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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
***간증: 1408. [역경의 열매] 김진숙 <1-15> “나의 고난은 홈리스 섬기라는 주님 뜻”
질곡의 역사 속에서 숱한 아픔 기적처럼 고비마다 용기와 희망 주셔
미국 홈리스들의 대모(代母)로 불리는 김진숙 목사가 지난 3일 서울 도곡로 롯데백화점 앞 거리에서 두 손을 모은 채 환하게 웃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나는 미국 워싱턴 주 시애틀에서 홈리스 사역을 하는 한인교포이자 미국장로교 은퇴 목사다. 홈리스 사역에 나설 때마다 ‘홈리스 근절(END HOMELESSNESS)’이라고 적힌 보라색 옷을 입고 다녀서 여기서는 ‘보랏빛 목사’로 불리곤 한다.
내가 보라색 옷을 입는 이유는 그것이 사순절의 색깔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기까지 십자가의 고난을 함께 슬퍼하고, 홈리스를 향한 우리의 무관심과 죄를 회개하며, 나아가 그들을 섬김으로써 그리스도의 사명을 다하겠다는 뜻이다.
나는 아픔이 많은 사람이다. 내 삶은 고난과 역경의 연속이었다. 인생 첫 10년은 이북에서, 24년은 남한에서, 이후 47년은 미국에서 살았다. 돌이켜보면 여든두 살이 된 지금 두 발을 땅에 딛고 선 채 마음껏 숨을 들이마실 수 있는 것조차 하나님의 기적이라 생각될 정도로 거친 세월이었다. 국제정세로는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피난 생활, 미국 이민 등의 기나긴 터널을 헤쳐 왔다. 질곡의 역사 속에서 개인적으로 숱한 아픔이 있었다. 가부장적인 집안에서 어린 날 목격한 아버지의 폭력은 평생 악몽이 됐다. 열한 살 때에는 공산당을 피해 오라버니 손을 잡고 산속을 헤맸다. 월남한 이후에는 전쟁의 공포와 지독한 가난에 시달렸다. 학교 다니면서는 남존여비의 구습에 맞서야 했다. 몸도 약했다. 다섯 살 때부터 천식을 앓아 지금까지 11번이나 수술대에 올랐다. 6·25전쟁 때에는 아버지 역할을 하던 큰오빠를 잃었다. 미국으로 건너가 장남을 잃고는 하나님께 ‘제발 절 죽여 주세요’라며 매달렸다. 그렇게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삶이 이어졌다.
그래도 난 살았다. 하나님이 고비 때마다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어 주셨다. 때론 함께 울어주셨다. 결국 하나님과의 싸움에서 KO 당했고 지금껏 하나님 등에 업혀 살고 있다. 역경을 견디니 기적처럼 인생 곳곳에서 열매가 송골송골 맺혔다. 내 몸 하나 살기 위해 흘렸던 눈물은 이제 미국 전역을 누비며 홈리스를 살리려는 눈물이 됐다. 하나님께서 날 업었다 여기저기 내려놓으셨는데 그곳마다 천신만고의 생을 사는 미국 홈리스들이 있었다.
때때로 내 인생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느낄 때면 그 경이로움에 나 스스로도 놀란다. 고통으로 점철됐던 내 인생을 주님이 함께 아파하신 것처럼 나는 지금 홈리스들의 아픔을 나누고 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했으니 내 인생이 결국 보랏빛 인생인 셈이다.
누가 나 같은 이름 없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질까 의심스럽다. 소름 돋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기억을 글로 옮기려니 끔찍한 기분도 든다. 하지만 나처럼 아픈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용기와 위로를 줄 수 있다면 의미가 있겠다 싶어 용기를 냈다. 그것이 ‘하늘 보다 높고 바다 보다 깊어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닷물을 먹물삼아 기록해도 못 다 할’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는 일이라 믿고 글을 시작하려 한다.
정리=김상기 기자 kitting@kmib.co.kr
* [역경의 열매] 김진숙 <1> "나의 고난은 홈리스 섬기라는 주님 뜻"
* [역경의 열매] 김진숙 <2> 아버지 폭력 견뎌낸 어머니… 여성신학 공부 계기 돼
* [역경의 열매] 김진숙 <3> 11살때 작은오빠와 공산군 피해 산길 걸어 월남
* [역경의 열매] 김진숙 <4> 가난으로 어렵게 다니던 中2 때 한국전쟁 터져
* [역경의 열매] 김진숙 <5> 열다섯살에 전쟁 통 200리 길 오가며 가족 부양
* [역경의 열매] 김진숙 <6> 한신대 처음으로 여학생 1등 졸업 영광 안아
* [역경의 열매] 김진숙 <7> 수렁 같은 삶에 지쳐… 다시 미국 보내달라 기도
* [역경의 열매] 김진숙 <8> '英語의 바다'로 넣으신 주님… 美 사역 디딤돌 돼
* [역경의 열매] 김진숙 <9> 美서 보조 복지사로 첫발… 직장·집 한번에 해결
* [역경의 열매] 김진숙 <10> 잠겨 있는 옥문 열리듯… 주립시설 취업길 열려
* [역경의 열매] 김진숙 <11> 맏아들 사고로 잃고 매일 통곡하며 1년여 방황
* [역경의 열매] 김진숙 <12> 아들 잃고 미친 듯이 성경 읽어… 영적인 눈 뜨여
* [역경의 열매] 김진숙 <13> 여성 홈리스들에 속옷 지급… '속옷 교회'로 이름나
* [역경의 열매] 김진숙 <14> '홈리스 근절' 美 순회 설교… 71세에 박사 학위 따
* [역경의 열매] 김진숙 <15·끝> 내 삶은 소나기처럼 부어주신 축복에 대한 고백
약력=△함남 함흥 출생(1935년) △1946년 월남 △이화여고 △한국신학대 신학사 △미 풀러신학대학 석사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원 목회학 박사 △워싱턴주 홈리스 문제 고문위원 △시애틀 둥지선교회 개척 △김진숙홈리스교육재단 설립 △미국장로교 ‘믿음의 여성상’·‘홈리스 영웅상’ △이화여고 ‘이화를 빛낸 인물’ △대한민국 국민포장
***[역경의 열매] 김진숙 <2> 아버지 폭력 견뎌낸 어머니… 여성신학 공부 계기 돼
오빠 결혼식날 잔칫상 부순 폭군 아버지… 어머니 “공부해 당당한 여성 돼라” 격려
내 어머니 박효숙 권사. 평생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렸던 어머니는 내게 종종 “공부 많이 해서 절대로 학대 받지 않는 자신 있는 여성이 돼라”고 당부했다.나는 1935년 7월 26일(음력) 함경남도 함흥시 성청정 3정목 95번지에서 태어났다. 아들 세 명 뒤에 내가 태어나니 할머니는 “고것 잘했다”고 좋아하셨다고 한다. 오빠 중 한 명은 내가 태어나기 전 세상을 떠났다. 동네 최고 부잣집에 태어나서 먹고 입는 것 걱정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10살까지였다.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웠지만 어린 시절은 끔찍했다. 아버지의 무자비한 폭력때문이었다. 어머니는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그게 날 슬프게 했다. 불행했던 어머니는 신경성 속병을 앓았는데 나 역시 그런 어머니 뱃속에서 나고 자라서 그런지 어려서부터 소화불량과 각종 질병에 시달렸다.
아버지는 미남은 아니지만 보통 키에 피부가 희고 말씀이 적었다. 어머니와 결혼하고도 기생집을 드나들었다. 장남이 태어났는데 다른 여자와 살았다. 지금도 아버지의 폭력적인 모습이 선하다. 간혹 집에 오면 오빠들의 성적표를 조사했다. 성적이 만족스럽지 않으면 회초리를 들었다.
그러다 한 번은 어머니까지 때리기 시작했다. 집에서 애들 공부도 봐주지 않고 뭐했냐는 것이다. 어머니를 때리다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어머니의 머리채를 잡아 부엌으로 질질 끌고 가서는 아궁이에 집어넣으려고 했다. 자식들이 모두 울고불고 매달려 아버지를 말렸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앞을 가리고 심장이 멎을 것만 같다.
