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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기와 굴비
이 홍사
조기와 굴비가 어떻게 다르지?
입으로는 그렇게 자문했지만, 그 답을 모르겠다. 이 자문은 백 선생과의 통화를 끝내고 자신에게 물은 것이다. 백 선생은 전화에 대고 말했다.
“조기가 아니고 굴비가 확실하지요?”
굴비 상자 안에 인쇄된 종이에 영광 법성포 굴비라고 씌어 있어서 굴비인 줄 알았지, 나는 조기와 굴비를 눈으로 구별하지 못한다. 구별하는 방법을 모르고 조기와 굴비가 무엇이 다른지도 모른다.
영광에서 택배가 왔다.
어제 택배가 왔는데 택배가 온 줄을 몰랐다. 어제는 자주 만나는 선배와 일찌감치 한잔하고 초저녁에 들어오니 아내가 영광에서 굴비가 왔는데 보낸 사람 이름이 없다면서 누가 보냈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영광? 영광이라면 아는 사람이라곤 백 선생뿐이다. 요즘 택배 상자에 보면 보낸 사람의 이름이 없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
“영광에서 굴비를 보낸 사람이 누구예요?”
“지난주에 손님 오신다고 했잖아? 영광에서 왔다면, 아마도 그분일 거야.”
내 대답은 시큰둥했다.
“잘 받았다고 인사하세요. 그게 도리예요.”
도리? 아내는 아이를 가르치듯 도리를 들먹였다.
그리 늦은 시간이 아니라서 백 선생에게 전화했다. 경기도 어려운데 웬 굴비를 다 보냈느냐고 굴비를 잘 받았다고 말했다. 그 말에 백 선생은 깜짝 놀라며 굴비가 왔더냐고 물었다. 굴비가 왔으니 왔다고 대답할 수밖에. 대리점에서 아직 보내지 않았다고 해서 더 맛있는 보리굴비를 준비했다고 하면서 내일 보내려고 지금 냉장고에 넣어두고 있다고 말했다. 아마도 물건은 직접 보지 않고 주소를 사진으로 찍어서 굴비 대리점에 보내면 부쳐주는 모양이라 짐작했다. 뭔가 사인이 맞지 않았던 모양이다.
추석을 앞두고 있었다.
백 선생은 추석 전에 전국에서 택배가 가장 많이 나가는 곳이 영광이라면서 대리점에서 착각한 모양이라고 하면서 조기가 아니고 굴비가 확실하더냐고 물었다. 그 질문을 받고 나는 조기와 굴비의 다른 점이 무엇이지 생각했다.
“아무튼 포장지에 영광 법성포 굴비라고 적혀 있던데요?”
내 대답은 영 자신이 없었다. 조기와 굴비가 어떻게 다른지 생각해보지 않았다. 생각해보지 않은 것이 아니라 관심 없이 모르고 살아왔다. 백 선생은 대리점 사장이 보내지 않았다고 했는데 그거, 참 이상하다고 했다.
“추석을 앞두고 물량이 많아서 착각할 수도 있겠죠.”
“그런가? 좀 떠져야 하겠네.”
백 선생의 전화를 끊고 굴비와 조기가 어떻게 다른지 생각해보았다.
백 선생이 보름 전쯤 구미를 다녀갔다.
만난 건 처음이다.
백 선생을 알게 된 지가 십오 년이 넘었는데 얼굴은 처음 본 것이다. 막상 만나서 불러보니 백 선생이라는 호칭은 좀 어색하다. 나에겐 똥배라는 이름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내 전화기에 백성이 똥배로 전화번호가 저장되어 있다. 온라인이나 전화로는 늘 똥배님이라고 했는데 막상 만나서 똥배라고 부르기에 어색해서 백 선생이라고 바꾸어 불렀다. 만나서 보니 똥배라는 닉네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아줌마였다. 똥배는 찾아볼 수가 없고 키가 크고 늘씬한 아줌마였다. 아무튼 똥배라고 하자, 그게 더 정감이 있으니까.
똥배를 알게 된 지가 십오 년이 넘었다.
만나서 따져보니 세월이 그렇게 흘렀다.
영광으로 내려가기 전, 서울에 있었을 적에 알았으니 영광으로 내려간 지 십사 면이 되었다고 했으니 최소한 십오 년은 넘었을 거다. 내 소설 카페에 똥배라는 닉네임으로 들어와서 글에 관심을 보이는 똥배가 있었다. 이분이 누구인가? 회원 정보에 찾아보니 여성이었다. 읽은 소감을 댓글을 다는 데 글을 보는 눈이 보통이 아니었다. 상당히 날카롭고 예리했다. 짤막하게 올리는 댓글에서도 보통 필력이 아님을 알 수가 있었다. 간결하면서도 할 말을 다 하는 문장이었다.
