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사(進士) 김군 계종(金君繼宗)의 묘지명 병서(幷序)
천계(天啓) 3년 계해년(1623, 광해군15) 2월 을축일에 성균관 진사 김군(金君)이 예안현(禮安縣) 서촌(西村)의 살고 있던 집에서 졸하였는데, 춘추는 57세였다. 이미 빈렴(殯斂)을 하고 며칠이 지나서 그의 당제(堂弟)인 계현(繼賢)이 시마복(緦麻服)의 형제인 나 상헌(尙憲)이 수제(守制)하며 연제(練祭)를 지내고 있는 기내(畿內)의 악실(堊室)로 서신을 보내어, 김군의 아들 명원(鳴遠)의 뜻이라고 하면서 장사를 지낼 날짜를 말하고, 광(壙)에 넣을 명(銘)을 지어 주기를 부탁하였다. 이에 곡위(哭位)를 설치하고 곡을 하기를 예법대로 한 다음, 다시 편지를 보내어 그 아들을 위로하고, 명을 짓는 것은 사양하였다. 그로부터 다섯 달이 지난 뒤에 계현이 다시 편지를 보내와서 말하기를, “산소 자리가 좋지 못하여 장사 지낼 날짜를 넘긴 채 먼 뒷날로 연기하였습니다. 이에 감히 전에 청하였던 것을 다시 청합니다.” 하였다.
아, 묘지명은 장차 후세에 전하기 위한 것이다. 말을 전한다고 하는 것은 그 꾸미는 것을 좋아하는 것으로, 반드시 아름답게 꾸미고자 할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오늘날에 마땅히 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그 심정을 돌아보면 끝내 차마 말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에 드디어 눈물을 훔치고 그를 위해서 꾸밈이 없는 말을 한다.
군의 휘는 계종(繼宗)이고, 자는 효숙(孝叔)이며, 안동인(安東人)이다. 안동의 김씨는 나의 비조(鼻祖)이신 태사공(太師公)으로부터 비롯되었는데, 후세에 화려한 집안을 말할 적에는 반드시 가장 먼저 칭하였다. 자손이 크게 번성하여 여기저기 흩어져 사는데, 벼슬하는 자는 서울에서 살고 처사로 있는 자는 향리에서 살고 있다.
군의 아버지는 휘가 현(顯)이고, 할아버지는 휘가 생명(生溟)이며, 증조는 휘가 순(珣)이다. 3대 동안 향리에서 살면서 벼슬하지 않았다. 나 상헌과는 고조인 장령부군(掌令府君) 휘 영수(永銖)의 같은 후손이다. 부군으로부터 나 상헌에 이르기까지의 4대는 서울에서 벼슬살이를 하였다. 이 때문에 내가 관례(冠禮)를 올린 뒤 1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군과 만나 볼 수 있었다.
군은 용모가 파리하면서 비쩍 말랐으며, 말투가 엉성하면서도 통달하였다. 가슴속은 평탄하여 경계를 둠이 없었으며, 의관은 소박하여 꾸밈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의 아름다운 점을 많이 말하면서 허물은 적게 말하였다. 당시에 동종의 형제인 구담(九潭) 김태(金兌) 사열(士悅) 역시 안동에 살고 있었는데, 관후하고 활달하여 장자(長者)의 풍모가 있어 월조(月朝)의 평(評)에서 다른 이견이 없었다. 이에 내가 일찍이 두 형의 인물의 등급이 서로 어금버금하다고 여겼다. 지난 무오년(1618, 광해군10)에 내가 안동으로 피해 가 있었는데, 그때 군이 자주 찾아와 머물러 있으면서 속마음을 토로하며 밤낮을 잊었다. 이에 미처 듣지 못하였던 말들을 더욱더 들을 수가 있었다.
군은 뱃속에 있을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태어나서는 병을 자주 앓아 스스로 서지 못하였다. 8세 때 갑자기 아버지가 계신 곳을 물어보자 집안사람들이 거짓으로 대답하고서 살펴보니, 눈물을 흘리면서 물어보기를 그치지 않았다. 이에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곳을 가르쳐 주자, 군은 함께 가서 전(奠)을 올리기를 청하고 묘소 곁에 엎드려 곡하면서 종일토록 떠나지 않았다. 그때 마침 눈이 펑펑 쏟아졌는데도 홀로 어린 시동아이 하나와 더불어 몸소 묘역을 소제하였다. 이로부터는 매번 올라가 성묘하면서 슬퍼하며 사모하기를 한결같이 하였다. 그러자 부당(父黨)인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소문을 듣고서 몹시 칭찬하여 말하기를, “김 모에게는 아들다운 아들이 있다.” 하였다.
군은 어려서 제대로 공부를 하지 못하였으며, 장성함에 미쳐서야 스스로 글 읽기를 힘썼다. 그러나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 학업을 계속하지 못해 마침내 자신의 뜻대로 되지 못하였다. 나이 40세에 이르러 비로소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여 상상(上庠)에 들어갔다가 얼마 뒤에 향리로 돌아가 여러 아들들을 가르치면서 다시는 공거(公車)에 나아가지 않았다. 집안이 본디 가난하였는데, 군의 대에 이르러서는 더욱더 가난해졌다. 향선생(鄕先生)이 군의 행의(行誼)를 열거해 적어서 조정 관원에게 천거하고자 하였으나, 끝내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임종할 때에는 유명(遺命)을 내려 검소하게 장사를 치르게 하고는, 아들들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처신하기가 몹시 어려우니 너희들은 힘을 써서 착한 사람이 되기를 구하고 비루한 짓을 하지 마라.” 하였다. 향리의 조문하는 사람들이 서로 고하여 말하기를, “착한 사람이 죽었다.” 하였다. 이해 아무 달 아무 날에 현의 북쪽에 있는 신의곡(伸義谷) 을향(乙向)의 산등성이에 장사 지냈다.
