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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이 오늘 밤 나를 부르시면
누가복음16:1~9(1~13)
I. 욜로⦁요도 젊은이들 가운데 욜로족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욜로란 You only live once. 인생은 꼭 한번 살고 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실하게 살자는게 아닙니다. 재미있는 경험들을 위해, 오직 나를 위해, 내가 벌어 내가 소비하고 살자는 주의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성경이 경고하는 바가 있습니다. 인생은 욜로가 아니라 요도라는 겁니다. 요도 는 You only die once. 인생은 반드시 한번 죽는다는 겁니다. 인생은 끝이 있고 종말이 있고 심판이 있습니다. 어떻게 살았는가 반드시 계산하는 날이 있습니다. 욜로가 아니라 요도입니다. 우리가 믿는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로 시작하여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로 끝이 납니다. 창조로 시작해서 종말로 막을 내립니다. 예전에 시골마을을 찾아가 마을 어르신들과 함께 꾸미는 TV 프로그램이 있었습니 다. 재치있는 할머니들은 서울 스튜디오에까지 올라와 퀴즈 게임을 즐겼습니다. 한 번은 진행자가 “호랑이와 사자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요?” 물었더니 한 팀은 호랑이가 이긴다. 다른 한 팀은 사자가 이긴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왜 호랑이가 이길까요?” 물었더니 대답을 못합니다. 사자가 이긴다고 대답한 팀에 할머니 한 분이 기상천외한 대답을 했습니다. “사자가 무섭지요. 호랑이든 사람이든 다 잡아 가는 건 저승사자에유.” 슈트디오가 웃음바다가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 시간이라도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면 힘쎈 권력도, 건강했던 몸도, 쌓아둔 재물도 다 소용 없습니다. 모든 인생에겐 끝이 있고 종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세상 사람들의 인생의 자세에 대한 차이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종말론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 세상 살아가다가 끝이 있음을 알고 살아갑니다. 심판 의 날이 있음을 알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불신자들은 이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나만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삶의 자세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다 살았으나 죽을 날이 있고, 건강하나 병들 날이 있고, 성공해도 실패할 날이 있고, 높은 자리에 올랐으나 내려올 날이 있습니다. 문제는 시작이 내 뜻대로 되지 않았듯이 끝나는 날도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나이가 되어서 1년에 한번씩 건강검진을 하게 됩니다. 젊은 날에는 모두다 건강합니다. 파란불이 뜹니다. 금년에 보니까 경계치에 있는 주황색 불이 온천지에 떠 있더라구요. 그렇 다고 곧 죽습니다. 빨간불이 뜬 것은 없습니다만 모두 파란불을 찾아보기가 힘이 듭니다. 제 기대 수명이 120살인데 쉽지 않겠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게 인생입니다. 철학자 하이데거의 말 가운데 “삶과 죽음은 얼굴을 맞대고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그 말씀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습니다. 그의 대답인 즉 첫째 인생은 반드시 죽는다. 둘째 모든 인생은 자신이 언제 죽을지 모른다. 셋째 올 때는 순서가 있었지만 갈 때는 순서가 없다. 넷째 모든 인생은 홀로 왔다가 홀로 간다. 다섯째 지금 살아 있는 이 존재가 나이듯이 죽음도 반드시 나의 것이 되는 날이 있다. 여섯째 오늘이 나의 마지막이 될 수 있으니 삶과 죽음은 얼굴을 맞대고 있는 것이다. 종말의식은 우리의 모든 생각과 가치관을 바꾸어 놓습니다. 삶의 기준과 틀이 다른 것입니 다. 