문장에 취한다는 말이 있다.
똥배의 문장이 그랬다. 감칠맛을 지니면서 예리했다. 내 카페에는 횡설수설 갈기는 원고지라는 코너가 있어서 거기다가 잡문을 올리면 내가 뭐 하는 사람인지 다 안다. 당연히 똥배도 굴착기 기사 출신이고 중장비 임대업을 한다는 걸 알게 된 모양이다. 그렇게 댓글을 주고받으면서 친분을 쌓은 한참이 지난 후에 전화번호를 알려달라는 댓글이 달렸다, 뭘 상의할 게 있다고 했다. 나는 이미 그녀가 어떤 성격의 소유자라는 걸 알았기에 전화번호를 알려주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최소한 내 글을 읽고 형편이 없으니 읽은 수고료를 요구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걸 알았다.
며칠이 지나서 똥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저 똥배예요.”
서울 말투의 목소리가 가냘픈 여성이었다.
농사를 짓고 싶어 영광에 땅을 샀다는 것이었다. 영광이 시댁이나 고향이냐고 물었다. 아무 연고가 없는 곳이라고 하면서 집을 짓는데 평당 얼마나 들고 굴착기로 땅을 평탄 작업을 하는데 평당 얼마나 들겠느냐는 성급한 질문을 던졌다.
연고가 없는 시골에 가면 정착하는데 상당히 고생하겠구나, 생각하면서 차마 그 말은 하지 못했다. 시골이라는 곳이 워낙 폐쇄적이고 배타적이어서 타지의 사람이 들어가서 주민들과 더불어 살기가 엄청나게 어렵다. 기대에 부풀어 있는 사람에게 그걸 설명해서 초를 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이미 땅을 샀다는 것이라 말을 하지 않았다.
그날 통화에서 내가 알고 있는 건축의 상식을 자상하게 설명해준 것으로 기억한다. 첫날 통화는 상당히 길었다. 거기서 똥배가 백성이라는 본명을 지녔다는 것도 알았다. 전화를 끊고 내 전화기에 백성이 똥배라고 저장했다.
남편과 아이들은 서울에 두고 여자 혼자서 영광에 내려가 터를 잡는다고 생각하니 기가 막혔지만 말릴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똥배는 영광에 내려가서 그 일을 거침없이 진행하는 눈치였다. 일을 진행하다가 난관에 부딪히면 간간이 전화가 왔다. 그런 일로 구미에서 영광까지 가볼 수는 없는 노릇이고 내가 아는 한도에서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다. 집을 다 짓고 혼자서 살 거처를 마련한 모양이었다. 내심 시골살이에 잘 적응하기를 바랐다.
몇 년이 지난 후에 동네 아줌마들을 데리고 김치공장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마도 농사 기술을 익혀서 배추 농사를 짓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영광에 내려가 농사를 지으면서도 틈틈이 내 카페에 들어와 글을 읽어보고 댓글을 남겼다.
그런데 어느 날 카페가 없어졌다.
내 필명을 적고 소설 세계로 되어 있는 카페가 없어진 것이다. 날아간 것이 아니라 내가 주인장 노릇을 못 하게 변해버렸다. 그걸 설명하자면 길다. 어느 날 보니 내가 주인장에서 손님으로 들어가게 카페가 변해버렸다. 카페지기로서 활동할 수가 없도록 변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 연유를 찾는데, 하루가 걸렸다. 일이 급한데 기사가 쉰다고 해서 내가 직접 굴착기를 끌고 작업을 나갔다. 작업을 하던 도중 참을 먹으러 갔다가 오면서 주머니의 스마트 폰을 굴착기에 올라가면서 땅에 떨어트린 것인데 그걸 모르고 굴착기를 움직여 바퀴로 밟아버리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박살이 난 게 아니고 전화기에 진흙탕에 박히면서 굽었는데 못 쓰게 되었다. 안에 든 중요한 자료를 살릴까 걱정을 했는데 작업을 마치고 단골로 가는 핸드폰 대리점에 들고 가니 단말기만 바꾸면 정보는 그대로 옮길 수가 있다고 했다. 정보라고 해봤자 사진과 저장된 전화번호, 폰뱅킹을 할 수 있는 앱뿐이다.
카톡의 내용을 옮기는 과정에서 대리점 총각이 말했다.
“카카오 계정과 통합할까요?”
그래야 카톡이 옮겨지는 줄 알고 그러라고 대수롭잖게 말했다. 카톡도 되고 구부러져서 못 쓰게 된 핸드폰은 버리고 새 전화기를 들고 들어왔다. 그날 저녁에 카페에 들어가려니 아이디를 다시 치라고 했다.
