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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찾은 곳은 서신면에 있는 안곡서원입니다.
해 지는 서쪽을 향해 자리를 잡은 안곡서원은 야트막한 야산에 삼면이 둘러싸여 있어 아늑한 느낌입니다.
화성시에 유일하게 남은 서원이라는 안곡서원은 화성시 향토문화재 1호이기도 합니다.
서원 옆으로는 상주 박씨의 묘역이 자리합니다.
현재 안곡서원 자리는 현종7년인 1666년 남양현감으로 부임한 민시중이 지방 유림의 의견에 따라 기묘사화로
귀양을 간 박세희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안곡사가 있었던 곳이라고 합니다.
경종 1년인 1721년에 '안곡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으면서 서원이 되었는데,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헐렸다가 이 지역 유림들에 의해 1976년에 다시 지어졌다고 합니다.
현재 이곳에 배향된 분은 총 세 분으로
1.주벽-박세희(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상주,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 일파로 몰려
상주로 유배되어 죽음
2.박세훈(1488-1553) 1504년 연산군10년, 아버지가 죽자 남양에 있는 무덤 밑에 초막을 짓고, 시묘를 하며
3년간 죽만먹고 애통하게 지내니 고을 사람들이 효자라 칭송함. 20세에 과거에 합격하고도
학문만 열중하다 조광조의 천거로 벼슬을 하다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고향으로 돌아옮.
3.홍섬(1504~158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 1567년 예조판서가 되고, 선종 즉위 후 우의정에
올랐으나 남곤의 죄상을 탄핵하다 파직됨. 1571년 좌의정이 되고, 영의정에 승진되어
세번이나 중임함.
40년 전에 다시 지어진 서원인데, 강당의 배치가 뒤로 돌아 앉아있는 것이
매우 독특합니다. 분명 무슨 이유가 있을터인데, 무척 궁금하네요.
어쩌면 해뜨는 동쪽을 향해 강당을 돌려놓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강당 앞에서 오른쪽으로 보면 멀리 잠시후 가게될 당성과 신흥사가 보이기도 합니다.
분명 안곡서원을 찾아갔으나 눈길을 확 잡아 끈 것은 서원 앞의 수령 450년 가량된 거대한 은행나무였습니다.
1천년이 되었다고 해도 믿을 법한 위용을 자랑합니다.
느티나무 남쪽 고갯마루를 넘어온다면 이런 풍광이 보입니다.
은행나무 노거수와 운곡서원의 절묘한 배치! 캬~~!
하지만 안타깝게도 걷는 길 노선을 이쪽으로 빼기에는 동선과 보행쾌적성 떨어지는 곳을
너무 길게 돌아와야해서 어려움이 많을 듯 합니다.
꼭 걷는 일이 아니더라도 놀이 삼아 다녀와도 좋을 법한 아늑한 마을입니다.
은행나무의 좋은 기운 받고 다음 행선지로 갑니다.
혹시 사강시장이라고 아세요?
지금의 송산면소재지인 사강은 이 부근 교통의 중심지이자 가장 큰 재래시장을 형성합니다.
과거 포구가 가까웠던 덕에 어물전이 크게 형성되었고, 그 결과가 지금까지도 남아 있습니다.
내륙의 자그마한 동네에서 큰 포구의 어시장을 보는 듯 하여 깜짝 놀랐습니다.
사강을 제가 생각지 못했던 지역문화의 보물입니다.
도대체 우리나라에는 얼마나 많은 보물들이 숨겨진 걸까요.
이 귀중한 자산들을 길들로 꿰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다시금 해봅니다.
사강 터미널입니다. 이 지역의 곳곳을 실핏줄처럼 연결하는 버스들이 지나는 곳이지요.
차를 타고 이동한 곳은 구봉산 자락에 자리한 신흥사입니다.
꽤 큰 부지에 자리한 신흥사는 꽤 오래된 작은 암자였던 신흥사에 성일스님이 1973년 부임하시면서
불사를 일으켜서 지금은 상당한 규모의 사찰이 된 곳입니다.
부처님교화공원까지 조성된 신흥사는 모든 편액과 심지어는 기둥에 새로로 건 주련까지
한글로 써서 신도들을 배려한 것이 돋보였습니다.
1천평 규모의 청소년수련원을 건립하여 해마다 3천여명의 수련생을 배출하고 있으시다네요.
큰법당(무량수전)의 꽃무늬 창살이 예뼈서 한 컷 남겨봤습니다.
창살 사이로 친견한 삼존불입니다.
먼저 좌협시한 관세음보살님은 인근에 있는 당성의 옛 절터에 있던 것을 불자가
100년 전 기진 한 것이라고 하고, 중앙의 아미타불은 대부도의 불도마을이라는 곳에
바다에서 건져져서 마을에 모셨다는 부처님을 모신 것이라고 합니다.
우측의 대세지보살은 삼존불을 완성하기 위해 10년 기도 후에 새로 조성한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기도를 드리고 계시는 성일스님이십니다.