옛날에 좋았던 것들이 시시하게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는 것들이 시시하게 보일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시시하게 생각하는 것이 내게 소중한 것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죽는다고 생각하면 큰 집에 사느냐 높은 지위에 있느냐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 살아갈 때 사람 미워하고 갈등을 느끼고 용서하지 못하고 사는 일이 없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왜 이렇게 진지한 것일까요? 이 세상이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장망성입니다. 언젠가 망해 없어질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요즘 그리스도인들, 신앙인들 가운데 종말의식이 하루가 다르게 약화되어집니다. 불신자처럼 생각합니다. 불신자처럼 그들이 귀하게 겨기는 것 나도 귀하게 여깁니다. 이 세상이 끝인 줄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언젠가부터 그리스도인의 삶이 교회가 힘이 없어져가는 겁니다. 나약한 존재로 무너져가고 있는 겁니다. 어떤 교회가 건강한 교회일까? 그랬을 때에 초대교회를 생각합니다. 초대교회는 극소수의 사람들이 역사를 바꾸었습니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 다. 오늘 주님이 오신다고 한다면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야지. 종말론적인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며 “주님 오늘 오시렵니까?” 저녁에 커텐을 닫으며 “오늘 밤에 오시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이 만나면 마라나타! “예수님 반드시 오십니다” 인사했습니다. II. 주인이 따로 있다. 오늘 본문은 사복음서 가운데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독특한 본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읽는 안경 하나가 있습니다. 종말론입니다. 성경에 쉽지 않은 난해귀 가운데 한 구절입니다. 쉽게 풀어지지가 않는 겁니다. 윤리라는 안경을 끼고 성경을 읽으면 이해가 안됩니다. 종말의 지혜라는 안경을 끼고 봐야 본문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윤리적인 어떤 교훈을 주시기 위해서 기록된 말씀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의로움이 아니라 종말론적인 지혜를 가지라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뱀 같이 지혜로워라”그랬습니다. 예수님께서 뱀을 닮으라니, 그 징그러운 뱀을 닮으라는 게 말이 돼? 항거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을 읽을 때에 초점을 잘 잡아야 됩니다. 그 안경을 잘못 쓰면 이해가 안 되는 게 오늘 본문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옛날에 부잣집에는 집사가 있었습니다. 청지기입니다. 성경이 기록된 이 나라에서도 청지기가 있었습니다. 주인 아래에 있는 종입니다. 종인데 주인의 모든 재산을 자율적으로 관리를 합니다. 그래서 그 종 밑에 또 다른 종들이 많이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시작하는 1절에 보면 “청지기가 있는데” “있는데”라는 말은 미완료 과거형으로 청지기가 오래전부터 있었는데 지금도 청지기로 이 집안을 섬기고 있었다. 늙은 청지기. 오래된 청지기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청지기에게 부정이 있다는 고발이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재산을 낭비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주인은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2절) 만약에 부정이 드러나게 되면 다시는 청지기직 으로 네가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이어지는 2절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어찌 됨이냐”이 말이 감탄사로 되어 있습니다. 