아하! 전화기를 바꾸었으니 당연히 아이디를 쳐야지.
대수롭잖게 생각하고 아이디를 치고 들어가니 카페가 열리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디 바꾸기를 했다. 그래도 열리지 않았다. 다시 아이디를 만들었다. 핸드폰 대리점 총각이 이 나이에 카페를 가지고 있고 메일을 사용한다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제 가게 아이디를 만들어 넣은 것이었는데, 그걸 모르고 밤이 늦도록 아이디 바꾸기를 하려고 아이디를 새로 만들어서 들어가려고 발버둥을 친 것이다.
다음날 혹시 핸드폰 가게에서 아이디를 바꾸었나, 생각하고 찾아가서 물으니 카카오 계정과 통합하면 아이디가 바뀌는데 자기가 대리점 아이디를 넣었다는 것이었다. 아이디를 알아서 그 아이디를 쳐서 들어가려 해도 카페가 열리지 않았다. 밤새 아이디 바꾸기를 했으니 아이디가 바뀐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혼선으로 바뀐 아이디를 기억하지 못했다. 대형 사고였다. 카페지기가 카페 관리를 할 수가 없으니 분명 대형 사고다. 대리점 총각은 인터넷 다음이나 카카오 계정에 문의하면 아이디를 찾을 수가 있을 것이라 했다.
그 사고로 안 사실은 인터넷 다음이나 카카오는 직통 유선 전화가 없다는 점이었다. 질문사항이 있으면 메일로 보내고 메일로 답변을 받아야 한다. 불편하기 짝이 없다. 구구절절 애가 타는 사연을 적어서 두 군데 메일을 보냈다. 물론 다른 아이디로 가입해서 보낸 것이다. 사흘 만에 날아온 대답은 저희도 사정은 알지만 어쩔 수가 없다는 절망적인 대답이었다.
답답했다.
손님으로 들어가 글을 읽었다. 카페지기로서 권한은 완전히 상실했다.
그 카페에 공지 사항을 올렸다.
카페가 이렇게 되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올렸더니 역시 방법이 있었다. 카페의 글을 누가 퍼가도 상관없다는 생각으로 드래그 금지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걸 알고 있던 창환 형이 가르쳐 준 것이었다. 내 필명을 넣고 소설 마당이라는 이름의 카페를 다시 만들어서 퍼다 나르면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준 것이 창환 형이었다. 창환 형 역시 작가인데 책을 열 권도 넘게 냈다. 내 카페에 회원으로 가입해서 알게 된 사이다. 시집도 내고, 산문집도 내고 소설집도 낸 만능 작가인데 하뜨크가 무엇인지 찾다가 내 카페로 들어오게 되었는데 카페지기인 나보다 글을 더 자주 올린다. 하뜨크란 몽골에서 행운을 상징하는 목도리다. 몽골에 가서 초원과 사막에서 울트라 마라톤을 한 그는 하뜨크가 인상적이었던 모양인데 인터넷에서 찾다가 내 카페로 들어오게 되었다. 몽골에서 칠 년간 사업을 했던 나는 하뜨크에 대해서 글을 몇 편 썼는데 그게 인터넷에 올라와 있었던 모양이다. 하뜨크가 연결해준 우리의 관계는 급속도로 발전했다. 서로가 서로의 독자가 되는 데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제는 둘도 없는 문우가 되었다. 나이도 비슷하고 동류의식이 자극해서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그를 위해서 문을 열어둔 사랑채라는 코너를 만들어 두었다. 내가 소설집을 낼 적에 해설을 써 준 그의 글은 비범하다. 누가 읽어도 보통이 넘는 작가라는 걸 안다.
소설 마당이라는 카페를 만들어 사무실 경리 부장인 여동생과 교대로 글을 퍼다 나르는데 일주일이 걸릴 방대한 양이었다. 소설 마당이라는 카페를 만들어 글은 다 퍼다 날랐는데 이백 명이 넘는 회원을 옮길 방법은 없었다. 그래서 못 쓰게 된 카페에 큼직하게 글을 남겼다.
이 카페는 폐쇄되었으니 소설 마당으로 찾아오셔서 회원으로 가입하세요!
자주 들어오는 회원들은 속속 찾아 들어왔다.
아마도 창환 형이 가장 먼저 들어온 것 같았다. 속으로는 창환 형에게 미안했다. 창환 형이 올린 글들이 모두 옮기는 과정에서 내가 쓴 글로 표기되어 있었다. 그래서 창환 형의 독방인 그 문을 열어둔 사랑채라는 코너에 글을 남겼다. 이러이러한 연유로 옮기는 과정에서 글쓴이가 바뀌었지만 모두 창환 형의 글이라고. 물론 그 후에 똥배도 찾아 들어왔다. 오랜만에 들어온 모양이었다. 똥배라는 닉네임으로 들어오지 않고 백성이라는 본명으로 들어왔다. 그래도 나에겐 똥배다. 똥배는 내가 올린 공지를 보지 못하고 창환 형이 쓴 글을 내가 쓴 글인 줄 알고 댓글을 남겼다. 나는 즉각 해명해야만 했다. 댓글로 하자니, 설명이 난해해서 전화로 사실 이러이러해서 이렇게 되었노라고 전화했다.