아버지는 그토록 난폭했다. 아버지가 집에 오는 날은 지옥이었고 우리끼리 있는 날은 천국이었다. 아버지는 큰 오빠가 장가가는 날에도 난리를 쳤다. 사돈댁 손님들이 다 자고 있는데 잔칫상을 부수면서 난동을 부렸다. 너무 겁이 나 앞집으로 도망쳤던 기억이 난다. 나중에 길에서 아버지와 비슷한 사람을 본 적이 있는데 소름이 돋을 정도로 끔찍했다. 지금 이 나이가 되어서도 아버지를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다니 미안하고 서글프다.
어머니는 머리가 명석한 분이었다. 학교를 다니지 못했지만 어깨 너머로 한글을 깨우쳤다. 밤에 내가 공부할 때 말없이 곁에서 바느질을 하셨다. 이따금 “어머니 내가 이걸 할 수 있을까요”라고 물으면 “네가 한다면 하겠지비”라고 하셨다. 어머니의 믿음은 내가 학업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힘이 됐다.
어머니는 젊어 함흥에 살 때 교회에 다니셨다고 한다. 훗날 내가 예수를 믿고 어머니를 다시 교회로 인도했다. 어머니는 서울 오장동에 있는 제일장로교회에 오래 출석했다. 어머니는 내게 여성신학의 토대를 물려주셨다. 어머니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며 ‘왜 여자는 이런 불이익을 당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을 품으며 자랐다. 어릴 적 자주 아픈 나를 몇 시간이고 업어 달래던 어머니의 따스한 등을 기억한다. 지금도 어머니 등과 하나님의 위로를 생각하면 감사의 눈물이 흐른다.
1945년 해방을 맞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북한에는 공산주의 정부가 들어섰다. 일본 기미가요를 부르다 김일성 찬양가를 불러야 했다. 소련 군인들이 들어왔다. 그들의 팔에는 시계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동네 유지였던 아버지 친구 몇 명이 맞아 죽었다거나 여자들이 소련군인들에게 겁탈당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상황이 갈수록 험악해졌다.
***[역경의 열매] 김진숙 <3> 11살때 작은오빠와 공산군 피해 산길 걸어 월남
먼저 서울 온 어머니·큰오빠 만나… 자유 찾았지만 가난한 생활 시작
큰오빠 김진호(왼쪽)와 작은오빠 김진우. 아버지 같던 큰오빠는 한국전쟁 때 전사했다. 나는 1947년 작은오빠와 함께 철원에서 서울까지 산속을 걸어 월남했다.나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함경남도 함주군 선덕면에서 살았다. 아름다운 곳이었고 집안 소유 과수원이 있었다. 해방이 되자 소련 군인들이 과수원에 심심치 않게 나타났다. 그들이 올 때마다 나는 올케 언니를 방 안에 숨겨놓고 몇 마디 배운 러시아말로 원하는 게 뭐냐고 물었다. 소련 군인들은 날계란을 가져와 삶아 달라거나 사과를 달라고 했다. 고작 10살이었지만 나는 올케 언니를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겁이 없던 건지 철이 없던 건지 모를 일이다.
어머니와 큰오빠 식구는 공산 치하에서 살 수 없다며 1945년 겨울 월남했다. 어머니와 큰 올케는 해산을 위해 선덕으로 돌아왔다가 46년 8월 조카를 낳고 다시 서울로 내려갔다. 나는 작은오빠와 남아 집을 지켰다. 작은오빠가 일을 나가면 산에 올라가 나무를 했다. 어둑어둑해지면 하루 종일 새끼줄로 묶은 나무를 어깨에 메고 내려와 밥을 지었다. 부잣집 막내딸이었다가 직접 일을 하려니 힘이 들었다. 그래도 울지 않았다. 47년 가을 작은오빠와 난 월남하기로 결심하고 철원으로 갔다. 아버지는 빼앗긴 땅을 되찾을지 모른다며 선덕에 남았다. 우리는 무서웠던 아버지를 미련 없이 떠났다. 그게 아버지와 마지막이었다.
철원에서 나와 작은오빠는 삼팔선을 넘으려던 다른 무리와 합류했다. 안내자를 고용하고 공산군을 피해 밤에만 산을 탔다. 아슬아슬하고 무서웠다. 작은오빠 손을 꼭 잡고 잠을 자면서도 걸었다. 며칠 밤을 걸었을까. 우리 일행은 어느 산 속에서 공산군에게 잡혔다.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방에 갇혔다. 공산군이 남자만 따로 데리고 갈까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제발 우리 오빠 죽이지 말아 주세요. 우리 오빠와 헤어지지 않게 해 주세요’라고 수없이 되뇌었다. 죽음보다 무서운 건 혼자가 될지 모른다는 공포였다.
공산군은 어쩐 일인지 우리를 해치지 않았다. 대신 이튿날 아침 집으로 돌아가라며 우리를 돌려 세웠다. 집으로 돌아가는 척 한참을 걷다 산속으로 빠져 다시 삼팔선을 향해 걸었다. 낮에는 자고 밤에는 걷는 고난이 이어졌다. 한 번은 산 속에서 인기척이 나자 오빠와 나만 남고 함께 있던 사람들이 삽시간에 사라지는 일이 벌어졌다. 오빠와 난 한참을 깜깜한 숲 속을 헤맸다. 내 손조차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 극한의 공포를 느꼈다.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소름이 돋는다. 천신만고 끝에 일행을 찾았다. 알고 보니 우리를 놀라게 한 사람들도 월남하던 다른 무리였다. 어린 나이였지만 목숨을 걸고 자유를 찾아나선 분들의 심정이 얼마나 절실한지 알게 됐다.
필사의 노력 끝에 한탄강에 이르렀다. 물이 차가웠다. 발을 담그면 바늘로 쿡쿡 찌르는 듯 했다. 드디어 자유의 땅에 왔다는 기쁨에 차 추운 강을 한달음에 건넜다. 그리고 또 한참을 걸어 검문소에 도착했다. 미군들은 우리의 머리와 등에 DDT를 뿌렸다. 열한 살짜리가 철원에서 서울까지 밤에 산길로 걷다니.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때는 절박한 세월이었다.
마침내 서울에서 어머니와 큰오빠 내외를 만났지만 또 다른 고난이 시작됐다. 비좁은 집은 말할 수 없이 추웠고 보리밥은 맛이 없었다. 이젠 가난이 내 인생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역경의 열매] 김진숙 <4> 가난으로 어렵게 다니던 中2 때 한국전쟁 터져
아버지처럼 의지하던 큰오빠 전사, 작은오빠도 인민군에게 잡혀가
난 어린 시절 사진이 거의 없다. 우산조차 못 살 정도로 가난했으니 사진을 찍는 일이 귀했다. 이화여중 1학년 때 나를 예수님께 인도한 친구 조영순(왼쪽)과 함께 찍은 사진.서울에서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춥고 배고프고 고달팠다. 어머니는 회현동의 한 호텔에서 빨래 일을 했고 큰오빠는 그 호텔에서 통역관으로 일했다. 우리 식구는 만두를 쪄 길거리에서 팔기도 했다. 근근이 입에 풀칠하는 수준이었다. 난 1949년 돈암국민학교를 졸업했다. 4학년에 월남해 졸업하기까지 우리 식구는 4번이나 이사했다. 어린 시절 이 경험이 나중에 집 없이 고생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계기가 될 줄 누가 짐작했겠는가.
가난한 피란민 아이였으니 부잣집 아이들이 많은 이화여중 진학은 꿈도 못 꿨다. 담임선생님은 그래도 입학시험을 쳐보라고 했다. 시험을 치르고 잊고 있었는데 합격 소식이 날아들었다. 어머니와 큰오빠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학비 댈 형편이 못되니 “누가 시험을 치라고 했느냐”고 호통을 쳤다. 집안의 돈을 모두 모아도 학비의 절반이 되지 못했다. 큰오빠가 이화여고 교장 신봉조 선생을 만나 사정했다. 신 선생은 “있는 돈만 가지고 아이를 데려 오라”고 해 가까스로 학교에 입학했다.
