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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과 유해발굴(서울 방어작전과 서울 철수 작전)
1. 개요
전쟁 초기에 국방부와 군 수뇌부는 '서울 고수냐', '한강선 방어냐'의 기로에서 '서울 고수' 전략을 굳히고 모든 예비전력을 서울 북방에 집중으로 축차 투입하여 문산을 방어하는 한편, 의정부에서 적을 저지하고 반격으로 전환하려 했으나 26일 의정부가 피탈되고 모두 실패하였다.
이에 군은 당일 17:00에 제7사단장 유재흥 장군에게 의정부지구 전투사령관 직책을 부여하여 대전에서 올라오는 제2사단 등의 에비전력을 통합지휘 하도록 학고 창동-우이동선에서 적을 저지하여 제3. 5사단으로 반격으로 실지 회복을 한다느 구두명령이 하달 된다.
같은 시간에 문산 방면은 제1사단이 봉일천으로 철수중이고 김포반도는 적이 조강포 일대에서 도하를 시도하자 김포지구사령부를 편성하여 방어에 들어가게 되는 등 사실상 '서울 고수'는 의문시 되고 있었다.
이에 27일 01:00에 중앙청에서 비상국무회의가 소집되었으며 계속하여 '서울 고수'를 주장하는 채병덕 총장의 견해와는 다르게 신성모 국방장관이 정부의 수원이동을 발의 하였다.
심야 국회에 참석해서도 채병덕 총장은 "반격으로 전환 백두산에 태극기를 꽂을 것이다"라고 호언장담한 반면 신국방장관은 정부의 이동이 불가피하다는 암시를 던졌지만 국회는 "100만 서울 시민과 더불어 수도를 사수한다"는 결의문을 통과 시켰다.
27일 05:00에 국방수뇌회의가 소집되어 신장관이 서울을 포기할 수 밖에 업다고 하였으나 채총장이 "정부는 남으로 이동하더라도 군은 서울을 고수한다"는 결심을 피력하며 회의를 끝냈으나 대통령은 이미 03:00에 경무대를 떠나 피난길에 올랐다.
국방 수뇌부 회의에 앞서 02:00경에 신장관과 서울시장, 그리고 조병옥경 내무부 장관이 경무대에 들어와 서울을 떠나지 않겠다는 대통령을 설득한 것이다.
그리고 27일 06:00에 정부가 수원으로 천도를 발표함으로써 시민들은 비로소 위기감을 알게 되엇고 서울시내는 혼란속에 빠져 들었다.
당일 10:00에 창동 저지선이 무너지고 채총장은 서울 철수를 결심하고 극비리에 시흥의 보병학교로 이동한다고 하고 전방 부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이에 최창식 공병감이 적이 서울시내에 들어오기전 2시간 전에 한강교(한강대교, 철교3개소,광진교)를 동시에 폭파하고 대략 16:00라고 보고 하고 공병대가 전선에서 후퇴하는 병력을 도하시키기 위해 공병 보트 18척을 준비한다고 하였다.
12:30분부터 육본이 철수하기 시작하였고 13:00에는 대통령의 녹음 방소이 있었지만 시민들은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이때 미 군사고문단장 대리 라이트 대령이 맥아더장군으로부터 곧 조사단을 파견한다는 전문ㄴ을 받고 미군의 철수계획을 취소한 뒤에 다시 서울로 복귀하기로 하고 이를 채 총장에게 설명하고 함께 용산으로 복귀할 것을 권고하여 채 총장의 결심으로 18:00경 다시 용산으로 복귀하였다.
이대 각 신문사에서 미극동군사령부의 전방 지히소 설치를 대서특필하여 호의와 벽보로 붙였고 정훈국에서도 군 사기진작을 위해 가두선전에 주력하였다.
하지만 이미 27일 04:00에 적이 창동선을 급습하고 아군의 공세이전기도를 좌절시켰으며 유재흥 장군은 패퇴하는 병력과 증언부대를 수습하여 그들의 남하를 저지하여 하였으나 우세한 그들의 전차와 포화로 이 선을 지탱하지 못하고 동일 14:00에 미아리-태릉선에서 서울 방어의 최후 저지선을 편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28일 새벽에 한강대교가 폭파 됨으로써 우리 손으로 우리의 퇴로를 끊어버렸다는 후세의 비판을 받고 있지만 이 문제 또한 만약에 폭파되지 못하고 적이 먼저 선점하여 전차부대의 도하가 이루어졌다면 아마도 미군이 한반도에 도착하기 이전에 승패는 끝나버릴 수도 있다는 가설은 힘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의문도 남는다.
이와같이 수도서울은 개전 4일만에 적에게 피탈되고 한강교의 폭파로 수많은 피난민과 전방에서 내려오는 군의 철수병력과 장비들이 갈 길을 잃고 허부적 거리는 비극속에 김일성은 이승엽을 내세워 서을시민위원히 위원장으로 임명하고 프락치등을 내세워 무고한 시민의 처형과 사유재산의 약탈 등 만행을 저질르게 된다.
이제 아군은 시흥에 시흥지구전투사령부를 편성하여 적의 한강 도하(노량진-영등포 방면)를 막도록 하고 김포지구에서는 김포지구사령부가 김포반도로 유입되는 적 제6사다의 진출을 지연 시킴으로써 당초에는 3일의 지연이 6일동안이나 이 전선을 지탱함으로서 미군의 한반도 진출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이장에서는 수도권 전황과 한강선 방어에 대한 창동-미아리전투, 김포-오류동부근전투, 서울철수 상황으로 구분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2. 창동- 미아리 전투
가. 전사 요약
의정부의 실함으로 의정부지구 전투사령관 제7사단장 유재흥장군은 이곳에 투입된 병력을 규합하여 창동을 중심으로 도봉산(우이동)-수락산(상계동)선의 구릉지대에 방어선을 계획하고 철수 병력을 수습중이었다.
이때 의정부 남쪽 백석천 일대에 배치된 엄호부대인 제2사단 제25연대(-) 26일 17:00경부터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 제3사단의 공격을 2.36"로켓조가 전차 1대를 파괴하고 이날 밤에 제11중대장이 편성한 전차특옹조가 전차 2대를 파괴하여 적의 진출을 저지하였으며 이로인해 적은 다음날 새벽에 다시 공격해 왔다.
이 동안 의정부지구 전투사령부는 병력을 수습하여 우이동-창동 구릉지대에 제7사단 제1.3.9연대, 제2사단 제5.16.25연대, 제3사단 제22연대의 잔여병력으로 총 6개 대대로 규모로 병력을 배치하였다. 우측방 붕암산 방향에는 제9연대(-)철수병력이, 육사부근 고지에는 내촌에서 물러난 육사생도 대대가 배치 되어 있었다.
그러나 27일 10:00경 미처 방어진지를 구축하기도 전에 적 전차 40여 대와 자주포로 증강된 적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포병학교 제2교도대대 105mm 곡사포 6문이 지원사격을 하는 등 분전했으나 방어선이 돌파되고 이 과정에 제1연대장 함준호 대령이 수유리에서 적탄에 맞아 전사했다.
이무렵 미아리-회기동선에는 미아리에서 서울울 방어하라는 명령을 받은 미아리지구 전투사령관 제5사단장 이응준 소장이 휘하의 제5연대 제1대대와 수도사단 제8연대 제2대대를 지휘하여 방어진지를 편성하다가 철수 병력을 수습, 제7사단장과 정릉(171고지)-미아리-청량리(106고지)를 잇는 이른바 미아리 방어선을 형성하여 제5사단장이 제20연대 제1대대를 171고지 동쪽, 제1연대(대대규모)를 길음교 북쪽 공묘지, 제15연대 제2대대를 미아리고개 132고지에 배치하였다.
제7사단장은 혼성연대를 164고지에 북동쪽에,제8연대 제2대대를 회기동 143고지 및 중랑교 남쪽 106고지, 제16연대(대대규모)를 예비로 돈암국교에 배치하였고 105mm곡사포를 돈암동에 57mm 6문이 미아리 고개에 배치되는 등 27일 오후가지 미아리-회기동 선에는 약 3000명의 병력이 배치 되었으며 중랑교를 제3사단 공병대대가 폭파하였다.
27일 밤 폭우가 집중되는 가운데 적의 공격이 재개 되었다. 적의 기마정찰대와 적 전차 10여 대가 19:00에 수유리에서 미아리로 공격을 하여 제20연대 제1대대는 중과부족으로 밀려났는데 포병과 대전차포 등이 집중화력으로 선두 전차를 파괴하면서 일단 에봉을 제압하였으나 24:00경 다시 폭우속에 수미터 앞도 보기 힘든 그런 상황에서 전차로 밀어붙여 미아리 방어선이 무너지고 길음교로 진출하고 이때 서울 시내에 침투한 적의 편의대가 곳고에서 예광탄으로 신호를 보내어 국군의 사기는 극도로 저하되고 제15연대 제2대대의 육탄 전차공격에도 결국 미아리 고개진입을 허용하게 된다.
이때가 28일 01:00경이었다.
미아리 방어선에서 28일 새벽을 맞이한 잔류병력은 적 전차가 시내에 진입한 사실도 모르고 있다가 나리 밝은 다음에 적 보병의 기습으로 분산 철수하기 시작한다.
나. 당시 지휘자들의 증언 내용
육군본부 전방지휘소장 강문봉의 증언이다.('65.1.14)
"지금의 쌍문파출소(과거는 노해지서)에 지휘소가 있었는데 27일 미명에 제7사단 포병대대장 이규삼 소령이 찾아와 땅을 치며 "보병이 포병을 보호하지 않고 도망쳤기 대문에 우리는 포를 전부 잃고, 이제는 포 사격도 할 수 없게 되었다"고 통곡하였다.
아날 11:00시에 적 전차 공격을 받고 미아리로 철수하여 고개 남쪽에 있는 감천여관에서 작전계획을 짜다 과로에소 온 탓인지 잠시후 유재흥 장군과 잠시 잠들고 말았다.
누가 문을 두들기며 "전차가 오고 있다'는 고함소리에 놀라 정신을 차려보니 적 전차와 기관총 소리가 동시에 들려 여관 담을 넘어 성북 경찰서로 뛰어갔더니 수백명의 장벼이 운집하고 있었다.
이들에게 전차가 창경원쪽으로 가고 있다고 알리고 지프를 빌려타고 육군본부로 가서 채총장에게 전차가 창경원가지 들어왔다고 보고하였는데 이때가 28일 01:30분으로 알고 있다."
수도경비사령부 제3연대 제2대대 제7중대 소대장 소위 박태송의 증언이다.('64.8.25)
"그 당시의 소속은?"
"제7사단 제3연대였습니다. 그게 어디에 있었느냐면 지금 서빙고에 있는 여군중대 있지 않습니까. 그 자리에 제가 있었어요. 최초에 그날 지시를 받고 그 다음날 동두천으로 출동을 했어요.
거기에 출동을 했다가 별 접전이 없었고 새벽 무렵에 진지를 점령하고 있는데 저녁 무렵에 의정부를 거치지 말고 서울로 돌아오라는 무전연락이 왔습니다.
그래 준비하고 있으니까 어두워서 돌아오는데 의정부를 거쳐오다가 대부분의 전우들이 희생되었습니다.
"그때 제3연대장이 누구였습니까?"
"사변나기 직전까진 박임항 연대장이였고 그후에 젊은 연대장인데 이름은 모르겠어요.
20여명을 데리고 늦게야 미아리에 도착했는데 탱크 한대가 들어왔는데 그 탱크 한대 없애려고 있는 수단을 다해보았으나 그게 듣지 않고 새벽에 잠잠해져서 어떻게 잠이 들었는데 깨어보니 너무 조용한 것 같아서 상사인가 중사인가 1명을 내보냈더니 뭐 어떻게 흔적이 없어요. 그렇게 많던 병력이 후퇴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이 지금 당시에 허무했다는 것이 기억에 남아있는 것입니다.
수도경비사령부 제8연대 제2대대 5중대장 중위 안태갑의 증언이다.('67.2.2, '81.3.13)
제1차 증언 : 수도사단 제2연대와 우리 제8연대가 교대 되었다. 그래서 제8연대가 서울로 나오고 제2연대가 들어갔다.
내가 나온 곳은 '50. 6월24일 지금 육균본부 자리에 도착을 해서 그날이 토요일이라 집으로 외출을 했다. 25일, 그날은 장충동에 있는 충혼탑에 귀경보고를 한다고정복을 하고 나오라고 해서 나갓는데 웅성웅성 하였다.
그때까지도 부대에서 뭐가 났다는 이야기는 안하고 비상대기만 시켰다. 그리고 26일 아침에 부대가 출동한다고 하더니 우리 제2대대만 가평으로 갔다.
가평으로 가다가 밤에 다시 돌아왔다.
그때 우리 중대장이 5기생 이석우 대위인데 이 양반의 태도가 수상해 부대가 움직일 때마다 연락병한테 쪽지를 적어서 어디론가 보내기에 이상하다 여겨 연락 나가는 연락병을 도중에 체포하여 편지내용을 보았다. 그러니까 그 내용이 지금은 분명하지는 않지만 아무개한테 일금 얼마를 보내니 어디 있는 누구한테 보내라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실제 연락병한테 실지 돈을 받았느냐고 하니까 받은 일이 없다고 하였다.
그때 제8중대장 정승모가 대대 선임장교인데 그분과 상의하였다.
우리 부대가 어디로 가려고 햇느냐면 지금 고대와 고대 부근에 배치되고 제5중대장은 잔류토록 정리하였는데 본인이 꼭 가겠다고 애원하여 연대장(서종철 중령)에게 보고하니 나가라고 해서 나갔는데 연대 정보장교가 따라와서 우리 중대장을 데려가 즉결 처분을 했어요.
그 사람은 원래 제주도에 있을 때부터 국제공산당에서 활동하던 사람이었다. 나중에 탄로가 나 즉결처분을 받았고 내가 현지에서 제5중대장 대리를 했습니다.
그후에 그곳에서 2일을 있다가 광나루를 건너 수원으로 내려갔다.
2차증언
"경력, 그리고 주요 전투 참가는?"
"만주 봉천 상업학교를 나왔고 월남하여 육사 8기로 입대하였다. 전투는 청량리전투와 공비토벌을 했다. 공비토벌은 신남전투, 정작골(자은리 북방)전투, 오대산 공비토벌 및 상남전투 등이 있다. 당시 대대장은 이현진 소령이고 중대장은 7기생인 이대용 대위였다.
연대장은 서종철 중령인데 노량진전투에서 부상당하여 이현진 중령 부연대장이 연대를 지휘했다.
"강원도에서 서울가지 부대이동 및 경로는?"
"홍천 두촌면 자은리 북방 정작골에 중대가 있다가 23일 출발하여 용문에 도착하여 하루를 자고 24일 서울 용산에 도착, 지금의 육본이 위치한 제18연대 자리에 들어갔다.
25일 09:00에 장충단에 있는 공비토벌전사자위령탑에 모이게 되어 있었다. 신당동 집에 가 쉬고 다음날 준비를 하고 있는데 38선에 북한군이 불법 남침 했다고 전 장병은 원대복귀하라는 방송을 듣고부대에 들어가니 출동준비가 되어 대대장으로부터 명령을 받고 한강을 건너 노량진의 한강둑 제방에 방어진지를 편성 하였다.
배치되고 얼마안되어 대대장으로부터 철수하라는 지시가 있어 대대는 다시 부대로 돌아왔다.
25일을 그대로 보내고 26일도 오전에 대기하고 있다가 오후늦게 가평으로 ㅜㄹ동하라는 명령이 내려 징발된 버스를 타고 가평까지 갔다.
그런데 중대장이 계속 북으로로만 진출해 물어보니 무조건 따르라고 해서 못하겠다고 말다툼을 하곤 했는데 밤에 다시 부대로 ㄷㄹ어왓다가 아침 08:00경에 다시 청량리로 출동지시가 내려왓다.
이대 중대장이 전령으 ㄹ시켜 뭔가를 보내기에 앞에서 말한 것을 확인하고 먼저 제8중대장인 정승허ㅘ 대위와 상의하고 대대장에게 보고하고 대책을 숙의중인데 연대장이 와서 물어봐 이야기 했더니 그대로 가라고 해 버스를 타고 청량리 회기동 파출소에서 전부하차하여 인으ㅓㄴ 및 장비검사르 하는데 여대 S-2보좌관이 3~4명의 하사관과 함께 와서 중대장을 체포해 갔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는 해방후 중국 공산당에 가입되어 만주에서 활동하다가 우리나라에 프락치로 들어왔다고 한다.
"중대와 대대간, 소대와 중대간 통신유지는 전투간에 어떻게 했는지?"
"유무선이 없어 전령으로 통신을 유지했다."
"ㅈㅣ휘통솔에 대하여는?"
"글쎄요. 당시는 적정을 너무 모르고 불명확한 명령을 하달했다. 노량진에 부대를 배치한 일이며 가평까지 가서 다시 돌아온 일 등은 무계획, 무모한 행동이라 생각한다."
제2사단 제16연대 제3대대 정보관 김희석의 증언이다.('65.10.13)
"대대는 청주에 주둔하면서 태백산지구 공비토벌을 하던 중에 출동명령을 받아 26일 오후에 서울에 도착 하였다.
당시 대대장은 강태봉 중령이었으나 휴가중이라 같이 행동하지 못하고 부대대장 최민섭 대위가 연대의 후발대장으로서 3개중대 미달의 부대를 지휘하였다.
27일 05:00에 창동에서 제7사단장 유재흥 장군의 명령을 받고 의정부로 진출하다 적 전차와 만나게 되어 창동으로 철수하여 본대와 합세하게 되었다.
이날 12:00에 전차 20여대가 대대 정면으로 침입한 가닭으로 분산 되고 말았다.
제2사단 헌병대 선임하관 일등상사 조한철의 증언이다.('66.5.25)
"6.25때 어디에 계셨습니까?"
"대전, 제2사단에서 25일 의정부지구로 출동을 했다."
"당시 상황을 말씀해 주십시오?"
"25일 오후 3시반에 기차로 헌병 34명과 장교 2명이 서울을 경유하여 의정부에 도착했다. 그때 시간이 26일 새벽 1시쯤일 거다. 그때 사단장 이형근 장군이 새벽 5시쯤 전투를 개시한다고 했다. 그래서 낙오자선을 의정부 초업 국민학교에서 200m 떨어진 지점에 설치하자마자 터지기 시작했다.
그러니 낙오자를 수습하기도 전에 전방이 무너졌다. 조금 있으니 많은 인원이 후퇴해 오는데 어느 대령에게 차르 막고 이렇게 후퇴해도 되겟습니까? 하니까 작명이 후퇴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말만 듣고서 그 다음부터는 전부 다 교통정리만 해 버렸다. 그런데 맨 마지막에 사단장이 내려오면서 그 연대장이 누구냐고 묻는 것이었다. 그래서 전장실상이 전장공포에서 온 공항심리를 인식하지 못한 실수를 한번 해 본 적이 있다.
창동에 오니까 사단장이 육군본부로 소환 당해 갔다. 그래서 우리 사단은 유재흥 장군이 통합지휘를 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사단장을 경호하게 되었다.
그리고 창동에서 본 인민군 탱크가 나타나면서 사기가 저하되어 완전히 뒤로 쳐져 버렸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탱크가 아니고 자동차를 위장한 것은 확인 안하고 놀래버린 것이다. 작전참모도 갈팡질팡하여 지휘도 못하는 형편이라 할 수 없이 또 후퇴를 해서 미라리로 철수 했다.
미아리 고개에 부대를 배치하고 장교를 찾으니 장교가 없었다. 위관장교는 나 하나 뿐이었다. 한심했다. 배치를 하는데 참모장이 어디 있으며 대대장이 어디 있는지도 연대장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뒤에서는 박격포가 떨어지고 오합지졸이었다.
나보고 지시를 하는데 제2사단과 제7사단의 헌병을 창경원으로 전부 집합시키라는 것이다.
그래서 헌병 72명을 데리고 창경원에 갔다.
그곳에 가서 서울시내 요소에 헌병 2명씩을 보내놓고 나하고 3~4명이 남아서 낙오병을 집결시키니 80여명이 되었다. 한참 지난 후에 차를 세웠는데 인민군 탱크가 와서 무자비하게 사격을 가하여 많이 죽었다. 그래서 탱크 7~8대가 지나간 다음에 창경원에 들어가 보니 다 도망을 가버렸다.
그런데 부대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창경원 뒤의 어느 민가에서 밥을 얻어 먹고 옷을 갈아 입고 오후 6시에 시내를 나왔는데 그때는 인민군이 다 들어온 것이다. 완전히 적들의 치하가 되었다.
서울 시내를 빠져 나가지 못하고 하루를 헤매다 다음 날 저녁때인가 마포강에서 도하하여 여의도에서 짚차를 잡아타고 수원까지 내려갔다.
제5사단 제15연대 제2대대 작전장교 중위 장영종의 증언이다.('80.10.18)
"입대전 경력과 전주에서 미아리까지 부대이동 상황은 ?"
"육사 7기로 임관했다. 원래 제2대대 5중대장을 하고 있다가 보병학교 촏ㅇ군사반을 졸업하고 연대장 최영희 대령이 S-3로 근무하라하여 제15연대 S-3보좌관이 되었다.
전쟁 직전에 서울에 있는 헌병학교에 교육파견 명령이 나서 6월 26일 입교하기 위하여 24일 서울에 와 25일 헌병학교에 갔는데 들어가지도 못하고 밤차로 전주로 갔다.
부대에 가니 이미 3대대는 출동했고 2대대는 올라가고 있어 혼자 다시 서울로 올라와 27일 05:00경 용산에 도착하여 제5사단장 이응준 장군을 만나 문산으로 가겠다고 했더니 미아리로 가라고 하여 다시 혼자서 미아리로 갔다."
"지형의 특색과 부대배치는?"
"전방에 길음교가 있었다. 200~300m 떨어져 있었지요. 그 당시에 분명히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선두 전차가 파괴되자 교량입구를 막게 되어 사용을 못하게 된 것이지요.
대대 OP는 132곶에 있었어요. 대대장 안광영 소령과 같이 있었습니다. 부대배치를 완료한 후에 위문품으로 들어온 정종도 있고 해서 전부대원에게 한 대접씩 나누어 먹여 휴식시킨 다음 전투준비에 만전을 기하고 있었습니다.
아군이 적전차에 대하여 81mm 박격포, 57mm 대전차포, 그리고 L-4비행기도 폭격한 것이 기억이 납니다.
아군의 적전차 공격으로 적의 공격이 약 6시간 정도 멈추었다가 새벽 4시경에 전차가 다시 움직였어요. 비도 조금 내리는데 전차가 전진후방으로 들어오니 약간 혼란이 일어났으나 보병이 없어 다시 질서를 회복했는데 아침 9시경에 적 보병이 내려와 한참 싸우다 탄약이 떨어져 탄약을 가지러 탄약차로 갔더니 차가 없어요. 알아보니 부상병이 타고 병원으로 갔데요.
탄약이 떨어져 오피로 올라서니 대대장과 제5중대원 90명이 있어요. 북한군이 계속 추격해 오니 우리는 여기서 대대장과 헤어지고 5중대원을 이끌고 내가 인솔해서 왔어요."
"철수 과정은?"
"서빙고로 도하 했는데 오는 도중에 동대문에 오니까 서북청년단원들이 적이 퇴계로에 있다고 하여 장충동 고개를 넘어 한남동으로 왔어요. 삼각지와 한강교에는 적의 전차가 있다하여 서빙고쪽으로 내려갔는데 이때 한강교 폭파를 알았어요.
한강에 오니 배가 11척이 있는데 그곳에는 제9연대 일부병력과 피난민이 혼잡을 이루어 무질서해서 권총을 쏘며 조용히 시켰는데 영감 한 분이 군인이 먼저 건너야 한다고 하여 3대를 사용하라고 하여 무사히 도하 하였습니다. 그 이후에 나는 제15연대 제3대대 작전장교가 되었습니다."
제5사다 제20연대 제1대대장 소령 김한주의 증언이다.('77.3.17, '81.3.20)
1차증언 : 광양에서 지리산 공비토벌작전을 수행하고 있던 중 6월25일 연대본부로 모든 장비와 보급품을 가지고 철수하라하여 그 다음날 광주역에 도착했는데 하차도 않고 고용화기를 실고 1시간 뒤에 그곳을 떠나 동일 19:00에 용산역에 도착하여 비를 맞으며 제18연대 막사에 수용되었으나 곧 육본의 명령으로 철수를 엄호한다며 미아리공동묘지에 배치되었다.
이응준사단장과 박기병 연대장의 전화도 받았고 그런데 얼마 뒤부터는 아군부대들이 밀어닥치기 시작했는데 적전차가 꼬리를 물고 뒤따랐다.
박격포와 기관총등 화력을 집중하였더니 전차로 보였던 그들 대열속에서 차량과 병력이 공중으로 치솟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그들이 전차아닌 차량으로서 위장하고 있음을 알았다.
적이 격퇴되고 28일 아침에도 적 저항이 없는 것을 보고 사단과 연대에 전화했으나 응답이 없어 전령을 보내봤더니 흔적도 없다고 한다. '사수하라' 명령만 내리고 철수해버린 상사들이 원망스러웠다.
뚝섬방향으로 도하하여 시흥에 집결하여 재편성하여 노량진 인도교까지 가서 진지를 점령했는데 적은 소규모로 소대공격을 수시로 할 정도였다.
지휘하는 사람도 없고 탄약 식사등의 보급지원도 잘 안되었다. 대대장이 알아서 지휘하라는 것인데 후방과 연락도 안되고 굶을 수가 없어서 다시 시흥쪽으로 부대를 철수시키고 말았다. 날짜는 정확히 모른다.
제2사단 제25연대 병기장교 강순형의 증언이다.('66.5.24)
"사령관께서는 6.25전쟁때 어디에 계셨습니까?"
"당시 온양에 있는 제25연대 병기장교인데 그때 제가 안동에 나가 있는 제1대대 병기검사하러 안동에 갔는데 6.25전쟁이 났다고 얘기를 들었어요.
여관에서 자려고 하는데 손님들이 말을 해서 라디오를 들으니까 전쟁이 났다고 해서 자고 그 이튼날 제1대대에 가서 검사를 하는 둥 마는 둥하고 우선 본대로 왓는데 본대는 출발하고 없어요.
그래서 기차를 타고 용산역으로 왔는데 제25연대 사람 몇을 만났는데 부대가 의정부쪽으로 갔다고 하여 하늘에서 비행기가 공중전 하는 것을 보고 동대문으로 해서 청량리로 갔는데 거기서 트럭을 타고 의정부로 가려면 미아리로 가야하는데 태릉으로 갔어요.
여기서 보미 제1삳납 병력리라던가 제7사단 병력이 후퇴해서 내려오는데 물어보니 제25연대는 미아리쪽으로 가야 된다고 하여 미아리로 가니 낙휴병들을 헌병들이 붙잡아 놓고 나보고 중대장을 하라고 (아마 유재흥 장군이)하여 미아리고개 동쪽 공동묘지에 80며을 데리고 배치하였습니다.
적전차가 새벽 1시경부터 들어오는데 총격전이 벌어졋는데 탱크는 고개 너머로 자꾸 가는 겁니다. 지휘하는 사람은 없고 연락도 끊기고 날이 밝아오는데 탱크하고 부대가 서울로 들어갔는데 우리는 거기에 있으니까.
그래서 저 건너 산에 배치된 부대로 병력을 데리고 가서 대대 선임장교가 동기생이라 함께 후퇴하기 시작하는데 서빙고로 해서 한강교로 가니 정말 다리는 끊어졌고 삼각지까지 차량과 사람으로 넘치고 시체도 많았어요. 여기서 민간이 타고 있는 배를 징발해서 한강에서 노량진 쪽으로 도하 했어요."
제7사단 제9연대 제6중대 소총병 이등중사 박인업의 증언이다.('66.3.4)
"월남하신 것이 언제이고 제주도 토벌도 참가 했습니까. 38선에서 6.25전쟁 나기전ㄲ지의 출동 같은 것을 경험했습니까. 그때 계급은?"
"1948년에 월남했고 제9연대로 갓는데 제주도에 가니까 토벌은 다 끝났습니다. 전선에서는 북한군 순찰병만 보았고 병장으로 제6중대 제1소대 입니다."
"대대본부는?"
"포천 신읍에. 그 전날이 토요일이라 전부 외출 나가고 전날 저녁에 전방에서 탱크소리가 들린다 하여 긴장상태에 있었는데 그러다가 아침에 비가 내리는데 한 4시경 포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더군요. 전방에 1개 대대가 나가 있었는데 제2대대에서 제7중대인가 나가 있었을 겁니다.
아침에 전투가 벌어져 부상자가 나오고 7시반경에 부관이 전부 출동하라해서 나가려는데 벌써 피난민들이 나오고 비는 쏟아지는데 탱크 20대가 들이닥치더군요.
신읍리에서 3~400m에 탱크가 들어오더니 시민들에게 한차 연설을 하고 조금 있다가 탱크가 포를 우리 부대로 돌리더니 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린 밤새 걸어서 사관학교로 와서 재편성해서 미아리고개로 배치되어 이틀인가 싸웠습니다."
"미아리어느 쪽입니까?"
"서라벌 대학의 산 중턱에 가서 이틀인가 싸우고 포가 날아와요. 우리가 밀려서성동역으로 빠져 아침 8시에 철수하기 시작해서 나룻배로 건너 안양에 서 다시 수원으로 갔습니다."
"그러니까 2대대만 입니까?"
"대대가 다 헤어져서 다시 편성했습니다. 수원에서 특공대를 조직하여 서울에 전차를 부스러 간다고 1개 대대병력을 나흘동안 교육받았습니다. 교육받고 노량진으로 가서 국군묘지 있는데에 배치를 하고 배를 수습하여 TNT를 실고 건넜습니다. 정찰병이 북한군과 교전을 하고 그러다가 낮에는 그냥 지내고 밤에 그 놈들의 많은 병력이 나와서 다시 안양으로 철수했습니다."
다. 관련된 내용분석과 지형 탐사
여기서 나오는 내용중에는 미아리고개가 제일 많이 나오고 그중에서도 공동묘지에 배치된 부대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각자 도생을 위해 알아서 철수 했다는 이야기가 핵심이다.
물론 병력들이 축차적으로 전선에 투입 되는데 건제도 없고 그저 들어오는대로 재편성해서 여기저기 방어하게 하고 지휘체계도 없었다.
지휘관도 높은 지휘관은 없고 잘해야 중대장이고 소대장들은 그런대로 열심히 현장에서 싸웠다고 본다. 하지만 적 상황도 모르고 부대를 보냈다가 다시 복귀시키고 엉뚱한 노량진 한강변에 배치했다가 다시 복귀시키는 등의 많은 문제점이 정말 사실인지 궁금하기만 하다.
따라서 주요 문제점으로 다음 몇가지를 분류해 보았다.
첫째 : 지휘체계의 마비다.
강문봉 육본 전방지휘소장의 증언대로 미아리고개 남쪽 감천여관에서 잠시 잠든 사이에 적 탱크는 서울로 28일 01:30분경에 진입했다. 누가 지휘를 했겠는지 스스로 질문해 보면 답은 나와 있다.
그러니 제7사 제3연대같은 경우도 동두천으로 갔다가 다시 의정부를 거치지 말고 서울로 돌아오라는 지시와 또 이를 지키지않고 의정부를 거쳐 오다가 많은 손실을 입었다는 증언도 그렇다.
도대체 지금 적이 어디 있는지 아무런 상황 설명도없이 가라는대로 가는 군대였다.
그러니 미아리 고개전투에서는 아예 지휘하는 상급부대장이 없었다고 한다.
아니 탄약차에 탄약이 실려 있는데 부상병이 차르 가지고 가버려 실탄이 없어서 싸우지 못했다는 것은(제5사단 제15연대 제2대대 작전장교 장영종 증언) 뭐라 해야 하겠는가?
