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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시賞 수상자 대담
【특집】제17회 웹진『시인광장』선정 ‘올해의 좋은 시賞'의 수상을 축하하는 황인찬 시인과의 대담ㅣ재생산의 무한 반복을 거부하는 주체 ■ 대담: 최규리 시인(시인광장 편집장)
재생산의 무한 반복을 거부하는 주체
■ 최규리 : 안녕하세요? 황인찬 시인님, 제17회 웹진 시인광장이 선정한 ‘올해의좋은시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수상작 「당신 영혼의 소실」은 동료 시인들로부터 올해의 좋은 시로 많은 호응을 얻었습니다. 수상 소감문이 있지만, 짧게 인사 부탁드립니다.
□ 황인찬 : 여러모로 부족함이 많은 저에게 정말 큰 힘이 되는 일입니다. 사실 시인들은 동료 시인들에게 인정받을 때 가장 큰 기쁨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저 또한 그랬습니다. 선정 과정에서 동료 시인들의 추천이 있었다는 사실이 저에게 큰 응원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가장 좋은 시를 썼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좋은 시를 쓰는 수많은 동료 시인들과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 최규리 :저도 「당신 영혼의 소실」을 의미 있게 읽었는데요. 저의 영혼은 과연 어디에 머물고 있을까. 잠시 생각해 봤습니다. 로그아웃 되어버린 영혼은 ‘고무나무 한 그루’로 형상화되고 있습니다. 이 작품에 대해서 말씀해 주세요.
□ 황인찬 : 삶에 대한 실감이 점점 희박해지고 있습니다. 참담한 소식들이 화면 너머로 전해지지만, 그 모든 비극은 화면을 들여다보는 동안만 잠시 현실로 여겨질 뿐입니다. 또한 성장에 대한 기대가 사라져 버린 오늘날, 우리가 삶의 실감을 얻기란 더더욱 어려울 것입니다.
이 시는 웹소설에서 유행하는 장르인 게임 소설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거기서는 주인공의 성장이 모두 분명한 수치를 통해 묘사됩니다. 몬스터를 쓰러트리면 경험치를 얻고 레벨업을 하며, 좋은 무기를 얻으면 나의 능력이 성장합니다. 성장과 성취를 실감하기 어려운 세대에게 분명한 성장의 즐거움을 제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게임은 죽음이 없는 세계이기도 합니다. 아즈마 히로키 등의 논자들이 이미 이야기한 것처럼 게임에서의 죽음은 게임의 재시작을 의미하기도 하는데요. 죽지 않고 무한히 재시작하며 성장하는 이야기라는 것이 저에게는 어쩐지 끔찍하고 무서운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정말로 죽지 않는 것은 플레이어가 아니라 이야기 자체, 혹은 게임 그 자체이기도 할 것입니다. 플레이어인 우리는 그 안에서 끝없이 죽음과 재시작을 강요받고 있는 셈입니다.
그렇게 게임을 비롯한 몇 가지 서브컬처의 아이디어를 통해 떠오른 이야기를 시로 풀어내고 싶었습니다. 사라져 버린 삶의 실감, 어디선가 들려오는 내가 이미 죽었다는 메시지, 그리고 더는 부활하지 않겠다는 거절의 태도까지, 그것들이 어쩌면 우리 삶에 대한 은유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 최규리 : 흔히, 사람이 죽으면 혼이 빠져나간다는 말을 들어왔지만, 저는 영혼과 육체는 분리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즉, 시간과 공간 또한 분리될 수 없겠죠. 하지만, 시에서는 육체와 영혼을 잠재적으로 분리하고 있습니다. ‘신’이라는 현실 바깥의 존재를 부여함으로 현실 세계를 강하게 부정하고 있으며, 죽은 자아를 지켜보는 시적 화자를 통해 소실된 자아를 경험하게 해줍니다. 오해의 연속인 삶 속에서 육체라는 오해, 나 자신과 끊임없는 실패가 결국 영혼의 죽음을 목격하게 되는데요.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시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타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자아’에 대하여 우리는 어떤 고민을 해야 할까요?