멋쟁이 친구들 사이에서 제대로 된 교복조차 입지 못했다. 국방색 여군 윗도리를 얻어 물을 들이고 흰 칼라를 달아 입고 다녔다. 누가 봐도 교복이 아니었다. 그래도 친구들은 날 놀리거나 업신여기지 않았다. 비오는 날에 자가용으로 등교하는 아이들도 많았고 비옷을 입은 친구도 있었다. 내겐 비옷은커녕 우산조차 없었다. 그건 사치였다. 동복이든 하복이든 단벌이었다. 밤에 빨아 말려서 아침에 다려 입었다. 교복이 구겨지는 것도 막고 버스비도 아낄 생각에 묵정동에서 정동 학교까지 걸어 다녔다. 그래도 난 공부하는 즐거움에 빠져 주눅 들지 않았다.
중학교 2학년 때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6월 25일은 주일이었다. 가족을 건사하기 위해 군인이 됐던 큰오빠는 머리에 기름을 발라 얌전하게 빗어 넘긴 채 외출했다. 큰오빠는 단정하고 상냥하고 친절한 사람이었다. 그날 아침 집을 나서던 게 내가 본 큰오빠의 마지막이었다. 내 든든한 후원자이자 아버지 같던 큰오빠와의 이별은 날 아프게 했다. 아버지 없이 살 수 있지만 큰오빠 없이는 살 수 없었다. 올케 언니와 어머니, 나는 매일 울었다. 지금도 이 글을 쓰면서 운다.
인민군은 3일 만에 서울로 들이닥쳤다. 정치인들은 국민을 버리고 달아났다. 우리 가족은 북한에선 숙청 대상인 지주였고 남한에서는 대한민국 국군의 가족이었다. 잡히면 즉시 총살감이라는 불안 속에 떨었다.
인민군이 들어온 지 며칠 뒤 나는 한강 근처에서 셔츠 바람으로 잡혀가던 미군을 봤다. 그 때 본 미군의 처참했던 얼굴을 6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한국전쟁에서 숨진 미군이 5만4000여명이라고 한다. 미국으로 돌아가 자살한 군인은 전쟁터에서 죽은 군인보다 많다고 한다. 남북한 인명 피해도 각각 100만 명이 넘는다. 큰오빠도 그 중 한 명이다. 전쟁은 너무나 많은 생명을 앗아갔다.
밤에 몰래 큰오빠의 군복을 태웠다. 군인 가족이라는 증거를 없애기 위해서였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조마조마한 삶을 살았다. 우리는 판잣집의 앞문과 뒷문을 죄 열어놓고 잠을 잤다. 언제라도 도망갈 수 있도록 준비해야 했다. 그러다 이번에는 작은오빠가 인민군에게 잡혀갔다.
***[역경의 열매] 김진숙 <5> 열다섯살에 전쟁 통 200리 길 오가며 가족 부양
서울에 쌀 팔고 다른 물건 사 시골에 팔아… 다섯 식구가 상자로 만든 집서 3년간 지내
부산 피란시절 영도섬에서 촬영한 사진. 나는 이때 중학교 3학년이었는데 나무로 만든 사과 궤짝을 책상 삼아 열심히 공부했다.인민군에게 잡혔던 작은오빠는 화장실에 간다고 둘러대고 도망쳤다. 우리 식구는 곧장 서울을 떠나 큰오빠 친구가 사는 경기도 구둔이라는 곳으로 갔다. 작은오빠는 그 집 부엌에 토굴을 파고 3개월을 숨어 살았다. 영어사전 하나로 그 긴 시간을 버텼다.
큰 올케는 돈을 벌기 위해 서울로 갔다. 어머니는 두 살, 네 살짜리 조카들을 돌봤다. 열다섯 살이었던 내가 밥벌이를 해야 했다. 200리 길을 걸어 서울에 쌀을 가져다 팔고 받은 돈으로 다른 물건을 사 다시 시골에 파는 동네여자들을 따라나섰다. 그렇게 하라는 사람들은 없었지만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200리는 끼니때만 빼고 쉬지 않고 걸어도 이틀이 걸리는 거리였다. 날이 어두워지면 노숙을 했다. 날이 밝으면 쌀 한 말을 머리에 이고 어깨에 지며 서울로 갔다.
서울에 도착해 쌀을 팔아 고무신을 샀다. 그리고 다시 이틀간 200리를 걸어 집에 오면 앉은뱅이가 됐다. 다리와 발목이 너무 아팠다. 어머니는 시장에 나가 고무신을 보리나 감자로 바꿔왔다. 3개월간 2번 서울을 왕복했다. 800리를 걸은 셈이다. 어린 나이에 너무 많이 걸어서인지 키가 크지 못하고 무릎의 연골도 무리가 왔다. 지금도 그때 고생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30년 같은 3개월이 지나고 1950년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됐다는 소문을 들었다. 서울에서 쌀을 팔고 고무신을 사서 구둔으로 떠나려던 밤이었다. 그날 밤 거리는 지옥 같았다. 폭격에 맞아 피 흘리는 사람, 당황해서 이리저리 뛰는 사람 등이 길거리를 메웠다. 인민군은 서울 시내에 불을 지르고 보는 사람마다 죽인다고 했다. 밤새 총소리 대포소리를 들으면서 헤매다 새벽을 맞았다. 예전에 살던 판잣집으로 향했다. 길가에는 시체가 즐비했다. 판잣집은 사라지고 없었다. 어머니가 항아리에 담아 땅에 묻었던 소지품과 사진도 사라졌다.
서울로 돌아왔지만 두세 달 만에 다시 피난을 가야 했다. 1·4후퇴였다. 군인 가족이라 기차에 태워준다고 해 서울역으로 달려갔다. 기차가 만원이라 문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가까스로 유리창을 넘어 기차에 올랐다. 사람들은 기차가 설 때마다 밖으로 나와 밥을 지어 먹었다. 기차는 예고 없이 출발했는데 밖에서 밥 먹던 사람들이 밥솥을 든 채 유리창으로 기차에 올라탔다.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
서울을 출발한지 12일 만에 부산진역에 도착했다. 그곳도 막막했다. 물 한 모금 살 곳이 없었다. 부산에 아무런 연고가 없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보따리를 베개 삼고 땅바닥을 구들 삼고 하늘을 천장 삼아 역마당에서 며칠을 보냈다. 노숙 3일째가 되자 한 노인이 자기 집 마당에 들어와 자라고 했다. 그 분 집 마당에 텐트를 쳤다가 다시 미군 시레이션 박스로 하꼬방(상자로 만든 집)을 지어 다섯 식구가 3년을 살았다. 겨울에는 돌을 달궈 수건에 싸고 큰 이불로 덮은 뒤 온 식구가 발을 넣고 잤다. 내 나이 만 16세가 되기 전이다.
나는 어머니와 생계를 꾸렸다. 한 시간을 걸어 부산 야미시장에 가서 물건을 사와 길거리에서 팔았다. 목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어머니와 나는 새벽 3시에 자리를 잡았다. 집 주인이 대문을 잠갔기 때문에 어머니와 나는 담을 넘어야 했다.
***[역경의 열매] 김진숙 <6> 한신대 처음으로 여학생 1등 졸업 영광 안아
경제문제로 美 유학 1년만에 돌아와결혼했지만 생활고는 더 심해져
1959년 한국신학대학 졸업식 때 찍은 사진. 1등 졸업 선물로 웹스터 영한사전을 받았다.서러운 부산 피란살이 도중 부산 영도에 이화여고가 텐트를 치고 문을 열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난 이화여중 3학년으로 복귀했다. 여기저기서 학생들이 몰렸다. 우리 반은 120명이 됐다. 영어를 가르쳤던 이봉국 선생이 얼마나 혹독하게 잘 가르쳤던지 난 잠꼬대까지 영어로 했다. 여든 살이 넘은 내게 조금이나마 영어실력이 남아 있다면 그건 전적으로 그때 토대를 잘 닦은 덕분이다.
휴전과 함께 우리 식구는 3년 판자집(하꼬방)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때부터 학업과 신앙에 불이 붙었다. 학교에서는 아침마다 정동교회에서 열리는 채플에 참석했다. 친구 권유로 서울제일교회에 갔다가 성경에 눈을 떴다. 제일교회 이기병 목사는 수요 예배나 새벽기도회 시간에 내게 목회기도를 시켰다. 내 신앙이 부쩍 자랐다. 고등학교 졸업반이었던 1954년 겨울에는 제일교회 100일 새벽기도회에 참석했다. 집안 어른들은 법대나 의대 진학을 바랐지만 주님은 100일 기도회 마지막 날 신학 공부를 하라는 비전을 주셨다.