“그분이 누구세요?”
똥배도 창환 형의 간결하며 서정적인 글에 취한 모양이었다. ROTC인지 학사 출신인지 군인이었는데 영관급에서 전역하고 정부 부처에서 일하다가 지금은 퇴직한 군인정신이 충만한 작가라고 설명했다. 군인정신? 사실이 그랬다. 창환 형은 글만 잘 쓰는 게 아니라 나는 문외한인 식물에 대해서도 박식했고 운동 신경이 발달해서 이 나이에, 마라톤을 뛸 정도로 강인한 체력을 가진 만능 재주꾼이었다.
그렇게 설명했더니 똥배는 그분이 누구인지 알고 싶다고 했다.
카페를 옮겨서 다시 올리는 창환 형의 글은 mount1020 이라는 닉네임으로 올라와 있었다. 그 글에 똥배가 댓글을 달고 이야기를 주고받는데 나는 관심이 없었다. 둘이서 연애하듯이 댓글을 주고받았다. 댓글을 얼핏 보니 똥배는 1020이 맘에 든다고 했다. 자신의 생일이 10월 20일인데 그걸 닉네임으로 썼으니 우연이 아니라 필연으로 여기는 듯했다.
드디어 둘이서 한번 만나자는 데 뜻을 모은 모양이다. 창환 형은 서울에 있고 똥배는 영광에 있으니 내가 있는 구미에서 만나자고 한 모양이었다. 똥배는 내가 안 지가 십오 년이 넘었는데 얼굴을 한 번도 못 보았다고 하니 그럼 도리가 아니고 상식에 어긋난다고 질책을 날린 모양이었다. 창환 형은 두 번인가 만났었다. 창환 형은 나랑 동갑이다. 단지 생일이 내가 몇 달 빠를 뿐인데 내 카페에 들어오고부터 아주 가까운 문우가 되었다. 부산으로 출장을 갔다가 오는 길에 구미에 들렀었고 일부러 나를 만나러 내려온 것은 아니지만 어디를 갔다가 구미에 들러서 막걸리를 마신 사이라 얼굴은 알고 있었다. 서로가 존중하는 의미에서 형이라고 부르는 사이가 되었다.
둘이서 댓글을 주고받다가 의기가 투합되었는지 언제 구미에 가면 시간을 낼 수 있느냐고 똥배에게서 연락이 왔다. 창환 형과 상의가 되었다고 했다.
언제든지 상관없다.
이 정부가 들어오고 건설은 버린 자식이라 경기가 죽어 일은 없고 미얀마는 아예 나가지도 못한다. 코로나도 코로나지만 미얀마에서는 쿠데타가 일어나서 외국인이 들어갈 수가 없다. 그냥 지켜보고 있는 상태다. 내 인생에서 가장 잔혹한 실수는 미얀마에 투자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실의에 빠져 있다가 다시 군에 간다는 각오와 미얀마의 것은 다 버린다는 생각으로 심리적 변화를 위해서 머리를 삭발했다.
희망이 없었다.
한국에서 하는 중기 임대업은 매달 적자를 보고 있었고 미얀마에 투자한 재산은 물 건너에 있다. 미얀마에 투자할 적에 아내가 그냥 욕심을 부리지 말고 편하게 살자고 했는데 막상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원망할 곳이 없었다. 그냥 심장을 긁으며 자책하는 수밖에 없었다. 자고 일어나면, 고민하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오늘은 뭘 하지?
그 생각을 담배를 한 대 피울 동안 하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막상 삭발하고 나니 희망이 생겼다. 자고 일어나 머리가 얼마나 자랐나 거울을 보게 되는 것이었다. 내일은 오늘보다 낫겠지?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내일을 기다리게 되는 것이었다. 인간은 그렇게 사소한 희망이라도 있어야 하는 모양이다.
아무튼, 똥배는 창환 형과 구미에서 만나기로 했으니 언제가 좋겠느냐는 질문을 날렸다. 거듭 얘기하지만 아무 때라도 상관없다. 창환 형과 시간을 상의하여 편한 때에 오시라고 했다.
창환 형과 날짜를 상의했는지 일방적으로 통보했는지는 모르지만, 이틀 후에 연락이 왔다.
