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아프칸 전쟁
도스트 무함마드는 1차전쟁 후 아프카니스탄의 국왕이 되어 20년 동안 평화와 통일을 위하여 노력한다. 그후, 아들 <세르 알리>가 뒤를 이었다.
영국은 아프카니스탄의 병합을 목적으로 다시 적극적인 정책을 취하여 1878년 11월, 군대를 3방향으로 나누어, (히베르 고개, 크람계곡, 칸다하르) 아프카니스탄으로 쳐들어 갔다. 이것이 2차 아프칸 전쟁의 시작이다.
세르알리는 아들인 야크부한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마잘리샤리프로 도망쳐 그곳에서 병사한다.
야크부한은 1879년 5월 26일 영국과 조약을 맺고 아프카니스탄의 외교권을 영국에 맡길 것을 승인하였다. <구한말, 을사늑약이 떠오른다> .
그 결과 이 조약을 체결한 영국측 사절단의 대표 <루이스 카바니야리>가 영국의 대사격으로 카불에 온다. 7월, 사절단 일행은 정중한 환영을 받으며 카불에 도착하여 짐을 풀었다. 얼마간 모든 것은 평온하였다. 사절단을 방문하는 아프칸인은 거의 없었고 거리에서 아프칸인들은 그들을 보면 고개를 돌려 외면하곤 했다.
그러나 이들에게 불행한 일이 찾아온다.
8월초, 헤라트에서 카불로 옮겨온 아프칸 군대가 봉급지불의 지연을 항의하면서 불온한 행동을 감행했다.
그들은 야크부한 정권과 영국 사절단에 항의하는 구호를 외치면서 칼을 휘두르며 카불시내에서 데모를 벌였다.
9월3일, 데모대가 영국사절단의 공관으로 접근하자 수비병인 인도병사들이 발포를 했다.
이에 흥분한 아프칸 병사들은 공관을 습격하여 카바니야리, 이하 전 직원을 몰살시켰다.
멍청한 카바니야리는 그 전날까지도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고 있었다.
전날, 그가 인도로 보낸 전문 내용은 <서부전선 이상없음, <이크, 오타다.> 만사 이상 없음 이었다. 이 전문은 마지막 전문이 되었다. 뒤를 이어 보복을 하기 위해 영국군이 투입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역시 아프칸인의 게릴라전에 시달림을 받은 끝에 카불로 철수하고 만다. 그 대신 영국은 세르알리의 조카 압둘라만을 내세워 아프카니스탄의 왕위에 오르게 한다.
2차 아프칸 전쟁을 통해 아프칸인이 자랑할 만한 일로서 마이완드 전투를 들 수 있다.
1880년,7월 27일, 아쿠브한의 아우, 아유브한이 이끄는 군대와 호전적인 아프칸 의용군(무자히딘)들이 칸다하르 서쪽 마이완드에서 영국 마로우즈 장군이 이끄는 2734명의 영국군과 대전하여 격멸시킨다. 영국의 이 패전은 19세기 아시아에서 벌린 영국의 전투중 가장 치욕적인 패전으로 기록된다.
오늘날, 카불 시가지의 가장 넓은 거리를 마이완드 大路라고 하며, 네거리에 마이완드 전승기념탑이 서있는데 그 앞, 비석에는 파시툰語(아프칸 족의 고유언어)로 된 2행시가 써있다.
<마이완드 전투에서 살아남은 자의, 그 더러운 이름은 길이 전해질 수 없다.>
끈 짧은 Bayonet의 머리로는 이 2행시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멋대로 단어를 넣어 바꾸어 보았다.
<마이완드 전투에서 도망쳐 살아남은 자의, 그 더러운 이름은 길이 전해질 수 없다>
3차 아프칸 전쟁.
두 번의 치욕적이 패배로 영국은 아프카니스탄을 군사적으로 점령한다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고 생각을 바꾼다. 아프카니스탄을 비무장지대 비스므리한 것으로 만들어 이 나라를 벽으로 하여 러시아의 세력이 남으로 내려오는 것을 막기로 하였다.
1878년, 영국은 먼저 러시아와 협의, 아프카니스탄과 러시아의 국경선 (대부분 아무다리아 강을 경계로 함)을 획정(구획정리)하고 다음에는 이란과 아프칸의 국경선을 새로 그었다.
(이 대목에서 우리나라에 그어진 38선을 생각 안 할 수 없다.)
