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희의 담판 (세 치 혀로 거란군을 물리침)
993년(성종 12년) 거란의 소손녕 장군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내려옵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담판이 벌어집니다.
소손녕은 “너희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은 우리의 소유인데 너희들이 강점했다. 또 국경을 마주한 우리 대신 바다를 건너 송을 섬기니 군사를 일으킨 것”이라며 “땅을 떼어 바치고 국교를 회복하면 무사할 것”이라고 협박했습니다
이에 서희는 ”우리야말로 고구려의 후예이고, 그런 이유로 국호도 고려라고 칭했다“며 ”거란이 차지한 만주 역시 우리 땅“이라고 당당히 맞섰습니다.
서희는 ”송과 교류하면서 거란과 국교를 맺지 않는 것은 여진족 때문이다. 그들이 압록강 인근을 점거하고 있어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육로로 교통하기가 어렵다”며 “여진을 내쫓고 압록강 일대를 되찾으면 우리가 왜 너희와 굳이 국교를 맺지 않겠느냐”고 역제안을 합니다. 즉, ‘고려-거란’ 간 국교를 위해서는 양국 사이에 있는 압록강 일대를 안정시켜야하니 이에 협조해달라는 것입니다. 모든 책임을 여진족에게 떠넘긴 셈이죠.
이를 들은 거란 측은 군사를 철수시킬 뿐 아니라, 압록강과 접하는 강동 6주에 대한 영유권을 인정합니다. 덕분에 청천강에 머물렀던 고려의 경계는 순식간에 압록강까지 확대됩니다.
거란군이 고려에 쳐들어와 처음 공략한 곳은 봉산성(황해도 봉산군)입니다. 이곳엔 고려의 최정예인 선봉군(先鋒軍)이 배치되어 성문을 잠그고 버티는 농성작전을 벌입니다. 거란의 주력군은 기병입니다. 평야와 구릉이 펼쳐진 만주와 황하 일대와 달리 산과 강으로 둘러싸인 한반도에서는 상당히 애를 먹습니다. 거란은 봉산성에서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병력 손실을 꽤 입었습니다. 이를 알게 된 고려 조정은 거란이 봉산전투 직후 보낸 항복 서신에 일절 답하지 않았습니다.
조바심을 느끼게 된 거란은 군사를 둘로 나누어 안융진과 연주성을 공격했습니다. 당시 안융진에는 발해 왕족 대도수(大道秀)가 1000여 명의 군사와 지키고 있었는데, 결사적인 저항으로 거란군을 막아냅니다. 연주성도 마찬가지입니다. 2400여명의 군사들이 역시 거란군을 패퇴시킵니다. 만주와 북중국 일대에서 승승장구하던 거란으로서는 심리적으로 큰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서희가 담판을 시작한 것은 바로 이때입니다. 적으로 하여금 추가 군사행동에 대한 의지를 꺾어놓은 뒤 비로소 화의(和議) 협상에 들어간 셈입니다. 서희의 역제안이 통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같은 전과(戰果)가 담보됐기 때문입니다.
※ 고려와 발해는 형제의 나라였나? - 고구려의 후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