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청문회 도중 케이블 타이로 사람 손발을 묶는 모습을 시연하는 것을 봤는데 바로 그날 넷플릭스에 올라온 리미티드 시리즈 '제로 데이'(zero-day, 6부작, 한 회 평균 50분)에서 케이블 타이로 사람들을 포박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윤석열 대통령의 느닷없고 어처구니없는 비상계엄 선포 이후 혼돈의 80일을 보내고 25일 윤 대통령의 탄핵 심판 최종변론과 3월 초순 아니면 중순 헌법재판소의 선고 결과를 남겨둔 우리가 지켜본 것들과 앞으로 펼쳐질 일들에 대한 두려움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비상 대권, 경고성 계엄, 음모론에 빠진 이들, 사실 확인 없이 받아쓰기에 바쁜 언론, 오로지 돈을 위해 아무말이나 떠들어대는 사이버 렉카, 권력을 잡기 위해선 헌법이나 법률, 도덕까지 내다버리며 기차 바퀴를 네모라고 주장하는 정치인, 음모론에 빠진 빅테크 CEO, 거악을 척결한 검사 출신으로 신망을 얻은 전직 대통령, 인칭 대명사 타령, 케이블 타이, 망상, 섬망, 국민 저항권, 남편보다 힘 있어 보이는 퍼스트 레이디 등등, 차이점이라면 우리는 친위 쿠데타, 이 시리즈는 입법 권력과 빅테크가 연합해 저지른 역성 쿠데타란 점. 마지막 6편 20분부터 23분 19초까지 시리즈의 핵심 대화가 이어지는데 오늘 대한민국에 던지는 교훈처럼 들린다.
1943년생으로 영화계에 굵직한 족적을 남긴 로버트 드 니로가 자존심을 접고 처음으로 넷플릭스 시리즈를 선택했다고 해서 화제가 됐는데 자꾸 우리 현실이 겹쳐 떠올라 불편하면서도 흥미로웠던 작품이다. 작가들이 우리 사태를 벤치마크한 것인지, 아니면 자막 번역을 부러 그렇게 한 것인가 의심되기도 했다. 레슬리 링카 글래터가 마이클 S.슈미트, 노아 오펜하임, 에릭 뉴먼이 함께 쓴 극본을 박진감넘치게 연출했다. 그렇다고 스펙터클하지는 않고, 드 니로의 나이를 감안해서인지 정치 스릴러로서 영민한 계산에 힘쓴 것으로 보였다. 물론 매우 가혹한 반론도 없지 않다. 뒤에 적겠다.
제로 데이란 말은 보안 취약점이 발견되자 패치가 배포되기 전에 곧바로 공격을 가한 날을 뜻한다. 미국 전역이 1분 동안 모든 전력과 통신, 인터넷이 다운된다. 단 1분 멈춰섰을 뿐인데도 3402명이 목숨을 잃는다. 미국 정부는 아무런 실마리도 찾지 못한다. 정부 안 강경파들은 자꾸 러시아 소행을 의심하는데 증거가 없다.
조지 멀린(로버트 드 니로)은 대통령 재임 시절 유례없는 사랑을 받으며 양당을 통합한 인물로 모두들 재선에 도전할 것으로 예상하고 바랐지만 정계를 은퇴해 조용히 지내고 있다. 사이버 테러 1분 뒤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오며 모든 미국인 핸드폰에 "이 일은 다시 벌어질 것"이란 경고문이 떠 국민들은 불안에 떨고 정부를 믿지 못한다. 힘을 합쳐 사태를 해결해야 하는 하원 의장 드라이어(매튜 모딘)는 자신의 인지도를 높이려 혈안이 돼 있다.아들의 친구로 극단을 선택한 아들의 빈 자리를 메운 로저 칼슨(제시 플레이먼스)이 에벌린 미첼 현직 대통령(안젤라 바셋)의 부탁을 받고 그를 찾아와 구조 현장을 찾아 불안에 떠는 국민들을 다독여줄 것을 애원한다. 사람들은 잔뜩 흥분해 다투느라 구조 작업을 방해한다. 멀린 전 대통령은 열정적이면서도 차분하게 음모론을 떠들던 자들을 만류하고 구조 작업에 매진할 수 있도록 하는데 이 모습이 전국에 생중계된다.
