍습이 서서히 없어졌다고.
파병 극초기에 처음으로 마련된 한-미-월남 합동 작전회의 때 기묘한 경험을 한 바 있다. 3개국 장성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는데 별 시답잖은 얘기를 하다 회의는 금방 끝났고, 월남 장성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나가버렸다. 어리둥절해 하는 채명신을 미군 장성이 다른 방으로 안내해 뜻밖의 얘기를 했다. 그 미군 장군은 "그들(월남군)에게 하는 얘기는 곧바로 베트콩으로 들어가며 이 때문에 미군이 막대한 피해를 입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라는 얘기를 했고, 채명신이 안내된 다른 방에서 진짜 작전회의가 열렸다. 채명신 자신은 이 때 '우리가 아무리 해도 이길 수 없는 전쟁을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복잡했다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서전에서 한국군은 포로가 없다고 서술되었던 점에서 안학수 하사 납북이 2009년에 뜨거운 논란을 일으키며 나왔는데, 연장선상에서 위의 행동들에 대한 진정성이 의문시된다는 사람도 있다.
전장에서 자꾸 아군 오사 사례가 나타나자, 파월 병력들을 집합시켜 "지금부터 일체 움직임이나 소리를 내지 말도록 하라. 위반할 경우 즉결 처분을 하겠다"고 엄포를 놓은 적 있다. 당초에는 교육효과를 노린 엄포 차원에 불과했지만, 문제는 하필 그 순간에 소리를 내며 몸을 움직인 사람이 나타나 버렸다고 한다. 2000년대 이전에 출간된 회고록에는 이날 싸움 한 번 못 해보고 죽은 그 장병분에 대한 죄책감이 술회되어 있다고 한다.
4.1. 백골병단 관련
백골병단의 활약에 대해서는 참전 부대원들의 단체인 대한유격대 참전동지회에서 발간한 《백골병단 전사》, 육본 직할 결사대 전우회에서 발간한 《육군본부 직할 결사대 (백골병단) 60년사》 등의 다양한 서적에서 다루고 있다. 관련자들의 증언을 모아 정리한 것이라 자료들마다 조금씩 상충되는 부분들이 있다. 하지만 이들 자료에서는 공통적으로 백골병단 최대의 전과 중의 하나로 1951년 3월 설악산 한계령 부근에서 북한 제5유격지대장 길원팔 중장을 생포한 사건을 꼽고 있다.
길원팔은 당시 북한군 제5유격지대장을 맡고 있었다. 이들은 인천 상륙 작전 이후 전개된 북진 과정에서 낙오된 패잔병들로 편성되어 한때 병력이 1만여 명에 이르렀으나, 1950년 12월~1951년 1월에 걸쳐 한국군 제3군단의 공격을 받아 전력이 크게 약화된 상태였다. 채명신과 제13연대 유격대원들은 식량 확보를 위해 수색정찰을 하던 도중에 이 제5유격지대 지휘부가 기거하던 민가를 발견하여 지대장 길원팔 중장, 참모장 강칠성 총좌와 수행원들을 생포했다. 이때 수행비서를 맡고 있던 여군관은 남한의 모 여대에 재학하다 월북한 인사였다고 한다. 이들을 억류하고 있던 도중에 감시가 소홀한 새벽을 틈타 이 남한 출신 여군관이 탈출해버려 북한군 구출부대의 습격을 받을 위험에 노출되었다. 채명신은 먼저 길원팔에게 전향하고 남한으로 같이 가자고 설득했으나, 길원팔은 이를 거부했다. 결국 채명신은 약식재판을 열어 이들 포로들에게 극형을 선고하고 처형했다. 다만 길원팔에게는 적장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자살을 권유했다. 길원팔도 이를 받아들여 권총 자살을 했다고 한다.