더구나 위문품으로 들어온 정종을 한사발씩 마셨다는데 전시에 지금 앞에 적전차가 으르렁 거리는데 참 기막힌 증언인데 사기가 진작 되었다고 하니... .
둘째 : 역시 부대에 침투한 프락치들의 농간이 심했다고 봐야한다.
소도사령부 제8연대 제5중대는 26일 아침에 가평으로 갔다가 다시 그 다음날은 청량리로 출동 하라하고 이 과정에 중대장 이석우 대위가 바로 공산당원으로 제주도에서부터 활약한 인원이었으며 제1소대장 안태갑의 제보로결국 도중에 즉결처분 되는 내용이다.
또한 제2사단 헌병 조한철의 증언처럼 헌병이 낙오자 수집선에서 확보한 많은 인원들이 창경원에 갔다가 많은 피해를 입고 분산철수 하게 되는 장면도 그렇다.
셋째 : 열심히 싸운 인원은 병사들이고 낮은 계급이었다.
먼저 당시는 통신수단이 점무해서 전령을 운용하는 방법이 일반적인데 그러니 어떻게 되겠는가. 일단 통신수단의 마비가 곧 상급자의 지휘를 불가능하게 하였고 또한 전쟁공포가 심해 연대장도 말없이 철수해 가는 상황이니 참 안타깝다.
하지만 병들고 초급 지휘자들은 가지고 있는 화기를 이용하여 마지막까지 싸웠고 대전차 특공대 임무도 수행하며 적을 저지하려 했다.
넷째 : 편제장비의 조작 미숙이다.
제5사단 제20연대 제1대대 제4중대장 대위 김용림의 증언('77.3.21)에 의하면 미아리고개 우측 공동묘지에 배치 되어 2.36" 로켓포 2문으로 사격하려 했으나 접속부분의 고장으로 한발도 못쏘았다고 한다. 적 탱크가 무적이 아니라 우리의 교육수준이 미흠하였다고 봐야 한다.
다섯째 : 적의 위장전술이다.
제5사단 제20연대 제1대대 제4중대장 김용림의 증언, 제1대대장 김한주의 증언에 의하면 탱크인줄 알았는데 박격포나 포병 사격으로 공중으로 치솟는 것을 보니 차량에 위장을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실제 서울 시내에 들어온 적 전차는 얼마였을까?
여섯째 : 도하장소에서의 질서유지와 국군의 도하과정에 미스테리는 있다.
제5사단 제15연대 제2대대 작전장교 중위 장영종의 증언에서 서빙고쪽에 배가 11척이 있었고 이중 3대를 군인이 우선 사용토록 노인이 주었다고 하는데 많은 피난민이 몰려들어온 상황에서 과연 무리적 행사없이 군인에게 우선권이 주어졋는지, 그리고 과연 그것이 맞는 조치인지 곰곰히 생각해 보아야만 하는 문제다.
다음은 탐사와 탐문결과다.
우리는 이 미아리 기름교에서 고개로 올라서며 과거 공동묘지자리로부터 주변의 크고 작은 산들을 탐사하고 해당 축선을 따라 불고 150여m 밖에 안되는 올망졸망한 산들을 하나하나 다 올라가 보았다. 나는 특히 중학교 시절 이곳 삼선동과 성북동 미아리일대에서 신문배달을 하였던 추억이 있는 곳이다. 물론 그때와 지금은 개벽이지만 그래도 지형숙지는 남보다 앞선다고 본다.
지금의 북서울꿈의 숲일대, 배봉산, 영축산 근린공원, 불암산, 묵동의 봉화산, 명륜동과 이화동 뒷산, 옥수동의 매봉산, 남산, 북한산 태고사 지역등 웬만한 곳은 다 들여다 보았다고 본다.
가장 특이하게 기록될만한 곳은 명륜동 노인회관에 들어가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이곳에 어르신들은 많은 분이 미아리 공동묘지에 엄청난 군인이 죽었는데 거기서 죽은 인원보다는 바로 이곳 명륜동일대 서울대 의대병원에서도 엄청죽어 그곳으로 시신을 빼내고 일부는 화장하였다고 한다.
더욱이 창경원 앞길에는 죽은 군인이 길따라 깔려 있어 그대로 적 차량이나 탱크가 지나다녔고 많은 사람들이 김일성 만세를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서울대 병원 앞에서 구두수선을 하는 분이 제보한 내용에 의하면 혜화문에서 길건너 동성중고교 뒤로 한성이 쭉 연결되는데 바로 지금 고물상 수집소 앞 아카시아 나무 숲이 조금 시작되는 곳에 몇구의 시신이 당시에 묻혔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도 벌써 70년전의 이야기고 길아 3배는 넓어졌으니 그 흔적이 남아 있을리는 없다고 봐야 한다. 지금도 이 한성을 따라 가면 일부 당시의 개인호 흔적도 있다.
배봉산이나 봉화산 매봉등에도 개인호는 있으나 당시 피난민들이 워낙 많이 올라와 움막을 치고 살다보니 그 흔적은 보존된 것이 없다고 봐야 한다.
또한 한강교가 푹파되어 혼비백산한 군인들이 조직적으로 전투에 임했다는 것은 무리한 추측이다.
서빙고에는 수많은 군인과 민간인이 몰렸고 당시 조그만 동산같은 곳이 있었는데 지금 한강중학교 일대로 얼마나 죽어있는지 꼭 어느섬에 까만 염소떼처럼 그 뜨거운 여름의 햇살아래 썩어가는 시신이 정말 무서웠다고 한다.
한강 중학교 바로 남쪽으로 교회가 있는데 그 자리도 많은 시신이 묻힌 곳이라는데 우린 흔적조차 찾을 길 없었다.
용산에 살던 한 어르신은 지금 용산 우체국에서 국방부 서문으로 오르다 보면 종교셑터가 나오는데 그곳과 철조망 울타리를 포함하여 미8군 지역이 포함돠는 곳에 무려 100여구의 구닌을 매장하였다고 증언하였다. 물론 공산치하에서 묻은 것이다.
하지만 지금 어디에도 그 흔적은 없다. 아니 건물이 들어서며 이미 발굴 되어 처리되엇는지도 모른다. 말이 100여구지 사실 산더미만큼 많은 숫자다.
나는 중구 회현동, 남대문 경찰서 바로 뒤에 있는 경로당에 3번이나 찾아갔다.
찾아간 이유는 그당시에 이곳에 세브란스 병원이 있었고 서울대 병원 못지않게 많은 부상자들이 이곳으로 실려왔기 때문이다.
이곳으로부터 남산을 기고 필동에서 동국대, 옥수동의 매봉으로 연결되는 산이 서울에 마지막까지 남아서 결사항전한 군인들이 전투를 벌인 장소이며 특히 필동에서 동국대 후문에 이르는 구간은 당시 군 시설이 위치한 곳으로 적군이 들어와서 이 일대에서 많은 우리의 부상자나 포로들이 처형되어 남산의 Y지선에 묻혀졌다는 제보가 있었기에 그 사실을 확인하러 이 일대는 자주 가본다.
힐튼호텔이 있는데 일제시대에 그 밑으로 땅굴이 구축되어 있었다.
"남산 주변에 시신이 깔려 있고 세브란스병원에는 차량이 전사자나 부상자를 실고와 그대로 놓고 도망쳐 버리고 북한군이 들어와 모두가 죽어야 했다."
바로 이곳에도 많은 인원이 죽어서 있었으며 수복과정에 모두 처리 되어 그 흔적은 지금 없다. 이곳은 직접 8240부대원인 장기락 참전용사님이 서울에 당시 머물며 직접 목격한 사실이다.
회현동 경로당에서 들은 제보로는 남산경찰서 뒤로 교통부장관 관사도 있었으며 우물도 있었다 한다. 그런데 우물도 흔적도 없고( 아마도 시신이 많이 들어있었으리라 추정됨) 빽빽한 건물만 있다.
"당시 사형을 선고 받고 대기중이던 죄수들은 모두(?) 한강 백사장에 끌려나와 총살 되었다"
서대문 구치소만 있는게 아니고 마포구치소도 유명한 교도소로 많은 죄수들이 일제시대부터 구금되어 있던 곳이란다.
그런데 전쟁이 나고 밀려내려온다 하니 중범죄자들을 차로 실어내 마포강변일대에서 미리 땅을 파놓고 대기하다 그곳에 집어넣고 총살시켜버리고 교도관들은 강을 건너 남으로 내려갔다.
실제 그 임무를 집행한 장본인을 만나 들은 이야기로써 우린 보도연맹의 죽음과 연관선에서 이 문제도 한번쯤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본다.
전시란 분명 나라의 운명이 위태롭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고하게 한 생명이 죽어도 좋다는 것은 아질진데 우리 6.25전쟁간 벌어진 끔찍한 사건들은 그 믿음에 어울리지 않다.
3. 봉일천 부근의 전투
가.전사 요약
'50. 6월27일 서울 북방 의정부-미아리에서 인민군 제3사단과 제4사단이 3번도로 접근로로 공격으 을 집중하고 있던 간은 시단에, 서울 북방에서는 문산-법원리까지 진출한 인민군 제6사단(-_와 제1사단이 1번도로와 307번도로 접근로에전개하여 서울을목표로 봉일천 방향으로 진격 중이었다.
이대 제1사단은 제15연대(배속:제20연대 3대대)를 위전리에 제13연대를 도내리에 그리고 제11연대를 예비로 최후저항진지를 편성하고 초기존투에서 분산 철수한 제12연대는 금촌에서 재편성 중에 있었다.
"대전차 특공조의 활약으로 서울진출 시간 지연되다."
27이 10:00경 적 전차를 선두로 적 제6사단의 주력부대가 제15연대 정면으로 공격을 개시하자 제3대대장 최병순 소령은 57밀리 무반동총과 2.36"치 대전차 화기가 무력함을 알고 육탄공격으로 저지할 것을 결심하고 제11중대장에게 선두전차를 공격토록 하여 그 결과로 6대의 전차가 불능 상태로 되어 적은 일단 문산으로 후퇴하게 된다.
이보다 조금 늦게 19:00경에는 제13연대 방향으로 보전협동공격으로 적 제1사단이 밀어 붙였으나 제2중대 신현조 중위가 지휘한 2.36" 로켓조가 선두전차의 무한 궤도를 파괴하여 적의 공격이 주춤거리게 된다.
하지만 이날 밤 봉일천 일대에 소나기가 쏟아지자 적은 기상의 악조건을 역이용, 야간공격으로 최후저항선이 무너지고 제1사단은 봉일천으로 물러났다.
27일 저녁에 육군본부에서 파견한 작전지도반 김홍일 소장이 전선을 방문하여 미아리선의 전황을 설명하고 한강도하 철수를 준비할 것을 권유받지만 총장의 명령에 따르겠다고 답변한다.
본부로 돌아간 후에 28일 아침에 연락기(L-5)가 전통을 전술지휘소에 떨어뜨리고 갔다.
"현 방어선을 사수하라"는 명령이고 철수라는 말은 없었다.
이래서 사단은 28일 아침에 반격을 개시하여 제15연대의 철수로 전방이 된 제11연대가 적 제6사단을 격퇴하여 위전리-도내리선상의 최후저항선 중간가지 진출하게 된다.
그러나 우측방 제13연대는 대치한 적 제1사단의 강력한 저항으로 지출하지 못하고 배속돈 서울 특별연대와 제20연대 제3대대를 투입하여 양개 연대의 간격을 메우고 방어선을 연결하게 된다.
나. 당시 전투 참가자들의 증언
먼저 제13연대 제3대대 기관총 사수 황대형의 증언이다.
"선배님, 전사에는 철수하면서 축차적으로 전투를 했다고 하는데 전투를 하면서 철수 했습니까?"
"전쟁사에는 26일 밤부터 27일까지 제3대대의 행적을 보면 27일 밤에 봉일천-행주 방향으로 철수하던 부대가 광탄 서쪽 150고지를 점령해 남하하는 적을 저지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 기억에는 26일 밤 이율곡 사당에서 철수를 시작한 이후부터 28일 아침까지 비를 맞아가며 철수를 계속했던 기억밖에는 없다."
누누히 밝히고 있지만 항선배는 '99년 10월부터 '18년 작고 하실 때까지 어느 누구보다도 나와 함께한 시간이 많았다.
서울에 올라오셔도 만나고 내가 광주에 내려가서 만나기도 하고 다부동에서 만나기도 하고 년에 10회 이상을 만나 다부동뿐만 아니라 고랑포 지역, 도내리, 행주대교, 무극리, 베티고지 앞등 주요전투 지역은 다 함께 다녔다.
나는 다른 용사님은 몰라도 이분의 증언은 사실 그대로라고 믿는다.
상식을 벗어나지 않는 증언이기에 그렇다. 대부분 이제 모두가 본인의 잘못은 잊어버리고 잘한 것으로 보이는 것만 말하기 쉽다.
살아 있는 용사님이 없으니 누가 알리도 없다. 본인이 답이 전부인양 되기 쉽다.
"혹시 과거에 대대장이 총살시킨 오소령 이야기 다시한번 해 주시죠?"
"28일 아침 봉일천 부근에서 일어났다. 본인의 동기생이며 사단의 작전참모를 역임했던 오소령을 쏘아 사살한 사건이다.
"그 이유가 처음 저에게 말씀하실 때는 오소령이 북한의 프락치라 그렇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철수한는데 병력을 데리고 밤새 걸어서 아침 나절에 보니 다시 그자리로 와서 병력을 적의 손아기에 넣어준 꼴이되어 그랬다고 하셨는데."
"그렇다. 사실 관계는 그 당시 연대장이던 김익렬 대령의 증언에 나오듯 "우리 고손자 대나 나올 문제다"라는 증언에 의미하는 바가 크다고 본다.
사실 당시에는 대대장과 두 분이 동기생으로 애매한 위치에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오소령(오혜택)이 사단 참모에서 시흥 보병학교 고등군사반에 입교했다가 전쟁으로 복귀하여 대대로 내려온 것이다. 물론 당시 대대장은 본인이 대대장이고 오소령은 단지 자신의 부하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그러다 27일 밤에 철수를 하게 되는데 두 분의 의견이 갈리였는데 많은 사람이 오소령의 제안을 딸르게 되어 결국 그 안으로 밤새 행군을 한 것이 28일 날 아침에 다시 그 자리였던 것이다.
그러자 대대장이 "이 총알은 나와 전 대대원들이 주는 것이니 원망하지 말라"라고 소리치고 방아쇠를 당겨 뚝방으로 굴러 떨어지는 그에게 계속 발사하여 죽게 되었다.
그리고 대대장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전 대대원을 집결시켰다. "내가 대대장이다. 지금부터 내가 지휘한다." 그리고 서울 시가전을 위해 전투편성을 하여 오후 2시경 고양시 일대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게 웬인인가, 회의에 갔다온 제12중대장 한인성 대위가 전 중대원을 집합시켜 놓고 통곡을 하며 말했다.
"이 시간부로 부대를 해산한다. 각자 알아서 갈 길을 찾아 간다. 한강 이북에 집이 있느 ㄴ사람은 집으로 가라. 한강 이북에 갈 곳이 없는 사람은 각 자 한강을 건너 시흥 보병학교에 집결하라. 가급적이면 시흥보병학교에서 집결하여 다시 만나자. 이상 끝."
그래서 한 순간 수군거리기도 했지만 모두 우리에 갇혀있던 닭들이 자유를 얻어 흩어지듯 모두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한강을 어떻게 넘었습니까?"
"우리 기관총반은 살기 위해 뿔뿔이 헤어지기로 했다. 그래서 기관포를 군복을 벗어 포장하여 땅속에 묻고 무작정 한강으로 향했다. 지금의 행주대교 근처다.
그런데 29일부터는 적으로부터 공격을 두려워한 배들이 댕ㄴ에서 되돌아오지 않아 강변을 서성이는 병력이 많았다. 한강의 얕은 곳을 찾으러 서성거리던 나는 한 초가집에서 옷을 얻어입고 널판지를 한 장을 얻어 개헤엄 반 잠수 반으로 소리를 죽이며 수영으로 도하하여 개화산 기슭에 도달하여 보이는 민가에 무작정 들어가니 몇이 더 있었다."
"그래서 바로 시흥으로 무사히 내려갔습니까?"
"그랬으면 얼마 좋겠어요. 집에서 조금 쉬고 밖으로 나와 보니 동산이 하나 있는데 인민군이 나타나 조준을 하고 있는거야. 그래서 뛰어들면서 적군이다라고 외쳤더니 먼저 그놈들이 "저기! 저 새끼들 국방군이다"며 달려들어 우리는 꼼짝없이 포로가 되었는데 어떻게 해, 두 손을 번쩍들었지. 그래서 손을 들고 끌려 가는데 민간복장을 한 여러명이 대기하고 있는데 갑짜기 언덕에서 국군 복장을 하고 총을 든 한 무리가 도망치니 북한군이 그들을 쫒는 틈을 이용하여 무조건 달렸지. 논 밑으로 굴러 벼 포기속으로 숨으며 도망치니 쫒아오지 않아요.
그래서 농수로가 있어서 살짝 그 위로 올라갔을 때 소름끼치는 장면이 펼쳐지고 있지 뭐요!"
"혹시 사람을 빨가벗겨 가죽을 벗기는 장면 입니까?"
"북한군 몇명이 국군으로 보이는 군복차림의 20여 명과 사복차람의 10여 명을 도로 아래 둑으로 밀어 붙이고 사살하고 있는 장면을 직접 보았어요."
"그래서 살아나 시흥 보병학교에 갔나요?"
"6월 30일 밤에 이곳에 도착하여 다시 군복을 받고 밤이 되어 불침번을 편성한 후에 잠에 들었는데 마지막 불침번이라 총을 들고 불침번 근무를 하는데 총알은 없었다.
그래서 불현듯 제13연대를 찾아야한다는생각이 들어 M1소총을 들고 그대로 밖으로 나와 요행히도 제13연대를 찾아 갔는데 제3대대는 1개 중대가 채 되지 않게 모였다.
어쨋든 총을 들고 나타난 군인은 나 밖에 없었다. 우리는 풍덕천으로 이동하였다가 다시 수원으로 왔는데 아군기의 오폭으로 연대징 김익렬 대령이 부상 당하고 부연대장 김진권 중령은 전사했다고 들었다. 그리고 계속철수하여 평택에 도착하여 기차를 타고 조치원으로 가서 그곳으로부터 걸어서 청주를 거쳐 증평에 도착했다.증평에서 제5ㅅ단의 예하 연대를 흡수하여 제15연대장인 최영희 대령이 제13연대장으로 오고 나는 제1대대 제3중대 소총수로 전환되었다.
재편성 후에도 별다른 전투 없이 철수를 계속하여 음성을 거쳐 괴산에 도착하였으며 7월31일 함창에 도달했다."
참전용사 이경수 사단 의무대 운전병의 증언이다('00년 7월개화산에서)
"선배님은 어떻게 행주나루를 도하했습니까?"
"뭐 어떻게 해. 차를 버리고 민간배를 얻어타고 건너는데 사단장도 주요 참모들도 다 행주나루에서 건넜는데 공병들이 바랍들어 있는 무슨 큰 보트같은 것을 이용하여 짚차도 실고 건넜지."
"그 당시에 피난민이나 도하하려는 군인들이 아우성치는데 어덯게 잘 건너갔습니다?"
"할 말이 많지만 할 수가 없어요. 그걸 다 말하면 세상이 뒤집어져. 높은 놈들이 다 나쁜 놈들이야."
"구체적으로 말하지는 못하지만 한가지 예를 들어주면 안되겠습니까?"
"뭐 이런거지. 이미 서울이 적에게 들어가 어디로도 갈 수 없는데 그러면 아무리 병사들이라도 상황을 알려 주어야 할 거 아냐. 그런데 아무 말없이 자기들끼리 차를 이용하여 쏙 달아나 벌이고 나머지는 알아서 하라는 식이니 어떻게 되겠어. 서로 배 타려고 총질도 하고 아군끼리도 많이 죽었어요. 아비귀환인데 아무도 통제하는 놈이 없어. 목소리 크고 총들고 있는 놈이면 다야."
"사단장은 조직적으로 철수를 했다고 하는데... .?"
" 뭐 조직적. 그만 하자구. 너무 불쌍한 군인들 많아요. 총 다 버리고 발가벗고 널판지 이용하여 넘어오기도 하고 쪽배에 혁띠를 매달고 넘어오지않나. 그러면 뭐해 이쪽에 먼저 인민군이 와서 올라오는대로 "이리 오라우 국방부동무"하고 붙잡아 총살 시키는데. 여기 개화산에서도 적군이 먼저 저 위에 올라와 안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그러니 오라오는 족족 다 죽는 거지."
"하지만 우리가 듣기로는 몇백명이 전사했다고 하는데 지금 흔적을 찾기가 힘들고 여기 살아온 사람들 이야기로는 산보다 저 앞에 벌판에서 많이 죽었다고 하는데?"
"그야 나도 모르지. 얼마가 정확하게 죽었는지 기록에 없잖아요. 더구나 공산치하에서 다 치워버렸는데 누가 부역 열심히 했다고 손들고 나오겠어요. 모른다고 하지. 아니 연대가 흩어져 강을 건너 시흥에 갔는데 대대병력도 채 안되니 도망쳐 집으로 갔던지 아니면 북한군에 포로가 되었던지 아니면 행주나루나 저 위에 이산포라고 있는데 그 곳에서 건너다 물속에 다 들어갔던지 죽었으니 안 모였겠지. 그때 병력은 충성심이 강해요."
"수도경비 사령부 제18연대 제2대대 전기풍 용사님 증언이다.('07년부터 10여회)
"한강 어디로 도하 하였습니까?"
"우리는 의정부쪽으로 출동하였다가 철수하면서 적이 의정부를 차단하여 옆으로 이동하여 27일 패뜰 무렵에 도착한 곳이 금곡리였다. 여기서 배가 고파 동네에서 강제로 밥을 구해 먹고 다시 걸어서 구파발로 걸어서 행주나루에 인접한 곳에서 도하했다."
"도하할 때에 배로 했습니까, 아니면 다른 수단을 강구했는지요?"
"그 당시에 행주나루에 오니 아우성인데 1사단이 독차지 하고 있으니 어떻게 해. 우리 그보다 약간 밑에서 민간 배를 몇 척 징발하여 무기들은 버리고 겨우 도하했다. 함께 했던 전우들 중에는 배를 타지 못하고 개별적으로 살아남아 나중에 보니 시흥에서 만나기도 했는데 만나보니 바지만 걸친 놈, 런링구만 입고 있는 놈, 그래도 총을 메고있는 놈등 정말 꼴이 꼴이 아니더라."
"혹시 도하 하면서 적이 먼저 와서 포로가 된 인원은 없습니까?"
"아 그렇지. 나도 건너오는데 저기 먼 곳에 적들이 있는 모습이 보여. 그래서 그당시는 갈대숲이 우거져 있어서 잘 안보이거든. 그 물줄기를 따라 몇몇이 은밀하게 이동했는데 갈대가 월마나 큰지 위장이 잘 되어 우리팀은 한명도 안 걸려 들었고 다른 조에서는 붙잡혀 포로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그 놈들이 기관총인지 설치하여 마구 쏘아대는거야. 놀라서 돌아가 항복 하라고 말이지. 그런데 거기에 누죽이 들어 아마 많은 인원이 도하를 포기하고 죽기도 많이 했다고 알고 있어요. 그 많은 인원을 어떻게 하겠어. 그놈들도 통제하기 곤란한데. 비극이야. 다 죽고 다 버리고... ."
나머지 증언 내용은 문산-봉일천 관련 내용을 보면 제13연대등 주로 제1사단과 지원부대장들의 증언이 나와 있다. 참고하기 바란다.
다. 관련내용 분석과 지형탐사 결과
이미 개성-문산-봉일천간의 전투분석에 내용은 다 들어 있기 때문에 특별히 분석할 내용은 없다.
다만 몇가지 첨언할 것이 있다.
첫째 : 중요한 것은 앞에서도 언급 되었듯이 정말 전사와같이 제1사단의 봉일천전투가 벌어졌느냐의 신뢰성 문제다.
따라서 우린 이 지역의 전사자를 찾으러 봉일천과 행주대교, 이산포 일대를 몇번에 걸쳐 확인 탐문 및 탐사를 했다.
봉일천 지역은 이전리와 도내리 그리고 공릉천 제방,1번국도를 좌우로 연하는 낮은 고지군을 샅샅이 살피고 몇군데는 지역주민 간담회를 실시하여 그 진실성을 알아보여 많은 노력을 했다.
사단의 최후 저항선인 월롱이 이전리-도내리-창만리에 이르는 곳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개인호나 교통로가 없다는 것은 현장에 가서 이야기를 들어보면 다 알 수 있다.
월롱의 노인정이나 덕은리에 가서 탐문을 해 본 결과로 '51.1.4후퇴이후 재 진격간 문산천에서 봉서산-문산으로 진출괴정에 우리는 덕은리일대에서 동측방으로 공격을 한다는 것은 전사놔 일치하게 그 전투흔적이 명확히 남아 있다.
하지만 우전리나 도내리의 내화산 광탄의 만장산에서 그런 흔적은 거의 없고 주민들 또한 초초 전투는 월롱의 다락고개 일대에서 가장 크게 했고 만장산 56번 도로상으로 병력이 지나 가고 그 좁은 길로 북한군이 추격하는 과정에 길거리에 몇이 전사하여 모퉁이에 묻혀지고 차후에 길을 넓히는 과정에 모두 훼손 되어 흔적도 없다고 증언한다.
광탄 신산리에 금식 기도원 뒷산에 올라서면 200여개의 개인호가 존재한다.
나는 눈 내리는 '18년 1월에 이곳에 올라가 실태를 분석하고 등원리의 마을 회관을 찾아 할아버지들의 증언을 들어보았다. 이곳은 이미 '10년에 신기동지역에 제보가 있어 현장을 확인하는 과정에 1차로 찾아갔고 그후로도 3번정도는 찾아가 서로 다른 증언에 대한 진위를 파악하려 노력했었다.
그 진위란 '08년도에 지역부대에서 제보를 받았다고 연락이 와서, 집단 가묘가 있다는 곳을 찾아가는 과정에 노인정에 들러 관련 이야기를 들어 본 결과 민간인 피해자로 의중이 되어 발굴을 중지시킨 적이 있는 곳이다.
이곳은 천연적으로 방어하기에 유리한 횡적 하천이 문산천 앞에 갈곡천이 있고 밑에는 고산천이 그리고 공릉천이 봉일천에 남에서 흘로 북으로 와서 서쪽으로 빠지는 곳인데 이 공릉천과 고산천이 만나는 곳이 조이음 뇌조리 지역이다.
그러니 지리족 조건이 1번ㄱ 국도와 경의선이 남북으로 이어 달리고 종횡으로 33번도로, 56번도로, 76/78번도로, 367번도로 등이 그물망처럼 얽혀 있었으니 그당시에는 길의 폭이 좁아서 겨우 우마차나 다니는 정도니 기계화부대는 결국 1번도로상에 집중 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내가 탐사 및 탐문을 하며 내린 나만의 판단은 이곳은 그렇게 전쟁이 심하지 않았고 1번도로상에 집중 되는 병력 배치와 하천선을 이용한 일시적 거부작전 정도가 있었다고 보며 다행히도 용감한 중대장이나 특공대의 활약으로 적의 전차가 파괴 또는 돈좌 되는 상황에 서울에 이르는 시간이 지연 되었다고 본다.
특히 뇌조리 야산에서 시작하여 봉일천 고교 뒷산으로 해서 장곡리의 구릉성 야산일대, 내유동의 명봉산이ㅣㄹ원, 관산동의 심리산과 공릉천의 사리현동에서 지영동, 그리고 대원리에 이르는 강변을 탐사하고 대원리 마을 회관이나 내유동 관산동의 마을 회관에서 노인들을 만나 본 결과 초기 전투때는 전쟁이 언제 터졋는지도 모르고 북한군이 들어닥쳤고 이곳 일대의 전투는 주로 그 이듬해 국군이 진격하면서 중공군이 방어를 하면서 파 놓은 개인호가 대부분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다면 금식기도원 뒷산일대에 구축된 개인호는 언제 누가 굴토하였는가?
다시 도내리 마을 회관을 찾아 증언을 들어보니 이곳은 국군니 판 것이 반이고 중공군이 판 것이 반이라 한다.
그러면서 뜻밖에도 전쟁 당시에 북한군이 남한의 포로나 유력인사를 납치하여 끌고 올라갈 때에 사용한 길이 1번 국도가 아니고 길 안쪽으로 들어가 미군의 비행기 공습으로부터 보호받으며 이동한ㄴ데 이 곳이 그런 곳이란다.
그러니 능원리나 뇌조리, 내유동이 다 그런 길목 역활을 하고 있었고 이러다 보니 알게 모르게 끌려가는 과정에 탈출하다 죽기도 했지만 반대로 북한군의 부역자 역활을 한 사람들이 또한 많아서 국군이 진격시 경찰이나 군인으로부터 아니면 태극단이라는 자치대에 죽어간 민간인이 많았다 한다.
그 가족들은 대부분 북한군을 따라서 북으로 가버려 죽어간 사람들은 누가 가져다 묻어주지도 않아 동네에서 나중에 우리 경찰들 통제로 여기저기 가매장하였다고 한다.
탐사중에 나는 봉일천고교 뒤산에서 한 나이드신 신사를 만났다.
그는 공무원으로 정년 퇴임하여 지역에 사는 사람으로 매일 이곳 일대를 산책하는 일과다.
그런데 하루는 나를 만나게 된 것이다.
"어이 군인 양반, 뭐하러 산속으로 다니는 거요, 간첩 수색작전인가요?"
"안녕 하세요. 저는 유발굴 탐사반입니다. 이곳이 전쟁터라 해서 지금 그 흔적을 찾고 있습니다."
"아니 그렇게 눈으로 뭘 어떻게 찾습니까? 무슨 장비라도 있어야 하지 않나요?"
"맞습니다. 장비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내가 들고 다니는 수호신 측량하는데 사용되는 봉대를 보여 주었다.
"아니 측량하는데 쓰이는 도구가 무슨 역활을 한다고? 요즘도 그렇게 군이 주먹구구식으로 시간때우기식 탐사를 하는 모양입니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험하게 하십니까. 공직 생활을 40년씩이나 하셨다는 분이 말씀이 너무 거칠게 들립니다."
나는 아주 불쾌한 모습으로 퉁명스럽게 아저씨를 바라 보았다.
언젠가 군이나 경찰로부터 되게 혼이 난 적이 있는 모양이었다. 생면부지에 감히 너무 심하게 폄하하는 말이 무척 귀에 거슬려 따져 물었다.
"아저씨는 공직자 생활을 주먹구구식으로 하시고 세월을 보내 연금을 받게 되었습니까? 이렇게 질문을 받으시면 뭐라고 답변하시겠습니까. 저도 한 30년 공직자 생활을 했는데 이런 식의 냉대는 처음입니다."
정말 싸움이라도 벌어질 모양이었다. 흔한 말로 싸가지하고는 ... .
그랬더니 한 발 물러서며 조금전의 말은 실수였다고 오해를 풀라고 하신다.
"선생님, 적어도 이 스틱은 영혼을 구제하는 지팡이 역활을 합니다. 이것으로 눈에 보이는 개인호를 찔러보면 깊이를 가늠하여 적어도 이게 언제쯤 굴토되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산악지형을 이동간 멧돼지나 낭터떠지등 위험요소로부터 방어를 할 수 있습니다. 누군 무거운데 뭐하러 들고 다니겠습니까."
"그렇습니까. 잘몰라서 그랬으니 오해를 풀기 바랍니다. 아 그러니까 이것으 ㄹ호에 깊게 찔러보면 몇cm 정도 들어가는 가를 쉽게 판단하여 호인지 아닌지도 알게 되고 호의 간격을 가늠하게도 되고 필요시는 호신용으로도 사용되는 중요한 도구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럼 지금까지 저를 힘들게 하셨으니 정보하나는 주고 가셔야 합니다."
