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뒤? 잊혔거나 쉬겠죠” 임윤찬이 그날 기다리는 이유
카드 발행 일시2024.08.09
에디터
김호정
임윤찬 비하인드
관심
‘임윤찬 비하인드’를 5회로 마무리합니다. 오늘은 그동안 아껴놨던 마지막 스토리를 전해드립니다. 임윤찬과 골드베르크 변주곡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2024년, 쇼팽의 연습곡, 무소륵스키 ‘전람회의 그림’으로 국내외 청중을 충격에 빠트렸던 임윤찬이 내년엔 새로운 도전에 나섭니다. 바로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연주를 시작하는 거지요.
마지막회는 임윤찬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연주하는 2025년의 모습과 스스로 예상하는 10년 후 모습을 그려봅니다. JTBC ‘임윤찬의 고전적 하루’에서 주고 받았지만, 방송되지 못했던 대화를 공개합니다.
임윤찬이 처음 공개하는 이야기 ⑤끝
JTBC 임윤찬의 고전적 하루를 촬영하고 있는 피아니스트 임윤찬. 김성룡 기자
“오케스트라는 어떤 곳에서 제의가 와도 감사할 뿐이에요. 그런데 내년의 독주회는 꼭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으로 하고 싶습니다.”
피아니스트 임윤찬(20)은 참 오랫동안 이 작품을 이야기해 왔습니다. 위의 발언은 2022년, 반 클라이번 국제 콩쿠르 우승 직후의 기자회견이었습니다. 어떤 오케스트라와 연주하고 싶은지, 또 어떤 공연장에서 연주해 보고 싶은지 질문이 나오자 저렇게 답했죠.
그때 임윤찬의 바로 옆에 있던 2, 3위 피아니스트들의 반응이 재미있었습니다. 그들은 ‘골드베르크’라는 곡명이 나오자마자 ‘헉’ ‘하아’ 하는 절묘한 탄식을 뱉었습니다. 3위를 한 드미트리 초니(31ㆍ우크라이나)는 “아주 야심 찬 젊은이”라고 말하더군요.
기록적인 콩쿠르 우승 이전부터 임윤찬은 ‘골드베르크 변주곡’에 대한 소망을 입에 달고 살다시피 했습니다. 언젠가는 꼭 연주해 보고 싶은 곡이라면서요. 첫 음반으로 녹음하고 싶다고도 여러 차례 말했습니다.
그 꿈이 드디어 실현됩니다. 임윤찬은 내년 4월 뉴욕 카네기홀에서 이 곡을 연주합니다. 또 2월 샌프란시스코, 4월 파리ㆍ빈ㆍ런던ㆍ워싱턴에서도 골드베르크 변주곡 연주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전곡 연주에 80여 분이 쏜살같이 지나가고, 주제에 대한 변주가 30개에 달하는 대곡입니다. 이 곡의 연주는 ‘야심 차다’는 말을 들을 만한 꿈이었죠.
지금까지 임윤찬의 독주회 프로그램도 도전적이었습니다. 리스트 초절기교 연습곡, 쇼팽의 에튀드 27곡, 무소륵스키 ‘전람회의 그림’ 등을 연주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야말로 피아니스트로서 자존심과 명예를 건 선택입니다. 피아니스트들의 경전이면서 꿈이고, 때로는 무덤이 되는 곡이기 때문입니다. 임윤찬은 도대체 어떤 점 때문에 ‘골드베르크’에 매혹됐던 걸까요? 그와 이 작품은 어떤 사이일까요? 질문을 해 봤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뭔가 잘 안 될 때 골드베르크 변주곡으로 해소하고는 했다고 들었어요.
“그랬던 시간이 있었죠.”
어떻게 이 음악을 처음 들었나요?
“제가 처음으로 산 음반 중 하나가 박스였는데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들어 있었어요.”
임윤찬의 ‘골드베르크 바라기’는 어린 시절, 이 작품에 대한 파격적 연주로 유명한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의 음반에서 시작됐다는 겁니다. 그 열정이 어떻게 흘러와 내년 무대에 오르게 되는 걸까요.
이 스토리는 조금 돌고 돕니다. 임윤찬과 골드베르크의 사이는 자꾸만 ‘멀어지면서’ 시작됐거든요.
“중학교 1학년에 손민수 선생님을 처음 만났어요. 학기 시작하자마자 제가 골드베르크를 너무 하고 싶다고 했죠. 선생님은 그러려면 평균율을 몇 개 해야겠다고 하셨어요.”