주인이 충격을 받았다는 얘기입니다. 그 긴 긴 시간 동안 내가 너를 믿고 우리 집에 모든 재산을 맡겼는데 이 어찌 됨이냐? 놀라는 장면입니다. 이때 늙은 청지기가 고백을 합니다.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아차!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 “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 냐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기름 백 말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문서를 변경합니 다. 사문서 위조입니다. 배임횡령입니다. 이 불의한 짓을 용서받을 수 없을 터인데 사기 행각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했습니다. 이 지혜를 배우라고 하십니다. 이 물질적인 것으로만 생각하면 이해가 잘 안됩니다. 우리가 가진 것들 가운데 물질보다 귀한 것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저는 교육학을 전공한 사람인데 교육이란 것이 그렇습니다. 가르칠수록 더 풍성해 지는 것입니다. 사랑을 가지고 있는데 사랑을 나눌수록 사랑이 많아지는게 사랑입니다. 품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친절한 언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언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 님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눌수록 더욱 더 풍성해 지는 것입니다. 좀 더 시각을 달리하고 본문을 읽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본문 8절입니다.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세상 사람들 좀 봐라.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은퇴한 다음에 늙은 다음에 어떻게 살 것인가를 꼼꼼하게 준비하지 않느냐? 그런데 영원히 살 세계가 있다는 걸 믿으면서 그 세계를 준비하 지 않는 하나님의 백성들, 신앙인들이 있다면 이게 말이 되겠느냐? 그 얘기입니다. 주인이 따로 있다. 이 세상 살아가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이 세상에서 성공, 실패가 판가름 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날이 있다. 그런 얘기입니다. 이 청지기. 위기가 오기까지 주인을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주인인 줄로 알았습니다. 오늘 본문 이 지혜로운 청지기, 끝날이 있다는 걸 알았을 때는 지혜롭지만 그걸 모르고 살아갈 때에 동일한 단어들이 누가복음에 등장합니다. 누가복음 12장을 보면 한 부자가 나옵니다. 그해 따라 큰 풍년이 들었습니다. 창고 곡간을 많이 늘렸습니다. 하늘처럼 쌓여져 있는 곡시 창고를 보면서 하는 말이 “내 영혼아 먹고 마시고 즐기자” 침실에 누우려 하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누가복음 12:20) 여기 어리석은 자와 지혜로운 자의 차이가 종말이 있음을 아느냐 모르느냐. 주인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느냐 안 하느냐에 따라서 모든 것이 달라지더라는 것입니다. III. 맥추감사절 오늘은 맥추감사주일입니다. 돌아보니 은혜 아닌 것이 없습니다. 감사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갚지 못하고 살았는데 또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십니다. 앞을 내다보니 은혜 아니면 살 길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기회, 감사일 뿐입니다. 신문에 보면 가끔 재치있는 만화가 한 토막이 있습니다. 바로 이 시간 6개월이 지나고 난 다음에 7월 1자 신문에 이런 만화가 실렸습니다. 생선을 구울 때, 한면을 구울 때는 힘이 들고 시간이 길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뒤집어서 나머지 반쪽을 익히는데는 그렇게 빨리 고기가 익을 수가 없습니다. 지나온 6개월보다는 퍽이나 빨리 세월이 달아날 것이다. 금년 시작하면서 이런 일도 하리라. 이렇게 다르게 살아봐야지. 이렇게 멋지게 살아봐야지. 