"네, 무슨 정보 입니까?"
"이 동네에서 60년을 살았다고 했으니 적어도 이 봉일천이 유명한 전쟁터인데 그 흔적이나 혹시라도 유해가 매장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면 그걸 알려주시는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오해를 완전히 지우는 겁니다?"
"아니지요. 선생님 지금 대답이 크신 것을 보니 뭔가 알고 계신 곳이 있는 것 같은데 6.25전쟁당시의 정보가 아니면 저는 오해를 갔고 살아갈 겁니다."
"와, 이과장 무서운 분이네. 알겠습니다. 날 따라 와 보세요."
"찾아간 곳에 많은 가봉분이 있고 처절한 가족들의 편지가 나무에 매달려 있었다."
나는 생면부지의 한 전직 공무원을 따라 봉일천중고 뒤 야산으로 갔다.
뇌조리라 고산천 넘어 등원리에 과거 민간인 피해자들의 가봉분이 있다는 것은 등원리 노인정에서 이미 들어온 이야기가 있다.
더구나 이곳 가가운 고양의 금정굴에는 6.25전쟁 당시에 태극단이라는 반공단체와 고양 경찰에 의해서 집단으로 학살된 미간인 유해가 수십구 그대로 지금도 굴안에 방치되고 있는 곳이다.
물론 학살된 이유는 3개월 공산치하에서 그들에게 협조하고 우익인사나 경찰 군인의 가족들을 고자질하여 많은 인명피해를 가져온 결과에 대한 보복성 학살로 보도연맹하고는 성격을 달리 한다.
그러니 이곳의 성격을 나는 머리속에서 복잡하게 그려보며 따라서 현장에 도착하니 야산 계곡에 봉분들이 있고 나무마다 비닐로 코팅한 편지들이 붙어 있었다.
그중의 하나를 소개하면 눈물이 난다.
["아버지, 저 000입니다. 어디에 계십니까?
저는 아버지 얼굴을 모릅니다. 어머니로부터 아버지 자식이라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어머니도 이제 한맺힌 세월을 접고 하늘 나라에 가셨는데 혹시라도 상봉하셨는지요. 대답을 좀 해 주십시요.
아버지는 저를 낳았다는 것은 알고 계시리라 봅니다.
하지만 산고의 고통을 받고 있던 그 날밤에 아버지는 경찰들에게 끌려가고 돌아오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정말 경찰인지 군인인지 아니면 다른 무장집단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생전에 어머니 말씀은 경찰이라 했습니다.
잘 살지도 못했고 대학나온 이유로 동네 일을 맡아서 한 것 밖에는 없는데 무슨 영문으로 끌려갔는지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다 합니다.
잘못이 있다하더라도 이렇게 사람을 죽여 계곡에 버려 여우나 동네 미친개들의 밥이 되로록 하는 이곳이 국가가 해야 할 일인지 비통스럽습니다.
누군가가 아버지가 이곳에 묻혀져 있다하여 매일 한번씩 찾아오지만 찾아오는 사람의 숫자도 이제 줄어들고 저도 60이 넘었습니다.
살아 있는 한 아버지를 찾으러 올 것입니다. 부디 안녕히 계십시요.
이제 세상도 많이 밝아져서 이러한 곳도 발굴하고 감식으로 유족을 찾을 수 있다고 하니 희망을 갔고 기다리겠습니다. 아버지를 보고 싶은 자식 000 올림."]
나무마다 매달려 있는 편지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랐다. 부끄럽기도 하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땅을 바라보고 흔들리는 편지들의 사연을 읽어 보고 있었다.
어느 유가족이 나를 욕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발굴해 달라고 애원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이 묻혀있는 분들과 어떠한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다.
주변을 다 돌아본 나는 선생님을 불러 묵념을 올리자고 제안했다.
"묵념~~~!"
이곳은 시기는 6.25전쟁 당시가 맞지만 우리가 발굴하는 대상은 아직 아니다.
우리의 대상은 군인이나 경찰 . 학도병, 그리고 노무자들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 전사한 분들을 찾는 것이다.
함께 서 있는 분이 물었다. "이분들은 발굴하면 벌 받습니까?"
"벌 받는게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뒷처리가 아직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누가 유가족을 찾아서 감식을 해야 할 것이며 그 예산을 누가 줄 것이고 그분들의 명예고양은 어떻게 하고 등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현실 입니다."
"그러니 이나라가 좌우익으로 갈려 쌈질이나 하고 민생은 그만이고 당리당략으로 한 자리하려고만 혈안이 되어 잇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심하게 비판하시면 되는 건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누가 죄인인지 불분명한, 역사적 심판이나 양심적으로 잘못을 인정한 사례도 없습니다. 가튼 국민으로써 가슴이 짖어지는 것은 같습니다. 그러나 그거와 심판은 다릅니다. 엄현히 그 행위의 대상이 지금도 북에는 무력통일을 내세우고 있는 김씨일가의 꼭두각시부대들이 존재하고 우리 사회에도 일부지만 거기에 동조하거나 실제 무력으로 나라를 다시 전복하려는 세력이 없지않아 존재한다는 사실에 우린 경계심을 늦추어서는 안된디고 봅니다."
"아이고 이 양반도 골수고만. 나도 그렇게 공직자 생활을 했어요. 이과장은 당연한 모습입니다. 믿음직스럽습니다."
"믿음직스럽다니 조금 어색합니다. 저도 공적인 장소에서 해야 할 말을 구분해야만 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러면서 나는 나의 명함을 달라는 요청에 있지만 드리지 못했다. 이유는 묻지 말기 바란다.
대신 그 선생님의 전화번호와 나의 전화번호를 교환했다.
"금정굴에 대해서는 알고 있습니까?"(진격 작전간 설명 하겠다.)
"네, 제가 최초 발굴 사업시 책임 지도교수가 그 발굴 담당자로써 직접 현장에 몇번 가 보았습니다. 이곳만이 아니고 파주 두포리에도 민간인 관련 양민학살 지역이 있고 용미리에 있는서울 시립 공원묘지 위 계곡에도 유사한 민간인 피해지역이 있다는 것을 지역주민의 탐문활동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 대단하시네요. 사명감이 남달리보이네요."
"그렇지않습니다. 제가 해야할 일이 명확합니다. 법의 테두리를 벗어 날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요. 국가 공무원인데 그 마음 저도 이해 합니다. 오늘 많은 것 배웠습니다."
"제가 무례한 행동을 한 것같아 죄송합니다.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일대의 개인호는 초기 전투에 굴토한 것은 별로 없다.
대부분 1.4후퇴 이후에 다시 국군이 진격하는 과정에 중공군이 파거나 일시적으로 진출한 국군이 파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우리는 공격이고 중공군은 방어다. 그러니 호의 위치가 어디에 있겠는가?
대부분 남쪽에 굴토되어 있고 고지 후사면(남에서 바라보고)에는 집중적으로 굴토하여 거점방어 형식으로 거의 전지역이 동일하게 형성 되어 있다.
북으로 진격하는데 우리가 남쪽에 호를 구축한다는 것은 기본 상식에 어긋난다.
물론 지휘자의 호인 경우나 아니면 주요 거점인 경우는 우리도 팔방으로 호를 구축도 하고 교통호도 파서 연결되게 하기도 했지만 이런 경우는 '51년도 중공군 5월공세가 끝나고 재진격하는 과정에 고지쟁탈전이나 고지를 사수하기 위해서이지 '그 이전에 공비토벌 작전지역이 아니고는 우리는 북으로 호를 파게 된다.
다음은 마을회관이나 노인정 탐문결과다.
먼저 문산읍의 능산리 마을회관에는 할머니들이 많이 모인다. 할아버지는 어디가셨느냐는 질문에 깨팔려 갔다하여 한참을 망설였다.
낙하리가 가가운 거리에 있어 혹시 우리가 유익한 정보가 있을까 여러질문을 던지고 할머니들의이야기를 귀담아 들었다.
하지만 모두가 큰 전투가 이곳에서는 없었다고 한다. 낙하리에 그들이 배위에 짚단을 올려 위장한 것이나 중공군이 낮에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않고 밤에는 집에 들어와 집 사람들과 함께 잠을 잔다는 공통된 이야기는 많다.
모두가 1.후퇴 이후의 이야기들이다. 처음 전쟁때는 알지도 못했다고 한다.
검산리 마을을 탐문하는 과정에 한 어른이 금촌까지 우릴 대동하고 가셨다.
이유는 초등학교 동창회를 하는데 피난을 가지않고 계속하여 이곳에 살아온 친구들이 몇 있다고 해서 함께 갔다.
어른이 동네에 살던 이야기는 월롱산 좌측에 기간봉이란 238고지가 있다. 실제로 본인이 그곳에 올라가 탄피를 주워 돈으로 받거나 엿과 바꿔 먹곤 했는데 시신을 몇구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중공군관련 이야기이고 동네에 빨갱이 집이 있었는데 '50년 10월에 북한군이 퇴각할 때에 그 가족 모두가 다 짐보따리 메고 북한군따라 가버려서 그 집이 지금도 패가로 남아 있었다.
법흥리는 동네 이름에 걸맞게 아예 전투가 없었고 중공군이 들어와 함께 살았는데 주민들에게 잘해주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오히려 미군이 들어와 이집 저집 다니며 '색시' 색시' 하고 다녀 킥킥 웃음도 나왔고 여자들은 다 숨어서 보이지않게 했다는 일상적 이야기다.
갈현리에서는 특이한 어른을 만났다.
동네입구에서 서성이고 있는데 ㅈ건거를 타고 오는 아주 깨끗한 한복차람의 할아버지가 우리 앞을 지나가시는데 '할아버지'하고 내가 목소리를 크게 했더니 놀라시며 "나요?"하고 물었다.
할아버지는 연세가 85세로 중학교 1학년때 전쟁이 났는데 피난갈 겨를도 없이북한군이 들어와 할아버지 집이 지휘소였다고 한다.
그러니 꼼짝 못하고 있는데 먹는 것은 잘 먹고 살아 큰 불편없이 지냈는데 어느날 인민군이 북으로 함께 가자고 아버지를 설득하여 온 집안이 난리가 났단다.
못가겠다고 하자니 무슨 요절이 날지 모르고 가겠다고 하니 이건 온 집안을 욕먹이는 꼴이 되고 흔한 말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끙끙 앓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들이 떠난다는 날이 내일인데 갑작스레 하루 전날에 아침 새벽에 보니 아무도 없이 다 사라지고 갑작스레 국군이 들이 닥쳤다.
대위가 대장인 부대원들이 들어와 집을 샅샅이 뒤지고 나서 아버지를 불러 세우더니 다짜고짜 어디에 숨겼느냐고 따져 물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아버지와 우리들은 벌벌 떨면서 그동안의 그들 행적을 아는대로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니 그 대위가 한발 늦었구나하면서 급히 차를 몰고 낙하리 방향으로 달려가고 몇이 남아서 집에 서성거리며 동네를 수색하기도 했다.
얼마후에 다시 대위일행이 들어오더니 할아버지집을 다시 본인들이 사용한다며 협조를 구했다.
아니 공산군이 들어와 있던 집인데 안된다고 하면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싫어도 그 기색없이 그렇게 하라고 대답해야 한다.
얼마를 머무르냐고 물으니 알 수 없다고 한다.
많은 시간이 지나고 눈 내리는 겨울이 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국군이 갑작스레 떠나가며 함께 남으로 내려가자고 한다.
중공군이 남침하여 곧 이곳으로 온다는 이야기와 무지막지한 놈들이라 다 죽인다고 하여 결국 아버지와 어머니는 남고 우리는 국군을 따라 한강 이남으로 내려왔다.
졸지에 가장 역활을 해야만 하는 할아버지는 평택근처에서 어느 집에 골방을 얻어 누이 한명과 남동생을 데리고 한겨울을 보내야 했다.
먹을 것은 미군부대에 가서 노무자로 일을 하여 먹을 것을 구하고 인근에 문산인근에서 내려온 분들이 많이 있어 서로 정보를 교환하며 겨울을 보내고 나니 다시 국군이 진격한다고 꿈에 부풀어 있는데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래서 아는 사람들 몇이 평택을 떠나 한강을 건너서 동네근처에 와보니 이미 국군이 점령하고 있는데 일반사람들이 못 들어가게 통제하고 있었다.
금촌 북방으로는 들어가지 못한다고 한다.
"운명처럼 만난 국군 대위와 그 일행들"
그런데 옆에 지나가는 군인들이 무장을 하고 바삐 걷고 있다.
바로 이때 앞에서 걷고 있는 군인이 지난 10월에 집에 묵었던 그 대위다.
"대위님, 길근입니다."
"뭐, 길근이라고. 너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냐?"
"평택에 누나와 동생이 있고 제가 집에 남아 있는 부모님이 어떻게 도셨는지 알아보러 왔는데 들어가지 못한다 하여 이곳에서 서성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졸지에 개선장군처럼 국군을 따라 집으로 갔다.
집에는 부모님이 아무 탈없이 잘 계셨다.
이번에도 국군이 집에 본부를 두고 밤이면 나가고 새벽이면 들어오고 어떤 경우는 2~3일 안들어 오다가 들어오고 도대체 무슨 부대인지 낮엔 주로 잠을 자고 있다.
이렇게 하여 할아버지 가족은 전쟁기간에 아무도 피해를 입지않고 다 살아났다.
하지만 같은 동네라도 바로 뒷집은 운명이 바뀌었다고 한다.
그 집 아버지가 당시에 면서기였는데 누가 뭐라고 고자질을 했는지 동네에서 인민재판에 회부되어 몰매맞아 죽었고 두집 건너서는 북한군에 부역을 했다하여 자치 치안대와 경찰에 끌려갔는데 어떻게 소식이 없다고 한다.
그런데 할아버지 집은 공산군이 들어와서 중공군이 들어와서도 본부로 사용한 집인데 아무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 잘 살지도 안했고 그렇다고 굶고 살지도 안했는데 집안이 고려때부터 이곳 일대에 살아오면서 높은 관직없이 그저그렇게 살아왔다고 한다.
"어르신 집안이 좋은 일을 많이 하시고 남에게 배풀어왔으니 그렇겠지요?"
"아니요, 난 잘 몰라요. 못되게 굴진 않았다고봐요."
전쟁은 끝이 없이 계속 되었다.
연일 강건너로 비행기들이 별처럼 많이 떠서 하늘을 가르는데 얼마 있으면 검은 연기가 하늘에 치솟아 오른다. 개성역이 폭파되었다는 소문도 들려온다.
"북으로 침투하여 정보를 수집하고 폭격을 유도하는 유격대원들"
전쟁은 오래 되었다.
'53년 7월 말가지 계속되고 부분적으로 마을 사람들이 피난에서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대부분 불타버린 집이지만 할아버지 집은 멀쩡하게 살아있어 남들의 부러움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가 할아버지를 다라 집으로 들어갔을 때의 집은 주택개량을 하여 옛날 집은 아니였다.
"할아버지, 그 대위일행은 뭐하는 군인이었어요. 모르세요?"
"아~, 나중에 내가 한번은 그들을 따라 가본적이 있어요. 오금리가 어딘지 아니나요?"
"네, 낙하리 가기전에 북한에서 흐러나오는 사천강이 임진강과 만나는 곳 아닌가요?"
"잘 아시네. 맞아요. 그곳까지 따라갔는데 보니까 배를 타고 임진강을 건너가요."
"그때는 강건너는 북한군 지역일텐데 그곳으로 들어가는 군인들이 있었다니요?"
"전쟁이 끝나고도 한참동안 그 분들이 우리 집에 머물며 북한지역을 넘나들며 특수임무를 수행했어요. 나는 잘 모르지만 오래 머물다 보니 어느날에는 모르는 사람이 함께 와 있기도 했는데 아마 북에서 데려온 동조자나 아니면 지금 생각하니 납치해온 사람들이었다고 봅니다."
우린 오두산뿐만 아니라 보현산 그리고 월롱산에 이르는 크고 작은 산들을 다 올라가 보았다.
특히 월롱산은 지역에서 서쪽에 229고지로 기간봉 238고지와 쌍봉을 이루며 가장 저명한 지형지물이고 1번도로 우측에는 216m 봉서산이 있는데 이곳은 다 최초 전투지역으 ㄴ아니라느 ㄴ것을 탐문결과로 알았다.
360번도로 상 월롱면 용상골에서 월롱산 우측 어깨를 관통하여 덕은리 덕고개로 이어지는 비포장 도로가 있는데, 지금 이곳에 포병훈련장이있는 곳인데 복차 통행이 현재는 가능한 곳인데 이곳에 엄청난 인원이 죽어서 좌우측으로 가매장 했다는 참전용사의 증언에 따라 우리는 10여명을 투입하여 1주간을 정밀 탐사했지만 돌무덤같은 몇군데를 찾았지만 확인이 불가 했고 한곳은 가능성이 높은 곳인데 공장이 들어서버려 전체적인 지역이 훼손되어 버렸다.
물론 이곳도 초기전투가 아니고 1.4후퇴시에 해당하는 이야기였고 월롱 면소재지의 다락고개일대가 가장 그래도 가능성이 높고 전투가 실제 있었다고 증언하는 분들도 있으나 1번국도가 4차선으로 확장되고 주변에 기간시설들이 들어서 원형을 찾기란 불가능했다.
초기전투와 관련된 유해발굴은 사실 지금까지 유해발굴 결과 명확한 숫자는 말하기 어렵다.
다만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는 현황은 다음과 같다. 임진강 너머 노상리일대에서 19구, 진동면 일대에서 3구, 문산읍 당동에서 1구, 파주 덕은리에서 19구. 금촌에서 4구, 봉일천에서 7구, 고양에서 12구의 유해 발굴 되다."
그렇다면 이 일대에서 초기유해발굴은 없는 것인가?
노상리는 사실 우리가 초기에 제1사단 제12연대가 철수하면서 전투를 했다면 가능한 숫자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 통일촌에 들어가 직접 제보자의 안내를 받아가며 현장을 확인한 나로서는 우리가 피아판단을 정확히 할 수 없어서 그렇지 '51년도 4월이후 미군이 진격하는 과정에 미군의 폭격으로 죽은 적군이라는 의중을 버릴 수 없다.
진동면의 3구는 초기전투시 제1사단의 전투지역으로 어느정도 인정할 수 있는 숫자라고 본다.
우리가 받은 제보중에서 가장 큰 숫자가 장단지서에서 출발하여 고랑포로 가다 적전차에 맞아 전사한 경찰 20여명인데 현장을 직접 목격한 당시 장단면에 근무하던 분을 장파리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어 대동하고 실제 그 위치에 가서 탐사를 했으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문산 당동은 현재 포병부대 울타리선에서 지역주민의 제보로 십여구의 유해가 있다고 해서 발굴 했으나 1구와 다수의 모시나칸트탄탄과 M1탄피등이 혼재되어 나왔다.
파주 덕은리는 마을 사람들이 직접 목격한 분이 없이 우리가 전사사실을 가지고 현장을 탐사간 군차량호 작업현장에서 노출된 유해를 직접 내가 발견하여 시작되었으며 접근하게 된 배경은 제1사단이 '51년도 4월부터 캔사스선으로 재진격간 문산천전투에서 전투기록이 나온다. 그러니 초기전투라 하기는 곤란하다.
금촌지역은 도내리 뒷산과 영태리 신기동일원에서 각 1구씩 발굴 되었고 대부분 제보자의 제보에 의해서 발굴되고 봉일천은 장곡리 일대에서 3구 봉일천 초교 바로 우측 길옆에서 2구 그리고 공릉천 제방에서 2구가 발굴 되었다. 이곳도 모두 제보 지역으로 초기전투라고 확실시 되는 것은 봉일천 초교 옆우로 이곳은 바로 옆집에 사는 분을 탐문하며 직접 집으로 들어가 증언을 청취하여 발굴한 곳인데 사실 개인 집 바로 옆이라 본인이 증언을 고사하여 무척이나 애를 먹었던 기억이 생생 하다.
고양에서의 12구는 여러가지로 해석이 분분하게 된다.
먼저 선유동에서 11구의 유해를 무명 206고지에서 개인호 700여개를 굴토하여 발굴하게 되는데 사실 이곳은 1.4후퇴 당시에 영국군과 중공군이 일전을 치뤄 영국군 전차 10여대가 파괴되고 엄청난 인명 피해를 가져오며 미 제1군단의 서울 철수를 엄호한 매우 중요한 전투가 벌어진 곳으로 유명한데 이곳은 초기 전투는 아니고 사실 피아판단에도 약간의 개연성이 있는 곳이다.
또한 덕양구 현천동의 밤나무골일대에서 1구의 유해를 발굴 하는데 이곳은 제보자의 증언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제보자 황정호는 발굴 당시 '11년도에 나이 70으로 전쟁 당시는 9살 이었으며 본인 증조부 묘소 옆에 국군 유해 1구를 직접 매장했다 하여 발굴 하였다.
이 분은 이곳에서 계속 살아왔기에 동네 어른들로부터 들었고 어린 나이에 직접 목격한 것들이 많아 여기저기 많은 제보를 하였다.
한 곳은 지금 항공대 바로 맞은편으로 이곳도 모두 밤나무골에 속하는 곳으로 지금은 도로가 개설되어 있어 포크레인 까지 동원하여 본인이 직접 14구의 유해를 매장하는 것을 목격했다니 열심히 발굴 했으나 전투화 밑창등 소수의 유품만 발견 되었다.
다른 한곳은 망월산에 '53년도 8월경에 와삼촌과 나무하러 갔다가 국군 30여명을 발견하여 직접 묻어주고 제례도 올렸다고 한다. 사실 이곳은 중공군의 '51년도 4월공세시 28~30일어간에 인민군 제8사단이 골든선(서울 방어선)을 방어중인 국군 제1사단을 공격하게 된다.
하지만 행주나루지역으로 침투한 적 1개연대 규모는 사단 수색대에 발견되어 인천 외항에 대기중인 순양함 폴레도호의 8인치 함포사격을 받고 많은 시체를 유기한체 퇴각한 후에 10여차례의 무모한 공격을 감행 했으나 국군 제1산단 제11연대의 분전으로 900여구의 시체를 남기고 물러나게 된다.
우전방에서도 제15연대가 일시적으로 중공군의 양동작전에 휘말려 앵봉을 피탈 당했으나 바로 보전 협동작전으로 중공군을 격퇴하게 되는데 중공군도 많은 시체를 유기한체 주력부대는 금촌-앵무봉선으로 철수하게 된다.
이상의 내용에서 보면 이 일대의 발굴된 유해는 사실 아군이 공세적 방어를 했던 곳이라 우리는 유해를 수습하여 처리가 가능했지만적은 미군의 강력한 화력전투에 속수무책으로 당했기 때문에 시신을 유기한체 뒤로 물로나야만 했던 곳이며 상황이었다.
4. 김포-오류동 부근 전투
가. 전사개요
서울 북방 의정부와 봉일천지역이 실함위기에 있을 때 한강 하구인 김포반도에도 또 다른 적이 측방에서 서울을 위협하고 있었다.
이지역은 강폭이 2~3km에 달하고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여 적이 도하작전을 하지 못하리라 판단하여 육군본부는 별로 신경을 쓰지않고 있었다.
따라서 적은 우리의 방어계획을 손바닥 손금보듯 간파하여 북한군 제6사단은 옹진지구를 제3여단에 인계하고 예하의 제14연대가 이미 26일 영정포에 집결하여 도하지점을 정찰하고 있었다.
이에 육ㅂㄴ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보고받은 후에 바로 남산학교 교장 계인주 대령을 김포지구 전투사령부 지휘관으로 임명하여 ㅡ곳으로 옹진반도에서 철수한 국군 제1사단 제12연대 제2대대를 포함하여 남산학교, 보병학교 후보생, 공병학교 학생, 보국대대 병력과 그곳으로 투입된 독립기갑연대 일부 부대를 편성하였다.
전투지휘부는 통진을 중심으로 한강 하구와 염하를 이용하여 김포반도를 방어토록 강화-통진간 도로 좌측에 보국대대와 기갑연대 제1대대를 배치하고 우측에 기갑연대 제3대대(도보), 그리고 반도 북단에 제1사단 제12연대 제2대대(혼성), 남산학교 소대를 배치하고 보병학교 후보생대대는 예비로 확보하는 진지편성에 주력 하였다.
각 부대가 진지 편성을 완료할 무렵 26일 16:00 적의 도하정찰이 두드려지면서 2시간 후 수척의 적 어선이 강령포로 접근하기 시작하여 제12연대 제2대대 제5중대가 기습사격으로 적을 섬멸하고 조강리 강둑에 배치된 장갑 1개 소대도 적의 화물선을 관측히고 장갑차에 장착된 37mm 포를 발사하여 격침시켰다.
그러나 이날 야간에 적의 소규모 부대가 강령포로 도하하여 고지를 점령하여 도하발판을 만들고 강화로 상륙한 1개 중대 규모가 갑곶에서 염하로 건너 보국대대를 배후에서 기습하여 김포사령부의 퇴로차단을 기도하였다.
이로인해 일시에 전방 방어선이 무너지고 육본에서는 이곳의 위기극복을 위해 제3사단 제22연대 제3대대와 수도사단 제8연대 제3대대, 기갑연대 도보수색중대 제8중대를 추가 배치하여 김포반도의 마지막 보루인 운유산-73고지 선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하지만 적은 28일 새벽에 대촌 북쪽 강변에 상륙하고 거의 동시에 적전차 2대를 김포로 향하는접근로 상에 투입하여 국군 제22연대 제3대대를 정면에서 공격하여 장병들은 2.36인치 로켓포와 37mm 직사포로 분전했지만 역부족으로 김포지구로 물러나기 시작하였다.
나. 당시 전투 참여자들의 증언
먼저 보국대대장 방원철의 증언이다('77. 4. 20)
보국대대란 북한군에서 귀순한 장병 300여명으로써 정훈게통에서 창설한 부대로 육군 게급장을 달고는 있었으나 군번도 없는 포로수용소나 다름없는 실태였다.
'49년 12월 28일에 내가 부임하면서 본격적인 선무공작대로 전신하여 '50년 2월에는 밀양지구 공비귀순공작을 벌였고 3월에 다시 올라와 문래동 방적공장에 대대본부를 두었다.
5월20일쯤 2개 중대를 제6사단과 제7사단에 각 1개 중대식 파견하였다.
6월25일 옥인동 집에 있다가 가두방송을 듣고 영등포 본대로 들어와 출동태세를 갖추고 대기하다 이튿날 육본에 들어가 무엇을 하느냐고 묻고 통진으로 출동하였으나 그날 밤 적의 측방 기습에 27일 김포로 낮에 철수하였다.
다시 수습돤 병력 30여명을 본대로 복귀시키고 육본에 들어가 미아리보다 김포쪽이 먼저 들이닥칠 것 같다고 전하고 부대로 돌아와 몇몇은 사복을 입혀 주변에 남도록 하고 한강 다리가 끊어진 다음 수원으로 내려가 29일 오후에 전방에 보낸 1개 중대병력을 만났다.
7월 12일에 대전에서 부대 장교 52명이 정식으로 군번을 받아 현역으로 편입되고 병력은 제1군단사령부와 제8사단에 분할 배속 하였다.
남산학교 병기관 조 한춘의 증언이다.('66. 4.22, '77.5.24)
여기서 남산학교가 무언지 모르는 독자를 위해 잠간 설명부터 하고자 한다.
남산학교는 쉽게 말해 정보학교를 말하는 것으로 '49.5.20일에 수색에 창설하여 초대 교장은 백선엽 대령(당시 육본 정보국장)이였으며 같은 해 6. 29일에 서울 남산동(전 kbs 방송국 자리)으로 이전하고 7월 10일에 남산학교로 개칭하고 지금의 정보학교 역활을 수행하게 된다.
"부교장인 최복수 중령이 실제로 교장 임무를 대행하고 있었고 6월 24일에 적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날은 토요일이자 월급날로 외출을 하고 있는데 25일 아침에 전쟁 소식을 듣고 학교에 들어가 26일 아침에 김포지구에 들어가 그 지역일대 잡동사니 부대들을 통합지휘하여 28일까지 김포읍선을 지켰다.
그 날 아침에 한강교가 폭파되었다는 소식에 퇴로 차단ㄴ을 우려하여 19:00쯤 소사로 이동 하였다.
29일아침에 최복수 중령이 공격대장이 되어 장갑차를 앞세우고 비행장 탈환공격에 투입되어 안영직 대위등과 전사하고 사병 몇 명만 돌아 왔다. 그리고 지휘소를 소래-수워느로 옮기며 나중에 제1군단 수색요원이 되었다."
기갑연대 기병대대 제7중대장 김촌성의 증언이다.('77.5.19)
나는 대학재학시인 '48년 런던 올림픽에 길전식등과 승마선수로 선발 되었다가 출전치 못하고 이용문 당시 기갑연대장의 권유로 대학선수 9명과 수의 5명이 육사 8기로 특채되었다.
당시 기병대대는 말이 300여필 되었고 화기 소대에는 60mm 박격포 4문과 경기관총 8정까지 말에 싣고 다녔는데 6.25전쟁 당시가지는 마필이 확보 되지 않아서 제5,6중대 2개중대만 편성되었다.
보병학교에 입ㄱㅎ하여 교육중 전재이 터져 대부분 일선부대 중대장으로 나갔지만 기병대대로 배속 되어 27인가 기갑연대로 갔더니 기병대 주력은 이미 퇴계원쪽으로 출동한 뒤였고 남아 있는 병력으로 임시 제7중대를 편성하여 중대장으로 장갑대대에 들어가 김포로 출동하였으나 강안에 배치되었을 때에 말이 놀라서 이리저리 뛰게 되어 보병전투마저 여의치 않았다.
보병학교 후보생 곽해용의 증언이다.('66. 4.2)
나는 갑종간부 제2기로 시흥 보병학교에 입교를 해서 3개월 교육을 마치고 후반기 교육이 끝나는 일요일에 전쟁이 났다.
25일 저녁에 보병학교에 들어가니 먼저 들어온 사람들은 문산으로 가고 우리들은 제2차로 교도대 인원들과 김포를 지나 강화도 조금 못미처인 곳에 갔습니다.
28일날 새벽에 진지편성을 하는데 앞에서 다발총 소리가 나고 철수하는 병력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는데 우리 진지 뒤에도 포가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81mm 부사수인데 철수하는데 그만 포를 놓고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포열을 들고 나가는데 김포읍으로 가는 도로가 보이는데 그쪽으로 병력이 집결하는데 VT신관이 터지고 하는데 시오리가지 철수를 하여 트럭이 있어 트럭에 싣고 나오다 보니 제일 늦었습니다.
김포에 가서 저녁을 먹고 잤는데 김포비행자 들어가는 소로가 있는데 그곳에 배치되어 있다가 비행장을 공격한다하여 갔는데 못하고 철수하였습니다.
소사국민학교에서 하룻밤을 자고 김포비행장이 보이는 고지를 점령했는데 인민군이 우리를 공격해 오는데 한 2개중대는 되었습니다.
아무리 사격해도 맞지도 않고 김포비행자ㅏㅇ 쪽으로 빠져 나오는데 앞산에 화이바를 슨 것 같은 서너 명이 오라고 소리를 지르는데 알고보니 인민군이고 그곳을 탈출해 소사에서 집결해 가지고 수원으로 갔습니다.
제22연대 제3대대장 손영을의 증언이다.('67.2.23, '77.5.13)
6.25전쟁이 나서는 연대편성을 해서 서울로 왔습니다.
수도경비사령부에서 집결후 1개 연대가 분산되었습니다. 제2대대는 문산 방면으로 내가 가진 제3대대는 김포로 나갔습니다.
