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아름다워(1063) - 9월의 문턱에 들어서며
유난히 무덥고 힘들었던 8월이 물러가고 온 누리에 충만한 기운이 넘치는 9월에 접어들었다. 이를 축복하듯 간헐적으로 내리던 장맛비도 그치고 8월의 마지막 날 올해 들어 가장 크고 밝은 보름달이 두둥실 떠오르며 무겁게 짓누르던 시름을 달래준다. 천체의 오묘한 운행궤적을 일깬 슈퍼블루문(슈퍼 문: 지구와 달의 거리가 가장 가까울 때 뜨는 보름달, 블루문: 양력을 기준으로 한 달에 두 번째 뜨는 보름달)의 등장이 반가워라!
2023. 8. 31 자정에 살핀 슈퍼블루문의 모습
아침에 접한 시, ‘초가을’이 9월에 들어서며 한층 서늘한 기온(엊그제까지 섭씨 25도 내외이던 기온이 19도로 내려갔다)인 것을 깨우쳐준다.
‘어느새 초가을이라 밤 점차 길어지고, 청풍 산들산들 더더욱 서늘하네.
이글이글 무더위 사라진 고요한 초가, 계단 아래 풀숲엔 반짝이는 이슬방울'(2023. 9. 1 동아일보 이준식의 한시 한 수, 맹호연의 ‘초가을(初秋)’에서)
불가리아 선교사의 문안메시지, ‘그동안도 평안하신지요? 자녀손 등 온 가내도 두루! 저희들도 성도님들의 기도와 주님의 은혜로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번 여름은 참으로 우리들에게 많은 괴로움을 주었습니다. 무더위와 태풍으로 고통스러웠던 여름도 끝이 나려고 합니다. 일기변화로 불가리아에는 없던 모기가 생겨 극성으로 물어서 모든 사람들에게 또 다른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그래도 감사한 일은 이런 어려움을 이기고 견디며 소망을 가지고 가을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9월 초에 둘째아들 가족이 선교사명 감당하려고 들어옵니다. 언제나 저희들을 위해 기도해주시고 사랑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얼마 전 유 튜브에서 어느 목사가 들려준 예화, ‘대충 익힌 바둑실력으로 다른 이들의 대국을 관전하다보면 당사자보다 한두 수 앞질러 내다보는데 정작 바둑판에 앉으면 이보다 낮은 수준인 것이 아쉽다. 그 이유를 살펴보니 관전자일 때는 객관적인 시각에서 상황을 바라보므로 보다 정확한 판단이 가능하나 직접 대국에 임할 때는 욕심이 개입하여 상황판단을 그르치게 된다.’ 이를 들으며 세상이나 자신을 둘러싼 여러 상황의 판단이나 평가도 이런 기준을 적용하면 좋겠다는 덕담으로 새겼다. 지금은 각종 정보와 자료가 넘치는 시대, 그 홍수 속에서 더러는 보람과 유익을 얻고 때로는 좌절과 허탈을 곱씹는다. 이제는 세상을 달관할만한 연치, 일희일비하지 말고 차분히 관조하자.
* 무료한 일상을 메꾸는 것의 하나는 스포츠 중계방송, 요즘은 프로야구를 열심히 시청하는 중이다. 때마침 야구를 빗대어 작금의 세태를 예리하게 짚은 칼럼, ‘차라리 야구를 응원하는 게 낫다’에서 적절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어제는 좋아하는 팀이 이겨서 행복하였다. 오늘도 행복할까, 지더라도 다음날이 기다려진다. 하수상한 세태도 느긋이 기다려보며 함께 살펴보자.
‘야구 취재를 오래 했기 때문이다. 오가다 만나는 동료들이 꼭 묻는다. “요즘 ○○은 도대체 왜 그래?” ○○ 안에 어떤 구단 이름을 넣든 비슷하다. “요즘 ○○ 때문에 행복해”라는 말은 좀처럼 듣지 못한다. 1등을 달리고 있는 LG 팬인 동료 역시 한두 경기만 지면 “요즘 LG는 왜 그래”라고 묻는다. 야구에 정답은 없다는 걸, 내일은 이길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하소연하듯 묻는다. 스스로 야구팬이거나 주변에 야구팬이 있는 사람들은 안다. 야구팬들은 늘 화가 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야구를 응원한다는 건 가성비에 맞지 않는다. 밑지는 장사다. 구글에서 데이터 과학자로 일했던 세스 스티븐스 다비도위츠는 어릴 때부터 뉴욕 메츠의 열렬한 팬이었다. 그는 저서, “모두 거짓말을 한다”를 통해 페이스북에서 야구단에 좋아요를 누른 데이터를 싹 다 모아 특정 팀의 팬이 되는 것은 7~8세 때의 성적임을 증명했다. 1994년 마지막으로 우승한 LG의 팬 중에는 30대 후반이 많다. 1992년이 마지막 우승인 롯데 팬들의 나이대도 비슷하다. LG와 롯데가 맞붙을 때 불꽃이 튀는 건 어쩌면 이런 인구학적 특성 때문인지도 모른다.