그런데 6개월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감사하며 살아야 되겠는데 감사보다는 불평, 원망이 많았습니다. 여러분, 감사는 언제 할 수가 있을까요? 지금보다도 돈을 조금 더 벌면 감사할 수 있을까요? 돈 벌었을 때 진짜 감사부터 하셨습니 까? 지금 내가 당하고 있는 어려운 문제, 이것 해결되기만 하면 하나님 앞에 감사할 것 같은데 그 문제 없을 때 감사했습니까? 나이가 들어가면서 병이 들고 자꾸 문제가 생깁니다. 이 병 나으면 하나님 앞에 감사할 것 같은데 그 병 없던 시절 건강 가지고 하나님 앞에 먼저 감사했습니까? 감사는 Now and here 지금 이 자리, 이 시간에 감사하지 않으면 영원히 감사는 내 곁에서 사라지는 것을. 닥터 스코프라는 신앙인은 그런 말을 했습니다. 감옥과 수도원의 차이는 근본적으로 고민하느냐, 감사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죄인은 눈을 뜨는 순간 고민, 걱정, 불평, 원망하고 성도는 눈을 뜨는 순간 감사한다. 죄인이 수도원 에 들어오면 수도원이 감옥으로 변하고 성도가 감옥에 들어오면 감옥이 수도원으로 변화될 수가 있다. 하는 것입니다. 물고기가 그 넓은 바다에 살다 보니까 물에 대한 감사가 없는 겁니다. 공중을 나는 새가 하늘을 마음껏 날다 보니 공기에 대한 감사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바다보다도 넓고 깊은 하나님의 은혜, 무조건 용서하시고 품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하늘을 바라보면서 온 우주를 뒤덮고 있는 하늘을 보면서 그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없었더라 고 한다면 내가 이곳에 있을 수가 없는데,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을 수 없는데, 하나님 의 은혜가 너무 커서, 너무 깊어서, 너무 높아서, 감사를 잃어버리고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디모데후서에 말세에 어떤 징조들이 일어날 것인가를 설명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그때 먹고 살 것이 세상에 풍요로워졌는데 “감사치 아니하며”(딤후 3:2) 그랬습니다. 매일같이 밥 먹으면서도 형식적으로 감사기도 합니다. 먹고 살 것이 없을 때는 찬밥 한 그릇이 그렇게 감사했습니다. 고등학교 때 라면을 한 그릇 먹었을 때에 짜장면 한 그릇이 우주를 얻은 것처럼 행복하지 않았습니까? 먹고 살 것이 많은 지금 “감사치 아니하며” 내 마음 내 영혼에 감사가 사라지거 들랑, 내 심령이 메말라지거들랑, 마지막 종말의 때가 된 줄로 알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맥추감사절입니다. 가난한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 씨앗을 뿌리고 열매를 거둡니다. 맥추감사절을 시킵니다. 한 해의 끝자락 가을녘에 수확을 거두어 드리고 감사 제사를 드립니다. 수장절, 추수감사절입니다. 출애굽하고 50일 오순절에 맥추감사절을 지켰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모세가 받는 날이었습니다. 신약에 와서 그날에 성령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시작되는 날이었습 니다. 맥추감사절은 이 땅에 있는 어떤 절기보다도 많은 의미가 있는 절기입니다. 우리가 언제 보리농사 지었어? 그 얘기가 아닌 것을. 성령이 내게 임하여서,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서, 내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 고, 이렇게 행복한 교회가 있어서 교회에서 은혜받으며 살아가고 교회를 섬기며 살아가게 되고, 이 교회가 천국의 지점이 되어서 오늘 내가 눈을 감아도 본점 천국에서 눈을 뜨는 것, 이것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게 맥추감사절입니다. IV. 불의 재물로 천국을 사라. 내 인생의 주인이 따로 있음을 깨달을 때 내가 누구인가를 다시 깨닫게 됩니다. 아하! 나는 청지기였구나. 어느 날 문득 주인 되신 하나님께서 너 내게로 오너라. 살아온 인생 계산해 보자. 통보가 옵니다. 그 날이 분명히 옵니다. 반드시 옵니다. 오늘 본문의 늙은 청지기는 너무나 오랜 기간동안 모든 것을 자신이 관리하다 보니 자신이 주인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주인으로부터 최후 통첩을 받고 보니 자신이 주인이 아니라 청지기임을 깨달은 겁니다. 청지기는 잘 관리해야 하는 사람일뿐 소유권이 없습니다. 가진 것 모두 주인의 것입니다. 