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고 묻혀진 회령진성 내의 흔적들을 찾아서/ 글 : 이제석
세월의 흐름속에 옛 것은 잊혀지거나 묻혀지기 마련이지만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발전한다 해도 영구보존해야 할 것들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회령진성은 1490년(성종21)에 축조된 만호진성으로 남해에 출몰하는 왜구를 소탕하는 수군진이다. 축성의 형태는 내벽은 흙을 쌓은 토축이며 외벽은 돌로 쌓은 석축으로 만들어져 있다.
어언간 520여년의 세월이 흘렸을까?.......
1872년에 기록된 회령진지에 따르면 동헌(3칸), 객사(3칸), 내아(3칸), 비장청(5칸), 군기고(4칸), 선창고 (3칸) 등 건물들이 있었다는옛 기록만 있을 뿐 어느 건물 하나도 남아 있는 흔적이 없다. 단지 동헌과 객사는 현재까지 동헌터와 객사터로 불리고 있는 장소만 있을 뿐이다.
내가 어렸을 적 기억으로 남문과 북문 위쪽의 성외벽 주위로 허물어져 있는 온갖 거무스레한 이끼로 꽉 찬 아주 오래된 돌들이 흩어져 방치되어 있었는데 이러한 돌들이 옛적에 집을 짓는 기초석과 담장 등 건축용으로 쓰여지고, 1962년 3월부터 1966년 말까지 회진과 덕도를 연륙하는 간척사업에도 성의 돌들이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1970년대 박정희 군사정권 독재시대에는 새마을사업으로 마을안길을 확장하는데 성 외벽의 돌들이 석축용으로 이용되어 회령진성은 인위적으로 많이 훼손, 훼철되기도 하였다. 또한 동문 주위에 거북모양이 새겨진 큰 주춧돌과 철로된 비석이 있었고 남문으로 추측되는 현 박재희씨 집 근처엔 소를 이용하여 곡물을 찍는 원형으로 된 큰 연자방아도 있었는데 어디에 묻혀 있는지 어디로 사라져 소멸되어 버린건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다행히도 문화재발굴 조사팀에 따르면 성벽의 밑부분인 지대석은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으며, 동문의 기둥을 지탱했을 거북모양이 새겨진 큰 주춧돌은 동문 주변인 현 윤중필씨 집 근처 어딘가에 묻혀 있을 것으로 동네 어르신들이 추측하고 있어 그나마 위안을 받는다.
성내에 있었던 옛 지명도 지금은 거의 불리어지지 않고 잊혀지고 있어 제가 어렸을 때 같이 뛰어놀면서 어르신 으로부터 전해 들었던 성내의 골목길과 샘들을 기록하여 보존하고자 여러 어르신들의 증언과 기록물들을 참고하여 아래와 같이 정리해 보고자 한다.
☆ 회령진성 내의 지명 흔적들
° 동헌(관아): 지방에 파견된 고을 수령이 집무를 보는 곳. 현 하양관씨 집 자리. 정월대보름과 한가위 때는 동네의 모든 아낙네들이 주로 이곳에 모여 강강수월래 민속놀이를 1960년대 말까지 행함.
° 비장청: 고을 수령 밑에서 일을 돕던 무관벼슬인 비장관리들이 대기하거나 사무를 보는 곳
° 사령청: 장군청의 하부 기관으로 사령들의 집무실. 고을 수령의 심부름 등의 비천한 일을 하였고 군관, 포교 밑에 있으면서 죄인에게 곤장을 치는 일들을 함.사령들이 지방민들에게 행패가 심했다고 함.
° 군기고: 전투에 쓰이는 기구를 보관하는 창고
° 선창고: 부둣가에 전투식량 등을 보관하는 창고
※ 비장청, 사령청, 군기고 등은 동헌터 주위에 선창고는 동문 근처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 됨.