이번 주 토요일에 오겠다고 연락이 왔다.
영광에서 오니 대전으로 가서 서울에서 내려오는 창환 형과 만나서 오느냐고 물었다. 구미에 온다면 그렇게 오는 게 가장 편리한 길인데 그렇지 않다고 했다. 광주로 가서 구미로 오는 버스를 타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구미에서 광주로 바로 가는 버스가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던 터라 그런 루트도 있느냐고 물었고 몇 시에 도착이냐고 물었더니 오후 세 시 정각에 도착이라고 했다. 창환 형은 새벽에 열차로 내려와서 오전은 금오산을 둘러볼 것이니 오전에는 자유시간을 달라고 했다. 금오산에서 내려오면 아무래도 점심시간이 될 것이다. 창환 형과는 점심을 같이 먹으면 되고 똥배가 오후 세 시에 도착이라면 당연히 한잔하고 자고 갈 것이라 짐작하고 금오산 호텔로 가는 게 좋을 것이라고 호텔로 전화를 넣어 가격을 알아보았는데 나중에 알아보니 저녁 여섯 시 반 차로 돌아간다는 것이었다.
그럼 겨우 세 시간 반을 만나는 거야?
시간이 그렇게밖에는 안 된다고 했다. 점심 겸 이른 저녁을 먹고 돌아가겠다는 것이었다. 방법이 없다. 그날 오후 세 시에 버스 터미널로 마중을 나가겠다고 했다. 여섯 시 반에 구미에서 광주로 가는 버스가 있는 모양이라고 짐작했다.
나는 세 시간 반의 만남을 위해서 일정을 짜야 했다. 그런 일에는 나는 상당히 취약한 편이다. 만나면 술을 빼놓을 수가 없다. 일단 한잔할 것이기에 내 차는 가지고 갈 수가 없다. 그렇다고 가는 곳마다 택시를 잡자면 택시를 잡는데, 시간이 다 소요될 것이다. 어디로 어떻게 움직이는지 모르는데 택시를 한나절 대절하는 게 괜찮을 것이다. 그게 편리하고 싸게 먹힐 수도 있다. 일단 택시를 한 대 예약했다.
창환 형은 금오산을 둘러보고 상모동에 있는, 그분의 생가를 둘러보고 싶다고 했다. 창환 형은 분명히 그분이라고 했다. 좌파라서 독재자로 인식하고 있는데 분명히 그분이라고 했다. 생각이 바뀐 모양이다. 그거 괜찮은 생각이라고 마음이 들었다.
둘이서 몇 시에 똥배가 도착한다는 걸 알고 있고 거기에 맞추어 창환 형 나름대로 계획을 짠 모양이다. 오전 금오산을 둘러보는 시간에는 자유시간을 달라고 했으니 예약한 택시를 열두 시에 오라고 했다. 아무래도 점심을 같이 먹고 생가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세 시에 터미널로 똥배의 마중을 나가면 되리라고 짐작했다.
그날 열두 시에 정확하게 택시가 왔다.
택시가 도착하자 창환 형에게 전화를 넣었다.
지금 어디냐고?
나름대로 짠 예정은 거기서 꼬였다.
지금 막 금오산 정상에 도착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올라가다가 폭포쯤에서 돌아내려 올 것이라 짐작했는데 군인정신이 충만한 그는 후퇴 없이 전진에 전진을 거듭하다가 정상까지 올라간 것이었다. 기가 막혔다.
정상에서 내려오려면 최소한 두 시간은 걸린다.
같이 점심을 먹는다고 생각했는데 그 계획에서 두 시간이 허공에 붕 떴다.
택시는 도착했고 갈 곳이 없었다. 택시로 겨우 십오 분 정도가 소요되는 금오산에 가서 막연히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택시 기사에게 점심을 먹었느냐고 물었다. 점심 전이라고 했다. 상황을 설명하고 시간이 남으니 가까운 기사 식당으로 가자고 했다. 기사와 둘이서 점심을 먹으며 생각하니 새벽밥을 먹고 온 그가 정상까지 올라갔으면 분명 허기가 질 터인데 먹을 것을 준비했는지 모르겠다. 금오산을 너무 만만히 본 게 아닌가? 허기가 지고 그 나이에 혈당이라도 떨어지면 곤란하다. 다시 전화를 넣었다. 먹을 것을 챙겼느냐는 물음에 지금 내려가는 길인데 괜찮노라고 했다. 느긋하게 점심을 먹고 종이컵 커피를 마시며 생각했다. 똥배도 점심을 못 먹고 올 터인데 김밥이라도 한 줄 사서 택시에서 이동하면서 요기를 하게 하고 생가를 잠시 둘러보고 만나면 바로 식당으로 가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택시 기사에게 물었더니 그게 좋겠다고 맞장구를 쳤다.