김포쪽으로 강화도 방면에서 적 3개 사단이 상륙을 하는데 제12연대에 일부 병력, 제22연대 일부 병력, 우리 대대와 그 다음에 편성중에 있는 공군의 후방부대 그런데 공군 김포지구사령관이 최용덕 장군인데 그 분하고 작전을 한다고 했습니다.
27일쯤 될 겁니다. 인접부대와 연결은 없고 공격을 햇는데 27,28일으 ㄹ견디어 내다가 대대를 부평을 경유해서 소사로 나왔어요.소사에서 재편성을 햇는데 그 당시에 육군 종보학교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3사단 참모장 우중령이 있고 제18연대장 임충식 장군도 있었습니다.
적은 이미 김포비행장을 점령햇는데 제18연대 일부병력과 정보학교의 적은 병력으로 공격을 하다가 정보학교장이 전사했습니다.
나는 1개 대대의 3분의 2 병력을 가지고 정면을 공격해 들어갔는데 다음 지휘관이 제3사단 참모장 우중령이 왓는데 역시 실패하였습니다.
저쪽은 많은 병력이고 아뇌니까 우중령은 그곳에서 자살을 했어요. 자기 권총으로 했어요. 그 다음 지히관이 임충식 중령이었습니다.
이때 상황이 보급이고 뭐고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본부와 연락도 전혀 안되고 이 어수선한 상황에서 혼전을 하다가 부대별로 수원으로 후퇴를 했습니다.
당시의 제3사단(장. 유승렬 대령)은 대구의 제22연대(강태민 중령)와 부산의 제23연대(자. 김종원 중령)뿐인데 6월25일 육본 명령에 따라 제22연대가 서울로 집결하게 되었다.
그런데 연대도 제1대대는 포항의 경비대래로 나가 있어 제2,3 양 개 대대만이 상경하게 되었고 그때 사단장도 부재중이라 참모장 우병옥 중령이 연대와 함께 행동 하였다.
그날 오전에 장비와 차량을 모두 열차에 시고 11:00시경 대구역을 출발하여 저녁에 용산역에 도착하였다. 수경사의 작전구역을 인곕받으라 해서 제8연대(현 육본)에 들어가 갔는데 제8연대는 출동했는지 막사가 비어 있었다.
그래서 제2대대는 먼저 문산으로 출동해 가고 우리 대대는 그냥 그곳에서 하루정도 더 있다가 김포로 출동하라해서 우리가 가지고 온 차량편(트럭 20여대)으로 김포로 가니 김포사령부가 있었고 게인주 대령과 김용주 중령 및 공군의 최용덕 준장 등이 보였다.
밤에 진지를 편성하고 있다가 이튿날 새벽부터 접전이 시작되어 일부는 부평-소사로, 일부는 비행장쪽으로 철수 하였다.
그 다음날 김포 비행장을 탈환하려 공격했는데 그때 치복수 중령이 차를 몰고 돌진하다가 전사하고 그 뒤에 우병록 중령이 자기 권총으로 자살 하였다. 작전 실패에 대한 책임감이다. 그는 평소에 책임감이 강하고 아주 성실한 사람이었다.
다. 관련된 내용분석과 지형 탐사
김포 오류동 전사는 사실 그렇게 각광을 받지못했던 전사내용이다.
하지만 시간이 경과하면소 그 중요성이 새롭게 부각되는 전사인데 춘천대첩만큼이나 중요한 전사로 많은 분석이 요구 된다고 본다.
"춘천에서 국군 6사의 소양강방어와, 동쪽 제8사단의 7번도로 사용이 적절치 못했던 북한군, 그리고 중서부 전선의 서파에 전차를 투입하여 없는 도로에 병력이 집결 되고 다시 포천으로 우회해야 했던 북한군의 의정부-포천공격의 실수, 여기에 김포지구의 깜짝 임시방어부대의 분전으로 한강선 방어의 시간을 갖게 되어 우리는 살았다. 미군의 한반도 투입 시간을 보장해 준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개전 당일 오전 9시에 개성이 하락되고 국군 제1사단은 임진강선으로 철수하게 된다. 이로 인해 방어부대가 없었던 한강 하류와 김포반도는 무주공산과도 같았다.
그러나 도하장비를 갖추지않은 북한군 제6사단의 천만다행한 실수(?)로 그들이 도하를 위해 시간을 지체하는 사이에 임시지만 정보학교나 보병학교 교도대대, 제3사단의 제22연대 1개 대대, 기갑연대 일부 병력 등이 편성되어 북한군의 측방진입을 차단 또는 지연시키는 엄청난 큰 작전을 수행했다고 봐야 한다.
만약 그들이 도하장비를 갖추고 빨리 한강을 도하하여 김포반도로 유입되고 영등포로 진입해 왔다면 우리는 방어부대가 없는 상황에서 어찌 되었겠는가!
따라서 여기서 나오는 대부분의 증언은 지휘관의 전사와 자살에 관한 이야기다.
첫째 : 한국판 노블리스 오블리제다.
초기 전투에 어디에도 고급장교가 나서서 전투를 했다는 기록은 찾기 힘들다.
하지만 최복수 중령이 차량을 몰고 김포공항으로 돌진해 들어가는 모습이나 다음에 우중령이 작전에 실패한 책임을 지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화는 정말 값진 전사인데도 우린 그동안 공상적인 전투성과를 나열한 제1사단등에 미쳐서 제대로된 전사를 알지 못했다.
이러한 전사의 숨은 공적을 이제라도 우린 밖으로 토해내야 하는 것이 임무다.
잘 알고 있듯이 서울을 양익 포위 하려던 북한군은 국군의 춘천지역에서의 결사항전에 그만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국군 제6사단이 말고개에서의 적 자주포나 전차를 육탄공격으로 무력화 시키고 춘천소양강 일대에서도 심일 소위의 대전차특공조가 옥산포 일대에서 적 전차를 파괴하여 사기를 진작시키고 시민 학생, 국군이 혼연일체가 되고 적의 진출을 저지함으로써 북한군은 우리 제6사단을 '춘천바위'라 부르며 치를 떨었다 한다. 그래서 그 책임을 물어 제2군단장이던 김광협과 제2사단장 이청송이 해임되고 제12사단장 최충국은 전사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 전사는 마치 국군 제1사단이 수도서울을 사수하는데 기여한 것처럼 그리고 제7사단이나 제2사단이 의정부-미아리축선에서 실패하여 무너진 것처럼 쓰고 있지만 그래도 적 전차를 동반한 주공에 맞서 당시로서는 잘 싸운 전투였다고 봐야 한다.
둘째 : 역시나 지휘공백이다.
분명히 단일 지히관으로써 가장 높은 제18연대장도 있고 아직 수도 서울이 실함된 것도 아닌데 임시 급조된 부대를 지휘통제할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각 단의 부대별로 싸우다 결국 무기력하게 물러나게 되었다.
비행장이 갔는 군사통제면의 효율성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하지만 행주나루에서 건너오는 그 많은 부대들도 사단장도 있고 연대장이 몇 명씩이 되어도 본인이나 지기 부대원을 데리고 사병처럼 움직인 그 당시의 행태는 분명히 비판 받아야함에도 그 계급의 위상에 밀려나 누구도 범하지 못하고 영웅담으로 신성시하는 전사가 되었다.
셋째 : 전사 내용의 옳바른 기록이다.
여기서 나오는 내용중에는 북한군이 강령포일대에서 적의 도하를 기습적으로 강타하고 화물선을 발견하고 장갑 소대에서 37밀리 포로 격침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본인이 이곳 일대의 주민을 만나서 알아본 결과로는 누구하나 이런 모습을 보질 못했다고 한다. 다만 그들이 도하준비가 안되어 어선등을 이용하여 소수 규모로 도하하려다 보니 일부 아군과의 교전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국군이 한강선에 집중적인 방어태세를 갖추지않고 각개 부대별로 활동하다 옆 집이 뚫리다 싶으면 그냥 통제없이 알아서 빠져 버리는 그런 전투였다고 하면 않될까?
온유산-73고지선에도 방어선만 있지 사실은 병력이 제대로 배치되지않은 것이 사실이라고 본다.
아니 지역주민이 국군을 보지못했다고 하는데 전사의 기록에는 있다면 뭔가 하나는 잘못된 것이다.
반면에 강상에서의 전투는 미미한 것이라도 운유산-73고지 선을 연하는 통진읍 일대의 역습 상황이 좀더 언급 되어야 한다.
소련군 군사고문단장이 긁어모은 부대의 역습으로 진출에 지장을 가져왔다고 하는데 우린 지휘관(최복수 중령)의 전사나 우중령의 자살 내용으로 끝을 봐서는 안된다고 본다.
증언록에도 이곳 관련 내용은 상당히 제한적으로 기록이 남아 있다.
혹시라도 라주바예프가 북한군 제6사단의 기동이 본인과 무슨 연관이 있어(도하장비 미확보등) 책임을 회피하는 차원에서 우리 국군의 용맹성을 부각시킨 것이지도 모른다.
그럴만한 이유는 도하장비를 갖추지 못해 부대들이 일사분란하게 도하하지 못하고 각 부대별로 도하하다 보니 협동작전을 위해서는 제대들이 기다려야 하고 그 당시시에 이미 미군의 항공폭격은 진행되고 있었기에 그저 오면 문이 열려 무혈입성하리라 보았던 계획이 그래도 몇몇 부대들이 나타나 역습도 해 오고 물러나지 않는 지휘관들의 사생결단 노력에 그만 멈칫할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런 이유는 동네에 다니면서 주민들의 제보나 증언을 받는 과정에 그렇게 큰 전투를 목격하지 못했다 하는데 소련고문관의 기록은 대작으로 되어 있기에 생각해 본 것이다.
기록 어디에도 수송선이 격침되었다는 내용은 없으며 도하하여 교두보를 확보하는 부대는 별 장애없이 도하하였다는 것을 기록을 통해 알 수 있고 이것은 지역 주민들의 증언과도 일치한다.
넷째 : 병력 통제의 부재다.
올라오는 부대들이 이미 의정부전투나 미아리-창동전투 때도 언급된 것이지만 올라오는대로 그저 이리저리 가라하고 아무런 통제대책도 없이 지휘관들이 알아서 했던 ㅡ 당시의 모습은 어떻게 보면 매우 용맹스런 임무형 지휘체계가 갖추어진 부대같다.
하지만 이건 기우에 불고하고 정신이 없으니 그저 올라온 부대가 왔다고 하면 '어, 그래 너는 청량리로 가고 너는 미아리로가' 이런식의 병력 통제였다.
그러니 통합된 전투력 발휘나 보급체계등 아무 것도 행할 수 없는 통제 불능의 부대로써 그저 그 부대와 그 구성원 몇이서 잘 싸운 군대가 초전의 우리 모습이다면 안될까?
다음은 탐사와 탐문결과다.
나는 사실 서해안의 특히 NLL이남의 왠만한 섬까지 탐사와 탐문을 다녔다.
교동도의 말탄포-율두산-고구리-동산리나 서도면의 말도, 석모도,강하의 인하리-철산리-월곳, 김포의 보구곶-조강리-시암리-월곶-애기봉전망대-오리정-온운류산-대촌 등 모든 곳을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드려 탐사와 탐문을 했고 발굴도 기회발굴을 많이도 났다.
그러나 교동과 강화는 주로 유격군의 활동 무대였고 김포의 가장 두드러진 전선인 운유-73고지선의 방어선도 찾아 나섰지만 실제 운유산에 일부 개인호가 있을 뿐이었다.
"쇄암리에서 초기전투 당시 기갑부대 장병 1명을 발굴하다."
대촌이나 월곶 조강포가 가서 그곳 사람들의 영웅담을 듣는 것이 사실 더 흥미로운 사실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월곶의 쇄암리에서 초기 전투 때에 들어온 군인이 적군의 위장전술인 소총에 태극기를 달고 나나타는 북한군에게 속아서 같은 국군인줄 알고 마주을 한답시고 진지 밖으로 나갔다가 전사한 인원을 묻어놓은 곳을 제보하여 실제 발굴 결과 제보 내용대로 한구를 찾았으 ㄹ때가 가장 보람있는 순간이다.
하지만 보구곶리 마을회관 앞에서 만난 깡패 기질의 할아버지로부터 봉변(?)도 당했다.
할아버비 18살에 전쟁이 나고 당시에 갑곶리 어ㅣ가집에 갔던 할아버지는 북한군이 처 내려온다하여 강을 건너와야 하는데 이미 배도 없고 모두가 도망쳐버린 상황에 혼자 헤엄으로 건너왔던 바다 사나이였다.
"아니 북한군이 총으로 쫒아오는데 어떻게 강으로 도망쳐 왔어요?"
"여보,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도망치다니. 난 도망친게 아니고 북한군이 온다고 알리려 목숨을 걸고 강물에 뛰어든거야. 그놈들이 뒤에서 총질을 하는데 내가 맞겠어. 문수산 도사님인데."
"죄송 합니다. 우린 잘 모르니까 말 실수를 햇습니다."
"당신들 말야. 군인도 아냐. 여기에 몇이서 와 가지고는 서성거리더니 저 겅건너에 북한군이 보이니까 다 사라져버렸어. 뭐 군인이그래."
"우리는 혹시나 이곳에 전쟁중에 전사한 인원의 유해가 발굴도지 못하고 있다면 조사해서 발굴하려고 탐문중에 있습니다."
"저 물속에 들어가 용왕님께 물어보슈. 얼마가 지났는데 이제와서 뭘 발굴한다고 00이야. 난 좋은 말은 못해요. 날 보고 싶으면 용강리로 오쇼."
참 많은 곳을 다녔지만 이런 할아버지도 처음이다.
그렇다고 물러나면 내가 바보가 된다. 그래서 떠나는 오토바이를 바로 따라 갔다.
"할아버지 집에 들어가 할아버지의 6.25전쟁사를 경청했다."
"할아버지는 소속이 어디였습니까?"
"소속이 뭐요? 난 이곳 문수산을 주름잡고 인민군을 일망타진하며 서부전선을 지켰소."
"아니 무기는 어디서 받고 누구와 함께 작전을 했습니까?"
"무기는 인민군한테 빼앗아 사용했고 지금은 모두 귀신이 되었지만 서북청년단원 3~4명이 동료요."
"그럼 이 동네는 공산치하에 프락치도 있고 내무서원도 있었을 것인데 어떻게 하셨습니까?"
"내가 18살에 저 강을 헤엄쳐서 북한놈이 쏘는 총알을 피하며 살아났는데 뭐가 무섭겠소. 우린 문수산에 은거지를 만들어 놓고 수시로 내무서도 기습하여 보급품을 획득하고 붙잡혀온 사람들을 탈출도 시켜주고 그러다 유격군이 되어 탄포나 영정리 흥정포로 침투하여 백마산에서 전투도 했오."
"동네 프락치는 그당시에 없었던 모양입니다?"
"왜 없겠소. 하지만 이곳에는 해방 당시에 황해도 개풍에서 잠시 내려온 사람들이 여기저기 많았는데 북한군이 와서 대부분 잡아가 버렸고 그러다 보니 사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어촌도 아니고 농촌도 아닌 동네에 뭐 먹을 것도 없고 잘사는 사람도 잘난 사람도 없으니 그놈들이 잇엉봐야 할 일이 없잖아. 하지만 통진만 내려가도 꽤나 많았어요."
"그럼 군번도 없고 정식 군대도 안가고. 참전용사는 유격군 했다는 것으로 되었습니까?"
"무슨 참전용사? 나는 참전용사도 아냐. 그때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는데 인민군도 10명도 더 사살하고 많은 양민들을 구출도 했지. 그러다 유격군이 되었다가 해체되고 전쟁이 끝나고 군에 다시 갔다 왔지. 그런데 참전용사되면 무슨 참전비 준다고 난리가 나서 서로 참여했다고 하는데 다 가짜가 태반이야. 난 창피해서 신청안해요.
내가 살면 얼마나 산다고 죽지않고 산것만도 다행이지. 뭘 더 바래요. 내 총에 죽은 그놈들 명복이아 빌어주고 있다 오라하면 가야지."
"그래도 동네에서는 어르신이 진짜 참전용사님이라고 하던데 이거 좀 이상합니다."
"여보, 똑똑히 들어. 저놈들 믿으면 안돼요. 이쪽에서 싸운 아군 별로 없어요. 싸우지도 않고 차 타고 왔다가 슬며시 저 강가에 북한군 나타나니 도망친 것들이 무슨---"
"하지만 전사에 조강포에서 전투가 있었고 배도 격침시켰다고 하는데... ."
"가서 애기봉밑인데 김00이라는 할아버지 살고 있어요. 할머니들도 꽤나 있어. 그곳은 배가 드나들어 사람이 그래도 있었거든. 가서 물어봐요. 한둠명 죽은 것 밖에는 없어요. 무슨 전투야 총질 몇번 하고 다 사라졌다고 하는데... ."
나는 인사를 드리고 조강리로 갔다
10여 채의 가옥이 있고 그래도 인기척이 있는 곳이였다.
할아버지 한 분을 만나 사실 이야기를 하니 바로 본인이였다.
"혹시 전사한 사람이 어디에 묻혀있습니까?"
"참 거시기 하고만. 죽은 사람이 맞긴 맞은데 국군인지 공산군이지 민간인인지 잘 몰라요. 내가 15살에 전쟁이 나고 이곳으로 북한군이 수없이 넘어오고 넘어가고 하긴 했어요.
전쟁도 비가 내리는데 갑짜기 꽝꽝거려 나와보니 벌써 북한군이 마을 저 저산에 올라가 있고 국군은 어디있는지 보질 못했어요.
"그럼 저기 죽어서 묻혔다는 사람은 누가 묻었습니까?"
"내가 한 것이 아니고 동네 어른들이 한 것이야. 워낙 냄새가 진동하니까 이곳 일대 미친개들은 다 모여. 여우들이 그때는 많았어요. 그러니 보기 싫으니 바로 옆엗 따을 파고 묻었다고 하는 소리를 들었지. 직접 보질 못했어요."
"그럼 대략적인 위치라도 아시면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나는 할아버지 안내를 받아 그 위치를 파악하고 다른 동네사람 몇 분을 더 만나 사실관계를 파악했다. 그러나 이곳은 인민군이 넘나드는 포구였고 국군은 잠시 왔다가 다 밀려나갔다고 한다.
그러면서 중요한 정보를 하나 얻었다.
통진에 가서 오리정에 가면 지금 외국어고교가 있는 근처에 국군이 앉아서 쉬다가 북한군에게 전부 전사했다는 곳이 있다고 알려 주었다.
우리는 지탐기로 위치를 탐사하고 탐지음이 나는 몇군데를 체크하여 기록에 남겼다.
해병대와 협조하여 기초굴토를 해 봐야 한다.
동네사람들 이야기는 이곳이 북으로 가는 지름길이라 군인뿐만 아니라 민간인들, 그리고 전쟁이후에도 북한에서 아니면 우리쪽에서 넘나들던 사람들이 얼마동안 잇었다가 강안 철책이 드리워지며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다 한다.
"그러니 생과부도 생기고 북으로 못 넘어가 부랑아 아닌 부랑아도 생기고... ."
그래서 이곳 일대에 민간인도 흔한 말로 월북을 기도하다 총맞고 죽은 사람도 있고 유격군이 북으로 넘어가 교전을 하다 전사하여 이곳에 시신이 흘러와 묻혀지기도 했다고 하니 조사하기가 정말 어려운 문제다. 어쨌든 전투는 별로 없었다.
실제 얼마 뒤에 몇곳을 발굴하여 봤지만 흔적은 발굴 되지 않았다.
나는 오리정으로 달렸다.
이곳에 오니 그래도 전쟁한 지역같은 분위기였다.
강화도나 김포반도 북단에서 철수하는 제12연대 병력이나 김포지구사에 배속되어 들어오는 병력이 만나는 지점이 여기라 한다.
동네 사람들은 많은 군인들을 구경했다. 그리고 죽어가는 모습도 보고 도망치는 모습도 보았다.
이곳 일대는 200M미만의 낮은 산에 둘러 쌓여 있는 분지형으로 월곶면소재지와 통진읍이 교차한느 곳으로 김포외국어고교가 들어서 있는 야산 일대다.
지금은 김포 한누리병원까지 들어서 이제 그 형체를 찾아보기 힘들게 되어버렸지만 '00년도에는 밤나무 숲 능선에 개인호가 완벽하게 살아 있었다.
이곳이 그 당시에는 교통의 중심지로 모든 길이 오리정으로 통하고 있었는데 ㅈㄴ방에서 후퇴하는 병력이 행군으로 오리정으로 들어와 길 옆에 군장을 풀어놓고 자미 휴식을 취하는 사이에 적의 기습을 받아 많은 인원이 전사하여 군장이며 장비를 놓고 일시적으로 마송방향으로 후퇴하였다.
그러나 이때 아군의 부대들이 진출해 들어오면서 적의 기습부대는 사라지고 국군이 다시 점령하였으며 야산 능선으로 부대를 배치하여 오후 늦게부터 개인호를 구축하고 적군을 기다리는데 적이 앞에서 온 것이 아니라 뒤에서 나타나 전투도 못하고 모두 철수해 나갔다고 한다.
이 시기에는 이곳에 사람들이 지금도 많이 살고 있지만 꽤나 많이 살고 있었는데 북에서 내려온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그러니 자연스레 프락치도 많아 국군이 점령해 들어올 때는 이로인해 민간인도 희생이 많았지만 그때는 주로 길따라 시신들이즐비하게 널려있었는데 모두 길 확장이나 포장공사로 그 흔적조차 없다는 것이다.
"야속하게 무너져버린 오리정의 국군 전투흔적들"
나는 동네 어른들그리고 한누리휴게소, 팬택산업단지 조성사업에 관여하는 분들께 전쟁지역임을 알려드리고 공사를 하게 되면 알려달라고 명함까지 주고 받으며 신신 당부하고 떠났다.
그리고 2~3년이 지나 다시 찾아가 보니 물류창고를 짓는다고 반이나 다 밀어버렸고 밤나무숲속에 남겨진 흔적은 점점 생명력을 잃어버렸다.
물론 이곳에서 죽자사자 전투를 한 것은 아니고 점령하고 있다 떠나간 자리지만 김포지구사의 역사며 흔적인데 아무런 통제없이 역사는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그렇다면 오리정 길가에서 전사한 제12연대 인원들은 어디에 매장 되었을까?
전쟁으로부터 3개월의 공산치하에서 지역주민들이 부역으로 끌려가 시신들을 치웠으며 북한군도 다수 있었다는 증언은 살아 있다.
하지만 어디에 매장되었는지는 누구도 모른다. 아니 그 당시에 관여한 분들은 지금 살아있지 않다.
그러니 이곳 일대의 개발사업에서는 그러한 면을 고려하여 사전에 건설업체와 협약을 하여 공사에 피해를 주지않으면서 호국용사의 유해를 찾는 노력이 요구되는데 처음에는 그럴싸하게 출발 했지만 지금은 아무런 통제없이 공사는 진행되고 흔적은 사라지고 있다.
이어서 나는 온유산-73고지선을 따라 김포사의 주방어선을 탐사하였다.
"숟가락이 나와 들통난 무지한 현장 결과"
온유산자락에는 해병대부대가 울타리선을 확보하여 지키고 있지만 그 꼭대기에 올라서면 무슨 카페시설이 들어와 있고 대공감시초소도 구축되어 있다.
이러한 시설들은 '00년도에는 없었던 시설이고 그 당시에는 개인호가 선명하게 남아 있고 탐지기를가동하면 윙윙 소리가 나서 저쟁터란 기분이 들었던 곳이다.
운유산의 북쪽이 바로 대촌으로 북한군 제6사단이 상륙한 곳이다. 48번도로가 가로질러 강화에 이르는 곳으로 지금 김포 한강 신도시 개발이한창 지냉중인 장기-양촌지구다.
어느날 이곳 개발지역을 찾아가 함부로 땅을 밀면 안된다고 엄포를 놓았다.
"이곳이 전쟁지역으로 아군 수백명이 묻혀 있는 곳입니다. 그러니 꼭 우리에게 밀기전에 통보하여 주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많은 원혼들이 들고 일어나 큰 사고가 날겁니다?"
"아 그렇습니다. 우리 토목업자들도 그런 것은 잘 지킵니다. 꼭 연락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건설업자가 아닌 어느 개인이 제보를 하였다.
"내 증조부 산소를 이장하는데 옆에서 탄알이 나오고 탄창이 나오고 군화가 나오고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바로 출동하겠습니다."
그러고 달려가 보니 평탄한 지면인데 유품류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물론 6.25전쟁 당시 것인지 그 후에 군부대가 일시적으로 점령하여 매장한 폐기물인지는 모르지만 군인 유품류는 맞았다.
우리는 현장 조살르 마치고 제보자가 이장을 완료하여 떠난 후에 주변을 정밀 탐사하는 가운데 놋숟가락이 나와 있어 이상하다 싶어 사진을 찍고 분석을 의뢰했는데 조선후기 숟가락이라 하였다.
우린 이러한 사진과 앞에서의 유품사잔을 근거로 토지공사에 공문을 보내 공사진행에 앞서 우리가 선행 조사를 하겠다고 했는데 그 토지공사의 공문 접수자가 이걸 문화재청에 보냄으로써 문화재청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 숟가락을 반환하라는 것이다.
"졸지에 문화재 도굴범이 될 뻔하다.
그야 바로 사진에 나와 잇는 것을 보내주고 말았지만 기분이 좋지않았다.
물론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렇려면 뭐하러 사진에 포함하여 통보하겠는가. 그러나 전허ㅏ를 주고받는 문화재청 공무원의 입소리가 무척이나 귀에 거슬렸다. 법이 어떻고... .
우리도 문화재청에 매년 발굴 계획을 통보하고 도한 문허ㅘ재청에서 발주하는 전국의 주요 문화재 매장지에서의 군관련 유품이 나오면 통보해 달라고 하지만 지금까지 한번도 통보해 온 적이 없다.
그렇다면 없어서 그러면 말도 안한다.
"임진강상 고구려 유적지 발굴현장, 한강변 아차산 발굴현장, 용인 할미산 발굴현장 등이 수 많은 6.25전쟁 격전지이고 실제 발굴사업간 많은 군 관련 유품이 나왔으나 한번도 알려주지않고 은폐(?)하엿다고 보면 된다.
그러한 사실은 그곳에 투입딘 사업단의 인원들이 우리 발굴팀이나 감식팀에 들어오는대학생들이 있고 실제 우리가 탐사간 현장에서 일부 인원으로부터 제보를 받았고 확인도 했다.
같은 국가의 동력끼리 밥그릇 싸움이지만 어쨌든 우린 찜찜한 기분속에 이 일대의 세밀한 조사를 통하여 전쟁사를 구술하려 노력 했다.
"조국의 운명을 건진 김포사의 용맹스런 전투의 역사를 기록하라"
이미 앞에서 조금 강조는 했지만 우린 나라를 구한 것은 제1사단이요 제6사단인 것처럼 전사가 쓰여있지만 사실은 김포사나 제8사단의 방어도 많은 기여를 했다.
최근 공개된 소련측 당시 소련 군사고문단장 라주바예프의 6.25전쟁 보고서에 의하면 우리 전쟁사가 얼마나 많은 허구를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김포지구의 전쟁사를 알아보려면 북한군 제6사단의 작전을 알아야 하는데 여기에 우리 독립 제17연대와 제1사단 제12연대의 철수가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제17연대가 고인이 된 백인엽 연대장의 혹독한 지휘로 싸우면 이기는 부대인 것처럼 인식되어왔다.
그런데 보고서에 의하면 옹진반도쪽에 북한군은 구들의 제3여단과 제6사단의 1개 연대를 투입하여 공격을 개시하였고 우리의 제17연대와 제1사단 제12연대의 2개 대대가 북한군 포병의 공격준비 사격과 보병의 공격에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연안으로 철수하기 시작하였고 저녁 7시 40분 경에 옹진을 점령했다고 한다.
"'50. 6. 25일부터 26일까지의 야간에 제17연대 참모부와 1개 대대 등 총 400여 명의잔여병력이 소함정과 거룻배를 이용하여 옹진반도에서 대연평도로 철수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북한군은 무려 2000여 명의 병사 및 장교를 포로로 잡고, 전투장비를 모두 노획하였다고 한다."
과연 제17연대의 병력이 얼마며 제12연대 2개 대대 병력이 얼마였는데 이런 치욕적인 피해를 가져왔는지 우리측에서는 별로 비교할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있어 답답하기만 하다.
"잔여병력은 민간인 의복으로 갈아입고 예성강을 도하하여 철수하였으며 일부는 지역 주민들 속으로 숨어버렸다"고 한다. 이래서 '50. 6. 26일 오전 10시 30분 물렵에 옹진반도와 연안반도는 함락 되어 버리고 북한군 제6사단의 일부는 개성을 공격하여 개전 당일 7시 30분 무렵에 점령하게 된다.
북한군 제6사단의 임무와 한강도하 작전의 진실이 이 기록에 있다.
북한군은 첫날 개성에 진출하면 조강리에서 한강을 도하하고 둘째 날 아침에 통진-백석현고개=마곡리선을 따라 강의 남쪽 강변에 교두보를 확보하고 서울의 병력이 서남쪽으로 후퇴하는 것을 차단하면서 한강 남쪽 강변을 따라 영등포로 공격할 계획이었으며 일부 병력이 인천을 점령하는 것이다.
그래서 6.25일 당일 7ㅛㅣ 30분에 개성을 점령한 그들은 첫날 한강 변에 진출하여 영정리와 방책동 전방에서 도하에 착수하였다.
그래서 26일 아침 6시 30분 경에 보병 2개 대대와 교육 대대 및 76mm 야포 2문만이 도하 하였다.
그러나 국군의 김포사 일부 부대가 수시로 역습을 개시 하고 항공 폭격 등으로 인해 6월 28일 되어서야 도하를 완료하게 되었다고 한다. 전차와 자주포는 도하하지 못했다.
6월 27일 부터 28일까지 사단내 보병과 포병들 그리고 76mm자주포 대대, 전차중대 등이 완전히 도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 보병과 전차가 협동작전으로 김포방향으로 공격하며 6월 30일 오후 8시에 오류동을 점령하였다고 한다.
특히 7월 1일부터 2일까지 하루에 4~5회에 걸쳐 아군의 역습과 항공공격으로 전투를 벌여 7월 3일 새벽 5시에 영등포를 점령하게 되는데 그들은 이 기간중 아군을 장교 및 사병 3,040명 희생시켰고 3,296명을 포로로 잡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인천은 7월 4일에 아침 7시 40분에 별 다른저항 없이 점령하게 되었다 한다.
"한강교 폭파시간도 없이 우린 완전히 포위되어 끝났다."
그거면 여기서 미아리 고개를 넘어 서울로 적 전차가 들어오고 한강대교가 폭파되는 싯점과 비교하면 얼마나 위급한 시간이고 작전지역인지 알 수가 있다.
적이 미아리를 넘어선 시간이 28일 새벽 01:00경이고 한강교가 폭파된 시간이 대략 02:30분경이라 한다. 김포가 그들의 계획대로 떨어졌다고 가정하면 정부의 대전천도도 어렵고 한강이북에서 전쟁은 끝났다.(?)
이렇게 중요하고 그 당시에 지휘자들의살신성인 정신이 깃들여 있는 전투사를 우린 그동안 너무 간과 했고 지금도 그 흔적마저 개발이라는 붐에 밀려 흔적조차 살아지고 있는데도 누구하나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유해발굴은 단지 전사한 인원의 유해를 찾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옳바른 전쟁사를 재조명하여 후세에 바른 전쟁사를 물려주는 것도 사명이다."
이르 위해서는 실증적 근거로 유해발굴 현황과 개인호등 전투 흔적에 대한 명확한 분석, 그리고 우리의 영웅담이 가득한 전사와 더불어 중공군 기록, 소련군 기록, 미국이나 일본군 기록, 나아가 북한군의 자료를 확보하여 언젠가는 6.25전쟁사의 대대적인 진실편이 쓰여져야 한다.