° 객사: 고을 수령의 관사인데 조선시대 사신을 접대하고 왕정의 위덕을 펴는 곳으로 왕의 위폐를 모시고 초하루와 보름에 왕이 계신 곳을 향해 절을 올리며 사신의 숙소로도 사용됨. 회령진 지도를 참고하면 행선 근처인데 현재 객사터로 불려지고 있는 곳은 조선시대 말까지 서당이 있었던 3백여년 된 팽나무가 있는 구 회진교회 자리 임.
° 내아: 수령의 가족이 거처하던 안채
° 동무네 : 동문이 있었던 자리 윤중필씨 집과 황복수씨 집 사이
° 동각 : 회진(동,서,남구 분구 전)마을 회관 자리 이회진에 있던 회진초등학교가 6.25사변 때 불에 타 없어지자 현 위치에 학교가 건립되기 전까지 학교 교실로 사용 됨. 현재 회진노인당 위치
° 행선 : 회령진성 중앙에 있는 우뚝 솟은 뒷동산
° 진구사태: 동문에서 현 서구회관으로 오르는 골목
°갈쿠막 : 동문에서 북문으로 오르는 비탈진 골목
° 한밭에: 북문에서 성 안으로 20여미터 들어와 동문과 남문으로 갈라지는 넓고 평평한 삼각지
° 큰도팍: 현재 이상문씨 집 아래에 있었던 큰 바위
° 분밖에: 북문 입구. 현재 안행렬씨 집 주변
° 분지태: 성터 아래 바닷가쪽의 평평한 곳 현재 회진시외버스터미날 주변
° 홀대거리: 분밖에서 서문방향으로 오르는 성 밖의 길
☆ 회령진 성 내에 있었던 우물들
- 장흥읍지(1747), 대동지지(1864)에 의하면 성내에 세 개의 우물이 있다고 기록 됨.
° 큰샘: 성내 중앙인 행선 아래에 샘이 있었는데 수원이 풍부하고 수질이 아주 좋아 마을분들의 주된 식수로 사용 됨. 샘 중앙에 '청신근'이란 글이 새겨져 있었는데 청렴'신중하고 부지런한 마을분들이 모여 먹고 사는 샘이라 하여 '청신정'이라 부르기도 함. 여름에는 냉동실에서 갓 꺼낸 아삭아삭한 얼음처럼 시원한 물이 항상 넘쳐나고 주전자에 샘물을 담으면 이슬방울 같은 성에가 주전자에 알알이 방울방울 맺혀지고, 겨울에는 온천에서 나오는 수증기처럼 샘 안에 온기가 가득차 하얗게 피어 오르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수원이 부족하여 수 십 개의 양동이들이 먼저 온 순서대로 줄을 지어 기다리면서 물을 길어 먹음.
° 동굴샘: 큰샘으로부터 오른쪽으로 15미터 정도 떨어져 돌담을 윈형으로 쌓아 만든 샘이며 수원은 많은 편이지만 수질이 좋지 않은 상태여서 허드레물로 사용되고 빨래터로 주로 이용 됨.
° 진구사테샘: 진구사테 골목에 있는 샘 허드레 물과 빨래 하는데 사용 됨.
° 새샘: 큰샘으로부터 오른쪽으로 20m 정도 떨어져 위치 가장 늦게 1960년대 초쯤 만들어진 샘이고 겨울에는 물이 안나오며 수질도 안좋음.
□ 참고
° 왼쟁이: 1960년대 이전에는 마을의 방송시설이 없어 성내의 요충지역인 갈쿠막, 큰도팍 등에서 마을의 각종 회의나 공사(울력) 등을 고성으로 외쳐서 알리는 사람을 호칭하는 비속어
2017. 9
♡회진을 사랑하는 사람 이제석 씀
사진과 같은 연자방아가 회령진성 남문 근처에 있었다.
동헌 바로 아래 사령청이 있었을 곳으로 추정되는 허종필씨집 돌담
성 외벽에 있는 돌들이 마을안길 석축에 사용된 흔적들
담쟁이 넝굴이 있는 우축이 큰샘 입구이고 가로등 전주부근에 큰도팍 있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