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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15일 주일예배 설교내용 –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는 비결. 物分かりの悪さから逃れる秘訣。
본문 갈 3:1~6
갈 3:1 어리석은 갈라디아 사람들이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모습이 여러분의 눈 앞에 선한데, 누가 여러분을 홀렸습니까? 2 나는 여러분에게서 이 한 가지만을 알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믿음의 소식을 들어서 성령을 받았습니까? 3 여러분은 그렇게도 어리석습니까?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 와서는 육체로 끝마치려고 합니까? 4 여러분의 그 많은 체험은, 다 허사가 되었다는 말입니까? 참말로 허사였습니까? 5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성령을 주시고 여러분 가운데서 기적을 행하시는 것은 여러분이 율법을 행하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믿음의 소식을 듣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이 복음을 듣고 믿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까? 6 그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그것을 의로운 일로 여겨 주셨다"는 것과 같습니다.
1. ああ、物分かりの悪いガラテヤの人たち、だれがあなたがたを惑わしたのか。目の前に、イエス․キリストが十字架につけられた姿ではっきり示されたではないか。2. あなたがたに一つだけ確かめたい。あなたがたが霊を受けたのは、律法を行ったからですか。それとも、福音を聞いて信じたからですか。3. あなたがたは、それほど物分かりが悪く、『霊』によって始めたのに、肉によって仕上げようとするのですか。4. あれほどのことを体験したのは、無駄だったのですか。無駄であったはずはないでしょうに……。5. あなたがたに霊を授け、また、あなたがたの間で奇跡を行われる方は、あなたがたが律法を行ったから、そうなさるのでしょうか。それとも、あなたがたが福音を聞いて信じたからですか。6. それは、「アブラハムは神を信じた。それは彼の義と認められた」と言われているとおりです。
지난 주일에는 자신의 자아가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이 진정한 축복이라는 성경의 약속을 들었습니다. 부활하셔서 지금도 내 안에 살아계시며 성경의 고백을 통해 직접 말씀하고 계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믿습니다. 가장 풍요롭고 윤택한 일상을 살고자 하는 태도와 자세로 언제나 나와 동행하시는 주님을 시인하며, 끝없이 죄를 뿜어내던 자아가 십자가에서 이미 죽은 자의 축복을 누리실 수 있기를 다시금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아쉬운 말을 하며, 안타까운 심정을 전하고 있는 바울의 간절한 외침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는 또한 부모가 자녀들의 바람직하지 못하고 어리석은 선택과 행동에 대해서 엄격한 목소리와 격앙된 태도로 그 잘못을 나무라는 모습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부모가 아니라도 누군가 위험한 행동을 하거나, 혹은 바람직하지 못한 태도를 보이면 바로잡고자 하는 생각은 상대를 위해서도, 그가 속한 공동체와 사회를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할 것입니다.
본문의 1절에 어리석다는 표현이 나오는데요. 이 표현의 원어인 ‘아노에토스’는 “생각할 능력이 있으면서도 그 능력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자의 처신”을 가리킨다고 주석성경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알지 못해서 그릇된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알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무시하고 거부하는 어리석음”을 말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일본어 성경은 “物わかりの悪い”라고 번역한 것인데요. 분별력이 없는 것이 아닌 분별하지 않기로 선택한 어리석음인데요.
복음을 알고 믿으면서도 복음의 축복을 길거리에 쓰레기처럼 방치해 놓은 것과 같은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이 그토록 안타까워하면서 격앙된 목소리로 강하게 어필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축복을 축복인 줄로 지식으로는 알면서도 실제로 그 축복의 자리를 회피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전하였습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 드린대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나의 죄도 함께 죽어서 이제는 저주가 없고 멸망도 없는 영생을 약속받은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 증거가 곧 이 십자가이지요. 그래서 교회는 십자가를 상징으로 내걸고 있는 것인데요. 그래서 이 십자가를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십자가를 상징으로 하는 교회 건물을 세우고 그 공동체 안에서 생활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축복으로 믿는 믿음의 토대 위에서 축복으로 충만한 일상생활을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라고 강하게 어필하는 것이지요. 이 말씀은 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형을 받는 현장이 있었다는 사실의 차원이라기보다는 십자가의 존재가 곧 예수님의 희생과 죄된 자아의 죽음을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복음을 아주 극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도 이 십자가를 가리키며 여러분들에게 십자가의 복음과 그 희생에 대해서 전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 십자가를 보면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자기 죄의 죽음을 함께 기억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갈라디아 성도들은 이 십자가의 복음을 듣고도, 그리고 그 복음으로 인해 교회공동체를 세우고 섬기면서도 율법의 행위를 요구하는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마치 진짜 화폐를 받고도, 여전히 가짜 위조지폐에 마음이 빼앗겨 진짜를 등한시하는 모습과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갈라디아의 성도들도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성령님의 강력한 능력을 체험하였습니다. 기적과 같은 경험도 있었습니다. 본문의 4절에 보시면 “그 많은 체험”이라는 구절이 있는데요. 여기서 많다는 말은 강력하다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다시 말해 수적인 표현이면서 동시에 정도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절대로 잊을 수 없이 각인된 경험을 뜻하지요.