2023. 8. 31 현재 1위를 달리고 있는 LG 야구단의 표정
서섹스대 연구진은 스포츠팬들을 대상으로 조사했다. 가장 좋아하는 팀이 이기는 경기, 지는 경기를 시청하고 나서 몇 시간 동안 그들의 행복점수가 어땠는지 꼼꼼하게 조사했다. 평균적인 스포츠팬들은 경기가 시작되기 전 행복점수가 조금씩 높아진다. 승리에 대한 기대와 승리 장면을 상상하면서 기쁨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렇게 기대하고 있다가 이기면, 행복점수는 약 3.9점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기면, 행복해진다. 문제는 질 때다. 이길 때 3.9점 높아지는 행복점수가 질 때는 7.8점이나 깎인다. 지는 경기에서 받는 상처가 이기는 경기에서 얻는 기쁨보다 훨씬 크다. 가성비가 맞지 않는다. 게다가 야구는 거의 매일 하는 경기다. KBO리그는 1년에 144경기를 치른다.(무승부일 때는 0점이 아니라 마이너스 3.2점으로 조사됐다). 2022년 KBO리그 최하위였던 한화 팬이라면 손해가 심각하다. 46승2무96패를 기록했는데, 계산대로라면 179.4점을 얻고 755.2점을 잃는다. 행복지수가 무려 마이너스 575.8점이다. 강팀을 응원한다고 해도 행복점수를 플러스로 만들기 쉽지 않다. 계산대로라면 승률이 66.7% 이상이어야 하는데, 2022년 우승팀 SSG랜더스의 승률은 62.9%였다. 어느 팀을 응원하든지, 우승팀을 응원해도 밑지는 장사일 수밖에 없다. 심지어 강팀 응원에 대한 조사 결과는 조금 다르다. 승리 확률이 높은 팀이 이겼을 때 얻는 행복점수는 3.1점이지만 졌을 때는 10점이나 깎인다. 승리 확률이 높을수록 한계효용이 체감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1위 팀이든 10위 팀이든 어느 팀을 응원하든 모든 야구팬들이 항상 화가 나 있는 게 당연하다. 스스로 야구팬이거나, 주변에 야구팬을 둔 사람은 안다. 그럼에도 야구를 끊지 못한다. 야구는 매일 하는 종목이고, 오늘의 패배가 내일의 패배를 확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일은 내일의 해가 떠오르듯, 내일의 경기는 다시 승리의 희망으로 시작된다. 한 번의 패배에 좌절하지 않고, 승리라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연습이 매일 이뤄진다. 야구를 응원하는 건, 비록 행복점수 기준으로 손해가 확정된 일이지만, 대신 회복 탄력성을 연습하는 데 최고다.
대한민국과 이 나라에서 함께 사는 이들을 응원하는 입장에서 2023시즌은(지난 시즌에도 비슷했지만) 꽤 답답하다. 이기는 경기가 보이지 않는다. 사건·사고가 이어지고, 외교에서는 계속 퍼주고만 있고, 잼버리는 완패나 다름없었다. 도쿄전력 원전 오염수 방류에 대한 대처는 팬 대다수가 (고의)패배로 느끼는데 산수도 제대로 못한다고 되레 큰소리를 내며 승리를 주장한다. 심지어 감독은 승패에 대해 얘기하지 않고, 코치들만 나와서 “사실은 지지 않은 것”이라고 애먼 설명을 늘어놓는다. 더 심각한 건, 내일 경기는 물론 남은 세 시즌의 미래에 대해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을지 설명조차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여전히 전임 감독 탓만 하고 있다. 팬들은 벌써 화를 내는 것조차 지친다. 차라리 야구를 응원하는 게 낫다. 야구 응원의 최고 효용은 지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졌는데 지지 않았다고 우기는 것만큼이나 무용한 일은 없다.‘(2023. 8. 31 경향신문, 이용균 기자의 ‘차라리 야구를 응원하는 게 낫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