□ 황인찬 : 시에서 영혼이나 신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지만, 저는 영혼이나 신을 믿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감각하는 현실을 이해하기 위한 좋은 장치라고 여길 따름입니다. 영혼이나 신을 경유할 때, 우리는 쉽게 우리 자신을 부감할 수 있을 테니까요. 말씀하신 ‘시선’이라는 것 또한 바로 그러한 뜻에서 사용하신 말이라 짐작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우리가 특정한 어떤 고민을 해야만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바라보는 것, 나 자신으로부터 잠시 떨어져 보는 것, 우선은 거기에서 시작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는 다시 한번 지켜봐야 하겠지요.
■ 최규리: 최근 네 번째 시집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 (문학동네, 2023)를 펴내셨는데요. 또 한 번 축하드립니다. 이번 수상 작품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의 마음을 명확히 말하지 않음은, 자신을 타자화하는 작업을 통해서 자기 객관화를 시키는 태도로 볼 수 있을까요? 무엇인가를 ‘가정’해 봐야 하는 것. 혼돈의 이 세계에서 자기 검열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까요?
□ 황인찬 :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는 말은 오히려 결심을 하는 일에 가깝습니다. 설령 그것이 아무리 임의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잠시 떠올랐다가 금세 사라져 버릴 감정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명료하게 언어화함으로써 일시적인 나의 입장을 만들어 내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말씀하신 자기 검열이 자기 인식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바와 같은 의미겠군요. 앞서의 답변과 비슷한 것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어떤 마음을 갖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결심 그 자체이며, 결심을 하겠다는 태도일 것입니다.
■ 최규리 : 이 시대는 증명의 세계입니다. 자기 자신을 증명해야 합니다. 과거에 ‘믿음’을 ‘강요’하던 세계에서 이제는 믿음이 존재하지 ‘않음’을 ‘인정’하는 세계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불확실성을 인정하는 것이 어쩌면 가장 자신을 솔직하게 바라보는 것인지도 모르겠죠. 우리에게 믿음의 부재, 정체성의 부재는 어떤 방식으로 극복해 가는 것이 좋을까요?
□ 황인찬 : 시란 물론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는 일이긴 하지만, 어쩌면 우리가 너무 ‘나’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세계가 그토록 불확실한 것이라면 우리가 진정 관심을 둬야 하는 것은 ‘나’의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닐까요? 타인의 존재를 가까스로 알아차리는 것, 결코 이해할 수 없을 타자의 고통을 마주함으로써 우리가 함께 살아갈 방법을 모색하는 것, 그것이 어쩌면 ‘나’를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의 시 쓰기 역시 그렇게 ‘나’ 아닌 것들, ‘나’의 바깥에 있는 것들을 알아차리고 마주하는 일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 최규리 :「구관조 씻기기」의 새를 다루는 방법, “씻길 필요가 없는 것”을 씻기기 위한 자기 검증과 「단 하나의 백자로」와 「희지의 세계」에서의 혼자 살고 있는 화자. 수상작 「당신 영혼의 소실」에서도 ‘1인용’ 식탁이 그려집니다. 너무나 평범한 풍경, 보통의 세계입니다. 익숙한 풍경 속에서 시인의 낯선 시선은 ‘혼자 살아가는’ 현실에 대한 재인식을 갖게 합니다. 도무지 사라지지 않는 ‘혼자’에 대한 마음. 되풀이되는 질문들. “단 하나의 순간도 모두 사라져가는 것”과 “나는 여전히 나로 남아 있는” “이상하고 신기한 마음”에 대해 부연 설명을 해주세요.
□ 황인찬 : 시를 처음 쓸 무렵에는 시란 세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시의 언어는 한없이 가볍고, 시가 포착하는 세계는 지면으로부터 살짝 떠 있는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저의 시 쓰기 역시 그처럼 자유로움을 향해 움직이는 일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시를 쓰면서 알게 된 것은 시의 자유란 시의 자유의 불가능을 의미하는 것이며, 시 쓰기란 그 불가능을 헤아리는 일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시가 자유를 향해 움직일수록, 시의 자유의 불가능을 헤아릴수록 선명해지는 것은, 시의 자유로움 바깥에 있는 것들, 불편하고 어색하며 무거운 타인의 얼굴이었습니다. 시가 익숙한 것들 사이에서 낯선 것을 발견하는 일이라면, 그것은 평범한 풍경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평범한 풍경 안으로 적극적으로 들어가는 일이 될 것입니다.