이듬해 한국신학대학(현 한신대)에 진학했다. 난 우등생이었다. 공부가 재미있었다. 시험을 잘 봤다며 100점 만점에 105점을 준 교수도 있었다. 한 학기에 독일어 시험을 6번 봤는데 600점을 받았다. 문익환 목사에게서 히브리어를 배웠는데 세 번 시험에 300점을 받았다. 네 번째 시험은 수술 때문에 나중에 별도로 치르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문 목사는 안 된다며 300점을 4회로 쪼개 평균 75점을 줬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다른 남학생이 1등이고 내가 2등이라는 소문이 들렸다. 교무실에 찾아가 성적을 다시 계산해달라고 요청했다. 재평가 끝에 내가 1등이 됐다. 따져 묻기는 싫었지만 정의를 찾고 싶었다. 개교 이래 여학생 1등 졸업은 처음이라고 했다. 졸업식 날 이름 모를 여성 선교사가 자랑스럽다며 안아줬다. 1등이 어떻게 그리 쉽게 번복됐을까. 노골적인 남녀차별이 빈번했던 당시에 여학생에게 1등을 줘선 안 된다는 분위기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한신대 1등 졸업은 내게 큰 의미가 있다. “많이 배워 나처럼 살지 말라”던 어머니에게 드릴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었다. 1960년 가을에는 미국 유학을 떠나 시카고대 대학원으로 진학했다. 가난한 피란민 출신이었던 내게 이화여고 졸업과 한신대 1등 졸업, 미국 유학시험 합격 등의 기쁜 일이 이어졌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워 미국 유학 1년 만에 귀국했다. 반드시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겠다고 다짐했지만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는데 10년이 걸렸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의 삶은 힘겨웠다. 일본 메이지대(明治大) 법대와 한신대를 졸업한 남편을 만났다. 남편은 생활력이 없었다. 내가 돈을 벌어야 했다. 두 아들 형수와 용수를 낳고 기르면서 직장생활을 했다. 1년에 한 번씩 사글세를 옮겨 다녔다. 몸이 아파 월급의 절반이 약값으로 들 때가 잦았다. 집세까지 내면 두부와 콩나물로만 살아야 했다. 아이들은 남의 손에 맡겼다. 남편과 세상이 미웠다. 견디다 못해 68년에는 일곱 살짜리 형수를 미국에 사는 애들 고모에게 보냈다. 그러면 미국으로 갈 기회가 올 것으로 믿었다. 나를 위해 자식을 머나먼 곳으로 보내다니 얼마나 모진 어미인가. 보내놓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역경의 열매] 김진숙 <7> 수렁 같은 삶에 지쳐… 다시 미국 보내달라 기도
美 교단서 1년간 일할 초청장 받게 돼… 출국날 공항까지 남편 빚쟁이가 나타나
미국으로 떠나는 날 김포공항에 배웅 온 가족과 친척, 교인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왼쪽 가슴에 꽃을 달고 있는 사람이 나다. 너무 울어서 눈이 부어 있다.삶은 여전히 수렁이었다. 아버지의 폭력과 월남, 한국전쟁과 가난 속에서 나는 언제나 살기 위해 발버둥쳤지만 고통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처절한 상황에서 내가 찾을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었다. 나는 울지 않는 사람이었다. 열한 살 어린 나이에 작은오빠의 손을 잡고 한밤 산속을 걸어 월남할 때도, 우산을 살 돈이 없어 비를 맞으며 학교에 갈 때도 밝은 내일을 꿈꾸며 꿋꿋이 버텼다. 하지만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었다. 하나님께 애원했다.
“하나님, 제발 저를 수렁에서 빼내 주십시오. 더 이상 살 수가 없습니다. 제 아들 형수를 만나러 가게 해주세요. 제발 저를 이 나라에서 놓아 주세요.”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주신 걸까. 1970년 미국에 갈 기회가 생겼다. 내 친구가 미국의 연합그리스도교 교단에서 1년간 문화교류를 위한 자원봉사자를 구한다는 광고를 가져다주었다. 곧바로 지원했다. 모든 것이 술술 풀렸고 미국으로 떠날 수 있게 됐다. 그런데 복병이 있었다. 그해 4월 18일 김포공항에서 떠나려는데 낯선 사람이 찾아왔다. 그는 남편의 빚을 갚으라고 했다.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고 갚을만한 돈도 없었다. 그 사람은 내가 떠나면 남편에게서 빚을 돌려받을 수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내 남편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보증수표’라는 별명으로 통했다. 그들은 나를 인질로 삼으면 돈이 나올 것으로 여겼다.
너무 슬퍼 친척과 친구들이 잔뜩 배웅을 나온 자리에서 펑펑 울었다. 눈물이 꼭지 빠진 수돗물처럼 흘렀다. 남편과 다섯 살 난 용수를 두고 떠나는 서러움까지 겹쳤다. 결국 남편의 사촌형이 빚을 책임지기로 하고 풀려났다.
엄마를 태운 비행기가 하늘로 날아가고 엄마 없는 집에 들어서며 서운했을 어린 용수를 생각하면 지금도 심장이 난도질당하는 것 같다. 나는 참으로 몹쓸 어미였다. 큰아들을 먼저 미국에 보내고 울고, 이제는 작은아들을 뒤에 남겨놓고 울었다. 나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원망스러웠다. 내 자신의 고통이 너무 커서 그랬을까. 홀로 남겨질 어머니 생각도 깊게 하지 못했다.
그렇게 한국을 떠났다. 고작 1년짜리 초청장이었지만 비행기 안에서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23년간의 남한생활은 가난과 죽음, 병과 고통으로 가득했다. 지긋지긋했다. 슬픈 역사를 지나오면서 수많은 여성들이 함께 겪은 고통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미련 없이 새 세상으로 떠났다. 조국은 그러나 핏줄처럼 떠날 수 없는 존재였다. 지금도 애국가를 부르면 콧날이 시큰해온다. 도망친다고 외면할 수 있는 조국이 아니었다.
꼭 잠긴 옥문을 열어 사도 바울을 해방시키신 것처럼 하나님이 나의 옥문도 열어주셨다. 미국에서의 삶은 순조롭게 풀렸다. 난 미국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큰아들 형수를 찾아갔다. 2년만의 모자 상봉이었다.
형수는 초등학교 1학년을 마치고 미국으로 떠났다. 2년이 길었던 걸까. 날 보고 서먹서먹해하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형수 손을 잡고 오랫동안 걸었다. 걷다가 사진을 찍으며 반가움을 표시했다. 얼마가 지나자 형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마음을 열고 내게 안겼다. 1주일을 함께 보내고 난 다시 자원봉사 교육을 받기 위해 필라델피아 포츠타운의 연합그리스도교 선교본부로 떠났다.
***[역경의 열매] 김진숙 <8> ‘英語의 바다’로 넣으신 주님… 美 사역 디딤돌 돼
美 수양관서 한국 소개하며 영어 익혀… “자원봉사 끝나면 와달라” 제안 들어와
미국 미주리 주 캠프 모발에 있는 연합그리스도교단 수양관 앞에서 첫째 아들 형수와 함께 찍은 사진.독일과 일본, 한국, 미국 등에서 필라델피아로 모인 자원봉사자는 나를 포함해 열한 명이었다. 우리는 한 달 간 저소득층 지역과 흑인 빈민촌, 고아원 등을 방문하며 교육을 받았다. 자원봉사자들은 열정적이었다. 백인 교회와 흑인 교회를 다녀온 뒤 인종차별 문제에 관한 질문으로 밤새 지도목사를 괴롭히기도 했다. 주요 논제는 ‘미국 같은 기독교 국가에서 왜 백인과 흑인이 교회를 따로 나눠 다니느냐’는 것이었다. 백인 지도목사는 인종차별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애를 썼다. 세계 최강국 미국에도 어둠이 있음을 절감했다.