소유권 내게 없었던 걸, 도로 찾아가는 회수권 주인에게 있었던 것을, 마지막에 계산하는 심판권 내게 있었던 것 아닌 것을, 이걸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내 것 아닌 것 내가 가지고 있고 주인이 회수할 수 있는 것 마지막에 반드시 계산해야 되는 것 생명도 내 것 아닙니다. 오늘 밤이라도 부르면 가야 합니다. 이 세상 살아가는 시간,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으로부터 잠깐 빌려서 쓰는 겁니다. 물질, 내것 아닙니다. 은사 내 것 아닙니다. 건강 내 것 아닙니다. 남 못지 않은 건강이었건만 함부로 관리하다가 병들었습니다. 송구한 일입니다. 모두 내 것이 아닙니다. 많이 맡기든 적게 맡기든, 오래 맡겨주시든 짧은 기간 맡겨주시든 주인의 권한입니다. 옛날에 동리에 엿장수가 나타나면 엿장수 가위가 있습니다. 운율을 맞춰서 엿장수가 가위를 흔들면 머리카락 짤라 놓았던 것, 빈병, 쌀 바구니, 보리 바구니 들고가서 엿 바꿔 먹었습니다. 그때 있었던 수수께끼가 있었습니다. 1 분에 엿장수가 가위를 몇 번이나 아장아장 하게요? 엿장수 마음대로. 주인이 따로 있는 것. 적게 받았다고 불평할 것 없습니다. 적은 일에 충성하면 칭찬을 받습니 다. 많이 받았다고 폼잡고 살아갈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계산하는 날이 있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계산해야 하는가? 탈무드에서는 세 가지를 말합니다. 키소, 코소, 카소라고 합니다. 키소는 돈 주머니란 뜻입니다. 창고입니다. 내가 가진 통장, 돈 주머니를 하나님 앞에서 계산하는 날이 있다는 겁니다. 코소란 술잔이란 뜻으로 어디서 인생의 행복을 느끼고 살았는가 하는 겁니다. 카소란 열정이란 뜻입니다. 이 땅에서 무엇이 나를 신나게 만들어 내 열정을 쏟고 살았는가를 물으신다는 겁니다. 내 삶을 어디에 쏟을 때에 보람이 있고 재미가 있었느냐? 그것 계산해 보자는 겁니다. 호스피스 전문의 오츠 슈이치라는 의사가 1000명의 환자들의 죽음을 관찰하고 쓴 책이 있습니다. 「죽을 때 후회하는 25가지」입니다. 천명 가운데 단 한사람도 좀 더 좋은 집에서 살아봤으면 하는 말이 없습니다. 가장 많은 후회 첫 번째, 내 곁에 사람들에게 특히 사랑하는 사람에게 더 많이 더 진실하게 감사했어야 했는데, 내가 고맙다고 말해야 될 사람이 이렇게 많은 걸 이제야 깨닫는 구나. 두 번째, 바쁜 일에 허둥대다가 중요한 일을 놓치고 살았구나. 내가 중요한 일을 먼저 했어야 되는데 하는 겁니다. 세 번째, 겸손했어야 되는데 내 성질부리고 살았다. 네 번째, 좀 더 친절한 말을 해야 되는데 함부로 내뺕고 살았구나. 후회합니다. 쭉 나오다가 마지막 네 가지는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스물 두 번째, 건강할 때 건강 지켰어야 되는데. 스물 세 번째, 진작 담배 끊었어야 되는데. 스물 네 번째, 건강할 때 할 일들이 있었는데. 마지막 스물 다섯 번째, 내 약점들을 좀 더 진지하게 고쳐갔더라면 더 크게 쓰임 받았을 수 있었을 텐데. 오늘 본문을 읽어가다 보면 궁금증 하나가 생깁니다. 왜 성경은 종말 이야기를 할 때마다 돈 얘기를 하는 걸까? 왜 물질 얘기를 하는 걸까? 하나님에게는 물질이 필요 없을 텐데 제가 생각을 해보니까. 첫 번째, 돈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돈으로 깨끗해지는 것이 가장 쉬운 겁니다. 하나님 앞에 돈 드리는 게 가장 쉬운 일입니다. 여러분 팔 하나 바쳐라 그러면 할 수 있겠어요? 팔까지 그럴 거 없다. 새끼손가락 하나 바쳐라. 가능하겠어요? 눈 두 개나 되니까 하나 바쳐라. 불가능한 일이지요. 이게 제일 쉬운 일이다. 그런 얘기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 앞에서가 아니라 인간들 입장에서 보면 사람들이 물질을 너무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질 드리면 하나님의 주인성을 인정한 겁니다. 다 드린 겁니다. 본문의 마지막 결론 16:13을 보세요.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 하나님이 앉아 있어야 될 자리에 떡하니 주인처럼 앉아 있는 게 재물이더라. 돈이더라. 하나님하고 맞짱 뜰 수 있는 건 돈이더라.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돈을 어떻게 썼느냐 본다는 것입니다. 돈 결단이 제일 쉬우면서 제일 어렵습니다. 중심자리, 왕좌에 돈이 있는 한 절대로 결단을 못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주인이라는 신앙고백이 확실하지 않고서는 하나님 앞에 이것이 깨끗해지지 않더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읽다 보면 신구약 성경에서 참 재미있다고 느끼는 9절 말씀이 나옵니다.