■ 최규리 : 세 번째 시집 『사랑을 위한 되풀이』에서도 ‘지난 봄’, ‘지난 여름’ 등 자주 기억을 소환하고 있습니다. 이번 수상작 「당신 영혼의 소실」에서도 ‘회상’을 하게 되죠. 과거가 지닌 삶의 연속성은 미래에 대한 불안을 대체하고 있으며 현재는 가상의 공간으로, ‘가정해 보는 행위’로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되풀이되는 현실과 반복되는 일상이 ‘사랑’이라는 대체 불가능한 언어로 다가갈 때 우리는 ‘위로’를 얻을 수도 있겠습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 궁금합니다.
□ 황인찬 : 문학 행위란 결국 기억에 대한 일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눈앞에 있는 타인조차도 결국 우리 안의 과거에 속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문학은 시간성을 강하게 의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은 모두 과거에 있으며, 사랑이란 그리워하는 일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삶은 과거를 바라보면서 미래를 소망하고 그리는 일의 연속이지요. 저의 시가 기억을 현재에 소환하는 것도, 그리고 때로 미래 시제의 문장들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것도, 삶에 대한 그런 태도와 연관 되어 있습니다.
■ 최규리 : 오디오클립의 작가연재 <황인찬의 읽고 쓰는 삶>에 대하여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시인님의 목소리가 참 좋다는 생각을 해왔는데요. 오디오로 듣는 시인의 목소리는 시와 독자(청취자)와의 거리를 좁히며 시를 온전히 받아들일 자세를 갖게 합니다. 100회를 끝으로 잠시 휴식기를 가지고 계시는데요. 매주 연재하며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어요?
□ 황인찬 : 시를 혼자 읽고, 혼자 이야기하는 일이었다 보니 에피소드라고 할 만한 것이 따로 생기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수년째 오디오클립을 비롯하여 여러 매체를 통해서 시에 대해 말하는 일들을 계속하는 동안, 시에 대해 말하는 일이 저에게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좋아하는 시, 좋은 시에 대해서 말하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몇 시간이고 계속할 수도 있습니다.
■ 최규리 : 100회 마무리를 하며 <시는 왜 읽는 것일까>라는 제목으로 구성하였는데요. 시인과 독자 모두에게 꼭 필요한 이야기라는 생각을 합니다. 시인광장 독자들에게 다시 한번 들려주세요.
□ 황인찬 : 그때의 원고가 남아 있어, 일부를 아래 옮기겠습니다.
“문학은, 그중에서도 특히 시는 참 내밀한 영역에 속하는 예술 양식이라는 점 또한 시의 매력일 것 같습니다. 아주 내밀한 층위에서 할 수 있는 깊은 소통이라는 것이 시의 좋은 점이고, 사실 그런 깊은 소통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 또한 시의 좋은 점일 것입니다. 지금껏 만난 적 없는 새로운 아름다움을 만난다는 기쁨,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사실은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에서 얻게 되는 또 다른 종류의 희열 같은 것이 시에는 있는 거죠. 여러분은 지금까지 함께 읽고 생각한 시들을 보며 어떤 생각을 또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서로 생각이 겹치는 순간도 있고, 또 아주 다른 생각을 하게 되는 순간들도 있었을 텐데요. 그 만남과 엇갈림 모두가 시의 아름다움이자 우리가 함께 사는 일의 아름다움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시를 쓰는 사람이니, 제가 쓰는 시 또한 그렇게 여러분과 잠시 만났다가 다시 또 엇갈리고, 잠시 이해했다가 또 한편으로는 이해받지 않는다면 더없이 기쁠 것 같습니다.”
■ 최규리 : 지금까지의 질문에 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하여 말씀해 주세요.
□ 황인찬 :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열심히 쓰고 읽으며 살아갈 계획입니다. 다만 요즘에는 그림책을 비롯한 아동 문학을 열심히 공부하고 있기도 합니다. 시인으로서 열심히 시를 읽고 쓰는 한편으로, 시 바깥의 것들과 더 적극적으로 마주하고 싶습니다. 그 모든 일들이 저의 시 쓰기에, 그리고 저 자신의 삶에 큰 보탬이 되리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 최규리 : 네. 그림책은 상상의 언어입니다. 시 바깥의 것들이 곧 시의 세계인데요. 시가 시로만 존재한다면, 시의 운명은 죽음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시가 우리 안에서 움직이고 시의 바깥으로 전진 할 때, 그 때야 비로소 시가 되는 순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선생님의 귀한 시간과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