교육을 마치고 미주리주의 연합그리스도교단 수양관에 배치됐다. 세인트루이스에서 서쪽으로 50마일 떨어진 유니온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다시 9마일 정도 떨어진 시골이었다. 형수를 데리고 그곳으로 갔다.
수양관 책임자인 레이먼드 바이저 목사와 엠마 루 사모는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엠마 루 사모는 목사 부인회 모임 등에 나를 데려가 소개했다. 주일에는 나와 형수를 자신의 교회로 데려갔다. 바이저 목사는 간장과 고춧가루를 구해다 주었다. 난 햄버거에도 간장과 고춧가루를 뿌려 먹었다.
수양관에서 한복을 입고 모든 교회 그룹에게 한국을 소개하는 일을 맡았다. 매달 용돈으로 20달러만 받고 일했다. 당시엔 영어가 유창하지 못했다. 대중 앞에 서서 한국에 대해 설명해야 하는 게 부담스러웠다. 몸으로 부딪히며 익혔다. 한국 기독교나 6·25전쟁 등 내가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 나오면 더듬더듬 최선을 다해 설명했다. 그 외 시간에는 부엌에서 요리하고 설거지를 도왔다. 그러고도 시간이 나면 속옷까지 젖도록 청소를 했다. 내 일은 아니지만 기왕 봉사할 바엔 제대로 하고 싶었다. 매일 몸이 부서지도록 일했다. 그리고 그 일을 자세히 적은 보고서를 매달 교단본부로 보냈다. 본부에서는 내 보고서를 영화 보듯 즐겁게 읽었다고 한다.
내 이야기가 회자되면서 교단의 다른 곳에서 날 부르기 시작했다. 그 해에만 100여회 강연을 다녔다. 그러다보니 영어가 트였다. 하나님이 나를 영어의 바다로 밀어 넣으셨다고 믿었다. 영어를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환경이었고 그게 미국에서 살아남는 첫 걸음이었다. 물론 어린 시절 학교에서 배운 문법과 10년 전 미국 유학생활이 큰 도움이 됐다. 언어 훈련은 훗날 내가 미국 전역의 500여 개 교회를 다니며 설교하는 디딤돌이 됐다. 미리 나를 훈련시킨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에 감탄할 뿐이다.
자원봉사를 시작한 지 5개월, 미국에서 첫 추수감사절을 맞았다. 은퇴자들의 요양시설인 ‘굿 사마리탄 홈’이라는 곳에서 날 초청했다. 추수감사 전날 노인들에게 강연을 하고 감사절 아침 예배에서 설교해달라고 했다. 내가 했던 설교가 기억에 남는다.
“추수 감사란 무엇인가. 칠면조 고기 먹고 휠체어 타고 따뜻한 시설에서 편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 진정한 의미인가. 우리나라엔 전쟁으로 자식을 잃은 노인이나 고아, 과부들이 너무나 많다. 그렇게 아픈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추수 감사는 어떤 의미이겠는가”라고 열변을 토했다. 설교가 끝나자 시설 책임자가 나를 불렀다. 그는 내게 6개월 뒤 자원봉사가 끝나면 자기 시설에 와서 일해주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역경의 열매] 김진숙 <9> 美서 보조 복지사로 첫발… 직장·집 한번에 해결
기쁨도 잠시… 남편과 아이에 주변서 불평… 신경쇠약 걸려 울음 멈추지 않아 입원
우리 가족은 1973년 미국에 첫 집을 마련한 뒤 뉴올리언스로 여행을 갔다. 왼쪽부터 나와 둘째 아들 용수, 남편, 첫째 아들 형수다.1971년 5월 자원봉사 기간이 끝나자 곧장 ‘굿 사마리탄 홈’으로 갔다. 미시시피 강 언덕에 있는 아름다운 건축물이었다. 그곳에서 내게 침실 두 개에 가구가 딸린 직원 아파트를 제공했다. 아침과 점심은 물론 월급으로 200달러를 줬다. 따로 직장을 알아보지 않았는 데도 이런 행운이 찾아왔다. 외국인 여성인데 직장과 집과 월급이 한꺼번에 해결되다니. 1년을 강행군으로 언어 훈련을 시킨 주님께서 직접 알선하신 것으로 여겼다.
그곳에서 보조 복지사로 일했다. 시설의 6층은 병원 겸 양로원이었는데 이곳에 입원한 노인들의 자활 프로그램을 도맡았다. 노인들을 모아 놓고 노래도 하고 간단한 것들을 만들거나 게임을 하며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도왔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거나 상담도 했다. 이런 프로그램을 ‘놀이치료’라고 불렀는데 당시엔 생소했다.
노인들은 젊었을 때 내로라하는 직업과 경력을 자랑하던 쟁쟁한 분들이었다. 하지만 늙고 병드니 남은 것은 고독뿐이었다. 외로운 이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친절하게 대했다. 사랑을 베풀었다. 그들의 말을 경청했다. 재미있는 놀이를 함께했다. 하나님은 수양관에서 내게 언어 연습을 시키시더니 사마리탄 홈에서는 황혼 길을 걷는 늙고 외로운 노인들을 사랑하는 연습을 시키셨다.
사마리탄 홈에서 일한 지 1년 5개월째 되던 72년 10월 나는 고국에 남은 남편과 둘째 아들을 미국으로 초청했다. 사마리탄 홈의 책임자 목사님은 나를 귀하게 여겼다. 내게 영주권을 주기 위해 서류를 준비했다. 게다가 내 남편이 미국에 도착하기도 전에 자활프로그램에서 일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겠다고 했다. 내가 당사자를 만나보지도 않고 어떻게 그런 결정을 내리느냐고 말했지만 목사님은 “그 아내에 그 남편 아니겠느냐”며 물어볼 필요도 없다고 했다. 식구들이 미국으로 왔을 때 내게는 이미 집과 차가 있었다. 남편의 직업까지 준비돼 있었다. 아이들은 곧바로 학교에 다녔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고서야 이런 축복이 가능했을까. 내 인생은 이렇게 중요한 고비마다 주님의 은총으로 가득하다.
가족이 함께 살 수 있어 행복했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였다. 남편은 미국에 오자마자 운전을 배운다며 차를 끌고 나갔다가 나무를 들이받았다. 직장에서는 한국 남성으로서의 자존심이 상한다며 간호사들과 잘 지내지 못했다. 수간호사는 남편이 간호사들에게 잘 협조하지 않는다며 나를 수시로 불러댔다. 장난이 심한 아이들이 집안에서 큰 소리로 떠들거나 밖에서 뛰어다니는 것이 그곳 노인들의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불평이 쏟아졌다.
가슴앓이를 했다. 낮에 일하고 밤새 끙끙 앓고 다시 아침에 출근하는 일이 반복됐다. 어느 날 저녁 속이 너무 상해 아파트 앞을 흐르는 미시시피 강을 바라보며 한없이 울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떠났던 조국이 그리웠다. 울고 또 울었다. 울음이 멈추지 않자 남편이 나를 병원 응급실로 데려 갔다. 병원에서도 울음이 멈추지 않았다. 결국 주사를 맞고 입원했다. 신경쇠약에 걸려 있었다. 울 일은 있었지만 그렇게 긴 시간 울음을 그치지 못한 적은 없었다.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다.
***[역경의 열매] 김진숙 <10> 잠겨 있는 옥문 열리듯… 주립시설 취업길 열려
석사 마치자마자 정신건강원에 취직… 훗날 정신질환 홈리스 섬길 경험 쌓아
일리노이 주 지역 정신건강원에서 직원들과 찍은 사진. 대부분 흑인이고 비서만 백인이었다. 2년 밖에 일을 하지 못했지만 이들과 40년 넘게 교제하고 있다.입원해 종합검사를 받았다. 의사들은 신경쇠약 외에도 담낭(쓸개)에 돌이 가득 찼다고 했다. 지난 10년간 매일 밤 날 괴롭혔던 가슴앓이의 원인이었다. 가슴을 째고 쓸개를 뗐다. 가슴앓이가 사라지니 새 인생을 찾은 것 같았다. 하나님은 불행한 상황에서도 밝은 소망을 찾게 하셨다. 완전한 불행이란 없다. 언젠간 소망이란 친구가 뒤따라온다는 교훈을 얻었다.
