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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달리는 한국
함석헌
과거 반성
8.15의 스물여섯 돐이다. 스물 여섯 해라면 개인으로는 한 사람이 완전히 다 자라서 제 구실을 하게 된 나이요, 역사에서도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다. 2400년전 헬라 사람은 이만 밖에 아니 되는 동안에 소위 페리클레스 시대라 해서 전과 후에 비할 것이 없으리 만큼 찬란한 문화를 건설해서 서양 모든 민족의 문화에 표본이 됐고, 근대의 일본은 명치 혁명 이후 이에서 더하지 않은 기간에 봉건 제도를 벗어 버리고 일청 일로의 전쟁을 일으켜 이겨 가지고 대번에 동양에서 가장 강한 나라가 될 수 있었다. 하물며 스피드의 이 시대랴, 우리는 해방 후 이루어 놓은 것이 무엇인가? 솔직히 말해서 해방조차 완전히 못되고 있다. 뜻 깊은 역사의 날을 기념할 때면 정치업자들은 매양 잘됐다는 거짓 선전만 하고, 생각 없는 민중은 노라리 기분에만 빠지지만 나라는 그렇게 해 가지고 절대로 될 수 없다. 마땅히 과거를 깊이 반성해서 뉘우쳐 고칠 것을 고치고 현재를 똑바로 드려다 보아 알 것을 알아 문제 해결을 하며 미래를 멀리 내다보아 대세를 붙잡아서 민족의 나갈 방향을 결정해야 할 것이다.
당초에 해방부터 잘못 됐었다. 우리 해방은 우리 손으로 싸워서 얻은 것이 아니고 역사의 대세가 가져다 준 것이었다. 미국 소련이 우리를 동정해서 준 것도 결코 아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역사의 대세였기 때문에 그들도 거기 따라서 한 것 뿐이었다. 대세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의 명령이요, 해방될 수 있는 기회지 해방의 실상이 아니었다. 이것을 해방이 다 된 사실인 것처럼 생각했던 것이 큰 잘못이었다. 우리 자신이 다시 싸워 얻어야 하는 것인데 그 점을 우리가 잘 알지 못했다. 민족도 하나의 산 인격인데 어떻게 남이 대신하거나 그저 주거나 할 수 있겠는가? 개인의 혼이 누구를 죽일 수도, 죽임을 당할 수도 없는 것인 것처럼, 민족의 혼도 누구를 멸망시킬 수 있는 것도, 뉘게 멸망당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자유를 누가 주는 것도 뉘게 받는 것도 아니다. 다만 천년이 가도 스스로 싸워서만 얻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까지도 그때 우리는 해방이 됐다고 하니 어찌 정신이 있다 할 수 있겠는 가? 참 대로 말한다면 야심 있는 일본을 한 때 눌러 놓고 “자 네가 자유해봐” 한 것 뿐이었다. 일본을 누른 것도 한 때지 영구히가 아니다. 왜? 어느 나라가 어느 나라를 영구히 누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 일본이 갔다고 우리를 얽매던 제국주의가 아주 간 것도 아니었다. 왜? 역사는 사람의 일이기에 서로서로의 책임이지 일방적이 아니다. 일본이 먹어서만 우리가 망했던 것처럼 생각하는 데가 또 크게 잘못이다. 제국주의의 가장 악독한 데가 바로 거기인데 한 민족에서 책임감을 없애 버리는데 인데, 우리가 깨닫지 못했다. 그러므로 제국주의는 여전히 우리 안에 가능성으로 있었다. 상대자가 갈리면 또 다시 남의 식민지가 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기 때문에 대세가 올 때는 그것을 잡아 탈만한 정신적 또는 물질적 준비가 돼 있어야만 한다. 못됐거든 온 후에라도 시급히 해야 한다. 역사에 무임승차는 없다. 해방 후 한 동안 무임승차의 버릇이 유행했던 것은 우리의 그 역사적 태도를 단적으로 잘 드러내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라 어제까지 제 말 쓰지 말라면 말못하고, 제 옷 입지 말라면 맞지도 않는 유가다에 게다 끌고 나오고, 성 고치라면 조상의 위패 똥통에다 던지고 일본 이름 쓰고, 젊은 놈 남의 전쟁에 나가 죽으라고 시국 강연 하라면 있는 지식과 말 재주를 다 떨어 하던 사람들이, 사람이 아니라 놈들이 어떻게 그대로 해방 받아 자유 하노라 할 수 있겠나? 생각이 옅었다.