유해매장과 관련한 제보 또한 제한적이었다.
주로 유격군의 행태에 관한 제보와 유격군 출신들이 동료를 매장하였다는 제보는 많았다.
하지만 정규작전간 전사한 인원의 매장 사실을 제보한 인원도 이곳에는 없으며 제한적이다. 그런데 소련군 기록에 3000여 명이 전사했다고 하는데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전사에 기록에도 김포공항 탈환작전에서도 참여한 부대들의 인원이 대부분 전사했다고 하는데 그 처리과정에 대한 제보나 증언이 없다.
그렇다고 북한군이 가져갔을리는 없지않은가... .
"공항 활주로 밖에 논이 있는데 논골에 시신이 널려 있어 마을마다 강제로 부역에 참여하여 그 시체들을 다 논골이나 응덩이 같은 곳에 묻어버렸다. 지금 그곳이 활주로가 추가 된 곳이다."
현재 평창 방아다리골에 살고 있는 전쟁 미망인 한 분이 나를 찾아왔다. '07년 6월 6일이다.
현충일 행사가 끝나가고 잠시 행사장 정리를 하고 있는데 할머니 한 분이 찾아왔다고 한다. 그래서 안내를 하여 무슨 사연인지 알아 봤더니 전쟁 미망인으로써 남편 분이 수도사인데 평창-대관령 지구에서 전사했다는 것이다.
"내 남편의 이름은 이춘풍, 어떻게 뼈 한조각이라도 찾아주실 수 없나요?
"죄송 합니다. 확답을 드리지 못해서. 하지만 우린 열심히 찾을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니 내 남편이 정말로 어디서 전사했는지 무슨 기록이 없나요?'
"전사망 기록이 있습니다. 하지만 집으로 보내드린 자료와 같습니다. '51년 겨울전투에서 전사하였고 당시에 시신은 찾지못해 실종처리 되었다가 전사처리 되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 지금 할아버지 묘비가 현충원에 있잖아요. 어떻게 묘비가 세워지게 되었지요?"
"국군묘지가 만들어질 때는 유품만이라도 있으면 묘비를 세울 수 있게 해 주었어요."
기막힌 사연이 숨어 있다.
이 이야기는 차후 수도사단의 대관령지역 진출 작전간에 말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할머니의 또 기막힌 이야기를 하나 소개하려 한다.
"내가 직접 괭이 들고 남정네들과 시체치우는데 나가서 공산군은 끌어서 아무렇게나 논골이나 웅덩이에 집어 넣어버리고 국군은 정결하게 가지런히 묻도록 했어요."
"어디서 그런 부역을 하게 되었어요?"
"나도 몇십구 묻었어요. 비행장 안에."
"외발산동, 그러니까 지금 공수부대있는 자리와 비행장이 당시에는 활주로가 2개인데 지금은 4개잔하아요. 3/4번 활주로 자리가 논이였는데 그곳에 그렇게 많이 군인들이 죽어서 있었어요. 현재 강서구 구청일대 야산에도 많았어요. 그래서 동네마다 당시 내무서원들이 나서고 치안대가 설쳐대며 남녀노소 가리지않고 인원이 참여하여 너무 냄새가 심하게 나니 다 인접에 가매장 하게 했어요. 나도 괭이 들고 가서 몇 십구 묻었어요."
"아 그러세요. 정말 고생하셨네요. 혹시나 지금 비행장에 가시면 알겠어요?"
"얼마전에 가보니 할주로가 생겼고 논이 많았는데 잘 안보여요. 화곡동 그 구청 앞산에도 등산로가 생겼던데 그곳에 묘지들이 많이 있는데 몇군데는 아마 죽은 군인들 무덤일거예요."
할머니는 나를 따라 화곡동으로 와서 우장산일대의 현상을 기억을 더듬어 알려주고 다시 공항으로이동하여 공항뒤편 오정동 마을회관에 가서 동네분들과 이곳 사정에 대해 이야기를 교환하였다.
하지만 공항은 완전히 과거 논자리는 사라져버렸다.
동네에 아는 사람도 없다. 이야기만 흘러다니는 메아리로 남았다. 원혼들이 얼마나 안타깝겠는지 나라도 원한을 갔고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춘의산, 우장산 등 주변 산들을 찾아 다녔다.
그리고 외발산동의 공수부대 안의 야산들도 해당이 되고 구로구 궁동 뒷산에서 능고개로 올라가 고강동 뒷산까지 연결되는 능선을 타면 공항이 보이고 이곳이 전투지역의 일부다.
서쪽으로는 원미산과 춘의산이 있고 동쪽으로는 오류동에 과거 무의도에서 북한에 침투하는 특수부대를 양성하는 교육을 시키고 관장하던 공군 특수이무 부대가 있던 산이 잇는데 지금은 제일 평강교회에서 모든지역을 불하 받아 사용중인데 '실미도 사건'의 주체가 있었던 산도 전쟁터다.
이곳일대가 공항탈환작전을 위한 병력 집결과 기동로로써 이곳 전투에서 후퇴하여 대부분 부대들이 수원으로 가서 재편성하게 된다.
"초기 전투시 공항 탈환조 대원을 발굴하다."
우선 우린 궁동야산에 국군울 매장하는 것을 보았다는 민간인이 현장에서 만나기를 원하여 원각사로 가서 제보하신 분을 만났다. 이분이 나이 10살에 전쟁이 났다고 하는데 오류동에 살고 있으면서 피난을 집안이 떠나지 못하고 그대로 있으면서 북한치하 3개월을 경험했다고 한다.
전쟁이라지만 별로 싸우는 것 같지도 않고 탱크소리나고 포탄 몇발이 떨어지면 국군은 뒤로 물러나는데 이곳 원각사 뒷산은 공항을 공격하던 부대가 퇴각하면서 산 능선을 타고 가는데 부상당하여ㅕ 멀리 가지못하고 산에서 전사한 국군이란다.
"그럼 혹시나 누가 묻어주었는지 아시는지요?"
"무슨 소리야, 그때 누가 묻어. 그러다가 어떤 놈이 고자질하면 바로 대창으로 찔려서 죽는 마당에 이곳에 한참그대로 있었고 나는 무섭지도 않고 재미있어서 공항전투도 하는 것 다 보았고 군인들이 지금 부천 종합운동장 일원이 논인데 그 논바닥에 얼마나 죽어 있는지 대 낮에도 미친개들이 주둥이가 뻘겋게 되어 시신을 물어뜯고 다니고 여우들도 사람을 무서워 하지도 않고 힐끔힐끔 보면서 시신을 건드려요. 그러니 그 비참한 모습은 말로 표현 못하지."
"그러시면 이곳 일대라고 하는 것은 언제까지의 모습인지요?"
"전쟁이 끝나고 가보니 그 자리에 조그만 봉분이 있더라고. 그런데 지금까지 그 자리야. 이곳이 산악 쓰레기를 버리는 곳인데 누군가가 묻었다고 느낌이 와서 제보한거요."
우린 이곳에서 어ㅏㄴ전한 한구의 유해를 발굴 했다. 그것도 쓰레기 더미를 치우고 말이다.
살아서도 대우받지 못하고 죽어서는 쓰레기 더미밑에 깔려 계시다 이제야 햇빛을 보게되신 용사님께 정말 죄송하다고 경례를 올리고 하지만 용서해 달라고도 애원했다.
얼마 있어 이번에는 제61사단에서 연대장 한 분이 나를 좀 보자고 한다.
부천 작동의 마을회관에 가니 많은 마을사람들이 모여 있다.
이곳은 초기전투시 국군이 개활지를 횡단하여 후퇴해 나가고 북한군이 뒤따라 오는 곳이다. 따라서 큰 전투라기보다는 분대단위의 전투나 개인이 살아남기 위해서 피신해 가는 장소로 동네에서는 전쟁 자체에 대한 공포심이 정부가 계속ㅎ하여 북으로 진출하여 곧 평양 가고 신의주 간다는 식의 정부차원의 발표에 모두들 기다리다 갑작스레 북한군이 들어와 피난도 가지 못하고 있었다 한다.
그런데 군인들이 들이닥쳐 갑작스레 난리가 났지만 어린 아이들은 신기하여 부모님들의 만류에도 밖으로 나가 어떻게 전투하는지 구경하는 것이더 재미있었다 한다.
"민간인 복장으로 총을 들고 나타난 국군이 방안에 숨었다."
노인회장님이 본인이 본 전쟁상황을 재미있게 이야기하고다른 인원들이 보충하여 설명하는 식인데 어떻게 국군인지는 알았느냐는 질문에 총이 있는데 북한군이 민간인복장을 할리가 없을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럼 그 당시에는 북한군인지 아군인지 아니면 다른 민간인이거나 프락치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가 그 당시에 15에서 17살까지가 주로인데 더 많은 분들은 그 당시에 군에 갔거나 대부분 사망하였고 동네에는 아무도 없다. 특히 여기는 농업이었고 당시가 7월이라 그렇게 바쁘지는 않아서 어른들이 집에서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 이 일대의 사람들은 다 알고 있으니 모르는 사람이다. 그런 분이 집에 들어와 숨겨달라 하여 아버지가 창고에 있으라 했는데 이미 군인들 본대는 다 더나가 버리고 북한군이 판을 치고 다니고 집집마다 조사하러 다니고 있었다.
하루를 머물렀는데 아침 새벽에 혼자 출발하여 어둠속에서 사라져 갔는데 얼마 있어 뒤따르는 군인들 소리가 들리고 총소리가 났다. 그래서 가 보니 이미 죽어서 지금 가보면 알겠지만 야산 소나무 사이에 죽어있더라. 그래서 집에와 이야기 했더니 동네 사람들이 언제 인지는 모르지만 묻었다고 한다. 그 장소에 가보니 조그만 봉분같은 곳이 있었는데 지금은 민밑해져서 분간하기가 쉽지않다."
"그러시면 한 번 가보시죠."
우리는 동네 몇몇 분과 현장으로 연대장을 대동하여 함께 갔다.
간단한 제례를 올리고 기초굴토를 해보는데 탐지기에서 계속하여 발신음이 잡혀 분명 뭐가 있긴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못하게 한다.
"국군인지 적군이지 아니면 다른 신원이라면 어떻게 처리하나요?" 연대장의 질문이다.
"아군인지 적군이지는 발굴 되는 유품을 보고 대략적인 판단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더군다나 민간인 복장이었다 하나 매우 민감합니다. 원래는 이런 경우에 우리가 직접 발굴하는 것보다 해당지역 경찰에 신고하여 우리에게 협조가 오게하는 것이 정식계통인데 현재는 그 과정을 생략하여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등록된 묘지가 아니고 명확하게 지역주민들이 참전용사의 무덤이라 보증을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지금 보니 뭔가 군관련 유품이 나올 것 같은데 아무것도 없다면 그래도 증언에 의해서 무명용사님으로 처리하시는지요?"
"그렇습니다. 일단 발굴해 보면 어느정도 '남녀노소'에 대하여서는 바로 식별이 가능합니다.만약에 그럴리는 없겠지만 노인이나 여성, 아니면 어린이로 판별이 되면 해당 경찰에 신고하거나 이곳에 정중히 다시 매장해 드려야 합니다. 사건과 관련이 없는 상황이어야 하는데 기다려 봐야겠습니다."
드디어 유해의 모습이 나타난다. 소나무뿌리가 교묘하게도 유해를 비껴서 자리를 잡아 발굴하는데는 어렵지않았다. 발굴 되는 모습이 달려가다 넘어진 모습 그대로였다. 별로 유품이 나오진 않았는데 전투화 잔해와 칼빈 탄피와 수저가 나왔다.
우린 일단 무명요사로 분류하여 정밀감식을 의뢰하기로 하고 현장에서는 약식제례를 올렸다. 해당 연대장이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어 발굴기간중 계속 현장에 지켜있으면서 관심을 표했다. 나중에 보니 장군에 진급하고 외발산동에 있는 제1공수여단장까지 역임하고 퇴역하였다.
우린 김포공항 탈환작전에 관련된 전투지역과 오정동 마을회관 및 외발산동 마을 회관과 노인정을 샅샅이 찾아 다니며 해당 제보를 얻으려 했다.
김포비행장도 실제 들어가 현장을 확인했으며 김포평야와 개화산에는 거의 10여차례 조사했다.
5. 서울 철수 상황
가. 전사개요
북한군 제1군단이 김포, 금촌, 미아리로 서울로을 향해 지녁작전을 감행하고 있을 때에 28일 01:00경부터 북한군 제4사단을 지원하던 전차가 미아리 고개를 넘어섬으로써 국군의 방어선이 돌파되고 있었다. 서울 고수를 위한 최후 방어선의 붕괴를 의미하한다.
이 무렵인 28일 01:45경 채 총장은 강문봉 대령으로부터 적 전차가 시내가 진입했다는 것을 보고 받고 공병감 최 대령에게 즉시 한강에 가서 한강교를 폭파하라고 지시하고 육군본부를 더나 한강을 건너 시흥으로 향하였다.
한강교의 폭파는 이미 임진교의 파괴실패를 상기시키면서 한강교 폭파준비에 만전을 기하도록 이미 26일에 지시 되어 있었다.
명령을 받은 공병감은 28일 02: 20분경 공병학교장 엄홍섭 중령에게 폭파 명령을 하달 하였고 엄중령은 즉시 대기 중에 있던 황중위에게 장약점화를 지시하게 된다.
이들은 27일 15: 30까지 한강상의 5개 교량에 폭약설치를 완료하였다. 최 공병감은 총참모장 채장군으로부터 적이 서울시내 진입 2시간 전에 파괴하도록 지시를 받았기에 27일 16: 00을 폭파예정시간으로 준비를 하였다.
그러니 시흥으로 간 채총장 일행이 다시 육군본부로 복귀함에 따라 폭파부대는 다시 폭파장치를 일단 제거하였으며 다시 야간 23: 30분경 재차 준비명령을 받고 폭파장치를 설치하였다.
채총장이 다시 서울을 빠져 나간 직후에 미아리선에서 육군본부에 도착한 이응준, 유재흥, 이형근 장군등이 폭파명령 하달 소식을 듣고 참모부장 김백일 대령에게 병력이 철수한 후에 폭파하자고 요청하여 다시 김부장이 작전국장 장창국 대령에게 폭파 중지를 지시하고 장 국장이 지프를 타고 폭파 지휘부가 있는 남한강 파출소로 향했으나 강 북단에는 폭주하는 인원과 차량으로 진입핳 수가 없었다. 폭파 지휘부는 명령대로 28일 02: 20분경에 최대령이 엄 중ㄹ령에게 엄중령이 황 중위에게 장약점화를 지시하였으며 이 순간에 이시형 부통령의 차량이 통과하는 것이 마지막 이었다.
인도교와 3개의 철교에서 굉음과 함께 불꽃이 치솟았지만 경부선 복선철교와 경인선 상행 단선철교는 완전히 폭파되지 않아 후일 적의 전차 도강을 허용하게 되는 빌미가 되었다.
장대령이 현장에 도착하기 전에 폭파는 되었고 광진교는 이보다 1시간 반 뒤에 폭파되었다.
"전방에서 내려오던 병력과 장비등이 갈곳이 없이 되어버려 모두 버리고 몸만 살아가야 했다."
이로인해 다리위에 있던 500~800여 명의 피난민과 일부 군경이 피해를 입었고 북한강 파출소에 차량 40~50여 대의 차량이 대파되는 피해를 입었고 국군 주력부대의 퇴로가 차단되어 버린 순간이 되었다. 이제는 두가지의 갈림길에서 우리 군인들은 선택의 길에 두리번 거리게 되었다.
첫째는 끝까지 싸우다 전사하여 역사앞에 떳떳한 군인의 최후모습을 기록에 남기는 것이다.
이를 위해 지휘관들 중에는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마지막까지 가용한 도하수단을 찾아내어 목숨을 나누는 피맺힌 활동을 하기로 약속하고 움직이는 일행이다.
그래서 민간인 배를 찾고 공병여단에서 준비한 도하정은 극히 일부 높은 분(?)들이 이용하였다.
그리고 강 저편에서 재편성해야 하는데 이렇게 넘어가는 군인이 얼마 없어 사실 보병학교인 시흥에서 대부분 다시 재편성하여 한강선에 투입하게 된다.
둘째는 실리를 찾아 군복이뭐고 다 벗어 던져 버리고 민복으로 갈아 입고 지하로 숨어들던지 아니면 내려오는 북한군으로 들어가던지 선택은 자유였다.
"이 시간부로 부대를 해산한다. 각자 알아서 갈 길을 찾아 간다. 한강 이북에 집이 있는 사람은 집으로 가라. 한강 이북에 갈 곳이 없는 사람은 각 자 한강을 건너 시흥 보병 학교에 집결하라. 가급적이면 시흥보병학교에 집결하여 다시 만나자. 이상 끝. 각자 행동 개시"
봉일천에서 고양으로 내려서며 서울에서 시가전을 위해 진격한다던 제1사단, 그러나 사실은 높은 분들은 먼저 행주나루로 이동하여 떠나가고 갔다. 제13연대 제3대대 제12중대장 한인성 중위의 통곡이다.
앞에서 언급 되었듯이 당시 제1사단의 황대형 참전용사의 증언에서처럼 우리에 갇혀 있던 닭들이 자유를 얻어 흩어지듯 모두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6월 28일 저녁부터 6월 29일 아침 사이에는 각 부대가 행주와 이산포 부근에서 도선용 소형 선박들을 이용해 그런대로 한강을 도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서울이 함락된 다음날인 29일의 날이 밝자 적으로부터의 위험을 느낀 배들이 김포쪽 대안에서 차안으로 들어오지 않음으로써 각개행동으로 살아남아야 했으며 대다수의 병력이 적에 의해서 처참한 최후를 마친 것으로 추정된다.
황용사님은 다행이도 어느 주인집에서 옷을 얻어 입고 널빤지 한 장으로 개헤엄 반 잠수반으로 소리를 죽이며 도하하여 개화산 기슭에 도달했다고 한다.
이렇듯 국군의 제1,7,2,수도사단등이 이렇게 무너지고 해산되고 그래도 살아나 한강을 도하한 인원들은 또 다시 시흥 보병학교에 모여들어 다시 총을 들고 한강선 방어를 위해 전진해 올라 왔으니 뭐라고 높임 말을 해야할 지 모르겠다.
이렇듯 요행히도 한강을 도하해 철수한 병력 대부분의 집단이 혼성부대가 되어 지휘자가 없는 가운데 오합지졸이 되어 북한군의 먹잇감이 되어 버린 경우가 허다했다.
푸른 제복에 청춘을 묻고자 했으나 준비되지 못한 전쟁으로 인해 짧은 인생을 마칠 수밖에 없게 된 안타깝고 안타까운 순간이었다.
서울 도심에는 삼각지와 마포 방면에 수도사 예하 제18연대 제1대대가 적의 진출에 대비하고 있었고 중앙청 남산 마포에 대공사격반이 운용되고 삼각지에 배치된 부대가 57mm 대전차포로 접근하는 전차를 공격도 했다.
남산의 박명웅 소위조가 기관총 사격으로 적 전투기 YAK 1대를 격추시키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무렵 미아리방어선이 붕괴되면서 제5연대 제3대대의 일부 병력이 철수하다가 적전차 12대와 보병이 시내로 진입하는 것을 대전차 특공조를 운용하여 공격 하였고 남산에서는 시가전을 벌이다 이곳으로 모여든 장병들이 참모학교 이용문 대령의 지휘하에 백호부대라는 별칭으로 뭉쳐 항전하다 장렬히 전사하고 일부 생존자는 뒷날까지 유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서울대 병원에서는 1개 경비 소대원 전원이 그리고 입원환자 80여명이 전사 하였다."
비록 건제는 무너지고 지휘하는 상급 지휘관은 엇어도 우린 의병정신으로 북한군에 맞서 싸웠다.
입원환자까지 맞서 싸우니 그들은 부상병을 난사하여 다 죽이고 유해를 모아서 불질러 버리는 만행을 서슴치않았다.
그러니 그들은 서울에 들어온지 10시간이 넘어서야 한강선에 진출할 수가 있었다.
이동안에 철수부대들은 분산되어 광나루, 마포, 그리고 행주나루와 이산포에서 생가사의 사투로 한강을 넘어서야 했다. 많은 인원이 그러니 어떻게 되었겠는가, 8만의 지상군 전투병력이 3만으로 50%도 안되게 남아 미군의 참전소식에 고무적인 희망을 걸고 한강선에 혼성부대를 편성하여 제한적인 방어이지만 결사적으로 버티어 그들의 도하를 저지하였다.
인민군은 서울을 점령한 당일부터 공공기관을 장악하고 서울에 남아있는 각 정당 사회단체 등 각계 각층의 대표자들을 강제 동원하여 국유재산과 정부요인 및 자본가들의 사유재산을 모두 몰수하였다.
그들의 군사위원회는 점령지역에서 군수물자를구입하기 위한 것이라는 명목을 내세워 북한의 중앙은행권 1원에 남한권 8원으로 환율을 적용하고 남한권을 무제한 남발하여 화폐가치가 몰락하고 이로인해 물가가 폭등함으로써 시민생할에 위협을 초래하였다.
적은 시민ㄷ들 생계에 절실한 식량을 일반 시민들에게 동등하게 배급한다며 증록시켰으나 사실은 각 기관원이나 소위 의용군 유가족을 제외하고는 배급을 받지도 못했다.
적은 서울 시내에서 발간중인 각 신문을 모조리 폐간하는 대신 소위 해방일보, 조선인민보 등 공산계 신문을 등장시키고 관영언론 기관을 동원하여 기만선전을 되풀이 하였다.
이 무렵 문산으로 공격을 해온 북한군 제1사단과 제6사단(-)은 봉일천 선에서 서울로 압박을 가하고 있었으나 제1사단의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하였으며 김포반도로 남하한 북한군 제6사단은 김포비행장까지 진출하고 있었다.
한편 조공인 북한군 제2군단은 국군 제6사단의 선방으로 춘천과 홍천 말고개에서 지연되어 근본적인 한수이북에서의 포위소멸을 당성하려던 계획이 차질을 가져왔다
서울 실함시 전선은 김포-봉일천-서울-홍천-대관령-강릉선에서 유지되고 있었으며 북한군은 그들 계획대로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였으나 국군의 포위에는 실패하였고 또 그들이 믿었던 인민봉기가 일어나지도 안했다.
나. 당시 전투 참여자들의 증언
육본 작전국장 창창국의 증언이다.('77.2.27)
전쟁 초기의 작전지도와 당시 상황을 정리해 보면 한 마디로 작전지도 혹은 전쟁지도체계가 전혀 서 있지 않았다고 본다.
물론 그때 나를 포함해서 거의가 연소했고 또 전쟁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어떠한결심을 할 때에는 참모회의나 참모들의 판단에 의하지 않고 상급 지휘관이 단독으로 결심하여 실행했기 때문에 나쁜 결과를 가져 왔는지도 모른다.
당시 내가 작전국장이지만 참모부장이나 총참모장에게 건의한 것이 아니고 모두가 위에서 내려오기만 했는데 지금과 비교해 보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알기로는 한강교 폭파와 같은 큰 문제를 6월 28일 한강교 폭파 당시에 들은바에 의하면 어떠한 허ㅚ의도 없이 공병감 최창식 대령이 "서울의 일부에 적의 전차가 들어온 후 2시간 40분ㅇ니가 얼마 후에 한강교를 폭파해야 한다"는 건의를 했다는 말을 들었다.
이와 같은 최대령이 건의가 어느 부(국)에 속한 회의에서 이루어졌는지 알 수 없으며 작전국장인 나 자신도 거기에 참여한 일이 없고 또 누가 폭파를 결심했는지도 모르고 있다.
육군본부 철수에 관하여도 나 자신이 건의 하거나 판단한 바 없고 상부의 결심에 따를 뿐이고 27일 먼저 일부가 철수했을 때 김백일 참모부장이 불러서 올라가 보니 내일 아침이면 맥아더 사령부가 서울에 오니 다시 복귀 시키라는 지시로 27일 오후에 복귀 시켰는데 이로 인해 28일 02: 30분경 한강교가 폭파되었기 때문에 나는 이를 지연시키려 참모부장의 지시로 한강교 현장으로 달려 갔다.
그러나 물밀 듯 밀려나가는 피난 대열 때문에 한강 인도교 오구에서 더 이상 전진할 수가 없어서 하차 후 도보로 몇 발자국 걷자마자 쾅!하느 소리와 함께 한강교가 폭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서빙고쪽으로 올라가서 수명의 장병들과 함께 노가 없는 조각배 하나를 찾아 타고 물결따라 손바닥과 판자를 이용하여 해치면서 도강하여 지금의 노량진 한 강 수위측정소 근처에 닿게 되어 시흥으로 가게 되었다.
수도경비사령부 부관부보좌관 중위 선우 길영의 증언이다.('80.12.23)
"주요전투는?"
"수경사 상황실 근무, 노량진 및 진천전투 참가했다."
"전투 경과는?"
"6월24일 장퉁동 집에서 자고 25일 10시경 충무로 5가에서 병참대장을 만나 비상이라하여 집에 가서 옷 입고 12시경에 귀대했다. 25일 예하 부대인 제3연대와 제18연대가 의정부지역으로 투입되었고 26일부터 후방에서 부대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당시 제5사단의 부대는 대대별로 문산지구, 의정부지구, 가평지구로 분산 배치되어 연대본부 인원들은 갈 곳도 없어 우왕좌왕하는 것을 보았다.
낙오병이 계속 들어와 300~400명 정도 집결되었다. 27일에도 바쁜 하루를 보내고 의자에 앉아 잠이 들어 한강교 폭파소리도 못 들었다. 김응수 참모장이 나타나 적이 미아리선을 넘었고 한강교가 폭파되었다며 미알리 정찰을 간다고 나가 나도 낙오병과 행정병 10명을 데리고 제3연대로 걸어가니 아무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김포반도로 들어온 적이 아군퇴로를 차단하기 위하여 한강다리를 끊은 줄로 생각을 하고 강을 건너야겠다는 생각에 한가ㅏㅇ으로 내려갔더니 차안에는 배가 한 척도 없고 대안에 11척이 있어 보이는데 수영할 줄 아는 사람으 ㄹ나오라 하니 ㅇ무도 안나와 내가 직접 옷을 벗고 건너가 배와 노를 구해와서 15명을 태워 건너서 관악산으로 갔다.
안양으 ㄹ거쳐 다시 평택으로 가니 사단장이 이준식 장군으로 바뀌어 있었고 2~3ㅇㄹ 사이에 다시 김석원 장군으로 바뀌었다. 한강 이남에서 최초로 105mm곡사포의 지원을 받으며 진천의 봉화산과 문안산을 제1연대가 공격하였으며 제1연대장이 윤춘근인데 우리가 보은에 정찰중인데 그곳에 와서 "우리 연대가 어디에 있느냐?"고 어처구니없는 질문을 받았다.
수도사 제3연대 제1대대장 소령 임백진의 증언이다.('77.8.9)
6월25일 밤에 의정부 부근의 금오리에서 광릉으로 헐수하였는데 26일 새벽 0:00시에 광릉에 집결해보니 적이 벌써 휩쓸고 지난 뒤였다.
그래서 야간행동으로 북한강으로나가 배 2척을 구하여 30명씩 분승, 철야로 도하를 해서 양수리에 철수했다.
28일 세벽에 천호리족으로 나오다 광진교를 폭파하고 나오는 공병을 만나 차량으로 수원에 도착했다. 여기서 다시 과천으로 갔으며 29일 아침에 연대장 이상근 중령이 아프다고 수원으로 가고 부연대장 최수청 중령이 연대를 지휘하여 과천으로 올라와 말죽거리 정면의 낮은 고지를 공격하기도 하고 판교쪽으로 철수를 하다 최중령이 전사했지만 유해를 가지고 오지 못했다.
수도사 제8연대 부연대장 중령 이 현진의증언이다.(.65.11.18)
"6.25전쟁중 겪으신 경험담을 듣고자 합니다."
"제1연대 1개 대대를 제8연대장이 지휘햇습니다. 제2대대가 ㅓㅇ량리쪽에 배치되었습니다. 저는 적들이 태릉까지 들어올 때가지 몰랐습니다."
"그때 2대대장은 누구입니까?"
"제2대대장은 고백규 장군이고 내가 부연대장. 하나는 인천쪽으로 공격하고 하나는 시흥 남쪽으로 공격을 했습니다. 여기서 29일부터 7월2일까지 약 5일간 여기서 견제햇는데 그때 적의 공격으로 비행장을 몇 번 점령을 했느냐 할 것 같으면 다섯 번 점령당했습니다.
연대장이 직접 일선 장병과 같이 뚝에 있으면서 적이 다섯 번 공격해서 점령한 비행장을 다시금 공격해서 재탈환함으로써 적이 이지역을 침공 못했다는 것과 만약에 이 지역을 막지 못했다면 유엔군이 빠르게 증원되자 못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간을 얻는 것인데 그 시간을 여기서 지탱했다는 것 그래서 7월 2일난 아침까지 지탱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후퇴한 것이 7월 3일날쯤 될 것이 아닙니까?
"3일날 아침입니다. 적이 1개 연대하고 철교를 건너온 전차를 동반해서 제7사단이 있는 곳으로 그냥 넘어 왔습니다. 여기에 전술적으로 고려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때에 제7사단은 이 뚝에 연결하여 배치를 안했어요. 한강 뚝을 연결해서 배치해야 되는데 병력이 넘어올 때까지 여기에 병력이 없었습니다. 능선에 배치되었습니다. 높은데 배치한다고 해서 능선에 배치한 것이지요"
"주둔지는 어디입니까?"
"육군본주 자리이지요. 제8연대 주둔지에 수도사 사령부가 있었고 서울지구에는 우리 연대 밖에 없었습니다."
"제18연대도 수도사에 속해 있었는데요?"
"서울지구 경비 부대장에 내가 임명받았으니까 나보다 선임자가 있었으면 내가 받지 않았을 것 아니예요? 제18연대장은 임충식 장군인데."
"제3연대는 여군 훈련소 자리에 주둔하고 있었고요?"
"여군 훈련소자리가 그때는 기용부대(?)가 있었습니다."
"6.25전쟁이 났지요. 그래서 고급지휘관반이 해산되어 사단장, 연대장들이 다 돌아왓습니다. 그때는 바쁘니까 제18연대를 의정부로 보내고 제8연대만 남아 아무 부대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8연대를 어디로 보냈느냐 하면은 2개 대대 밖에 없었기 때문에 처음 출동을 춘천 방면으로 가라해서 차가 없어서 버스까지 동원하여 가평까지 갔습니다"
"실제 갔습니까?"
"연대가 전부 다 갔습니다. 가평경찰서에 가서 상황을 보니까 의정부가 더 바빴습니다. 서종철 장군이 직접 지휘하고 전화로 연락을 하니까 육군본부 작전참모가 강문봉 장군으로 기억하는데 다시 빠리 떠나라 이것이에요. 그래서 의정부방면으로 출동하였습니다."
"그 날로 돌아왔습까?"
"그 날 밤으로 돌아왔습니다. 25일 저녁까지 들어왔습니다. 26일 오후가 되어서 다시 명령이 내렸는데 의정부 방면에서 내려오는 부대가 많으니까 육군사관학교 쪽으로 들어온다 이것이에요. 그래서 농업시험장에서 광나루 다리있는 쪽에 2대대를 배치하고 그 나머지 1개 대대 병력은 대부분 휴가가고 없는데 육군본부를 경비하라 하였습니다"
"수도경비사령부 제8연대 제2대대 작전장교 대위 남상욱의 증언이다.('81.4.18)
"부대이동에 대하여?"