남편이 사업을 시작하고 난 공부를 하기 위해 굿사마리탄홈을 그만뒀다. 이든 신학교에서 목회임상실험 훈련을 1년 받은 뒤, 마흔두살이던 1977년 세인트루이스대학에서 사회사업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돈 때문에 포기한 공부를 16년 만에 마무리한 셈이다. 공부는 재미있었다. 사회봉사 경험이 많아서인지 이론이 머리에 쏙쏙 들어왔다. 내가 도서관에 들어가면 한국 유학생들이 내 주위로 몰려들었다. 나는 그들을 집으로 데리고 가 냉면을 해 먹이곤 했다. 공부하느라 늦는 날에는 첫째 아들 형수가 큰길에 나와 날 기다렸다. 학위를 받기 직전 인턴십은 세인트루이스대학 의대 정신병원에서 받았다. 이때의 경험은 이후 정신질환 홈리스를 섬기는 초석이 됐다. 하나님의 훈련과정은 이렇게 치밀했다.
졸업하자마자 일리노이주 지역정신건강원(Community Mental Health Center)에 취직이 됐다. 정신질환자나 마약중독 홈리스들을 치료하는 주립시설이었다. 시설은 미국에서 가난하기로 소문난 흑인 빈민촌에 있었다. 살인과 강간 등 끔찍한 뉴스가 매일 쏟아져 나오는 곳이었다.
대학원을 갓 졸업한 사람이 주립시설에 고용된 것은 기적 같은 일이었다. 흑인과 백인 등 직원 12명을 거느리고 하루 종일 100여 명의 정신질환자와 홈리스를 돌봤다. 환자들에게 점심을 해 먹이고, 교육자료도 체크하고, 직원관리도 해야 하는 중요한 자리였다. 1년간 정신병원에서 훈련을 받긴 했어도 어떻게 내가 취직이 됐을까 의아했다. 나중에 들어보니 상당한 실력자들이 지원했다고 한다. 하지만 추천자들끼리 알력이 벌어지면서 오히려 추천인이 없던 내게 행운이 돌아온 것이었다. ‘잠겨 있는 옥문이 열리는 기적’은 이런 식으로 일어났다.
시설에서 열심히 일했다. 환자들을 친절하게 대했고 목사처럼 홈리스를 심방했다. 지역사회 지도자들을 만나 후원을 요청했고 대학교수들을 초빙해 직원교육을 시켰다. 항상 직원들과 화목하게 지냈다. 기관 책임자인 어맨다 머피 박사는 “당신은 하늘이 우리에게 보내준 천사”라며 날 칭찬했다.
세상에는 다양한 민족이 있다. 모든 사람은 피부색과 관계없이 하나님의 백성이다. 이 지극히 간단한 사실을 흑인 직원들과 함께 지내며 깨달았다. 시설의 환자는 대부분 흑인이었다. 하나님은 내게 백인사회 속에서 차별받고 무시당해온 흑인들을 존중하고 사랑하도록 훈련시키셨다. 목숨을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이 함께 하셨기에 내가 그들을 사랑하는 일이 가능했다. 발걸음을 뗄 떼마다 나와 동행하는 하나님의 손길이 느껴졌다.
행복은 그러나 한순간에 산산조각이 났다. 내 삶의 의미였던 맏아들 형수를 끔찍한 사고로 잃었기 때문이다.
***[역경의 열매] 김진숙 <11> 맏아들 사고로 잃고 매일 통곡하며 1년여 방황
무덤서 울고 있을 때 “왜 우느냐…” 하나님께 ‘항복’하고 시애틀로
11학년이 된 형수와 함께 고등학교 앞에서 찍은 사진(왼쪽). 난 형수가 숨진 뒤 무덤 위에 꽃을 심고 매일 물을 주며 울었다.맏이 형수는 공부를 잘했다. 학교에서 별명이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이었다. 형수는 1976년 8학년(중학교) 졸업할 때 백인 학교에서 1등을 했다. 학교에서는 동양인에게 1등상을 주기 싫었는지 모의고사를 두 번이나 봤다. 형수가 두 번 모두 1등을 하고 1등상을 받았다. 교장은 전통에 따라 형수를 오픈카에 태워 동네를 돌았다. 형수는 운동도 잘 해 각종 대회에 출전해 트로피를 수두룩하게 받아왔다.
아이가 잘 커 안도의 한숨을 내쉴 무렵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졌다. 78년 4월 30일 형수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잘 살아 보려고 미국으로 왔는데 소중한 아이가 한순간 내 품을 떠났다. 내 삶이 완전히 무너졌다. 자식 잃은 어미 심정을 도대체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아들을 영원히 놓친 아픔과 허탈감, 무력감, 절망감을 어디에 비할까. 혼이 완전히 나갔다.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 8년여 동안은 봄이 오는지 가는지, 꽃이 피는지 지는지 쳐다볼 새도 없이 정신없이 뛰었다. 그렇게 허둥대다 그제야 안정을 찾게 되나 싶었는데 암흑 세상이 됐다. 나는 왜 태어났을까. 세 살 때 물에 한동안 빠졌다 둥실 떠올랐다던데 그때 왜 영원히 가라앉지 않았을까. 초등학생 때 말라리아를 여러 번 앓았는데 왜 그때 죽지 못했을까. 한국전쟁 때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난 왜 함께 죽지 못했을까.
매일 형수 무덤 앞에서 통곡했다. 제발 날 죽여 달라고 하나님과 씨름했다. “저는 여자도, 어미도, 인간도 아니고 죽을 자격밖에 없으니 하나님께서는 제발 저를 벌하시고, 놓으시고, 버리시고, 불쌍히 여기지도, 위로도 하지 마옵소서. 아들 무덤 옆의 땅이 쫙 갈라져 저를 삼키게 하소서”라고 울부짖었다. 형수와 함께 갔던 햄버거 가게를 찾아갔고, 함께 운동했던 공원으로 달려갔다. 아이가 다니던 학교, 동네, 집, 방 등이 모두 눈물이었다. 내 몸의 모든 뼈와 살과 영혼이 부서지고 내려앉을 때까지 하나님을 밀어냈다. 헛것이 보이고 헛소리가 들렸다. 누가 목을 조르는 듯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찬송가를 펴고 첫 장부터 끝 장까지 통곡하며 불렀다. 찬송가 한 권을 다 불러야 밥을 먹을 수 있었다. 그렇게 1년을 넘게 방황했다.
어느 날 저녁 형수 무덤에서 울고 있었다. 그런데 어깨에 다른 사람의 손길이 느껴져 얼굴을 들어보니 어떤 남자가 옆에 서 있었다. 그도 울고 있었다. 그 남자는 내게 “왜 우느냐”고 물었다. 난 “아이를 여기에 묻었다”고 대답했다. 그에게 “당신은 왜 우느냐”고 물었다. 그는 내 아들 옆의 무덤을 가리키며 “나는 여기에 내 아버지를 묻었고 내게도 그만한 나이의 아들이 있다”고 대답했다. 그날 내 어깨에 닿은 손길은 따뜻했다. 그가 흘린 눈물은 주님의 눈물로 여겨졌다. 나와 함께 울어주시는 주님의 얼굴을 봤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위로가 됐다. 결국 난 “하나님께서 이기셨으니 이제는 마음대로 하시라”고 말하고 항복했다. 하나님은 끝까지 날 꽉 껴안고 놓지 않으셨다. 형수를 가슴보다 더 깊은 곳, 내 영혼의 저편에 묻었다. 그리고 제2의 고향인 세인트루이스를 떠났다. 마치 죽음에서 부활을 소망하듯 우리 가족은 79년 7월 시애틀로 향했다.
***[역경의 열매] 김진숙 <12> 아들 잃고 미친 듯이 성경 읽어… 영적인 눈 뜨여
“살아도 죽어도 주를 위해” 눈물 고백, 52세에 목사 안수 받고 학원 목회 시작
1987년 4월 12일 미국장로교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내 평생 처음으로 축도를 하는 모습.큰아들 형수를 잃고 시애틀로 이사했을 때 하나님은 내 영안(靈眼)을 열어주셨다. 난 밤낮으로 미친 듯이 성경을 읽었다. 성경을 몇 번이나 통독했는지 모른다. 남편을 따라 낚시를 가서도 찌를 보지 않았다. 해가 지고 글이 안 보일 때까지 쉬지 않고 성경을 읽었다.