이때 길원팔은 죽기 전에 자신이 아들처럼 데리고 다니던 전쟁고아를 거둬달라고 부탁을 했다고 한다. 채명신은 이를 수락하고 함께 아군 진영에 복귀한 뒤에 이 소년을 동생으로 입적시켰다. 이후 친동생인 채명세 소위가 피의 능선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이 양동생이 유일한 형제로 남게 되었다. 채명신은 이 양동생을 성심껏 대해주었으며, 양동생 또한 학업에 매진하여 서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화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아 유명 사립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다 정년퇴임하였다고 한다.
4.2. 국민일보에 연재된 회고록
회고록은 국민일보에 잠시 연재한 버전은 업계의 특성상 신앙 간증. 나중에 매일경제에 연재한 부분은 5.16 직후까지 그리고 있다. 조금 자기 자랑이 심하지만 가끔 나오는 취중진담식의 이야기는 훈훈한 편.
정식 회고록을 1994년 2006년 두 차례 펴냈는데, 2006년판 회고록은 같이 고생한 부하장병들, 지인들의 명예에 누가 될만한 여지를 남기지 않고자 내용을 순화하여 펴낸 것으로 추정된다.
4.3. 트루먼 전 대통령과의 만남
한국전쟁의 휴전협정이 맺어진지 약 10년 후, 채명신은 미 육군 지휘 참모대학에 잠시 유학을 떠난다.
당시 트루먼 대통령은 은퇴 후 캔자스시티에 위치한 자신의 도서관에서 노후를 보내고 있었고, 채명신은 참모대학 총장인 램리 장군에게 수 차례 부탁한 끝에 램리의 주선으로 트루먼 대통령과 개인적인 만남을 가지게 된다.
만남의 자리에서 트루먼은 채명신을 무척이나 반가워하며 손수 커피를 끓여주는 등 격식없이 따뜻하게 맞아주었고, 채명신이 한국민과 한국군의 일원으로서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의사를 전하자 본인 역시 승전 군인들을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받으면서 당시 백악관의 상황과 결정이 상세히 기록된 자신의 일기를 서재에서 직접 꺼내와 보여주었다고 한다. 수첩에는 당시 파병부대의 이름들과 군 지휘부로부터 받은 보고들이 빼곡하게 적혀져 있었고, 치열한 전쟁의 뒤편에 이런 고뇌에 찬 결정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채명신은 사무치는 감동을 느꼈다고 한다.
트루먼은 그러고는 문득 맥아더를 경질한 자신의 결정을 한국인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한국인들의 의견을 여과없이 듣고싶습니다''라고 물었다고.
채명신은 당시 트루먼과 맥아더의 정치적 관계를 고려해서 “한국민들은 맥아더의 해임 이유를 모르고 그가 그저 인천상륙작전을 이끈 훌륭한 장군이라 믿지만 저는 압록강 전선에서의 후퇴에 분명 맥아더의 판단 착오가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하였는데, 공과 과에 대한 평가가 적절히 섞인 채명신의 답변을 들은 트루먼은 고개를 끄덕이며 ''사실 그의 화려한 명성 뒤엔 작전상 중대한 과오가 숨겨져 있었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라는 다소 놀라운 발언을 했다고 한다.
채명신은 훗날 회고에서 이 만남을 유학 시절 가장 의미있었던 순간으로 꼽는다고 밝힌다.
4.4. 베트남 참전담
이 문서는 토론을 통해 다음의 합의사항으로 합의되었습니다. 합의된 부분을 토론 없이 수정할 시 편집권 남용으로 간주되어 제재될 수 있습니다.
베트남전 사령관으로 임명된 후에 이야기는 한국과 베트남 전쟁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회고록 집필 당시가 당시인지라 강정구나 구수정에 대한 개인적인 섭섭함이 드러난다.
4.5. 백선엽 명예원수 추대 반대
백선엽에 대한 명예원수 추대에 대해 논란이 있을 때 채명신은 반대하는 태도를 보였다. 박경석이 '백선엽 장군이 명예원수에 추대된다'고 하자 채명신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강하게 반대했다.