"6.25전쟁 전에 제6사닺 예속부대로 있다가 수도사단으로 예속이 변경되어 23일 강원 홍천 자은리를 떠났다. 23일 용문에 와서 하루저녁 자고 24일 기차로 용산에 도착하여 현 육군본부인 제18연대로 와서 군장을 풀고 그날을 보냈다. 서울에 집이 있는 사람은 외박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왜 노량진에 대대가 배치되었으며 누구의 명령으로 갔습니까?"
"연대장 명령으로 나갔다. 그곳에서 연대장 훈시도 있었다. 이유는 나도 잘 모른다."
"부대 배치는?"
"중대별로 경계병을 뱇치할 정도였다."
"가평 출동은 언제? 왜?"
"25일인지 26일인지 잘 모르겠다. 하여튼 저녁때 도착한ㄴ 것만은 틀림없다. 서울을 방어하기 위하여 춘천쪽에서 내려오는 적을 막기 위하여 떠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의정부가 급하다 하여 그날로 돌아왔다. 27일 오후에 처ㅓㅇ량리에 가서 부대를 배치했다. 제5중대는 서울위생병원이 있는 야산에 배치하고 중랑교까지 담당하도록 하였다.
제6,7중대는 경희대 뒷산인 143고지 능선에 배치했다. 28일 아침이 되어 제6중대, 제7중대지역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전투는 몇 시간이 계속 되어 중대에서 탄약이 떨어져 싸울 수 없다고 하여 보급장교인 방용을 중위가 대대가 가평에 있는 줄 알고 그곳으로 가다가 인민군에게 포로가 되어 보급지원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정보장교가 휘경동쪽으로 나가 소주 한잔하겠다고 나갔다가 포로가 되고 청량리역에도 인민군이 들어와 대대가 포위 되었다하여 대대장은 광나루로 철수를 명했다.
수도경비사령부 제8연대 제2대대 제8중대 소대장 중위 강영환의 증언이다.('81.3.17)
"부대이동에 대해서?"
"25일 새벽 06~07시에 비상이 걸렸다. 내가 그 날 일직근무를 하고 있었다. 38선에 적이 공격을 했다는 것이다. 나는 자은리에 있을 때에 흔히 있는 일이라 대수롭지않게 생각했는데 얼마가 지났는데 적 비행기가 와서 한강을 폭격한다는 것이다.
50mm 기관총을 막사 앞의 배수로에 거치하고 비행기가 또 오기를 기다리는데 오전 10시경 비행기가 왔다. 20발 쏜 것으로 생각되며 적기까지 미치지 못했다.
1시간이 지나고 나서 육본에서 기간총 20여 정을 가지고 와서 병력을 있는 대로 실으라 하여 중앙청과 경무대에 배치하고 1소대장인 황인건 중위가 한강에 나갔고 오후 2시경에 적 비행기가 나타나 한강에 폭격을 하기 시작하여 기관총으로 일제히 사격하여 적기에 명중, 김포가도에 추락하고 조종사는 낙하산으로 낙하하여 민가집에 숨었다가 잡혔다고 알고 있다. 이때 최초로 적기를 추락시킨 결과를 전과보고를 하지않아 훈장이나 표창을 받지 못했다.
"그 다음은?"
"25일은 그대로 보내고 26일 오후 5시경 가펴으로 출발하였다. 1,2소대는 가지않고 3소대만 갔다. 우리는 트럭 2대로 가펴으로 가서 가평에서 오른쪽으로들어가 밤나무가 많이 있는 밤나무골에 드어갔고 다른 중대는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도착하자마자 피곤하여 잠이 들었다가 철수지시가 있어 다시 부대로 돌아왔다.
27일 다시 청량리로 이동하여 회기동 파출소 근방에 도착하여 비가 내려 근처 민가에 들어갔다.
보초를 세우고 검문검색을 하여 피난민을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였는데 국군 3대 선서를 복창하라던가 애국가를 부르게 하고 직속상관 관등성명을 말하도록 하여 오열을 식별하도록 노력하였다.
28일 09~11시 사이에 적과의 교전이 시작되었고 지도도 없어 짐작으로 박격포는 쏘았다.
더 싸울 수가 없어서 철수하는데 포열이 달아서 수통물과 소변을 모아 겨우 식혀 철수를 시작하는데 이때 보도연맹이 팔에 완장을 하고 옆에 와서 있는데 몽둥이를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눈치를 보다가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 같았고산 너머에서 인민군이 오는 것이 보이는데 공포를 쏘아 그들이 따라오지 못하게 하고 광나루에 도착해 배에 물이 차면 철모로 물을 퍼내면서 도하하여 광주를 거쳐 수원에 가고 용인전투에 참가하고 오산으로 철수했다.
수도경비사령부 제8연대 제8중대 소대장 중위 김용건의 증언이다.('67.2.15)
"이동하여 부대를 서울 위생병원에 배치하는 날은?"
"27일이다, 그때까지 몰랐다. 알 재간이 없었다. 시내로 북한군이 시가행진으로 계속 남하했다.
"그렇게 무책임하게 다 도망갔군요?"
"그래서 알 수가 없어서 답십리로 해서 뚝섬으로 갔다. 그런데 답십리를 지나가는데 벌써 지방 빨갱이가 완장을 차고 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그놈들은 막대기를 들고 다니기 때문에 우리한테는 대들지못했다. 수원으로 갔다가 혼합편성되어 영등포로 왔는데 노량진에서 김포 가는 뚝방에 배치되어 2~3일 지탱했다. 마포쪽에서 박격포를 쏘면서 진격해 오는데 북한군이 영등포 시내에 왔다갔다 하고 적색분자들이 사복차람에 권총을 가지고 갑짜기 뻥뻥 쏘기 때문에 병사들이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고 하다가 분산 되었다.
수도경비사령부 제8연대 대전차포 중대장 중위 유기천의 증언이다.('80.12.11)
"대전차포 중대편성은?"
"중대는 3개 소대. 소대는 2개 분대로 편성되어 6개 분대이다. 중대 장비는 1개 분대당 57mm대전차포 1정이 있으며 3/4톤 차도 6대다.
그 외에 1/4톤 짚차 1대, GMC 트럭 4대, 3/4톤 무전차 1대, 인원은 160명 정도 였다.
"옹진에서 서울로 이동은 언제?"
"'49년 12웕에 LST로 옹진에서 서울로 왔다. 임무교대는 제17연대와 했다."
"서울에 와서 57밀리 사격 실시여부는?"
"경기도 광주 포사격 훈련장에서 했다. 조준 렌즈가 있어 57mm 대전차 포는 명중률이 좋았다. 이곳이 육군의 포사겨장으로 105mm포도 사격했다."
"대전차포 철갑탄은 보급 되었는가?"
"철갑탄은 없었다."
"6월25일 전투경과에 대하여?"
"6월25일이 나의 약혼 날이었다. 24일 밤에 영등포 처가에 가서 자고 25일 아침 8시경에 약혼반지를 맞추기 위해 밖으로 나오는데 전쟁이 발발 했다고 귀대하라는 가두방소을 듣고 약혼자와 헤어져 용산에 있는 부대로 왔다. 연대와 같이 출발하여 의정부에서 하루 밤을 자고 다음날 의정부에서 북서쪽으로 100리쯤 되는 곳에 대전차 포를 방열하고 잇는데 26일 12시가 좀 지나 적 T-34전차가 약 4Km 전방에서 사격을 하면서 내려오고 있었다.
얼마 후에 우리 보병이 내려오고 중대장이 연대에 가서 보고 하고 온다고 가버려 내가 부대를 지휘했다. 연대와도 연락 두절이고 중대를 지휘하여 의정부쪽으로 오다가 지서 경찰주임의 하는 말이 의정부가 적에게 점령당했다 하여 소로길로 경찰의 안내를 받아 빠져서 27이 ㄹ아침에 서대문 영천으로 왔다. 용산부대로 갈려고 하는데 헌병이 미아리로 가라고 곳곳에서 고함치고 있어 미아리로 향했으나 각종 차량과 포와 기타장비가 혼란을 이루어 정릉으로 빠져 방열하고 있다가 보병이 없으면 싸울 수 없음을 느끼괌 11시경에 연대본부(지금의 육본)로 돌아왔다.
새벽 3기쯤 폭음소리가 났는데 나중에 보니 한강교 폭파였으며 그로부터 약 20분 후에 전령이 명령을 가져왔는데 수도방위사령부 소속부대는 서울을 사수하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명령을 받고 도망가는냐, 사수하느냐의 2가지 문제를 가지고 망설이다가 한강을 도하할 것을 결심하고 포를 걸어 차를 몰아 한강교로 갔지만 이미 폭파되고 주변은 아수라장으로 부상당하여 살라달라 아우성치는 사람 죽어있는 사람등 비극의 참상이었다.
우리는 다시 영내로 들어와 삼각지 일원에 방열하여 적 전차를 사격하였으나 잠간 멈추더니 한강 쪽으로 지나가고 우리는 위치가 탄로나 적의 사격으로 탄약차도 완파되고 인원도 전사하였으며 우리는 미 8군을 경유 이태원으로 가서 민복으로 갈아입고 학생증을 가지고 인민군의 검문검색을 피하기도하고 그들은 무릎과 팔굽을 검사하여 군인을 가려내려 혈안이 되고 있었다.
동동 삼촌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마포로 나가 한강으 ㄹ건너려고 한는데 보도연맹이라는 자가 까다롭게 하자 당시 월급이 2000원인데 8000원을 주고 영등포에 계시는 아버지를 모시러 간다고 하여 한강을 건넜다. 가을 건너 여의도에 갔더니 진지공사를 하고 있는데 제18연대 3대대였다. 연대 김상사가 빨갱이라고 죽이려 했으나 마침 3대대장이 있어 곤란한 장면을 면하였다."
혼성 수도사단장 이종찬의 증언이다.('77.5.2)
6월28일 새벽 04시쯤에 서빙공에서 이형근 준장과 함께 나룻배로 한강을 건너, 동이 틀 무렵에 노량진으로 갔다. 10:00에 시흥의 보병학교에 갔더니 나를 혼성 수도사단으로 임명하였다. 지휘소를 우신 국민학교에 두고 있다 동양 맥주공장으로 옮기고 나중에 시흥으로 다시 이전했는데 ㄷㅇ시 사단은 김포가도의 제방에 일렬로 병력을 배치하여 여의도쪽에서 건너오는 적을 막았다.
사단의 병력이라야 제8연대 밖에 없었으며 제18연대의 1개 대대가 양허ㅏ교쪽을 막았는데 기갑연대의 장갑차가 지원되기도 했다.
당시에 내가 느낀바 중에서 가장 뼈아픈 것은 한강선에서 통제된 방어를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병력을 축차 투입한 것인데 건제를 무시한 혼성병력이라 사실상 부대의 전투략은 기대할 수 없는 상태였다.
수도사단 기갑연대 장갑중대 곽응철의 증언이다('65.12.8)
저희들 연대는 장갑 1개 대대와 기병 1개 대대, 도보 1개 대대로 주로 수색정찰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전쟁 직전까지 장갑 1개중대가 이북과의 가까운 지역주민들에게 안심하게 해 주기 위해서 우리가 무기가 있다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서 전방에 나가 있기도 했습니다.
최초로 적과 교전한 것은 ㅣㅁ포반도에 상륙한 적 부대를 맞았습니다. 9대가 1개 중대인데 김포가도로 나가는데 문산쪽에서 민간인 복장으로 철수하는 군인들로부터 적이 곧 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고깃배 모양의 보트 같은 것을 보았습니다. 장갑차에는 하력이 케리바 50과 37mm 전차포, 그리고 기관총 3대가 장비 되어 있는데 하력을로 상륙하는 보트 몇대를 침몰시킨 것 같아요. 그때는 몰랐는데 아침에 보니 적이 산곡대기에 다 올라왔어요.
치열한 전투를 하고 장갑차로 철수하여 김포비행장에 배치되었습니다.
오후 5시에 비행장에 있던 적이 저희들, 그리고 미군 비행기의 폭격에 의해 지리멸렬 상태에 들어가 노획품도 상당히 많았습니다.
기갑연대 소대장 유흥수의 증언이다.('66.12.6)
"부대를 어디서 수습하셨습니까?"
"후티할 때 본부에 화기소대가 하나 있었습니다. 연대본부 직속으로 화기소대가 있었는데 그 소대에는 81mm 박격포가 3문, 3.26인치하고 무반동포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기관총이 몇정있고 캐리바 50입니다. 그 다음에 수냉식 기관총이 있는데 이 소대는 제가 데리고 나갔습니다.
그런데 28일 날 아침에 또 장갑차 한 대를 연대장용을 제가 가지고 있었습니다. 28일 아침에 비가 그쳤는데 그때 보병학교 문 앞에서 복잡했는데 도로 옆에서 장갑차를 제가 타고서 내가 맨 뒤 골짜기를 담당하고 있을 테니까 빨리 나가라고 하고 있는데 그때 상당한 피난민들이 내려오고 부평에서 탄약과 무엇이 내려왔다고 해요.
거기에 있으니까 9시쯤으로 아는데 김백일 대령이 와서 노량진으로 나가서 쏘아라 했습니다.
무엇을 쏠까요? 했더니 마구 쏘아라 총소리만 나면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소 쏘고 있던 장갑차를 타고서 노량진에 와 보니까 노량진 수원지가 있는데 사무실의 유리가 다 날아가 버렸고 민가의 유리도 부서지고 수도 사무실에 들어가소 보니까 한강 북쪽에 기관총이 세 대인가 있어요.
쌍안경으로 보니까 그래요, 그래서 장갑차를 수도국 사무실보다 조금 뒤편인 영등포 쪽에 위치시켜 쏠려고 하니까 민간인이 나타나 의용군이라그래요. '노량진 고개 산에 있습니다.' 그래요. 그래서 그러면 내가 쏜 다음에 쏘아라 했더니 우리가 쏘고 뒤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그때 아군은 배치가 안되었지요?"
"그곳에는 없었습니다. 민간인 사복 입은 사람이 조금 있었습니다."
"사복 입은 사람이 낙오자들 아닙니까? 낙오자가 아니면 총이 어디서 있겠습니까?""
"낙오자는 아닌 것 같은데 저도 의심은 했는데 그렇다고 우리 뒤에서 쏜 것을 보면... . 그래서 그곳에서 몇 방으 ㄹ갈기고 다시 보병학교로 돌아와 박격포를 끌고 ㄴ나가서 노량진하고 영등포 중간지점에 삼각지 제2연대가 있던 제8군사령부에 조준을 해서 쏘았습니다.
29일날 경인데 박격포가 없어졌습니다.
각 사단에 배속 되었던 병력들은 빈손으로 들어오고 우리가 가지고 있던 장비를 잃어버렸는데 보고를 안했습니다.
어떻게 되었는냐 하니까 그때 제8연대장 서종철이 와서 몽땅 집어갔습니다. 후에 서종철이 자기기 박격포를 빼앗아 갔다는 것을 자기가 확실히 말했습니다. 아군끼리 중하기 쟁탈전을 했습니다.
29일날인가 장갑차 2대가 들어와 재편성햇는데 김백일 대령이 김포반도로 나가라하여 갔더니 게인주 대령이 김포반도 방위 사령관을 하고 있는데 4km쯤 앞으로 나가니까 아군이 있는데 제9기던가 생도들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총도 없이 맨 손으로 엎드려 있다가 박격포탄이 날아오면 밀려나고 하는데 대위 하나가 술에 만취가 되어 권총을 뽑아 가지고 이놈들 왜 후퇴하느냐 죽인다고 야단하는 것을 보고 돌아오니 계인주와 경찰들이 웅성거려 가보니 채총장이 나와 적이 어디 있느냐 아군은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 데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김백일 대령에게 아무것도 모르는 사령관 앞에는 안되겠습니다. 철수시키겠다고 하니 안된디고 했습니다. 명령이니 보내라 하여 보냈는데 거기거 자살한 우중령이 사령관이 되었습니다.
"비화같은 것이 없습니까?"
"요란한 것이 있는데."
"제1연대 하극상...?"
"그것이내 중대에서 났습니다. 그 날짜가 4월인가 5월달일 것입니다. 비화를 얘기한 것을 써 놓으면 재미 있을 것입니다. 임부택씨가 그때 부교 하사관이지요. 대대에서 인사계를 해씁니다. 입대해 들어오는 인원들 중에서 제일 왈가닥 같은 사람은 써비스 부대로 갔습니다, 얌전한 사람은 A중대 C중대로 보냈고 부량해 보이는 사람은 모두 저희 부대로 보냈습니다. 그러니까 항상 사고가 나는 것은 저희 중대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때 무엇이 논의 되었냐 하면 신탁통치 찬성, 반대 두 패로 나뉘어서 내무반에서 늘 싸움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우리는 빨갱이를 몰아내야 한다. 신탁통치 반대로 되었으니가 빨갱이를 몰아내야 된다고 해서 모의를 시작했는데 그때 장교중에 빨갱이가 들어와 있다고 해서 이것이 정일권 정위지요. 그래서 이것을 없애자는 모의가 되었다고 합니다
내가 하루는 주번사관을 하고 있는데 내무반이 뒤숭숭하여 꼼짝하지 말라고 돌아다니며 고함을 치고 했는데 조용해져서 이상하다고 내무반에 문을 열어 보니까 창문을 열고서 나갔습니다.
이놈들이 장교숙소를 습격 갔다고 해서 가 보니까 그때 정일권 정위가 매를 맞고 의무실에 와서 누워 있습니다ㅣ 그런데 나중에 사람들이 내가 선동을 해서 정일권씨를 몰아내려고 했다는 얘기를 하는데 전혀 사실무근이에요.
후에 보니까 그 주동자들이 좌익계열이었습니다. 좌익계열에서 똑똑한 사람을 몰아내기 위한 모의같았습니다."
제5사단 제15연대 제3대대 소령 최병순의 증언이다.('67.12.24)
"6.25전쟁 당시에 어디에 계셨습니까?"
"제15연대 제2대대장을 했습니다. 25일날 새벽에 나와서 26일날 적과정면으로 부딪힌 것이 아침 9시경입니다. 그때 문산 벌판에서2.36인치 로켓포와 대전차포 그것을 가지고 아주 치열하게 전투를 했고 그 이후에 대대가 한강을 맡고 있었는데."
"행주나루 건너서요?"
"아닙니다. 우리가 있던 것은 흑석동에 들어가는 길이 있잖아요. 노량진 수원지 흑석동으로 들어가는 길 그 봉우리를 맡고 있었습니다, 15연대 일부는 김포쪽을 맡고 일부는 여기에. 연대장은 성남중학교에 있었지요."
"교전을 치열하게 했지요?"
"29일날 저녁쯤 되었을 거에요. 적 1개 중대가 도하를 했는데 우리 진지내로 들어와 몽딸 전멸당했지요,그 이튼날 B-29가 서울에다 대대적으로 폭격을 했습니다. 적이 200여명 물에 빠져 죽고 무기를 7트럭 노획을 했으니까요."
"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우리가 문산 그곳에서 전쟁을 하지 못하고 당했지요. 적이 개성쪽에서 밀려왔지만 6월 25일 밤에 새벽에 나올 때가지 도하를 못했어요. 그래서 문산까지 오는데 하루가 걸렸어요.
적의 전차가 우리 전면에 나타났는데 18대입니다. 그때 생각으로는 M1총으로 쏘면 구멍이 뜷리고 로켓트포로 100야드거리에서 맞으면 완전히 지리멸렬해 지는 줄 알았어요.
전차가 18대 나오는데 적의 보병이 2개소대 엄호를 해서 나오고 적의 주력부대는 남으로 향해서 야산을 타고 강쪽으로 돌았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전차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다가 적이 돌아서 오는 것을 몰랐어요.
벌판이라 전차가 오는 것이 보이기 때문에 전차가 오는 길에다 150m간격으로 로켓트포 진지를 구축하고 숨어 있는 거에요. 그리고 그 밑에 대전차 포가 8문인가 있었어요. 그 뒤에 105mm가 6.7문 있었어요. 그래서 그것을 때리곤 했는데 맞지를 않아요. 교육이 잘 되어 50m 거리내에 오지 않은 것은 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놈들의 뒤에 오는 전차가 전부다 논밭으로 들어가서 기어 나오는 거에요. 그러니 이놈의 전차 6대가 로켓트포의 호 위에 있는거에요. 그래서 로켓트포 사수가 수류탄을 가지고 까집어 넣어서 전차를 3대 잡았어요.
그래서 뛰어가서 전차안에 다가 수류탄을 까집어 넣어라. 그랬습니다. 그곳에서 8대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순식간에 적의 보병이 옆으로 와서 압력을 가하고 전차 뒤에 적의 기마병이 나타나는 거에요. 그래서 연대에 보고 하니까 연대는 이미 이동중에 있었어요.
"거기서 중대장 누군가 전사 했습니까?"
"제6중대장인가 제7중대장인가 대위인데 전사했어요. 그때 왜 전사했느냐면 대대장이 저나 위에 올라가니까 다 잡은 둘 알고 중대를 지휘해서 잘 나갔어요. 그런데 적에게 걸린 것이지요. 그때 최영희 장군이나백선엽 장군이 내가 적의 탱쿠에 올라 가는 것을 보고 있었어요.
그 후 계속 후퇴를 해서 문산 밑에 역이 하나 있어서 쭉 걸어 내려 왔는데 부상자를 데리고 내려 오려니 상당히 힘이 들어 그냥 걸어서 내려와 문산역에 전화를 하니까 이북말이에요. 수색 사단에 전화를 하니 통하지 않고 그래요. 26일날 밤에 비가 많이 오는데 어느 집에 머물고 있는데 밤 11시쯤에 적 기마병이 나오는 거에요. 제11연대 제13연대 제15연대 이렇게 있었는데 부상병이 3천명 몰려 있었어요. 서울에 들어가려 하니까 이미 서울에 적이 들어왔다 하여 수색에서 도하하려다 조금 내려와 제2한강교와 영등포 중간쯤 해서 모래탑에 동그란 산이 있습니다. 그쪽으로 나갔어요.
그런데 그쪽으로 가보니 북한군들이 형무소의 죄수를 풀어주고 그사람들에게 총을 주어서 우리가 가니까 총을 쏘고 있어요.
나오는데 짚차에 엔진이 그대로 걸려진 채 팽개쳐 있고 그때 배가 없어서 건너지 못하고 집에 기둥을 빼서 위에서 나무를 띄워서 건너는 겁니다. 내가 총을 버린느 놈은 총살이라 하여 모두 휴대하고오후 4시인가 그때 다 건넜습니다.
"연대장은 다 갔지요?"
"그렇지요. 한강다리 끊어지기 전에 갔지. 내가건넜는데 수도방위사령부 2호차가인가 그것이 있어서 그 차를 타고 다니고 그때 동양맥주회사 지하에 가니 돈이 5,6가마 있었어요. 이걸 주고 물건을 사려하는데 받지를 않아서 가지고 다니기도 곤란하고 불에 태웠습니다.
시흥에 가서 재편성하여 유재흥 장군밑에 들어가 한강 방어선에 투입 되었던 것입니다."
제5사단 제15연대 제11중대 소대장 소위 박종순의증언이다.('81.1.21)
"전투에 참전한 날짜는?"
"나는 호국군 출신으로써 '50년 3월 시흥 보병학교에서 OBC 7기로 교육중 6.25전쟁이 발발했다. 다음날 나는 제15연대로 전속되어 용산역에 도착하여 제15연대장 최영희 대령에게 신고했다. 26일 09:00시의 일이다. 그런데 예비역에서 현역으로 편입한 일자가기록상에는 '50.7. 16일로 되어 있다. 후퇴하는 혼란 속에서 행정정리가 뒤따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로 말미암아 예현장교들이 실제 전투에 참가한 20일간이 정리 되지않아서 이 동안에 전사한 동료들은 군번도 없이 무명용사로 취급되어 버렸다.
"첫 전투지역은?"
"26일 용산역에 도착한 부대는 제15연대 본부와 제3대대였다. 이날 문산으로 열차로 이동하였으나 수색역에서 적기의 기습으로 걸어서 문산에 들어갔다.다시 금촌으로 내려와 119고지에 배치 되었거 27일 오후 적과 교전이 시작 되었다.
여기서 용감한 병사들이 수류탄으로 육탄 공격을 감행하여 적 전차 3대를 잡았고 약 2시간 이상 싸웠다. 그러던중 고립 되었는데 철수하라는데 어디로 오라가라 하는 말도 없었다. 28일 아침 수색에 도착하여 아군 보급품을 적재한 화차 속에서 건빵과 카라멜을 찾아내어 3끼를 긂은 배를 채웠다. 그러나 부근에 아군의 그림자도 없었다.
일단 서울로 가기로 하고 마포로 갔는데 시민들로 부터 한강교가 폭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강변에 가보니 마침 보트가 있기에 큰소리로 불러서 사공이 배를 몰고 와서 3회 왕복하여 영등포로 건너가 시흥 보병학교에 가서 원대와 합류했다."
"시흥에서 재편성하여 다음 한강에 배체돈 것으로 아는데?"
"28일 오후 늦게 한강변으로 북상한 바, 혼성된 우리 대대는 인도교 우측 흑석동 강변 일대에 진지를 구축 하였다. 대안에 적 전차가 출현하여 대대진지에 적지않은 포탄사격을 했다. 29일 우리 대대는 노량진으로 진지를 변환하였다. 이날 오후에 적은 보트로 타고 아군 진전으로 도하를 강행하여 18:00경 끝내 진지를 빼앗기고 말았다. 중대(대대)가 분산되어 중앙대 부근 주택가에 숨었다가 어둠을 이용하여 관악산으로 이동을 개시하는데 적이 이미 중앙대 뒷산도 점령하고 있었다.
행동 개시하여 움직이는데 산에 적 1개분대가 잠에 골아 떨어져 있어 수류탄으로 처치하고 동이틀 무렵 곤악산 기슭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긴장이 풀리어 잠이 들어버렸는데 누군가가 '손들어' 하는 소리에 눈을 떠보니 독전 헌병이었다. 상황을 설명하고 안양으로 가라하여 안양에서 연대 일부와 합류하여(30일 오후) 재편성한 다음에 부근 어느 고지(안양 동쪽)에 배치 되었는데 갑자기 아군 제트기의 기총소사로 적지않은 병력이 죽었다.
30일 저녁 우리대대는 오류동으로 이동하여 7월 1일 지금의 동양공대 뒷산을 발판으로 하여 북쪽으로 여명공격을ㄷ 감행했으나 적의 화력에 돈좌되고 논바닥에 엎드려 3~4시간을 보냈다.
고개만 들면 적탄에 쓰러지는 병사가 속출하고 여기서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리다가 안양-수원으로 철수해 갔다."
혼성 제7사단 작전참모 중령 박권근의 증언이다.('67.6.2)
"제7사단에서 작잔참모님 하시지 않았습니까?
"6월 8일인가 그랬을 것입니다. 전쟁 나고 3~4일 되었을 때 미아리에서. 미아리로 철수를 한 것이 6월 28일 일 겁니다. 그래서 미아리에서 철수해 광나루에서 그 다음에 국립묘지 앞으로 너머 갔지. 그래서 노량진에 와서 제7사단 CP가 여긴데 한강 방어를 하다가 한강 전면이 영등포로 들어가는 기차길 들어가는 곳에서부터 서빙고 맞은 편으로 해서 과천으로 들어가는 곳까지가 책임구역이에요.
"한강선 방어에서 얻은 교훈은?"
"야간에 북한군이 올 때 진지가 노출되었으니까 아주 방어를 잘못했어요. 당시 전투란 한 마디로 엉망이에요. 당시에 무슨 화력이 있나. 운용할 예비대가 있나. 통신망이 있나. 인접부대와는 고사하고 상하의 연락ㄷ조차도 되지 않았다. 당시 병사들의 고충은 더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잊을 수 없는 일이 하나 있다.
사단 지휘소가 있는 서울공고자리에서 철수할 때인데 그 곁에 벽돌공장과 개천이 하나 있었다. 적의 포탄이 떨어져서 길을 막고 있는데 개천을 따라 가다 보니 그 개울가에 어떤 병사 두 사람이 복부에 파편을 맞았는지 선혈이 낭자한 가운데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하게 앉아 있었다. 나를 보더니 자기들은 제1연대 소속의 아무 아무개인데 이제 여기서 죽게 되었으니 뒤에라도 자기 부대를 만나거든 그곳에서 전사했다는 것을 전해달라고 했다.
포탄이 떨어지고 달리 사람을 구할 길이 없어. 나는 눈물을 흘리면서 그곳을 떠났는데 그들은 서로가 얼싸안고 '여기가 우리의 무덤이네' 하고 위로 하면서 군가를 부르기도 했다.
그때 그 병사들이 부르던 군가 소리가 지금까지 내 귀에 쟁쟁하다. 내가 군대 생활을 통해서 남은 한가지 한이 있다면 그때 그 병사들을 구해주지 못한 것이다. 당시의 병사들의 기개는 참으로 훌륭했다고 생각한다."
제7사단 제9연대 통신대장 중위 유한종의 증언이다.('66.2.8)
"그때 어떻게 했습니까?"
"그때 애기는 할 것도 없어. 그냥 밀려 내려가 버리는 거지. 어디나 다 그랬으니까."
"어디서 부상당했습니까? 중앙대학교 뒷 고지겠지요?"
"한강 모래사장이 보이는 고지가 모래사장 앞에 고지가 또 하나 있었어 그래서 거기서 부상당했는데 지금도 파편이 들어가 있고 그때 재미난 이야기가 하나 있지. '사병 하나가 일을 보고 있는데 급하니까 조금 떨어져 용변을 보는데 포탄이 5m쯤 떨어졌는데 불발탄이야. 그래서 이 사병이 용변을 다 보더니 돌아오다가 기절을 했어. 용변 볼 때는 참고 있다가 우리에게 오더니 그냥 쓰러진거야. 그래서 나는 그 후에 부상을 당해 병사 두명이 업고 가는데 민가를 지나는데 기운 센 놈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총을 겨누니까 이 놈이 대한민국을 절대 지지해요. 이놈들이 업고 두명이 호위하고 연대의무대로 가 무장해제하고 그런데 그때는 피난민들이 자꾸 나와요. 위험하다고 오지 말라해도 자꾸 오는데 적이 같이 와요. 그래서 수류탄 전지지. 그래도 올라오니까 우리진지인데 하나하나 조사를 했지. 그때 피난민들은 돈도 가지고 오거든. 그때 돈 뺏길까 싶어서 어쩔줄 모르더군."
"어느 병원에?"
"야전 병원이 아니고 연대 구호소는 지나버려 사단 구호소로 갔는데 담배 하나 달라고 해서 빨다가 기절해 버렸는데 죽은 줄 알고 담요를 덮어버렸데. 그런데 철수하는데 살아난거야. 그래서 당까에 얹힌 채 화차에 실려 대전으로갔지. 거기서 할머니가 나도 봐주고 다리가 날아간 처녀도 봐주고. 그러다 광주로 가서 비행장에 하룻밤 자는데 여자는 죽고 거기서 장교가 한 20명 되는데 여자들 한 60명이 발씻어 주고 그랬어. 간호하던 애들이 그대로 진주로 해서 마산으로 부산으로 갔지. 그냥 석어가는 채로 부산 부둣가에 내려 병원으로 갔지. 여기서 치료가 잘 되어 제9사단으로 조치되었지."
제10연대 제3대대 제12중대 구종철의 증언이다.('66.9.5)
"몇 연대에 있었습니까?"
"제10연대 제3대대 제12중대에 있엇습니다. 시흥에서 재편성을 한다고 했을때 8명을 데리고 서울 시내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한강 다리가끊어졌다고 하여 겨우 도강하여 효창공원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여대생들이 모여서 동무들 뭐 하냐면서 선동을 하는 겁니다. 인민군하고 교전을 한 번 해보고 싶었는데 일제히 총을 쏘고 뛰었습니다. 그러다 잡혀서 숙대 강당으로 끌려갔습니다.