그 다음 새 날이 오고 새 임 맞는다면 청소부터 하고 거치른 것으로나마 새 옷 입어야 하지않나? 낡은 악을 청산 했어야 하는데 못한 것이 많다. 잘못된 국민성격이나 사회 풍습 같은 것은 하루 이틀에 아니 된다 하더라도, 지난 날 일본의 앞잡이 노릇하던 것만은 싹 씻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해방 후, 북한은 또 몰라도, 이 남한에서는 정치, 군대, 경찰이 주로 친일파로 되지 않았나? 이 무슨 운명인가? 이리해서 일본제국주의는 여기서 새 모양으로 자라게 됐으니, 오늘 일본사람이 다시 자기 옛 집 찾아들 듯 꺼림도 부끄럼도 없이 오는 것을 이상하다 할 것이 없다. 이점은 미국을 나무라고 싶고 죽은 이승만에 채찍을 더하고 싶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민중이 정말 똑똑 했다면 그들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썩었다.
또 결심도 부족했다. 정신적으로 그런데다가 일본이 물러갈 무렵은 긁어 먹을대로 긁어먹어서 물자가 말랐고, 기술도 배우지 못하게 했으니 없었고, 정치 경험도 기회 주지 않았으니 못해서, 여간 어려운 조건이 아니었다. 거기서 새 역사를 지어 내려면 전 민족이 비상한 결심을 하고 고난에 견딜 각오를 뭉쳤어야 할터인데 그렇지 못했다. 미국 군대 소련 군대 오는 것을 보고 그저 환장이 되어 미친 것이 그것을 증명하지 않나?'
국론 통일을 못했다. 이 책임은 정치인들이 져야한다. 미.소의 세력은 우리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남이야 어쨌든 우리는 우리 할 것을 하는 것이 책임인데, 그 밖 에 길이 없는데, 또 그렇게 했다면 될 수 있지 없는 것이 아닌데, 그때에 나서는 사람들이 누가 천거한 것 아니고 자천해서 나왔는데, 그렇다면 절대로 야심이 있어서는 아니 될 것 인데, 그들이 민족의 운명 생각 보다는 권세욕이 더 강했기 때문에 민중의 힘을 얻어 외국 세력을 견제하려 하지는 않고 반대로 외국 세력에 붙어 지배권을 쥐려했다. 그랬기 때문에 민족 분열을 만들고 말았다. 악한 놈들이다.
또 아무 이념이 없었다. 설계도 없이 집을 짓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찌 바로 될 수 있겠는가? 역사 짓는 비결은 전화위복에 있다 할 것이다. 나쁜 환경이나 조건을 아니 만날 수는 없고 만났으면 그것을 내 목적에 맞도록 뒤집어 이용하는 재주가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우선 목적이 서 있어야 하지 않나? 소련이 북에 왔어도 공산주의는 그들의 이념이지 우리 것 이 될 수 없으며, 미국이 남에 왔다 해도 민주주의는 그들의 것이지 그 제도를 그대로 모방해서 될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어떤 나라를 세우자느냐 생각이 있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오늘까지 아무 것도 없다. 언제 민주주의를 민중에게 가르친 일이 있던가? 정치한다는 그들 자신이 민주주의의「民」자만 알았다면 오늘까지의 이런 따위 정치는 아니 했을 것이다. 정치가 아니다. 그저 권력부림이지. 민중과 외면하고 자기네끼리만 둘러앉은 사람들께 이념이 어찌 있겠나? 이(理)는 전체에서만 나오는 것인데.
현실 직시
정말 해방이 되려면 현실을 똑바로 드려다 봐야 한다. 구렁을 보지 않고 어떻게 빠져 나오며 독사의 굴을 보지 않고 어떻게 독사를 잡겠는가? 똑바로 보아야 한다. 정면으로 눈을 크게 뜨고 보아야 한다. 유심히 보아야 한다. 그저 눈을 뻔히 뜨고 본다고 보는 것이 아니다.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 목적 두고 의미를 찾는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 아무 해석이 없는 주마관산(走馬觀山) 식의 보는 것으로는 역사의 주인이 될 수 없다. 경제의 구렁, 정치의 독사는 굉장히 복잡 교활한 조직 기술이기 때문에 생각이 없이는 보고도 모른다. 그러기 때문에 민중에게는 반드시 날카롭게 또 깊이 물건과 일을 분석 비판하는 정직하고도 찬찬한 학자가 있어야 하고, 또 중간에 서서 돼 가는 일과 생각을 잘 보도해 주는 민첩하고도 대 바른 언론인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게는 지식인들이 왼통 기가 죽었으니 어떻게 하나?