그럼에도 그들 가운데 남과 서로 비교할 수 없는 “믿음”이라는 내면의 기준보다, 율법의 행위라는 남과 비교할 수 있는 외적인 기준에 생각이 기울기 시작하는 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 앞에서 자신의 믿음을 지키는 것보다, 남들의 형편과 자신을 비교하며 믿음의 분량을 측량하며 자존심을 채우려는 탐욕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는 말이지요.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 믿음을 측량하려는 시도는 자신을 남과 비교하여 보다 우월한 위치에 서고자 하는 인간의 탐욕을 영적으로 포장하는 것입니다.
사실 애초에 율법은 적법하게 사용하면 우리에게 유익합니다.
... 율법은 사람이 그것을 적법하게만 쓰면 선한 것임을 우리는 아노라 (딤전1:8)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마 5:17)
그래서 사도 바울도 이렇게 증언하지요.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8:3-4)
그러므로 율법이란 우리를 우리답게, 그리고 사람답고 아름답게 회복시키시기 위해서 매만져 주시고, 어루만져 주시며, 깍고 다듬기 위해서 주신 최소한의 제약이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거룩한 삶을 지킬 수 있도록 최소한 것으로 허락해 주신 율법을 지키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게 되면 영적인 교만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바로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이 그런 자들이었지요. 예수님께서 영적으로 교만한 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마 23:13)
이르시되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눅 11:46)
율법의 조문과 문서의 내용을 지키며 영적인 교만에 빠져서 정작 거룩한 삶과 영생의 축복을 쓰레기장에 버리고 마는 죄를 범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갈라디아의 성도들이 어리석음에 빠진 것을 고발하는 바울의 외침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여전히 유효합니다. 복음을 믿고 성령의 능력과 축복으로 살기 시작한 처음 사랑의 활기찬 모습에서 점점 율법적이고 관습적으로 굳어가는 모습이 자신도 모르게 드러나는 경우가 생겨납니다.
신앙생활만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모습으로 언제나 넉넉한 태도와 자세로 살았습니다. 항상 생기발랄하게, 그리고 아무런 세속적인 근심과 걱정에 휘말리지 않던 모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서부턴가 그런 행동이 점점 유치하고 생각 없는 모습으로 여기려는 유혹에 마음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바로 남과 비교하기 시작할 때부터입니다. 남과 신앙생활을 비교하고, 남과 일상생활을 비교하고, 남과 자녀들의 행동을 비교하고, 남과 소유를 비교하고, 남과 성격을 비교하지요. 그것이 무엇이든 남과 자신을 비교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우월감을 가지려는 유혹에 한 발자국씩 휘말리고 휘둘리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갈라디아의 성도들이 율법을 중시하는 유대 기독교인들과 접촉하고 그들과 자신들을 비교하자, 율법을 지켜야 좀 더 세련된 믿음생활을 할 수 있다고 여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만일 같은 기독교인이면서, 혹은 같은 처지에 있으면서도... 좀 더 윤택하고, 세속적으로 매력적인 생활을 하는 이와 조우하게 되면 그런 유혹을 만난 것입니다.
우리는 그 순간 정신을 차리고 깨어 바른 선택을 해야 합니다. 상대와 나를 비교하여 좀 더 우월하다고 착각하는 믿음의 자리에 서려는 유혹에 시선을 빼앗길 것인지.. 아니면 주님을 바라보며 내게 주신 그 사명의 자리 그 순종의 시간을 지키며 십자가에서 죽고 예수님과 함께 사는 자기를 지킬 것인지 말입니다. 마지막 때를 살고 있는 이들에게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유1:20-21)
자신을 지킨다는 것은 죄에 물든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거나, 자기 노력과 실력을 자존감을 세우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직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자기의 죄는 죽었고,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인생을 살면서 영생을 살고 있다는 진리를 잊지 않는 것이지요.
