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말씀(요한계시록 21장 9-21절)은
‘어린 양의 신부’입니다.
사도 요한은 복음을 전하다가 밧모 섬에 갇혔습니다.
그런데 성령에 이끌려 십자가로 일어난 일과
새 하늘과 새 땅의 일을 보고 기록했습니다.
일곱 인과 일곱 나팔과 일곱 대접의 재앙은
성자와 성령과 성부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행하신 심판입니다.
마지막 일곱 재앙을 시행한 천사 중 하나가 요한에게 이리 오라고 하면서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보여준다고 합니다.
그때 성령께서 요한을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으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새 하늘과 새 땅의 일입니다.
계시록 21:2절.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새 하늘과 새 땅의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다고 합니다.
이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옛 하늘과 옛 땅이 사라진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일어나는 일이기에 건물이 아닙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의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은 구약과 신약의 성도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새 예루살렘 성에 가득합니다.
그 성의 ‘빛’이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석으로 말씀하는 것으로 보아
새 예루살렘도 건물이 아니라, 어린 양의 아내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의 새 예루살렘은 건물이 아니라
구약과 신약의 구원받은 모든 성도입니다.
구약의 성도는 십자가로 단번에,
신약의 성도도 묵시적으로는 십자가로 단번에 구원을 이루십니다.
그러나 신약의 역사 속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다 이루신 복음’을 듣고 믿는 순간에 하늘에 앉혀집니다.
새 예루살렘을 측량합니다.
그 성은 네모반듯하고,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습니다.
정육면체의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미 구약에서 이런 모형을 미리 말씀하였습니다.
장과 광과 고가 같은 곳이 성전의 ‘지성소’입니다.
솔로몬이 건축한 ‘지성소’의 길이와 넓이와 높이가 같습니다.
길이와 넓이와 높이가 같은 정육면체가 지성소입니다.
이 지성소의 내용을 오늘 본문에서는 새 예루살렘 성으로
곧 어린 양의 신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사장의 겉옷에 12 지파의 이름을 새긴 보석을 두 번이나 달게 하니, 합하면 24입니다.
대제사장이 이런 옷을 입고 날마다 들어가는 장소는 성소입니다.
그런데 일 년에 딱 한 번 들어가는 곳이 지성소입니다.
지성소는 넓이와 길이와 높이가 같은 곳입니다.
지성소에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습니다.
그 언약궤 뚜껑을 속죄소라고 합니다.
그 속죄소에 대제사장이 정결한 짐승의 피를 뿌립니다.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만나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이 보석에 이름을 새긴 옷을 입고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를 짊어지고 가슴에 품고 들어가는 겁니다.
이런 모형들은 영원한 하늘 성소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자기 피로서 하늘 지성소에 들어가시는 것을 미리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피로 구약과 신약의 성도들을 어깨에 짊어지시고
가슴에 품고 하늘 성소로 가시는 겁니다(히9장). 열둘의 이름을 두 번이나 새겼습니다.
오늘 본문의 ‘거룩한 성 예루살렘’은 건물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로 값 주고 산 구약과 신약의 성도들
곧 어린 양의 신부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신약의 성도들을 흩어진 나그네라고 합니다(벧전1:1).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 문안한다고 합니다(약1:1).
이 당시의 열두 지파란 유대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모든 흩어진 자들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의 복장에 있는 12의 이름을 두 번이나 보석에 새긴 것도
구약의 열두 지파와 신약의 열두 사도로 대표되는 구원받은 자들의 총수가 24이며,
다르게는 144, 14만4천, 1만2천 등으로 말합니다.
그러므로 성경 전체를 통하여 보면 이런 말씀이 특정 숫자나 건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과 신약의 모든 택함 받은 자’를 말하는 것이며,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로 구원받아 어린 양의 신부를 말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20~22절.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건축자들이 쓸모없다고 버린 돌이 모퉁이 돌이 되어 새로운 건물에 세워집니다.
유대인들에게도 이방인들에게도 쓸모없다고 버린 돌이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그 버림받은 예수님이 기초가 되어 새로운 집을 짓습니다.
그 버림받은 모퉁이 돌 그 십자가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갑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성령이 임하여 주 예수를 믿는 자들은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갑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이 완성된 집을 보았습니다.
건물로 설명하지만, 건물이 아니라
구약과 신약의 모든 구원 받은 자들
곧 어린 양의 피로 깨끗함을 받은 성도들
어린 양의 신부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로 우리를 값을 주고 사셔서
우리를 자신의 신부로, 자신의 거처로 만드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이미 완성된 그 나라를 보았기에
그 영광의 날을 소망하면서 살아갑니다.
이런 자들은 세상의 흉흉한 소식들에 놀라지 않습니다.
그 십자가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자들은
요란한 이 땅에서도 안식과 자유를 맛보고 누리면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본향을 향하여 순례자의 길을 걸어갑니다.
오늘도 어린 양의 신부로서
본향을 향하는 순례자의 삶을 잘 살아가길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보배로운 피로 우리를 사셨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