김밥을 어디 가서 사느냐?
금오산으로 향하면서 김밥을 살 만한 곳을 찾는데 창환 형에게서 전화가 왔다.
잘못 내려왔는지 내려오니 야영장이라고 했다.
벌써 다 내려왔어? 야영장?
그럼 금오산 옆구리로 내려온 것이다. 최 단거리인데 경사가 가팔라 사람들이 잘 이용하지 않는 길인데 그리로 내려온 모양이다. 야영장 입구에 기다리라고 하고 김밥 사는 걸 포기하고 바로 야영장으로 향했다. 야영장에 도착하니 배낭을 맨 그가 등산복 차림으로 도롯가의 가로수 그늘에서 홀로 기다리고 있었다.
반가웠다. 허기가 지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괜찮단다.
어떻게 움직일까?
가까운 데 가서 간단하게 요기라도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물으니 생가 근처에 가면 마트가 있을 것이니 음료수에 빵 하나 먹으면 상관이 없다고 했다. 그때 머리에 퍼뜩 떠오르는 집이 있었다. 생가 입구에 가면 보릿고개 체험장이 있다. 특별한 음식점이다. 두부와 고구마나 감자, 묵, 그리고 막걸리를 파는 그 옛날 보릿고개의 음식을 파는 집이다. 그리로 가자고 했다. 금오산 둘레길을 따라가면 택시로 십 분 남짓 걸리는 곳이다.
생가보다 먼저 보릿고개 체험장이라는 음식점에 들렀다. 돈만 내면 바로 준비된 음식이 나온다. 평상에 마주 앉아 두부에 막걸리를 마시면서 창환 형은 최고의 음식이라고 엄지를 세워 내밀었다. 허겁지겁 먹는 걸 보니 어지간히 허기가 졌던 모양이다. 똥배를 만나면 바로 식당으로 갈 건데 많이 먹으면 곤란하다. 두부만 먹은 창환 형은 주인아주머니를 불러 고구마와 남은 막걸리를 싸달라고 해서 배낭에 챙겨 넣었다.
택시 기사의 안내로 생가를 둘러보는 동안 나는 생가에 들어가지 않고 주차장 가로수 그늘에서 담배를 피웠다. 담배를 다 피우니 금세 나왔다. 시간을 보니 터미널로 가기는 이른 시간이었다. 어중간한 시간에 뭘 하나 생각하는데 창환 형은 왕산 기념관을 들먹였다. 인터넷으로 주변의 볼거리를 다 찾아본 모양이다. 왕산 허위 선생의 기념관은 차로 오 분 거리에 있다. 그곳을 잠시 돌아보고 가면 똥배의 도착 시간과 어지간히 맞을 것이다.
왕산 기념관으로 갔다. 나도 처음 가는 곳이고 택시 기사는 그런 곳이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관람객은 없었고 관리인 혼자서 지키고 있었다.
왕산 선생에 대해서 설명을 해달라고 관리인에게 창환 형이 부탁했다. 왕산 기념관을 보러 서울에서 왔다는 말도 덧붙였다. 관리소장은 친절했다. 짧은 영상을 보며 왕산이 누구인가를 알고 관리소장이 왕산의 일대기에 관해서 설명하는데 나는 자꾸 시계를 보았다. 아무래도 시간이 촉박할 것 같았다. 터미널에 오 분 먼저 가서 기다려야 하는데 설명이 길어지고 있었다.
급한 마음에 나는 설명을 듣다가 택시가 있는 주차장으로 나와 담배를 피웠다. 내가 나오자 눈치를 챘는지 택시 기사와 창환 형이 나왔다. 터미널까지는 십 분 남짓 걸리는데 아무래도 늦을 것만 같았다. 광주에서 열두 시 차라고 했으니 세 시간이 걸린다고 했는데 세 시가 넘어서고 있었다. 주차장으로 들어갈 사이도 없이 터미널 옆구리 도로변에 택시를 기다리라고 하고는 하차장으로 달려갔다.
구미 터미널은 하차장이 따로 있다. 하차장으로 가니 방금 손님이 내린 듯한 버스가 두 대 서 있는데 앞을 보니 광주 구미를 왕복하는 버스가 도착해 있었고 버스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시간을 보니 삼 분 정도 늦었다. 주위를 돌아보니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마침 지나가는 오십 대쯤으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있기에 똥배냐고 물을 수는 없었고 백성이 선생이 아니냐고 물었다. 아줌마는 고개를 갸웃하며 별 희한하다는 사람을 본다는 듯이 대답하지 않고 지나갔다.
머쓱해 하는 사이 어디서 나타났는지 뒤에서, 저예요! 하며 내 손을 잡았다. 늘씬하게 키가 큰 단발머리의 아줌마였고 검은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오래 기다렸죠?