현실을 똑바로 본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현실이란 곧 상처다. 없음에서 있음을 조각해 내는 것이 삶이란 것인데 어떻게 찢어지고 피 남이 없겠는가. 현실을 보면 상처 투성이요. 미래의 휘장을 열어 제치려 할 때는 언제나 그 앞의 죽음의 형상이 서서 지키고 있는 것을 본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은 허상이다. 내 마음의 약한 것 때문에 일어나는 허께비지 실상이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역사적 민족의 첫째 자격은 용감이다 겁이 없어야 그 휘장을 찢을 수가 있고 그래야 현실은 제 참 모습을 보여 준다.
그뿐 아니라 민중의 눈을 가리우려는 도둑들이 있다. 현실의 보물 창고의 문을 열면 민중이 직접 앞장 설 줄을 알기 때문에 야심 있는 지배자들은 여러 가지 방법을 써서 현실을 가리우려 한다. 월남 가서 군인이 죽어도 몇 사람이 죽은 것을 보도하지 못하게 한다. 공장 안에 노동자의 불평이 있어도 그 기사를 신문에 보도하지 못하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 바른 언론과 정직한 학자 없이 아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또 민중의 뒷받침이 없이 학자와 언론인은 있을 수 없다. 민중이 모를 때는 지식인이 강해야 하고, 지식인이 약할 때는 민 중이 채찍질을 해야 한다. 일제시대에 “친일파”란 말은 세계에서 제일을 자랑하는 일본 군대보다도 더 무서웠다. 그랬기 때문에 학자가 감옥 가는 것을 영광으로 알았고 신문사가 정간 계간 당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활자를 뒤집어 먹으로 박은 것이 나오면 신문이 더 팔리는데 어찌하겠나? 그런 기억을 하며 동아일보사 조선일보사를 바라보면 단번에 불을 지 르고 싶은 생각뿐이다. 정신 다 죽은 다음에 생긴 휴지 팔아먹기 신문들이야 이빨에 걸 것이나 있겠는가?
그럼 그런 생각을 가지고 민중 제 눈으로 볼 때 무엇이 뵈나?
첫째 민족의 분열이다. 물론 남북 분열이 우선 문제지만 그것만 아니다 남 안에도 자체 분열이 있다. 하나 둘만이 아니라 분자화다. 돌아가는 말이 불신풍조라 하지 않던가? 북에 도 마찬 가지일 것이다 언론의 압박이 있는데 어떻게 분열이 없겠나? 언론은 민중의 신경이다. 신경이 마비되면 제 몸을 가누지 못하지 않던가? 민족 통일이 첫째 과제인 것을 모를 사람이 누구겠나? 그러나 참 어렵게 됐다 대세가 오지 않아 어렵단 말 아니다. 대세는 틀림없이 올 것이다. 그러나 그 올 때의 우리 안의 준비가 문제다. 일반 씨알에게 문제 있을 것 없다. 씨알은 십년을 마른 이로 두어도 죽지 않는 씨알이다. 그것은 맨 사람대로 있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남북의 차이도, 유식 무식의 차이도 없다. 칼로 물을 잘라도 물은 아니 잘린다. 칼만 빼면 언제나 하나다. 소위 이데올로기란 것, 체제란 것 칼 같은 것이다. 씨알은 약하기 물 같아도 체제로 인해 그 근본 성격을 잃지 않는다. 문제되는 것은 씨알의 자리를 떠나 높아지자고 무슨 지위에 올라간 인간성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북의 정치인, 남의 정치인, 북 의 공무원, 남의 공무원, 북의 군대 남의 군대 이런 사람들이 문제다. 대세가 오는 날 재빨리 회개하고, 있는 것을 다 돼지 먹는 주염 껍질로 알고, 알몸으로 나선다면 문제가 없는데, 조국이 그들을 받아 드리는 것이야 탕자의 늙은 아버지 같이 할 것 이지만, 그들이 그렇게 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이것이 민족의 장래를 위협하는 가장 큰 걱정이다. 그들이 나라 민족의 장래보다 제 가지고 있는 돈과 지위에 말라 붙지 않을까?