시애틀에서 난 메이플우드장로교회를 나갔다. 이 교회 윌슨 목사가 내게 목사 안수를 권했다. 내 나이가 벌써 50인데 무슨 공부냐며 사양했다. 윌슨 목사는 할 수 있다며 밀어붙였다. 결국 시애틀의 풀러신학교 분교 대학원에 입학했다. 공부는 역시 재미있었다. 영적으로는 기뻐서 찬송가를 부르며 다녔다. 그러나 직장을 다니면서 공부하느라 육신이 힘들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 몸에 두드러기가 날 정도였다.
당시 목사 안수 후보자는 노회 시험을 두 번 거쳐야 했다. 한 번은 전 노회원 앞에서 왜 목사가 되려는지 설명하며 신앙을 고백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필기시험이었다. 이를 거치면 최종 구두시험을 다시 본다.
첫 관문을 통과하는 날 나는 “이제 내게 남은 것은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는 일뿐”이라고 말했다. 맨 앞자리에 있던 남편을 향해 그 말을 하는데 눈물이 터진 수도꼭지처럼 쏟아졌다. 그 말은 소중한 자식을 잃고 사경을 넘나들며 얻은 결론이었다. 그 자리에 있던 수백 명의 목회자와 장로들 중 마른 눈으로 돌아간 이가 없었다고 한다.
풀러신학교에서 소정의 교육을 마친 뒤 필기시험을 무사히 통과했다. 다시 2년 후 구두시험을 만장일치로 통과하고 목사안수를 위한 준비를 마쳤다. 노스푸젯사운드 노회는 1987년 4월 12일 메이플우드교회에서 내게 정식으로 목사 안수를 해줬다. 미국장로교에서 한인 여성 목사가 된 사람은 한정미 목사가 처음이었고 내가 두 번째였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28년 만에 온갖 풍상을 겪고서야 이룬 결실이었다. 그 때 내 나이 쉰둘이었다. 그곳에 참석했던 모든 목사와 장로들이 나와 내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를 했다. 다들 대단한 사람이라고 칭찬했다. 여자 나이 쉰이 넘으면 ‘쉰 세대’라고 하는데 난 펄펄 날았다. 인생의 또 다른 장을 시작했다.
이처럼 4월은 내게 의미 있는 달이다. 부활절이 있고 내가 미국에 도착한 달이다. 내 아들의 생일과 그 아들이 세상을 떠난 날이 있고, 내가 목사가 된 달이다. 4월은 내게 죽음의 달이자 부활의 달이기도 하다.
윌슨 목사는 내게 워싱턴주립대학에서 학원 목회를 제안했다. 당시 대학에는 외국인 학생 수가 전체 학생 수의 20%를 차지할 만큼 많았다. 미국에 적응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찾아 발이 닳도록 캠퍼스를 누볐다.
목사 안수를 받은 지 꼭 1년이 되던 1988년 부활절 새벽, 난 이상한 꿈을 꿨다. 꿈속에서 하나님이 날 작은 교회 문 안쪽에 세워놓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거기에 십자가를 심으라. 그리하면 그것이 지붕 밖으로 자라 나갈 것이다.(Plant the Cross. It will grow through the roof)”
하나님 음성을 처음 들었다. 감격스럽고 떨렸다. 계시는 분명했지만 미련한 나로서는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대체 어디에 십자가를 세우라는 말씀일까. 그 뜻을 알아차리기까지 몇 년이 걸렸다.
***[역경의 열매] 김진숙 <13> 여성 홈리스들에 속옷 지급… ‘속옷 교회’로 이름나
女 홈리스 섬기는 교회 세워 7년 사역… 기사화되면서 백화점서 지원해 숨통
1993년 5월 시애틀 지역신문 ‘인터내셔널 이그제미너’에서 시상하는 ‘지역사회 목소리상’을 받는 모습.미련한 나는 계시의 의미가 홈리스와 여성 목회를 하라는 비전임을 뒤늦게 깨달았다. 십자가를 심는 사역이란 교회 벽에 나무 십자가를 걸어만 두는 게 아니라 생동하는 십자가를 사람들의 마음과 생활 속에 심으라는 뜻이었다. 여성 홈리스를 섬기는 교회를 세우기로 했다. 결심을 하고 교회를 세우기까지 3년을 고민하고 기도했다. 1990년 5월 시애틀의 여성지도자들을 내가 사역 중인 대학으로 불렀다. 그리고 여성 홈리스를 위한 교회를 세우겠다는 꿈을 얘기했다. 이름은 막달라마리아교회로 지었다. 막달라 마리아는 귀신에 들렸다가 치유를 받고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 고난과 부활의 증인이 된 여성이다. 교회의 주제가 되는 성경 말씀으로 “나는 주를 보았다”(요 20:18)를 선택했다. 홈리스 여성들이 마리아처럼 예수님의 능력으로 갖가지 자신들의 문제로부터 치유를 받고 새 삶을 찾기를 원했다.
90년 늦가을 미국 제일감리교회 히어홀처 목사를 만났다. 91년 1월 19일까지 방 하나만 달라고 요청했다. 결국 10명이 앉을 수 있는 작은 방을 얻었다. 찬양대가 옷을 걸어두는 공간이었다. 대부분의 쉼터는 홈리스들을 새벽에 내보냈다. 우리는 춥고 배고프고 화가 난 여성 홈리스들을 맞이하기 위해 따끈한 커피와 아침을 준비하고 오전 7시에 문을 열었다.
첫 예배는 그렇게 시작됐다. 즉흥적이었지만 하나님은 채워주시는 분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첫날에는 다섯 명의 자매가 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간이 좁아졌다. 다시 건물 지하로 예배당을 옮겼다. 지하실도 곧 비좁아져 다시 큰 홀을 사용했다. 막달라마리아교회에서 난 ‘속옷 사역’을 벌였다. 홈리스 여성들의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3개월마다 새 속옷을 한 벌씩 배급했다. 다른 교회에 가서 속옷 사역을 한다고 하니 미국 교인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남이 입던 속옷을 입어보지 못한 사람은 그 말을 이해 못한다. 시애틀타임즈의 칼럼니스트인 진 가든이 ‘속옷 교회(Lingerie Church)’란 제목으로 우리 교회를 소개했다. 칼럼을 읽고 한 백화점에서 속옷을 지원하겠다고 해 경제적으로 숨통이 트였다.
95년 미국장로교총회 직원 수련회가 시애틀에서 열렸다. 수련회 주일 아침예배를 준비하던 데니스 휴즈 목사가 내게 설교를 부탁했다. 수련회 주제는 ‘화합’이었다. 난 새벽에 시내로 나가 홈리스 여성들을 모았다. 8명을 밴에 태우고 행사장인 메리어트호텔로 갔다. 호텔 화장실에서 홈리스 자매들을 씻기고 예배 장소로 데려갔다. 내 설교 차례가 됐다. 나는 “오늘 아침 시애틀 시내에서 혼란으로 출발했지만 지금은 화합을 이루어 여러분 앞에 섰다”고 했다. 설교 마이크를 홈리스 자매에게 내주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가며 설교를 했다. 설교장에 있던 많은 참석자들이 눈물을 흘렸다. 나는 이 설교로 미국장로교에서 순식간에 유명 인사가 됐다.
97년 6월 미국장로교총회에서 ‘믿음의 여성상’을 수상했다.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몸이 아팠다. 이듬해 2월 막달라마리아교회에서 은퇴했다. 길바닥에서 홈리스 사역을 한 지 7년, 내 몸이 견디지 못했다. 홈리스 여성들이 앓는 모든 병을 같이 앓았다. 지병인 천식이 심해졌다. 하나님께서 부르실 날이 가까워진 것 같았다.
***[역경의 열매] 김진숙 <14> ‘홈리스 근절’ 美 순회 설교… 71세에 박사 학위 따
건강 악화로 교회 은퇴 후 새 길 열려… 홈리스 자립 위해 대학 보내기 사역 시작
6년 이상 섬기던 순회 설교 사역에서 은퇴하던 날 동료들이 날 위해 깜짝 파티를 준비했다.막달라마리아교회 은퇴를 결심하고 이사회에 통고했다. 이사회가 마련한 송별회에서 놀라운 선물을 받았다. 홈리스 여성들로 가득한 배를 내가 물 위에서 끌고 가는 모습을 그린 삽화였다. 내 사역을 잘 표현했다는 생각에 지금껏 내 로고로 사용하고 있다.