아니, 방금 도착했어요.
내가 먼저 와서 기다리려고 했는데 이렇게 되었어요.
아주 오래된 사이처럼 손을 잡고 터미널 옆구리로 빠져나왔다. 창환 형이 기다리는 택시로 가는 동안 아주 친숙한 사이처럼, 눈곱이 이게 뭐예요? 하며 직접 손가락으로 내 눈곱을 떼어주었다. 노안에 안약을 넣어서 그동안 눈곱이 생긴 모양이었다. 창환 형이 택시에서 내려 인사를 하고 택시를 탔다.
점심도 거르고 시장하시죠? 식당으로 바로 가요. 소고기를 잡수실래요, 장어를 잡수실래요?
내가 마음에 두고 있는 식당은 두 군데였다. 나름대로 깔끔하고 맛이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엉뚱한 대답이 똥배의 입에서 나왔다. 식당을 예약했다는 것이었다. 인터넷으로 찾아서 예약한 모양이다. 횟집이었는데 낙동강을 건너서 공단 저쪽에 있는 집이었다. 할 수 없다. 이미 예약했다니 그리로 가는 수밖에.
택시로 거의 이십 분이 걸리는 동네인데 길에서 시간을 다 보내겠다고 했다. 그보다 놀라운 사실은 광주로 돌아가는 여섯 시 반 차가 구미에서 타는 게 아니라 동대구 터미널에서 탄다는 사실이었다.
기가 막혔다.
구미에서 동대구 터미널까지 가자면 한 시간이 넘게 걸린다. 식당에 도착해서 똥배와 창환 형이 이야기하는 동안 나는 동대구까지 가는 가장 빠른 방법에 관해서 연구했다. 버스를 타면 북부 정류장에 내린다. 북부 정류장에서 동대구 터미널까지 택시로 삼사십 분이 걸린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차가 좋겠다. 동대구역에 내리면 걸어서 오 분 거리에 동대구 버스터미널이 있다. 동대구역까지는 기차로 약 삼십 분이 걸린다. 시간이 맞는 차가 있다면 기차가 편리하겠다. 그걸 내가 알아볼 수가 없다. 알아볼 수가 없는 게 아니라 알아볼 짬이 없었다.
집에 있는 딸아이에게 전화해서 사연을 간략하게 설명하고 기차 시간을 알아보라고 일렀다. 금세 알아보았는지 딸아이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다섯 시 반에 기차가 있는데 그걸 타면 충분히 광주로 가는 여섯 시 반 버스를 탈 수가 있다고 했다. 그 기차를 예매하라고 일렀다. 딸아이는 기차를 예매해서 표를 메시지로 보내주겠노라고 했다.
횟집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고 뭘 먹었는지는 모르겠다.
기억에 남는 것은 똥배는 자신이 고구마 농사를 지으면 한 평에 10Kg을 생산할 수가 있는데 창환 형은 겨우 이 할 정도 나는 마이너스 이 할을 생산할 것 같다는 말만 기억에 남는다. 그렇게 보였던 모양이다.
딸아이에게서 기차표가 메시지로 날아와서 똥배의 전화로 전달을 했고 동대구에 내려서 택시를 타지 말고 터미널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어보고 걸어서 가면 된다고 일렀다. 창환 형이 걱정하지 말라며 자신이 동대구까지 내려갔다가 광주행 차를 타는 걸 보고 다시 서울로 올라가도 시간이 넉넉하다는 것이었다.
횟집에서 보낸 시간이 한 시간 조금 넘었다.
일어서야만 했다.
뭘 먹었는지도 모르겠고 무슨 얘기를 했는지도 기억에 없고 똥배의 얼굴마저도 익히지도 못했다. 옆자리에 앉았기에 마주 앉은 창환 형의 얼굴을 보고 얘기하며 자꾸 시계를 보았다. 횟집에서 낙동강을 건너 역까지는 삼십 분 정도가 소요된다. 그 시간에 맞추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횟집에서 나오니 계산을 벌써 똥배가 했다. 화장실 가는 척하며 계산을 해버리고 들어온 것이었다.
구미역에 도착하니 그 시간에 동대구로 내려가는 기차를 탈 승객은 타는 곳으로 내려가라는 방송이 나왔다. 옳게 인사도 하지 못하고 헤어졌다. 물론 창환 형도 그 차를 타고 내려갔다. 타는 곳으로 내려가며 손을 흔드는 똥배의 모습만 기억에 남는다. 겨우 두 시간 정도의 만남이었다.
서운했다.