미첼 대통령은 영장 없이 테러리스트들을 체포할 수 있는 비상 대권을 부여할테니 제로 데이 위원회를 이끌어달라고 멀린 전 대통령에게 매달린다. 미국을 구할 사람은 당신 밖에 없다고 애원한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하원 의원이 된 딸 알렉스(리지 카플란)는 아버지가 다시 일선에 나서는 것을 못마땅해한다. 김건희 여사처럼 남편에게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부인 실라 여사(조안 앨런) 역시 괜한 일에 나서지 말라고 뜯어 말린다.
그런데 사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멀린 자신에게 있다. 간혹 깜빡깜빡한다는 것이다. 치매다. 자꾸 잊어먹기에 메모하는 습관이 배여 있는데 아무도 모른다. 자신을 만나고 돌아가다 애꿎게 죽은 여자 편집자가 눈에 들어온다. 칼슨을 시켜 그녀의 관을 열어 얼굴까지 확인했는데 틀림 없었다. 섹스 피스톨스의 '누가 밤비를 죽였나' 노래가 환청으로 들려온다.
하지만 미첼 대통령에게 상황 설명을 들으니 사태가 예상보다 심각해 결국 멀린 전 대통령은 위원장 제의를 받아들인다. 옛 친구인 전직 모사드 요원 나탄은 러시아가 해커 집단에 자금을 지원해 브롱크스에 서버팜이 생겼는데 필릭스란 인물을 의심해 보라고 한다. 어찌어찌해 러시아는 무관하다는 결론이 내려진다.
내부의 추악한 음모 실체가 드러난다. 이 모든 일을 뒤에서 조종한 이는 멀린 전 대통령의 개인적 약점(한둘이 아니었다)을 빌미로 빠져나갈 궁리를 하고 거의 성공한 것처럼 보였는데...
이 시리즈는 막강한 권능을 가진 누군가가 핸드폰 앱에 멀웨어를 심어 유포하면 비슷한 위기를 충분히 만들어낼 수 있으며 그 일로 현대 사회와 국가 체제는 스스로 무너질 수 있겠다는 섬뜩한 경고를 던진다. 검사로서 뛰어난 수사 능력을 뽐낸 전직 대통령이 손수 테러 분자 고문에 나서는 모습도 나온다. 82세 노익장 배우의 뛰어난 연기는 그것만으로도 이 시리즈를 봐야 할 이유가 충분히 된다. 정치 스릴러의 대결 장면보다 인상적이며 부러웠던 점은 멀린 전 대통령이 매일 아침 전용 풀장에서 수영하며 반려견과 함께 바닷가 숲길을 조깅하는 모습이었다. 계엄 사태로 빼앗길 뻔했던 일상의 소중함을 상징하는 것 같기도 했다.
늘 그렇듯 혹평은 존재한다. 너무 많은 인물 관계를 펼쳐놓았다는 점이다. 멀린 전 대통령과 너무나 개인적으로 얽혀 있는 전직 비서실장 발레리 화이트셀(코니 브리튼)을 실라 여사가 직접 찾아가 남편을 도와달라고 하는 장면, 위기의 순간 실라 여사가 발레리 집을 찾아가는 장면 등등 기둥 줄거리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요소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섬망을 일으키는 신경조직 공격도 테러리스트들의 소행인지 여부를 뚜렷이 밝히지 않고 유야무야 된다. 누구는 '6부작 드라마의 인물 관계를 20부작처럼 설정해놨는지... 당연히 인물의 서사와 끝맺음이 통쾌하고 매력적이지 못했다'고 지적했는데 공감하는 바가 없지 않았다. 멀린 전 대통령이 조용한 일상으로 돌아가 반려견과 조깅을 하다 물속을 바라보며 끝나는 마지막 장면도 '이게 뭐지' 뜨악하게 다가온 것이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