소가죽 끈으로 묶어놓고 강당문을 잠그는 겁니다. 그리고 주먹밥 하나씩 주는데 멸치 꽁댕이 하나씩 주는 겁니다. 그때 내 나이가 20살인데 몇 연대에 있었느냐고 물어요. 그래서 제21연대 부연대장이라고 이야기를 했어요. 내일이면 심판을 받으러 간다고하는데 그 다음날 되니까 우리를 아군 도요다에 태우고 중앙청 지하로 갔습니다.
그런데 옆에서 무조건 데리고 나가라고 해서 다시 그리 끌려 왔습니다. 그래서 그날 밤에 탈출을 햇습니다. 강당문이 하나 있는데 오래 되니까 앉아서 자더군요. 그래서 박상병이 살살 기어가서 입을 막고 총으로 가슴을 찔러서 죽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효창공원 오리나무가 있는 곳으로 가서 하룻밤을 자고 안전히 다 넘어 왔습니다.
보병학교 심유선의 증언이다.('66.7.12)
"전투때 하신 것을 말씀해 주세요."
"6.25전쟁 당시에 시흥에 있는 보병학교 후보생으로 있었다. 6월 28일 04시경에 출동을 김포반도 쪽으로 나가 적과 싸우면서 천안까지 내려왔습니다. 그 다음에 다시 후보생 교육을 한다고 해서 전주로 전부 내려갔다.
"시흥에서 출동할 때 장비는?"
"99식 소총을 가지고 갔다. 그러다 3.4 일째 되는 날 미군 공군기들이 와서 M1 소총을 공중 투하해 주어서 그 다음부터 M1 소총을 가지고 전투했다.
"지휘는 누가 했습니까?"
"우리 소대장들은 후보생때 소대장 하던 사람인데 한 분은 임억재 소령이고 한 분은 엄경호 소위였다. 대대장은 그 다음날 김포반도에서 전사 했다. 후보생들이라 경험부족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포병학교 정보과 보좌관 중위 오예식의 증언이다.('81.2.16)
"포병학교 위치는?"
"미군 포병이 최초에 영등포에 있었는데 철수할 때 한국측에서 인수받아 장은산 대령이 포병사령관이 되었다. '50년 봄에 용산으로 이동하면서 백웅부대라 하고 포병학교로 명칭을 바꾸었다. 하교장은 신태영의 아들 신응균 준장이 맡았고 부교장에 김계원 대령이 보직 되었다.
"당시 포병의 편성과 임무는?"
"부대를 현성하여 교육하여 전방 사단에 보내는 일이었다. 당시에 서북 청년단이 많이 지원해 들어왔다. 105mm 6개 대대와 57mm 대전차포 2개 대대를 교육시켜 포병학교에 105mm 1개 대대와 57mm 대전차포 1개 대대를 교도연대에 남겨 놓고 5개 포병부대는 옹진의 제17연대와 전방 사단에 각 1개 대대식 보냈고 57mm는 잘 모르겠다.
사격술은 광주에 있는 남한산성에서 실시 했다.
"전투과정에 대해서는?"
"26일 육본지시에 따라 학교는 학도연대의 2개 포 대대를 전방으로 보냈다. 105mm 곡사포 대대는 1개 포대를 문산방면, 1개 포대를 의정부방면, 1개 포대를 포천방면으로 분산 배치하였다. 대전차포는 어떻게 배치 했는지 잘 모른다.
6월 26일 오후부터는 각 방면에 나가 있는 장교들이 하나둘씩 까만 얼굴과 흙과 따믕로 올룩진 작업복으로 또는 카키복에 정모를 쓴 채 맥없이 면목없는 모습으로 학교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모두 유구무언이다. 분함을 참지 못하여 책상을 치며 통곡하는 장교도 있었다. 어떤 장교는 "고문관 매쾌린 소령 나쁜 자식이다. 미국 놈은 나쁜 놈들이다. 30리 밖에 못 미치는 작은 포에다 철갑탄은 안주고 순발신거ㅘㄴ만 주고서 이것을 가지고 대전차작전을 하다보니 내 부하만 죽였다"며 통곡하기도 했다.
6월 27일 오후에 옹진포대의 포대장인 김수산 대위가 학교본부에 도착했다. 김대위는 상황이 급해지자 포와 포탄은 바다에 버리고 포차는 불을 지르고 어선을 동원하여 후퇴했다 하며 통곡했다.
대대장 박정호 소령은 부하들을 해상으로 철수시키느라고 최후까지 남아서 지휘했다. 그 영감이 통곡하던 그 모습에 내 가슴이 뭉클함을 금할 수가 없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박정호 소령은 포로 교환때 없었ㄴㄴ데 포로로 있을 때에 장교의 신분을 숨기고 운전사 행세를 하였다 한다. 결국은 신분이 노출 되어 처형 되었거나 강제 노동에 보내졌을 것이라 한다.
27일 비보가 왔다. 의정부쪽으로 출동했던 A포대의 장세풍 대위가 대전차포격전을 하다가 전사했고 김풍익 소령도 장대위와 같이 1개 분대를 직접 인솔하여 부하들이 말리는 것도 거부하고 적의 전차에 대전차 사격을 하다가 전멸했다는 것이다. 정말 슬프고 분통한 일이었다.
28일은 비가 언제 왔느냐는 듯 맑게 개였다. 오전 10:00경부터 학교장, 이기동중령 드이 안양국민학교에 도착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노소동 중위는 3/4톤 차량을 타고 왓는데 어떻게 왔느냐고 물으리 바퀴타이어를 빼고 레루를 타고 철교로 왔다고 하였다. 학교장이하 여러 장교들은 철교로 걸어왔다. 그 후 수원으로 갔다.
육군본부는 일제때 제2지원병 훈련소였던 농업시험장 자리에 들어가 있고 이곳은 이범석의 대동청년단 훈련소가 위치하고 잇었다. 제1지원병 훈련소는 지금의 태릉 사관학교 자리이다.
이동중 평택에서 하룻밤을 자게 되는데 우리는 학교에서 주둔하게 되는데 그 학교 뒤에 교회가 있고 촛불이 켜 있어 가 보니 목사 혼자서 교회를 지키고 있었다.
대화중에 이 동네에 보도연맹이 3명이 있는데 북한군이 빨리 오기만을 기다린다고 한다.
그래서 선임하사에게 사보ㅗㄱ을 하고 서을 중앙당에서 왔다고 하고 사상이 어느정도인지 알아보도록 했는데 나머지 사람은 기다리다 못해 서울로 올라갔다고 하고 좋아한다.
그 당시에 북한군은 유격군을 후방에 사복을 입고 침투하여 교란작전을 하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그날밤 24:00경 처단하게 되었다.
이 총소리에 놀라 게릴라가 동네에 기습해 온 것으로 착각하여 난리가 나 대피소동이 벌어졌다고 한다. 우리가 학교로 돌아와 찾으니 아무도 없다. 이곳 저곳을 다니며 찾으니 웃지 못할 가관이었다.
책상 밑에 숨어 잇는 사람, 다락에 숨어 있는 사람, 이불을 둘러쓰고 있는 사람, 변소에 숨어 있는 사람, 취사장에 가니 쌀가마니를 피라미드형으로 만들어 그 가운데 숨어 있는 사람 등 웃어 넘길 수 없는 현상이었다.
그 다음날 대전으로 내려갔다. 그곳에 가니 미국으로 유학갔던 신응균 장군, 심흥선 대령,,강관영 대위 등이 귀국해 와 있었다. 대전에서 공수되는 M2 신형 105mm 곡사포를 인수하기로 했는데 비행장 사정 간계로 대구로 이동하여 대구 경북여고 자리를 잡고 들어가 대구 동촌비행장으로 도착하는 대포를 받아 대구에서 중고등학생을 보충받아 신병교육을 해서 전방으로 배속시켰다.
나는 전방부대에 나가 싸우고 싶었다.
그래서 1950년 7월에 50대대를 편성해서 제8사단에 배속하게 되어 대대 S-2로 보직받게 되었다.
우리가 하양국민학교에서 영천 시내로 무거ㅘㄴ측 사격을 가하고 공중 포격을 심하게 했는지 영천시내로 진격했을 때 보니 북한군 시체가 거리는 물론 부엌아궁이, 광, 마루밑 등 여기저기에서 썩어가 그 악취가 영천시내를 뒤덮었다.
육군본부 공병감실 계힉과장 소령 유완식의 증언이다.
"공병감실에서 여러가지 하신 일이 많으실텐데 말씀해 주세요."
"우리가 6월 25일 아침에 비상이 걸렸어요. 그때 내가 삼각지 관사에 있다가 부대로 복귀하였다.
지역별로 주요 도로들은 철수계획이 있는데 적의 침공을 저지하기 위하여 교량을 폭파한다는 등 한강교가지 폭파계획이 다 수립 되어 있었다.
하지만 어느 시기에 어떻게 한다는 것이 상세하게 되어있지 않았다.
그래서 28일 날 한강교가 폭파되지 않았어요. 새벽에 폭파 되었는데 그 27일 날 맥아더 사령부에서 무엇이라고 연락이 왔느냐면 B29 50대를 출동시켜서 인민군을 폭격할테니가 서울을 사수하라 이렇게 되었습니다. 채병덕 장군이 상당히 뚱뚱하니까 자칫하면 좀 피곤해 하가든. 그래서 가장 정력적인 분이 김백일 장군이었어요. 그래서 김백일 장군이 참모회의를 소집해서 그런 얘기를 전달하고 작전지시를 하곤 하였습니다.
"오전에 했습니까?"
"이것이 맥아더 사령부에서 온 것이 26일 오후 7시경인가 그랬어요. 그래서 회의가 소집되어 사수하라. 그래서 그때 채병덕 장군도 기뻐하시고 이렇게 와서 폭격해 주면 우리가 저지할 수 있을 것 아니냐.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육군은 측지부대가 있었어요. 그 전 일본군이 가지고 있던 지도를 전부다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가지고 한강 이남으로 철수했어요. KMAG도 다시 돌아오는 바람에 다시 들어왔지요. 그때 시흥까지인가 가지고 나갔는데 28일날 아침에 폭파되는 바람에 지도 한 장 없이 작전하지 않으면 안될 그런 입장이 되었지요. 그리고 나는 병력 철수를 확인하고 나눗배를 전부 집결시켰어요. 어디에 집결했느냐면 한 강 그 남쪽에 전부다 집결했는데 한강교가 폭파되는 바람에 이곳이 다 날아가 버렸어요 그 당시에 공병이 가지고 있던 일본식 장비가 있는데 그것이 몇 개가 남아 있었어요. 내 자신이 공병이지만 한강교가 폭파된 이후에 육군본부에 연락할 일 때문에 이 주대라는 것을 타고 갔다 왔어요. 시흥으로 이동했지요. 그리고 이동한 곳이 수원입니다.
육군본부 공병감실 측지장교 소위 차재웅의증언이다.('66.5.19)
"공병으로 계시면서 어디에 계셨습니까?"
"육군본부 측지감실에 있었는데."
"그때 얘기를 해 주십시요."
"그때 측지감실에서 한국군의 지도를 만들어 보급했는데 그때는 지금과 달라서 지금은 지도가 사진화 되어서 나오는데 그때는 원판을 만들어 도장찍듯이 나오는데 그것이 지도의 주종이 되었지요. 그때 그것을 한강변에 내버리고 갔어요. 못 가지고 건너가서. 한강교가 폭파되어 배가 없어서 다 내던지고 몸뚱이만 나가게 되었어요. 그때 당시에 그 지도가 없어져 버렸는대 미국사람들이 지도보급 못했으면 전쟁 못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군요?"
"전쟁 못했다는 말은 전쟁에 패한 것이다 하는 것과 똑같은 말이지요. 그때 가지고 나왔다가 최공병감이 다시 들어가라 해서 들어왔지요. 그래놓고 '지도 가져와라. 없습니다. 왜 없느냐 이런 지경입니다. 당신네들 맘대로 다리끊어 놓고 어떻게 하느냐 그때 높은 사람들이 대개 지도를 찾아요. 그러니까 부대가 망해 버린 것이지요.'
그래서 그때 정보국장이 4천만원인가 돈을 대전에서 수표 일부, 현금 일부 해서 돈을 줄테니 어떤 방법으로든 박으라. 그러니까 원판이 있어야 있어야 지도를 찍을 수 있을 것 아니에요. 부산 내려가서 이것 저것 모아서 찍어보았으나 알아볼 수 없을 정도 였습니다.
"그러면 지도가 정상적으로 보급된 것은?"
"그때 전부 미국사람으로부터 보급을 얻어 썼어요. 그러다가 일본에 있는 극동군 지도부에서 원판을 빌려다가 찍을 때부터 정상보급을 했으니 전쟁 나고 2년 후지요.
공병학교 등 한강교 폭파관련 여럿의 증언이다.
공병학교 폭파 교관 이창복의 증언이다('77.3.8)
26일 다른 사람들은 전차 육탄공격하러 나갔고 우리는 남아 있었는데 11:00시경에 육군본부 공경감실에서 오라해서 가니까 '한강교 폭파 정찰을 해오라'하는 것이었다.
정찰하고 오니까 13:00시경이다. 폭약량을 산출해서 내니까 27일 10:00시에 한강 인도교 건너편 노량진쪽에서 대기하면 제1공병단에서 폭약을 싣고 오면 그것을 인수해서 한강교에 장진하라는 것이었다.
폭파준비를 완료하고 있을 때 김백일참모부장이 와서 하는 말이 "이 교량은 총참ㅁ장이나 나 아니면 최창식 대령 그 다음에 공병학교 교장의 명에 의해서만 끊어라"고 하였다.
교량폭파는 칼빈소총을 연발로 발사후 후레쉬라이트를 흔들어 신호하기로 되어 있는데 나는 두가지 다 듣지도 보지도 못했고인도교가 폭파 된느 소리에 알았고 임흥순 중위가 마침 와서 '철교를 끊어라'하여 점화를 했으나 폭파되지 않았다.
병사들을 대기시켜 놓고 임중위와 가 보니 뇌관만 터졌다. 다시 뇌관을 갈아 끼고 점화를 하여 폭파시켰는데 완전히 끊어지진 않았다.
공병학교 교도대대 대대장 김재식의 증언이다.('77.3.6)
우리는 장전을 하다가 YAK기의 공격을 받은 일이 있었으나 장진은 쉽게 끊났다.
그러나 이날 오후에 반격을 한다해서 폭파를 하느니 안하느니 하다가 차량안에서 대기하고 있는데 밤중에 공병감이 왔다는 것이다.(이때 미군이 참전한다는 서식에 철수했던 육군본부 일부가 다시 복귀하였다.)
밖에는 비가 오는데 왁자지껄하여 나가보니 공병감이 "적이 오는데 무얼 하느냐"며 야단을 치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적의 전차다. 빨리 폭파하라"고 명령하는 것이였다.
공병학교 전기과 과장 황원회의증언이다.('64.10.16)
6.25전쟁이 날 때에는 공병학교가 남산에 위치해서 공병감실 지시를 받았다.
의정부 상황이 좋아졌다고 일단 철수를 했습니다. 완전히 철수를 한 것이 아니고 대기하고 있었는데 상황이 나빴으며 그때 인민군 비행기가 한강에 하나 떨어졌다. 오스트레일리아 비행기 2대가 격추하여 동작동 앞 한강에 떨어져 그때 들어가 인민군을 건져냈는데 머리를 맞아서 엉망이 되었다.
그래서 밤에 비가 부슬부슬 오는데 너무 피곤해서 졸고 있는데 사병이 와서 깨우기에 보니 공병 공병 하고 찾기에 나가 보니 최공병감하고 엄홍섭 학교장이 왔다.
인도교 쪽으로 사람이 몰려드는데 총으로 쏘고해도 몰려들었다. 그때 점화하려고 할때에 이시영 부통령이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맨 마중에 지나갔고 내가 직접 차를 세우고 확인했다. 그 후로는 차량 하나 사람 하나 인도교로 지나간 사람이 없다,
"북쪽에 헌병이 배치되어 피난민을 막았군요?"
"네. 그렇게 한 것이지요. 다 후퇴해 버릴 때니까 잘 모를 겁니다. 끊어진 교량에서 사람이 많이 죽었다고 하는 것은 그때 이단하와 김삼룡도 여기서 헌병이 죽였습니다 형무소에서 데리고 나와서 한강에 와서 많이 죽였습니다,
"뒤에 차가 많이 있었던것은 사실 아닙니까?"
"네. 그것은 사실이다. 다리를 끊고 제일 먼저 헤엄쳐 나온 것이 미군인데 극동담당 무슨 기관원이데 아주 중요한 사람인 모양이었다. 큰 개를 한 마리 붙들고 나왔다. 나와서 삼각지 어느 집에 중요한 공중 촬영 사진이 있는데 갖다 주던지 그렇지 못하면 태워버리든지 하면서 수원까지 내려갈 차를 좀 달라고 하며 자기가 동경까지 가면 곧 비행기를 보낼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차를 주었더니 가서 쎄단차를 보내왔다."
다. 관련된 내용분석과 지형 탐사
이상의 내용이 서울 철수와 관련된 그 당시의 주요한 몇몇 인원의 증언을 살펴 보았다.
직접 그 당시를 경험하지 않은 내가 무엇이 틀렸다 맞다하는 것은 위험한 판단이란 생각이 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의 낮은 계급 군인은 정말 용감하게 잘 싸웠다는 것이다.
문제는 별로 나이차이도 없으면서 높은 계급인 대대장 이상 지휘관들의 소위 전술능력 부족과 사명감이나 책임감이 너무 미약한 것, 나아가 병력을 놓고 본인들만 한강을 건너가 버리는 있을 수 없는 행태가 고스란히 이 서울 철수작전간에 다 노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사실 탱크를 잡을 무기가 없었다고 하지만 문산일원에서 제15연대의 육탄공격이나 재래식 공격으로도 얼마든지 전차를 무력화 시키고 진출을 지연시키는 역할을 다 했다.
하지만 의정부 축선의 부대들은 그런 능력이나 지휘통제가 부족해서서울로의 진출을 너무 쉽게 허용하고 말았다고 한다면 지금 하늘에 있는 그 당시에 전사한 인원들이 나에게 뭐라고할지 두려워 진다. 또한 공과 사실에 있어서도 사실 제1사단의 공이 너무 포장이 되고 그 당시에 제5사단 제15연대(나중에 제1사단 제13연대로 통합이 되지만)의 분전은 대단했다고 보여진다.
그런데 왜 전사에는 적의 탱크는 무법자처럼 묘사하고 있을까?
혹시라도 여기 등장하는 증언하는 분들이 과장해서 그런 말을 했을까?
여기서 '소련 군사고문단장 라주바예프의 전쟁 보고서'를 통해 서울 함락까지의 그들의 제1단계 작전결과에 대한 내용을 들야다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6월27일 아침 9시에 제3 및 제4보병사단과 제105땅크여단이 공격으로 전환한다.
그당시에 제4사단은 수유리에 제105땅크여단은 정릉 유원지 입구에 제3사단은 청량리부근을 확보한 후에 밤 11시에는 광진구 화양동부근을 점령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6월28일 새벽에 보병은 서울의불암산(527고지)을 확보하고 4시 30분부터 30분간 공격준비 사격을 하여 동북방으로부터 서울로 진입하였다.
새벽 6시에 서울로 진입한 땅크여단은 방송국, 우체국, 전신국 및 여타 행정기관을 점령하고 아침 8시에 제4보병사단 제18연대가 서울 북쪽 변두리를 그리고 주력은 서울의 북부와 중심지역을 점령하였다. 제3사단은 서울을 남쪽으로 우회하여 오후 4시 무렵에 이촌동, 한강교와 지금의 원효대교 사이를 점령하게 된다.
이때 국군은 전투장비와 탄약을 버린 채 한강 남쪽으로 황급히 퇴각 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북한군의 각 사단장들은 서울에서 퇴각하는 적을 적극적으로 추격하거나 한강 도선장을 점령하지는 않은 채,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모호하게 행동하였다. 또한 제105ㄸ아크여단 예하부대들도 서울을 점령한 후 3일동안 적을 추격하지 않은 채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음으러써 우리에게 한강의 남쪽 강변을 강화하고 교량을 파괴할 수 있는 여유를 주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땅크여단은 7월 1일에 사단으로 개칭하였으며 우리의 포격과 사격으로 막대한 손실을 입으며 한강을 도하 강의 남쪽 강변에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이 과정에 병력의 약 35%가 전사 혹은 부상당하였다고 한다. 다른 부대들의 도하 역시 7월 3일 야간에서야 수행되었고 공병부대와 지역주민들의 힘으로 교량을 복구하였다 한다.
반면에 남쪽으로 우회한 제3사단은 6월 30일 새벽에 옥수동과 자양동 지역에서 한강을 도하하여 오후 1시 무렵에 신사동 일대에 교두보를 확보하였으며 7월 1일 아침까지 사단 병력의 50%가 남쪽 강안에 도달하였다고 한다.
사단은 한강 도하 이후 수원을 공격하라는 명령에 따라 공격으로 전환하였으나 성남의 둔전리일대에서 아군의 기습적인 측방 역습으로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7월 5일 저녁 8ㅅ겨에 수원은 북쪽으로부터 공격한 제105땅크사단과 제4보병사단에 의해 해방되었고 하며 원래 땅크사단은 7월 1일까지 수원을 점령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았으나 7월 4일 아침에야 사단 주력이 한강 도하를 완료 하였다 한다.
수원으로 진출간에 아군의 지뢰에 전차 2대가 파괴되고 1대가 대전차포에 파괴 당하였다 한다.
이 서부전선의 전투 기록에 우리 아군이 문산벌에서 그렇게 많이 격파했다는 전차 잡는 내용이 하나도 없다. 일부로 그런 것인지 의도적인 것인지 모르지만 오산의 죽미령에서 미군 스미스부대와의 전투 기록도 보지못했다.
중부전선의 기록은 북한군 제12, 2보병사단의 작전에 대해 6월 27일 공격을 재개하였으며 양구-인제에서 홍천을 공격중인 제12사단은 종대대형으로 진출하다 제31보병연대는 군자리 고개에서 아군의 강력한 저항에 1차 멈칫하고 6월29일이 되어 오후 5시경에 아군을 격파하고 홍천으로 전진하기 시작한다.
나머지 양개 연대는 6월 29일 저녁 8시까지 성산리 남쪽 고지에 대한 공격을 4차례 감행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고 기록하는데 아마도 말고개 전투를 의미한다고 보며 여기서도 전차의 파과나 자주포의 파괴등 그들이 입은 심대한 피해 기록은 없다.
따라서 6월 30일 오후 6시에 홍천을 피탈하고 7월 2일 아침 8시에 횡성을 오후 1시에 원주를 피탈한다고 되어 있다.
반면 춘천에서 우리 제6사단에 혼이 난 제2사단은 '50. 7. 1일부터 김량장리(용인)방면에서 남쪽으로 진출하기 위해 당일 경기도 광주 원당리까지 진출 하였다. 여기서 주요고지마다 아군의 기습으로 진출 속도가 지연되고 7월 2일 아침 8시에 도시 점령을 위한 공격을 개시하여 10시무렵 김량장리를 피탈하였다고 기록한다.
여기서 이들은 도하가 지연되어 뒤늦게 따라온 야포와 자주포를 집경시키고 부대를 재정비한 후 7월 3일 아침에 공격을 계속하기로 했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에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될 한가지 중요한 것은 교량폭파가 주는 유불리에 대한 평가다. 만약 그들이 도하장비를 가지고 있었다든지 아니면 우리가 폭파이전에 그들이 점령하게 된다고 가정하면 우리나라의 운명은 그리 길지않았다고 느껴지는 점이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소련 고문관은 서울점령까지의 작전결과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먼저 우리의 작전결과에 대한 보고서 요약이다.
첫째 : 일정한 작전적인 고려 없이, 단지 방어전단과 그 직후방에서의 저항만을 염두에 둔 방어선이 구축 되었고, 또한 적절하게 고려된 방어계획이 부재하였다.
둘째 : 전투행동 과정을 통해 볼 때 전체 장교와 부대에 대한 교육훈련 수준이 매우 낮았다.
셋째 : 고지 방어시에 축차적인 예비 사격진지가 구축되지 않았다.
넷째 : 일반적으로 대대, 연대 및 심지어는 사단 예비전력까지도 소단위로 분할되어 투입되었으며 전선 혹은 인접 전선에 배치된 현역부대들과의 필수적인 협조체계가 이루어지지 않아 그에 따라 에비전력을 결정적 목표에 투입하는데 실패하였다.
다섯째 : 아군의 포병은 인민군의 포병 포격에 극히 민감하여 특히 60mm 및 81mm 박격포의 경우에는 포격을 받게 되면 즉각 사격을 감소시키거나, 진지에서 철수해 버렸다.
여섯째 : 보병의 60mm 박격포, 60mm 대전차로켓포, 57mm 무반동포 등을 충분히 보유하였으면서도 방어전에서 이 무기를 효과적으로 사용하지 못하였다. 길지 않은 종심을 따라 운용되어 전차 및 자주포에 의해 파괴되거나 포병의 포격을 받고 유기되어 버렸다.
다음은 북한군에 대한 기록이다,
첫째 ; 잘 조직되고 훈련된 군관요원들 및 병과부대들 덕분에 반격을 계획대로 진행하여 38선상의 아군 방어선을 전 전선에 걸쳐 와해 시켰다.
둘째 : 전투행동의 지휘가 평양으로부터 직접 이루어지도록 계획하였다.
이로인해 통신장비가 부족하고 전선과 총참모부가 떨어져 있는 상황에서 부대의 효율적인 지휘를 곤란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상급 지휘관의 명령이 없을 경우 부대들이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하는 상황이 자주 발생하였다.제2 및 제12사단)
셋째 : 공격작전 전 기간 아군에 대한 추격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로인해 아군이 유리한 지역에서 방어선을 재구축할 수 있도록 하였다.
넷째 : 서울을 점령한 후 각 부대가 행한 극단적인 완만한 행동과 개별부대 지휘관들의 임무 유기로 인하여 아군은 한강을 도하하고 교량을 파괴하였으며 남쪼 강변에 방어선을 조직하여 인민군의 진격을 늦추게 되었다.
이상의 내용에서 우리는 몇가지 반복되는 잘못을 분석해 볼 수 있다.
첫째 : 준비 되지 않은 지휘관과 부대훈련이다.
이문제는 당시의 주요지휘관의 연령이 그렇고(30대 초반) 실제 정상적인 군구조 속에서 편성되고 훈련되지 못했다는 것은 짧은 당시의 군의 연역에서는 피할 수 없는 문제였다.
둘째 : 지휘자의 전투의지와 사상적 문제가 크나큰 작전결과를 가져왔다.
흔히 맣하기를 '병사는 용감했다'고 한다. 그러나 때와 장소에 따라 그 용감성은 무모한 희생을 가져오게 된다. 하지만 더 무서운 것은 그 병사를 지휘하는 자들이 사상적으로 문제가 있어 중대장이 도망치고 연대장이 공백이고 철수한다면서 병사들은 알아서 가라하고 본인들은 먼저 행주나루를 건너가는 그 있을 수 없는 현실이 증언자들의 입을 통해 밝혀지고 있다. 그래도 양심은 있어 "가능하면 살아서 남쪽 시흥에서 만나자"는 그 결별선언(?)이 눈물나기만 한다.
셋째 : 한강선 방어에 지휘의 공백이다. 도대체 누가 계획하여 통제하는 것인지 혼성 사단을 편성하여 방어하라 해놓고 그 다음은 아무 것도 없는 소련군 고문관의 증언대로 소부대대로 싸우니 통합전투력이 나오겠는가.
넷째 : 초기 전투의 패배가 무기체계라는 빌미는 이제 더 이상 변명의 꺼리로 사용해서는 안된다.
그 당시에 보유한 대전차 무기로 얼마든지 소련 전차를 잡을 수 있었다. 소련군 고문관도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교육이 제대로 안되어 종심깊은 운용이 안되었고 철갑탄을 준비도 안한 것이 누구의 잘못인지 묻고 싶다. 그런 와중에도 제15연대의 문산벌에서의 대전차 공격을 귀감이 되는 것인데 그런 내용이 소련군 기록에도 없고 우리의 기록에도 미흡하니 그 진실을 다시금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다섯째 : 도대체 병사를 놓고 한강을 먼저 건너간 고위 지휘관이 누군지 이제는 밝혀야 한다.
행주나루일대에서 무려 2,000여 명이 우왕좌왕하다가 숨져 가거나 포로가 되고 철수한다는 이야기도 없이 각 부대별로 알아서 하도록 한 문제는 '군의 정체성 확립' 차원에서도 그냥 지나가서는 안되는 문제다.
다음은 탐사와 탐문결과다.
서울시내는 나의 고향이다. 내가 초중고를 이곳에서 나왔는데 국립현충원 서달산이나 성남고의 용마산이 내가 놀던 곳이었다.
한강변에서는 고기잡기 하고 여름날 멱을 감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 당시에 누구하나 이런 곳이 전투현장이란 말은 들은 적이 없다.
군에 들어가서도 중령을 달고 대쟁장이며 인사참모까지 하고 있어도 몰랐고 대대장 시절 우리의 작계진지가 전투현장이었다는 것도 몰랐다.
사관학교에서나 군사교육기관에서 배우던 전사에서도 그 교훈이나 전술적인 면에 중점으로 가르치지 어디서 얼마만한 피해가 발생하여 어떻게 되었다는 그런 내용이 없다.
따라서 서울 지역에서의 유해를 찾기위한 탐사나 제보자 등을 찾는 다는 것은 쉽지 않은 문제였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렇게 요란한 전사가 숨어 있지만 유해를 찾는 것은 불과 10여구 내외다.
아니 한강 백사장에 다 묻혀 큰 홍수에 다떠내려 갔던지 아니면 무자비한 개발에 밀려 그저 그 속으로 다시 묻혀버렸느지 아니면 모두 발굴 되어 화장되어 자연으로 돌아갔는지 알 수가 없다.
창동에서 미아리, 미아리에서 한강변에 이르는 주요 고지군은 다 올라가 돌아보았다.
강변도 행주나루, 마포나루, 광나루, 동빙고, 서빙고등 그들이 도하 아니면 우리가 쪽배나 널판지를 이용하여 도하했다라고 하는 곳은 다 가보았지만 현재 원형이 보존 되어 잇는 곳은 한 곳도 없다.
물론 행주나루나 이산포 지역은 강변은 그래도 살아 있지만 참전용사니을 대동하고 현장을 가보니 그때의 강변이 아니란다. 위치만 맞는 것이다.
우선 의정부 호원동의 회룡사-사패산 능선, 수락산-불암산 능선, 북한산 능선은 지난 19년간 적어도 3회 이상은 다 올라가 보았다. 특히 불암산은 등산객에 의해서 제보가 오고 불암산 우측 자락 또한 제보자의 신고로 실제 출동하여 현장 확인과 유해발굴을 해 본 적이 있고 6구의 유해를 발굴 하기도 한다.
여기에 5구는 군인의 것이지만 1구는 민간인에 해당하는 것으로 누군가 타살하여 자루에 담아서 산 등산로 패인 곳에 오래 전에 매장한 점버를 입고 있는 남성의 유해로써 경찰에 인계했다.
1주간의 발굴 기간에 이곳 일대, 중게동과 별내동 일대의 노인정과 마을회관을 찾아서 사실관계를 찾으려 했으며 노원고개와 태릉지역까지 광범위한 조사를 해봤다.
중계동 지역은 전쟁은 있었다고 하지만 일방적으로 북한군이 밀고 내려갔다는 이야기가 전부고 불암산에 일부 군인이 숨어 들어가 홍길동처럼 행동하여 '호랑이 부대'라는 애칭을 갖고 잇었다고 한다. 우리는 불암사로 들어갔다. 오르는 길 우측으로 푯말이 서 있는데 호랑이부대의 이력이 기록되어 있었다. 주로 육군사관학교를 방어하던 인원들이 이곳으로 옮겨와 지속적으로 유격활동을 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신고 장소에 도달하니 등산로를 따라 물줄기가 있고 소나무뿌리가 길게 자라 발굴하기에 곤란한데 신발끝이 보이고 있다. 하루 종일 경찰 입화하애 발굴해 보니 겨울용 점버를 입고 있는 건장한 남자인데 꽤나 오래 전에 묻은 사체로 결론이 나서 경찰에 인계헸다.