그 다음 우리는 빚을 졌다. “빚진 종”이라는 옛 말을 생각해 보면 그만이다. 빚을 갚기 전에 자유 없다. 자세한 것을 물을 것 없이 일본의 빚 졌으면 일본의 종이다. 36년 지나 봐서 일본 사람이 인심이 후한 민족도 아니요, 또 주고도 뺐길 멍청이는 절대 아니란 것을 잘 안다.
그 다음 그것과 어쩔 수 없이 붙어 있는 외국세력이다.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자주 독립 민족이 못된다. 외국 군대 외국 자본이 들어와 있는 한 독립 없다. 이것을 내 몬 다음에야 국민이다. 어떻게 할까?
마지막으로 사회 풍조의 썩어짐이다. 지배자들은 민족의 장래가 문제 아니라 자기가 권세 누리는 것이 문제기 때문에 그저 잘 된다 잘된다 해서 자기 살 동안만 지나가면 그만이라 생각한다. 신라 경순왕은 망하는 순간까지 포석정서 안심하고 놀았고 어리석은 李王은 제 지위는 보존이 되거니 했다. 민중도 속는다. 정신 깬 민중은 짜 먹기 어려운 것을 알기 때 분에 될수록 모든 것에 호화로운 풍을 길러 민중의 정신이 마비되도록 한다.
십자로
이러는 즈음에 갑자기 아시아 정국에 변동이 왔다. 갑자기도 아니다. 생각하는 사람들은 벌써 알고 있지 않았나? 생각 없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의외다. 미국 중국이 가까워지고 일본 중국이 손을 잡으려는 것이, 그 속셈이야 어쨌든 세계의 현상으로 볼 때 좋은 일이지 나쁜 일이라 할 수가 없다. 그런데 우리 입장은 딱하게 됐다. 까닭이 어디 있나? 내 힘대로가 아니고 남의 힘에 곁들어 가던 길이기 때문이다. 우리를 끌고 가던 사람은 저를 위해 한 것이지 우리를 위해 한 것이 아니었다. 이 다음은 몰라도 지금까지는 국가란 자기 본위지 남을 위한 것이 아니다. 개인에서는 자기 희생이 덕이어도 나라에서는 그것을 죄악으로 안다. 여기 현대 국가주의의 잘못된 점이 있고 국가의 선고 받은 운명이 있는 점이지만 우리가 남을 생각할 때는 이상주의로만 생각하는 것은 스스로 속임이다. 하여간 앞서 가는 자가 자기 본위로 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미리 통고 없이 적당하다 하는 때에 갑자기 노선을 변경 해 도 나무랄 수가 없다. 그러나 따라 오던 뒷 차량의 운명은 참으로 참혹한 것이다. 앞선자는 새 계획대로 한 것이니 조절해 갈수가 있지만 뒷 놈은 타성에 의해 꺼꾸러질 수밖에 없다. 우리 남북한의 운명은 그것 아닌가? 이것을 그림으로 표시한다면 마치 십자로와 같다. 38선이 그어졌을 때 우리는 남.북으로 긴장됐다 북을 따를까 남을 따를까가 문제였다. 그것은 이데올로기의 문제로 나타났다. 그렇게 해서 소위 냉전시대를 지나는 동안 변동이 오기 시작했다. 우리가 생사선 위에 딩구는 동안 이익을 본 것은 동의 일본과 서의 중공이었다. 일본은 경제적으로 부흥할 기회를 얻었고 중공은 군사적으로 강해질 기회를 얻었다. 이제 그들이 이때까지의 남.북의 종적 긴장선에 대해 동.서로 서로 이끌어 횡적 새 긴 장선을 죄기 시작했다. 그렇게 돼서 우리는 이제 십자로 상에 서게 됐다. 이때까지 나는 우리 역사를 고난의 역사라 하면서도 행여 이제는 끝이 났으면 했는데, 끝이 나긴 고사하고 이제 정말 본격적인 고난이 오게 됐다. 전엔 고생을 해도 민족 정신을 잃을 염려는 없었는데 이번에는 민족이 아주 없어진 위험이 있다. 사람이 아무리 있다기로 민족성이 없는데 무슨 민족이라 하겠나? 이제 침략은 정치 경제, 군사만 아니라 문화적으로 오고 있다. 이 민중은 생각이 있는가 없는가? 어디로 가려나 십가로가 아니라 십자가다. 이제 정말 못을 박힌다.