대단히 서운했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들어오면서 생각하니 역에서 택시를 보내고 동대구까지 동행해서 광주로 가는 차를 타는 걸 보고 올라와도 괜찮을 것인데 융통성이 부족한 나는 그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러니 똥배의 눈에 고구마를 마이너스로 수확하는 사람처럼 보인 게 아닌가? 자책했다.
집에 오니 아내가 물었다.
“손님 잘 대접했어요?”
“번갯불에 콩 구워 먹었어.”
정말 그랬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병적인지 모르지만 나는 시간이 촉박하면 다른 생각이나 일을 하지 못한다. 기억을 더듬어도 똥배의 얼굴 기억이 나지 않았다. 실루엣처럼 그 모습만 눈에 선한데 정작 얼굴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동대구에서 무사히 광주로 가는 버스를 탔을까? 이번 만남이 너무 짧았으니 청환 형과 언제 영광에 한번 가자는 약속을 했던 것 같다. 횟집에서 소주를 한 병 정도 마신 것 같다. 창환 형은 소주와 맥주를 섞어서 갈증 해소에 그만이라며 들이켰다. 백 선생은 시간이 빠듯한데 광주로 가는 버스를 탔을까? 생각하다가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서 전화기를 보니 지리산 휴게소라면서 사진을 찍어 인증사진을 찍어서 날렸다.
무사히 탔구나.
너무 짧은 만남이어서 얼굴 기억도 못 하겠다고 지나가다가 나를 보면 먼저 인사를 하라고 답신을 날렸다.
그게 보름 전쯤이었다.
어제 굴비는 받았지만 나는 보낼 게 없었다. 주소도 묻지 않고 굴비가 정확하게 도착했다. 책을 자주 보냈으니 백 선생이 내 주소를 기억하거나 보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생각했다.
추석 선물로 뭘 보내지?
생각하는데 백 선생의 말이 귀에서 살아났다.
조기가 아니고 굴비가 확실하지요?
조기와 굴비가 어떻게 다르지? 굴비를 조기로 만드는가? 조기와 굴비가 어종이 다른 게 아닌가? 뜬금없는 생각을 하다가 인터넷에 굴비를 치고 들어갔다.
굴비 : 소금에 절여서 말린 조기
인터넷 사전에는 이렇게 간략하게 기술되어 있었다. 아하! 그렇구나. 이제는 조기와 굴비가 어떻게 다른지 알았다. 그럼 굴비를 받았으니 조기를 한 상자 사서 영광으로 보내면 어떨까? 아서라! 그렇게 하면 소금에 절여서 또 말려서 굴비를 만들어 보낼지도 모른다. 아서라! 추석이라서 택배 물량이 폭주한다는데 추석을 쉬고 생각하자. 일단은 굴비와 조기가 어떻게 다른지 알았다. 다른 어종이 아니라 조기로 굴비를 만든다는 걸 알았다.
또 하나를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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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어젯밤에 이 글을 읽고 답신을 달라하면 전화가 오고 또 문자가 오고
오늘 새벽에도 들어와 드려야겠다고 컴을 켜니 본체가 완전히 갔습니다. 오전에 읍내 컴수리점에 맡기고..가서
결국 이시각 공장 사무실에 와서 드립니다.
글을 읽으니 상황마다 꼬이고 얽히고 설키고 참으로 복잡다단합니다.
인생사가 다 그러니 다시 상황설명은 접겠습니다.
선생님은 제 얼굴도 기억못하게 콩을 볶았지만 저는 정확히 기억합니다.
나중에 제가 또 아는체 하겠습니다.
한가지! 30센티 보리 굴비가 가야는데 가게의 실수로 홈쇼핑 과대광고하는 피래미 맨굴비가 간것이 안타깝지만..
접고요..
영광에선 개나 고양이도 굴비를 물고 다닌다지만
십수년을 살며 굴비 선물을 선생님께 처음 해봅니다.
원래 가족외 누구에게도 제가 짓는 농산물도 선물 하지 않아요. 무척 단호할 정도..(선생님은 이유를 아실겁니다)
근데 제가 왜 선생님께는?
다는 물론 아니지만
배가고파야 좋은 글이 나온다는 개똥철학(?)을 갖고 있는
작가들은 펜만 들고 다니는지 알고 있습니다.
수년을 책을 보내주신것도 모잘라
(이걸 밥한끼로 갚았다고는 생각지 마세요..더 보은을 할 것입니다. 시골서 홀로 생활하는 제게 독서는 엄청난 에너자이저)
근데 또 차비를 주신거에요..
아마도,
저는 책을 읽을 줄만 알았지 문학성은 전혀 없는 매마른 사람이고
돈을 버는 장삿꾼 근성이라.. 선생님의 금일봉에 놀랐던 듯..
빚을지기 싫어하는 성격이라 그런것 아닙니다.
그냥 선생님께는 그래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