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당신
오래된 당신의 필체를 쏙 빼닮은 바람의 수화를 읽는다 폐
쇄된 간이역의 녹슨 출입문처럼 삐걱거리는 신호 대기음 앞
에서 자꾸 주춤거리는 글자들, 지금은 아무에게도 전이되지
않을 슬픔의 철자법을 따로 익혀야 할 시간이다
느린 걸음으로 골목을 빠져나가는 키 작은 그림자, 휑한 옆
구리 쪽으로 글썽해진 바람이 비껴간다 갈팡질팡하는 나뭇가
지에 불규칙적으로 내려앉는 눈발들, 우편함에 쌓이는 주소불
명의 편지들, 낯선 곳을 지나고 있을 사람의 안부가 문득 궁금
해졌다
언젠가 무너지기 위해 똑바로 서는 기둥들처럼 나는 또 어디
선가 무릎을 감싸고 주저앉기 위해 이 자리를 단단히 버텨야
한다 어딘가에서 첫 햇살에 아려오는 눈을 비비고 있을 오늘
의 당신이듯
백곡 단장
저수지로 밤마실 간 할머니
흰 옷자락 나부끼는 초저녁
물살 가락 타는 햇살
눈부신 손가락들과
산모퉁이 돌며 숨 고르는 늙은 소의
한 옥타브 낮은 울음이 잘 어울렸다
할아버지 지게 장단 빗살무늬로 꺾이는
저수지 벼랑 깊은 데서
꿈결인 듯 허리 펴는
할머니, 곡절 닮은
노랫가락 하나
잠깐 떠올랐다 가라앉는
음력 이월
쑥꽃
아버지는 엄마 무덤으로 갔다.
아버지가 떠나고 나서
꽃 무더기가 생겨났다.
산자락이 조금 환해지기도 했다.
시집<<누군가 나를 검은 토마토라고 불렀다>>에서
박완호
충북 진천 출생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1991년 <<동서문학>>으로 등단
시집<<기억을 만난 적 있나요?>>, <<물의 낯에 지문을 새기다>>, <<아내의 문신>>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