길이 어디 있나? 길은 東도 아니요, 西서 아니요, 南도 아니요, 北도 아니다. 길은 오직 한 점에 있을 뿐이다. 그 한 점이 어딘가?
孟子에 말에 定于一이라는 말이 있다. 梁양王을 봤더니 “天下는 어디가 결정이 되는 것입니까”하고 물었다. 거기 대한 맹자의 대답이 “定于一이라 하나에 가서 定해진다.” 또 묻기를“누가 그 一을 할까요” 하는데 대해 맹자는 다시 “사람 죽이기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하지요”했다. 또 다른 데서는 이런 문답이 있다. 膝文公이 묻기를 “우리 나라는 조그만 나라인데 큰 나라 齊와 楚 사이에 끼어 있어서 참 어렵습니다. 齊를 섬겨야 합니까 楚를 섬겨야 합니까?” 그 질문을 받고 孟子는 말하기를 “그것은 제가 알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정말 할 수 없거든 나는 한가지만 말하겠습니다. 성을 높이 쌓고 못을 깊이 파고 죽을 각오로 지 켜서 백성이 떠나지 않고 같이 한다면 해 볼만 합니다”했다. 거기도 하나란 것이 있다. 그 하나가 무엇인가.
십자 위에 섰으면 그 네 길의 어느 길로도 나갈 수 없다. 그것은 남의 길이지 내 길이 아니다. 남으로 가면 북이 가만 아니 있을 것이요, 동으로 가면 서가 노할 것이다. 다만 할 수 있는 것은 교차점에서 위로 직상 하는 것 밖에 없다. 그것이야 말로 내 길이다. 위로 올라가는 것만이 길이다. 역사의 길은 생명의 길이기 때문이다. 생명은 자라는 것, 자람은 위에 있다. 위가 어딘가? 나, 자신에서 사뭇 하늘로 향하는 것이 위요 자람이요 나감이다. 역사는 거기만 있다. 그것이 창조의 길이다.
예수의 말씀에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란 말이 있다. 그것은 보통 예수를 믿으라는 뜻으로 해석 되지만 깊은 뜻을 알려면 그 나를 어느 개인 나로 알 것 아니라, 참 나, 곧 나와 모든 나의 본질이 되는 나로 해석해야 한다. 내가 곧 길이다. 사는 길이 나에 있다. 나를 살리는 것이 곧 남을 살리는 것이 될 때, 그 길이 참 길이다.
직상의 중도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中道라 할 수 있다. 中道는 中과 和의 道다. 원리로는 中이요 실천으로는 和다.
남 북 대립이 왔을 때 우리 문제는 中에 있었다. 좌도 우도 아닌 중이다. 둘 중 어느 것을 택할 것 아니라 나는 내 길, 곧 보다 높은 길, 둘의 대립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 고난의 역사의 사명이었다. 말을 바꾸어 한다면 그렇게 해서만 고난을 벗어날 수 있다.
동 서의 긴장이 나타난 것은 이데올로기 문제가 아니다. 나라 힘의 문제요 외교 문제다. 그러므로 그 대답은 和에 있다. 친일 친중이 문제 아니다. 세계 평화가 문제다. 문제를 그렇게 잡지 않고 해결할 수 없다. 지난날 외무장관은 실리외교를 하겠다고 했지만 그것은 아무 확실한 외교 원리와 노선의 결정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천 년 전에 올라가서 德者本, 財者末,外本內末 爭民施奪이란 가르침을 배워 가지고 와야 할 것이다. 和는 약자는 못한다. 내가 정신적으로 강자의 지위에 서고야 된다. 이른 셈든 아재비가 지는 것이다. 강하고야 능히 和同올 부친다. 中ㆍ日和同을 부쳐라.