죽음을 준비하는 동안 하나님은 또 다른 계획을 준비하셨던 걸까. 1997년 미국장로교총회 주최 홈리스 워크숍에 초청받았다. 그곳에서 홈리스 사역의 중요성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현장에 있던 바바라 두에이 목사가 내 말을 새겨들었는지 총회에서 함께 일하자고 제안했다. 미국 전역의 장로교회를 돌면서 홈리스 근절 촉구 설교를 해달라는 설명이었다.
98년 2월부터 순회설교에 돌입했다. 작은 여행가방 하나를 끌고 곳곳을 누볐다. 6년 동안 비행기를 184번 타고 31개 주 96개 도시에서 430개 교회와 그룹에게 홈리스 근절을 촉구하는 설교를 했다. 내겐 미국 전역에 언제든지 방문해 머무를 수 있는 집이 100군데나 있다. 호텔비를 아껴 홈리스를 돕기 위해 민박을 하기 때문이다.
‘믿음의 여성상’을 받을 때 후원자들은 ‘홈리스 근절(END HOMELESSNESS)’이라고 적힌 보랏빛 티셔츠에 관심을 보였다. 언제나 이 옷을 입고 다녀서 ‘보랏빛 여성’이란 별명을 얻었다. 양말이나 운동화, 가방, 모자까지 보랏빛으로 입고 다녔다. 병원이나 식당, 버스, 공항에서 사람들은 “보랏빛을 좋아하나 봐요”라며 한마디씩 던진다. 그때마다 “이것이 내 선교 색깔”이라며 가슴의 홈리스 근절 문구를 보여주면 다들 “원더풀”이라고 대꾸한다.
71세가 되던 2006년에는 두 가지 큰일을 해냈다. 샌프란시스코 신학대에서 목회학 박사 학위를 땄다. 남편이 병들어 양로원에 들어가면서 공부를 중단해야 할 처지였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컴퓨터를 응급실로, 중환자실로, 양로원으로 가지고 다니면서 남편 침대 옆에서 계속 논문을 썼다. 칠순도 학교에서 공부하다 맞았다. 학생들이 케이크를 사와 축하해줬다. 사실 내겐 학위가 필요 없었다. 일생을 바친 홈리스 사역을 학문적으로 정리해 후대를 위해 남기고 싶었을 뿐이다.
또 하나는 내가 사는 시애틀 인근 린우드에서 둥지선교회를 설립한 일이다. 모든 걸 잃어버린 홈리스들에게 직업과 거처를 마련하고 존엄성을 회복시켜 하나님과 예수님께 돌아오게 하자는 취지였다.
천신만고의 이야기로 시작했으니, 이제 천신만고의 이야기로 끝맺고 싶다. 난 지금 홈리스 들을 대학에 보내는 사역을 벌이고 있다. 공부를 해야 좋은 직장과 월급을 얻고 홈리스 생활을 청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대학에 보내준다는 소문이 나자 찾아오는 홈리스들이 100명을 넘었다. 지난 1월 시작된 대학교 새 학기에 20명을 우선 등록시켰다. 내년 봄학기를 준비하는 학생은 24명이다.
깐깐하기로 소문난 린우드시는 내가 눈물로 호소하자 어느 침례교회 마당에 텐트 5개를 치도록 허락해주었다. 어떤 분은 판잣집 10개를 기증하겠다고 나섰다. 지금은 그 판잣집이 들어설 장소를 찾고 있다. 언제나 그랬듯 하나님이 또 다시 문을 열어 주시기를 기다리고 있다.
난 지금 죽음을 향해 걷고 있다. 폐협심증으로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 홈리스들의 졸업식을 볼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등에 업고 달리시니 천신만고의 길이라도 감사한 마음뿐이다.
***[역경의 열매] 김진숙 <15·끝> 내 삶은 소나기처럼 부어주신 축복에 대한 고백
북한에서 남한으로, 다시 미국으로… 고난과 기적이 교차하며 성숙해져
막달라마리아교회 은퇴 송별회 때 선물로 받은 삽화. 홈리스 여성들로 가득한 배를 내가 물 위에서 끌고 가는 모습이다.내 인생은 파란만장했다. 북한에서 남한으로, 다시 미국으로 삶의 장을 옮겼다. 역경의 열매를 위해 내 인생을 다시 여행했다. 마음의 거리로 따지면 1만 마일도 넘는 세상을 되돌아온 것 같다. 다행히 지난 일과 감정이 머릿속에 차곡차곡 정리돼 있어 기억을 되살리기가 어렵지 않았다. 행복하고 기쁜 기억도 있었고 내 의식의 저편에 꽁꽁 숨어 있다가 문득 생생하게 다가와 날 슬프게 만드는 기억들이 많았다.
인생 첫 11년을 살았던 북한 땅을 떠올렸다. 내가 자란 황금정 네거리, 사포리, 선덕에도 가봤다. 별로 좋은 일이 없었다. 난 어머니와 함께 울었다. 아버지는 항상 화내고 부수고 때렸다. 그래도 아름다웠던 선덕 집 주변 풍광과 과수원을 떠올리니 미소가 절로 났다.
이어 1940년대 후반부터 60년대까지를 여행했다. 전쟁과 피난으로 배고프고 추운 홈리스의 삶이었다. 삼천리강산만 폐허가 된 게 아니었다. 그땐 사람들의 마음이 피폐했다. 전쟁이 끝나고 60년대는 가난과 싸워야 했다. 그 와중에 좋은 학교를 다니고 신학대를 졸업했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다. 절망과 희망 사이를 오가며 치열하게 살았다. 이 시기 주님을 영접했다. 일생일대 사건이었다. 미국 유학도 밝은 기억이다. 나환자들을 돕고 교회를 건축하도록 힘을 보탠 일 등도 한줄기 봄 햇살처럼 따뜻하게 내 언 가슴을 녹여주었다.
마지막으로 46년의 미국 생활을 돌아보았다. 매일 희비쌍곡선을 살았다. 기적과 고난이 언제나 교차했다. 그러면서 한 뼘씩 성숙했다. 학문적 성취와 개인적 영광도 맛봤다. 책을 여러 권 썼고 크고 작은 상을 20여 차례 받았다. 목사 안수를 받았고 사역도 많이 했다. 하늘의 별같이 많은 형제와 자매, 자녀와 친구를 얻었다. 하지만 큰아들 형수를 잃은 상처는 녹아 없어지지 않았다. 죽는 날까지 품고 살아야할 고통일지 모른다.
이 상처를 뺀 모든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다. 하나님은 내 인생에 소나기 같은 축복을 쏟아 부어 주셨다. 내 삶은 그 축복에 관한 고백이다. 나와 동행하신 하나님의 이야기다. 미국에서의 삶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모든 일이 이루어졌다는 고백 외에는 할 말이 없다. 나의 80년은 한 손으로 몸과 마음의 병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주님의 손을 잡고 공부하며 일하고 홈리스들을 섬긴 역사의 삶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계시, 은혜와 섭리 가운데서 이루어졌다.
인간의 뼈는 206개라고 한다. 뼈의 조직은 끊임없이 죽고 생기는데 7년에 한 번씩 몸 전체의 뼈가 새 것으로 바뀐다. 혈관의 길이는 12만㎞로 지구를 세 바퀴 도는 거리와 맞먹는다. 자동차를 만드는 데 1만3000여개 이상의 부품이 필요하다. 인간의 몸에는 자그마치 100조 개의 세포 조직이 있고 25조 개의 적혈구와 250조 개의 백혈구가 제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섬세한 창조물이다.
기억을 되짚으면서 여러 번 놀랐다. 그 많은 추억을 어떻게 3파운드 밖에 안 되는 두뇌에 오랫동안 저장할 수 있었을까. 내 인생을 돌아보며 그 경이로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나님이 빚으신 게 아니고선 도무지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우리의 하나님은 진실로 놀라운 능력의 하나님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