걷기여행길 컨설팅과 관련한 말씀을 드리니 바로 옆 신도회장님을 연결시켜주셔서
따스한 차 한잔과 더불어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다 왔습니다.
바로 옆 당성에서 10년 기도 후에 발견한 약사여래상을 이렇게 모셨다고 합니다.
상반신 일부와 불두는 훼손된 것을 새롭게 조성했다고 합니다.
교화공원을 비롯해 둘러볼 곳이 많은 사찰입니다.
이곳은 신흥사 바로 옆에 자리한 당성 이란 곳입니다.
이름 그대로 당나라를 오가던 포구를 지키던 성이 있던 것이지요.
신라, 백제, 고구려가 이 성을 탈환하기 위해 싸운 흔적도 볼 수 있습니다.
현재 당성의 재조명을 위한 발굴작업이 한창이랍니다.
산정상부의 퇴뫼식 산성을 1차로 하여 후에 계곡을 감싸는 큰 규모의 포곡식 산성으로
발전한 2차 산성까지 집중적으로 발굴이 이뤄지고 있다고 합니다.
최근 3차에 걸친 발굴조사에 의해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 유물이 다양하게 출토되었고,
당나라 시대 형태의 기와가 출토되어 당성의 진위논란으로부터 자유로워 졌다고 합니다.
즉, 이곳 앞바다가 국제적 해상교류의 중심지라는 역사적 가치가 부각되는 셈이지요,.
발굴과 관련된 다양한 임시 안내자료들이 있습니다.
당성 올라가는 길
멀리 당성 일부가 보입니다.
이날 시계가 너무 좋지 않아 당성 조망은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답니다.
이 사진은 통일신라시대의 간선교통로로 추정된 경주로부터 이곳 당성까지의 이동경로입니다.
중간에 이름 들으면 아실만한 산성들이 보이실거예요. 삼년산성, 상당산성, 죽주산성 등...
새벽부터 돌아다녔는데, 벌써 점심시간입니다.
전곡항 앞에서 바지락칼국수로 맛나는 식사시간을... ^^
전곡항은 요트 등의 해양레저 특화 항구로 이름이 높지요.
전곡항에서 갯벌 위의 안고렴섬을 거쳐 제부도 입구까지 가는 갯길이 있다고 해서
살펴보려 했는데, 저렇게 막혀 있네요. 나중에 시청의 협조를 얻어 다시 가 봐야겠습니다.
화성시의 해안로 상당부분은 이렇게 걷기 좋은 보행로를 확보하고 있습니다만,
아직 완전하진 않습니다.
제부도를 향하는 물길입니다. 왼쪽으로 인도도 별도로 확보되어 안전하게 제부도로 건너갈 수 있습니다.
인근의 백미리 갯벌체험마을이 있는데요.
어떤 체험을 할 수 있는지는 조금 시간을 두고 살펴봐야겠습니다.
이런 갯벌의 길들을 걷기여행길로 활용할 수 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물론 물때의 영향을 아주 강하게 받게 되겠지요.
화옹방조제 북단의 궁평항입니다. 낙조가 아름다워 사진 찍는 분들이 자주 찾는다고도 하지요.
다시 차를 타고 5분 정도 이동하여 들린 이곳은 경기도에 몇채 안되는 전통가옥 중 하나인 정용채 가옥입니다.
50칸 규모의 이 집 밑으로 초가로 지어진 정용래 가옥이 함께 합니다.
조선 말기에 지어진 살림집으로 사랑채와 안채가 연속하여 놓여서 생활의 편리함을 꾀하면서도
안채와 사랑채를 연결하는 복도를 두어 내외를 명확하게 구분하는 특징을 지닌다고 합니다.
설명문에도 있지만 주변 지형을 고려한 배차가 우수하다는 느낌을 받고, 매우 개성있는 구성을 보여줍니다.
문이 닫혀 있어서 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뒤쪽의 낮은 담장 너머로 살펴본 모습입니다.
정용채 가옥 바로 밑의 정용래 가옥입니다.
초가가 정말 예쁘게 자리합니다. 소박함이 마음에 더 다가옵니다.
설핏 잠겨 있던 빗장을 열고 살짝 안을 들여다 봅니다.
도리와 창방 등의 부재들의 자유로운 선이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듯하여 더 곱게 느껴집니다.
이곳은 왕모대포구 마을입니다.
예전에는 이곳까지 배가 들어와서 흥청거렸던 동네였으나, 1991년 시작된 화옹지구 간척사업으로
이제는 바다부터 이곳까지 밀고 들어올 배가 더 이상 없게 되면서 쇠락한 마을이 되어버렸습니다.
왕모대포구 마을 앞 간척지입니다. 덤프트럭 공사차량만 오가고 있습니다.
이쪽으로도 걷기여행길을 내면 좋겠다는 화성시 관계자의 조언으로 와보았으나,
현 상태 그대로라면 걷기여행길 경유지로 부적절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차를 타고 이동한 남양 홍씨인 홍담(1509~1576)의 효자각입니다.