바흐의 평균율은 24곡씩 두 세트로 된 곡입니다.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바흐 음악의 집대성이라면 평균율은 뼈대나 골조와 같죠. 스승이 골드베르크 연주의 전 단계로 이 작품을 제시한 이유일 겁니다. 그렇게 해서 임윤찬이 골드베르크에 다다르는 길이 한 번 미뤄졌었네요.
“그 말씀을 듣고 학기 들어가자마자 평균율 중 7곡 정도를 공부했어요. 그 정도 해놓고 그럼 한번 시작해 보자고 선생님이 그러셔서 골드베르크를 치기 시작했죠.”
전곡을요?
“15번 변주까지 하고 멈췄어요.”
딱 절반이네요!
“제대로 치진 못했지만, 제가 그때 다른 곡을 공부할 일도 생기고 해서요.”
"제대로 마주할 때까지"
바흐는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참 ‘똑 떨어지게’ 작곡했습니다. 주제(아리아)가 끝난 후 30개 변주가 이어지는데요. 16번 변주에서 새로운 세계가 시작됩니다. 바흐는 16번에 서곡 형식을 사용해 ‘자, 여기부터 새로운 시작!’이라고 선언이라도 하는 듯합니다. 어렵사리 골드베르크를 치기 시작한 13세의 임윤찬은 정확하게 한 단락이 끝나는 곳(15번 변주)까지 익히고 잠시 또 멀어졌다는 거죠.
차준홍 기자
그렇다면 임윤찬과 골드베르크는 반 클라이번 콩쿠르 이후에 무대에서 만날 수 있지 않았을까요? 뉴욕과 런던 등의 명문 콘서트홀이 무대를 내어줄 때, 또 세계적 음반사가 녹음을 제의할 때 말이죠. 그럴 때 그토록 하고 싶었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연주하는 구상을 분명히 했을 거란 생각이 들어 질문해 봤습니다.
올해 카네기홀 데뷔에서도 연주할 수 있었겠네요.
“처음에는 고민을 많이 했어요. 카네기홀에 곡목을 제출해야 할 때였죠. 골드베르크 변주곡, 쇼팽 연습곡, 라흐마니노프 전주곡 전곡, 이렇게 셋 중에서 고민했죠. 그런데 아직은 골드베르크를 잘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처음에는 라흐마니노프로 제출했다가 쇼팽으로 바꿔서 연주했죠. 골드베르크는 제대로 마주하고 싶어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이렇게 이번에는 임윤찬 스스로의 결정으로 한 번 더 멀어졌습니다. 임윤찬은 결국 쇼팽 연습곡 전곡으로 올 2월 카네기홀에 데뷔해 '생명력으로서의 기교'라는 리뷰(뉴욕타임스)를 받았고, 음반을 발매해 빌보드 차트에서 1위에 올랐죠. 절반을 공부해 놓은 골드베르크 변주곡과는 나중을 기약해야 했습니다.
"추억이 깊게 남은 음악"
지난달 스위스 베르비에 음악제의 리사이틀 무대. 사진 Nicolas Brodard/베르비에 음악제
인터뷰 당시 골드베르크 연주를 9개월 정도 앞뒀던 임윤찬은 “드디어 마주하게 돼 되게 설렌다”고 하더군요. 겸손하고 자기 비판적인 그가 이제는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마주할’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는 이 작품에서 무엇을 봤을까요? 어떤 점 때문에 이토록 매혹당했던 걸까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봤습니다.
처음 들은 글렌 굴드의 연주가 충격적이었겠어요.
“처음 듣고 그랬죠. 어릴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런데, 한 사람의 인생을 그 변주곡들 안에 다 담아낸 것 같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인생이요?
“아리아(주제)에서 시작해 아리아로 끝나는 것도 그렇고, 그사이에 많은 굴곡이 있잖아요. 저에게 그 점이 너무 큰 매력으로 다가왔었고요. 그렇게 어렸을 때 그런 규모의 음악을 온몸으로 접하는 게 되게 충격적이었어요.”
리스트 초절기교 연습곡을 연주할 때는 그 작품이 리스트의 인생인 것 같다고 말했었죠. 이번에는 바흐의 인생을 보는 건가요, 아니면 좀 더 보편적인 의미의 인생일까요?
“리스트는 정말 어릴 때부터 그 곡을 디자인했고 (나이가 들어서도 계속 고쳤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게 됐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제 인생을 투영시키는 것 같아요.”
의외의 답이었습니다. 음악의 대가인 바흐의 인생이라거나, 수많은 사건과 감정이 들고 나는 보통 사람의 생이라는 답이 나올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임윤찬 본인의 인생이라고요?