이 국경선이 <듀런드 라인>이란 것이며 이것이 아프칸 족의 거주지를 양분하게 되어
훗날, 갖가지 분쟁을 일으키는 요인이 되었다. 오늘날에도 아프칸정부와 아프칸인들은 듀런드라인 너머의 아프칸인 거주지를 파시투니스탄 <파쉬툰족의 땅>이라고 부르며 파키스탄의 영토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다.
1895년 파미르 지방(아프칸의 동북방; 고선지 장군도 몇번 다녀가셨음) 의 국경선이 정해진다
국왕 압둘라만이 지병으로 죽고 1901년, 그의 장남 <하비불라한.>이 왕위에 오른다.
1907년, 영국은 러시아와 영러협상을 맺었다. 내용인즉, 아프카니스탄에 관한한 러시아는 이 나라가 자기 나라의 세력권 밖에 있음을 공표하고, 영국은 이 나라의 어느 곳도 점령, 병합하지 않겠다는 것을 약속한 것이다.
아프칸을 둘러싼 러시아와 영국의 분쟁은 이로써 종지부를 찍는다. 즈그들 마음대로,,,,,,,,
1차대전이 일어나자, 독일과 터어키 사절단이 카불을 방문, 같은 이슬람 국가인 터어키를 지지해줄 것을 요청하며 영국에 선전포고를 하기를 권유하나 하비불라한은 찬성하는 여론을 억누르고 끝까지 중립을 지킨다.
1919년,
사냥을 하던 국왕이 암살당한 후, 그의 아들 <아마눌라한>이 국왕이 되었다. 그는 5월, 즉위하자마자 아프카니스탄의 완전독립을 외치며 이를 행동에 옮겼다. 영국이 세계대전으로 피폐해지고 인도에서 반란 (영국에서 보면 반란, 인도에서 보면 독립운동)이 일어난 틈을 이용, 빌어먹을 듀런드라인을 박차고 나와 인도로 군대를 보낸다.
이것이 3차 아프칸 전쟁이다. 아프칸이라면 진절머리가 나는 영국은, 한 달 동안의 전투 끝에 <라왈핀디>에서 회견, 8월에 강화조약이 맺어졌다. 이로써 아프카니스탄은 외교권을 회복하여 국제적으로 한 국가임을 승인 받게 되었다. 아프카니스탄에서는 이날을 기념, 매년 8월에 독립기념제가 개최된다. 이후 아프카니스탄은 근대화의 대열에 들어선다. 그러나........
1842년, 1월6일 영국은아프간을 점령 후 2년만에 철수 중 인도로 통하는 도로에서 군인, 가족, 인도용병 등 2만여명이 몰살 단 1명만 귀환.
20세기 소련은 10년간 점령후 15,000명 사망, 전투기 1,200대와 장갑차 2,000대 손실 등 840억불 전쟁비용 지출하였으나 전장없는 전장에서 게릴라소탕을 포기하고 철군.
아프카니스탄은 침략자들에겐 생지옥이다. 아프칸을 침공한 나라들 치고 제대로 돌아간 국가는 없다.
몰락해 가는 구쏘련에 마지막 방아쇠를 당긴 것은 아프칸이라는 말도 있다.
침략도 가능하고 점령도 가능하지만 절대 이길 수 없는 나라가 아프칸이다.
아프카니스탄은 침략자들에겐 무간도의 끝이다.
들어갈 수는 있지만 들어간 그대로 나오지 못하는 곳이다.
四道
열반에 이르는 네 길. 가행도, 무간도, 해탈도, 승진도이다.
가행도[加行道]
사도(四道)의 하나. 번뇌를 끊기 위하여 다시 힘을 더하여 수행하는 경지를 이른다.
무간도[無間道]
사도(四道)의 하나. 번뇌를 끊고 진리를 체득하는 단계로, 막힘이 없는 경지를 이른다.
해탈도[解脫道]
1 같은 말: 불도(佛道)
2 사도(四道)의 하나. 확실히 진리를 깨닫고 해탈을 얻는 경지를 이른다.
승진도[勝進道]
사도(四道)의 하나. 해탈을 한 뒤에 다시 훌륭한 수행을 하여 정혜(定慧)를 더욱 키워 가는 경지를 이른다.
bayonet조회 255|추천 0|2009.08.04. 14:06 ← 출처 잇빨중사카페
첫댓글 아프간이 그런 곳이었군요.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