5구는 노원고개 위로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바로 얼마 안가서 비로 산이 약간 흘러내린 곳에 탄피와 실탄등이 나와 주변을 확장하여 발굴 결과 5구가 나오는데 소련제 모시나칸트탄과 중공제 방망이 수류탄도 나오고 초기 전투가 아니라 그 이후의 전투에서 전사한 군인 또는 중공군으로 식별 되어발굴하여 정밀감식을 의뢰하여 진행 중이다.
북서울 숲에는 약 50여개의 개인호가 남아 있지만 그 당시 것이라고 단정하기 어려운 상태이고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번동의 배봉산이나 신내동의 봉화산에는 20여개의 개인호가 남아 있다. 특히 봉하산 주변은 그 당시에 논에 야산은 배밭인데 군인들이 배밭으로 들어와서 봉화대가 있는 곳에 잠깐 머물다 떠났는데 큰 부대가 아니라 몇명이서 움직이는 군인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곳의 노인정에는 참전용사 한분이생존해 계시면서 실제 본인이 이곳에서 학도병으로 군인들을 따라서 남쪽으로 내려가 전쟁에 참여 했다면서 동네에 전투는 없고 바람처럼 스치고 지나갔다고 한다.
전농동의 배봉산은 이곳을 지나 중랑천을 건너면 광나루로 가는 길이라 많ㅇ느 군인이 지나갔다고 한다. 그러나 장안평 일대와 구나동 자리는 끄때만 해도 하허 벌판이고 군자동쪽은 강변에 고구마밭이 많았고 그렇게 주민이 많이 살지않아서 전쟁 목격자가 적었다.
바로 우측에 용마봉(348m)과 아차산(287m)이 있고 남북으로 길게 능선이 다리면서 북쪽에는 망우공원묘지가 있고 남쪽에는 아차산성이 있는곳이다.
망우공원묘지에 가면 묘비에 많은 총탄자국들이 전쟁의 상터를 안고 있는데 들리는 소문이 6.25전쟁 당시에 많은 사람이 이곳에 숨어들었다고 하여 혹시나 하는 마음에 들어가서 정밀 탐색을 해보고 오래전의 관리인등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본 결과 초전에는 아니고 9.28 서울 수복당시에 우리 군인들이 많이 이곳으로 밀고 올라 갔고 1.4 후퇴시부터 중공군이 들어와 있는 시기에 이 산속에 유격군이 실제 많이 숨어서 활동을 했다고 증언한다.
망우리 묘지는 일제시대 확대 조성되게 되는데 그 이력을 잠깐 소개하면 이렇다.
일본은 우리의 장례문화에 문제점ㅌ중에 많은 부분이 무분별한 장지선정에 있다고 보고 전국의 몇군데를 공동묘지 지역으로 정하게 되는데 서울지역은 1929년에 신당동과 아현동의 공동묘지를 홍제동과 수철리로 이전하게 된다.
1933년에는 서울의 확대로 시내에 남게 된 공동묘지를 외곽으로 이전시켜 턱없이 모자라는 묘터를 늘렸다. 이렇게 해서 망우리와 미아리의 공동묘지는 전국에서 가장 큰 묘지로 각광받게 된다. 당시 이태원동에 공동묘지가 있었는데 4만여기가 들어서서 포화상태가 되었다. 이 이태원 것을 이전하게 되는데 이때 유관순 열사의 묘도 훼손되게 되었다고 한다.
미아리 공동묘지는 이제 흔적도 없다.
이곳은 공동묘지이면서 격전지로써서울 방어에 매우 중요한 우치가 되는데 서울지역 재개발로 그 흔적조차 없으며 미아리고개 좌우측에 70년대에 그나마 남아 있던 전쟁의 흔적마저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어 아루런 단서를 찾을 길 없다.
당시에 수도사단 제3연대 제1대대에 근무했던 김세철용사님('08)의 증언이 미아리 일대에서 적 전차를 잡으라는 연대장 함준호 대령의 명령으로 특공임무 수행자를 모집하여 10명이 지원하였고 이들이 적전차 파괴임무를 부여받고 육탄공격을 감행 하였으며 6명이 죽고 4명이 복귀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그 위치는 흔적도 없다.
용인 동천동에 살고 있는 김영채('08)씨의 제보도 있다. '50년 6월 말에 국군 3명이 후퇴간에 하얀 적삼으로 허ㅘㄴ복을 하고 내려오다 동네 고정 빨갱이들에게 들켜 인민군에게 넘겨지고 삼선동 지역에서 총살을 당해 계곡쪽에 매장(한성대 부지)되었다는 제보로 현장을 확인결과 재개발 지역으로 발굴이 가능하여 1구를 찾아냈다.
나는 돈암동 미아리 일대에서 중학교시절 신문배달을 6개월가량 한 적이 있어 이곳 지리는 그래도 골목까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30년이 지난 다음에 유해를 찾으러 가보았더니 천지개벽이다.
미아리의 지명 유래는 당당히 의미가 있어 소개한다.
공식적인 기록은 조선말 고종 초라고 한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되너미 고개를 미아리 고개로 불러서 고개 이름이 동명이 되었다는 것이다.
되너미 고개가 한자로는 돈암현이라 한다. 이 외에 미아 7동에 있는 불당곡에 미아사라는절이 오랫동안 있어서 이 절 이름이 동네 이름이 되었다는 설도 잇다.
명칭 유래에 대해 몇가지 더 알아보면 첫 번째는 병자호란때 되놈들이 이 고개를 넘어 한양으로 침입해 왔다고 해서 되너미 고개라 불리게 되었다는 것과 두 번째는 돈암동 방면에서 길음동, 미아동을 지나 의정부로 이어지는 길 목인 이 고개가 끝나면 더 이상 없기 때문에 불리게 되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시절에 이곳 일대에 한국인전용 공동묘지가 조성되어 시내에서 사람이 죽으면 되너미 고개를 넘어가게 되는데 미아리 공동묘지에 묻히면 영원히 다시 돌아올 수 없다고 하여 되너미 고개를 미아리 고개로 불렀다 한다.
유명해진 것은 '단장의 미아리 고개'로 인데 한국전쟁당시에 북한 공산당들에게 납북되어 끌려갈 때에 이 고개를 넘어 끌려갔다고 한다. 그래서 대중가요로 이 노래가 나왔고 유명해지면서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고 한다.
일제는 그 후로 장충공원 장충단에 있던 을미사변 당시에 순국한 우리의 용사들을 모두 이러한 곳으로 옮겨버려 그 정통성을 끊어버리려 많은 노력을 해 온 것이 사실이다.
태릉이든 그리의 동구릉이던 가면 조선시대 왕들의 묘비나 상석에 많은 총알 자국이 남아 있다. 하지만 그곳에서 전사하여 매장되었다는 제보나 증언은 아직 듣지 못했다.
초기 전투시 남양주의 동구릉과 금곡지역 벌판에서 총격전이 벌어졌고 그 흔적으로 앙릉안에 소나무에 탄흔자국이 많이 있다하여 전수조사를 하였으나 신통한 증언은 받지를 못했고 그 나무마다 남아 있는 흔적은 일부 확인하였다.
이러는 가운데 몇건의 제보가 우리를 흥분하게 만들고 이걸 기초로 정말 한구라도 찾으려 노력해 왔으나 만족할 성과는 없다.
은평구 녹번동에 살고 있는 이기성('08)씨는 몇년전에 서울대학교 병원 근처에 하수도 공사중 유해와 유품(철모)을 발견하여 현장에 매장했으며 유해의 골격이 매우 크다는 제보를 하였다. 확인결과 매장 위치는 장례식장 앞 울타리주변 잔듸있는 곳으로 추정 되는데 이곳도 이미 한차례 또 정화작업이 진행 되어 찾기가 곤란했다. 바로 그 일대에 당시 대학병원에서 숨져간 용사님들의 "자유의 추모비"가 있다.
거주지를 밝히지않은 이기성('08. 70)씨는 현재 전쟁 긴념관과 미군부대 사이에 '50년 6월 28일에 2구의 국군 용사를 매장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하는데 위치가 이미 변하여 발굴이 제한 되었다.
서울에 거주하는 조재원('08. 79)씨는 현재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 지역에 셋강이 있었는데 조개 잡으로 갔다가 1구는 강뚝에 1구는 강바닥에 있었다고 제보하며 지금의 위치는 하늘공원이나 자유로 도로가 될 수도 있다고 하였으나 발굴이 제한 되었다.
"성동구 하왕십리 안정사 절에서 백우스님이 연락이 왔다. 5구의 국군 유해가 있다"
임무 수행중 정말 고마운 전화며 많이 들어왔던 사찰에 보관된 유해라는 의미에 바로 달려갔다. 이절은 규모는 적었지만 조선의 개국공신 무학대사와 인연이 있는 절로써 망우리에서 한양을 바라보고 들어오던 첫번째 당시 사찰이었다 한다.
이유야 어쨌든 달려가 보니 처음으로 6.25당시 화장유해의 실체를 그대로 볼 수 있는 기막힌 기허ㅣ였다. 5구의 유해가 목곾에 화장해서 들어가 계시는데 그당시의 광목에 쌓여지고 누런 종이에 씌여진 글씨에 명확하게 신원이 기재 되어 있었다.
"처음으로 실체가 확인되는 6.25당시의 화장 유해"
말로만 소문으로만 들었던 유해가 화장되어 원형 그대로 어떻게 절에 남아 있었을까?
사실 우리에게 연락을 취한 백우스님도 그 내력을 알지 못하고 재개발지역이 되어 절을 이전하게 된 상황에서 절의 오래된 지장전의 깊숙한 곳을 정리하는 과정에 유해들이 발견되었다.
따라서 오래된 신도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전쟁이 나고 언젠가부터 전사한 유해들이 자가봉송되기 시작하는데 그 당시에 피난이나 다른 이유로 유족이 받지못할 경우에 인근 사찰에 맞겨지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우리는 바로 큰절을 올리고 경례를 했다.
하지만 바로 모셔갈 수가 없었다. 절에서 그동안의 관리한 보상이라할까 응분의 보상을 바라기도 하는 것같고 이렇게 음지에서 나왔는데 그냥 보내드릴 수 없다며 날짜를 잡아 지장기도를 하고 가져가야 한다는 것이다.
돌아와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다시 절에 찾아가 주지스님을 만나 우리의 사업 취지를 설명해 드리고 양해를 구했다. 그결과 혼쾌히 승인을 해주셔서 아무조건없이 지장기도도 100여만을절에서 부담하여 지내는 것으로 하고 어느날 현충원으로 모셔왔다. 그리고 이 5인(소위 김경섭, 육군 일병 목좌균, 목인준, 정용구, 해군 김택영)의 유해는 이후에 3인의 유가족이 찾아져서 다시 현충원에 안장되었으며 2인은 현재 유족을 기다리는 중이다.
"서울대 병원자리에서 60여구의 유해가 나왔다."
이 사실은 지금 사실 미궁에 빠져있는 실체이다. 어느날 해화경찰서에서 연락이 발굴단으로 왔다. 서울대 병원안에 과거 황우석 박사 연구동(지금은 다른 용도로 변경)을 건설하기 위해 터파기를 하는데 엄청 많은 유해들이 나왔다는 것이다.
"와 이거 혹시 서울 피탈 당시에 병상에서 전사한 80여명의 국군이 아닐까하는 기대감에 바로 달려가 현장을 조사해 보았다. 아뿔사 그런데 나오는 유해들이 두개골도 있고 실제 골이 그대로 남아 있는 유해도 있다. 사람이 아니라 무슨 동물 실험장이나 일본군의 731부대같은 느낌이 들었다. 머리뼈는 날카로운 도구로 부분 절단된 모습이 뚜렸하고 어떤 약품처리를 했는지 인체의 가죽이 그대로 원형대로 있고 어린아이로부터 나이먹은 사람까지 각 단계별로 도한 여성도 남성도 있다.
이 자리가 원래 연못 자리였고 그걸 메꾸어 건물을 지었다가 허물고 타파기를 하는 과정에 나왔다. 군인이라고 추정할 수 있는 유해는 비상통로에 남아 있던 1구로써 통일화가 있고 일부 탄피도 있다. 이걸 가지고 경찰은 우리에게 넘길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진실은 이게 아니다. 너무나 엄청난 사건이 숨어 있는데 분명 경성제대시절도 이곳이 그런 곳이라니 나이먹은 의사들은 분명 알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모두가 함구하고 있다. 수인번호처럼 나무에 새겨진 번호판도 있었다. 분명 대학에서 적어도 사람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한 증거다. 골이 그대로 보존돈 모습, 그리고 다리뼈나 팔뼈에 사람가죽이 그대로 남아 있는 모습, 살아 있는 사람을 잡아다(?) 이런 짓을 했을 것이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났는데 다시 그곳에서 연락이 왔다. 정현주라는 분이 서울대 의과대학에서 '08년 10월부터 국제협력단 건물중 제1 별관(과거 미술대)을 철거하고 2별관을 철거중 벽를 허물고 평탄 작업중 방공호로 추정되는 호속에 4~5구의 유해가 나와서 보관하고 있다는 제보였다. 이 또한 성격이 같은 유해로 우린 경찰과 협조하도록 조치하고 말았다. "내가 19년간 업무를 한 유해발굴 사업에서 가장 큰 미지의 사건이다."
이곳의 관련제보는 또 있다. '09년도에 종로구 명륜동에 사시는 서병국(69)씨의 말에 의하면 본인이 어릴 때인데 국군이 밀리고 있는데 서울대에 입원해 있던 일부 부상병들이 동네로 숨어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동네 빨갱이들이 붙잡아 처형한 것을 동네사람들이 서울 의과대학 뒤에 야산이 있는데 가묘를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국군 지휘관도 1명이 붙잡혀 인민군이 심문하는 것을 목격하였고 학교 지하실에 숨은 국군을 사살하려고 수류탄으로 공격 하였다 한다.
"경기 오산에 살고 있는 참전용사 최하용('09. 79)씨는 서빙고에서 60~70구를 매장했다"
참전용사님은 병으로 처음 전쟁에 참전하여 갑종장교로 임관하여 1201공병단에서 근무했다. 전쟁이 종료되고 '55 3월경 서빙고동에 여군중대 및 훈련소 신축공사중 전사자를 무더기로 발굴하여 당시 교회옆 비탈진 곳에 매장 하였다고 한다.
사실 이 증언도 매우 신뢰성이 높았던 증언이다. 왜냐하면 한강교 폭파로 도하를 못하고 있던 병력들이 우왕좌왕 하는 가운데 도선을 기다리려고 대기하게 되는데 인민군이 밀어닥쳐 모두가 총받이가 되었다는 참전용사의 수많은 증언이 있었다. 과거 중경고자리가 그 일대로 여기에 꼭 흑염소 집단 매사장소처럼 뜨거운 태양아래 썩어가는 그 시신이 모두 국군이었다 한다. 그런데 그 약도를 가지고 탐사해보니 천지가 개벽해 버렸는데 어디서 무엇을 찾겠는가... !
"아~, 서울이여!"
어느날 한분이 현충원에 우리를 찾아 오셨다. 하남에 사시는 차명주란 분이였다. 전쟁 당시에 어린 나이였는데 국군이 지금 용산 우체국 뒤로 가면 국방부 들어가는 길이 있고 우측은 미8군 자리인데 이 일대가 옛날에는 야산이었다 한다. 한강을 도하하지 못한 병력이 인민군에게 죽어서 100여명이 있는데 얼마나 냄새나고 개들이 물고 다니고 난리가 아니였다 한다. 그러니 인민군이 마을 사람들을 모아서 인근 야산에 매장하는데 본인도 직접 참여하여 매장을 도왔다고 한다.
요청하면 함께 탐사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도 수많은 제보가 있었고 '00년 초기부터 많은 조사를 해 왔던 곳으로 지금 불럭 울타리로 경계가 구분되어 있다.
사실 그 후에 토지구획이 이루어지고 개발과 주택지로 변하였고 군부대가 조밀하게 들어서 이미 현장이 훼손되어 찾을 수가 없는 곳이였다.
"당시에 서울의 야산에는 군인이 죽어 있지만 피난민들 촌이 들어서며 모두 없어졌다 한다."
경희대 뒷산, 성균관대 뒷산, 서울대 병원자리, 이화동을 끼고 서울 도성일대, 남산, 옥수동의 매봉산, 성동구 응봉동의 응봉, 고려대 뒷산-미아리 고개에 이르는 구간등 많은 지역을 탐사하였다.
모든 지역에 전쟁의 흔적은 조금은 있으나 발굴할 만한 곳은 찾지 못했고 다만 한양대학교 뒤산이 옛날 피난민촌이었다가 철거되었는데 그곳에 전사하여 묻혀진 용사가 있다하여 행당동 노인정을 찾아 수소문을 하고 실제 위치를 확인하여 발굴 하였으나 찾지 못했다.
"하지만 창동이나 미아리 격전지에는 흔적도 찾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기록을 중시하는 문화가 살아 있었던 민족이다. 조선시대 왕조실록이 그 대표적 자산이다. 그런데 어이된 일인지 고구려나 발해의 역사서는 이 땅에 진서가 단 한장도 없다고 한다.
백제의 기록도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나오는 3천궁녀와 의자왕의 애로물적인 그러면서 타락의 대표상인 마냥 적어진 이야기가 우리에게 낯익은 것이고 고구려는 연개소문 사후에 펼쳐지는 자식들의 행태가 전부인양 되어 있다.
오히려 중국이나 일본에 그 시대의 기록이 더 많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러한 것을 보면 어찌 우리 민족은 지워버리기를 좋아하고 그래서 진취적인 기사을 가졌다는 역설적인 해석이 맞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서울의 관문에서 벌어진 6.25전쟁의 흔적은 이곳에는 찾지를 못하였지만 그 인근에 사는 나이드신 분들의 증언에서 전쟁은 분명했다는 것은 알았다.
그래도 좀 찜찜한 것은 제대로 전투하는 모습은 아니라는 것이다. 적이 전차포 몇 방 쏘고 박격포가 몇 발 떨어지면 인근의 국군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국보 1호인 숭례문에 관련해서도 마찬 가지다. 아니 바로 문앞에 서 서 좌우측의 축성을 보면 총탄자국과 박격포탄같은 퍄편의 탄흔이 엄청나게 많고 동대문도 그렇다.
하지만 안내 간판에 그 축성된 돌에 남겨진 흔적이 뭔지 아무런 해명이 없다. 잘못하면 일본이 한반도를 침입해 오면서 남겨진 흔적이라고 혹시 문화해설사가 설명하지는 않는지 모르겠다.
이유는 우리는 일본이 저지른 것이라고 해야 시선을 받으니 그런 해법이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 6.25전쟁의 상처다. 그런대도 어디에도 그런 설명은 없다.
은평구의 진관도에 있는 북한산 자락의 진관사란 고찰에 가면 절 바로 들어가는 입구 좌우측에 석축에 탄흔자국이 많이 남겨져 있다. 하지만 이 절에는 일제점령기에 사용된 태극기 원본이 하나 보관돼 있는데 이에 대한 전시나 자랑은 많이 한다.
하지만 진작 6.25전쟁의 6자도 보이지 않고 있다. 그 바로 위에 응봉이 있는데 이 응봉으로부터 비봉 향로봉 구간에도 아직 전쟁 당시의 개인호가 그대로 남아 있지만 그런 설명은 어디에도 없다.
태고사 지역 일대는 우리 아군의 1개소대 병력 정도가 은거하며 북한산에서 유격전을 수행했고 모두가 장렬히 전사했다고 전해진다.
본인의 실명을 밝히는 것을 거북스러워 하는 지극한 나이를 드신 분이 직접 목격했다며 절 마당에 죽어있는 모습을 보았고 그 일대 어딘가에 매장 되었다고 한다. 절에 가서 수소문하면 알게 될거라고 하여 엄청 큰 희마을 갔고 태고사 인근에 있는 절은 다 들어가 사실관계를 확인하였으나 그런 사실을 알만한 노스님도 없고 관심도 없어 보였다.
다만 노적사에 들어가니 현 주지 스님이 이곳 출신은 아니지만 그래도 관심이 있는 스님을 만났다.
임진왜란 당시나 병자호란 등에 관련된 전쟁이야기며 당시의 승병들이 축성한 내력과 병력 배치를 알고 계셨고 노적봉에 인천 앞바다에서 함포가 날아와 떨어진 흔적이 그대로 있다는 말씀도 하며 전쟁 당시에 많은 인원이 산속에 은거하여 유격할도을 하다 숨져갔는데 그 흔적은 찾기가 힘들다 한다. 다만 바위 밑이나 혹시 동굴이 있다면 그 동굴속에 나아 있을 수도 있을 거라 하였다.
30년 전만 해도 철모나 탄피 탄알, 전투화, 박격포 등이 보였는데 지금은 숲도 우거져서 보이질 않는다는 설명이다. 태고사 주변의 이야기는 본인은 듣지 못했고 다만 지역이 안으로 쑥 들어가 있어 그럴 가능성은 있을 수 있다고 하신다.
"북한산에도 아무런 기록이 없다."
태고사 위로, 북한산성계곡 길을 따라 백운대(836m)를 거쳐 남서쪽 능선 또는 산성을 따라 이동하면 북한산성의 대동문이 나온다. 정릉이나 수유리 방향에서도 오를 수 있다. 이곳 문의 좌우측을 살펴보면 역시나 탄흔이 그대로 남아 있다.
아니 서을 피탈후 수복까지 3개월간의 유격전과 '51년도 1.4후퇴시부터 다시 3월 15일 서울을 재수복하는 기간에 이곳은 우리 국군뿐만 아니라 북한산 뒷편은 골든선이라 하여 미군이 진출하고 많은 병력과 화력이 집중되어 탈환 및 방어한 곳이기에 분명 뭔가는 남아 있어야 한다.
그래서 소나무 군락이나 당시의 가람이 보이지 않는 것인데 이를 두고는 일부 인원은 미군의 무자비한 폭격으로 다 불타버렸다고 철없는 이야기를 하는 분도 있었다.
'물에 빠진 분을 구하여 주니 지갑 내놔라'는 것과 뭐가 다르겠는가. 지금 우리는 다시금 해방이후에 격었던 그 이념의 갈등에 이제는 후손들이 얽혀서 또 다른 이념논쟁으로 비화하여 갈 길이 먼데 멈칫 거리지는 않는지 모르겠다.
역사를 잃어버리면 죽은 민족이라는데 이 삼천리 금수강산은 아직 이분법이 난무하고 당시를 증명하는 분들이 세상을 떠나니 죄인처럼 살았던 분들의 한풀이 장이 되어가는 느낌마저 든다.
총을 잡고 자유 민주주의를 그리고 대한민국을 지키려 싸운 것이 마치 강대국의 사주를 받아 민족해방을 방해한 것처럼 되어 가는 현실이다.
하지만 아무런 기록도 없다. 전사책에만 있는 기록은 기록으로 가치가 없다. 군인만이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면 이 역사는 잘못된 것이다. 모두가 피흘린 역사도 알아야 한다.
"드디어 강북지역 북한산에서 유해를 발굴 하다."
아무런 단서를 찾지 못하고 많은 시간이 지난 '10년도에 어느 등산객이 바위 밑에 전투화가 있고 뼈도 보인다는 제보를 해 왔다.
사기막계곡 깊은 곳이다.
넓적 바위가 있고 그 밑에 굴은 아니지만 비눈을 가려줄 수 있는 정도의 공간이 있는 곳이다.
주변에 풀들이 자라 뿌리가 무성하게 자라있고 활엽수 나무들의 뿌리도 들어와 낙엽과 함께 수수북한 모습인데 그 속에 유해가 있다.
한 등산객(이00씨로 51세)이 아마도 산삼이나 이런 것을 캐려 들어와서 비가 내리니 잠시 피난처로 들어가 잠을 청하고 일어나 보니 이상한 것이 보여 확인해 보니 전투화 잔해가 보이고 수류탄이 있었다. 다시 상세히 관찰하니 사람뼈도 보이는 것같아 신고를 하게 되었고 우린 출동하여 현장확인과 발굴 작전을 벌여 1구를 찾아냈다.
하지만 너무 오래되고 풀뿌리들이 침투하여 유해가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그러니 사실 피아판단도 어렵고 언제 전사하였는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서울지역에서 그것도 국립공원인 북한산에서 처음으로 찾아낸 유해라는 점이 앞으로 얼마든지 유해는 발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한 것이다.
서울 강남에서는 '07년도에 현충원 뒷산에서 2구가 발굴 되고~
우리는 이 보다 먼저 강남지역 동작동 현충원이 있는 산 28번지에서 '07년도에 유해 2구를 발굴한 적이 있다. 지역에 살고 있던 이재석씨(75세)의 제보로 본인이 17살에 이수교에 살았고 전쟁이 나고도 피난가지않고 있으면서 이곳 현충원일대의 전투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당시야 현충원이 아니고 논밭으로 되어 있고 강변에 나가 멱감고 고기잡아 먹었던 시절이니 전쟁이 나서 한강교가 무너지고 그 많은 군인이나 피난민이 이곳을 통하여 과천으로 빠져 나가는데도 강단이 있던 아저씨는 남아서 동네를 지켰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날 도망가지 못하고 숨어있던 군인인지 경찰인지 2명을 데리고 와서 묘지 부근에 데리고가 총으로 쏴 죽이는 모습을 그대로 목격했다고 하며 현장에 직접 오셨다.
우리는 땅 소유주와 협조하여 발굴결과 전투화 밑창등과 2구의 유해를 발굴해 냈다.
하지만 두개골이 완전히 풀뿌리로 휘감겨 꼭 야구공 속처럼 스폰지로 되어버려 어떻게 손질조차도 못하는 상태로 남아 있어 당시 서울 지역에 상주하는 그 많은 언론이 취재를 와서 눈물을 흘려야 하는 쓰라림이 있었다.
사실 그 유명한 해병대 전투지역인 연희고지도 우리가 40여개의 호를 식별하여 발굴했지만 유품마저도 찾지 못했고 인민군의 주요지휘부가 있었다는 이화여자 대학교 야산과 언산에서 흘러 내리는 능선을 따라 봉원동 현저동 대신동 아현동 일대의 산처럼 생긴 곳은 다 들어가 탐사하였지만 초기전투시는 아니고 9.28 서울 수복시 인민군이 죽어있는 것을 보았다는 이야기는 무성했다.
강남에는 동작구 서초구 강남구에 주로 흔적이 아직 남아 우리를 기다렸다.
영등포구의 여의도와 관련된 밤섬이나 노들섬에는 아예 흔적이 없다. 그 이유는 언젠가 언급했는지 모르지만 피난민이 몰려들어 풀 한포기도 없이 완전히 벗겨지고 말았다니 뭐 그런 상황에 유해를 본들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동작구는 현충원 서달산에 일부 개인호와 피탄흔적이 바위에 남겨있다.
사육신 묘에도 일부 개인호가 20여개 남겨져 있어 우리가 발굴까지 했다. 실제 묘역까지도 협조를 구해 발굴을 했다.
성남고 용마산에도 30여개의 흔적이 있어 발굴했지만 현재 공군참모총장 공관 안쪽 부분을 탐사 및 발굴하지 못했다. 이곳도 지역주민의 증언과 실제 경계근무중인 병사로 부터 전해오는 괴담에 비오는 날에 귀신(?)을 보았다는 제보도 들었다.
그런 어느날 나는 주말을 이용하여 이화장을 찾고 낙산에 올라 미아리고개를 바라보았다.
요즈음 대세인 미스트롯의 우승자 송가인이 부른 그 미아리 고개는 나는 중학교시절에 신문배달을 하며 거의 6개월간을 하루도 빠지지않고 걸어 다녔던 곳이다.
낙산 성벽은 좌청룡 우백호의 풍수지리에 근거하여 청룡에 해당하는 곳인데 지금 동대문에서 올라서면 이곳으로 올라선다.
그런데 이 길이 수많은 그 당시에 납북자들을 인민군이 결박하여 끌고 갔었다니 너무도 비극이다.
이유는 성벽밑을 이용하여 걸으면 하늘에서 비행기에 노출이 잘 되지 않으니 그 길을 이요애야 했고 실제 서울을 벗어나 의정부에 이르는 단거리 길이란다.
현재까지 그 성벽을 따라 나는 제대로 알고 걸어본 것은 이 유해발굴 사업을 하면서 한성대 뒤에 살고 계시는 이00이란 분이 이곳 일대에 유해가 매장 되어 있다는 제보에 의해서 걸었지 한 50년 살았어도 걸어본적이 없다.
여기 올라서서 그때 끌려가신 분들의 눈물나는 애환을 그려보고 서쪽으로 보이는 서울의대 병원과 창경궁을 바라보며 서울 피탈시 부상병으로 실려와 있다 진입한 북한군에 무자비하게 죽어가고 휘발류가 뿌려져 전사한 그 숭고한 호국영령님들의 얼굴을 그려보곤 하는 버릇이 생긴 것이다.
바로 옆에는 조선시대 교육기관인 성균관이 자리잡고 지금 성균관이 자리잡고 지금 성균관대학이 생존하여 있지만 그 몇 백년된 아름들이 은행나무들이 이 사연을 알고 있는지...
전쟁 당일에 이승만 대통령이 낚시를 했다는 창경궁안의 낚시터를 그려보고 미아리 고개전투시 어느 여관에 잠들다 도망쳐 이곳 창경궁에 이르렀다는 솔직한 당시 지휘관의 증언, 그곳을 경비하러 달려온 헌병출신이 증언, 그리고 밀어 낙친 북한군 탱크의 위용(?)을 그려보며 낙산에서 내려와 명륜동에 도달한다.
결과적으로 서울은 인민군 제1군단에 의해 점령되었다. 인민군 제3사단과 제4사단이 제105전차연대(-)와 협동으로 철원에서 의정부, 미아리, 창동방어선을 돌파하고 서울에 진입한 것이다.
이무렵 문산으로 공격을 해온 인민군 제1사단과 제6사단(-)은 봉일천 선에서 서울로 압박을 가하고 있고 김포반도로 남하한 인민군 제6사단의 1개연대는 김포비행장 부근가지 진출하고 있었다.
한편 조공인 인민군 제2군단은 제2사단과 제12사단이 국군 제6사단의 분전을로 춘천 점령이 지연되고 홍천 북방 말고개 일대에서 저지당하여 그들의 한간선 이북에서 포위소멸의 목적은 달상하지 못했다.
서울 실함시 전선은 김포-봉일천-서울 홍천-대관령-강릉 선에 형성되었다.
인민군은 최초에는 계획대로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했으나 그들이 믿었던 민중봉기가 일어나기는 커녕 국군과 국민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쳤으며 유엔군이 참전하게 되고 그들의 남침계획은 차질을 빚게 되었다.
반면에 국군은 불의의 기습을 받아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서울을 피탈당했다.
주요지휘관들의 부재와 정치사상적 문제 등으로 고전하고 많은 인명 피해와 장비 손실을 가져오고 전쟁지도 능력의 부재와 재경주대와 예비사단을 서울북방으로 부대별로 축차적 투입하여 상호 지원 부대간의 암투 등이 공공연하게 작용하여 의정부-미아리 축선이 무너지자 한강교량의 피탈을 우려하여 교량을 파괴하였다.
이로인해 교량의 파고로 서울시만 대부분이 피난하지 못하고 국군은 비록 포위는 면했으나 조직적인 철수를 할 수 없어 와해를 초래하였다. 그러나 이때 미군이 유엔군의 일원으로 국군을 도와 참전하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