이 일대는 남양 홍씨 묘역으로 관리되고 있더군요.
남양 홍씨 묘역에서 좀더 깊숙히 들어가면 가장 안쪽에 자리한 홍법사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일본의 홍법대사와 혹시 관련 있는 절 인가 하고 가봤더니.
광해군 당시인 1611년 처음 세워진 절이더군요.
전해지는 전설이 흥미로워 옮겨봅니다.
광해군 2년인 1610년 당시 명나라 천자의 후궁으로 끌려간 홍법마을의 홍랑이 조선에서 가져간 물과 대추만 먹고 버티다가 굶어 죽고 말았는데, 죽은 지 3일만에 천자는 이름모를 병을 얻었으나 백약이 무효였다고 합니다. 이때 천자의 꿈에 홍랑이 나타나 방탕한 성품을 회개하고 백성을 아끼는 성군이 되어달라는 부탁과 함께 소첩의 혼이 담긴 보살상을 만들어 돌배에 태워서 무쇠뱃사공 12명과 함께 고향으로 보내달라 고 하였답니다. 이에 명나라 천자는 석수장이와 대장장이들을 시켜서 돌배와 무쇠사공, 보살상을 조각케하고, 자신도 불전에 나가 백일기도를 드리며 잘못을 회개했다고 합니다. 천자의 백일기도가 끝나는 날 완공된 보살상과 무쇠 12명 사공을 돌배에 태우 바다에 띄우니 이 돌배는 흘러흘러 꿈에도 그리던 홍랑의 고향 앞바다에 다달았다고 합니다. 홍법마을의 원로 3명 꿈에 홍랑이 나타나 서신 앞 바다에 보살상과 무쇠사공이 있으니 사찰을 지어 모시도록 하라고 하였답니다. 꿈을 꾼 노인들이 바다에 나가보니 정말로 돌배에 무쇠사공과 보살상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여 조심스레 이들을 내렸으나 보살상과 무쇠사공 2명만 내렸고 나머지 사공 10명과 돌배는 물 속으로 가라앉았다고 합니다. 그 후 홍씨문중에서는 서신 앞바다가 굽어보이는 마을 뒷산에 홍랑보살과 2명의 무쇠사공을 봉안한 사찰을 지었으니 그것이 홍법사라고 한답니다. |
홍법사 대웅전, 저 안에 무쇠사공 2분과 홍법보살상이 있다고 하니
궁금하여 아니 들어가 볼 수 없군요.
비로자나부처님이 정중앙에 계시고, 무쇠사공 2분이 협시를 하고 있습니다.
선조 때 당시의 보살과 부처님이신지는 여쭤보지 못했네요. ^^
지금의 자리에 절이 다시 중창된 것이 1920년대 였다고 합니다.
이곳은 다시 차를 타고 이동하여 들린 법흥사입니다. 홍법사와 직선으로는 600m정도이나
작은 야산으로 막혀있기에 차로 이동하면 빙 돌아가기 때문에 5km쯤 됩니다.
사세가 적지 않은 사찰인데, 그 연혁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다음에 가게 되면 종무소에 들려서 자세히 알아봐야 할 듯 합니다.
대웅전에 모셔진 비로자나부처님의 모습이 매우 친근하게 느껴집니다.
마치 동네 어귀에 모셔진 듯 한 민불 같기도 한데, 그렇게 보기에는 조각의
수법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불단 하단의 연화좌대로 사연이 있을 듯 하더군요.
원통보전에 보셔져 있던 천수천안관세음보살입니다.
33관음보살 중 기복신앙에 가장 가깝게 외형적으로는 느껴지는 분이다보니
요즘 천수관음보살 모시는 사찰이 조금씩 느는 듯한 느낌입니다.
이상은 화성시 서신면과 송산면의 다양한 문화유산과 지역문화자원들을 엮는 걷기여행길을
잇기 위한 사전조사 후기였습니다. 실제 길잇기 작업이 시작되면 매우 디테일하게 조사가
들어가게 되겠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보행 안전성과 쾌적성에 대한 고민이 많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도 즐거운 길에서 행복한 시간들 되시길 빕니다. ^^
첫댓글 조촐한 곳이지만 나름 의미있고 뜻있는 곳을 다녀오셨네요. 잘 다듬어 주시면 걷기 쉽고 재미있는 길이 될 듯 합니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상대적으로 좁은 지역인만큼 더 세세하게 들여다 보게 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
함께 여행은 못하지만 카페에서라도 즐겨봅니다~~^^
눈으로만 함께 하시는 것이 여행의 시작입니다. ^^
수원에서 멀지않은 곳이군요.
참여하고 싶네요~
이렇게 걷기길을 직접 발굴하시는군요.!
보통일이 아닌 듯한데 대단하십니다!
네. ^^ 가끔 길을 발굴하기도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