누가 강하냐? 나를 가진 자다. 맹자의 “하나”는 곧 민족적 자아다. 한 덩어리로 뭉쳐서 하나의 유기체가 된 씨알이다. 외교는 외교만이 하는 것 아니다 국민이 한다. 씨알의 뒷받침 없는 외교가 어떤 것임은 韓ㆍ日관계를 보면 안다. 그것으로 韓ㆍ日이 和하는 것 아니라 직 접 불리하게 만든다. 그 노골화 되어 가는 것이 소위 일본의 공보관 설치라는 문제다.
미래 투시
여기서 우리는 세계사의 나가는 앞을 내다 볼 필요가 있다. 인간은 그 살림을 전반적으로 고쳐 생각하지 않고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 중에서도 가장 달라져 야 할 것이 국가관이다. 정치가들은 제가 쥐고 있는 권력의 노예가 되어 감히 용단을 못하고 있지만 인류의 살림은 용서 없이 달라지고 있다. 이때까지 오던 국가주의가 이 이상 더 계속된다면 인류만 아니라 생명의 씨를 아주 없애 버릴 위험이 있는 것을 이제 전문 학자가 아닌 보통 사람으로도 느끼게 됐다. 이럴 때 인간은 눈앞의 이익 향락만 아니라 크게 책임 감과 의협심을 발휘해야 할 때다. 이제 세계구원, 생명보존이란 생각 내놓고 경제니 정치니 교육이니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니라 죄악이다. 회개의 길도 내 놓지 않는 죄악이다. 한 번 잘못하면 죽음만이 세계를 다스린다.
이런 자리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 볼때 우리는 도리어 용기를 얻는다. 앞서가는 차가 제 세상인 줄 알고 달리 다가 그것이 죽음의 길인 것을 발견하고 어쩔 줄 모르는 때에 뒤떨어 졌 던 우리는 그 불행을 행으로 단번에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대국은 대국이기에 방향 변경을 하고 싶어도 못 하는 점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경제적으로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가진 것이 없는 자 아닌가? 여기서 우리는 예수의 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저의 것이다” 세상에 우리처럼 가난한 나라가 어디 있나? 이제 돈이 없고 천연자본이 없을 뿐 아니라 고유종교 고유철학 조차도 있다할 수 없는 것을 부끄러워 할 것 아니라, 다행으로 알 수 있게 됐다. 이제는 새 차원이 나타나려 하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는 한국
예수는 그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부끄러운 실패의 십자가를 인류구원의 십자가로 변경시킬 수가 있었다. 못생긴 마음으로 죽으면 짐승이요, 생을 초월한 마음으로 죽으면 보다 높은 생이다.
東ㆍ西ㆍ南ㆍ北 긴장의 교차점에 선자는 화 있을진저! 갈 길이 없다, 그러나 복 있을진저, 네가 스스로 밑으로 떨어지지만 않고 골고다의 십자가처럼 버티고 서기만 한다면, 네게서 새 차원의 진화로 올라가는 돌변화가 일어난다.
생명이 씨알로 된 것은 깊은 신이다. 씨알이란 개체 속에 있는 전체다. 그러기 때문에 무수하게 썩는 씨알이 있어도 그 중 작은 어느 한 알이 전체를 건질 수가 있다. 새 창조를 할 수 있다.
돈에 취하고 권력에 취하는 썩어진 씨알은 마음껏 먹고 썩어질 대로 썩어지라 해라! 하나의 씨알이 새 생명으로 싹이 틀 때 그것은 좋은 거름이 될 것이다. 그럼 내가 너를 더럽다 아니 하리라, 너는 나를 미워했고 없신여겼어도 내가 어찌 너를 같이 미워하고 없신여길 수야 있겠느냐? 네가 이북에서 썩거나 이남에서 썩거나 일본에서 썩거나 또 중국에서 썩거나, 그 어떤 역사의 쓰레기통에서 썩건 간 나는 너를 업신여기지 않을 것이다. 제발 네가 비록 유리처럼 역사의 나가는 바퀴에 찍혀 사도에서 악마의 자식으로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부디 우리 믿기를 잊지마라!
그럼,一大 역사적 결정을 해야 할 것이다. 십자가에 달릴자의 가장 중요한 일은 어느 순간에 각오의 결정을 내리는 일이다. 아래는 지옥이 있고 위에는 새 나라가 있다.
이것으로 골고다 길의 구래네 시몬의 응원을 삼는다 !
씨알의소리 1971. 8월 3호
저작집30; 5-59
전집20; 17-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