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호지면 적서리에는 차천로 선생의 영정을 모셔 둔 사당 ‘문원사’가 있습니다. 차천로 선생은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기에 글의 동산이라는 문원사(文苑祠)라 불리웁니다.
문원사는 차천로의 후손(연안 차씨 오산공파)들이 당진에 세운 사당으로 1993년 당진의 향토유적 제2호로 지정됐습니다.
차천로의 고향은 개성이지만 그의 후손들이 적서리로 낙향하여 이곳에 사당을 세웠고 연안차씨 집성촌이 만들어졌습니다.
사당의 오른쪽에는 아름드리 팽나무 두 그루가 세월의 흔적을 말해 주고 있는데요.
문원사는 돌로 높이 쌓은 축대 위에 세워져 있는데 약 20여개의 돌계단을 오르면 외삼문이 있습니다.
1954년 정문인 외삼문을 보수하며 규화문(奎華門)이라는 현판을 달았습니다.
규화문을 지나면 문원사 사당이 있습니다.
정조 14년(1790)에는 차천로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었지만 고종 30년에 차천로의 13대손 차영열이 영정을 봉안하고 문원사를 지었습니다.
사당에 모신 영정은 선조 때의 인물화가 이신흠이 그렸는데 당시 차천로의 나이는 40세가량이었다고 합니다.
오산 차천로 선생은 가사문학의 대가로 불리는데요. 자는 복원(復元), 호는 오산(五山), 본관은 연안(延安)이며 1583년(선조 16년) 벼슬길에 올랐습니다.
오산선생은 시에 능해 한석봉의 글씨, 최립의 문장과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일컬어졌는데요.
저서로 <오산집>과 <오산설림>이 있고, 작품으로는 학창시절 배웠던 <강촌별곡> 등이 있습니다.
오산 선생의 제향을 살펴보겠습니다. 제관은 당진지역의 유림 및 지역 유지들이 주로 맡는데요. 총 10명의 제관은 매년 새롭게 정합니다. 제관의 직책은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 묘사, 전사관, 집례, 대축, 집사 2인, 알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제향축문 내용은 오산 선생의 뛰어난 문장력에 대해 칭송하는데요. '임진왜란 때 많은 사람들 사이에 한 번에 백수를 읊으니 명나라 장수가 경탄해 문명을 천하에 떨쳤다"라는 내용입니다.
제수를 보면 4두4변으로, 크게 좌우에 변(籩)과 두(豆)가 있습니다. ‘변’이란 마른 음식을 담는 대나무로 된 그릇이고, ‘두’는 젖은 제수를 담는 나무로 만든 그릇을 말합니다. 마른 음식을 담은 4개의 변에는 밤·육포·소금·대추를 담고, 젖은 음식을 담은 4개의 두에는 조기·소고기·미나리·열무를 담습니다. 4변과 4두 사이에 놓인 사각형 그릇에는 쌀과 기장을, 원형 그릇에는 수수와 조를 넣고 그 앞쪽에는 돼지고기를 놓습니다.
오산 선생의 후손들과 당진향교 유림들은 문원사에 모여 매년 음력 9월에 오산 선생을 추모하며 제향하고 있는데요. 1963년 즈음에 경모회가 조직된 이후 매년 음력 11월 15일에 향사를 봉행하다 2014년부터 매년 음력 9월 15일에 봉행하고 있습니다.
오산 선생은 명나라에 보내는 대부분의 외교문서를 담당해 문명이 명나라까지 떨쳐 ‘동방문사’라는 칭호를 받았는데요. 오산 차천로 선생의 제향은 훌륭한 선현에게 공경의 마음을 전하는 서원 격의 제향이라고 합니다.
오산선생 후손들과 당진향교 유림께서 차천로와 관계된 일화 하나를 소개해 주셨는데요.
임진왜란 때 차천로와 한석봉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명나라 부호가 유명한 화가의 복사꽃 화조(花鳥)그림을 받아 병풍을 꾸며 놓았답니다.
그리고 명나라의 문장가와 명필가를 초청해 화제시(畵題詩)를 지으려 했습니다.
때마침 차천로와 한석봉이 구경하러 갔다가 주인이 없는 틈을 타 차천로는 시를 짓고 한석봉은 이를 병풍에 썼다고 하는데요.
"같은 모양 복사꽃인데 색깔이 다르구나
이 뜻을 가져다가 봄바람에 물었더니
그 복사꽃 사이에 다행히 말하는 새가 있어
짙은 분홍이 엷은 분홍에 비쳤다고 하더라"
이를 본 명나라 문장과 명필들이 명시(名詩)에 명필(名筆)이라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다고 합니다.
오산선생경모회 김원곤 회장은 “당진향교 유도화와 오산경모회에서는 전통 제례 예법을 시행하며 전통 제례를 계승·보존하고 있습니다. 전통문화가 현대식으로 바뀌면서 제사나 차례 등 전통과 어긋난 부분이 많아졌습니다. 유림의 한 사람으로서 전통문화를 계승·보존하면서 잘못된 부분을 교정하며 전통의 맥을 이어가는데 기여하겠습니다."
"또한 차천로 선생은 짧은 시간에 많은 시를 쓰는 재주가 있어 일본에 갔을 때에도 많은 시를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차천로뿐만 아니라 조부와 아버지, 3형제까지 문장이 뛰어나 ‘차문삼세오문장(車門三世五文章)’ 이라 불렸습니다. 뛰어난 시재를 지녔지만 상대적으로 오산 선생의 시문학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경모회에서는 당진시민들과 청소년들이 오산 시문학을 계승해 창작문화를 이어갈 수 있도록 시낭송, 글짓기 대회 등 다양한 행사를 통해 선생의 시문학을 알리겠습니다."며 포부를 밝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