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눅 16:9)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내가 천국에 갈 때에 천군천사들이 영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깨끗하게 드렸던 그 재물들이 천국문 앞에서 나를 영접한다는 말씀입니 다. 여기 불의의 재물이 무엇일까요? 우선 돈이 더렵다는게 아닙니다. 돈을 벌고 가지는 과정엔 항상 불의가 낄 수 있다는 겁니다. 오늘부터 3대 거짓말이 있습니다. 오늘부터 담배 끊는다. 쉽지 않습니다. 오늘부터 예수믿는 집사로써 회사 회식자리에 가서 술 안 마신다. 쉽지 않습니다. 오늘부터 다이어트해서 10kg 뺀다. 가능하지 않습니다. 옛날에 3대 거짓말이 있었습니다. 처녀가 시집 안간다는 말입니다. 요즘은 그게 진짜입니다. 노인이 죽고 싶다는 말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가짜입니다. 밑지고 판다입니다. 이게 가짜입니다. 돈을 벌다 보면 갈등이 일어납니다. 바이어하고 나는 계약했다고 좋아하는데 떨어진 사람들 이 가슴을 칩니다. 그 사람에게 아픔을 주었습니다. 나는 싸게 샀다고 좋아하는데 싸게 팔아 서 가슴을 치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불의의 재물이라고 하는 겁니다. 불의의 재물이란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내 손에 있다가도 오늘 없어질 수 있는 게 재물입니다. 그래서 그것으로 영원을 살 수 있다면 그 재물이 가장 값어치 있게 사용된 것입니다. 불의의 재물이란 내 손에 잇다고 내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뻔히 하나님의 것 하나님께 드려야 되는데 내가 움켜쥐고 내 것이라고 고집합니 다. 내 곁에 가난한 사람, 사회적인 약자, 내 눈에 들어왔습니다. 섬겨야 될 곳이 내 가슴속에 박혔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겁니다. 나누어라. 주어라. 네 주머니 열어라. 그 얘기입니다. 보였지만 가슴에 꽂히지만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 가난한 자의 것입니다. 여러분 곁에 있는 사회적인 약자들의 것입니다. 내 손안에 있다고 의로운 게 아니라는 것입 니다. 정당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게 불의의 재물입니다.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영혼을 사는 일을 위해서 쓰는 것이 하나님 나라에서 나를 영접할 것입니다. 구제를 위해서, 선교를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쓰여진 것이 천국에서 너를 영접하리라.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믿음의 친구들이 모여 있는 공동체,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함께 살 가족 친구들입니다. 이 공동체를 위해서 사용된 것이 하나님께 드린 것이 되어서 천국에서 나를 영접하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어느 때에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어느 때에 우리 자신을 돌아보지 않겠습니까? 이 절기를 통하여 우리는 내 인생에 감사를 되돌아보는 시간입니다. 초실절을 지키라. 장막절을 지키라. 유월절을 지키라. 하나님이 지키라고 명하신 절기를 통하여 우리는 다시 한번 끝날의 심판, 계산을 기억하게 됩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종말, 내 인생의 종말이 곧 다가올 수 있음을 기억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인이 오늘밤 나를 부르시면 계산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돌아보는 멋진 절기가 맥추감사주일 절기신앙입니다. 이 말씀이 여러분의 삶에 새로운 전환점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삶의 자세 가 신선하게 새로워지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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