지난 주간에 미국에서 목회하시는 친구 목사님의 휴가일정을 도와 드렸습니다. 미국인들의 교단에서 사역하시는 목사님이신데, 학창시절에는 저보다 입학을 먼저 하셔서 선배님이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이제 나이도 갖고 하니 먼저 친구로 부르라고 하여 편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대화를 하면서 여러가지로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고 느꼈습니다. 특히 서로가 사역하는 삶의 자리가 다르다보니 미국의 목회는 어떻고, 제가 사는 여건을 어떤 지를 자연스레 비교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부분들은 인간적으로 보기에 조금 부럽게 여겨지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일본에 비해서 기독교의 가치와 가르침이 주류인 미국에서 목회를 하는 것이 조금은 더 수월하게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또한 신앙생활과는 별개로 일반사회 시스템이나 제도에 대해서도 비교하며 말하게 되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작년에도 함께 도우며 대화를 나누었지만, 올해는 좀 더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대화를 더 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대화와 친구 목사님의 의견을 들으면서 저에게도 비교의 돌맹이가 제 내면의 연못에 던져져 작지만 분명한 물결이 일어나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때 제가 만일 주님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았다면, 그저 친구 목사님의 사역을 부러워하며 한숨을 쉬었을 것입니다. 또한 기독교와 복음이 비주류이며 전혀 관심의 대상도 아닌 일본에서 사역하는 것에 허망함을 느꼈을지 모르지요. 이미 그런 마음으로 일본에서 잠깐 활동하다 한국으로 귀국하거나, 제3의 국가로 떠난 선교사님도 계셨던 것이 사실입니다.
목사인 저도 이렇게 현실의 문제에서 누군가와 비교를 하기 시작하면 반드시 유혹의 파문이 일어납니다. 심지어 그 파문이 파도가 되고 풍랑이 되어 자신을 휩싸게 되고, 마침내 홍수와 같은 비교의식에 휩쓸려 떠내려가게 되어 버리는 것이지요. 이런 유혹의 작은 파문이 일어날 때 주님을 기억하며 이 말씀을 기억하시길 소망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 (히2:1)
우리가 들은 복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듣고 믿은 그 십자가의 복음을 떠올려야 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어디서나 나와 동행하고 계시는 주님께서 나를 바라보고 계시는 시선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율법을 행함으로, 혹은 실력을 키움으로 우리의 믿음과 삶을 지키고 부흥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나를 의로 여겨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확정지으셨고, 절대 변하지 않을 기록으로 그분의 손바닥에 나의 이름을 새겨 놓으셨습니다.
믿음생활에 있어서든, 일상생활에 있어서든... 복음을 믿는 자는 절대 남과 비교하거나 부러워하거나 혹은 우월의식을 갖지도, 타인을 낮추어 보지도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으면, 늘 주님을 바라보게 되고, 언제나 동행하시는 주님께서 보호하심을 누리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복음을 믿는 저와 여러분은 늘 주님을 바라보며, 일상에서 주님과 동행하며 생활함으로 남과 비교하지 않고, 부러워하지 않는 지혜로운 인생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을 믿고 감격하던 처음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떠나지 않으시고 나와 함께 동행하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있다면, 처음 사랑을 지킨 것입니다. 율법을 행함으로 남들과 비교하든, 노력을 얻어진 실력이나 성취의 결과로 남들의 형편과 비교하든, 결국 타인과의 비교는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며 처음 사랑을 잃게 합니다. 주님과 동행하지 않는 어리석은 결말로 우리를 휩쓸어 가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나의 의지나 노력과 정성, 그리고 헌신과 섬김이 있기 전에 이미 나를 구원하시고 의롭다 하신 십자가의 복음을 믿읍시다. 복음의 소식을 듣고 믿어 거듭난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며 예수님을 바라보며 이 말씀을 늘 기억할 때, 남과 비교할 수 없는 충만함과 풍부함, 그리고 가장 선하고 완전한 일상을 누리고 있음이 믿어지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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