"큰일 낼 사람들이군.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역사 의식이 희박한지 모를 일이오. 건국 이후의 첫 명예원수 추대는 역사적 의미와 상징성이 매우 중요하오. 만약 일본군, 만주군 출신에다 독립군 토벌작전의 지휘관 경력자가 명예원수로 추대된다면 우리나라 건국사와 국군사는 하루아침에 북한 역사관에 종속될 거요."
명예원수 추대로 인해 박경석은 인사복지실장에게 국제적인 시각에서 보는 명예원수 추대 불가 이유를 확인하도록 채명신을 만날 것을 권유하였고 채명신 본인도 인사복지실장을 만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후 인사복지실장은 채명신과 대담 후 확신을 가지고 김태영에게 백선엽의 명예원수 추대의 불가능함에 대해 최종 보고하였다. 결국 명예원수 추대는 즉흥적이고 단순한 헤프닝으로 끝나버렸다. 박경석은 명예원수 추대 무효화를 가리켜 채명신이 "조국에 바친 마지막 봉사"로 평했다.
참고로 친일 문제에 대해 채명신 본인도 좋지 않은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채명신의 아내 문정인의 조부는 일본군에게 비행기를 헌납할 정도의 거물 친일파인 문명기였다. 이후 친일 연구의 권위자인 임종국이 문명기의 친일 행적을 밝히자, 이를 확인하기 위해 채명신 부부가 임종국을 찾아왔다. 임종국이 증거 자료를 보여주자 채명신 부부는 이를 인정하고 돌아갔다고. 이 때의 경험이 백선엽의 명예원수 추대 반대에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문명기의 손자 문태준이 채명신의 손위처남이다. 그러나 이와 별도로 채명신의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당시 항일운동을 주도하던 독립운동가였다.
그럼에도 이 일과는 별개로 채명신이 백선엽과의 사이가 굳이 나쁘지는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둘다 이북 실향민 출신으로 6.25에서 함께 싸웠고, 군을 떠난 후에도 원로로서 자주 입장을 함께 했기 때문. 한 인터뷰에서는 "6.25 당시 대령 계급에서 군을 떠날 뻔 했는데 백 장군이 배려해준 덕분에 도리어 장군으로 진급했다"며 백선엽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4.6. 김영옥과의 관계
미국의 전쟁 영웅 16인 가운데 유일한 유색인종이자 한국계로 유명한 김영옥과 친구였다고 한다. 고지전이 슬슬 시작되던 무렵 채명신이 몸 담고 있던 제7보병사단 칠성부대 옆에 미 7사단 31연대가 이전왔는데, 그때 31연대 1대대 작전참모가 바로 김영옥(당시 대위)이었던 것이다. 명장은 명장을 알아본다는 말이 실제인 건지, 이 둘은 이때 처음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죽이 잘 맞았다고 한다. 보통 김영옥이 채명신이 있던 칠성부대 쪽으로 와서 맥주를 즐겼다고 한다. 이 둘의 인연은 이후 꽤나 큰 활약을 하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수도방위사령부 관련으로 UN사와 마찰을 빚자 한국 측 특사로 채명신이, 미국 측 특사로 김영옥이 다시 만나게 된 것. 쉽진 않았지만 '1공수 및 2개 보병대대 원대복귀, 다만 그 2개의 보병대대는 수방사로 행정 배속'의 형태로 결국 잘 마무리 되었다. 이 일화는 김영옥 문서에도 있다.
4.7. 오늘날 베트남에서의 평가
베트남어 위키피디아에서 채명신을 '살인자(kẻ giết người)'라고 부르고 문서에 퐁니·퐁넛 마을 학살 사건을 비롯한 대민 범죄의 주동자라고 기술한 것을 보면 상당히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 듯 하다. 월남전에서 남베트남을 지원하며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 중 하나이니, 북베트남이 통일한 현 베트남의 시각에서 쓴 것이니 그렇다.
2022년 12월 기준으로 베트남어 위키피디아에는 채명신을 '살인자(kẻ giết người)'라고 부르는 단어가 없는 것으로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