“너무 어렸을 때부터 듣고 끌렸기도 했고, 그래서 그 추억이 너무 깊게 남아 있어요. 연주를 그런 식으로 하게 될 것 같아요.”
또 한 번 허를 찔린 기분이었습니다. 그렇죠, 임윤찬이 피아노로 풀어내는 이야기는 상당히 개인적이죠. 본인만의 환상과 상상, 그리고 강렬한 목소리가 들어 있습니다. 음악의 성서 혹은 경전쯤으로 여겼던 골드베르크 변주곡에서도 임윤찬은 자신의 이야기를 확실히 할 생각인가 봅니다.
'자장가 변주곡'이라는 오해
J.S.바흐가 한 귀족의 요청으로 곡을 썼다. 들으면 잠들고, 불면증을 치유할 수 있는 음악을 써달라는 요청이었다. 바흐는 이 곡을 쓰고 상당한 보수를 받았다. 연주는 요한 고틀리프 골드베르크라는 소년 연주자가 담당했다. 귀족이 고용한 건반 연주자였고, 바흐의 제자였다.
여기까지가 골드베르크 변주곡에 대해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다. 하지만 이 문제를 진지하게 연구한 사람들은 이 스토리를 거의 믿지 않는다. 우선 불면증에 시달렸던 귀족, 또 골드베르크의 이름은 이 작품의 그 어디에도 없다. 바흐는 ‘2단의 손건반을 가진 쳄발로를 위한 아리아와 여러 변주’라고만 악보 표지에 적었다. 또한 작품 출판(1742년) 당시 불과 15세였던 골드베르크가 연주하도록 바흐가 이 장대한 작품을 창작했다는 것도 이상하다. 무엇보다 들어보면 안다. 이 변화무쌍한 음악은 도무지 자장가가 될 수 없다.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자장가 설은 바흐가 세상을 떠나고 50여년 후에야 나왔다. 바흐의 첫 전기 작가인 요한 포르켈이 책에서 상세하게 이 주장을 펼쳤기 때문이다. 주장에 대한 검증은 더 뒤늦게 이뤄졌고, 이 음악의 제목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골드베르크 변주곡이다.
이 변주곡은 바흐의 거대하고 지적인 실험의 집합체와도 같다. 맨 앞과 맨 뒤에는 동일한 주제(아리아)가 연주된다. 32개의 베이스(저음) 음표로 된 주제다. 그 사이에는 30개의 변주가 자리하는데 15개씩 둘로 나뉜다. 30개의 변주는 3개씩 10개의 쌍을 이룬다. 3의 배수 번호의 변주곡은 돌림노래(캐논)다.
골드베르크 다음은?
JTBC 임윤찬의 고전적 하루를 촬영하고 있는 피아니스트 임윤찬. 김성룡 기자
조금 성급하게 그다음으로 가보려고 합니다. 골드베르크처럼 임윤찬의 마음에 박혀 있는 작품, 뭘까요? 궁금해진 김에 이런 질문을 해봤습니다.
10년 후에 자신의 모습이 어떨 것 같다고 생각해본 적 있나요?
“잊혀졌거나 몇 년 쉬고 있지 않을까요?”
또 예상하지 않았던 답이었습니다. 약간 멈칫했지만 정신을 차리고 이유를 물었습니다.
잊혀요? 왜요?
“제 목표 중 하나가 베토벤 소나타 전곡(32곡)을 하는 거여서, 이건 몇 년 안 쉬고는 못할 것 같아요. 베토벤 아니면 모차르트 소나타 전곡(18곡), 이렇게 둘 중 하나가 되지 않을까요? 그러기 위해서는 휴식을 가져야 할 것 같아요.”
이 완벽주의자의 열렬한 팬들이 집단으로 우울해지지 않도록, 이 답변은 ‘베토벤 또는 모차르트 소나타 전곡을 최선을 다해 완성하고 연주하고자 한다’는 정도로 순화해 이해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지난해 살짝 공개된 임윤찬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주제를 들어보겠습니다. 개인적이면서 굴곡이 가득할 30개 변주와 주제, 그리고 그 이후의 베토벤·모차르트 소나타 전곡 사이클까지 무한히 상상해 보면서 말입니다. 이 연주를 들으며 마치겠습니다. 지금까지 ‘임윤찬 비하인드’를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에디터
김호정
관심
중앙일보 기자
wisehj@joongang.co.kr
좋은 음악 듣고 좋은 콘텐트를 만듭니다. 클래식 음악을 담당합니다.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69355