군은 아무 군 사람 아무 씨에게 장가들어 3남 1녀를 낳았다. 장남 명원(鳴遠)은 생원으로 학문을 계속하여 닦고 있다. 차남 진원(震遠)은 구담(九潭)의 양자로 갔다. 일찍이 나에게 배웠는데, 자못 재주가 있었다. 삼남은 성원(聲遠)이다. 딸은 생원 금상현(琴尙絃)에게 시집가서 2남을 두었는데, 금시출(琴時出)과 금시발(琴時發)이다. 아, 군은 구담군에게 비교해 볼 때 또 어찌 복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명은 다음과 같다.
문족 보면 화려하기 그지없으나 族之華兮
집을 보면 가난하기 그지없었네 家則寒
몸을 보면 비천하여 낮았었으나 身之卑兮
행실 보면 높고 높아 존엄하였네 行則尊
수명은 또 오래도록 못 누렸거니 壽又不多
하늘 어쩜 그렇게도 인색하였나 天何慳
복을 쌓고 누리지를 못하고서는 蓄祉不享
후손에게 듬뿍 많이 남겨주었네 歸贏後昆
장사 지냄 검소하게 하였건마는 而藏之儉
그로 인해 몸은 더욱 편케 되었네 而俾體安
천년에다 만년 세월 흘러감이여 千秋萬𥜥兮
영원토록 어려움이 없을 것이리 其永無艱
[주1] 악실(堊室) : 상을 당하여 중문(中門) 밖의 추녀 밑에 백토(白土)를 쌓아서 축조한 상막(喪幕)인데, 흰 채로 아무런 장식을 하지 않는다.
[주2] 태사공(太師公) : 안동 김씨의 시조인 김선평(金宣平)을 가리킨다. 김선평은 안동 지방의 호족으로서 고려 태조 13년(930)에 태조가 견훤(甄萱)과 싸울 적에 안동 장씨의 시조인 장길(張吉), 안동 권씨의 시조인 권행(權幸)과 함께 태조를 도운 공으로 대광(大匡)에 임명되었으며, 뒤에 벼슬이 아부(亞父)에 이르렀다.
[주3] 월조(月朝)의 평(評) : 월단평(月旦評)과 같은 말로, 인물을 품평하는 것을 말한다. 한(漢)나라 때 허소(許劭)가 향당(鄕黨)의 인물을 논핵하기를 좋아해서 매월 초하루가 되면 인물을 다시 품평하였으므로 여남(汝南) 사람들이 이를 두고 ‘월단평’이라고 하였다. 《後漢書 卷68 許劭列傳》
進士金君墓誌銘 幷序
天啓三年癸亥二月乙丑。成均進士金君。卒于禮安縣西村之居第。春秋五十七。旣殯有日。其堂弟繼賢。書赴于緦兄弟尙憲畿內守制之練堊室。復以其孤鳴遠之意。告葬期而求壙銘。乃位而哭之如禮。復書且慰其孤而辭銘焉。後五月。繼賢重以書來曰。以山之有忌也。葬踰期。延卜于遠日。敢申前請。嗚呼。銘將以傳後。言之傳。以愛其文。必欲文
之。非今日所宜爲也。顧其情。終不忍不言。遂收涕而爲之質言。君諱繼宗。字孝叔。安東人。安東之金。由我鼻祖太師公始。後世言華胄者必稱首焉。子孫蕃衍散居。仕者于京。處者于鄕。君考諱顯。祖諱生溟。曾祖諱珣。三世居鄕不仕。與尙憲同出于高祖掌令府君。府君諱永銖。自府君以下至尙憲四世。仕宦于京。以此吾冠後十年。始與君相見。其貌癯而古也。其言疏而達也。胸次坦夷而無畦畛也。衣冠朴野而不修飾也。多稱人之美而略于過。時有同宗兄九潭金兌士悅。亦居于安東。寬厚豁達。
有長者風。月朝無異評。吾嘗意二兄人物行第俱伯叔也。歲戊午。某避地安東。君數來訪。留連敍述。忘日夜。於是益聞所未聞。君在腹。父棄世。旣生。善病不自立。八歲。忽問父所在。家人佯對以觀之。涕泣求問不已。遂指其墓處。君請具往奠。伏哭墓側。終日不去。適大雪。獨與一童奚。躬掃除塋域。自後每往省視。哀慕如一。父黨柳西厓成龍。聞而亟稱之曰。金某有子矣。君少失學。及長。自厲讀書。遭世亂輟業。竟不如其志。年四十。始名進士。入上庠。已退歸鄕里。敎訓諸子。不復就公車。家素貧。至君愈
削。鄕先生有欲列君行誼。薦于朝官之。未果。臨終遺命儉葬。戒諸子曰。處身至難。爾等勉之。求做好人。勿作庸鄙事。鄕里弔者相告語曰。善人亡矣。以是年某月某日。葬于縣北伸義谷乙向之原。君娶某郡某氏。生三男一女。男長鳴遠。生員進學不已。次震遠。出後九潭。君嘗學於余。頗有才。季聲遠。女適生員琴尙絃。生二男。時出,時發。嗚呼。君視九潭君。又何祉哉。銘曰。
族之華兮家則寒。身之卑兮行則尊。壽又不多。天何慳。蓄祉不享。歸贏後昆。而藏之儉。而俾體安。千
秋萬祀兮。其永無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